성학집요(聖學輯要) - 제2편. 수 기(修己)
제2편. 수 기(修己)
신이 살피건대「대학」에 이르기를,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 모두 몸을 닦는 것[修身]을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 지말(枝末)이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같이 제왕의 학문에는 몸을 닦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사옵니다.
제1장. 수기 총론(修己總論)
신이 살피건대, 몸을 닦는 공부에는 지식을 넓히는 것도 있고, 행하는 것도 있사옵니다.
지식은 착한 것을 밝히는 것이요, 행하는 것은 몸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니,
이제 지식과 행하는 것을 합하여 말한 것을 취하여 첫머리에 드러내었습니다.
군자는 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을 닦을지니, 광대한 것을 이루고 정미한 것을 다하며,
높고 밝은 것을 지극히 하고 중용을 행하며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알고,
두터운 것을 돈독히 하여 예의를 높여야 한다. (중용)
주자는 말하기를, 존(尊)은 공경하여 받든다는 뜻이다.
덕성(德性)은 내가 하늘에서 받은 바른 이치이다. 도(道)는 말미암는다[由]는 뜻이다.
온(溫)은 심온(溫)의 온과 같은 것이니 (불[火]이 물건을 익히는 것을 심이라고 합니다.)
앞에 배운 것을 또 다시 때때로 익히는 것을 말한다.
돈(敦)은 두터운 것을 더하는 것을 말한다.
존덕성(尊德性)은 마음을 보존하여 도의 체(體)의 큰 데까지 극진히 하는 것이요,
도문학(道問學)은 지식을 극진히 하여 도의 체의 세밀한 데까지 다하는 것이다.
한 오라기의 사사로운 뜻으로써 스스로 가리지 않고, (광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한 오라기의 사사로운 욕심으로써 스스로 더럽히지 않으며, (고명(高明)을 지극히 하는 것입니다.)
그 이미 아는 바에 함영(涵泳)하고 (옛 것을 익히는 것입니다.)
그 이미 능한 바를 돈독히 하는 것 (돈후(敦厚)의 뜻입니다.) 은, 모두 마음을 보존하는 등속이다.
이치를 분석하면 호리(毫釐)의 차이도 있지 않게 하며,
(정미(精微)함을 다한 것입니다.) 일을 처리하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이 있지 않게 하며,
(도중용(道中庸)의 뜻입니다.) 이의(理義)는 날마다 그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지신(知新)입니다.) 절문(節文)은 날마다 그 삼가지 못한 것을 삼가는 것(숭례(崇禮)입니다)은,
다 지식을 이루는 등속이다. 대개 마음을 존함이 아니면 지식을 극진히 하지 못하며,
또 마음을 보존하면 지식을 극진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섯 구절은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연관되고, 처음과 끝이 서로 응한다.
(동양 허씨(東陽許氏)는 말하기를, "큰 것은 위의 5절을 말한 것이요, 작은 것은 아래의 5절을 말한 것이며,
처음은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門學)의 한 구절을말한 것이요, 끝은 아래의 4귀절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성현이 보여 준 '덕에 들어가는 방법'이 이보다 더 자세한 것이 없으니 배우는 이들은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글에서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면 또한 도에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는 말하기를, "약(約)은 요약의 뜻이요, 반(畔)은 배(背)치 (배(背)는 음이 패(佩)입니다.)된다는 뜻이다.
군자는 학문은 넓히고자 하기 때문에 글에 상고하지 않는 것이 없고, 도를 지킴은 요령을 취하려고 하므로,
움직일 때는 반드시 예로써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면재 황씨(勉齋黃氏)는 말하기를, "박(博)은 넓게 취하여 그 넓은 것을 지극하게 하는 것이요,
약(約)은 돌이켜 단속하여 그 요령을 지극히 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要約)하지 않으면 반드시 한만(汗漫)한 데 이를 것이니,
널리 배우고 또 능히 예를 지켜 규범[規矩]을 따르게되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몸을 닦는 공부는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와 역행(力行)의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는 그 실마리를 간략하게 드러내었으며, 자세한 것은 다음에 있습니다.
제2장. 입 지(立志)
신이 살피건대 배움에는 뜻을 세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는 것이니,
뜻이 서지 아니하고는 능히 공부를 이룬 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닦는[修己] 조목에 뜻을 세우는 것[立志]을 맨 앞에 놓았습니다.
◆ 입지에 대한 보편적인 말씀
공자가 말하기를, "도에 뜻을 두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는 말하기를, "뜻[志]이라는 것은 마음의 가는 바를 이르는 것이요,
도라는 것은 인륜(人倫)·일용(日用)의 사이에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이르는 것이니,
이것을 알고 마음이 반드시 가면 나아가는 바가 발라서 다른 길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뜻이라는 것은 덕에 나아가는 기초이다.
성현이 여기서 시작하여 멀어도 도달하지 아니하는 곳이 없으며, 굳어도 파고 들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
착하고 악한 두 갈래 길은 오직 도(道)와 이(利)일 뿐이기 때문에,
도에 뜻을 두면 곧 이의(理義)가 주재가 되어 물욕이 능이 바꾸지 못할 것이며,
이(利)에 뜻을 두면 물욕이 주재가 되어 이의가 능히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요(堯)와 걸(桀), 순(舜)과 척(蹠)이 서로 차이가 있게 된 점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 북계 진씨(北溪陳氏)는 말하기를, "도에 뜻을 둔다는 것은 이 마음이 완전히 도에 향하는 것이니
만약 하다가 말든지 중도에서 물러설 의사가 있다면 이는 뜻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맹자는 성품이 착하다[性善]고 말씀하시되, 말씀하실 때마다 반드시 요(堯) · 순(舜)을 일컬었다. (「맹자」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도라는 것은 말한다는 뜻이요,
성(性)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품수하여 태어나는 이치인데, 혼연히 지극히 착해서 일찌기 악한 것이 없다.
사람은 본래 요·순과 조금도 차이가 없으나 다만 보통 사람은 사사로운 욕심에 빠져서 착한 성품을 잃었고,
요·순은 사사로운 욕심에 가리우지 않아서 능히 그 성품을 확충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성(性)은 착하다고 말하되, 반드시 요·순을 일컬어서 실증하여,
인의(仁義)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며 배우면 성인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여, 노력을 하는 데에 게으르지 않게 하도록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대개 사람은 모름지기 성현과 같이 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야 할 것인데,
많은 세상 사람들이 성현은 높고 자신은 낮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아가기를 즐기지 않는다.
이는 대개 타고난 성품은 <성인도> 보통사람과 같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어찌 성현과 같이 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안연(顔淵)27)이 말하기를,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렇게 함이 있으면 역시 순과 같이 된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능히 그렇게 함이 있다면 모두 순과 같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분발하여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
일용(日用)의 사이에 한 오라기의 사사로운 욕심도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속(迅速)하게 흥기(興起)함이 있어야 비로소 자리가 잡혀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기름에 그림을 그리고 얼음에 조각을 하는 것과 같아서 진실로 힘을 얻을 곳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반드시 스스로 적실(的實)하고 평온한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이다.
한갓 주야로 생각함이 나의 하는 바로써 순(舜)의 하는 바에 비교해 보고, 매양 순만 같지 못하다고 걱정하여서는 안 된다.
마치 병든 사람이 올바르게 순서를 밟아 약을 먹어서 점차로 다스려 자기 기력이 충만하게 하고 그래서 보통 사람과 같이 된 뒤에는 그만두는 것과 같다.
어찌 한 알의 환약이나 한 첩의 가루약으로, 일조일석에 효험을 바라서, 성급하게 보통 사람과 같지 않은 것을 괴상히 여기겠는가." 하였습니다.
○ 또 배우는 이에게 가르쳐 말하기를, "글을 기억하지 못하거든 숙독(熟讀)을 하면 기억할 것이고, 뜻이 서지 않으면 곧 힘을 들일 곳이 없다.
지금 이익이나 국록만을 탐내면서 도의는 좋아하지 않고, 귀한 사람이 되기만 바라면서 좋은 사람이 되기는 바라지 않으니,
이는 모두 뜻이 서지 못한 병통이다. 모름지기 되풀이 생각하여 병통을 찾아보고,
용감히 분발하여 성현의말한 바 온갖 말들이 한 가지도 실제의 말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보아야만 비로소 뜻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공부를 쌓아 점차로 향상해 가면 크게 할 일이 있을 것이니, 제군은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입지의 절목(節目)에 대한 말씀
○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 백성을 위하여 도(道)를 세우며, 옛 성인을 위하여 끊어진 학통을 잇고,
오랜 세상[萬世]을 위하여 태평(太平)을 연다." 하였습니다. (횡거문집(橫渠文集))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천지는 낳고 낳는 것을 마음으로 삼으니,
성인이 천지에 참여해 화육(化育)을 도와서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성명(性命)을 바르게 하는 것은,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는 것이다.
의리를 밝히고 도의[綱常]를 붙들어 세우는 것은 백성을 위하여 도를 세우는 것이다.
끊어진 학통을 잇는다는 것은 도통(道統)을 이어 서술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요,
태평을 연다는 것은 만약 왕자가 일어나면 반드시 와서 법을 취하여 공리와 혜택을 만세에 끼치는 것이니,
배우는 자가 이것으로 뜻을 세우면 책임한 바가 지극히 크고 마음가짐이 지극히 공평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임금의 도의 큰 것은 옛 바른 학문을 상고하여 선악의 귀추를 밝히고,
충사(忠邪)를 분별하여서 밝게 도의 바른 곳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러므로 임금의 뜻이 먼저 정해지는 데 있는 것이니, 임금의 뜻만 먼저 정해지면 천하의 다스림은 이루어진다.
이른바 뜻을 정한다는 것은 마음을 전일하게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여 착한 것을 가려서 굳게 지키는 것이다.
대저 의리를 먼저 다하지 않으면 많이 들어도 마음이 현혹하기 쉽고, 뜻을 먼저 정하지 않으면 착한 것을 지켜도 이탈하기 쉽다.
오직 성현의 교훈을 반드시 따라야 할 것으로 여기고, 선왕(先王)의 다스림을 반드시 본받아야 될 것으로 여겨
후세의 착잡한 정치에 견제되지 않고 세속의 안일한 의논에 현혹되지 않으며,
스스로 알기를 지극히 밝게 하고 도를 믿기를 지극히 돈독하게 하며,
어진 이에게 맡기되 의심하지 말고 사(邪)를 버리되 의심하지 말아서,
반드시 세상을, 삼대(三代)의 융성한 때와 같이 만들고야 말겠다고 기약하는데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임금의 뜻을 세우는[立志] 것을 말한 것이지만 또한 학자에게도 절실한 것입니다.)
◆ 다음은 입지의 공효(功效)에 대한 말씀
○ 공자가 말하기를, "인(仁)이 멀리 있는 것이랴. 내가 어질려고 하면 이에 인(仁)이 이르게 된다." 하였습니다. (「논어」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인(仁)이라는 것은 마음의 덕으로서,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놓고 구하지 않기 때문에 멀다고 여기는 이가 있지마는, 돌이켜 구하면 곧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어찌 먼 데 있겠느냐."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인(仁)을 행하는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이것을 행하려고 하면 곧 이르게 된다. 어찌 먼 데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악한 짓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구(苟)는 성실의 뜻이다. 그 마음이 진실로 인(仁)에 있으면 반드시 악한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양기(陽氣)가 발하는 곳에 쇠나 돌도 뚫을 수가 있고, 정신이 한 군데로 집중되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주자(朱子)의 말)
주자는 말하기를, "세속의 학문이 성현과 같지 않은 까닭은 알기 어렵지 않다. 성현은 다만 진실로 할 뿐이다.
정심(正心)을 말하면 바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의(誠意)를 말하면 곧 뜻을 성실하게 하며,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도 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의 학자들은 정심을 말하면 다만 정심을 입으로만 떠들고, 한 번 성의를 말하면 또 성의를 입으로만 떠들며,
한 번 수신을 말하면 성현들이 허다하게 말한 것을 가지고 입으로만 떠들 뿐이다. 혹은 옛 언어나 주워 모으고,
또 시속글이나 주워 엮는데, 이 같이 학문을 해가지고서야 자신에 대하여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여기 대하여 모름지기 정신을 기울여 이해하여야 한다.
지금 사람들은 진실로 성현의 학문을 듣기를 즐거워하는 이가 있으나, 끝내 세속의 비루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뜻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우는 이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뜻을 세우는 것이며, 배우면 문득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세속에는 조화(造化)의 힘을 뺏는 세 가지 일이 있다.
나라를 위하여 하늘에 기도해서 명을 길게 하는 것과, 형체를 길러 길이 사는 데 이르는 것과, 배워서 성인에 이르게 되는 것 등이다.
이 세 가지 일은, 분명히 사람의 힘으로 조화를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인데 사람이 스스로 힘쓰지 않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입지의 반대에 대한 말씀
○ 맹자는 말하기를, "스스로 해하는[自暴]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스스로 버리는[自棄] 자와는 더불어 행할 수 없다.
예의를 그르다고 말하는 것을 스스로 해한다 하고,
나의 몸은 능히 인(仁)에 있거나 의(義)를 행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버린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맹자」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포(暴)라는 것은 해(害)한다는 뜻이요, 비(非)라는 것은 비방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그 몸을 해하는 이는 예의의 아름다운 것을 알지 못하고 비방을 하니, 비록 더불어 말하더라도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그 몸을 버리는 이는 그래도 인의(仁義)가 아름다운 줄을 알고는 있으나, 게으른 데 빠져서 스스로 행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와 더불어 일을 하여도 반드시 힘을 다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선(善)으로써 스스로 다스리면 <착한 데로> 옮기지 못할 이가 없다.
비록 아주 어리석은 이라도 모두 점차로 연마하여 나아갈 수 있다.
오직 스스로 해하는 이는 거절하여 믿지 않고, 스스로 버리는 이는 거절하여 행하지 않으니, 비록 성인과 같이 있더라도 능히 감화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너무 어리석은 자는 옮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1등(等)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2등을 하겠다고 하지 말라.
만일 이러한 말을 한다면 이것이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배움을 말하면 문득 도를 뜻으로 삼고, 사람을 말하면 문득 성인을 뜻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일생을 게을리 하는 것은 스스로 포기하고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명도(明道)가 신종(神宗)에게 다스리는 도리를 적극 아뢰니,
신종이 이르기를, "이것은 요·순의 일인데, 짐(朕)이 어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였더니,
명도는 슬픈 빛으로 아뢰기를, "전하의 이런 말씀은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 아니옵니다." 하였습니다.
인(仁)은 사람의 편한 집이요, 의(義)는 사람의 바른 길인데,
편한 집을 비워 두고 거처하지 아니하며, 바른 길을 버리고 행하지 아니하니 가련(可憐)하도다.
주자는 말하기를, "인이라는 것은 본마음 전체의 덕으로서, 천리(天理) 자연의 안정됨은 있으나, 사람 욕심의 빠지는 위태로움은 없으니,
사람은 항상 그 가운데 있어야 하고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편한 집이라' 한 것이다.
의(義)라는 것은 마땅한 것이니 천리의 마땅히 행할 바이요, 사람의 욕심처럼 간사하고 잘못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를> '바른 길이라' 한 것이다. 광(曠)은 비었다[空]는 뜻이고 유(由)는 행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도가 본래 고유한 것인데, 사람이 스스로 끊으니 이것이 가련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성현의 깊은 훈계이니 배우는 이는 마땅히 맹성(猛省)을 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뜻이란 것은 기(氣)의 장수[帥]이니, 뜻이 전일하면 기가 동하지 아니함이 없는데,
배우는 이가 종신토록 글을 읽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뜻이 서지 않은 까닭입니다.
♠ 입지가 이루어지지 않는 병적 원인 세가지
뜻이 서지 않는 데는 그 병통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불신(不信)이요, 둘째는 부지(不智)이며, 세째는 불용(不勇)입니다.
1. 불신(不信)
불신(不信)이라는 것은, 성현이 후학(後學)에게 밝게 알려 명백하고도 간절하게 가르쳐 주었으니,
만일 그 말에 따라 순서대로 나아가면 성인도 되고, 현인도 되는 것은 이치의 당연한 것으로서 그런 일을 하고도 그런 공이 없는 이는 있지 않습니다.
저 불신(不信)하는 이는 성현의 말이 사람을 권유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라 생각하고, 다만 그 글만 음미[玩味]할 뿐, 몸으로 실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입으로 떠드는 것은, 성현의 글이지마는 행하는 것은 세속의 행위입니다.
2. 부지(不智)
부지(不智)라는 것은, 인생의 기품이 만 가지나 되어 같지 않으나 힘써 알고 힘써 행하면 성공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뛰놀며 장사지내는 놀이[踊躍築埋]를 한 것은 맹자의 유희였지마는 마침내 아성(亞聖)이 되었고, 저물게 돌아오고 사냥하는 것을 즐긴 것
[暮歸喜獵]은 정자의 버릇이었지마는 마침내 큰 현인이 되었으니, 어찌 반드시 나면서부터 알아야만 비로소 덕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저 부지(不智)한 이는 스스로 자기의 자질이 불미(不美)하게 태어났다고 하여 퇴보(退步)하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아니하여,
나아가면 성인도 되고 현인도 되며, 퇴보하면 어리석은 자도 되고 어질지 못한 자도 되는 것은 모두 자기의 소위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이러므로 읽는 것은 성현의 글이지마는 지키는 것은 기품에 구애된 것뿐입니다.
3. 불용(不勇)
불용(不勇)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성현은 우리를 속이지 아니한다는 것과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다소 알면서도,
다만 태만하게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분발(奮發)하고 진작(振作)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어제 한 일을 오늘 개혁하기를 어렵게 여기고,
오늘 좋아하는 일을 내일 개조하기를 꺼려합니다.
이같이 고식적(姑息的)으로 우물쭈물하며 한 치를 나아가면 한 자씩 후퇴하는 것은 불용(不勇)의 소치입니다.
이러므로 읽는 것은 성현의 글이지마는 안주 하는 것은 케케묵은 관습입니다.
사람들에게 이 세 가지 병통이 있기 때문에 군자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육적(六籍)28)은 빈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니, 아! 몹시 서글픈 일입니다.
진실로 성현의 말을 깊이 믿어 불미(不美)한 자질을 바루되 실로 백·천배의 공부를 하여 끝까지 퇴전(退轉)하는 때가 없게 되면,
큰 길이 앞에 있어 직접 성인의 경지를 가르쳐 줄 것이니, 어찌 도달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대개 사람은 작은 몸으로 세상에 참여하여 병립(立)하고 있으며,
학문의 공업은 위육(位育)을 능사(能事)로 삼기 때문에 필부(匹夫: 은나라 신하인 이윤(伊尹) 같은 이를 말함.)로도 그 임금을 얻게 되면,
오히려 한 백성에까지라도 혜택을 입히지 못할까 걱정하는데,
하물며 임금은 군사(君師)의 지위를 겸하여 교양(敎養)의 책임을 지고 세상의 표준이 되었으니, 그 책임이 얼마나 중하겠사옵니까?
한 마음의 차질이 정사를 그르치고 한 마디 말의 실수가 일을 패하게 하옵니다.
도에 뜻을 두고 도를 따라 행하여 이로 말미암아 한 세상을 당(唐)·우(虞)의 세상으로 되게 하는 것도 자기에게 있는 것이요,
욕심에 뜻을 두고 물욕에 따라 행하여 이로 말미암아 한 세상을 말세(末世)가 되게 하는 것도 자신에 말미암은 것이니,
임금은 뜻의 향하는 바를 더욱 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설문청(薛文淸)은 말하기를, "내마음이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하늘이 마침내 나의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학문이 나아가지 않는 것은 대개 우물쭈물하는데 말미암은 것이다." 하였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옵소서.
< 주 >
27) 공자의 수제자. 이름은 회(回), 연(淵)은 그의 자(字)임.
노(魯)나라 사람으로 호학(好學)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고 하며 학덕이 가장 높아 스승의 많은 총애를 받았다.
28) 시(詩)·서(書)·역(易)·춘추(春秋)·예기(禮記)·악기(樂記)를 말한다.
제3장. 수 렴(收斂)
신이 살피건대 경(敬)이라는 것은 성학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그러므로 주자는 말하기를, "경을 가지는 것은 궁리(窮理)하는 근본이니, 아직 깨닫지 못한 이는 경이 아니면 알 수 없다," 하였고,
정자는 말하기를, "도에 들어가는 데는 경만한 것이 없으니, 치지(致知)를 하면서 경에 있지 않은 이는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경이 학문의 시작이 됨을 말한 것입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이미 깨달은 이는 경이 아니면 지킬 수 없다." 하였고,
정자는 말하기를, "경과 의(義)가 이루어지면 덕이 외롭지 아니한데 성인까지도 또한 이러하다." 하였으니,
이것은 경이 배움의 끝이 됨을 말한 것입니다.
이제, 경의 공부에서 학문의 시작이 되는 것을 취하여 궁리장(窮理章) 앞에 놓고 이것을 수렴(收斂)이라 제목하여 「소학」의 공부에 해당시키옵니다.
◆ 용지(容止)의 수렴에 대한 말씀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무겁지[重] 아니하면 위엄이 없으니 배워도 견고[固]하지 못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는 말하기를, "중(重)은 중후하다는 뜻이요, 위(威)는 위엄의 뜻이고, 고(固)는 견고하다는 뜻이다. 외부가 가벼우면 반드시 내부가 견고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도 없고, 배워도 역시 견고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장자는 말하기를, "의리의 학문은 모름지기 깊이 생각을 해야 비로소 나아감이 있을 것이요, 얕고 경망해서는 얻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군자의 용모는 여유있고 우아[舒遲]하되 존경하는 사람을 보면 조심하고[齊] (재齋입니다) 삼가야 한다. (「예기」하동)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서지(舒遲)는 여유 있고 우아한 모양이요,
제(齊)는 기기제율(夔夔齊慄)29)의 제(齊)자와 같고, 속()은 삼가고 방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 구용(九容)
발 모양은 무겁[重]고, 손 모양은 공손[恭]하며 눈 모양은 단정[端]하고, 입모양은 정지[止]하며, 말소리는 조용[靜]하고,
머리 모양은 곧으며[直] 기운 모양은 엄숙[肅]하고, 선 자세는 후덕[德]하며, 얼굴 모양은 씩씩하여야 한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중(重)은 가볍게 옮기지 않는다는 것이요, 공(恭)은 경만하지 않는 것이요,
단(端)은 흘겨보지 않는 것이요, 지(止)는 망동하지 않는 것이요, 정(靜)은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는 것이요,
직(直)은 넘보지 않는 것이요, 숙(肅)은 숨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요,
덕(德)은 중립하여 의지하지 않아서 엄연하게 덕이 있는 기상이요, 장(莊)은 긍지가 있는 모양이다." 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람이 한가하게 있을 때에 몸가짐은 게으르더라도 마음이 태만하지만 않으면 괜찮습니까." 하니,
정자는 대답하기를, "어찌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마음이 태만하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옛날에 여여숙(呂與叔)30)이 6월에 구지(氏)31)에 찾아왔었는데 혼자 있을 때, 내가 가만히 보니 반드시 엄연히 꿇어앉아 있었으니 돈독하다고 할 것이다.
학자는 모름지기 공경하여야 하지마는 구속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구속된다면 오래 가기가 어렵다." 하였습니다.
○ 요진경(寥晋卿)이, "무슨 책을 읽어야 하겠습니까?" 하고 청하니, 주
자는 대답하기를, "공의 마음이 흩어진 지 이미 오래이니 먼저 정신을 가다듬어,
옥조(玉藻)32)의 구용(九容)을 자세히 체인(體認)하여 뜻이 선 뒤에 문득 글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경(敬)을 말하는 이는 다만 이 마음만 간직하면 자연히 이치에 맞을 것이라 하고, 용모와 사기(辭氣)는 전혀 공부를 하지 않으니,
설사 참으로 이렇게 해서 마음을 간직하더라도 또한 석노(釋老)33)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구나 마음과 생각이 황홀해서 참으로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이겠는가?" 하였습니다.
○ 절효(節孝) 서공(徐公)이 처음에 안정호선생(安定胡先生)을 따라 배우더니,
스스로 말하기를, "처음 선생을 뵈올 적에 머리 모양이 조금 기울었는데 안정(安定)이 갑자기 언성을 높여서 말하기를,
'머리 모양을 곧게 하라.'고 하거늘 내가 스스로 생각하되, 다만 머리 모양만 곧게 할 것이 아니라,
마음도 역시 곧아야 한다 하고 이로부터 감히 사심(邪心)을 갖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이선생(李先生 : 이연평李延平선생으로 주자의 스승임)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어도
신채(神彩: 뛰어난 용모)가 맑고 밝아 조금도 게으른 기세가 없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종일토록 빠른 말과 급한 기색이 없다.' 하더니,
그 분은 진실로 이러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가까운 데를 가면 반드시 천천히 걷고 먼 데를 가면 반드시 급하게 걷지마는,
선생은 가까운 데를 가도 그러하였고 먼 데를 가도 역시 그러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을 불러서 오지 않으면 반드시 소리를 지르나, 선생은 불러서 오지 않더라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또 벽을 향하여 앉을 적에 글자가 있으면 머리를 들고 한번 보는 것이 보통인데,
선생은 그렇지 않아서 앉았을 때에는 진실로 보지 않지만, 만일 보라면 반드시 일어나 벽 아래에 나아가서 보았으니,
그 사물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대개 이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연평 이선생(延平李先生)은 본래 함양(涵養)한 것이 순수하게 익어서 그렇게 된 것이나, 처음 배우는 이도 마땅히 이것을 법으로 삼아야 합니다.)
◆ 다음은 언어(言語)의 수렴에 대한 말씀
○ 시에 , "너의 말하는 것을 삼가고 너의 위의를 공경히 하여, 유(柔)하고 가(嘉)하게 하라.
흰 옥[白圭]의 티[]는 갈면 되지마는 이 말의 티는 어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생각 없이 경솔히 말하지 말고 구차하게 이렇다고 이르지 말라.
나의 혀를 잡아 줄 이가 없으니 함부로 입 밖에 말을 내지 말라." 하였습니다. (대아(大雅) 억(抑)의 편)
주자는 말하기를, "유(柔)는 편안한 것이요, 가(嘉)는 착한 것이요, 점()은 이지러진 것이다.
이(易)는 가벼운 것이고, 문()은 잡는 것이요, 서(逝)는 가는 것이니, 마땅히 말을 삼가라는 것이다.
대개 구슬이 이지러진 것은 갈아서 반반하게 할 수 있지마는, 말은 한 번 실수하면 구제할 수가 없고, 나를 위하여 그 혀를 잡아 줄 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나자신에게 연유하여, 실수하기가 쉽기 때문에 항상 잡고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그 훈계가 깊고 간절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왕의 말이 사(絲) 같다면 그 나아가는 것은 윤(綸)과 같고,
왕의 말이 윤과 같다면 그 나아가는 것은 발( : 음은 불(弗))과 같다." 하였습니다. (예기(禮記))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윤(綸)은 인끈[綬]이요, 불()은 관(棺)을 매는 큰 줄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이것은 왕의 말씀은 비록 적은 것이라도 그 이해(利害)의 공효는 매우 큰 것이오니, 삼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옵니다.
"군자는 방에 앉아서 말을 하여도 착하면 천 리 밖에서도 응하거늘, 하물며 가까운 데 있어서랴.
방에 앉아서 말을 하여도 착하지 아니하면 곧 천리밖에서도 어기거늘, 하물며 가까운 데 있어서랴.
말은 몸에서 나와 백성에게 미치고, 행동은 가까운 데서 나와 먼 곳에 나타나는 것이라,
말과 행동은 군자의 추기(樞機)이니, 추기가 발하는 것이 영욕(榮辱)을 주재한다.
말과 행동은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것인데, 어찌 삼가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역계사(易繫辭) ○ 역시 공자의 말임.)
절재 채씨(節齋蔡氏)는 말하기를, "말이라는 것은 마음의 소리요, 행동이라는 것은 마음의 흔적이니, 말과 행동은 바로 감응하는 추기이다,
착한 것은 이치이고 착하지 아니한 것은 이치에 어그러진 것이다." 하였습니다.
(군자의 말과 행동이 착하면 화한 기운이 응하고, 착하지 아니하면 어긋난 기운이 응한다.
화(和)한 것이 지극하면 천지가 편안하고 만물이 생육하며, 어긋난 것이 지극하면 천지가 막히고 어진 이가 숨기 때문에 "천지를 움직인다."한 것입니다.)
◆ 다음은 마음[心]의 수렴에 대한 말씀
○ 오만[敖]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고 욕심을 따라서는 안 되며, 뜻은 만족해서는 안 되고 즐거움은 지극해서는 안 된다. (예기)
응씨(應氏)는 말하기를, "공경의 반대가 오(敖)요, 정(情)이 움직이는 것은 욕심이다. 뜻은 만족하면 넘치고 즐거움이 지극하면 슬픔이 온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뜻이 가득 찬다[志滿]는 것은 적게 얻은 것을 만족하게 여기어 치연(侈然)히 스스로 큰 체하는 것입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닭이나 개를 놓친 것은 구(求)할 줄 아는데, 마음을 놓치고는[放心] 구할 줄 모른다.
학문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놓친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맹자)
정자는 말하기를, "마음은 지극히 무겁고 개와 닭은 지극히 가벼운 것인데, 개와 닭을 놓친 것은 구할 줄 알면서 마음을 놓친 것은 구할 줄을 모른다.
어찌 지극히 가벼운 것은 사랑하고 그 지극히 무거운 것을 잊어 버리겠는가. 이것은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럴 뿐이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학문하는 일은 진실로 한 실마리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놓은 마음을 구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대개 능히 이같이 한다면 지기(志氣)가 환하게 밝아지고 의리가 환하게 드러나서 위에 이를 수가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아니하면 어두워지고 방탕해서 비록 배움에 종사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밝게 트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는 말하기를, '성현의 천만 가지 말은 다만 사람이 이미 놓은 마음을 거두어 몸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것이니,
스스로 찾아 향상하여 가서 하학(下學)하여 위에 이르러야 한다' 하니 이것은 맹자가 절실한 말을 개시(開示)한 것이며,
정자가 또 발명하여 그 뜻을 간곡히 한 것이니 배우는 이는 마땅히 마음에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맹자가 학문의 도는, 단연코 '놓은 마음을 구하는 데 있다.'고 하였으니,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먼저 그 놓은 마음을 수습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이 마음을 풀어 놓으면 학문을 넓히는 데도 등한하고 질문하는데도 등한할 것이니, 어떻게 밝게 분변하며 돈독히 행할 수 있겠는가.
대개 몸은 집과 같고 마음은 집주인과 같으니, 집주인이 있어야 능히 마당에 물을 뿌리고 쓸며 집안 일을 정돈할 것인데,
만약 주인이 없다면 이 집은 한 황폐된 집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이른바 마음을 놓친다는 것은 마음이 딴 곳으로 도망쳐 가는 것이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문득 보이지 않는 것이다.
또 깨달으면 문득 눈앞에 있기 때문에 이는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끌어당기면 문득 보이는 것이다.
만일 마음을 수습하여 의리의 안정한 곳에 두고, 요란한 생각이 없이 오래 가면 스스로 물욕은 적어지고 의리는 두터워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거경이 궁리의 근본이 된다는 말씀
○ 함양(涵養)은 모름지기 경(敬) 공부를 하여야 할 것이며, 학문을 진취시키는 것은 곧 치지(致知) 하는 데 있다. (
정씨 유서(程氏遺書) ○ 이천(伊川) 선생의 말.)
정자는 말하기를, "근본을 먼저 배양한 뒤에야 방향을 정립할 수 있다.
그 방향이 이미 바르면, 이루는 바의 얕고 깊은 것은 힘써 행하거나 힘써 행하지 않는 데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마음의 덕을 길러서, 근본을 깊고 두텁게 한 뒤라야 방향을 세워도 어긋나지 않으며,
또 쉬지 않고 힘써야 능히 깊이 이를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공경히 이 마음을 지키되, 절박하게 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깊고 두텁게 배양하여 그 속에 깊이 잠긴 뒤라야 스스로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절박하게 구하면 단지 사심일 뿐이어서, 마침내 도에는 이르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함양(涵養)공부를 아마 옛날 사람은 바로 「소학」중에서 함양하여 성취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대학」의 도는 다만 격물(格物)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지금 사람은 앞서 이런 공부는 하지 않고 「대학」의 격물을 먼저하는 것만 보고는, 다만 생각이나 지식만으로 구하려 하여,
다시 마음을 잡아 보존하는[操存] 데는 힘쓰지 않으니, 비록 궁구하여 충분히 얻었다 하더라도 역시 실지 의거할 곳이 없는 것이다.
대개 경(敬)자는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며, 격물 치지(格物致知)는 그 속에 절차로서 나아가는 곳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지금 사람은 모두 근본적으로 이해하기를 즐겨 하지 않는다.
가령 경(敬)자를 다만 입으로 떠들 줄만 알며, 실행에 옮길 줄을 모른다. 근본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기타 사소한 공부는 모일 곳이 없게 되는 것이다.
명도(明道)와 연평(延平)이 다 사람을 '정좌(靜坐)하라.'고 가르친 것을 보더라도 모름지기 정좌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마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허령(虛靈)하며, 신묘한 것을 측량할 수 없어, 항상 한 몸의 주인이 되며,
만 가지 일의 벼리[綱]를 관장하기 때문에 잠시라도 보존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 번 자각하지 못하고 달려 나가 물욕을 몸 밖에서 따른다면, 한 몸의 주재가 없어지고 만 가지 일이 벼리가 없어져서,
비록 쳐다보고 되돌아보는 사이에도 이미 그 몸의 있는 바를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데
하물며 성인의 말씀을 반복하고 사물을 참고하여 의리의 마땅한 귀결을 구할 수가 있겠는가.
진실로 능히 공경하고 조심해서 항상 이 마음을 보존하여, 종일토록 물욕에 빠지는 바가 되지 않게 한다면,
곧 이것으로 독서하고 이것으로 이치를 관찰함에, 가는 데마다 통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이것으로 사물에 응하고 접하면 어떤 일이나 마땅하게 대처되지 아니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공경에 거하고 뜻을 바루는 것이 글을 읽는 근본이 되는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 설씨(薛氏)는 말하기를, "고요한 가운데 무한한 묘리(妙理)가 모두 나타난다." 하였습니다.
○ 신이 살피건대, 남당진백(南塘陳栢)이 지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은 배우는 이로서 공부하는 데 매우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아래에 기록하오니, 수렴하는 데 가장 유력할 것입니다.
잠(箴)에 말하기를, "닭이 울면 깨어 생각이 점점 흩어지거든 그 사이에 맑게 정돈하여, 혹은 옛 허물을 반성하고 혹
은 새로 얻은 것을 추출하여 차제(次第)와 조리(條理)를 요연하게 묵묵히 깨달아라. (위는 숙오(夙寤)를 말한 것입니다.)
근본이 이미 섰으면,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며 의관하고, 단정히 앉아서 형체를 거두어, 이
마음을 이끌어 들여 밝기가 돋는 해와 같게 하여 엄숙하고 정제(整齊)하며 비어 밝고[虛明] 고요하여 하나가 되게[靜-] 하라.
(이상은 신흥(晨興)을 말한 것입니다.)
이에 책을 펴서 성현을 대하면, 공자가 앉아 있고 안(顔)·증(曾)이 앞뒤에 있으니,
성사(聖師)의 말씀을 친절히 공경스럽게 들으며 제자들의 묻고 변론한 것을 반복하여 참고하라. (위는 독서를 말한 것입니다.)
일이 이르면 이에 응하여 사물에 증험하게 되니 밝은 명(命)이 빛남을 항상 눈여겨 그것을 응시하라.
일에 응함이 이미 그치면 나는 예전과 같이 하여 마음을 맑게 하여 정신을 모우고 생각을 쉬라. (이상은 일에 응함을 말한 것입니다.)
동정(動靜)이 쉬지 않고 돌매 오직 마음을 보되, 정하면 보존하고 동하면 살펴서 두 갈래나 세 갈래가 되지 말게 할 것이며,
글을 읽은 여가에는 가끔 푹 쉬어서 정신을 누그럽게 하고 정성(情性)을 휴양하라. (이상은 일건(日乾)을 말한 것입니다.)
날이 저물면 사람이 게을러져서 혼미해지기 쉬우니, 단정히 재계하고 정제하며 정신을 밝게 진작(振作)하라.
밤이 으슥하면 자되, 손은 모으고 발을 거두고서 생각을 하지 말고 심신(心神)이 돌아가 잠들라. (이상은 석척(夕)을 말한 것입니다.)
밤의 기운으로 기르매 정(貞)하면 근본[元]으로 회복될 것이니 생각을 여기에 두어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라." 하였습니다.
(이상은 숙야(夙夜)를 겸해서 말한 것입니다.)
신이 살피건대 놓친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학문의 기초입니다.
대개 옛 사람은 스스로 밥 먹고 말할 수 있을 때부터 바로 가르쳐서 행동마다 잘못이 없게 하고,
생각마다 지나친 것이 없게 하여 그 양심을 기르고 그 덕성(德性)을 높이는 것이, 어느 때 어느 일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격물 치지(格物致知) 공부는 여기에 의거하여 머물 데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젊었을 때부터 이런 공부는 않고 지름길로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는 것만 하려 하기 때문에 마음이 혼란하여지고 행동이 규범에 어긋나서,
그 공부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여 결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현(先賢)들이 사람에게 정좌(靜坐)하는 것을 가르치고, 또 구용(九容)으로 몸가짐을 하게 하였던 것이니
이는 배우는 이로서 최초로 힘쓰는 곳입니다. 그러나 정좌하는 것은 역시 일이 없을 때를 가리킨 것입니다.
만일 사물에 응하고 접할 때라면 정좌하는 것에 고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의 한 몸에는 만 가지 일이 쌓여 있으니, 만일 일 없을 때를 기다려 정좌한 뒤에 배운다면 아마 그럴 여가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동하고 정하는 것을 막론하고 이 마음을 잊지 아니하고 마음 지키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허로재(許魯齋)가 말한 바와 같이, 비록 천만 사람 가운데 있더라도 항상 자기자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일이 없을 때에는 비어 고요하게 본체[體]를 기를 수 있고, 일이 있을 때에는 밝게 살펴서 발용(發用)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성학(聖學)의 근본이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현의 교훈은 밝아서 속이지 아니하는 것이오니, 유념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 주 >
29) 마음을 조심스럽게 갖는 것을 뜻함. [祇載見 夔夔齊慄] 《書, 大禹謨》
30) 송(宋)나라 사람. 이름은 대림(大臨) 여숙(與叔)은 그의 자임.
처음에는 장재(張載)의 제자였으나 장재가 죽은 뒤 다시 정자(程子)에게 사사하여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의 한분으로 일컬어졌다.
31) 산(山)이름. 중국 하남성(河南省) 언사현(偃師縣) 남쪽에 있다.
32) 예기(禮記)의 편명(篇名).
33) 석가(釋迦)와 노자(老子)를 가리킴.
제4장. 궁 리(窮理)
신이 살피건대, 수렴(收斂)한 뒤에는 궁리로써 치지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궁리장(窮理章)을 그 다음에 두었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대개 한 가지 물(物)에는 한 가지 이치가 있는데, 모름지기 그 이치를 궁리하여 극진히 하여야 한다.
궁리하는 데도 많은 실마리가 있는데, 혹시 책을 읽어서 의리를 해명하기도 하고, 옛날이나 지금의 인물을 논하여 그 시비를 분별하기도 하며,
사물에 응하고 접하여 그 당연한가 아니한가를 처리하는 것이 모두 궁리이다." 하였습니다.
궁리하는 공부는 대략 이러하온데 그 자세한 것은 다름과 같습니다.
◆ 궁리의 용공(用功) 방법에 대한 말씀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하게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깝게 생각하면 인(仁)이 그 가운데에 있다." 하였습니다. (「논어」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이 네 가지는 다 학문(學問)·사변(思辨)의 일일 따름이요, 힘써 행하여 인(仁)을 하는데는 미급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종사하게 되면 마음이 밖으로 흩어지지 않아서 있는 바가 스스로 익숙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仁)이 그 가운데 있다고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가깝게 생각한다[近思]는 것은 유(類)로써 미루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소씨(蘇氏)는 말하기를, "널리 배우되 뜻을 돈독하게 하지 아니하면 크기만 하고 이룸이 없을 것이며,
엉성하게 묻고 멀리 생각하면 수고만 하고 공효가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마음에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어두워서 얻는 것이 없고, 그 일을 익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위태로와서 편안하지 못하다.
대개 학(學)자는 행(行)자의 뜻을 겸하였으니, 가령 의리를 강구하여 밝히는 것은, 학문이지만 그 하는 바를 본받으면, 곧 행하는 뜻이 있다." 하였습니다.
○ 주자가 정윤부(程允夫)에게 답하는 글에서 말하기를, "매양 오제(吾弟)와 더불어 강론하면 오제의 명민한 것을 알게 된다.
문자를 보는데 힘을 허비하지 아니하여도 도리를 얻는 데 용이하고 분명하지마는, 다만 다소 깊이 음미하고 실천하는 공부를 저버리기 때문에
그 도리가 비록 분명한 것 같으나, 문득 자신의 몸과 마음과는 관계가 없게 된다.
그래서 좋은 뜻이 오래가지 못하고 조금 지나면 바로 쉬게 되니, 도리어 느리고 둔한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여
나아가 얻어서 뜻을 오래 간직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것은 근본상의 큰 병통이며 한 마디 말, 한 가지 뜻의 과실만은 아니다.
먼저 고사(高沙)에 있을 적에 오제(吾弟)가 "이와 같은 강론이 도무지 돌아가 머물 데가 없다'고 하기에 일찌기 받들어 답하기를,
'강론을 마치고 바로 실천에 옮기면, 곧 돌아가 머무를 수 있다'고 하였었는데, 이 말이 의미가 있는 듯하기에 다시 고하니 생각해 보게." 하였습니다.
착한 데 밝지 아니하면 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한다. (「중용」○ 역시 공자의 말)
주자는 말하기를, "착한 데 밝지 아니하다는 것은 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지 아니하여 진실로 착한 것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유씨(遊氏)는 말하기를, "그 뜻을 성실하게 하려면 먼저 그 지식을 극진히 하여야 할 것이니,
착한 데 밝지 아니하면 그 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설은 경(經)의 글에는 상세하지 아니합니다.
선현(先賢)들이 많이 밝혀 내었으나, 정자·이씨(李氏)·주자(朱子) 세 선생의 설이 가장 명백하고 적절하기 때문에 삼가 그 대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옵니다.
어떤 사람이, "학문에 뜻은 있으나 지식이 가리어 굳어졌거나 역량이 이르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하니,
정자는 대답하기를, "다만 이 치지(致知)를 해야 할 것이니 만약 지식이 밝아지면 역량(力量)은 스스로 나아간다." 하였습니다.
○ 또 어떤 사람이, "충신(忠信)은 힘쓸 수가 있으나 치지(致知)는 어려우니 어떠한 까닭입니까." 하니,
정자는 대답하기를, "성실한 것과 공경하는 것은 참으로 힘쓰지 않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천하의 이치를 먼저 알지 못하면 역시 힘써 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차서에 치지(致知)를 먼저하고 성의(誠意)를 뒤에 한 것이니, 그 등급을 뛰어 넘어서는 안 된다.
진실로 성인 같은 총명이나 밝은 지혜가 없이 한갓 힘써 그 일을 행한 흔적만을 실천하려고 하면
어찌 저와 같이 동작하는 절차가 자연히 예에 맞게 될 수 있겠는가.
오직 이치를 밝힘이 분면하면 힘쓰지 않고도 스스로 이치에 따름을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대개 사람의 성(性)은 본래 착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치를 좇아 행하면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오직 그 지식은 지극하지 않았는데 힘만으로써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어려운 것만 괴롭게 여기고, 그 즐거운 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아는 것이 지극하게 되면, 이치를 따르면 즐겁고 이치를 따르지 아니하면 즐겁지 않은 것이니, 무엇이 괴로와 이치를 따르지 아니해서,
나의 즐거움을 해되게 하겠는가. 만일 착하지 않은 것을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알면서 그래도 혹시 한다면, 역시 진실로 한 것이 아닌 것이다." 하였습니다.
○ 묻기를, "격물(致知)이라는 것은 반드시 물건마다 격(格)하는 것입니까.
일물(一物)을 격하면 만 가지 이치가 다 통하는 것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일물을 격하여 만가지 이치가 통하는 데는 안자(顔子)도 역시 이르지 못하였다. 오직 오늘 일물을 격(格)하고, 내일 또 일물을 격하여 익히어 많이 쌓아야만 열려서 관통(貫通)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한 몸에서부터 만물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이해가 깊으면 자연히 열리어 깨닫는 곳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궁리한다는 것은 반드시 천하의 이치를 다 궁구하는 것은 아니나, 다만 한 가지 이치만 궁구하여 얻으면 되는 것도 아니다.
곧 쌓인 것이 많아지면 스스로 열리어 깨닫는 곳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한 가지 일을 다 궁구하면 다른 것은 유추(類推)할 수 있다.
만약 한 가지 일을 궁구하여 얻지 못하면 또 별도로 한 가지 일을 궁구하되, 혹시 쉬운 것을 먼저 하기도 하고,
어려운 것을 먼저 하기도 하여 각각 자기 정도의 얕고 깊은 것을 따라야 할 것이다.
비유한다면 천 갈래 길이나 만 갈래 길이나 다 서울에 갈 수는 있지마는, 다만 한 길만을 택하여 들어가면
나머지 길은 미루어 비유하여 통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개 만물은 각각 한 가지 이치를 갖추었으며,
만 가지 이치는 모두 한 근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미루어 비유하면 통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물(物)에는 반드시 이치가 있어서 마땅히 다 궁구할 바이니, 천지의 높고 낮은 까닭이나, 귀신의 깊숙하고 나타나는[幽顯] 까닭이 이것이다.
만약 내가 하늘은 높은 것을 알 뿐이고, 땅은 그 낮은 것을 알 뿐이며, 귀신은 그 깊숙하고 나타나는 것을 알 뿐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미 그러한 말인데 또 무슨 이치를 궁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 만약 효도를 하려면 마땅히 효도하는 방법을 알아야 할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히 봉양(奉養)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따뜻하게 하고 서늘하게 하는 절도인지를
모두 궁구하여야 효도를 능히 할 수 있을 것이요, 효(孝)자 한 자만을 지킨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물(物)을 보고서 몸을 살핀다는 것은 물(物)을 봄으로 인하여 몸에 돌이켜 구한다는 것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꼭 그렇지도 않다. 물과 나는 한 이치이기 때문에 저것을 밝히면 곧 이것을 깨닫게 되므로 이것은 안팎을 합한 도리이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그러면 먼저 사단(四端)34)에 구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정성(情性)에 구하면 진실로 몸에는 절실하지마는, 풀 한 잎, 나무 한 가지에도 다 이치가 있으니,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치지(致知)를 하는 요령은 지선(至善)이 있는 곳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가령 아비는 사랑하는데 그치고, 아들은 효도하는데 그치는 유이다.
만약 이것을 힘쓰지 아니하고 한갓 범연하게 만물의 이치를 보려고 하면,
대군(大軍)의 떨어져 나간 군졸이 너무 멀리 나아가서 돌아올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을까 염려된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격물(格物)은 몸을 살펴서 더욱 간절하게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반드시 천하의 이치를 다 궁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미 말하였고, 또 물에는 반드시 이치가 있으니 다 마땅히 궁구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미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살펴야 한다고 하였고, 또 몸에 살펴서 더욱 간절하게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한 것은
다 서로 밝혀 각각 그 뜻을 다 한 것이오니 모름지기 자세히 이해하여 꿰뚫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연평 이씨(延平李氏)는 말하기를, "학문을 하려면 먼저 마음을 보존하여야 하고, 학문 이외의 다른 일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된다.
대개 한 가지 일을 만나면 곧 그 일만 되풀이하며 파고 들어서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의문이 풀리는 것을 기다려서
차례로 따라 나아가서 다른 일을 궁구해야 하고, 이렇게 하기를 오래하여 쌓인 것이 많으면 가슴 속은 스스로 상쾌해지는 것인데,
이것은 글 몇 자나 말 몇 마디가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 주자가 말하기를, " 천도(天道)가 유행하고 조화(造化)가 발육하여, 무릇 천지 사이에 차 있는 무릇 소리와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물이다.
이미 이 물이 있으면 그 물이 된 것은 각각 당연한 법칙이 있는 것이고, 스스로 그렇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은 다 하늘이 내려준 것이요,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가령 지극히 간절하고 가까운 것으로 말한다면, 마음이란 것은 실로 몸을 주재하고 있으며,
그 체(體)에는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성(性)이 있고,
그 용(用)에는 측은(惻隱)·수오(羞惡)·공경(恭敬)·시비(是非)의 정(情)이 있어
혼연(渾然)히 가운데 있어서 감촉함을 따라 응하는데 각각 주재하는 바가 있어 혼란할 수 없다.
다음으로 몸의 갖춘 바에 미치면 입·코·귀·눈·사지(四肢) 등의 용(用)이 있으며,
또 다음으로 몸에 관계되는 바에 미치면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 등의 상(常)이 있는데,
이것은 다 반드시 당연한 법칙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른바 이치이다.
이것이 밖으로 사람에 이르면 사람의 이치는 자기와 다른 것이 없고, 멀리 물(物)에 이르면 물의 이치는 사람과 다른 것이 없다.
그 큰 것을 지극히 하면, 천지가 움직이는 것이나 고금(古今)이 변하는 것도 여기서 벗어나지 아니하며,
작은 것을 지극히 하면, 티끌 하나의 미미한 것이나 숨 한 번 쉴 순간도 이것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상제(上帝)가 내려준 성[降衷]이요, 모든 백성이 가지고 있는 떳떳한 것[秉彛]이니,
유자(劉子)의 이른바 '천지(天地)의 중'(中) 이며, 공자의 이른바 '성(性)과 천도(天道)'요,
자사(子思)의 이른바 '천명(天命)의 성(性)' 이며, 맹자의 이른바 '인의(仁義)의 마음' 이고,
정자의 이른바 '천연(天然) 있는 그대로의 중(中)이며, 장자(張子)의 이른바 '만물의 근원'이고,
소자(邵子)의 이른바 '도리의 형체(形體)' 라는 것이다.
다만 그 기질(氣質)이 맑고 탁한 것과, 치우치고 바른 것의 다름이 있으며, 물욕(物慾)이 많고 적은 것과, 두텁고 엷은 것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과 물(物),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가 서로 두드러지게 달라 같지 않은 것이다.
그 이치가 같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마음으로써 천하 만물의 이치를 알지 못할 것이 없으나,
그 타고난 자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 이치는 다 궁구하지 못하는 수가 있으며,
이치를 다 궁구하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지식을 극진히 하지 못한다.
지식이 극진하지 못하면 그 마음의 발하는 것이 반드시 의리에 순수할 수 없어서 물욕의 사사로운 잡념이 없지 못하니
이것이 그 뜻이 성실하지 못하고 마음이 바르지 않으며, 몸을 닦지 못하여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옛날의 성인이 이를 근심하여 처음에 소학(小學)을 가르쳐서 정성과 공경함을 익히게 하였으니,
곧 그 놓친 마음을 거두어 들이고 덕성(德性)을 기르는데 있어 이미 그 지극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며,
「대학」으로 나아가면 또 사물 가운데 나아가서, 이미 아는 바 이치를 따라 깊이 궁구하여 각각 그 극치에 이르게 하였으니,
나의 지식이 또한 두루 통하고 정밀하여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만약 그 힘을 기울이는 방법은 혹 일의 현저한 데 상고하고, 혹은 생각의 미미한 데서 살피기도 하며,
혹 문자 가운데서 구하기도 하고, 혹 강론할 지음에 모색하기도 하여,
신심(身心)·성정(性情)의 덕(德)과 인륜(人倫)·일용(日用)의 상(常) 뿐 아니라 천지·귀신의 변하는 것과
새·짐승이나 풀·나무의 마땅한 것까지도 물마다 다 소당연(所當然)35) 하여 마지 아니하는 것과,
그 소이연(所以然)36) 하여 바꾸지 못하는 것을 얻어 보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반드시 겉과 속과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며,
또 더욱 비유하여 미루어 통하여 어느 날 환하게 꿰뚫으면 천하의 물에 대하여 그 의리의 정밀한 데까지 지극히 궁구하게 되며,
나의 총명과 밝은 지혜도 역시 그 마음의 본체를 다하여 극진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도리는 형체나 그림자는 없고, 오직 사물이나 언어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해 이해(理解)가 지극히 자세하면 곧 도리도 지극히 정밀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선하지 아니한 것[不善]은 마땅히 해서는 안될 줄 알면서도
일을 당하면 또 하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다만 이것은 아는 것이 극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훼(烏喙 : 독한풀 부자附子)는 사람을 죽이므로 먹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당연히 끝내 먹지 아니하니, 이것은 진실로 안 것이다.
선하지 않은 것을 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혹 한다면 이것은 오직 진실로 안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일을 당하지 않았을 때에는 옳은 것을 가려 알았으나, 일을 당하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것은 단지 판단하고 조치하는 것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격물(格物)은 한가한 때에 해야 하며 그때에 임박하여 이해해서는 안된다.
한가한 때에 도리를 분명히 안다면 일에 당하여 판단하고 조치하기는 자연히 쉬운 것이다." 하였습니다.
○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 봄[視]에 분명함을 생각하고 들음[廳]에 총명함을 생각하며,
안색은 온화함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함을 생각하며, 말은 충성스러움을 생각하고, 일에는 공경함을 생각하며,
의문스러우면 물을 것을 생각하고, 분(忿)하면 어려움을 생각하며, 얻는 것이 있으면 의(義)를 생각한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는 말하기를, "보는 데 가리는 것이 없으면 자세히 보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며, 듣는 데 막힌 것이 없으면 밝게 들리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안색은 얼굴에 나타난 것이고, 용모는 온 몸을 말하는 것이다. 물음을 생각하면 의심이 쌓이지 않을 것이며,
어려움을 생각하면 반드시 분(忿)이 막힐 것이며, 의를 생각하면 얻는 데 구차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람은 마땅히 일에 따라서 생각해야 하며, 만약 아무 일이 없이 생각하면 이것은 망상(妄想)입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만약 한가한 때에 생각하지 않고 일을 당하여 생각하면 이미 미치지 못한다.
일은 모름지기 먼저 그 사리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만 가지 일과 만 가지 물(物)을 다 이해하여야 하지마는, 몸을 살피는 것이 더욱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표현하였습니다.)
○ 의리에 의심이 있으면 묵은 견해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뜻이 나오게 하여야 한다. (횡거문집橫渠文集)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마음에 의심이 있어도 묵은 견해에 가로 막히면 치우쳐서 고집하게 될 것이니, 새로운 뜻이 어디서 나올 것인가." 하였습니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의심할 줄을 알지 못하는 이는 다만 실상으로 공부를 하지 않은 탓이다. (실지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실상으로 공부를 하게 되면 곧 의문이 있어서 반드시 행하지 못할 곳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의문이다." 하였습니다.
○ 주자가 말하기를, "의리를 사색(思索)하다가 혼란하여 막히는 곳이 있으면 모두 털어버리고[掃去], 마음 속을 텅비게 하며,
그러다 문득 들쳐 한 번 살펴보면 곧 스스로 집히는게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앞서 이선생(李先生)을 뵈었더니 이 말씀을 들려 주셨는데 오늘에야 시험해 보니 빈말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연평 이선생(延平李先生)이 일찌기 말하기를, '도리는 낮에는 깨달아 알고,
밤에는 문득 고요한 곳에서 앉은 자세로 생각을 하여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하였다.
내가 이 설에 의하여 공부를 해 보니 진실로 옳은 말이다." 하였습니다. (마음이 고요하면 이치가 밝아집니다.)
○ 치지(致知)는 수양하는 데 있는데, 수양을 하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정씨외서(程氏外書) ○ 이천(伊川)선생의 말.)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밖으로 물욕에 흔들리지 않으면 마음의 경지가 맑아지고, 안으로 함양(涵養)하는 공부가 있으면 밝은 지혜가 생긴다." 하였습니다.
○ 주자가 말하기를, "배우는 이의 공부는 오직 거경(居敬)·궁리(窮理)에 있는데, 이 두 가지 일은 서로 협조가 된다.
능히 궁리하면 곧 거경의 공부가 날로 나아가며, 능히 거경하면 곧 궁리의 공부가 날로 치밀하여진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학문을 강론하는 데 힘쓰는 이는 실천하는 데 결점이 많고,
실천하는 데 마음을 오로지 하는 이는 또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무익(無益)하다고 한다.
자못 실천을 통해서 학문을 강론하는 공효를 이루어 지식을 더욱 밝게 하면 곧 지키는 바가 날로 굳어져서
입이나 귀로서 구구하게 말하는 것과는 같이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독서(讀書)하는 방법에 대한 통괄적인 말씀
○「주역」에 말하기를, "하늘이 산중(山中)에 있는 것은 대축괘(大畜卦)37) 이다.
군자는 이것을 보고 옛 언행(言行)을 많이 알아서 그 덕을 기른다." 하였습니다. (대축괘(大畜卦)의 상사(象辭))
정자가 말하기를, "하늘은 지극히 큰 것인데 산중에 있으니 기르는 것의 지극히 큰 형상이다.
군자가 그 형상을 보아 쌓아 축적하는 것을 크게 한다.
사람의 온축(蘊蓄)함은 학문으로 말미암아 확대하니 옛날 성현의 언행(言行)을 많이 듣는 데 있다.
<성현의> 남긴 자취를 상고하여 그 용(用)을 관찰하고, <성현의> 말씀을 살펴서 그 마음을 구하여 인식하여,
얻어서 그 덕을 길러 이루는 것이, 곧 대축(大畜)의 뜻이다." 하였습니다.
본심(本心)이 타락한 지 오래 되매 의리가 투철하게 통하지 못한다.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항상 끊임없이 하면 물욕이 능히 이기지 못하여 본심의 의리가 편안하고 굳어질 것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는 말하기를, "천하의 이치는 미묘하고 정미(精微)하여 각각 마땅한 바가 있기 때문에 옛과 지금을 통하여 바꾸지 못한다.
오직 옛날 성인은 능히 이치를 다하여 그 언행(言行)은 천하나 뒷 세상에서의 바꿀 수 없는 규범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나머지는 거기에 따른 이는 군자가 되어서 길(吉)하고, 저버린 이는 소인이 되어서 흉(凶)하다.
길한 것이 큰 이는 사해(四海)를 보전하여 모범이 되고, 흉한 것이 심한 이는 그 몸도 보전하지 못하여 경계가 된다.
이것은 그 찬연(粲然)한 흔적이며, 반드시 그러한 공효로서 경훈(經訓)과 사책(史冊) 가운데 갖추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천하의 이치를 궁구하려고 하면서 여기에 나아가 구하지 아니하면 이는 담[墻] 앞에 정면으로 선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궁리는 반드시 독서하는 데 있는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나의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같지 못하기 때문에 이치를 밝히는 데 밝지 아니 하고, 준칙(準則)이 되는 바가 없어서
그 좋아하는 것에 따라서 높은 이는 지나치고, 낮은 이는 미치지 못하되 스스로는 지나치고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반드시 앞에 나아간 이의 말로써 성인의 뜻을 구하고, 성인의 뜻으로써 천지의 이치에 달하여야 한다.
구하는 데는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미치고, 이르는 데는 가까운 곳에서 먼 곳에 미쳐 순순하여 차례가 있어야 하며
서둘거나 절박한 마음으로 구해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글을 읽되, 즐겨하지 않는 이는 게으르고 소홀하며 지속성이 없어 성공하지 못한다."
<글읽기를> 즐겨하는 이는 또 대체로 많은 것을 탐(貪)하고 넓은 것을 힘써서, 가끔 그 실마리도 잡지 못하고 급작히 그 끝을 찾으려 하며,
이것을 궁구하지도 못하고 문득 뜻이 저기에 있다. 그러므로 비록 종일토록 노동을 하고도 쉬지 못하며,
마음이 총총하고 항상 분주하게 쫓기는 것 같아서 고요히 함영(涵泳)하는 즐거움이 없으니,
어찌 스스로 얻은 것을 깊이 믿어서 오래도록 싫지 않아서 저 게으르고 소홀하여 지속성이 없는 이와 다른 것이 있겠는가.
공자의 이른바 '빨리 서두르면 달하지 못한다.' 한 것이나 맹자의 이른바, '나아감이 빠르면 물러나는 것도 빠르다." 한 것은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진실로 이것을 거울로 삼아 반성하면 마음이 하나로 가라앉아, 오래도록 흔들리지 않아서 글을 읽으면 문의(文意)가 이어지고 혈맥(血脈)이 관통하며,
자연히 점점 배어서 흡족하게 되어 마음이 사리를 깨달아 알아서, 선한 것을 권하는 것이 깊고, 악한 것을 경계하는 것이 절실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차례를 따라 정밀하게 읽는 것이, 독서하는 방법이 되는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글을 읽어도 의심이 없는 것은 처음 배우는 이의 공통된 병통이다.
<이것은> 대개 평소에 많이 읽기만 했을 뿐 자세하게 연구를 하지 않고 속히 읽어 넘긴[涉獵] 탓이다.
지금 이런 일을 깊이 경계하여 일소하고 따로 규모를 갖추어 문자(文字)를 보되, 더욱 정밀하고 가장 급(急)한 것을 가려내어 한 책을 보고,
하루의 힘에 따라 한두단(段)을 보되 한 단을 깨달으면 비로소 한 단을 나아가고, 한 책을 다 마치면 또 한 책을 바꾸어 읽어야 한다.
먼저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고르게 한 다음에 숙독(熟讀)하고, 정밀하게 생각하여 한자·한 구절을 다 이해하고 지나가고
여러 어진 이의 주해(註解)를 일일이 꿰뚫은 뒤에 그 시비(是非)를 비교하여 성현이 말씀하신 근본 뜻을 구할 수 있다.
비록 얻었더라도 역시 되풀이하여 익혀서 그 의리가 살[肌]에 배이고 골수에 젖어야만 학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윤화정(尹和靖)38)의 문인이 그 스승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위대한 성현의 가르침인 육경(六經)의 편(編)을 귀에 순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여
자기의 말을 외우는 것과 같이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지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독서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글을 읽되 처음 읽을 적에는 의문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다음에 점점 의문이 생기고 중간에는 마디마디 의문이 되니,
이런 고비를 지난 뒤에야 의문이 점점 풀리며, 자세히 이해하고 꿰뚫어서 의문스러운 것이 모두 없어져야 비로소 학문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대개 문자를 보되 먼저 반드시 그 문장의 뜻을 깨달아야만 그 뜻을 알 수 있으며,
문장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글의 뜻을 이해하는 이는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위는 독서를 하려면 정밀히 해야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 귀산 양씨(龜山楊氏)39)는, "독서를 하는 법은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경험하여, 조용히 유한(幽閒)하고 정일(靜一)한 가운데서 묵묵히 이해하고,
초연히 책의 글과 형상의 뜻 밖에 스스로 얻어야 할 것이니, 대개 내가 스스로 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독서를 함에는 모름지기 몸을 단정하게 정좌(正坐)하여 눈을 지긋이 뜨고 작은 소리로 읽으며,
마음을 비워 함영(涵泳)하고, (함영(涵泳)은 숙독(熟讀)하여 깊이 익히게 됨을 말한 것입니다.)
몸을 절실하게 성찰(省察)하여야 한다. 한 구(句)의 글을 읽으면 그 한 구를 자신이 장차 어느 곳에 응용할 것인가를 몸소 살펴야 한다." 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평소에 글을 읽을 때에는 역시 소견이 있는 것 같으나 이미 책을 놓으면
또 일반(一般)이니, 병통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주자는 대답하기를, "이것은 몸에 구하지 아니하고 전혀 책에만 구하기 때문에 진실로 이와 같다.
대개 내 몸이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도(道)가 아닌 것이 없고, 글은 이 마음을 연결할 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몸에서 구한 뒤에 책[書]에서 구하면 곧 글을 읽는데 진미가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대개 문자를 볼 때는, 7년이다, (大國五年 小國七年) 1세(世)다, (雖有王者 必世而後仁) 백 년이다,
(善人爲邦 百年亦 可以勝殘 去殺矣) 하는 종류를 (다 논어論語에 보입니다.) 다 어떻게 하여야 할까를 생각하여야 유익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 동래 여씨(東來呂氏)40)가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글을 읽되 전혀 쓰일 데가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2·30년을 두고 성인의 글을 읽어도 하루아침에 일을 당하면 문득 거리의 사람들과 다른 것이 없으니 이는 다만 글을 읽을 뿐이며,
쓰일 데가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상은 글을 읽는 것은 실제로 사용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 다음은 소학(小學)을 읽는 방법에 대한 말씀
○ 주자의 소학서(小學書)가 강령(綱領)이 매우 좋아서 날로 쓰는 데 가장 적절하여
비록 대학(大學)의 성공에 이르더라도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소학집설(小學集說) ○ 진순씨陳淳氏의 말)
과재 이씨(果齋李氏)는 말하기를, "선생은 나이 58세에 소학(小學)이라는 책을 엮었는데,
책이 완성되자 어린 선비를 가르쳐, 그 기본적인 것을 배양하고 그 지엽적인 것을 통달하게 하였다.
내편(內篇)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神)·계고(稽古)41)이고, 외편(外篇)은 두 가지인데,
고금(古今)에서 아름다운 말을 취하여 넓히고 선행(善行)으로 충당하였으니,
비록 이미 「대학」에 진학한 이라도 역시 얻어서 겸비해 두면 수신(修身)의 규범이 여기에 대략 갖추어져 있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옛 사람은 「소학」에서 이미 존양(存養)42) 하는데 성숙하여 기본 바탕이 이미 두텁기 때문에,
「대학」에 가서는 다만 그 위에 약간의 정채(精采)를 나타낼 따름이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제가 어려서부터 「소학」의 차서를 잃었는데, 「대학」을 배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대학」을 배우려면 먼저 「소학」을 보아야만 한다. 달포의 공부를 하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 노재 허씨(魯齋許氏)43)는 말하기를 "「소학」 책은 내가 신명과 같이 믿으며, 부모와 같이 공경한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사서(四書)를 읽는 방법에 대한 말씀
주자가 말하기를, "먼저 「대학」을 읽어 그 규모를 정하고, 다음에 「논어」를 읽어 그 근본을 세우며,
다음에 「맹자」를 읽어 그 뛰어남을 보고 다음에 「중용」을 읽어 옛 사람의 미묘한 것을 구해야 한다.
「대학」을 꿰뚫어 이해하여 의문이 없어진 뒤에 「논어」와 「맹자」를 읽어야 하고, 또 의문이 없어진 뒤에 「중용」을 읽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 처음으로 배워서 덕(德)에 들어가는 입문서(入門書)로 「대학」만한 것이 없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이천伊川 선생의 말.)
주자가 말하기를, "「논어」와 「맹자」는 일에 따라 문답(問答)한 것이기 때문에 요령을 보기 어렵다.
오직 「대학」은 증자(曾子)가 공자의 설을 서술한 것으로서 옛 사람의 공부하던 방법인데,
그 문인이 또 전술(傳述)하여 그 뜻을 밝혀서 앞뒤가 서로 연결되고, 체통(體統)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이 책을 통하여 옛 사람의 학문의 방향을 알고,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읽으면 들어가기 쉬워서,
그 후의 공부할 것은 비록 많더라고 대략의 체계는 이미 확립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대학(大學)을 읽는 것은 어찌 그 언어(言語)를 보려는 것이겠는가. 바로 마음이 어떠한가를 체험하려는 것이다.
'선을 좋아하기를 호색(好色)을 좋아하는 것같이 하고 악을 싫어하기를, 악취(惡臭)를 싫어하는 것 같이 하라' 는 것을
내 마음 속에서, 과연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기를 이 같이 하는가 시험해 보며,
'한가하게 지낼 적에 선하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을, 과연 이런 일이 있는가.
시험해 보아 한 가지라도 이르지 못한 것이 있으면, 용감하게 분발하여 그만두지 아니한다면 반드시 장족의 발전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런 것을 알지 못하면 글은 글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을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대개 독서讀書하는 법은 다 이러하고 비단 대학(大學)만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대학의 글에는 정경(政經)이 있고, 장구(章句)가 있으며 혹문(或問)44)이 있는데,
보아오고 보아가는데 따라 혹문은 보지 아니하고 다만 장구만 보아도 이해할 수 있고, 더 오래 되면 정경만 보아도 될 수 있으며,
또 더 오래 되면 대학(大學) 한 권이 나의 가슴 속에 차 있기 때문에, 정경을 역시 보지 않아도 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만큼의 허다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역시 나의 말을 소화해 내지 못할 것이며,
성현만큼의 허다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역시 성현의 말을 이해해 낼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논어(論語)의 글은 그 말은 가까우나 그 뜻은 멀고, 말은 다함이 있으나 뜻은 무궁하니,
그 다함이 있는 것은 주해에서 찾을 것이요, 무궁한 것은 마땅히 정신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논어」집주(集註) 정자(程子)의 말.)
연평 이씨(延平李氏)는 말하기를, "사람의 몸가짐은 마땅히 공자를 본받아야 한다.
공자와 서로 거리가 천여 년[千餘載]이나 되기 때문에 이미 친해질 수 없고,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논어(論語)뿐이다.
「논어」에 기록된 것은 공자의 언행(言行)이다. 매양 읽어서 음미(吟味)하고 익혀서 해석하며,
미루어 행한다면 비록 당(堂)에 오르고 방[室]에 들어갈 정도는 되지 못하더라도, 역시 사군자(士君子)로서는 잃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가 말하기를, "「논어」를 읽는 이가, 다만 여러 제자(弟子)들이 묻는 것을 곧 자기의 물음으로 생각하고,
성인이 대답한 것을 지금 귀로 듣는 것처럼 생각하면 자연히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만약 「논어」와 「맹자」의 글 가운데에서 깊이 구하고 익혀 음미해서 함양(涵養)한다면 비상한 기질(氣質)을 이룰 것이다." 하였습니다.
(심생(甚生)은 비상(非常)과 같습니다.)
○ 또 말하기를, "만약 「논어」를 읽지 않았을 때도 이런 사람이요, 읽고 난 뒤에도 이런 사람이라면 이것은 곧 읽지 아니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성인의 도(道)를 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맹자」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창려문집(昌黎文集))
정자가 말하기를, "안자(顔子)가 죽은 뒤에 마침내 성인의 도를 얻은 이는 증자(曾子)이고, 그 학문을 전한 이는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맹자」가 성문(聖門)에 공이 있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중니(仲尼 : 공자孔子)는 다만 하나의 인(仁)자를 말하였고, 맹자는 입만 열면 문득 인의(仁義)를 말하였으며, 중
니는 다만 하나의 지(志)자를 말하였고. 맹자는 문득 기운을 기르는 허다한 설을 말하였으니, 단지 이 두 글자에 그 공효가 매우 많다." 하였습니다.
「논어」와 「맹자」를 읽고도 도를 알지 못하면, 그것은 이른바 '비록 많지만 무엇하겠는가.' 한 것이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이천(伊川)선생의 말.)
주자는 말하기를, "「논어」의 말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으되, 사람에게 보인 것은 모두 조존(操存) · 함양(涵養)의 요령이요
<맹자> 7편의 뜻은 궁구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되 그 사람에게 보인[示]것은 대개 체험(體驗)과 확충(擴充)의 실마리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배우는 이는 마땅히 「논어」와 「맹자」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논어」나 「맹자」를 제대로 읽으면 육경(六經)은 별 힘들이지 않아도 밝아질 것이다.
글을 읽는 이는 마땅히 성인이 경(經)을 지은 의도와, 성인의 마음쓰는 것과 성인이 성인으로 이르고,
내가 이르지 못하고 얻지 못한 까닭을 구절마다 구하여, 낮에는 외워서 음미하고, 밤에는 생각하여 그 마음을 고르게 하며,
기운을 바꾸며 의문은 버리면 곧 성인의 뜻이 보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사람이 다만 이 두 책을 얻어 보면 몸에 절실하여 종신(終身)토록 사용하여도 남는다." 하였습니다.
○ 중용(中庸)은 공부가 치밀하고 규모가 크다.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는 말하기를, "중(中)은 치우치지 아니하고 의지하지 아니하면 (미발(未發)의 중(中)입니다.)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것이 없는 것이며 (이발(已發)의 중(中)입니다) 용은 평상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바꾸지 않는 것을 용(庸)이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천하의 바른 도리요, 용이라는 것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이다.
이 편(篇)은 공문(孔門)에서 전해 준 심법(心法)45)인데, 자사는 너무 오래되어 어긋날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책을 써서 맹자에게 전수하였는데, 그 책의 첫머리는 한 이치를 말하고, 가운데는 흩어져서 만 가지 일이 되고, 끝은 다시 합하여 한 이치가 된다.
풀어놓으면 육합(六合)46)에 차고 접으면 깊숙이 감추어져서 그 맛이 무궁하니 다 실학(實學)47)이다.
선독(善讀)하는 이가 깊은 뜻을 생각하여 찾아보아 얻는 것이 있다면, 곧 종신토록 쓰더라도 다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중용을 읽는 이가 높은 것을 바라지 아니하고 기이한 것에 놀라지 아니하여,
반드시 구두(句讀)와 문의(文義) 사이에 깊이 잠겨 그 귀추를 이해하며, 반드시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가운데 삼가고 두려워하여,
그 실지대로 실천하면 거의 마음이 너그럽고 만족하여져서, 진실로 힘을 쌓아 오래하면 박후(博厚)하고 고명(高明)하며
유구(悠久)한 영역에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홀연히 이를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육경(六經)을 읽는 방법에 대한 말씀
○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육경은 모름지기 순환하여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의리(義理)가 참으로 무궁하니 자신이 조금 나아가면 또 보이는 것이 다름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공자는 말하기를, "소자(小子)들아, 어찌 시를 배우지 않느냐.
시는 흥(興)하기도 하고, 관(觀)하기도 하며, 군(群)하기도 하고, 원(怨)하기도 한다." 하였습니다. (「논어」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소자(小子)는 제자(弟子)이다. 흥(興)은 뜻을 감응·발동하는 것이다.
관(觀)은 득실(得失)을 상고해 보는 것이고, 군(群)은 조화하되 유입(流入)하지 않는 것이며, 원(怨)은 원망하되 노(怒)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시는 성정(性情)에 근본하여 사(邪)도 있고 정(正)도 있다.
그 말이 알기 쉬운데 읊조리고 음조(音調)의 높고 낮은 것을 반복하는 사이에 사람이 또 감동하기 쉽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가 그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 그치지 못하는 것을 반드시 여기서 얻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가까이는 아버지를 섬길 수 있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다.
주자는 말하기를 "인륜(人倫)의 도가 시에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으나, 이 두 가지는 중요한 것을 들어서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된다.
주자는 말하기를. "그 나머지는 또 많이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시를 배우는 법을 이 장(章)에서 다하였으니, 이 경(經)을 읽는 이는 마음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시를 배우지 아니하면 말을 할 수가 없다.
주자는 말하기를, "시는 사람의 정(情)에 근본하고 물(物)의 이치를 겸하여, 풍속(風俗)의 성쇠(盛衰)를 징험하고,
정치의 득실(得失)을 볼 수 있으며, 사리가 통달하고 심기(心氣)가 화평하다. 그러므로 능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지금 사람은 독서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령 '시 3백을 외워도 정사(政事)를 맡겨 통달하지 못하며, 사방(四方)에 심부름시켜 단독으로 대꾸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읽은들 무엇하겠는가.' (공자의 말씀임.) 모름지기 시를 읽지 아니하였을 때에는 정사에 통달하지 못하고,
전혀 단독으로 대답도 못하지마는, 이미 시를 읽은 뒤에는 문득 정사에도 통달하고,
능히 사방(四方)에 단독적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이것이 비로소 시를 읽은 것이다.
'사람이 주남(周南)과 소남(召南)48)을 읽지 아니하면 담장을 대한 것과 같다.' (역시 공자의 말씀임.)
모름지기 시를 읽지 아니한 때에는 담장을 대한 것과 같으나 시를 읽은 뒤에는 곧 담장을 대한 것과 같지 않아야 비로소 효험이 있는 것이니,
대개 독서(讀書)는 이와 같아야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공자는 말하기를, "예(禮)를 배우지 아니하면 서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는 말하기를, "예는 공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으로 근본을 삼지마는,
절문(節文)과 도수(度數)의 자세한 것이 있어 사람의 기부(肌膚)의 회(會)와 근해(筋骸)의 속(束)을 굳게 한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가 탁연(卓然)히 자립(自立)하여 사물(事物)에 흔들려서 빼앗기는 바가 되지 않는 것을 반드시 여기서 얻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품절(品節)이 상세히 밝으며 덕성(德性)이 굳게 정(定)해지기 때문에 능히 서게 된다." 하였습니다.
○ 영가 주씨(永嘉周氏)는 말하기를, "경례(經禮) 3백과 위의(威儀) 3천이 모두 성(性)에서 나온 것이며, 모양을 속이고 정(情)을 가식[飾]한 것은 아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기 때문에 예가 떳떳하게 섰으며, 유(類)로 모이고 무리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예가 진실로 행해졌다.
사람이 천지 사이에 위치하고 만물의 위에 섰으니, 존비(尊卑)와 분류(分類)는 베풀지 아니하여도 드러난다.
성인이 이것을 좇아서 관혼 상제(冠婚喪祭)와 조빙 향사(朝聘鄕射)의 예(禮)를 만들어
군신(君臣)·부자(夫子)·형제(兄弟)·부부(夫婦)·붕우(朋友)의 의리를 행하게 되었다.
그 형이하의 것은 음식·기복(器服)의 쓰이는 데서 나타나며, 형이상의 것은 무성(無聲)·무취(無臭)의 은미함에까지 지극하다.
뭇 사람은 힘쓰고 현인은 행하며 성인은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그 몸과 그 집과 나라와 천하는 예가 다스려지면 다스려지고, 예가 어지러워지면 어지럽고, 예가 있으면 존재하고, 예가 망하면 망한다.
진씨(秦氏)49)가 책을 불살라서 3대(代)의 예문(禮文)이 크게 무너졌다.
한(漢)나라가 흥하여 책을 구입하였으나, 예기(禮記) 49편이 여러 선비들의 전기(傳記)에서 섞여 나왔으며 성인의 뜻을 다 얻지는 못하였다.
그 글의 뜻을 살펴보니, 때로는 서로 어긋나는 것이 있으나, 그 글은 번거롭고 뜻은 넓으니,
배우는 이가 널리 배워 요약하면 역시 <도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대개 그 내용이 추(粗)한 것은 응대(應對)하고 진퇴(進退)하는 사이에 있고,
정(精)한 것은 도덕(道德)과 성명(性命)의 요긴함에 있으며, 어린애의 학습에서 시작하여 성인(聖人)에 이르는 데서 끝난다.
오직 옛 도(道)를 달한 뒤라야 능히 그 말을 알고, 그 말을 안 뒤라야 능히 예를 얻게 된다.
그렇다면 예가 예된 것이 그 법칙이 멀지 않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 덕(德)이라는 것은 성(性)의 실마리요, 악(樂)이라는 것은 덕(德)의 영화(英華)이다.
금(金)·석(石)·사(絲)·죽(竹)은 풍악의 기구이다.
시(詩)는 그 뜻을 말한 것이고 노래는 그 소리를 읊은 것이며, 춤은 그 몸을 움직이는 것이니,
이 세 가지는 마음에 근본하여야만 악기(樂器)가 뒤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정(情)이 깊어서 문(文)이 밝고, 기운이 성하여 변화가 신통하다,
화하고, 순한 것이 중(中)에 쌓이면 영화(英華)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니 오직 음악은 거짓으로 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예기(禮記))
유씨(劉氏)는 말하기를, "뜻이라는 것은 실마리[端]가 처음 발하는 것이다.
(덕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성(性)은 그 덕의 근본이기 때문에 말하기를, "덕이라는 것은 성의 실마리이다." 하고,
뜻은 이 마음의 가는 바이기 때문에 말하기를, "실마리가 처음 발(發)하는 것이다." 한 것입니다.)
목소리와 용모는 영화(英華)가 이미 나타난 것이다.
뜻이 움직여 시가 형성되고, 시가 이루어져 그 소리를 길게 노래하며, 길게 노래하는 것으로 부족하면
자기도 모르게 손과 발을 흔들어 춤추고 뛰며, 그 몸을 움직이게 된다.
이 세 가지는 다 마음이 여러 가지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임에 근본한 뒤에 팔음(八音)의 악기에 올려서 간척(干戚)과 우모(羽)에 미치게 된다.
정(情)이 마음 속에 감응하는 것이 깊으면 문(文)이 밖에 나타나는 것이 밝다.
이는 마치 천지의 기운이 안에 성하면 조화가 물에 미치는 것이 신묘(神妙)하여 예측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화하고 순한 것이 중(中)에 쌓이어 영화(英華)가 밖에 발한다.' 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풍악의 풍악되는 것을 거짓으로 할 수 있겠느냐."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풍악에는 5성(聲)과 12율(律)50)이 있는데, 서로 노래부르면서 서로 화답하여 가무(歌舞)를 하면
8음절(音節)이 사람의 성정(性情)을 길러서 간사하고 더러운 것을 씻고, 찌꺼기는 말끔히 사라질 것이다.
배우는 이는 의리가 정밀하고, 인(仁)이 익어서 스스로 도덕에 화하고 순하는 것을 반드시 여기서 얻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옛날 풍악은 이미 망하여 다시 배울 수 없게 되었고, 다만 학문을 강론하고 실천하는 사이에서 그 남긴 뜻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 임천 오씨(臨川吳氏)는 말하기를, "예경(禮經)이 겨우 남아 있는 것은 그래도 지금의 의례(儀禮) 17편이 있는데, 악경(樂經)은 없다.
그 경(經)은 아마 성음(聲音)과 악무(樂舞)의 절이 대부분으로, 사구(辭句)로서 읽어 외우고 기록하여 적을 수 있는 것이 적었기 때문에,
진(秦)이 책을 불사른 뒤에 전하지못한 듯하다. 여러 선비들은 능히 음악의 뜻을 말한 데 지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주(周)나라가 쇠하자 예악(禮樂)이 무너졌으나 예서(禮書)는 오히려 남은 것이 있어서,
제도(制度)와 글을 상고하여 찾을 수 있었지마는, 악서(樂書)는 다 망하고 남지 않았다. 뒤
에 예를 찾은 것도 이미 선왕(先王)의 제도와는 맞지 않지마는 음악은 더욱 심하다.
지금 세상에서 쓰이는 것은 대개 정위(鄭衛)의 음(音)에 오랑캐의 음이 섞이어 인심을 방탕하게 하고,
풍속을 허물어지게 하기에 알맞으니, 어찌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나 예악(禮樂)의 제도는 비록 망하였으나 예악의 이치는 남아 있다.
장엄하게 공경하는 것은 예의 근본이요, 온화하게 즐기는 것은 음악의 근본이다.
배우는 이가 진실로 장엄하게 공경하는 것으로 그 몸을 닦고, 온화하게 즐기는 것으로 마음을 기르면 곧 예악의 근본을 얻을 것이니,
역시 몸을 세우고 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서경(書經)을 본다면 모름지기 2제(帝)와 3왕(王)의 도를 보려고 해야 한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명도(明道)선생의 말)
주자는 말하기를, "상서(尙書)를 읽음에 역대(歷代)의 세상이 변하는 것은 보기 어려우니, 성인의 마음을 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가령 요(堯)는 그 백성을 다스린 까닭을 생각하고, 순(舜)은 그 임금을 섬긴 까닭을 생각하는 것들이다.
또 가령 탕서(湯誓)에 말한 바, '내가 상제(上帝)를 두려워하여 감히 바르게 아니하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것들을
숙독(熟讀)한다면 어찌 탕(湯)의 마음을 보지 못하겠는가."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상서는 처음 읽으면 너무 어려워서 자기와 서로 관계되지 않는 것 같으나,
뒤에 숙독하면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의 사적이 모두 몸에 절실한 것임을 알게 된다." 하였습니다.
○ 무이 채씨(武夷蔡氏)는 말하기를, "2제와 3왕의 천하를 다스리는 큰 경(經)과 법(法)이 다
이 책에 실렸는데, 수 천년 뒤에 나서수 천년 전의 것을 강론하여 밝히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2제와 3왕의 다스림은 도에 근본하고, 2제와 3왕의 도는 마음에 근본하였으니, 그 마음을 얻으면 도와 다스림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정일(精一)하여 중(中)을 잡는다는 것은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준 심법(心法)이요,
건중(建中)·건극(建極)51)은 상(商)의 탕(湯)·주(周)의 문(文) 무(武)가 서로 전한 심법(心法)인 때문이다.
덕(德)·인(仁)·경(敬)·성(誠)이란 것은 말은 비록 다르나, 이치는 하나이니 모두 이 마음의 미묘함을 밝힌 것이다.
후세의 임금이 2제와 3왕의 다스림에 뜻을 둔다면 그 도를 구해야 할 것이며, 2제와 3왕의 도에 뜻을 둔다면 그 마음을 구해야 할 것이니,
마음을 구하는 요령은 이 책을 버리고서 어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서전서문>
○ 공자는 말하기를, "대개 역(易)이란 무엇을 하는 것인가 하면, 그것은 물(物)을 열고 일을 이루어 천하의 도를 포괄[冒]함이니, 이러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역으로써 천하의 뜻을 통하며, 역으로써 천하의 공업을 정하며, 역으로써 천하의 의심을 결단한다." 하였습니다. (역계사易繫辭)
주자는 말하기를, "물(物)을 열고, 온갖 일을 이룬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점을 쳐서 길하고 흉한 것을 알아서 사업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천하의 도(道)를 포괄[冒]한다는 것은 괘(卦)와 효(爻)를 이미 베풀어서 천하의 도가 모두 그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역은 변하고 바뀌는 것이니, 수시로 변하고 바뀌어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그 글이 광대하여 다 갖추어져서 성명(性命)의 이치와 유명(幽明)의 이유를 밝히고, 사물의 정(情)을 다하여,
물(物)을 열고 일을 이루는 도를 보인 것이니, 성인이 뒷 세상을 근심한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지극히 은미(隱微)한 것은 이(理)이고, 지극히 드러난 것은 상(象)이다.
체(體)와 용(用)이 일원(一源)으로서 나타나고 숨는 것이 틈이 없으니 회통(會通)을 관찰하여 그 전례(典禮)를 행하면
(주자는 말하기를, "회(會)는 이치가 모인 것을 말한 것이요, 통(通)은 일의 마땅한 것을 말한 것이다." 했습니다.
뭇 이치가 모이는 곳에는 곧 쉽고 어려움과 막히고 방해됨이 있으니, 반드시 그 가운데서 통하는 곳을 얻어야 행할 수 있습니다.
전례(典禮)라는 것은 전상(典常)한 이치입니다.) 곧 말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잘 배우는 이는 말[言]을 구하되 반드시 가까운 데서 구한다. 가까운 데를 쉽게 여기는 이는 말을 아는 자가 아니다.
내가 전(傳)한 것은 말[辭]이니, 말로 말미암아 뜻을 얻는 것은 곧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시(時)를 알고 세(勢)를 아는 것이 역(易)을 배우는 큰 방법이다. (정자역전程子易傳)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방(方)은 술(術)과 같다. 시(時)는 성하고 쇠한 것이 있고, 세(勢)는 강하고 약한 것이 있는데,
역을 배우는 이는 마땅히 그 시세(時勢)를 따라서, 변화에 적응하되 오직 도를 따라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 맹자는 말하기를, "왕자의 자취가 없어지니 시가 망하고, 시가 망한 뒤에 춘추(春秋)를 짓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맹자」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왕자의 자취가 없어졌다는 것은 평왕(平王)이 동천(東遷)하여 정교(政敎)한 호령(號令)이 천하에 미치지 못한 것을 이른 것이요,
시가 망했다는 것은 서리(黍離 : 시전의 편명)가 강등되어 국풍(國風)이 되어 아(雅)가 망한 것을 말한 것이다. 춘
추(春秋)는 노(魯)나라 사기(史記)의 이름인데, 공자가 거기에 필삭(筆削)하되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元年)에서부터 시작하였으니,
실은 주나라 평왕(平王) 49년이다." 하였습니다.
그 일은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진(晋)나라 문공(文公)이요, 그 글은 사기인데,
공자가 말하기를, "그 뜻은 곧 내[丘]가 사사로이 취[竊取]하였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춘추 때에 오패(五覇)52)가 잇달아 일어났으나 환공(桓公)·문공(文公)이 가장 성하였다.
사(史)는 사관(史官)이다. 절취(竊取)라는 것은 겸손한 말이다.
공양전(公羊傳)에는 기사 즉 구유죄언[其辭則丘有罪焉]이라 하였으니, 뜻이 같은 것이다.
대개 결단하는 것은 자신에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이른바 쓸 만하면 쓰고, 깎을 만하면 깎았는데,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능히 한 마디도 거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윤씨(尹氏)는 말하기를,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음은 역시 사관(史官)의 글로써 당시의 일을 기재하였으나,
그 뜻은 천하의 사정(邪正)을 정하여 백왕(百王)의 큰 법으로 삼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낳자 무리에 재주가 뛰어난 이가 반드시 있어서, 일어나 군장(君長)이 되어
다스려 쟁탈(爭奪)이 그쳐지고, 인도하여 잘 살게 되며, 가르쳐서 윤리가 밝아져야만
인도(人道)가 서고 천도(天道)가 이루어지며, 지도(地道)가 고르게 된다.
2제(帝) 이전에는 성현이 때때로 나와 수시로 진작하여서 풍기(風氣)의 마땅함에 순(順)하게 하였으며,
하늘을 어기어 사람을 가르치지 아니하였고, 각각 때를 따라 정사를 세웠다.
그 뒤에 3왕이 잇달아 일어남에 이르러서는 삼중(三重:왕도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세가지 중대한 일.
곧 의례(議禮)·제도(制度)·고문(考文)·「王天下有三重焉 其寡過矣乎」≪中庸≫)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자(子)·축(丑)·인(寅)으로 정월(正月)을 삼고, 충(忠)·질(質)·문(文)으로 서로 숭상하여 인도(人道)가 갖추어지고 천운(天運)이 순환하였다.
그러나 성왕(聖王)이 이미 다시 일어나지 않자 천하를 둔 자가 비록 옛날의 자취를 모방하려고 하나, 역시 사사로운 뜻으로 망동(妄動)할 뿐이다.
일이 그릇되어 진(秦)나라는 건해(建亥)를 정월(正月)로 삼고, 도(道)가 그릇되어 한(漢)나라는 오로지 지혜로써 세상을 다스렸으니,
어찌 다시 선왕(先王)의 도를 알 수 있겠는가, 공자가 주(周)나라 말엽에 이르러 성왕(聖王)은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고,
하늘에 순하고 때에 상응하는 다스림이 다시 있지 않자 여기서 「춘추」를 지어 백왕(百王)의 바꿀 수 없는 큰 법으로 삼았으니,
이른바 3왕에 상고하여도 어긋나지 아니하고, 천지에 세워도 어긋나지 아니하며, 귀신에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고,
백세(百世)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춘추」의 큰 의리는 수십(數十) 가지이다.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춘추」의 큰 의리는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며 인의(仁義)를 귀히 여기고,
간사한 것을 천하게 여기며, 중국(中國)을 안으로 하고 오랑캐를 밖으로 하는 유례와 같은 것입니다.)
그 의리가 비록 크나 밝기가 해와 별 같아서 보기가 쉽지마는, 오직 그 미미한 글과 숨은 뜻의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르는 것은 알기가 어렵다.
혹은 누르고 혹은 놓아 주며 혹은 허여하고, 혹은 빼앗으며 혹은 나아가고 혹은 물러가기도 하며 혹은 적어지기도 하고,
혹은 드러나게 하여서 모두 의리의 편안함과 문질(文質)의 중(中)과 관(寬)·맹(猛)의 마땅함과 시(是)·비(非)의 공평함을 얻었으니,
곧 일을 제재하는 저울이요, 도를 헤아리는 모범이다.
후세의 임금이 「춘추」의 의리를 알면 비록 덕이 우(禹)와 탕(湯)과 같지는 못하더라도, 오히려 3대의 다스림을 본받을 수 있다.
그 뜻을 얻고, 그 쓰인 것을 법받으면 곧 3대를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사기(史記)를 읽는 방법에 대한 말씀
○ 사기(史記)를 읽으면, 모름지기 치란(治亂)의 기틀과 현인 군자의 출처(出處)와 진퇴(進退)를 보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곧 격물(格物)이다. (정씨유서程氏遺書 ○ 이천 선생伊川先生의 말)
정자는 말하기를, "대개 사기를 읽을 때에는 한갓 사적(事迹)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그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와 흥폐(興廢)와 존망(存亡)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가령 만약 한고조의 고제기(高帝紀)를 읽는다면 모름지기 한나라 4백 년의 시종(始終) 치란이 어떠하였던가를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역시 배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나는 매양 「사기」를 읽다가 반쯤 읽으면 곧 책을 덮어두고 생각하여,
그 성공과 폐망을 헤아려 본 뒤에 다시 읽으며 부합되지 않는 곳이 있으면 또 다시 정밀하게 생각하는데,
그 사이에는 다행히 성공한 것과 불행히 실패한 것도 많았다.
지금 사람들은 다만 성공한 이는 옳다고 하고 실패한 이는 곧 그르다고 하며, 성공하 자도 도리어 옳지 않은 것이 있고,
패망한 자도 도리어 옳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 동래 여씨(東萊呂氏)는 말하기를, "대개 「사기」를 보되 잘 다스린 것을 보면 잘 다스렸다 하고,
어지러운 것을 보면 어지럽다고 하면서 한 가지 일을 보면 한 가지 일을 아는데 그친다면, 「사기」를 보고 취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모름지기 자신이 그 가운데 있는 견지에서 일의 이해(利害)와 때의 화란(禍亂)을 보고, 반드시 책을 덮고
스스로 내가 이러한 일을 당하면 마땅히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사기」를 본다면, 학문도 나아지고 지식도 높아져서 비로소 유익(有益)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 허씨(許氏)는 말하기를, "사기를 보되 마땅히 먼저 그 사람의 큰 대목을 훑어본 뒤에 그 세세한 행을 보아서,
착하면 본받고 악하면 경계하여야 내 몸가짐을 바루는 데 유익하게 될 것이며 한갓 그 사건만 기억하고 그 글만 외우는 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독서는 궁리하는 한가지 일인데 독서에도 차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성현의 말을 채택하여 위와 같이 엮었습니다.
다만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외에도 송대(宋代)의 참다운 유학자인 주자(周子)·정자(程子)·주자(朱子) 등의 글의 성리학은
다 성상이 학문을 하시는 데 적절하므로 정밀하게 음미하고 또 깊이 연역(演繹)하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만히 생각컨대, 「경전」이 있게 된 이래 선비로서 누가 글을 읽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참다운 유학자는 드물게 일어났었고, 임금으로서 누가 글을 읽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좋은 정치는 드물게 있었던 것은 그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독서한 것이 단지 귀로 들어가고 입으로 나오는 자료가 되었을 뿐이요, 유용한 도구가 되지 못하였던 까닭입니다.
여릉(廬陵) 나대경(羅大經)53)의 말에 의하면 "지금의 선비는 요·순·주공·공자의 말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논어·맹자·중용·대학이 아니면 보지 않으며, 말은 반드시 주(周)·정(程)·장(張)·주(朱)를 일컫고, 학문은 반드시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을 말한다.
이런 일은 3대 이후로 아직까지 없었으니 성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호걸(豪傑)의 선비가 나오지 않고 예의의 풍속이 이루어지지 않아 선비의 기풍은 날이 갈수록 비루해지고, 인
재는 해가 갈수록 쇠잔해지니 통탄할 일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의 병통을 말한 것입니다.
아, 선비들의 독서는 부귀(富貴)나 이욕을 구하기 위한 것이 되었으므로, 그 병통이 이런 것입니다.
임금과 같은 이는 이미 지극히 숭고하고 부귀하기 때문에 힘쓰는 것은 궁리하는 것과 마음을 바루는 것이요, 구
하는 것은 천명이 길기를 하늘에 비는 것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어야겠는데 오히려 많이 찾아 조사하고 널리 상고하여서,
겉만을 수식(修飾)하는 데 힘쓸 뿐이고, 자기 몸에 절실한 용도로 삼지 않는 것은 어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심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이 폐단을 경계하시고, 힘써 성리학(性理學)에 정밀하게 하여 실제로 몸소 이행함으로써
「경전」을 빈 말이 되지 않게 하신다면 국가에 매우 다행일까 합니다.
◆ 다음은 천지(天地)·인물(人物)의 이(理)에 대한 포괄적인 말씀
○ 역(易)에 태극이 있는데, 이것은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으며 사상은 팔괘(八卦)를 낳는다. (역계사易繫辭 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하나가 매양 둘을 낳는 것은 자연의 이(理)이다. 역(易)이라는 것은 음·양이 변화하는 것이요, 태극이라는 것은 그 이치이다.
양의라는 것은 비로소 한 획[一]이 되어 음·양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사상(四象)이라는 것은 다음에 두 획[二]이 되어 태(太)와 소(少)로 나뉜 것이다.
팔괘(八卦)라는 것은 다음에 세 획[三]이 되어 비로소 삼재(三才 : 하늘·땅·사람)의 형상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상의 말은 실로 성인이 역(易)을 만드는 데에 자연의 차례요, 추호(秋毫)도 사람의 지혜를 빌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한번 음(陰)하고 한번 양(陽)하는 것을 도라고 이른다.
주자는 말하기를, "음·양이 서로 운행하는 것은 기(氣)이고, 그 이(理)는 이른바 도(道)이다.
음·양은 기요, 도가 아니며, 음·양이 되게 하는 까닭이 도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잇는 것은 선(善)이요, 이것을 이룬 것은 성(性)이다.
정자는 말하기를, "낳고 낳는 것을 역(易)이라 하는데, 이것이 천도(天道)가 된 것이다.
하늘은 다만 낳는 것으로 도를 삼는데, 이 낳는 이치를 이은 것이 곧 선(善)이다.
선에는 곧 하나의 원(元)이라는 뜻이 있는데, 원(元)이라는 것은 선의 큰 것이다.
만물이 다 생하는 뜻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을 잇는[繼] 것이 선이라는 것이다.'
이룬다[成]는 것은 만물이 스스로 그 성(性)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려서 얻게 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도는 음에서 갖추어져서 양으로 행한다.
잇는다[繼]는 것은 그 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선(善)이라는 것은 조화생육(造化生育)의 공효를 말하는 것이므로 양의 일이다.
이룬다[成]는 것은 갖춘다는 말이요, 성(性)이라는 것은 물이 받은 것을 이른 것이다.
물이 나면 성이 있어서 각각 이 도를 갖추는 것이므로 음의 일이다." 하였습니다.
인자(仁者)는 보고서 인이라 하고, 지자(知者)는 보고서 지라고 하며, 백성은 날로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가 적다.
건안 구씨(建安丘氏)는 말하기를, "성(性)이 이루어진 뒤에 사람이 양(陽)의 동한 것을 품수한 이는 인(仁)이 되고,
음(陰)의 정(靜)한 것을 품수한 이는 지(知)가 된다.
오직 그 품수한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보는 것이 편벽되어, 인자는 인(仁)만 보고 지(知)는 보지 못하므로 그 도는 인에서 그치며,
지자는 지(知)만을 보고 인을 보지 못하므로 그 도(道)는 지(知)에서 그친다.
백성들은 매일 쓰고 먹고 마시는 것이 이 도의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되 이 도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군자의 도가 적은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 맹자는 말하기를, "행하여도 밝게 알지[著] 못하며, 익혀도 정밀히 살피지[察] 못하므로, 종신토록 그 도를 알지 못하는 이가 많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저(著)라는 것은 그 당연한 것을 밝히는 것이고, 찰(察)이라는 것은 그러한 까닭을 아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이상(形而上)의 것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形而下)의 것을 기(器)라 하며, 조화하여 재제(裁制)하는 것을 변(變)이라 하고,
미루어 행하는 것을 통(通)이라 하며, 이것을 들어서[擧] 천하의 백성에게 베푸는 것을 사업(事業)이라 한다.
주자는 말하기를, "음·양은 다 형이하의 것이요, 그 이(理)는 도이다. 그 자연의 변화에 따라 이것을 재제하는 것은 변화의 뜻이다." 하였습니다.
○ 북계 진씨(北溪陳氏)는 말하기를, "도는 사물을 떠나서 따로 비고 허망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실제로는 도가 물을 떠날 수 없으며, 물을 떠나서는 도라는 것이 없다.
가령 군신(君臣)에는 의리가 있는데, 의리는 도요, 군신은 기(器)이다.
부자(父子)에는 친(親)이 있는데 친(親)은 도요, 부자(父子)는 기(器)이다.
부부(夫婦)에는 부부의 분별이 있고, 장유(長幼)에는 어른과 어린이가 순서가 있고, 붕우(朋友)에는 믿음이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물에는 반드시 이(理)가 있으니 모름지기 다 궁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인용한 공자의 계사(繫辭)의 말씀은 이학(理學)의 근본이 되옵니다.
다음에는 경전(經傳)의 여러 설을 인용하여 물에도 존재하고 몸에도 존재하는 이(理)를 대략 밝혀 그 실마리를 구하는 자료로 삼았습니다.
만일 이미 말한 것으로 인하여 말하지 못한 것을 미루어 확충(擴充)시키면 치지(致知)의 공부에 거의 가까와질 것입니다.
○ 무극(無極)하되 태극(太極)이다.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 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하늘 위에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나 실로 조화(造化)의 바탕[樞紐]이며, 만물의 근본(根本)이 된다.
그러므로 무극(無極)하되 태극(太極)하다고 한 것이며 태극 밖에 따로 무극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태극이라는 것은 다만 이 음·양 속에 있는 것인데,
지금 사람들이 음·양 위에 따로 형체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하여 이것을 태극이라고 함은 그릇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 면재 황씨(勉齋黃氏)는 말하기를, "무극하되 태극하다는 것은 형체가 없으되 지극히 형체가 있고,
모가 없으되 크게 모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을 낳아 동이 지극하여 정(靜)하여지고, 정하여 음을 낳아 정이 지극하여 다시 동하여진다. 동
하기도 하고 정하기도 하니 서로 그 근본이 되고, 음으로도 나누어지고 양으로도 나누어지니 양의(兩儀)가 성립된다.
주자는 말하기를, "태극이 동하고, 정하는 것은 천명(天命)의 유행(流行)이다.
태극이란 것은 본연(本然)의 묘(妙)요, 동하고 정하는 것은 타는[乘] 바 기(機)이며, 태극은 형이상의 도요, 음과 양은 형이하의 기(器)이다.
그러므로 나타난 것을 가지고 관찰하면, 동하고 정하는 것이 그 때가 같지 않고,
음과 양이 위치가 같지 아니하여 태극이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은미한 것을 가지고 관찰하면
충막무짐(沖漠無朕 : 공허해서 아무것도 없음.)하여 동하고 정하는 것과 음과 양의 이(理)가 이미 다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다.
비록 그러나 이것을 앞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 처음의 합해진 것을 보지 못하고 이것을 뒤로 인용하여 보아도 그 끝의 멀어진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자는 말하기를, '동하고 정하는 것은 끝[端]이 없고 음과 양은 처음[始]이 없다." 하였으나,
도를 알지 못하는 이로서 누가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동하고 정하는 기(機)는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요, 이(理)와 기(氣)도 앞뒤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氣)가 동하고, 정하는 것은 모름지기 이(理)가 근본이 됩니다.
그러므로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고 정하여 음을 낳는다' 한 것입니다.
만일 이 말을 고집하여 태극은 음양 이전에 홀로 전해하며 음양이 무(無)에서 나온 유(有)라고 한다면
이른바 '음양은 처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니 가장 융통성있게 간파하여 깊이 익혀야 합니다.
양이 변(變)하고 음이 합하여져서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를 낳으니, 오기(五氣)가 순하게 펼쳐져서 사시(四時)가 행해진다.
주자는 말하기를, "태극이 있으면 동하고 정하여 양의(兩儀)가 나누어지고, 음과 양이 있으면 변하고 합하여 오행(五行)이 갖추어진다.
그러나 오행이라는 것은 질(質)은 땅에 갖추어지고 기(氣)가 하늘에 행하는 것이다.
질(質)로써 그 낳는 순서를 말하면 수·화·목·금·토라 하는데, 수·목은 양이요, 화·금은 음이다.
기(氣)로써 그 행하는 순서를 말하면 곧 목·화·토·금·수라 하는데 목·화는 양이요, 금·수는 음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양은 어찌하여 변한다 하고, 음은 어찌하여 합한다고 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양이 동하면 음이 따르기 때문에 변하고 합한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오행은 한 음·양이요, 음·양은 한 태극인데 태극은 본래 무극(無極)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오행이 갖추어지면 곧 조화(造化)하고 발육하는 기구가 갖추어지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또 나아가 근본을 미루어 혼연 일체(一體)로서 무극의 묘(妙) 아닌 것이 없으며,
무극의 묘 역시 일찌기 일물(一物)마다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행은 날 때에 각각 그 성(性)은 하나씩이다.
장남헌(張南軒)54)이 말하기를, "오행이 낳은 질(質)은 비록 같지 않으나 태극의 이(理)는 일찌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오행이 각기 성(性)이 하나씩이라 하면 곧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이(理)가 되어 오행이 각각 그 하나씩을 오로지 가진다." 하였습니다.
무극의 진(眞)과 음양 오행의 정(精)이 묘합(妙合)하여 응(凝)하여, 건도(乾道)는 남성(男性)을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女性)을 이루어 이기(二氣)가 서로 감응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하니, 만물이 낳고 낳아 변화가 무궁하다.
주자는 말하기를, "진(眞)은 이(理)를 말한 것인데, 망령되지 아니하다는 것이고, 정(精)은 기(氣)를 말한 것인데 둘[二]이 없다는 것이다.
묘합이라는 것은 태극과 음양·오행이 본래 융합하여 간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떠나지 못하는 것인데 어찌 합하겠습니까.
융합하여 간격이 없으므로 묘합妙合이라고 한 것입니다만 역시 융통성있게 보아야 합니다.)
응(凝)이라는 것은 모인다는 것이니 기가 모여서 형체를 이루는 것이다.
대개 성(性)은 주재가 되고 음양과 오행은 경위(經緯)가 섞여 엉켜지고, 또 각기 동류(同類)끼리 엉켜 모여서 형체를 이루는데,
양으로서 굳센 것은 남성을 이루니 아비의 도이고, 음으로서 순한 것은 여성을 이루니 어미의 도이다.
이것은 사람과 물이 시작될 때에 기로써 화(化)한 것이다.
기가 모여서 형체를 이루면 곧 형체가 교류하고, 기(氣)가 감응하여 드디어 형체로써 화(化)하여 사람과 물이 낳고 낳아 변화가 무궁한 것이다.
남녀(男女)로서 보면 곧 남녀는 각각 그 성이 하나씩이나 남녀가 한 태극이요, 만물로서 보면 곧 만물은 각각 그 성이 하나씩이나 만물이 한 태극이다.
대개 합하여 말하면 만물이 전체가 하나의 태극이요, 나누어 말하면 일물(一物)이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갖춘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그 정수를 얻어 가장 신령하다.
형체가 이미 생기면 정신[神]이 발하여 알게 되고, 오성(五性)이 감동하여 선악이 나누어지고, 만 가지 일이 여기서 나온다.
주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뭇 사람은 동하고 정하는 이(理)를 갖추었으나 항상 동하는 데에서 잃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개 사람과 물이 낳음에 모두 태극의 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음양과 오행의 기질(氣質)이 교류[交運]함에 있어 사람의 품수[]한 것이 홀로 뛰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가장 영묘하여 그 성(性)의 전체를 잃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른바 천지의 마음[心]이요, 사람의 극치(極致)이다.
그러나 형체는 음에서 생기고 정신은 양에서 발하고 있기 때문에 오상(五常)의 성이 물에 감응되어 동하여,
양은 선하고 음은 악하며, 또 같은 유로 나뉘어 오성의 다른 것은 분산되어 만 가지 일로 된다.
대개 이기(二氣)와 오행이 만물을 화생하는데 사람의 경우는 또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은 중(中)·정(正)·인(仁)·의(義)로써 만 가지 일을 처리[定]하되 정(靜)한 것을 주재로 하여 사람의 법칙[人極]을 세웠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였고, 일월(日月)로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였고,
사시(四時)와 더불어 그 차서를 합하였으며, 귀신과 더불어 그 길(吉)·흉(凶)을 합하였다.
주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성인은 동과 정의 덕을 온전하게 하는데 항상 정(靜)한 것을 근본으로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개 사람은 음양·오행의 뛰어난 기(氣)를 받아서 낳는데, 성인이 난 것은 또 그 뛰어난 데서 더욱 뛰어난 것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것을 행하는 데는 중(中)하고, 그것에 처하는 데는 바르며, 그것을 발하는 데는 어질고, 그것을 결단하는 데는 의(義)롭다.
대개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하는 것이 모두 태극의 도를 완전하게 하여 이지러짐이 없으면 욕심이 동(動)하고 정(情)이 이겨서,
이해(利害)가 서로 침범하는 것이 여기서 정(定)하여진다.
그러나 정(靜)이란 것은 성(誠)의 복(復)이요, 성(性)의 정(貞)이다.
(동(動)이란 것은 정성이 통한 것이요, 천도(天道)의 원형(元亨)인 것이며, 정(靜)이란 것은 정성의 복(復)이요, 천도(天道)의 이정(利貞)인 것입니다.)
진실로 이 마음이 조용하게 되어 욕심이 없어져서 정(靜)하지 않으면 역시 어떻게 사물의 변하는 것을 수작(酬酢)하여 천하의 동하는 것을 통일하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중(中)·정(正)·인(仁)·의(義)가 동정(動靜)에 교류[周流]하되, 동하면 반드시 정(靜)한 것을 주로 하기 때문에
그 위치가 중(中)을 이루어 천지·일월·사시(四時)·귀신이 능히 어기지 못하는 것이다.
대개 반드시 체(體)가 선 뒤에 용(用)이 행해지는 것인데, 정자(程子)가 건곤(乾坤)의 동정을 논하여 '오로지 하나로 하지 않으면
능히 곧게 나가지 못하고, 합하여 모이지 않으면 능히 흩어져 발하지 못한다.' 한 것도 역시 이런 뜻이다." 하였습니다.
군자는 <사람의 법칙[人極]>을 닦아서 길(吉)하고, 소인은 이것을 어겨서 흉(凶)하다.
주자는 말하기를, "성인은 태극의 전체(全體)로서 한번 동하고 정하는 것이 가는 데마다 중(中)·정(正)·인(仁)·의(義)의 지극한 것이 아닌 것이 없는데,
대개 닦지 아니하고도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 닦으니 군자의 길한 바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어기니 소인의 흉한 바이다.
닦고 어기는 것은 역시 공경하고, 방자한 사이에 있을 뿐인데, 공경하면 욕심이 적어지고 이(理)가 밝아지며,
적고 또 적게 하여 무(無)에 이르면 곧 고요함에는 비고 움직임에는 곧아서 성인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도를 세우는 것을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우는 것을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를 세우는 것을 인(仁)과 의(義)라 한다 하고,
또 처음에 근본하여 끝을 돌이키므로 생사(生死)의 설을 알게 된다. 하니 크도다! 역(易)이여, 지극(至)하도다.
주자는 말하기를, "음양이 상(象)을 이루는 것은 천도(天道)가 서기 때문이요,
강(剛)과 유(柔)가 질(質)을 이루는 것은 지도(地道)가 서기 때문이며, 인(仁)과 의(義)가 덕을 이루는 것은 인도(人道)가 서기 때문이다.
도는 하나뿐이나 일에 따라서 나타나기 때문에 삼재(三才)55)의 구별이 있고, 그 가운데 또 각 체(體)와 용(用)의 나누어짐이 있으나,
그 실상은 하나의 태극이다. 양(陽)·강(剛)·인(仁)은 물의 처음이요, 음(陰)·유(柔)·의(義)는 물의 끝이다.
능히 그 처음에 근거하여 낳는 것을 알면 그 끝을 돌이켜 죽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천지 사이에 조화(造化)의 줄거리[綱紀]가 되어 옛날이나 지금도 유행해서, 말할 수 없는 미묘함인데,
성인이 주역을 엮는데도 그 큰 뜻은 대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설을 인용하여 증명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기(氣)는 앙연(然 : 無涯)히 태허(太虛)하여 승강(升降)하고 비양(飛揚)하여 일찌기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허실(虛實)·동정(動靜)의 기틀이요 음양(陰陽)·강유(剛柔)의 처음이다.
떠서 오르는 것은 양의 맑은 것이요, 아래로 내려 앉는 것은 음의 탁한 것이니, 만나서 감응되고 엉키고 뭉쳐서 바람과 비가 되고, 서리와 눈도 된다.
만 가지 형체나, 산과 시내가 화하여 이루어진 것이나, 찌꺼기[糟粕]나 불에 탄 재[燼]까지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만변 불궁(萬變不窮)함은 다 도체(道體)의 유행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유기(遊氣)가 어수선하고 떠들썩하여 [紡擾] 합하여 실상으로 이루어져 사람과 물의 만 가지 다른 것을 낳았고,
그 음양 양단(兩端)이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 천지의 큰 뜻을 세운 것이다." 하였습니다.
○ 원(元) · 형(亨) · 이(利) · 정(貞)은 천도(天道)의 상(常)이요,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는 인성(人性)의 강(綱)이다. (주자의 소학小學 제사題辭)
정자는 말하기를, "원(元)이라는 것은 만물의 시초요, 형(亨)이라는 것은 만물의 자라는 것이요, 이(利)라는 것은 만물의 나아가는 것이요,
정(貞)이라는 것은 만물의 이루어지는 것이니, 건곤(乾坤)은 이 사덕(四德)이 있다." 하였습니다. (건곤乾坤은 천지의 성정性情입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인(仁)이라는 것은 마음의 덕이고 사랑의 이(理)이다.
의(義)라는 것은 마음의 제재(制裁)하는 것이고 일의 마땅한 것이다. (의(義)는 이 마땅한 이치입니다.)
예(禮)라는 것은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요, 인사(人事)에 있어서 예절의 법도이다." 하였습니다. (예는 이 절문(節文)의 이(理)입니다.)
○ 또 말하기를, "성(性)은 이가 나에게 있는 것이요, 인(仁)은 곧 온화하고 자애로운 도리이며, 의(義)는 곧 결단하고 분별하는 도리이고,
예(禮)는 공경하고 겸손한 도리이며, 지(智)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도리이니,
이 네 가지는 본래 사람의 마음에 갖추어진 것이며 성(性)의 본체(本體)이다." 하였습니다.
○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만세(萬世)를 거쳐도 바뀌지 않으므로 상(常)이라 하고,
만가지 선(善)을 통괄하여서 남기지 않으므로 강(綱)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태극이, 하늘에 있는 것을 도(道)라 하고, (이 도道자는 천명天命이 유행하는 도로서 말한 것이며,
솔성率性의 도는 인물人物이 마땅히 행할 도道를 말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것을 성(性)이라 하니, 원(元)·형(亨)·이(利)·정(貞)은 도가 유행하는 것이요, 인(仁)·의(義)·예(禮)·지(智)는 성(性)의 갖추어진 것입니다.
원(元)은 때로 말하면 봄이 되고, 사람으로 말하면 인(仁)이 되며, 형(亨)은 때로 말하면 여름이요,
사람으로 말하면 예(禮)이며, 이(利)는 때로 말하면 가을이요, 사람으로 말하면 의(義)이며, 정(貞)은 때로 말하면 겨울이요,
사람으로 말하면 지[智]입니다. (원·형·이·정은 유행하는 용(用)으로 서(序)를 삼고, 인·의·예·지는 서로 상대하는 체(體)로 이름을 세운 것입니다.)
만물의 일원(一原)을 보면 이(理)는 같고 기(氣)는 다르며, 만물의 이체(異體)를 보면 기는 오히려 서로 가까우나 이는 절대로 같지 않다.
기(氣)의 다른 것은 순수하고 섞인 것이 같지 아니한 것이요, 이의 다른 것은 편벽되고 온전한 것이 혹시 다른 것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주자는 말하기를, "바야흐로 만물에 부여하는 처음에는 천명(天命)이 유행(流行)하는 것은 같을 뿐이므로 이(理)는 같고,
음양·오행의 기(氣)는 맑고 탁한 것과, 순수하고 섞인 것이 있기 때문에 기는 다르다.
만물이 이미 이것을 얻은 뒤에 비록 맑고 탁한 것과, 순수하고 섞인 것이 같지 않은 것이 있으나,
이 음양·오행의 기를 같이 하였기 때문에 기는 서로 가깝고, 그 어둡고 밝은 것과, 열리고 막힌 것이 매우 멀기 때문에 이는 절대로 같지 아니하다.
기가 서로 가까운 것은, 춥고 더운 것을 알고, 배고프고 배부른 것을 알며,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하며,
이(利)를 따르고 해(害)를 피하는 것 같은 것이니, 사람과 물이 모두 같다.
이(理)가 같지 않은 것은, 벌과 개미의 군신(君臣) 관계는 다만 이 의리의 한 가지만이 밝고,
범과 이리[狼]의 부자(父子) 관계는 다만 이 인(仁)의 한 가지만이 밝은 것 같은 것이다. 다른 것은 더 이상 미루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천지·음양의 변화는 바로 둘[兩]이 움직이는 맷돌과 같은데, 오르고 내리는 것과,
차고 빈 것과 세고 부드러운 것이 본래 일찍이 정지되지 않아서 양은 항상 차 있고, 음은 항상 이지러져 비어 있기 때문에 문득 고르지 아니한 것이다.
비유하면 맷돌[磨]이 도는데 이[齒]가 모두 고르지 아니하면 만 가지로 변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물(物)이 고르지 아니한 것은 물의 정(情)이다." 하였습니다.
○ 귀신이라는 것은 이기(二氣)의 본래 능(能)한 것이다. (장자정몽張子正蒙)
주자는 말하기를, "이기(二氣)로써 말하면 귀(鬼)라는 것은 음의 영묘한 것이요, 신(神)이라는 것은 양의 영묘한 것이다.
일기(一氣)로써 말하면 이르러서 펴는 것은 신(神)이요, 돌이켜서 돌아가는 것은 귀(鬼)이지마는, 그 실상은 한 가지 물(物)일 뿐이다.
본래 능(能)하다 한 것은 오고 가는 것과 오무리고 펴는 것이 이(理)의 자연스러운 것이요, 안배(安排)하여 조치(措置)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이기(二氣)는 곧 음양이요, 본래 능하다는 것은 그 영묘한 곳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귀신(鬼神)이라는 것은 천지의 공용(功用)이요 조화(造化)의 자취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공용(功用)이라 하는 것은 다만 발현된 것을 논한 것이니,
가령 추위가 오면 더위가 가고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봄에는 나고 여름에는 자라는 것은 다 이 조화(造花)의 미묘한 것으로써 볼 수도 없는 것이고
그 기의 오고 가며 오무리고 펴는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귀신이 아니면 곧 조화는 자취가 없다." 하였습니다.)
○ 장자는 말하기를, "물(物)이 처음 나면 기가 날로 이르러[至] 번성해 지고 물이 생겨서 이미 차면 기가 날로 반(反)하여 흩어진다.
이르는 것을 신(神)이라 하는 것은 펴지기 때문이요, 반(反)을 귀(鬼)라 하는 것은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천지 사이에서 사라지는 것은 귀(鬼)이고, 살아나는 것은 신(神)이며, 사는 것은 신이고 죽는 것은 귀이다.
사시(四時)에서는 봄·여름은 신이요, 가을·겨울은 귀이다.
사람에서는 혼(魂)은 곧 신이요, 백(魄)은 곧 귀이며, 말하는 것은 신이고 침묵하는 것은 귀이며,
동(動)하는 것은 신이고, 정(靜)하는 것은 귀이며, 부는[呼] 것은 신이고 빨아들이[吸]는 것은 귀이다." 하였습니다.
이 이하는 오로지 사람에게 있는 이치만을 말하겠습니다.
◆ 다음은 만물 중에서 사람이 귀하다는 데 대한 말씀
○ 사람이라는 것은 그 천지의 덕이고 음과 양의 교합한 것이며, 귀신의 모인 것이고 오행(五行)의 빼어난 기운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라 함은 천지의 마음이다. (예기)
장자는 말하기를, "천지의 덕이란 사람의 덕성(德性)이 천지의 성(性)과 같음을 말한 것이니, 사람이 귀하다는 것이 이것이다.
오행(五行)의 기를 품수하고 태어나서 만물 중 가장 영특하니, 이것이 그 빼어났다는 것이다.
대개 나는 것은[生] 곧 펴는 것이고, 마치는 것은[終] 곧 돌아가는 것인데, 한 물체가 그 처음과 끝을 겸하였으니, 이것이 귀신이 모인 것이다.
음과 양의 합치는 것과 귀신의 모이는 것과 오행의 기(氣)는 물이 날 때다 그러하지만 사람이 구비하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교화(敎化)는 다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용천 섭씨(龍泉葉氏)는 말하기를, "천지의 정성(情性)은 사람이 아니면 능히 체득하여 참여하지 못하며,
천지의 공용(功用)은 사람이 아니면 능히 살펴서 법(法)받지 못한다.
천지가 쉬지 않는 까닭을 인도(人道)를 말미암은 뒤에 보게 되기 때문에 사람이 천지의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본연의 성(性)에 대한 말씀
○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충(衷)을 백성에게 내리사 약(若)하여 떳떳한 성품이 있다. (상서탕고(商書湯誥))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황(皇)은 큰 것이요, 충(衷)은 중용이요, 약(若)은 순(順)하는 것이다.
하늘이 명(命)을 내려, 인·의·예·지·신의 이를 갖추어 편벽되거나 의지한 바 없는 것을 충(衷)이라 하고,
사람이 명을 품수[命]하여 인·의·예·지·신·의 이를 갖추어 마음과 같이 간직한 것을 성(性)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 유강공(劉康公)은 말하기를, "백성이 천지의 중(中)을 받아 생겨나는 것을 명(命)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하늘로 말하면 이것을 명(命)이라 하고, 사람으로 말하면 이것을 성(性)이라 하는데, 실상은 한 가지입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다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不忍]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였습니다, (「맹자」하동)
주자가 말하기를, "천지는 생물(生物)을 마음으로 삼고, 소생된 물은 각각 천지의 생물의 마음을 얻어서 마음으로 삼으니,
그래서 사람이 다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하였습니다.
사람이 다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금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홀연히 다 놀래어[] 측은한 마음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에게 교제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칭찬을 들으려는 것도 아니며,
그 비난하는 소리를 무서워서 그런 것도 아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사(乍)는 홀연히라는 뜻이요, 출척()은 놀래는 모양이다.
측(惻)은 근심하는 것이 간절한 것이요, 은(隱)은 아픈 것이 심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납[內]은 맺는다는 것이고, 요(要)는 구한다는 것이며, 성(聲)은 악명인 것이다.
(명(名)은 사람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악명(惡名)을 얻는 것입니다.)
갑자기 보았을 때에 문득 이 마음이 보는 것을 따라 발하는 것이고, 위의 세 가지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강자(腔子)에 가득한 것은 이 측은한 마음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강자(腔子)는 몸[軀殼]이라는 말과 같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럽거나 미워하는[羞惡]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辭讓)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른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수(羞)는 자기의 착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오(惡)는 남의 착하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다.
사(辭)는 풀어서 자기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이고, 양(讓)은 미루어서 남에게 양보하는 것이다. 시(是)는 착한 것을 알고 옳다고 하는 것이며,
비(非)는 그 악한 것을 알고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 네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측은 한 것을 논함을 인하여 그것을 모두 세어 말하기를 '사람이 만일 이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고 한 것이니,
반드시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하였습니다.
측은한 마음은 인(仁)의 실마리[端]이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실마리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실마리이고,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은 지(智)의 실마리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측은해 한다거나, 부끄러워하고 미워한다거나, 사양한다거나,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정(情)이요, 인·의·예·지는 성(性)이다.
단(端)은 실마리이다.
그 정이 발함으로 인하여 성의 본연(本然)을 볼 수 있으니, 마치 물이 중(中)에 있어 실마리가 밖에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사람이 이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사체(四體)를 가진 것과 같은데,
이 사단(四端)을 두고도 스스로 불능(不能)하다고 하는 이는 스스로를 해[賊]하는 자요, 그 임금을 불능하다고 이르는 이는 그 임금을 해하는 자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사체(四體)는 사지(四肢)이니,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불능하다고 하는 것은 물욕이 이를 가렸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사단(四端)이 나에게 있는 것을 모두 확충(擴充)할 줄을 알면, 불[火]이 타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샘물[泉]이 나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진실로 능히 이것을 충만하게 하면 사해(四海)를 보전할 것이요,
진실로 이것을 충만하게 하지 못하면 부모도 섬기지 못할 것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확(擴)은 미루어 넓히는 뜻이요, 충(充)은 가득한 것이다.
사단은 나에게 있어서 곳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에 나아가 미루어 넓혀서 본연(本然)의 도량을 충만하게 할 줄을 알면 날로 새로워져서 스스로 마지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능히 이것으로 말미암아 드디여 확충하면 사해(四海)가 비록 멀더라도 역시 나의 역량이 미치는 것으로 무난히 보전할 것이며,
능히 확충하지 못하면 비록 일이 지극히 가깝더라도 능하지 못할 것이다.
이 장(章)에 논한 것은 사람의 성정(性情)과 마음의 체용(體用)이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서, 각각 조리가 있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니
배우는 자가 여기서 돌이켜 구하고 묵묵히 생각하여 이것을 확충하면, 곧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을 다 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사단에서 신(信)을 말하지 않은 것은 이미 성심(誠心)이 있기 때문에
사단(四端)에는 곧 신(信)이 그 중(中)에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사단의 신(信)은 오행의 토(土)와 같다. 정한 위치도 없고, 이룬 이름도 없으며,
전일한 기(氣)) 없으나 수(水)·화(火)·금(金)·목(木)+이 이것을 기다려서 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토는 사행(四行)에 있지 않은데가 없고, 사시(四時)에는 곧 왕성[王]함에 붙으니, 그 이(理)가 역시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마음은 생하는 도(道)이다. 사람은 이 마음이 있고 이 형체가 갖추어져서 태어난다.
측은한 마음은 사람의 생하는 도로서 걸(桀)과 척(蹠)이라도 이것이 없이는 생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이것을 해쳐서 하늘을 멸할 뿐이다.
처음에는 물을 사랑할 줄 알지 못하다가 조금 있으면 차마 하는데 이르고, 나아가서는 살륙하는 데까지 이르며,
이것을 확충하면 살륙을 좋아하게 될 것이니, 어찌 사람의 이(理)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시」에 이르기를, "하늘이 만백성을 낳으니 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도다.
백성들의 간직한 성품이 있기에 아름다운 덕[懿德]을 좋아한다."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이 시를 지은 이는 그 도를 아는구나.
그러므로 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는 것이니 백성의 간직한 성품[]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시는 대아(大雅)·증민(烝民)의 편(篇)이다.
증(烝)은 무리이고, 물(物)은 일이며, 칙(則)은 법칙이요, 이()는 떳떳한[常] 것이고, 의(懿)는 아름다운 것이다.
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는 것은 귀와 눈이 있으면 총명의 덕이 있고,
부자(父子)가 있으면 사랑하고 효도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은 것인데, 이것은 백성이 간직한 바 떳떳한 성[性]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情)이란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이니, 사람의 성품이 착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만물은 모두 나에게 갖추었다.
주자는 말하기를, "크게는 군신(君臣)·부자(父子)와, 작게는 사물의 세미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당연한 이(理)가 성분(性分) 안에 한결같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성(性)은 이 태극의 혼연한 체(體)이므로 본래 명(名)자로 말하지 못한다.
다만 그 중에 만 가지 이치가 포함되었는데, 벼리[綱]가 되는 큰 이치가 넷이 있다.
그러므로 인(仁)·의(義)·예(禮)·지(智)라고 명한 것이다.
공자 때에는 성선(性善)의 이(理)가 본래 밝았으므로 비록 그 조목을 자세히 드러내지 않아도 그 말이 스스로 갖추어졌었지만,
맹자 때에 이르러서는 이단(異端)이 많이 일어나서 가끔 성(性)을 불선(不善)하다고 하므로,
맹자는 이 이가 밝혀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밝히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혼연히 전체(全體)라고만 하면 눈금 없는 저울[秤]이나 칫수 없는 자[尺]와 같아서 마침내 천하를 깨닫게 하지 못할 것이므로,
여기서 분별하여 말하되 한계를 넷으로 하여, 사단(四端)의 설이 성립되었다.
대개 사단이 발하지 않으면 비록 적연(寂然)히 동(動)하지 않으나 그 중에 스스로 조리가 있고 간가(間架)가 있으며,
농통(농통: 아직 그릇을 이루지 않은 것)하여 도무지 일물(一物)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외변(外邊)에서 감촉하면 내면(內面)에서 문득 응하여 사단이 발하는데 각각 면모(面貌)가 같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혼연한 전체(全體)의 가운데 찬연히 조리가 있는 것이 이러하니 성(性)의 선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사람의 사람됨이 천지와 병립(竝立)하여 삼자(三者)가 되는 까닭은
대개 형체는 크고 작은 것이 다르나 이(理)에는 크고 작은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인가 하면 인·의·예·지이다. 천도(天道)로부터 말하면 원(元)·형(亨)·이(利)·정(貞)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하나일 뿐이다.
사람은 천지와 더불어 본래 하나요, 둘이 아닌데 그 다르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은 무심(無心)한데 사람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천지의 쉬지 않는 명(命)은 예부터 항상 새로워서 원(元)하면 형(亨)하고, 형하면 이(利)하고, 이하면 정(貞)하며,
정하면 원(元)하여, 한번은 통(通)하고 한번은 복(復)하여 순환하여 틈이 없다.
사람은 날 때부터 다 이 이를 전부 갖추었으되 오직 그 형체의 누(累)가 있어서 물욕의 사사로움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측은한 마음이 발함에 있어 흔들리면 곧 인(仁)을 충실히 하지 못하고,
부끄럽다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발함에 있어 빼앗기는 것이 있으면 곧 의(義)를 충실히 하지 못한다.
공경(恭敬)(사양(辭讓)을 공경(恭敬)이라고 합니다.)과 시비(是非)의 발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맹자가 확충(擴充)하라는 말을 간절히 한 것이다. 대개 선한 실마리가 발하면 그 시초에는 매우 은미하다.
마치 음양의 기(氣)가 이지(二至: 동지와 하지)에서 시작되는데,
처음에는 다 묘연하여 나타나지 아니하다가 양(陽)이 점점 자라서 정월에 이르면,
곧 천지의 기가 화(和)하여 물(物)이 다 발달하고, 음(陰)이 점점 자라서 7월에 이르면 곧 천지의 기가 엄숙하여 물(物)이 다 수렴(收斂)하는 것과 같다.
천지가 만물을 생성(生成)하는 이치는 다 은미한 데서부터 나타나는 데로 이르는 것이니, 어느 해나 그렇지 아니한 것이 없다.
사람이 능히 천지의 마음을 체득하여 그 마음으로 삼고 그 선한 실마리가 발로함을 인하여 보양(保養)하고 부지(扶持)하여
그 침해하는 바를 제거하기를 불이 타는 것을 부채질하는 것같이 하고 샘물이 흐르는 것을 터 놓는 것과 같이 한다면
일념(一念)의 측은한 마음이 백세(百世)를 윤택하게 하고, 일념(一念)의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만백성을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요(堯)·순(舜)의 인(仁)과 탕(湯)·무(武)의 의(義)가 천지와 더불어 그 큰 것을 같이한 까닭은 능히 확충(擴充)하였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사람의 한 마음에는 만 가지 이치가 전부 갖추어져 있으니,
요·순의 인(仁)과 탕·무의 의(義)와 공(孔)·맹(孟)의 도(道)는 다 성분(性分)의 고유한 것입니다.
다만 이 기품(氣稟)이 앞에서 구애되고 물욕이 뒤로 함몰시켜 총명(聰明)한 사람이 혼미하여지고,
정대(正大)한 사람이 간사하게 되므로, 혼미하여 어리석은 중인(衆人)이 되어. 실상 새나 짐승과 다름이 없으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이는 그대로 공명하고 정대합니다.
다만 엄폐(掩蔽)되어 있을 뿐이며 끝내 이는 식멸(息滅)되지 않기 때문에 진실로 혼미한 것을 제거하거나
그 간사한 것을 끊어버린다면, 밖에서 빌리지 않더라도 요·순·탕·무·공·맹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비유한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있는 무진장의 보물(寶物)을 으슥한 땅에 묻어 놓고도 알지 못하여
빈한하게 구걸하면서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는데 만일 선각자(先覺者)가 나타나 보물이 매장된 곳을 알릴 경우,
독실히 믿어서 의심하지 않고 그 매장한 것을 발굴하게 되면 무진장의 보화가 다 자기의 소유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이치가 매우 명백한데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하니 슬픈 일입니다.
다만 이 마음에 이(理)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만 알 뿐이요, 그 이상으로 가리고 덮인 것을 힘써 제거하지 않는다면,
실은 보물이 매장된 곳도 알지 못하면서 나는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속여 말하는 것일 뿐이니 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유념(留念)하시옵소서.
◆ 다음은 기질의 성(性)에 대한 말씀
○ 형체가 있은 연후에 기질(氣質)의 성(性)이 있으니 이를 잘 반성하면 천지의 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기질의 성은 성으로 여기지 아니한다. (장자 정몽)
주자는 말하기를, "천지의 성은 오로지 이를 가리켜 말한 것이요, 기질의 성은 이(理)에 기가 섞인 것을 말한다.
다만 이 성(性)(본연의 성입니다.)이 있을 뿐인데 기질 가운데 있기 때문에, 기질을 따라서 스스로 하나의 성[一性]이 된 것이다. (기질의 성입니다.)
성을 물[水]에 비유하면 본래는 다 맑은 것인데 맑은 그릇에 담으면 맑고, 더러운 그릇에 담으면 혼탁해진다.
다만 맑게 다스리면 본연의 맑은 것이 있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기(氣)가 모여서 형체를 이루매 성(性)이 기질에 구애되어 순박(純駁)·편정(偏正)의 다른 것이 있으니, 이른바 기질의 성이다.
사람이 능히 선한 도리로 스스로 반성하면 곧 천지의 성이 다시 완전해질 것이기 때문에 기질의 성을 군자는 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대개 기질의 편곡[偏]함을 따르지 아니하고 반드시 그 본연의 선(善)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성은 하늘에서 나오고, 재(才)는 기질에서 나오니, 기질이 맑으면 재도 맑고, 기질이 흐리면 재도 흐려진다.
재에는 선(善)도 있고, 불선(不善)도 있지만, 성에는 불선이 없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성을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구비되지 아니하고,
기를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밝지 아니하나 이것을 둘로 하면 또한 옳지 않다." 하였습니다.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성의 선(善)한 것만 논하고 그 기품(氣稟)이 같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지혜롭고 어리석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불비(不備)하고 하였으며, 기품의 다른 것만 논하고 그 성(性)이 다 선(善)한 데 근거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 근본에 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불명(不明)이라고 하였다.
성이란 것은 기(氣)의 이(理)이고, 기란 것은 성의 질(質)이므로 원래 서로 떠나지 못하는 것인데 갈라서 둘로 하면 역시 잘못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은 이성(二性)이 아닙니다.
기질의 위에 나아가 단순히 그 이만을 가리켜 본연의 성이라 하고, 이와 기질을 합하여 기질의 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 다음은 심·성·정에 대한 통괄적인 말씀
○ 사람이 나서 정(靜)한 것은 하늘의 성이요, 물에 감응하여 동(動)하는 것은 성의 욕(欲)이니,
사물이 이르러 지(知)가 안[知] 뒤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나타난다. (예기(禮記) 하동)
유씨(劉氏)는 말하기를, "사람이 나서 고요한 것은 희·노·애·낙이 발하지 않은 중(中)인데
<이는> 천명(天命)의 성이요, 물에 감응하여 동하면 곧 성이 발하여 정(情)이 된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위의 지(知)자는 체(體)이고, 아래의 지(知)자는 용(用)이다." 하였습니다.
무엇을 인정(人情)이라고 하는가 하면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일곱 가지로서 이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이다.
정자는 말하기를, "천지가 정(精)을 쌓아서 오행(五行)의 우수한 것을 얻어 사람이 되므로, 그 본래는 참되고 정(靜)하며,
그 미발(未發)한 때에 오성(五性)을 갖추었으니, 인·의·예·지·신이라 하고, 형체가 이미 생기면 외물(外物)이 그 형체에 부딪쳐서 그 중(中)을 동(動)하게 한다.
그 중이 동하여 나온 것이 7정인데 희·노·애·구·애·오·욕이다.
정(情)이 이미 성하여 더욱 방탕하여지면, 그 성이 깎여 감해지기 때문에 선각자는 그 정(情)을 절제하여 중에 일치하게 해서,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성을 기르며, 어리석은 자는 곧 이것을 제재하지 못하여, 그 정을 방종하게 해서 편벽하고 간사해져서,
그 성을 질곡(桎梏)시키므로 망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이 애(愛)와 욕(欲)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물으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애는 널리 사랑하는 것이요, 욕은 반드시 얻는 데 뜻을 두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제(帝: 순임금)가 말하기를,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미하니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여야 진실로 그 중을 지키리라." 하였습니다.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 ○순(舜)이 우(禹)에게 명한 말.)
주자는 말하기를, "마음의 허령(虛靈)·지각(知覺)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이 다른 것은 혹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기며,
혹 성명(性命)의 정(正)에 근거하여 지각(知覺)하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은 위태로와서 편안하지 않고 혹은 미묘하여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 형체를 갖지 않은 이가 없기 때문에, 비록 뛰어난 이[上智]라도 능히 인심이 없지 아니하며,
또한 이 성이 없는 이가 없기 때문에, 비록 아주 어리석은 이[下愚]라도 능히 도심이 없지 아니하다.
두 가지가 마음 사이에 섞여 있는데, 이것을 다스릴 줄을 알지 못한다면, 곧 위태로운 것은 더욱 위태로와지고,
미묘한 것은 더욱 미묘하여져서 천리(天理)의 공평한 것이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정(精)이란 곧 이 두 가지 사이를 살펴서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요, 일(一)이란 곧 그 본심의 정(正)한 것을 지켜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니,
여기에 종사하여 조금의 빈 틈도 없어 반드시 도심이 항상 한 몸의 주재가 되고,
인심이 매양 청명(聽命)하게 한다면 곧 위태로운 것이 편안해지고 미묘한 것이 나타나서,
동정(動靜). 운위(云爲 : 말하고 행하는 것)가 자연히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차오(差誤)가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오봉 호씨(五峰胡氏)는 말하기를, "천리와 인욕은 행(行)함은 동일하되 정(情)이 다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다만 이 한 사람의 마음이 도리에 합하는 것은 천리이며, 정욕(情欲)에 따르는 것은 사람의 욕심인데,
마땅히 이 분계(分界)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잠실 진씨(潛室陳氏)는 말하기를, "이 말은 진실로 익혀 음미하여야 할 것이니, 음식이나 남녀의 욕정은 요·순도 걸(桀)·주(紂)와 같다.
다만 이치에 맞고 절도에 맞으면 천리가 되고, 이치에 어긋나고 절도에 어긋나면 절도에 어긋나면 곧 사람의 욕심이 된다." 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이, "음식 가운데 어느 것이 천리이며, 어느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까." 물으니,
주자는 대답하기를, "마시고 먹는 것은 천리이나, 미미(美味)를 요구하는 것은 사람의 욕심이다." 하였습니다.)
○ 면재 황씨(勉齋黃氏)는 말하기를, "요(堯)·순(舜)의 성스러움으로 제왕(帝王)의 높은 지위에 처하였으되
스스로 그 마음을 다스리는 바가 이러하였는데, 세상의 배우는 자가 이 마음의 중한 것을 알지 못하고,
정(情)에 따르고 욕심에 방종해서 교만하고 안일하며 방탕하여, 사려(思慮)할 때에 혹 올라가 하늘을 날고,
혹은 떨어져서 못에 빠지며, 혹은 뜨거워서 불이 타고, 혹은 추워서 얼음이 엉기니 어찌 민망하지 않겠는가.
성현의 교훈[垂訓]이 환하게 명백한데 배우는 자로서 어찌 깊이 생각하여 익혀 음미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습니다.
○ 서산 진시(西山眞氏)는 말하기를, "인심유위(人心惟危) 이하의 16자는 곧 요·순·우(禹)의 전해 준 심법(心法)이요, 만세 성학(聖學)의 근본이다.
선유(先儒)의 훈고나 주석(註釋)이 비록 많으나, 유독 주자의 설이 가장 정(精)하고 확실하다.
무릇 성색(聲色)과 취미(臭味)의 욕심은 이른바 인심이요, 인·의·예·지의 이(理)는 이른바 도심이다.
인심의 발하는 것은 섬봉(鋒 : 날카로운 병기.)이나 한마(悍馬 : 사나운 말)와 같아서 쉽게 억제하지 못하므로 위태롭다 하고,
도심의 발하는 것은 불이 처음으로 타거나 샘물이 비로소 흐르는 것과 같아서 쉽게 확충하지 못하므로 미묘하다고 한다."
(의리는 정미(精微)하여 보기 어렵기 때문에, 미(微)라 한 것이요, 쉽게 넓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서산(西山)의 설도 통(通)하여 따로 일설(一說)로 할 만하기 때문에 이것을 취하였습니다.)
오직 평소에 씩씩하고 공경한 것으로써 스스로를 견지하여, 한 생각의 좇아 일어난 바를 살펴서,
그 성색(聲色)과 취미(臭味)를 위하여 발한 것이라면, 곧 힘쓰고 지극히 다스려서 번성하여 자라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그 인·의·예·지를 위하여 발한 것이라면 곧 한 뜻으로 지켜서 변천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대개 이렇게 하면 이(理)·의(義)는 항상 간직되고 물욕이 물러날 것이니,
이것으로써 만 가지 변화를 응대(應對)하면 중(中)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만년(晩年)의 정론(定論)에서 인심을 사람의 욕심으로 삼지 않았으니, 대개 인심은 다만 형기(形氣)에서 난 것이라,
비록 성인이라도 역시 있는 것입니다. 인심이 주재가 되어 도심에 청명(聽命)하지 않아야만 사람의 욕심이 됩니다.
진씨(眞氏)의 설은 비록 인심을 바로 해석한 것은 아니나, 천리와 사람의 욕심을 논한 것이 분명하여 배우는 이에게 유익하므로 아울러 취하였습니다.)
마음은 성정(性情)을 통괄하는 것이다. (횡거어록(橫渠語錄))
주자는 말하기를, "통(統)은 주재한다는 뜻이다.
성은 마음의 이(理)요, 정은 마음의 용(用)이요, 마음은 성정의 주재이니, 곧 이(理)를 갖추어서 이 정(情)을 행하는 것이다.
지(智)로써 말하면, 시비(是非)를 아는 이치는 곧 성이요, 시비를 알고 시비를 하는 것은 정이요,
이 이를 갖추어 그 시비가 되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마음이다.
이 분별은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밀하게 살펴야 볼 수 있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마음의 전체가 맑게 허명(虛明)하여 만 가지 이치가 구비되어, 그 유행(流行) 이 동(動)·정(靜)에 관통하니,
그 미발(未發)한 전체로써 말하면, 성(性)이요, 그 이발(已發)한 묘용(妙用)으로써 말하면 정(情)이다.
그러나 다만 혼돈한 일물(一物) 중에 나아가서 그 이발과 미발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지 성(性)도 하나이고 마음도 하나이며,
정도 하나라는 것으로서 이렇게 현격(懸隔)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 소자(邵子)는 말하기를, "성(性)은 도의 형체요, 마음은 성(性)의 성곽[郭 : 성 밖의 큰 성]이며, 몸은 마음의 집이요,
물(物)은 몸의 주거(舟車)이다." 하였습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것이 거의 적은데[幾希], 서민은 그 다른 것을 버리고 군자는 이것을 간직한다." 하였습니다. (「맹자」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기희(幾希)는 적다는 뜻이다. 인물은 나면서부터 천지의 이를 같이 얻어서 성이 되고, 또 천지의 기도 똑같이 얻어서 형체가 되었지마는,
그 같지 않은 것으로써 사람은 다만 그 사이에서 형기(形氣)의 바른 것을 얻어서, 그 성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비록 조금 다르다고 하나 인물이 구분되는 까닭은 실로 여기에 있다. 뭇 사람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이를 버리니,
이름은 비록 사람이지마는 실상은 금수와 다를 것이 없다.
군자는 이것을 알고 보존하여 전긍척려(戰兢廬 : 조심하고 두려워함)하여 마침내 능히 그 받은 바의 다른 것을 온전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인물의 같은 것은 이(理)이고, (천지의 성은 인물(人物)이 하나입니다.) 같지 아니한 것은 마음이다.
(기(氣)에는 편정(偏正)·통색(通塞)이 있기 때문에 마음은 같지 않습니다.)
인심은 허령(虛靈)하여 밝지 않은 것이 없고, 금수는 어두워서 다만 한두 가지의 밝은 것만 있는데,
부자(父子)가 서로 사랑한다거나 자웅(雌雄)이 서로 분별이 있는 것 같은 유(類)이다.
사람의 허령은 다 미루어 나가는데 금수는 문득 미루어 나가지 못한다.
사람이 만약 사사로운 욕심으로 그 허령을 가린다면 이는 금수이니,
사람과 금수는 다만 이런 사소한 데서 구분되기 때문에 기희(幾希)라고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범씨(范氏) (준(浚)입니다.) 심잠(心箴)에 이르기를, "망망(茫茫)한 천지는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끝이 없다.
사람이 그 사이에 묘연하게 몸을 두었으니, 이 몸의 작은 것은 큰 창고의 쌀알과 같다.
삼재(三才)에 참여하게 된 것은 오직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누가 이 마음이 없었겠는가마는, <이> 마음이 물욕에 끌리어 짐승이나 새와 같이 된다.
오직 입·귀·눈과 수족은 동(動)·정(靜)하는 사이에서 틈을 타 그 마음의 병통이 된다.
한 마음의 가는[微] 것을 뭇 욕심이 침공하니, 그 간직하는 이가 거의 드물다.
군자는 정성을 다하여 잘 생각하고 잘 공경하므로 마음이 태연하여 백체(百體)가 명령을 따른다." 하였습니다.
그 마음을 다한 이는 그 성(性)을 알기 때문이니 그 성을 알게 되면 곧 하늘을 알게 된다.
주자는 말하기를, "마음이란 사람의 신명(神明)인데 뭇 이치를 갖추어서 만 가지 일에 응하는 것이요,
성이란 마음의 갖춘 바 이치이요, 하늘은 또 이(理)의 좇아서 나온 바이다. (하늘이 곧 이理이니, 이 이는 성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하늘은 넓어서 가가 없는데, 성(性)은 그 온전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의 본심은 그 체가 확연하여 또한 한량이 없다.
그러나 오직 그 형기의 사사로움에 질곡(桎梏)되고, 듣고 보는 것의 작은 것에서 막히어, 가려서 다하지 못한 바가 있으니,
사람이 능히 사물에 나아가서 그 이(理)를 궁구하여 어느 날 회통하고 관철해서,
남기는 바가 없는 데 이르면 곧 그 본연의 체(體)를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그 마음의 전체를 극진히 하여 부진(不盡)한 것이 없는 이는, 반드시 이(理)를 궁구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이일 것이니,
이미 그 이를 알면 곧 그 좇아 나온 바도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 대학(大學)의 서(序)로써 말하면, 지성(知性)은 곧 물격(物格)을 이른 것이요, 진심(盡心)은 곧 지지(知至)를 이른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물(物)이나 몸에 있는 이는 다 마땅히 궁구해야 할 것이지마는, 물에 있는 것은 넓기 때문에 대략 말하고,
몸에 있는 것은 긴요하기 때문에 좀 자세히 말한 것입니다.
몸에 있는 것은 상세히 하여야 하고, 물에 있는 것은 간략하게 하여도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가까히 생각하고 유(類)를 미루어 다하지 않은 것이 없으면 사소한 한 가지 물이나 한 가지 일까지도
그 이치를 통찰하지 못한 것이 없을 것이데, 하물며 천지의 광대하고 귀신의 미묘한 것이야 상세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또 살피건대, 선유(先儒)의 심(心)·성(性)·정(情)의 설은 자세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
러나 각각 위주하는 바가 있어서 말이 한결같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뒷사람들이 말에 얽매여 뜻에 혼란을 일으키는 이가 많습니다.
'성이 발하여 정이 되고, 마음이 발하여 뜻이 된다.'고 하는 것은, 뜻이 각각 존재함이 있으며 심·성을 두 가지 작용으로 나눈 것이 아닌데,
뒷사람들이 마침내 정과 뜻을 두 갈래로 생각하였습니다.
(성이 발하여 정이 된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요, 마음이 발하여 뜻이 된다는 것은 성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은 성을 극진히 할 수 있으나, 성은 마음을 검속할 수 없고, 뜻은 정을 운행할 수 있으나 정은 뜻을 운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을 주로 하여 말한다면 성에 속하고, 뜻을 주로 하여 말한다면 마음에 속하지마는, 실상은 성은 마음이 미발(未發)한 것이요,
정과 뜻은 마음이 이발(已發)할 것입니다.)
사단(四端)은 다만 이만 말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이와 기를 합하여 말한 것이며, 두 가지 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뒷사람들은 마침내 이와 기를 서로 발한다고 생각하였으니,
(4단은 성의 본연의 성을 말한 것과 같고, 7정은 성의 이기(理氣)를 합하여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질(氣質)의 성은 실은 기질 가운데 있는 본성이고, 두 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7정은 실로 4단을 포괄한 것이요, 두 정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두 성이 있어야 비로소 두 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의(情意)를 두 갈래로 생각하는 것과 이기(理氣)가 서로 발한다는 설을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개 마음의 체(體)는 성이요, 마음의 용(用)은 정인데, 성정 밖에 또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자는 말하기를, "마음이 동하는 것이 정이다." (주자의 말은 여기서 그칩니다.) 하였습니다.
정은 물(物)에 감동하여 처음으로 발하는 것이요, 뜻은 정으로 말미암아 계교(計較)하는 것이니 정이 아니면 뜻이 말미암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자는 말하기를, "뜻은 정에 말미암아야만 작용한다.
그래서 마음이 적연(寂然)히 부동(不動)한 것을 성이라 하고, 마음이 감동하여 드디어 통하는 것을 정이라 하며,
마음이 감수된 것에 따라 추출하고 헤아려 생각하는 것을 뜻이라고 한다." 하였으니,
마음과 성이 과연 두 작용이겠으며, 정과 뜻이 과연 두 갈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묻기를, "뜻은 본연의 정에 의하여 계교하는 것이지마는,
사람이 아직 물과 접촉하지 아니하여 소감所感이 없을 때에도 염려의 발단發端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정에 의한다고 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도 옛날에 발단되었던 정을 축출한 것이다.
그 때를 당하여 비록 아직 사물에 접촉하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실상 옛날에 느꼈던 사물을 사념하는 것이니,
어찌 정에 의하는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오성(五性) 밖에 다른 성은 없고, 칠정(七情) 밖에 다른 정은 없습니다.
맹자가 7정 가운데에서 그 선정(善情)만 적출하여 4단으로 지목한 것이요, 7정 밖에 또 4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의 선(善)·악(惡)이 그 어느 것인들 성에서 발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 악(惡)이란 것은 본래 악이 아니요, 다만 형기에 음폐되어 지나친 것과 미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악이 됩니다.
그러므로 정자는 말하기를, "선·악은 다 천리이다." 하였고, 주자는 말하기를, "천리로 인하여 사람의 욕심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4단과 7정이 과연 두 정이요, 이(理)와 기(氣)가 과연 서로 발하는 것이겠습니까.
(정(程)·주(朱)의 설을 얼핏 보면 매우 놀라운 듯하나, 깊이 생각하면 의심이 없습니다.
사람의 희·노·애·낙은 성인이나 미치광이거나 다 같이 가지고 있는데, 그 희·노·애·낙하는 소이연(所以然)의 이치는 성입니다.
그 희·노·애·낙을 아는 것은 마음이요, 사물을 만나 희·노·애·낙하는 것은 정입니다.
마땅히 기뻐할 것은 기뻐하고 마땅히 화낼 것을 화내는 것은 정의 선(善)한 것이요,
마땅히 기뻐하지 않을 것을 기뻐하거나 마땅히 화내지 않을 것을 화내는 것은 정의 불선(不善)한 것입니다.
정의 선한 것은 청명한 기를 올라타고 천리에 따라 곧장 나오니,
그것이 인(仁)·의(義)·예(嘉)·지(智)의 실마리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4단으로 지목하였습니다.
정의 불선한 것은 역시 이에 근거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더럽고 흐린 기에 음폐된 바 되어,
도리어 이를 침해하니 그것이 인·의·예·지의 실마리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4단이라고 말할 수 없을 뿐이요, 성에 근거하지 않고 따로 두 근본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이른바, "선악(善惡)은 다 천리요, 천리에 따라 인욕이 있다." 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욕을 천리라고 한다면 이것은 도둑놈을 아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여름철에 고기젓[=肉醬]이 변하여 구더기가 생기는 것과 같은데, 구더기는 본래 고기젓에서 생겼습니다.
그러나 바로 구더기를 고기젓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구더기는 고기젓에서 생겼지만 도리어 고기젓을 해칩니다.
인욕도 천리에서 나왔지마는 도리어 천리를 해치니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대개 심(心)·성(性)을 두 용[二用]으로 생각하고 4단과 7정을 두 정[二情]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 이(理)·기(氣)에 있어서 투철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대체로 정이 발할 때에 발하는 것은 기요, 발하는 까닭은 이입니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할 까닭이 없으니, 이·기는 섞이어 원래부터 서로 떠나지 못합니다.
만일 이(離)·합(合)이 있으면 동(動)·정(靜)도 끝이 있고, 음·양도 처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란 것은 태극이요, 기란 것은 음양인데, 이제 태극과 음양이 서로 동한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태극가 음양이 서로 동할 수 없으면 이와 기가 서로 발한다는 것이 어찌 오류가 아니겠습니까.옛
날에 어떤 사람이 미발(未發) 이전의 마음과 성의 구별을 물었더니, 주자는 말하기를, "마음에는 체(體)와 용(用)이 있으나,
미발은 마음의 체요, 이발은 마음의 용인데, 어떻게 지정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과 성의 두 가지 현상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과 성에 두 가지 현상이 없으면 4단과 7정도 어찌 두 가지 정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묻기를, "주자는 말하기를, '정(情)에는 선(善)·악(惡)이 있지마는 성은 완전히 선하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기질의 성도 불선이 없는 것인가."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기질의 성은 본래 선·악의 같지 않은 것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성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미발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사람은 비록 지극히 악(惡)한 자라도 미발인 때에는 본래 불선이 없다가 비로소 발하면 바로 선·악이 있게 된다.
그 악한 것은 기질과 물욕의 구애나 음폐하는 데 말미암는 것이요, 그 성의 본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성은 완전히 선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또, "인심과 도심이 이미 두 가지 마음이라면 4단과 7정도 어찌 두 가지 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으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이것도 말에 얽매여 뜻을 미혹하는 유이다. 마음은 하나인데 어찌 둘이 있겠는가.
다만 주재하여 발하는 것에 두 가지 이름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말하기를, '위(危)란 것은 인욕의 싹이요, 미(微)란 것은 천리의 깊고 묘한 것이다.
마음은 하나인데 정(正)과 부정(不正) 때문에 그 이름을 달리할 뿐이요, 도심을 한마음으로 삼고, 인심을 한마음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 말을 본다면, 마음이 두 가지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이, "천리로 인하여 인욕이 있다는 설은 의심스럽다." 하므로, 신이 이것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천리와 인욕은 처음부터 두 근본이 아니요, 성 가운데는 다만 인·의·예·지 네 가지가 있을 뿐인데, 인욕이 어찌 성 가운데에 뿌리를 박고 있겠는가.
다만 그 기에는 청(淸)·탁(濁)이 있어서 수치(修治)와 혼란(混亂)이 같지 않기 때문에 성이 발하여 정이 될 때에 지나침과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인(仁)이 어긋날 때에는 애정이 흘러서 탐욕이 되고, 의(義)가 어긋날 때에는 단제(斷制)가 흘러서 잔인(殘忍)이 되며,
예(禮)가 어긋날 때에는 공경이 흘러서 아첨이 되고, 지혜가 어긋날 때에는 지모(智謀)가 흘러서 사기(詐欺)가 된다.
이것을 미루어 그 나머지를 알 수 있다.
본래 다 천리이지마는, 흘러서 인욕이 되는 것이므로 그 근본을 미루어본다면 천성의 선(善)을 알 수 있고,
그 말단을 살펴본다면, 인욕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주자가 학자에게 현저히 보여 준 것이 역시 적절하다." 하였습니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마음은 하나인데 정이라고도 하고, 지(志)라고도 하며,
의(意)라고도 하고, 염(念)이라고도 하며, 여(廬)라고도 하고, 사(思)라고도 하니, 어찌 그 이름이 번다하여 한결같지 않는가." 하여
신이 대답하기를, "정이라는 것은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 동(動)하는 것이다.
동하면 바로 정으로 자유로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평상시에 함양(涵養)·성찰(省察)의 공이 지극하면, 정의 발하는 것이
자연히 이(理)에 맞고 절(節)에 맞지마는, 만일 마음을 다스리는 힘이 없으면 흔히 맞지 않는 것이 있다.
지(志)란 것은 마음의 가는 바가 있는 것을 이른 것이니, 정이 이미 발하여 그 추향(趨向)을 정한 것이다.
선(善)으로도 가고 악(惡)으로도 가는 것이 모두 지(志)이다.
의(義)라는 것은 마음에 계교가 있는 것을 말하는데, 정이 이미 발하여 생각도 하고 운용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정은 주거(舟車)와 같고 의(意)는 사람이 그 주거를 부리는 것과 같다.' 하였다.
염(念)·여(慮)·사(思) 세 가지는 다 의(意)의 별명인데, 사(思)는 비교적 중(重)하고, 염(念)과 여(慮)는 비교적 경(輕)하다.
의(意)는 거짓으로 할 수 있지마는, 정은 거짓으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의(誠意)라는 말은 있지마는, 성정(誠情)이라는 말은 없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지(志)와 의(意)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뒤인가.
" 이에 대답하기를, "지(志)와 의(意)가 정하여진 것이요, 의란 것은 지가 아직 정하여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지가 의의 뒤에 있는 듯하나 지가 먼저 서면 의가 뒤따라 생각하는 것도 있고,
의가 먼저 경영되고 지가 따라 정하여지는 것도 있으니,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다.
정(情)·지(志)·의(意)는 다 한 마음의 작용인데, 그 주재하는 바를 따라 각각 그 이름을 세우는 것이요, 여러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인심과 도심은 정(情)인가, 의(意)인가.
" 이에 대답하기를, "정과 의를 총괄하여 말한 것인데, 발하여 나오는 것은 정이요, 헤아려 생각하는 것은 의이다.
4단은 다만 도심을 가리킨 것이요, 7정은 인심과 도심을 총칭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에게, "이(理)와 기(氣)는 1물인가, 2물인가." 하여
신은 대답하기를, "예전 사람들의 해석을 참고한다면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이와 기는 혼연히 간격이 없어서 원래부터 서로 떠나지 못하여 2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자는 말하기를, '기(器)도 도(道)요, 도도 기이다.' 하였다.
비록 서로 떠나지 못하더라도 혼연한 가운데서 서로 섞여 있지 않으니 1물이라고 가리킬 수 없으므로,
주자는 말하기를, '이(理)는 이(理)요, 기(氣)는 기(氣)니, 서로 섞여 있지 않다.' 하였다."
두 가지 말을 합하여 음미하고 사색한다면, 이(理)·기(氣)의 묘한 것을 거의 알 것이다.
대체로 말한다면 이는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이통 기국(理通氣局)이요, (이통(理通)이란 천지 만물이 동일한 이라는 것이요,
기국(氣局)이란 천지 만물이 각각 일기(一氣))는 것입니다.
이일분수(理一分殊)란 것은 이는 본래 하나인데, 기가 고르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소속한 바에 따라 각각 한 이가 되니,
이것이 분수인 이유요, 이(理)가 본 일(一)이 아니란 것은 아닙니다.)
이는 무위(無爲)인데, 기는 유위(有爲)하기 때문에 기발 이승(氣發理乘)이다.
(음·양이 동(動)·정(靜) 하는데, 태극이 이것을 올라타니 발하는 것은 기이며, 그 기(機)를 올라타는 것은 이(理)입니다.
그러므로 인심은 지각[覺]이 있고, 도체(道體)는 무위(無爲)입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도를 넓힐 수 있으되, 도는 사람을 넓힐 수 없다." 하였습니다.)
무형(無形)·무위(無爲)이면서 유형(有形)·유위(有爲)의 주재가 되는 것은 이요, 유형·유위이면서 무형·무위의 기(器)가 되는 것은 기이다.
이것은 이·기를 궁구하는 큰 실마리이다." 하였습니다.
○ 또 묻기를, "이에는 체(體)도 있고 용(用)도 있는데 어떻게 분변하여야 하는가." 하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중용(中庸)에, '군자의 도(道)는 비(費)하고도 은(隱)하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이것을 해석하여, '비(費)는 용(用)의 넓은 것이요, 은(隱)은 체(體)의 미미한 것이다.' 하였다.
사물에 흩어져 있는 이의 당연한 것은,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사랑이 되고, 아들에 있어서는 효도가 되며, 임금에 있어서는 의리가 되고,
신하에 있어서는 충성이 되는 따위인데, 이것이 비(費)요, 용(用)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 까닭은 지극히 은미한 이치가 있으니 이것이 그 본체(本體)이다.
이는 사물에 존재하는 것을 말한 것이요, 도는 유행하는 것을 말한 것인데, 그 실제는 하나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차이에 대한 말씀
○ 맹자는 말하기를, "힘으로 인(仁)을 빌리는 자는 패(覇)인데 패는 반드시 큰 나라를 두며,
덕(德)으로 인을 행하는 자는 왕(王)인데 왕은 큰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탕(湯)은 70리로써 하고 문왕(文王)은 100리로써 하였다." 했습니다. (「맹자」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힘이란 토지와 강한 군사의 힘이다.
인을 빌리는 자는 본래 이 마음이 없으나 그 일을 빌어서 공(功)으로 삼는 자이다.
패란 것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나 진(晋)나라 문공(文公)같은 이를 말한다.
덕으로 인을 행하면 나의 마음에 얻은 것으로부터 미루기 때문에 가는 데마다 인 아닌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비록 천하의 일을 공적으로 하더라도, 만약 사의(私意)를 가지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 사(私)이다." 하였습니다.
힘으로 사람을 굴복하게 하는 이는 심복(心服)한 것이 아니라 힘이 넉넉하지[贍] 못한 것이요,
덕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사람은 진심으로 기뻐서 굴복하는 것이니, 칠십자(七十子)가 공자에게 굴복하는 것과 같다.
시에 이르기를, "'서(西)로도 동으로도 남으로도 북으로도, 생각하여 굴복하지 않는 이 없다.' 한 것은 이런 것을 이른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섬(贍)이란 넉넉하다는 뜻이다. 시(詩)는 대아문왕유성(大雅文王有聲)편이다.
왕(王)과 패(覇)의 마음은 성(誠)과 위(僞)가 같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응하는 것도 같지 않은 것이 이러하다." 하였습니다.
○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공자는 필부(匹夫)로서 지위를 얻지 못하여도 칠십자(七十子)가 종신토록 따랐는데,
이것은 누가 시켜서 그랬겠는가. 이는 진심으로 기뻐서 굴복한 것이니, 왕자(王者)가 사람을 복종하게 하는 것도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 추씨(鄒氏)는 말하기를, "힘으로써 사람을 굴복시키는 이는 그 뜻이 사람을 굴복시키는 데 있으므로,
사람이 감히 굴복하지 아니하지 못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굴복시키는 이는 그 뜻이 사람을 굴복시키는 데 있지 아니하나, 능히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옛날부터 왕(王)과 패(覇)를 논한 이가 많으나 이 장(章)과 같이 매우 절실하고 저명(著明)한 것은 있지 않다." 하였습니다.
어진[仁] 이는 그 의리[誼]를 바르게 하고 이(利)는 꾀하지 않으며, 그 도를 밝히고 공효는 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니(仲尼 : 공자의 자字)의 문하에서는 오척 동자(五尺童子)라도 오패(五覇)를 일컬음을 부끄러워하였으니,
그 속이는 힘[詐力]을 먼저하고 인의(仁義)를 뒤에 하였기 때문이다. (전한서前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맹자 이후에 능히 오패(五覇)를 배척한 이는 오직 동중서(董仲舒)이다.
대개 어진 이는 의리를 바르게 할 뿐이요 이(利)가 있고 없음은 논하지 않으며, 도를 밝힐 뿐이요 공효가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꾀하지 않는다.
의리는 합당한 이(理)이요, 도는 통행(通行)하는 길이니 그 실제는 하나이다.
패도(覇道)를 하는 자는 오직 이(利)만을 꾀하고 의리는 돌보지 않으며,
오직 공효만을 꾀하고 도는 돌보지 않으니 이것이 공자의 문하에서 내치게 된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신종(神宗)에게 말하기를, "천리(天理)의 바른 것을 얻고, 인륜(人倫)의 지극한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요·순의 도요,
그 사사로운 마음으로 인의(仁義)의 벽됨에 의지하는 것은 패자의 일입니다.
왕자의 도는 숫돌과 같이 평평하여 인정(人情)에 근거하고 예의에서 나오기 때문에, 한 길[大路]을 밟고 가는 것과 같아서
다시 돌거나 구부러지는 일이 없지만, 패자의 도는 험란하여 구부러진 길 가운데 거꾸러지고 엎어져서 끝내 요·순의 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심으로 하여 왕도를 하면 곧 왕이 되고, 빌어서[假] 패도를 하면 곧 패(覇)가 됩니다.
이 두 가지는 그 도가 같지 않은 데 그 처음을 살펴야 할 뿐입니다.
「주역」에 이른바, '그 차이[差]는 호리(豪釐)와 같으나 천리나 어긋난다.'는 것과 같으니, 그 처음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선성(先聖)의 말씀을 생각하시고 인사(人事)의 이(理)를 살피시되, 요·순의 도가 자신에 갖추어진 것을 알아서 몸에 돌이키고,
성실하게 하여 미루어 사해(四海)에 미친다면 곧 만세(萬世)에 다행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이단(異端)의 폐해에 대한 말씀
○ 공자는 말하기를, "이단(異端)을 전공(專攻)하면 해로울 뿐이다." 하였습니다. (논어)
범씨(范氏)는 말하기를, "공(攻)이란 오로지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석(木石)이나 금옥(金玉)을 다스리는 장인[工匠]을 공(攻)이라고 한다.
이단은 성인의 도가 아니요 따로 한 일단(一端)을 말하는 것이니, 양(楊)·묵(墨)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천하를 거느리되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데 이르게 되니, 오로지 다스려서 정밀하고자 하면 해됨이 심하다." 했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오직 오로지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것뿐만 아니다. 문득 간략히 이해하여도 아니된다.
다만 자기의 학문이 정(定)해져 이단을 보게 되면 그 병통을 알게 된다." 하였습니다.
○ 맹자는 말하기를, "양씨(楊氏)는 나만 위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없는 것이요,
묵씨(墨氏)는 평등하게 사랑하였으니 이는 아비가 없는 것이므로,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면 이것은 금수이다." 하였습니다. (「맹자」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양(楊)·주(朱)는 다만 자기 몸만을 알고 다시 몸을 바치는[致身] 의리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임금이 없는 것이며 묵적(墨翟)은 사랑이 평등하여 그 지친(至親)을 뭇 사람과 다름없이 보았으니 아비가 없는 것이다.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음은 인도(人道)의 절멸(絶滅)이다. 그러므로 역시 금수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능히 양(楊) · 묵(墨)을 막으려 하는 이는 성인의 무리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참으로 능히 이 양·묵의 설을 막는 자는 그 추향(趨向)하는 바가 바르므로, 비록 도를 알지 못하더라도 역시 성인의 무리이다.
대개 사설(邪說)이 정(正)을 침해하면 사람마다 이를 공격할 수 있으며, 반드시 성현이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춘추(春秋)의 법에는 난신(亂臣)이나 적자(賊子)는 사람마다 벨 수 있으며, 반드시 사사(士師)라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 노자(老子)를 배우는 이는 유학(儒學)을 배척하고 유학은 역시 노자를 배척하니,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꾀하지 못한다. (사기史記)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노자(老子)의 글은 포괄한 바가 많다.
그의 무위(無爲)·무욕(無慾)은 이(理)에 가까운 말이라 군자가 취하고, 그의 양생(養生)의 말은 방사(方士 : 신선술을 하는 사람)들이 숭상하는 것이요,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준다는 것은, 음모(陰謀)의 말이라 병가(兵家)가 숭상하며,
그 사물을 조적(粗迹)으로 삼고 공허(空虛)를 묘용(妙用)으로 삼는다는 것은 청담(淸談)하는 이가 모방하였다.
그 이(理)에 가까운 것을 가지고 말하면 진실로 취할 바가 있으나, 모두 우리 성인의 소유한 것이요,
이 이하로는 일편(一偏)·일곡(一曲)의 학문으로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양생(養生)의 설은 신선(神仙) 방약(方藥)의 나온 바요, 음모의 술(術)은 신(申)·상(商)·한비(韓非)가 근거한 것이요,
청담의 화(禍)는 왕필(王弼)·하안(何晏)에 이르러서 지극하였는데, 모두 세주(世主)를 미혹하여 어지럽히고 생민(生民)을 해하여 죽이었다.
비록 노장(老壯)의 학문이라도 처음에는 여기에 이르지 않았으나 근본에서 조그마한 차이 때문에 그 유폐가 심하니,
이로써 말한다면 어찌 요·순·주(周)·공(孔)의 도로 말미암아 폐단이 없는 것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 도기(導氣)한다 말하는 어떤 이가 정자(程子)에게, "당신도 역시 술(術)이 있는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일찍이 여름에는 갈(葛)옷을 입고 겨울에는 핫옷을 입으며,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뎐 마시며,
알맞게 즐기어 욕심을 조절하며, 심기(心氣)를 안정하게 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또, "신선(神仙)의 설이 있는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말하자면 백일(白日)에 비승(飛升)하는 유례는 없으나,
산림(山林)속에 살면서 몸을 보전하고, 기를 연마하여 나이를 연장하고 목숨을 보전할 수는 있다.
비유한다면, 화롯불을 바람 결에 두면 쉽게 타고 밀실(密室)에 두면 잘 타지 않는 이치와 같다. " 하였습니다.
또 "성인이 능히 이러한 일을 하는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천지 사이에 하나의 도적이다.
조화(造化)의 기밀을 도둑질하지 않고서야 어찌 능히 나이를 연장하겠는가.
만일 성인이 하실 것이라면주공(周公)·공자(孔子)도 이것을 하였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불교(佛敎)라는 것은 이적(夷狄)의 한 법(法)이다. (창려문집(昌黎文集))
물헌웅씨(勿軒熊氏)는 말하기를, "<불교는> 후한(後漢) 때에 중국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연(緣)과 업(業)을 논하여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는 데 불과할 뿐이었는데,
그 뒤로 심성(心性)을 설하여 비록 총명한 선비도 역시 현혹하였으니, 학자는 힘껏 살펴서 밝게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불씨(佛氏)의 말은 양(楊)·묵(墨)에 비한다면 더욱 이(理)에 가까와서 그 폐해는 더욱 심하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음성(淫聲)이나 미색(美性)처럼 멀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점차로 그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 (정씨유서(程氏遺書) 명도(明道)선생의 말.)
주자는 말하기를, "양·묵은 학설이 천박하여 사람을 미혹하지 못하지마는 불씨(佛氏)는 가장 정미하여 사람을 경동케 하므로
그 설을 따름이 깊을수록 더욱 사람을 해친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석씨(釋氏)의 설을 만약 궁구하여, 버리고 취하려 한다면, 그 설을 궁진하지도 못하고 이미 화하여 부처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다만 그 자취에서 상고해야 할 것이다.
그 설교(說敎)하는 것이 이러하니, 곧 그 마음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 마음은 취하고 그 자취를 취하지 않기는 어렵다.
이 마음이 있으면 곧 이 자취가 있는 것이다. 왕통(王通)56)이 말하기를, "마음과 자취가 다르다"고 함은 난설(亂說)이다.
그러므로 자취에서 그것이 성인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단정하는 것이 좋다.
만일 일치한 것이 있다면 곧 우리의 도에 이미 있는 것이요, 불일치한 것이 있다면 진실로 취하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정해지면 문득 간편하며 쉬울 것이다." 하였습니다.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이 말은 비록 처음 배우는 자로 마음을 정하지 못한 이를 위하여 세운 것이나,
맹자가 양(楊)·묵(墨)을 배척한 것도 역시 그 자취를 상고하고, 그 마음을 미루어서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데가지 극진히 한것에 불과한 것이니,
이것이 실로 이단을 분별하는 요령이다." 하였습니다.)
○ 왕씨(汪氏)는 말하기를, "정(程)·주(朱)의 시대에도 유학(儒學)이 불선(佛禪)에 유전(流轉)된 이가 있었는데,
지금의 학자는 이에 대하여 일절 말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정·주의 공적이 크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불씨(佛氏)의 설은 정미한 것도 있고, 조잡한 것도 있습니다.
조잡한 것은 다만 윤회응보(輪廻應報)57)의 설로서 죄와 복을 확장시키고,
우매한 백성을 유혹 협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양(供養)을 분주하게 시킬 뿐이지마는, 그 정미한 것에 있어서는 극히 심성(心性)을 논하였는데,
이(理)를 마음으로 인정하여 마음을 만 가지 법칙의 근본이라 하고, 마음을 성으로 인정하여 성(性)을 보고 듣는 작용이라 하며
적멸(寂滅)을 종지(宗旨)로하여 천지 만물을 환망(幻妄)이라 하고, 출세(出世)를 도로하여 윤리 도덕을 질곡(桎梏)이라 하였습니다.
그 공부의 요점은 문자(文字)를 내세우지 않고 바로인심을 가리키며, 성(性)을 보아 불(佛)을 이룬다하여
갑자기 깨달은 뒤에 비로소 점점 닦는데〔修〕, 만일 뛰어난 사람이면 바로 깨닫고 바로 닦는 사람도 있습니다.
달마(達磨)58)가 양무제(梁武帝) 때에 중국으로 들어와 비로소 그 도를 전하였는데, 선학(禪學)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였는데, 그 무리가 천하에 가득차서 양미순목(揚眉瞬目)하고
방할대소〔棒喝大笑: 선가에서 문답하는 것〕함으로서 서로 인증(印證)하였습니다.
대개 무의(無意)로써 도를 얻는 것으로 삼아 선악(善惡)은 논하지 않았으며, 만일 유의(有意)로써 <도를> 얻으면 다 망령된 견해하고 합니다.
반드시 마음대로 행하여 의사(意思)를 사용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진실한 견해라고 합니다.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이는 반드시 한 귀 두귀의 의미없는 말을 (구자(狗子) 무불성(無佛性)과 정전(庭前) 백수자(栢樹子)와 같은 유(類)입니다.)
무한한 묘리(妙理)로 삼아, 드디어 크게 위심하여 마음을 오로지하여 궁구하고 끊임없이 공을 쌓아서 고요하게 좌정(坐定)한 끝에,
심성(心性)의 그림자를, 방불하게 생각할 무렵에 대략 보고는 드디어 이것을 할연히 크게 깨달았다고 여겨 미친 듯이 방자해 하며, 할 일을 마쳤다고 말합니다.
송(宋)나라 시초까지도 그 무리들이 아직 치열하였는데, 정(程)·주(朱)가 배척해서 맑게 한 뒤로부터는그 세력이 비로소 쇠퇴하여
지금은 선학(禪學)이 거의 절멸하였습니다.
또 육상산(陸象山)이 주자와 같은 세대에 출생하여 치지(致知)의 공을 배격하여, 지리하고 번잡하여 진리를 잃는다고 여겨
오로지 본심(本心) 공부만 하였는데, 이것도 함양하는 데는 도움이 없는 것은 아니나 배우는 자는 반드시 지식과 실천을 병행하여야 합니다.
만일 도리도 모르고 시비도 가릴 줄 모른다면 마음을 보존한다는 것이 무엇에 의거 하겠습니까.
만일 정좌(靜坐)만을 한다고 모든 진리가 스스로 밝혀진다면, 공자는 어찌하여 반드시, "문(文)에 박학하여야 한다." 하였겠으며,
자사는 어찌하여 반드시, "학문에 연유하여야만 한다." 하였겠습니까.
이것은 피음(淫)·사둔(邪遁)의 선학의 설과 가깝지 않겠습니까.
상산(象山)은 이미 죽었으나 그 학풍은 끊어지지 않아 지금은 주자의 정통적인 학문과 병립(竝立)하여 서로 대항하니,
근로(勤勞)를 싫어하고 간편한 것을 즐기는 무리들은 서로 심오하고 황홀한 설을 만들어 그들과 부합합니다. 아, 그것도 사도(斯道: 유학)의 불행입니다.
선학은 사람을 의혹하게 하되 그 언어(言語)는 유학이 아니며,그 행실은 윤리를 절멸하게 하니,
세상에서 병이(秉彛: 하늘이 정한 상도(常道))가 있음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는 진실로 이미 의심하였으며,
또 정·주가 선학을 배척하여 그 자취는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육상산의 학은 그렇지 않아서 말은 반드시 공(孔)·맹(孟)을 일컫고, 행실은 반드시 효제(孝悌)에 근거하였으나, 그 마음을 쓰는 정미한 곳은 선학과 같습니다.
이를 물리치기가 어찌 불씨(佛氏)보다 10배나 힘들지 않겠습니까.
불씨의 폐해가 외구(外寇)의 침략과 같다면 육씨(陸氏)의 피해는 간신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몰라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기서 아울러 썼습니다.
○ 신이 살피건대, 궁구할 사물을 다 기록할 수는 없고 다만 왕도(王道) 패도(覇道),
이단의 폐해만은 분변하지 않을 수 없어서 대략 서술하였사오니, 다른 것은 유추(類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살피건대, 성현의 궁리하는 설의 대요(大要)는 이 장(章)에서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그 말에 의하여 실지로 공부하여 순서에 따라 차츰 전진하신다면, 관통(貫通)하는 효과는 미약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거두어질 것입니다.
대개 만사와 만물에는 이치가 없는 것이 없는데, 사람의 마음은 온갖 이치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궁구하지 못할 이(理)는 없습니다.
그러나 개명성(開明性)과 엄폐성(掩蔽性)이 한결같지 않고, 총명성(聰明性)과 암매성(暗昧性)의 차이가 있어서,
궁리하고 격물할 때에 한 번 생각하여 바로 체득하는 것도 있고, 정미하게 생각하여 비로소 깨닫는 것도 있으며,
마음을 써서 애를 태워도 투철하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생각하다가 얻음이 있어서 환연(渙然)하게 자신(自信)하고 패연하게 즐거우며, 쇄연하게 말로써 형용할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은 진실로 체득한 것입니다.
비록 체득한 것이 있는 듯하더라도 믿는 가운데 의문이 있으며, 위태롭고 편안하지 못하여 석연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것은 억지로 추측한 것일 뿐이며 진실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제 사물에 대하여 이해하거나 또 성현의 말씀을 살핌에 있어 만일 마음가짐이 깨끗하여, 한 번 보고도 문득 마음으로 이해하여
조금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다면, 이것은 한 번 생각하여 문득 얻는다는 것인데, 만일 다시 의문을 제기하면 도리어 진실한 견해를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가령 명도(明道)가 일찍이 창고 가운데에서 긴 행랑집의 기둥을 잠자코 헤아려 보고는,
맞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몇 번이나 헤아려 보았으나 더욱 틀리는지라, 드디어 사람을 시켜서 기둥을 두드리며 이것을 헤아려 보니
처음에 잠자코 헤아려 본 것과 같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만일 사색하여 체득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오로지 치지(致知)하여 죽도록 싸워 침식도 잊어버리게 되어야만 비로소 깨닫는 것이 있게 되는데,
가령 연평선생(延平先生)이, "하나이기 때문에 신(神)하고 들이기 때문에 화(化)한다." 한 말을 연구하여 얻지 못하여
밤새도록 의자 위에 앉아서 사색하여 몸소 그 속에서 체험하여 비로소 평온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나
관중(管仲)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귀신도 통할 것이니, 이는 귀신의 힘이 아니고 정신의 극치이다." 한 말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 혹은 오랫동안 애를 태우고서도 마침내 석연치 못하여 생각이 막히고 분분하고 어지러우면 모름지기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마음속을 비워서
일물(一物)도 없게 한 뒤에 문득 들추어 정미하게 생각하고, 그래도 오히려 환히 얻지 못한 것도 갑자기 자각(自覺)될 때가 있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거기서 이미 이해하지 못한 것을 만일 그쪽에서 전일하게 지키고 있으면 도리어 혼미(昏迷)하게 된다.
모름지기 다른 것을 궁구하여야 할 것이니 그러면 혹시 이 때문에 저것이 밝혀질 수도 있다."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세 조목은 서로 발명한 것으로 궁리의 요법(要法)이니, 여기에 종사하여 조금도 게으르지 않고, 정양(靜養)함으로써
맑혀 그 근본을 배양하고 의문을 묻고 판단함을 인해서 그 의취(意趣)를 펴게 하되, 오랫동안 공을 쌓아 하루아침에 활연히 관통하여
물(物)이 궁구되지 않은 것이 없고, 마음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른다면, 나의 식견이 성현과 부합되어 욕심의 유혹이나,
공리(功利)의 학설이나 이단의 방해와 같은 것은 모두 나의 마음을 더럽힐 수 없고, 한결같이 평탄하여 멀리 가도 의심이 없습니다.
거기서 성의정심(誠意正心)하면 큰 일을 처리하고, 대업(大業)을 결정함이 마치 강물을 터놓은 듯하여 능히 막지 못합니다.
학문을 하고 이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어찌 학문을 한다고 하겠습니까.
또 생각하면, 임금의 자리는 필부와는 같지 않습니다.
필부는 반드시 몸을 닦아서 때를 기다리고 임금을 얻어서 도를 행하기 때문에, 학문이 부족하면 감히 얼른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이미 신민의 주(主)가 되었고, 이미 교양(敎養)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지금 몸을 닦고 있으므로 사람을 다스릴 겨를이 없다." 한다면, 나라의 정치가 폐지됩니다.
그러므로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道)를 모두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 동안에 접촉하는 바가 만 가지 일이니 매양 한 사건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지당한 이치를 구하여,
그 그른 것을 버리고 그 옳은 것은 행하며 유학하는 신하와 친근하여 의리를 강론하고, 간(諫)하는 것을 받아들여서
오직 선(善)만을 위주하는 것은 다 임금의 궁리하는 일입니다.
장구(章句)를 찾고 화려한 언사(言辭)를 채집하여 빈 말로만 돌릴 뿐이요,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실용적인 공부(功夫)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비록 안목(眼目)이 높고 의논이 정묘하다 하더라도 마침내 학문에 힘스고 몸을 성실하게 하는 공효를 보지 못할 것이니, 역시 무슨 이익이 있겠읍니가.
자계황씨(慈溪黃氏)는 말하기를, "물을 퍼내려는 사람은 반드시 그 근원을 깊게 하며, 그 근원을 깊게 하는 것은 물을 퍼내기 위한 것인데, 도
리어 그 물을 버리고 퍼내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이며, 열매를 먹으려는 이는 반드시 그 뿌리를 북돋우어 주며, 그
뿌리를 북돋우어 주는 것은 그 열매를 먹기 위한 것인데, 도리어 그 열매를 버리고 먹지 아니하는 것은 무슨 뜻이며,
몸소 바르게 실천하려는 이는 반드시 성리학(性理學)을 정밀히 하며, 성리학을 정밀히 하는 것은 몸소 바르게 실천하기 위한 것인데,
도리어 몸소 실천하는 것을 불문에 붙이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였습니다.
이 말은 매우 적절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념(留念)하옵소서.
< 주 >
34)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말한 것으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단(仁之端),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지단(義之端),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지단(禮之端),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지단(智之端)의 사단을 말한다. 풀
어 말하면 측은해 하는 마음은 사랑의 실마리이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정의의 실마리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질서의 실마리이고,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마음은 지혜의 실마리라는 것이다.
35)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뜻하는데 송대 성리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소당연지리(所當然之理)라는 용어와 함께 썼다.
36) 그렇게 되는 원인 까닭을 의미하며 성리학에서 소이연지리(所以然之理)라는 개념과 함께 쓰고 있다.
37) 「주역」64괘 중 26번째의 괘이름.
38) 송(宋)나라 낙양(洛陽) 사람. 이름은 순(焞) 자는 언명(彦明). 화정(和靖)은 그의 호이다.
정이(程)의 문인으로 저서에 맹자해(孟子解) 화정집(和靖集) 등이 있다.
39) 송(宋)나라 사람. 이름은 시(時) 자는 중립(中立).
귀산(龜山)은 그의 호임 정자(程子)에게 수학하여 뒤에 주자의 근원이 됨. 저서로는 이정수언(二程粹言) 귀산집(龜山集) 등이 있다.
40) 송(宋)나라 금화(金華) 사람. 이름은 조겸(祖謙) 자는 백공(伯供) 동래(東萊)는 그의 호임,
주희(朱熹) 장식(張)과 함께 동남삼현(東南三賢)으로 일컬어졌다.
41) 입교(立敎)란 가르침에 관한 것을 세웠다는 뜻이고, 명륜(明倫)이란 인간의 도리를 밝힌다는 뜻이며,
경신(敬身)이란 몸가짐을 공경히 한다는 뜻이며, 계고(稽古)란 옛 것을 상고한다는 뜻이다.
42) 존양(存養)이란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줄인 말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는 뜻이다.
43) 원(元)나라 하내(河內) 사람. 이름은 형(衡) 자는 중평(仲平) 노재(魯齋)는 그의 호임.
정주(程朱)의 학문을 익히고 뒤에 국자제주(國子祭酒) 등을 지냈다.
44) 대학혹문(大學或問)은 중용혹문(中庸或問)과 함께 주희(朱熹)가 지은 것으로서 문답형식으로 「대학」의 뜻을 밝히고 있다.
45) 요(堯)·순(舜)·우(禹)·탕(湯)·문무(文武)·주공(周公)·공자(孔子)로 전수된 심법지학(心法之學)을 의미하는데,
인심(人心)은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정일(精一)로 그 중(中)을 잡아야 한다는 심법(心法)에 연유하고 있다.
46) 천지(天地)와 사방을 말한다.
47) 성리학(性理學)적인 의미에서 쓰이는 실리(實理)·실심(實心)·실사(實事)를 추구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48) 「시경」국풍(國風)의 2편의 시.
49) 진시황(秦始皇)을 말함. 시·서를 불사르고 유사(儒士)를 죽였다.
50)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를 5음(五音)이라 하고, 12률(十二律)이란 6률(六律)과 6려(六呂)를 의미한다.
양(陽) 6률(六律)은 황종(黃鐘-11월)·태주(太주簇-1월)·고선(姑洗-3월)·유빈(賓-5월)·이칙(夷則-7월)·무역(無易-9월),
음(陰) 6려(六呂)는 대려(大呂-12월)·협종(夾鐘-2월)·중려(仲呂4월)·임종(林鐘-6월)·남려(南呂-8월)·응종(應鐘-10월).
51) 중(中)을 세우고 극(極-즉 中)을 세운다는 뜻.
52)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제후(諸侯)의 맹주(盟主)로서 패업(業)을 이룬 다섯 사람.
즉, 제환공(齊桓公)·진문공(晉文公)·진목공(秦穆公)·송양왕(宋襄王)·초장왕(楚莊王).
일설에는 진목공(晉穆公)과 송양왕(宋襄王) 대신에 오합려(吳闔閭)·월구천(越句踐)을 이르기도 한다.
53) 송(宋)나라 여릉(廬陵) 사람. 자는 경륜(景倫). 저서로 학림옥로(鶴林玉露) 등이 있다.
54) 송(宋)나라 광한(廣漢) 사람. 이름은 식(拭), 자는 경부(敬夫), 남헌(南軒)은 그의 호임. 호
굉(胡宏)을 사사하고 주자와는 친구사이로 이학(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로는 남헌역설(南軒易說) 이천수언(伊川粹言) 등이 있다.
55) 천(天)·지(地)·인(人)을 가리킨다.
56) 수(隨)나라 용문(龍門) 사람. 자는 중엄(仲淹) 시호는 문중자(文中子) 하분(河汾)에 은거하며 제자를 양성하여 수업하는 자가 많았음.
방현령(房玄齡) 위징(魏徵) 등이 모두 그 문인이다.
57)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죽지 않고 다른 생명으로 환생한다는 불교의 한 이론.
58)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始祖).
양(楊)의 무제(武帝) 때에 중국에 건너와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 면벽(面壁) 참선(參禪)하고 뒤에 혜가(慧可)에게 도를 전하였다.
제5장. 성 실(誠實)
신이 살피건대, 궁리(窮理)가 분명한 뒤에는, 궁행(窮行)할 수가 있는데, 반드시 마음이 진실하여야만 비로소 진실한 공부에 착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성실(誠實)이 궁행의 근본이 됩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충(忠)과 신(信)을 주(主)로 하라." 하였습니다. 「논어」하동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스스로 양심(良心)에 충실한 것을 충(忠)이라 하고, 일에 진실한 것을 신(信)이라 한다.
충은 진실한 마음이고 신은 진실한 일이다. 사람이 충하고 신하지 못하다면 매사에 모두실상이 없을 것이다.
악을 행하기는 쉽고 선을 행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이 충과 신을 주요한 도덕으로 삼아서 힘써야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자장(子張)이 행하는 도리를 물었더니, 공자는 말하기를, "말이 충하고 신하며, 행동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비록 오랑캐〔蠻貊〕같은 야만의 나라일지라도 행할 수가 있을 것이나, 말이 충실하거나 성실하지 못하며,
행동이 돈독하거나 경건하지 못하다면, 비록 자기가 사는 향리(鄕里)인들 행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자장의 뜻은 밖으로 영달하여 행하여지는 데 있기 때문에 공자는 자기 몸의 수양을 돌이켜 말한 것이다.
독(篤)은 도탑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 장남헌(張南軒)은 말하기를, "독경(篤敬)은 돈독하게 공경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서 있으면 그것이 앞에 참여한〔參〕것을 보고, 수레에 있으면 그것이 멍에〔衡〕에 위지한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니, 그래야만 행하게 되는 것이다.
자장(子張)은 이 말을 잊지 않으려고 큰 띠〔紳〕에 써 두었다.
주자는 말하기를, "그것이란 충(忠)·신(信)·독(篤)·경(敬)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참(參)은 '가서 참여하지〔參〕말라.'는 참(參)과 같이 읽는다.
(곡례(曲禮*)에 보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거나 서 있을 때에 내가 가서 참여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나와 그것이 서로 가까이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형(衡)은 멍에이다. 그 말의 뜻은 충·신·독·경을 항상 마음 속에 잊지 않게 두고, 자기의 소재(所在)에 따라 늘 보이는 듯하여
9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말은 반드시 충(忠)·신(信)이 되고자 하고 행동은 반드시 독(篤)·경(敬)이 되고자 하여,
그것을 항상 마음 속에 두고 잊지 않으면 마음과 눈〔心目〕사이에 나타남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것에서 일순간도 떠나려야 떠날 수 없게 되어야만, 일언(一言) 일행(一行)이 자연히 충·신·독·경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리하여 오랑캐의 야만국이라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紳)은 큰 띠의 드리운 것인데, <띠에> 기록한다는 것은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큰 임무를 맡으려면 모름지기 독실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 공자는 말하기를, "옛날의 배우는 이는 자기를 위하여 하였는데, 오늘의 배우는 이는 남을 위하여 한다." 하였습니다. (논어)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안으로 자기를 위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요, 남을 위한다는 것은 밖으로 남에게 알려지고자 하는 것이다.
옛날 배우는 자는 나를 위하였으되, 마침내 남까지 이루게 하는데 이르렀으나 오늘 배우는 자는 남을 위하였으되,
마침내 자기 자신마저 상실하는 데 이르렀다." 하였습니다.
○ 또, "명예를 추구하는데 뜻을 두면 큰 근본을 이미 잃은 것인데, 다시 무엇을 배우겠는가.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이익(利益)을 좋아하는 것과는 비록 청(淸)·탁(濁)의 다른 것은 있다 하더라도, 그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은 마찬가지다." 하였습니다.
○ 경원 보씨(慶源輔氏)는 말하기를, "나를 위한 공부와 남을 위한 공부는 그 차이가 다만 털끝 만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직 나의 내적인 충실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남에게 알리려 할 필요가 없고, 조금이라도 남에게 알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기의 내적인 충실을 기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내적인 충실을 얻고자 하는 자는 거둬들여서 독실(篤實)하고,
남에게 알리려고 하는 자는 경하고 들떠서 천로(淺露)하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성현들이 배우는 자의 마음가짐의 득실(得失)을 논한 설이 많다.
그러나 간절하고 요약된 것으로는 이 말과 같은 것이 없다.
이것을 명료하게 분변하여 날마다 이를 반성한다면, 따라 행할 바에 거의 어둡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그 뜻을 성실(誠實)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自欺〕말라〔毋〕는 것이다.
마치 악취(惡臭)를 싫어하듯 하며, 여자를 좋아하듯〔好色〕하는 것인데, 이것을 자겸(自謙) 겸(慊)으로 읽습니다. 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獨〕있을 때를 삼간다. (대학(大學))
주자는 말하기를, "그 뜻을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수신하는 것의 으뜸인 것이다.
무(毋)는 금지하는 말이요, 스스로 속인다〔自欺〕는 것은 선(善)을 행하고 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긴 하면서도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직 참되지 못한 것이다.
겸(謙)은 유쾌하고 만족한 것이다. 독(獨)은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이고, 나만이 홀로 아는 곳이다.
그 말은, 스스로 수신하고자 하는 자는 선을 행해야 하고 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마땅히 그 힘을 다하여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서 악을 미워하기를 마치 악취를 미워하듯하며,
선을 좋아하기를 예쁜 여자를 좋아하기를 예쁜 여자를 좋아하듯하여,
<버릴 것은> 모두 버리도록 힘쓰고, <얻을 것은> 반드시 얻도록 구하여서 스스로 자기에게 유쾌하고 만족하게 하여야 하며
한갓 구차하게 밖으로 남을 위하여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그 참되거나 참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고, 나만이 홀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여기에 근신해서 그 기미(幾微)를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가령 오훼(烏喙: 독초(毒草)의 이름)는 먹을 수 없고, 물과 불〔水火〕은 밟을 수 없다는 것을 알므로,
스스로 먹지도 않고 밟지도 않으며, 추우면 옷을 입고자 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자하여 스스로 그만 두지 못한다.
사람이 과연 선을 보면 배고플 때 밥 먹고 싶듯이 하고, 추울 때 옷 입고 싶듯이 하며,
악을 보면 오훼를 먹어서는 안될 것으로 알고 물과 불을 밟을 수 없는 것으로 알 듯이 한다면, 이는 뜻이 스스로 성실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선을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알면서도 도리어 충분히 선을 행하는 데 이르지 못한 다거나,
악을 행하여서는 아니될 것을 알면서도 도리어 자기 스스로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바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만일 9분(分)의 의리(義理)가 있되, 1분의 사사로운 뜻이라도 섞여 있다면, 이것은 곧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10분의 선을 하였어도 그 속에 1분의 좋지 않은 뜻이 잠재해 있다가 발동해서 사사된 길로 말미암아 못된 것이 자라나게 되면,
이것으로 충만하게 되어 전면(前面)에 선한 뜻은, 모두 없어지게 된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학문은 어두운 방에서도 속이지 아니하는 데서 시작된다." 하였습니다.
○ 유충정공(劉忠定公)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을 보고 마음을 다하여 스스로를 행하는 요지로서 죽을 때까지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물었더니,
온공(溫公)이 말하기를, "성실이다." 하였습니다.
또, 행하는 데는 무엇부터 먼저 하여야 하는가를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망령되이 말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하라." 하였습니다.
유공(劉公)은 처음에 이것을 매우 쉽게 여겼으나, 물러나와 하루의 행동과 말이 서로 배치되거나 스스로 모순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그 뒤 힘써 7년을 행한 뒤에야 이루어졌는데, 이로부터 비로소 언행(言行)이 일치되었고 표리(表裏)가 서로 맞았으며,
일을 당해도 마음이 평탄하게 가라앉았고, 늘 여유가 있었습니다.
○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으나,
다만 평생에 행한 일이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경(經)에 이르기를,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지식을 투철하게 이루어야 한다.' 하였고,
또 '지식이 투철한 데 이르면 뜻이 성실하게 된다.' 하였다.
대개 심체(心體)의 밝은 것이 미진하면, 그 마음의 발하는 바가 능히 그 힘을 실지로 사용할 수 없어서 구차하게 스스로 속이게 되는 것이다.
혹시 이미 밝은 것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여기서 근신하지 않으면 그 밝은 것이 자기 것이 되지 못하여 덕으로 나아가는 터전이 될 수 없다.
그 차서를 가히 문란하게 할 수 없으며, 공을 드리는데 가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정성(誠)은 사물의 처음이요 끝이므로, 정성이 없으면 사물도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군자는 정성된 것을 귀하게 여긴다. (중용(中庸))
주자는 말하기를, "'정성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는 말은 사람의 편에서 말한 것인데, 이 정성이 없으면 이 사물도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가령 보는 데 밝게 하지 않으면 능히 이 사물을 볼 수 없고, 듣는 데 밝게 하지 않으면 능히 이 사물을 들을 수 없으며, 효도를 하되 정성이 없으면 효가 없고,
공경〔弟〕을 하되 정성이 없으면 공경이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은 종류로 미루어 구한다면, 가히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배우는 자는 정성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정성되지 않으면 선(善)해 질 수 없고, 정성되지 않으면 군자가 될 수도 없다.
학문을 닦는데 정성으로 하지 않으면 군자가 될 수도 없다.
학문을 닦는 데 정성으로 하지 않으면 학문이 잡되고, 일을 하는데 정성으로 하지 않으면 일이 실패된다.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데 정성으로 하지 않으면, 이는 자기의 마음을 속이거나 스스로 충실을 버리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 사귀는데 정성으로 하지 않으면 이는 자기의 덕을 잃어버리거나 남의 원망을 늘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작은 도〔小道〕 이단(異端)이라도 또한 반드시 정성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 있어서랴.
그 때문에 '배우는 자는 정성되지 아니할 수 없다.' 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성이란 도의 근본을 알아서 정성되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정성은 천도(天道)요, 정성되기를 생각하는 것〔思誠〕은 인도(人道)이다." 하였습니다. (맹자)
주자는 말하기를, "'정성'이란 것은 나에게 있는 이치가 모두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것이므로,
천도(天道)의 본연(本然)이요, '정성되기를 생각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이치가 모두 진실하고 거짓이 없고자 하는 것이니,
인도(人道)의 당연(當然)이다." 하였습니다.
○ 묻기를, "하늘에는 본래 진실한 이치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마땅히 진실의 공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인은 생각지도 않고, 힘쓰지도 않아도 종용(從容)히 도에 합치되어, 참다운 이치가 행하여지지 않는 것이 없는데,
이것은 성인이 하늘과 일체가 되는 것으로서, 곧 천도(天道)인 것입니다.
성인의 지경에 이르지 못한 이는 반드시 선을 택하여야만 능히 선을 밝힐 수 있고, 반드시 그것을 굳게 지켜야만 능히 이 선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사(人事)의 당연한 것으로서 곧 인도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하니, 주자는 "좋은 말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하늘에는 진실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기화(氣化)가 쉬지 아니하고 유행(流行)하며,
사람에게는 진실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공부가 틈이 없이 밝아지고 넓어지는 것이니, 사람에게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게 됩니다.
어버이가 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효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으면서도 효도하는 자는 드물며,
형이 있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으면서도 공경하는 자는 적으며,
입으로는 부부(夫婦)가 서로 공경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제가(齊家)의 공효를 거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경우도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진 이를 보면 마당히 좋아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색(色)을 좋아하는 데로 옮아가고,
사악(邪惡)한 자를 보면 마땅히 미워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부하는 것을 사사로이 아껴서 받아주며,
벼슬자리에 있는 자로서 염결(廉潔)과 의리를 말하면서도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염결하거나 의롭지 못하며,
백성들에게 임하는 자로서 백성을 기르고 가르칠 것을 말하면서도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는 기르거나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또 혹시 억지로 인(仁)을 하려 하거나 의(義)에 힘써서 겉으로는 볼 만한 듯하나, 마음 속으로는 인과 의를 즐겨하지 아니합니다.
속이는 것은 오래 가기가 어려워서 처음에는 날카로이 힘쓰는 듯 하나 나중에는 게을리 하는데, 이런 따위는 모두 성실한 마음이 없는 까닭입니다.
한 마음이 성실하지 못하다면 만사가 모두 거짓이므로 어디로 간들 가히 행할 수 있겠으며, 한 마음이 실로 진실하다면,
만사가 모두 진실할 것이니 무엇을 한들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성실이란 성인의 근본이다."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이점을 유념하시옵소서.
○ 신은 또 살피건대,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근본입니다.
지금 비록 따로 한 장(章)을 만들어 그 대개를 진술하였습니다마는 성실하게 하는 뜻은 실로 상하의 모든 장에 일관하고 있습니다. 만
일, 뜻이 성실하지 않으면 확립되지 못하고, 이치〔理〕가 성실하지 않으면 궁격(窮格)되지 못하며,
기질(氣質)이, 성실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가 없으니, 다른 것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 「예기」 곡례(曲禮)의 원문(原文)은 "이좌리립 무왕참언(離坐離立毋往參焉)"이라 되어 있다.
이(離)는 양(兩)의 뜻인데,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거나 서 있을 때에는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그 옆에 가서 말참견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제6장. 교기질(矯氣質)
신이 살피건대, 이미 학문을 성실히 하였다면 반드시 편벽된 기질을 고쳐서, 본연(本然)의 성(性)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 때문에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은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기질을 고치는 것이 성실에 다음이 되는 소이입니다.
◆ 기질이 같지 않지만 그것을 교정하는 데 각각 방법이 있다는 데 대한 말씀
강(剛)의 선(善)은 의(義)롭고 곧으며〔直〕, 결단〔斷〕있고, 엄하고 굳세며〔嚴毅〕, 줄기차고 굳은〔幹固〕것이요, 악(惡)은 사납고〔猛〕·좁으며〔隘〕,
강하게 날뛰는〔强梁〕것이며, 유(柔)의 선(善)은 자애롭고〔慈〕, 순(順)하며, 부드러운〔巽〕것이며, 악(惡)은 나약(懦弱)하고 결단이 없는 것이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邪〕것이다. (주자(周子)의 통서(通書). 하동)
주자(周子)는 말하기를, "기품(氣稟)의 강유(剛柔)는 진실로 음양(陰陽)의 크게 나뉘는 것인데, 그 가운데 또 각각 선과 악의 구분이 있다.
악은 실로 바르지 않은 것이어니와 선도 반드시 모두 중(中)을 얻은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목(木)의 기운을 많이 타고나면 굳세고 강한 것이 적고,
금(金)의 기운을 많이 타고나면 자애롭고 상서로운 것이〔慈祥〕적은 것인데, 미루어보면 모두 그렇다." 하였습니다.
오직 중(中)은 성인의 일이다.
주자(周子)는 말하기를, "이것은 성품을 얻음이 올바른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성인이 가르침을 세우는 데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 악을 바꾸게 하고, 스스로 그 증(中)에 이르게 한 뒤 그친다.
주자(周子)는 말하기를, "그 악을 바꾸면, 강유(剛柔)가 모두 선하게 되어,
엄하고 굳세며 자순(慈順)한 덕(德)이 있고 강하게 날뛰거나 나약한 병통이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중에 이르면, 혹 엄하고 굳세며 혹 자순하게 되기도 함이, 모두 절도에 맞아 지나치거나 못 미치는 잘못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강하고 사나운 자는 마땅히 그것을 억제하여야 하고, 두려워서 위축된 자는 마당히 그것을 확충시켜 길러야 한다.
옛 사람이 부들부들한 가죽을 차고〔佩韋〕59) 다니거나, 활시위를 차고〔佩弦〕60) 다니면서 스스로를 경계한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굳센 자는 억제하기가 쉽다.
자로(子路: 공자의 제자) 같은 이는 처음에는 비록 성인가지도 업신여겼으나,
그 뒤에 학문을 배우고는 문득 그 굳센 성품을 고쳐 매우 십게 자기를 극복하였다. 그
러나 두려워서 위축된 자는 기(氣)가 본래 유약(柔弱)하기 때문에, 모름지기 힘껏 노력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삼덕(三德)이란
첫째는 정직(正直)한 것이요, 둘째는 강경한 수단으로써 다스리는 것〔剛克〕이며, 셋째는 부드러운 수단으로써 다스리는 것 〔柔克〕인데,
평안하고 건전한 〔平康〕자에게는 정직한 것으로 다스리고, 깊이 잠긴〔沈潛〕자에게는 강경한 수단으로서 다스리며,
고명(高明)한 자에게는 부드러운 수단으로써 다스린다. 주서(周書) 홍범(洪範)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침잠(沈潛)한 자는 깊이 잠겨서 중(中)에 미치지 못하는 자요, 고명(高明)한 자는 높고 밝아 중(中)에 지나친 자이다.
평안하고 건전한 자에게는 정직한 것으로써 한다는 것은, 고치고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요,
깊이 잠긴 자에게는 강한 수단으로써 다스린다는 것은 굳센 것으로써 부드러운 것을 다스린다는 것이요,
고명한 자는 부드러운 수단으로써 다스린다는 것은 부드러운 것으로써 굳센 것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주자(周子)는 말하기를, "극(克)은 다스린다는 뜻이다.
자질(資質)이 침잠한 자는 마땅히 굳센 것으로서 다스려야 하고, 자질이 고명한 자는 마땅히 부드러운 것으로써 다스려야 한다." 하였습니다.
○ 황씨(黃氏)는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데는 모름지기 그 기질(氣質)에 따라서 그 편벽된 것과 이르지 못한 것을 살피되,
그 가장 절실한 것을 택하여 자기의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비유하면, 약(藥)을 쓰는 거소가 같은 것인데, 옛 사람의 약 방문(方文) 또한 그 대법(大法)만을 말해 놓았을 뿐이며,
병의 증세는 여러 갈래이므로 또한 증세에 대응하여 좋은 약방문을 신중하게 택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성품은 서로 비슷한 것이나, 습관이 서로 먼 것이다." 하였습니다. (논어(論語))
주자는 말하기를, "기질의 성〔氣質之性〕은 그 바탕이 아름답거나 악한 것이 같지 않다.
그러나 그 처음으로 말한다면, 모두 심히 서로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다만, 착한 습관을 들이면 착하게 되고, 악한 습관을 들이면 악하게 되어서, 비로소 서로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기질을 바로 잡는 방법이 극기에 있다는 말씀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하여 물었더니,
공자는 말하기를, "자기를 극복하여 예법에 돌이키는 것〔克己復禮〕이 인(仁)을 하는 것이니,
하루 동안 자기를 극복하여 예법에 돌이키면 천하가 인에 귀의할 것이다.
인을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에 말미암은 것이지, 남에게 말미암은 것이겠는가." 하였습니다. (「논어」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인이란 본심의 온전한 덕〔全德〕이다.
경원보씨(慶源輔氏)는 말하기를, "인·의(義)·예(禮)·지(智)는 모두 마음의 덕이나 인(仁)이 의·예·지를, 포괄하였기 때문에
본심의 온전한 덕이라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극(克)은 이긴다는 뜻이요, 기(己)는 자기 일신의 사욕(私欲)을 말하는 것이며, 복(復)은 돌이킨다는 뜻이다.
예(禮)는 천리(天理)의 예절 규정〔節文〕이요, 인을 하는 것은 그 마음의 덕을 완전히 할 수 있는 소이이다.
대개 마음의 온전한 덕은 하늘의 이치가 아닌 것이 없으나, 또한 인욕(人欲)에 의하여 파괴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사욕을 이겨 예법에 돌이켜야 하고, 그렇게 되면, 모든 일이 천리에 맞고 본심의 덕이 다시 나에게 온전하게 갖추어지게 된다.
귀(歸)는 귀의(歸依)하여 그 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또 '하루 동안 극기복례(克己復禮)하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 인(仁)에 편들어 귀의한다'한 것은 그 효과가 매우 빠르고 지극히 크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한 '인을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에 말미암는 것이요, 다른 사람이 능히 참여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은
그 동기가 나에게 있어서, 어렵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날마다 그것을 극복하되 어렵지 않게 된다면, 사사로운 욕심이 말끔히 다 씻어져서 천리가 유행(流行)하게 되고,
인이 풍부하여 다 쓸 수 없게끔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예가 아닌 것은 곧 사사로운 뜻이다.
이미 이것이 사사로운 뜻이라면 어떻게 인을 얻을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나의 사사로운 것을 다 극복하여 모든 것이 예에 복귀하게 되어야 비로소 인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사씨(謝氏)61)는 말하기를, "극기(克己)는 성질이 편벽되어 이기기 어려운 곳으로부터 그것을 이겨나가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색욕(色欲)이 지나치면 먼저 그 색을 절제하고, 이욕(利欲)이 지나치면 먼저 그 이를 끊어버린 다는 것과 같은 종류이니,
이것이 용맹스럽게 극기(克己)하는 요법(要法)입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자기의 사사로운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성질의 편벽된 것이요, 둘째는 귀·눈·입·코〔耳目口鼻〕감각기관의 욕망인 것이며, 셋째는 남과 나 간에 시기하고 이기려는 사욕인 것이다.
이것을 몸소 자세히 인식하여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사사로운 뜻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곧 그것을 이겨야 한다." 하였습니다.
설씨(薛氏)는 말하기를, "사사로운 것은 크고 작은 것을 가릴 것 없이, 그것을 깨달으면 곧 이겨내야 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예란 자기 스스로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돌이킨다〔復〕고 말한 것은, 나의 사사로운 것을 극복하고 나서야 바야흐로 예에 돌이킨다는 것이 아니다.
저 일푼〔一分〕의 인욕(人欲)을 극복한다면 문득 일푼의 천리가 회복되어 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누가 묻기를, "보통 일에는 이것이 천리이고, 저것은 인욕인 것을 알 수는 있으나,
실제로 행동을 하는 데서는 인욕이 이끌어 가는 대로 따라 가게 되어, 일을 치른 뒤에 도리어 후회하게 되는데, 이는 어떤 까닭입니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이는 곧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는 공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곳이 극히 중요하니 여기서 수습을 잘 해야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다.
가령 한 갈래의 큰 길〔大路〕이 있고, 또 한 갈래의 작은 길〔小路〕이 있다면, 분명히 큰 길로 가야한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작은 길 앞에 자기를 끌어당기는 것이 있어서 자기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작은 길로만 따라가게 되다가
마침내 앞에 우거진 가시덤불을 만나게 되면 도리어 후회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곧 천리와 인욕이 교전(交戰)하는 기미이니, 일을 당하였을 때 곧 그것을 극복하여야 할 것이며,
구차하게 어물어물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안연(顔淵)이, "극기 복례(克己復禮)62)의 조목을 묻고자 합니다." 하니,
공자는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 말 것〔勿〕이요, 예가 아니면 듣지 말 것이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 것이요,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하였고, 안연은, "회(回)가 비록 불민하오나 이 말을 이행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목(目)은 조건(條件)을 말한다. 안연은 선생의 말을 듣고 천리와 인욕의 즈음에 있어서 이미 판연(判然)하게 깨달았다.
그 때문에, 다시 더 의문되는 것이 없이 바로 그 조목을 물은 것이다.
예가 아니라는 것은 나의 사사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요, 물(勿)은 금지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심이 주(主)가 되어서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가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사욕을 이기면 행동하는 가운데 예에 맞지 않는 것이 없고, 일상 생활에 있어서 천리가 아닌 것이 없다.
안연은 그 이치를 묵묵히 마음 속에 인식하고, 또 자기의 능력이 사욕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곧바로 그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서 의심치 않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라는 것은 그 밖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와서 작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요,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는 것은 그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아가서 접촉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다.
안팎을 서로서로 닦아 나아가면 인을 하는 공부는 그 힘을 남김없이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성인의 말을 익히 파악하고, 안자(顔子)가 힘쓴 것을 탐구한다면, 그 요점은 다만 <예가 아니면> 그만 둔다거나 그만 두지 않는다는데 있을 따름이다.
이로부터 돌이켜 찾는다면 천리가 되고, 이로부터 흘러 버린다면 인욕이 되며, 이로부터 잘 생각하면 성(聖)이 되고,
이로부터 생각을 하지 않으면 광(狂)이 되는 것인데, 다만 털끝 만한 사이라도 이 같은 차이가 생길 따름이니,
배우는 자가 그 몸가짐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묻기를, "마땅히 보아서는 안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연히 눈으로 보게 되고,
그 마땅히 들어서는 안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스스로 귀로 듣게 되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하니,
주자는 말하기를, "예가 아닌 것이 비록 눈을 스친다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보는 마음은 있지 않아야 하고
예가 아닌 소리가 비록 귀를 스친다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듣는 마음이 있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 네 가지는 몸의 작용인데, 속에서 나와서 밖으로 응하는 것이니,
밖을 제어하는 것은 중심을 기르는 소이이다.
안연이 이 말을 받들어 실천한 것은 성인의 경지에 나아간 소이이다.
후대에 성인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명심하고 실천하여 잃지 말아야 한다.
이 때문에, 잠언(箴言)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노라.
시잠(視箴)에 이르기를, '마음은 본래 공허(空虛)한 것이어서 외물에 따라 응접(應接)함이, 그 자취가 없다.
이것을 조종하는 요령이 있는데, 그것은 보는 것을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
여러 가지 사욕이 앞을 가리면 가운데 마음이 그 쪽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밖에서 제어하여 마음 속을 편하게 하여야 한다.
자기를 극복하여 예에 돌이키면 오래매 성실할 수 있을 것이다.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눈이란 사람의 밝은 거울이요, 오행(五行)의 정화(精華)가 모인 것으로 마음 가운데 가장 절실한 것이다.
눈이 움직이면 마음이 반드시 따르고 마음이 움직이면 눈이 반드시 그 곳에 쏠린다.
허령(虛靈)한 마음은 온갖 변화와 조화를 이루는데 그것을 단속하고자 한다면 먼저 보는 것부터 올바른 표준을 세워야 한다." 하였습니다.)
청잠(聽箴)에 이르기를 '사람에게는 떳떳한 도리를 지키는 양심이 있는데, 이는 타고난 천성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앎〔知〕이 사물에 유혹되어 변질되어 드디어 그 올바른 것을 잃어버린다.
뛰어난 저 선각자(先覺者)들은 그칠 데를 알아서, 안정하므로 사심(邪心)을 막고 그 성실을 보존하여 예가 아니면 듣지 않는다.'
(앎이 사물에 유혹되어 변해 버린다는 것은 마음이 사물에 유혹되어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본체는 본래 바른 것이나 물에 유혹되어 버리기 때문에 드디어 그 바른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언잠(言箴)에 이르기를, '사람의 마음이 감동된 것은 말을 통해 발표된다.
말을 하는데 조급하거나 망령되지 않게 주의한다면, 마음속은 조용해지고 전일해질 것이다.
하물며 말이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추기(樞機)로서, 싸움을 일으키거나 우호(友好)를 맺는 결과를 이 말이 가져온다.
길(吉)하고 흉(凶)하고 영예롭고 욕된 것은 오직 이 말이 불러들이는 것이다.
너무 쉽게 하면 허망한 데 이르고, 번거롭게 하면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된다.
내가 함부로 말하면 상대편이 거슬리게 되고, 이쪽에서 어긋난 말을 하면 상대도 어긋난 말로 대꾸한다. 법도가 아니면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이 훈사(訓辭)를 공경해야 할 것이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지(支)는 나뭇가지가 몸 곁에서 마구 흩어져 뻗어나간 것과 같은 것이니, 곧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실수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동잠(動箴)에 이르기를, 철인(哲人)은 일의 기미(幾微)를 먼저 알고 생각하는데 성실케 하며,
지사(志士)는 행동을 가다듬어 일하는데 도리를 지키는 것이니, 이(理)에 순종하면 마음이 너그럽지만, 사욕으로 행동하면 위태롭다.
잠시라도 도리를 생각하고, 늘 조심하거나 경계하면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그렇게 조심하는 오랜 습관이 성품으로 굳어지면, 성현(聖賢)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사려(思慮)란 행동의 기미가 움트는 것이요, 행위는 행동의 현저한 것이며,
사려는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요, 행위는 밖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오랜 습관이 성품으로 된다는 것은 습관을 오래 쌓아 그것이 성공하면 마치 천성(天性)에서 우러나오는 것과 같은 것을 이르는 것이니,
이른바 소성(少成)이 천성과 같고 습관이 자연(自然)과 같다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성일나 애당초에 품수(稟受)하고 태어난 기질의 성〔氣質之性〕을 말하는 것이지, 본연의 성〔本然之性〕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이 장(章)의 문답은 곧 심법(心法)을 전수(傳授)하는 절실한 말이므로 지극히 밝지 아니하고는 그 기미를 살필 수가 없으며,
지극히 굳세지 아니하고는 그 결단에 이를 수가 없다.
정자(程子)의 잠(箴)은 발휘하여 설명한 것이 친절하니, 학자들은 더욱 깊이 음미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극기(克己)는 몸의 절실한 공부요, 기질(氣質)은 변화시키는 요법이기 때문에 정주(程朱)의 말이 이와 같습니다.)
역(易)에 이르기를, "산(山) 아래에 못〔澤〕이 있으면 손괘(損卦)63)가 된다.
이 때문에 군자는 분(忿)을 눌러 가라앉히고 욕심을 억제한다." 하였습니다. (손괘(損卦) 상전(象傳))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몸을 수양하는 도리에서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은 오직 분노〔忿〕와 욕심〔慾〕이다.
그러므로 그 분노를 눌러 가라앉히고, 그 욕심을 막아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사람의 정(情) 가운데 발하기는 쉬어도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은 오직 노(怒)하는 것이 심하다.
다만 노하였을 때, 문득 그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도리의 옳고 그른 것을 볼 줄 알게 된다면 또한 바깥 유혹을 족히 미워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도리도 중간 정도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분노는 다스리기 어렵고, 두려움도 또한 다스리기 어려운데,
다만 극기(克己)만이 분노를 다스릴 수 있고. 이(理)를 밝히는 것만이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논어」에, 정()64)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니 어찌 굳세다 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심하구나. 욕심이 사람을 해침이여.
사람이 불선(不善)을 행하는 것은 욕심이 유혹하는 까닭이다.
유혹을 당하고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면 천리(天理)를 없애버리고 되돌아올 줄 모르는데 이른다.
그러므로 눈은 아름다운 색(色)을 욕심내고, 귀는 좋은 소리〔聲〕를 욕심내며, 코는 향기를, 입은 맛을,
사지(四肢)는 편안한 것을 욕심내는 데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모두 욕심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그 욕심을 막아버릴 수 있겠는가,
사려(思慮)만이 <막을 수> 있을 뿐이다.
오직 사려를 통해서만이 능히 욕심을 막아낼 수 있는데, 증자(曾子)65)의 일일삼성(一日三省)66)은 욕심을 막는 방법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산의 상(象)을 보고 분노를 가라앉히고, 못〔澤〕의 상을 보고 욕심을 막아낸다.
그러므로 욕심을 막기를 구렁〔壑〕을 메우듯하고, 분을 가라앉히기를 산을 꺾〔〕듯한다." 하였습니다.
자기의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분노와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표출(表出)하였습니다.
◆ 다음은 기질을 바로 잡는 공부가 면강(勉强)에 있다는 말씀
○널리 배우고, 살펴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석하게 분변하며, 독실하게 행해야 할 것이다. 「중용」하동
정자는 말하기를, "이 다섯 가지에서 한 가지라도 폐(廢)하면 학문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학문이란 곧 기질을 능히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데,
만일 책을 읽어 궁리하거나 공경을 주장하여 본심을 보존하지는 않고,
한갓 어제의 잘못과 오늘의 바른 것〔昨非今是〕을 헤아려 비교하는 데만 간절하다면,
아마 또한 공연히 수고롭기만 하고, 아무 도움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배우지 않으려면 몰라도 배울 바에는 능숙해 지지 않고서는 그만 두지 않아야 하고,
묻지 않으려면 몰라도 물을 바에는 알지 않고서는 그만 두지 않아야 하며,
생각하지 않으려면 몰라도 생각할 바에는 터득하지 않고서는 그만 두지 않아야 하고,
분변하지 않으려면 몰라도 분변할 바에는 분명해지지 않고서는 그만 두지 않아야 하며,
행동하지 않으려면 몰라도 행동할 바에는 독실해지지 않고서는 그만 두지 않아야 하는데,
남이 하나에 능(能)하다면 나는 백에 능해야 하고 남이 열에 능하다면 나는 천에 능해야 한다.
주자는 말하기를, "군자의 학문은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할 바에는 반드시 이루려고 한다.
그러므로 늘 남의 백 배의 공을 들인다." 하였습니다.
○동씨(董氏)는 말하기를, "학문에 힘쓰면 문견(聞見)이 넓어지고, 지식은 더욱 밝아지며,
도를 행하는 데 힘쓰면 덕(德)이 날로 일어나 큰 공효가 있게 된다.
증자(曾子)는, '그 듣는 바를 존중하면 고명(高明)하게 되고, 그 아는 바를 행하면 광대(光大)하게 된다.'하였는데,
고명해지고 광대해 지는 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뜻을 기울이는데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과연 이 도(道)를 능히 행한다면 비록 우매한 자라도 반드시 명석하게 될 것이요, 비록 유약한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강하게 될 것이다.
여씨(呂氏)는 말하기를, "군자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기질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덕(德)이 기질(氣質)을 눌러 이기면 우매한 자도 가히 명석해 질 수 있고, 유약한 자도 가히 강해 질 수가 있을 것이나,
덕이 기질을 이기지 못하면, 비록 학문에 뜻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또한 우매한 자는 명석해 질 수가 없고, 유약한 자는 능히 자립할 수가 없다.
대저 고루 선하여 악함이 없는 것을 본성으로서 사람마다 같은 것이요,
어둡고·밝고·강하고·약하여 기품이 고르지 못한 것은 재주〔才〕로서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성실하면 그 같은 것으로 돌이켜서, 다른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대저 아름잡지 못한 기질로서 그것을 변화시켜 아름답기를 구하는 데는 그 공을 백 배 하지 아니하고서는 구하는 결과를 이루기가 힘든다.
이제 노무멸렬(鹵莽滅裂)한 학문으로서 (노무(鹵莽)는 마음을 집중시켜 쓰지 않는 것이요, 멸렬(滅裂)은 공부를 경박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혹은 하다가 혹은 말다가 하면서 그 우수하지 못한 기질을 변화시키려다가 변화할 수없게 되면
곧 말하기를, '천부의 기질이 우수하지 못하므로 배운다고 해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하는 것은
스스로 포기〔自棄〕하는 결과로 나아가는 것인데, 그 인(仁)하지 못한 것이 심하다." 하였습니다.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학문이 기질을 족히 변화시킬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학문을 하겠는가.
세상에는 실로 자기의 뜻대로 하여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는 자도 있으나, 또한 자기의 정(情)이 이끄는 대로 절제 없이 따라가다,
나라를 패망케 하고 백성들을 죽게 하는 자도 있다.
그런 사람은 혹시 굳세고 유약하며, 혹시 선(善)하고 혹시 악(惡)한 것을 그 기질의 여하에 그대로 내어 맡겨,
다시 그것을 바로 잡거나 이겨내어 아름다운 것을 이룩하지 못하는 위인인 것이다.
배우는 자는 이와 같지 않다. 혼미한 것이 가히 명석하게 변화될 수 있고, 약한 것도 가히 강하게 변화될 수 있으며.
탐욕하는 것도 가히 청렴하게 변화될 수 있고, 악독한 것도 가히 자애로운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니, 배우는 공효가 큰 것이다.
대저 기질이 아름답지 못한 자도 모두 가히 변화시켜서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에 있어서랴."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전자에 여백공(呂伯恭)을 만났는데, 그가 '젊었을 적에는 성품과 기질이 거칠고 사나와서 음식이 마땅치 않아도
문득 (가사(家事) 가사는 그릇을 말합니다.) 를 때려 부셨는데, 후일 오랜 병을 앓을 때 다만 논어(論語) 한 책을 가지고 아침저녁으로 읽다가
'궁자후 이박책어인(躬自厚 而薄責於人)67)'이라는 대목에 이르러 홀연히 깨달은 바 있어서,
의사(意思)가 일시에 평안해져 드디어는 종신토록 사납게 노하는 법이 없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가히 기질을 변화시키는 법이 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일기(一氣)의 근원은 담연(湛然 : 맑은 모양)히 청허(淸虛)한데 오직 그 양(陽)이 동(動)하고 음(陰)이 정(靜)하며 혹시 상승하기도 하고,
혹시 하강하기도 하다가,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사이에 합하여 질(質)을 이루어서, 드디어 고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物)의 편색(偏塞)된 것은 다시 이것을 변화시킬 방법이 없으나,
오직 사람은 비록 청탁(淸濁)과 수박(粹駁 : 순수와 박잡)의 같지 않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허명(虛明)하여 가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사람마다 모두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허언(虛言)이겠습니까.
기(氣)가 맑고 질(質)이 순수한 사람은 지(知)와 행(行)을 힘쓰지 않고도 능하게 되어 더할 것이 없으며,
기가 맑고 질이 박잡한 사람은 알 수는 있어도 능히 행할 수는 없는 것인데,
만일 궁행(躬行)에 힘써서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독실하면, 행실이 가히 이루어지고 유약한 사람이라도 강하게 될 수 있으며,
질이 순수하고 기가 탁한 사람은 능히 행동할 수는 있으나 잘 알 수는 없는 것인데,
만일 묻고 배우는 데 힘써서,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정밀하게 하면 지식을 통달할 수 있으며 우매한 자라도 명석하여질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기예(技藝)는 어디 나면서부터 지식을 얻어 가지고 나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시험삼아 음악을 배우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겠습니다.
동남(童男)이나 치녀(穉女: 어린 계집아이)가 처음에 거문고와 비파를 배워 손가락을 놀리어
처음으로 소리를 낼 때는 듣는 사람이 귀를 가리고 듣지 않으려 할 것이지마는, 노력을 쉬지 않고 쏟으면 점점 그 아름다운 음률을 이루며
그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그 소리는 청화(淸和)하고 원활한 흐름을 이루어 정묘한 것을 말로서는 다 표현할 수 없게 될수 있습니다.
저 동남이나 치녀가 어찌 음악을 나면서부터 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실지로 그 공력을 다하여 학습이 쌓여서 그와 같이 익숙하여졌을 뿐이요, 온갖 기예가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 백공(百工)의 기예가 세상에서 절묘(絶妙)한 자는 있으나 학문을 하는 이는 그 기질을 변하시킨 자는 볼 수 없고,
다만 그 지식의 광박(廣博)한 것이나 언론이 풍부한 것만을 힘입으려 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굳센 자는 마침내 유선(柔善)하여 질 수 없고, 부드러운 자는 마침내 굳세어 질 수 없으며,
탐욕한 자가 청렴하여 지는 것을 볼 수 없고, 불인한 자가 자애로워지는 것을 볼 수 없으며 경박한 자가 침중(沈重)하여지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실공(實功)은 다만 백공의 기예에만 있을 뿐이요, 학문에는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밝게 유념하시옵소서.
< 주 >
59) 성질이 급한 것을 늦추는 것을 말한다.
위(韋)는 부들부들하게 다룬 가죽으로 이것을 지니면서 자기의 성급한 성질을 고치려 하였다는 서문표(西門豹)의 이야기가 있다.
〔西門豹之性急 故佩韋以自緩〕≪韓非子, 觀行篇≫
60) 마음의 해이한 것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현(弦)은 활시위로서 긴장(緊張)을 뜻하며 이것을 몸에 차고 다니면서 느리 마음을 고치려고 했다는 동안우(董安于)의 고사가 있다.
〔董安于性緩 故佩弦以自急〕≪韓非子 觀行篇≫
61) 이름은 양좌(良佐), 자(字)는 현도(顯道)이다. 송(宋)의 상채(上蔡) 사람이므로 흔히 사상채(謝上蔡)라고 부른다.
62) 자신을 극복하여 천리의 질서에 합한다는 뜻.
63) 「주역」64괘 가운데 41번째 괘이름.
64) 공자의 제자. 성(姓)은 신(申), 노(魯)나라 사람. 공자는 신정을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굳셀 수 없다.'고 평한 일이 있다.
〔桭也慾 焉得剛〕《論語公冶長》
65) 공자의 수제자의 한 사람으로 도덕에 가장 뛰어났다고 전하며 효경(孝經)을 지었다고 한다. 이름은 삼(參)이다.
66) 증자가 날마다 충(忠)·신(信)·습(習) 세가지 점에 대하여 자기 반성을 한 것을 말한다.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論語學而》
67) 공자의 말씀으로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무겁게 돌리고 다른 사람을 책하는데 있어서는 가볍게 한다는 뜻이다.
〔躬自厚而薄責於人 則遠怨〕《論語 衛靈公》
제7장. 양 기(養氣)
신이 살피건대, 기질(氣質)을 고쳐 다스리는 것을 마땅히 극진히(克盡)하여야 하나, 기를 보양(保養)하는 것도 치밀하지 않아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대개 정기(正氣)를 보양하는 것은 곧 객기(客氣)를 고쳐 다스리는 일로서, 고쳐 다스리고 보양하는 것은
실로 두 가지 일이 아니지만 그 말에 있어 각각 주장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나누어 두 장(章)을 설정하였습니다.
◆ 오로지 지기(志氣)를 기르는 것에 대한 말씀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본심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 사람됨에 있어서 욕심이 적으면 본심을 보존하지 못하는 일이 비록 있더라도 그것이 적을 것이요,
그 사람됨에 있어서, 욕심이 많으면 비록 본심을 보존하는 일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적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맹자」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욕심이란 귀〔耳〕·눈〔目〕·입〔口〕·코〔鼻〕나 사지(四肢)의 욕심과 같은 것이다.
사람에게는 비록 이것이 없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욕심이 많아서 절제하지 않는다면
그 본심을 잃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배우는 이는 마땅히 깊이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욕심을 부리는 것이 반드시 탐익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만 하고자 하는 마음의 향하는 것만 있어도 그것은 곧 욕심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기(樂記)68)에 이르기를, "군자는 그 도를 즐기고 소인은 그 욕심을 즐긴다.
도로서 욕심을 제어하면 즐거우며 어지럽지 아니하고 욕심 때문에 도를 잊으면 탐익에 혹(惑)하여 즐겁지 않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천리(天理)에 어두운 것은 다만 기욕(嗜欲)이 그것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장자(莊子)는, '그 기욕이 깊은 자는 천기(天機)가 얕다.'하였는데, 이 말이 가장 옳다." 하였습니다.
○오자지가(五子之歌 :서경(書經)·하서(夏書)의 편명)에 이르기를, "안으로 여색(女色)에 미치거나 밖으로 사냥하고 노는 데 미치거나, 술
을 좋아하고 소리를 즐기거나, 높은 집 화려한 담 등 이러한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망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무릇 모든 완호(玩好)는 모두 사람의 올바른 뜻을 빼앗는다. 글씨와 편지〔書札〕는 유자(儒者)의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이 일만을 좋아하여 집착하면 역시 뜻을 잃어버린다.
가령 왕(王: 왕희지王羲之)·우(虞: 우세남(虞世南)·안(顔:안진경顔眞卿)·유(柳: 유공권柳公權)와 같은 무리들은 진실로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일찍이 글씨 잘 쓰는 사람으로서 도를 아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평생의 정력을 오로지 이 글씨 쓰는 데만 쏟았으니, 이는 오직 한갓 시일만 헛되이 보내었을 뿐 아니라,
도에는 방해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족히 뜻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윗 장(章)에서는 극기(克己)를 말하였기 때문에 질욕(窒慾)이라 하였고,
이 장에서는 양심(養心)을 말하였기 때문에 과욕(寡欲)이라 한 것입니다.
질욕이라 할 때의 욕(慾)은 오로지 사욕(私欲)을 가리켜 말한 것이나, 과욕이라 할 때의 욕은 평범하게 마음의 하고자 하는 바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만 욕심을 많이 내어 절제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곧 사욕인 것입니다.
우산(牛山)의 나무들은 일찍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큰 나라 가까운 교외에 있음으로 해서 도끼로 남벌하고 말았으니,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밤낮으로 자라고 우로(雨露)의 혜택을 입어 싹이 돋아나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거기에다 또 우양(牛羊)을 몰고 가서 마구 먹었기 때문에,
저와 같이 벌거숭이산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벌거숭이 같은 산을 보고는 그곳에는 본래 나무가 없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주자는 말하기를, "밤낮으로 자란다는 것은 기화(氣化)가 유행(流行)하여 일찍이 쉼이 없기 때문에 밤낮으로 만물이 모두 생장하는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사람의 본성인들 어찌 인(仁)과 의(義)의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양심을 잃어버리는 일은 또한 도끼로 나무를 날마다 찍어내는 것과 같은데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양심이 자라면, 날이 샐 때는 청명(淸明)한 기(氣)가 감도는 데도,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사람의 양심과 가까운 것이 거의 적은데
낮에 저지르는 소행이 양심을 속박〔梏〕하며 기능을 잃게 한다.
이런 양심의 속박이 반복(反覆)되면 밤중에 자라나는 청명한 기〔夜氣〕가 보존되지 못하고,
야기가 보존되지 못하면 금수(禽獸)와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사람들이 그 금수와 같은 자를 보고서 그 사람은 본래 재질〔才質〕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이 어찌 사람의 본 성정(性情)이겠는가.
그러므로 진실로 보양(保養)을 잘하면 생장하지 않는 것이 없고, 진실로 보양을 잘못하면 소멸되지 않는 것이 없다.
주자는 말하기를, "양심이란 인간 본래의 착한 마음인데, 곧 인의(仁義)의 마음이다.
평조(平旦)의 기(氣)란 외물과 아직 접촉하기 전의 청명한 기이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는 것은 인심(人心)의 모두가 함께 그런 것을 얻음을 말한다.
곡(梏)은 속박하는 수갑이요, 반복(反覆)은 전전(展轉)한다는 뜻이다.
그 말하는 뜻은, 사람의 양심을 이미 잃었다고 하나, 그래도 밤낮으로 반드시 생장하는 것이므로
날샐 즈음인 외물과 접촉하기 이전의 기가 청명할 때에는 그래도 양심이 발견되는 것이 있다.
다만 그 발견되는 양심이 지극히 미약한 데다 낮에 착하지 못한 소행이 뒤따라, 그 양심을 속박하여 소멸시키므로,
이는 마치 산의 나무를 베어버려도 싹이 돋아나기는 하나 그것마저도 우양(牛羊)을 방목하여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낮의 행동이 이미 그 밤사이에 생장한 기를 해치고, 밤사이에 생장한 양심이 또한 낮의 소행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서로를 해치고, 이렇게 해서 야기(夜氣)의 생장은 날로 엷어져 그 인의(仁義) 양심을 보존할 수 없는데
이르면 아침의 기도 또한 능히 맑아질수 없게 되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인심의 공통된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산의 나무와 사람의 마음〔人心〕이 그 이치는 한 가지이다." 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호연(浩然)한 기(氣)를 잘 기른다.
그 기는 지극히 크고 굳세어, 이것을 바른 도리로서 길러 해치지 않으면 천지 사이에 가득차게 된다.
주자는 말하기를, "호연(浩然)이란 성대하게 유행하는 모양이요, 지극히 크다는 것은 처음부터 한량이 없다는 것이요,
지극히 굳세다는 것은 굴복하거나 꺾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 천지의 정기(正氣)인데 사람이 타고 나온 것이, 그 본체가 본래 이런 것이다.
오직 스스로 반성하여 곧으면 그 기르는 바를 얻을 수 있고,
게다가 또 행동이 그것을 해치지 않으면 본체가 이지러지지 않고 천지간에 가득히 찰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기(氣)는 의(義)와 도(道)에 배합〔配〕되는 것으로서, 이것이 없으면 도의가 위축하여 버린다.
주자는 말하기를, "배(配)는 합하여 도움이 된다는 뜻이요, 의(義)란 사람 마음의 제제(裁制)하는 것이며, 도(道)란 천리(天理)의 스스로 그러한〔自然〕것이다.
뇌()란 주리고 결핍하여 기(氣)가 본체에 충만하지 못한 것인데, 그 말한 뜻은, 사람이 능히 그 기를 기를 수 있으면,
그 기가 도의에 배합하여 그것을 행하는 데 도움이 되어 그 행동하는 데 있어서 용기 있게 결단을 내려, 회의하고 꺼리는 바가 없도록 하며,
만일 이 기가 없으면 일시의 행동은 비록 도의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본체에 충만하지 않으면 또한 회의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면치못하고, 행동하는 데 부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의(義)를 모아서 생기는 것이지 의로 밖에서 엄습해〔襲〕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행동하여 양심에 만족하지 않으면 기는 위축되고 만다.
주자는 말하기를, "의(義)를 모은다는 것은 선을 쌓는 다는 말과 같은데, 대개 일마다 모두 의에 합당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습(襲)은 엄습하여 취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기(氣)가 비록 도의에 배합된다 하더라도 그 기를 기르는 것을 시작할 때에는 곧 일마다 모두 의에 합당하게 되어 스스로 반성하여 늘 곧으면,
그로서 부끄러울 바가 없는데 따라서 이 기가 자연히 그 가운데서 발생한다는 것이며,
다만 한 가지의 일을 행하는 데 우연히 도의에 합당한다 해서 문득 밖에서 엄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동하는 바가 하나라도 의에 합당치 않은 것이 있고, 스스로 반성하여 곧지 못하면 마음에 부족하게 되고, 그 체가 불충분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그 뜻을 견지하고 그 기가 방종하지 않으면 안팎으로 서로 길러진다." 하였습니다.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그 뜻을 견지한다는 것은 마음 속에 굳게 지키는 바가 있는 것이요,
그 기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밖의 유혹에 의하여 방종하게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지키는 바가 있으면 기가 스스로 완전하고, 밖의 유혹에 의하여 방종되지 않으면
뜻이 더욱 굳어지는 까닭에 서로 길러진다고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아울러 혈기를 기르는 것에 대한 말씀
○공자는 말하기를, "군자에게는 세 가지의 경계가 있는데, 젊었을 때에는 혈기(血氣)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색(色)을 경계하고,
장년이 되어서는 혈기가 바야흐로 굳건하니 싸움을 경계하며, 늙어서는 혈기가 이미 쇠약하여 졌으니, 탐득(貪得)을 경계한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혈기는 형체가 그것을 기다려 생기는 것인데, 혈(血)은 음이요, 기(氣)는 양이다.
득(得)은 탐득(貪得)이다. 때를 따라 경계할 줄 알아서 이치로써 그것을 이겨내면 혈기의 사역(事役) 당하는 바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범씨(范氏)는 말하기를, "군자는 그 뜻과 기를 기르는 까닭으로, 혈기를 움직이는 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가 더욱 높아질수록 덕도 더욱 높아진다." 하였습니다.
역(易)에, "언어를 조심하고 음식을 절제하라." 하였습니다. (이괘(卦)상사(象辭))
정자는 말하기를, "말을 조심하여 그 덕을 기르고, 음식을 절제하여 그 몸을 기른다.
일이 지극히 가까이 있으면서 그 관계된 바가 지극히 큰 것으로는 말과 음식만한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진원(眞元)의 기는 외기(外氣)와 서로 섞이는 것이 아니요, 다만 외기로서 함양할 따름이다.
이는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 있는데 물고기의 생명이 곧 물이 아니라, 다만 물로서 함양하여야 고기가 살 수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이 천지의 기 가운데 있는 것이 고기가 물 속에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음식의 보양도 모두 이 외기로서 함양하는 도리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동식(動息)·절선(節宣 : 철을 따라 몸을 조심하는 것)은 양생(養生)하는 것이요, 음식·의복은 양형(養形)하는 것이며, 위
의(威儀)·행의(行義)는 양덕(養德)하는 것이요, 나를 미루어 다른 물(物)에 미치는 것은 사람을 기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형서(邢恕)는 말하기를, "우리는 항상 정력(精力)을 아끼고 길러야만 된다.
정력이 조금만 부족하여도 권태로워 져서 일에 임하여 억지로 하게 되고 정성스러운 뜻이 없어진다.
<이러한 예는> 손님을 접대하고 말을 하는 데에서도 가히 볼 수 있는 데, 하물며 큰 일에 임하여서이겠는가." 하였습니다.
공자가 삼가한 것은 재계(齋戒)하는 것과 전쟁하는 것과 질병이었다. (논어)
주자는 말하기를, "재(齋)의 말 뜻은 바르게 한다는 것인데,
제사 지내기에 앞서 그 생각 가운데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하여 신명(神明)과 교접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성이 지극한가 지극하지 못한가. 신이 제사를 흠향하는 안 하는가는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전쟁은 중민(衆民)의 사생(死生)과 나라의 존망(存亡)이 걸려 있는 것이요,
질병은 또한 나의 몸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죽고 살거나, 존재하고 멸망하게 되는 것이니,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병중에는 생각〔思慮〕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오로지 본심을 보존하고 기를 기르는 것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장사숙(張思叔)에게 말하기를, "나는 기를 매우 약하게 타고났었는데, 30세에 차차 성해지고, 40·50에 이르러서는 완전하여 졌으며,
지금은 나이 72세인데 근골(筋骨)이 젊은 나이에 비하여 손색이 없다." 하였습니다.
사숙(思叔)이 청하여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어떻게 해서 기를 받은 것이 약했는데 잘 보생(保生)을 하셨습니까." 하니,
정자는 묵연(默然)히 말하기를, "나는 생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깊은 수치로 여겨왔다." 하였습니다.
(장남헌(張南軒)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양생(養生)은 강강(康强)을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다만 이익을 추구하는데 지나지 않으나, '이천(伊川)이 말한 것은 순전히 천리(天理)이라" 하였습니다.
또 정자가 부주(州)에서 돌아와서도 용모나 기색이나 수염이 모두 그전보다 나아졌기 때문에, 문인이 묻기를,
"어떻게하여 이와 같이 건강하실 수 있습니까." 하였더니, 말하기를, "학문의 힘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인의(仁義)의 마음은 사람마다 같이 받았으나 자품(資稟)이 트인 것〔開〕과 가리운 것〔蔽〕이 있으며,
진원(眞元)의 기는 사람마다 같이 가지고 있으나 혈기에 허(虛)와 실(實)이 있습니다.
인의의 마음을 잘 기르면 가린 것이 열릴 수 있어서 그 천부의 본심을 온전히 할수 있게 되고,
진원의 기를 잘 기르면 허가 실이 될 수 있어서 그 하늘로부터 받은 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기르는 방법도 또한 밖에서 타물(他物)에 가탁(假託)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흔들리거나 손상되지 않게 할 따름입니다.
천지의 기화(氣化)는 생생무궁(生生無窮)하여 잠간 동안이라도 정지하지 않는데, 사람의 기는 천지와 서로 상통하므로,
양심과 진기(眞氣)도 천지의 기와 함께 생장합니다.
다만 그것이 상(傷)하고 해(害)되는 것은 여러 갈래이어서 생장이 소멸하는 것을 능히 이겨내지 못하여, 계속 질곡되어 없어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마음은 금수(禽獸)가 되고, 기(氣)는 일찍 시들어버리게 되는 것이니, 가히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양심을 해치는 것은 귀·눈·입·코와 시지(四肢)의 욕망이고, 진기를 해치는 것도 또한 이 욕망 아닌것이 없습니다.
대개 귀와 눈이 성색(聲色)을 좋아하는 것은 진실로 마음에 해로운 것이지만, 음난한 소리와 아름다운 색은 뼈와 살을 결단내는 도기와 톱이요,
입과 몸으로 즐기고 좋아하는 것은 진실로 마음에 해로운 것이지만, 입을 상쾌하게 하는 맛은 반드시 오장(五臟)을 상하게 하고,
한가하고 안일한 것은 근육과 맥(脈)을 해이하게 하여, 드디어 행동과 휴식을 올바른 도리에서 어긋나게 합니다.
희(喜)·노(怒)는 그 중용의 도리를 잃어버려, 마음은 날로 방자해지고, 기는 날로 방탕하게 되어,
마침내는 일기(一氣)의 관통(貫通)이 끊어지고, 백해(百骸)의 유대가 풀어지게 되는 것이니,
장차 어떻게 입명(立命)하며 세상에 길이 살아갈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을 기르는 것과 기를 기르는 것은 실로 한 가지 일이므로,
양심이 날로 생장하면서 상하고, 해되는 것이 없어서 마침내 그 가려진 것을 모조리 다 없애버리게 되면 호연(浩然)의 기가 성대하게 흐르고 통하여,
장차 천지와 함께 동체(同體)가 될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과 길고 짧은 것은 비록 정하여진 수〔定數〕가 있다 하더라도, 나에게 있는 도리는 다한 것이니 어찌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유념하시옵소서.
< 주 >
68) 음악에 관한 기록으로 예기(禮記)속에 있는 편명(篇名)이다.
제8장. 정 심(正心)
신이 살피건대, 윗 두 장(章)의 공부는 정심(正心) 아닌 것이 없으나, 각각 주장하는 바가 있으므로,
따로 정심을 주로 한 선현의 말씀〔前訓〕을 편집하여 함양과 성찰의 뜻을 상세히 논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경(敬)은 성문(聖門)의 제일의(第一義)이므로 철두철미하게 하여야지 간단(間斷)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대요는 경(敬)을 주로 삼았습니다. (제 3 장의 수렴(收斂)은 경의 처음이요, 이 장은 경의 끝입니다.)
◆ 함양(涵養)에 대한 말씀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그 마음을 간직하여〔存〕그 성(性)을 기르는〔養〕것은 하늘을 섬기〔事〕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맹자)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존(存)은 잡고 놓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요, 기른다〔養〕는 것은 순하여 해(害)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며,
섬긴다〔事〕는 것은 봉승(奉承)하여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심성(心性)은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인데, 존양(存養)하지 못하여 이를 잃어버린다면, 하늘을 섬기는 소이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다만 하나의 천리(天理)가 있는 것인데, 만일 보존하여 얻지 못한다면 다시 무슨 사람이 되겠느냐."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만약 존양(存養)할 수 없다면 다만 말뿐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맹자(孟子)의 이른바 존양은 동(動)과 정(靜)을 통관하여 말한 것으로서, 즉 성의와 정심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현들이 정(靜)한 때의 공부를 논할 적에는 흔히 존양과 함양을 말하였으므로, 그 절요(切要)한말을 가려내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함양하면 곧 청명(淸明)하고 고원(高遠)한 데에 도달한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희(喜)·노(怒)·애(愛)·락(樂)을 하기 전에 동(動)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까, 정(靜)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정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정한 가운데 목적하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니, 여기가 바로 어려운 곳이다.
배우는 사람은 먼저 공경을 이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인데, 능히 공경하면 스스로 이를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좌(靜坐)할 때에 물(物)이 앞을 지나가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일이 어떠한가를 보아야 한다.
만약 큰 일이라면, 가령 제사(祭祀)때와 같이 구슬〔旒〕로 눈 앞을 가리우고, 솜〔〕으로 귀〔耳〕를 막았다면,
모든 물이 앞을 지나가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리지 아니할 것이요. 만약 일이 없을 때라면, 눈으로 보고, 귀로는 들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소병(蘇昞)이 "희·노·애·락이 발현하기 전에 중(中)을 구하면 됩니까." 물으니, 대답하기를, "옳지 않다.
이미 희·노·애·락이 미발(未發)하기 전에 구한다고 하면, 바로 이는 생각한 것이니, 이미 생각한 것은 바로 이발(已發)이다.
이미 발하였으면 화(和)라 이르며, 중(中)이라 이르지 못한다. 희·노·애·락이 미발할 때에 존양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으나,
만약 희·노·애·락이 이발하기 전에 중을 구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정자(程子)의 '조금이라도 생각했다〔才思〕하면
곧 이미 발한 것〔已發〕이라'고 한 일구(一句)는 자사(子思)가 말한 이외의 뜻을 발명한 것이다.
이는 대개 희·노·애·락의 발현을 기다림이 없어도, 다만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이것은 이발인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이 뜻은 정미(精微)하여 미발의 경계에 대해 충분히 다하였으니, 여기서 더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보지도 않고 듣지고 않을 때가 바로 희·노·애·락의 미발처이니,
항상 이 마음을 제기(提起)하여 여기서 미연에 방지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계신(戒愼)·공구(恐懼)는 너무 중하게 여길 것은 없고,
다만 이를 수습(收拾)하여 나가면 곧 여기에 있는 것인데, 이것은 이천(伊川)의 이른바 공경이다." 하였습니다.
○서산 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계신·공구는 다만 사물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 항상 지경(持敬)으로 혼매(昏昧)케 하지 않을 따름이다.
생각이 형성되지 않아서 지각(知覺)이 몽매(蒙昧)하지 않으면, 성(性)의 체(體)는 스스로 가릴 수 없는 것이니,
정자(程子)의 이른바 '정(靜)한 가운데에 물(物)이 있다'는 것을 배우는 사람들이 깊이 음미하여 실천해 보면,
마땅히 스스로 볼수 있을 것이며, 오로지 말로써만 구해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미발할 때에는 마음이 적연(寂然)하여 진실로 털끝만한 생각도 없지마는,
다만 적연한 가운데서도 지각이 불매(不昧)하여, 마치 충막무짐(沖漠無朕) 하지마는, 만상(萬象)이 삼연(森然)하게 이미 갖추어져 있음과 같습니다.
이 경지는 극히 이해하기 어렵지마는, 이 마음을 공경으로 지키어 함양이 오래 쌓이면, 스스로 마땅히 힘을 얻게 됩니다.
이른바 '공경으로 함양한다'는 것은, 다른 방법이 아니라 다만 정적(靜寂)하여 염려가 생기지 않게 하고 성성(惺惺)하여
조금도 혼매(昏昧)하지 않게 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발할 때에도 견문(見聞)이 있는가." 묻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만약 물(物)을 보기도 하고 소리를 듣기도 할 때에 염려가 따라 발현되면, 이는 진실로 이발에 속한 것이요,
만약 물이 지나가는 것을 눈으로 보기만 하고 이것을 보는 마음이 일지 않았거나,
귀에 지나는 것을 듣기만 하고 이것을 듣는 마음이 일지 않았거나, 비록 견문이 있더라도 사유(思惟)를 하지 않았다면,
곧 그것이 미발이 되는데 방해 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눈으로는 모름지기 볼 것이요, 귀로는 모름지기 들을 것이다.'하였고,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만약 반드시 보고 듣는 것이 없는 것을 미발처라고 한다면,
다만 일종의 의식(意識)이 혼매한 사람이 수면(睡眠)이 부족할 때에,
사람에게 경각(驚覺)한 바 되면, 잠시 동안 주위(周圍)를 알지 못하는 시각(時刻)에 이런 기상(氣象)이 있는 것이다.
성현의 마음은 담연(湛然)하여 못과 같이 깊고 고요하며〔淵靜〕총명이 통철(洞徹)하므로, 결코 이와 같지 않다.'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미발시에도 견문이 있다." 하였습니다.
○또 "보통사람〔商人〕의 마음이, 진실로 미발한 때가 있는데, 그 중체(中體)도 성현의 미발과 분별이 없는가."묻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보통 사람은 함양과 성찰의 공부가 없으므로,
그 마음이 어둡지 않으면 어지러워져서 중체가 서지 않지마는, 다행히 잠시 동안이라도 혼란(昏亂)하지 않게 되면 그 미발의 중(中)은 성현과 분별이 없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혹시 방자하여지기도 하고, 요란하여지기도 하여, 도로 그 본체를 잃게 되니,
삽시간의 중(中)으로 어찌 온종일의 혼란을 구하여 큰 근본을 세울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연평(延平) 선생은 정(靜)한 가운데서 희·노·애·락이 미발의 중(中)이라는 것을 본다고 하였는데, 미발은 어떤 기상(氣象)이 되는 것인가.
주자(朱子)는, '이선생(李先生)은 정(靜)한 가운데서 큰 근본을 체인(體認)하였다.'하였는데,
이 설은 어떤가."묻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바로 이발이므로,
이미 체인이라고 하였으면 성찰의 공부요, 미발시의 기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만년(晩年) 정론(定論)에 체인자(體認字)의 글자를 중하게 놓았다 하니, 이것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학자가 정좌(靜坐) 하고 있을 때에 이 공부를 하여, 미발시의 기상을 가만가만히 살펴보면,
학문에 나아가는 것과 마음을 기를 적에 반드시 유익할 것이니, 이는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미발(未發) 전(前)은 찾을 수 없고, 이미 깨달은 뒤에는 알맞게 갈라 부쳐서 안배(安排)하는 것을 용납되지 못한다.
그러나 평시에 장경(莊敬)으로써 함양하는 공부가 지극하여, 인욕(人欲)의 사사로운 것으로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그 미발에는 밝은 거울이나 흔들리지 않는 물과 같고, 그 발하는 데도 중절(中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은 나날이 쓰는 본령(本領)의 공부인 것이니, 일에 따라 성찰하고 물에 나아가 미루어 밝히는 데도 반드시 이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종래의 사색(思索)하고 강론하는 것은 단지 마음이 이발한 것이며, 일용의 공부 또한 일의 본말 시종〔端倪〕을 살피고 인식함으로써,
최초의 입각점〔下手處〕으로 삼았다.
이러므로 평시에 함양하는 한 토막의 공부가 결여되어, 사람의 가슴 속을 들떠,
심잠순일(深潛純一)한 맛이 없게 하고 발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사이에도 항상 급박하고 들뜬 느낌을 나타내어서
다시 마음에 화락하고 온화〔雍容〕하며 심후(深厚)한 기풍이 없다.
대개 소견이 한 번 어긋나면 그 해로움이 이와 같이 되므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성찰(省察)에 대한 말씀
○성(誠)은 무위(無爲)이요, 기(幾)는 선악(善惡)이다. (주자(周子) 통서(通書))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진리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무엇을 하는 것이 있겠는가. 미발시입니다.
기(幾)라는 것은 움직임의 미미한 것이니, 선악의 분별이 연유하는〔由〕것이다." 하였습니다.
○조치도(趙致道)는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미발의 체(體)를 밝히고, 이발의 단서(端緖)를 가리킨 것이다.
대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물이 맹동(萌動)하는 미미한 것에서 살펴 나가, 결단하고 선택하여,
거취(去取)할 바를 알아서 본심의 체를 잃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다.
선과 악은 비록 상대되었지만, 마땅히 손〔賓〕과 주인〔主〕을 갈라야 하며,
천리와 인욕이 비록 분파(分派)되었지만 본 줄기〔宗〕와 곁 가지〔孼〕를 살펴야 한다.
정성이 동(動)하여 선(善)으로 나가는 것은, 나무가 뿌리로부터 줄기로 <통하고> 줄기로부터 잎〔末〕으로 <통하여> 상하(上下)로 서로 통달하는 것처럼,
천리의 유행은 마음의 근본〔本主〕이요, 성의 정통을 이은 본 줄기〔正宗〕인 것이다.
혹시 곁가지가 잘되고 옆으로 빼어난 것이 혹시 사마귀가 기생(寄生)하는 것과 같다면 이것이 비록 정성이 동이라도 사욕의 유행이기 때문에,
이른바 악인 것이니 마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이는 대개 손〔賓〕으로서 의탁하는 것이며 정성의 본 줄기가 아니라, 이는 대개 곁 가지인 것이다.
실로 일찍이 변별(辨別)하지 않거나 세밀히 가려내지 않는다면,
손〔客〕이 주인〔主〕을 타〔乘〕고 곁 가지〔庶子〕가 본 줄기〔宗子〕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사물이 맹동하는 기미의 사이에 그 발하는 바 향배(向背)를 살펴본다면, 곧게 나가는 것은 천리(天理)가 되고,
곁으로 나가는 것은 인욕(人欲)이 되는 것이니, 곧게 나가는 것은 잘 인도하고, 옆으로 나가는 것은 막고 끊어야 할 것이다.
어러한 공력이 이미 지극하면 마음이 발하는 것은 자연히 한길〔一途〕에서 나오고 천명(天命)을 보전할 수가 있다." 하였습니다.
○범양 장씨(范陽張氏)는 말하기를, "한 생각〔一念〕이 선(善)하면 하늘의 신, 땅의 신, 상서로운 바람, 화평한 기운이 모두 여기에 있고,
한 생각이 약하면 곧 요망한 별·염병의 악귀·흉년·악질의 전염병이 모두 여기에 있기 때문에, 군자는 혼자 있을 때를 삼가한다." 하였습니다.
아무리 성(聖)이라도 생각치 아니하면 광(狂)이 되고, 아무리 광(狂)이라도 잘 생각하면 성이 된다. (주서(周書) 다방(多方))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성(聖)은 본래부터 하기 어려운 것이니, 광(狂)이라도 능히 생각하면 성이 되는 공부에 대해, 그 향하는 곳을 알 것이다.
성은 본래부터 이른바 망념(罔念)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어긋난 생각이 있으면,
비록 광에는 이르지 않았더라도 광이 되는 이치가 또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잡으면〔操〕있고 놓으면〔舍〕없으며,
나가고 들어오는 데 때가 없어서 향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오직 마음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맹자(孟子))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마음이란 잡으면 여기에 있고 놓으면 잃어버리고 그 나가고 들어가는데,
정(定)한 때가 없고, 정한 곳도 없어 위태롭게 움직이고 안존하기가 어려움이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출(出)과 입(入)의 두 글자는 선도 있고 악도 있기 때문에, 다 놓아서 없는 소치(所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마음의 체(體)·용(用)을 가리켜, 그 두루 흘러 변화하여 신명의 예측할 수 없는 묘(妙)를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불자(佛者)에는 관심(觀心)의 설(說)이 있다는데, 그렇습니까."물으니,
대답하기를, "마음은 몸의 주(主)가 되는 것으로서 하나이지 둘은 아닌 것이다.
이제 다시 어떤 물체가 있어서 마음을 관조한다면,
이것은 이 마음 외에 다시 한 마음이 있어서, 이 마음을 주관(主管)하는 것이 되므로, 이 말은 틀린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아직 발하기 전은 다만 공경으로써 지양(持養)하여야 하고 이미 발한 뒤에는 마땅히 공경으로써 살펴야 하는 것이나,
이미 발한 정(情)은 마음의 용(用)이어서, 이것을 심찰(審察)하면 마음으로써 마음을 보는 〔以心觀心〕병통을 면치 못한다.'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미 발한 곳을 마음의 본체의 권도(權度 : 권(權)은 저울, 도(度)는 자(尺))로하여 마음의 발한 것을 살피는 것은
경중(輕重)·장단(長短)의 차이가 있을까 염려해서이다.
만약 발한 바의 마음으로 따로 마음의 본체를 구하려고 한다면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대저 잡아 둔다는 것은, 저것으로서 이것을 잡아두는 것이 아니며, 놓아서 잃는다는 것은 저것으로서 이것을 놓아서 잃어버린다는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 스스로 잡으면 잃었던 것을 두게 되고, 놓고 잡지 않는다면 두었던 것도 잃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사람은 꿈꾸는 사이에도 자기가 배운 바의 얕고 깊은 것을 점칠 수 있는데, 꿈에 전도(顚倒)하는 것은
심지(心志)가 정해 있지 아니하거나, 잡아 두는 것이 굳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사람의 마음에 걸려 있는 일이 착하다고 하더라도 꿈에 보는 것은 해로운가." 하니,
대답하기를 "착한 일이라 하더라도 마음은 역시 동(動)하는 것이다.
무릇 일에 조짐(兆朕)이 있어 꿈에 나타난 것은 해롭지 않으며, 이 밖에는 다 망동(妄動)이 된다." 하였습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마음이 맑을 때가 적고 어지로울 때가 많아 마음이 맑을 때는 보면 밝고 들으면 총명하여 사체(四體)가 얽매인〔束〕것이 없어서
자연히 공근(恭謹)하여 지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이와 반대인데 이와 같은 것은 무엇인가 하면
대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미숙(未熟)하여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고, 상심(常心)이 적기 때문이요,
세 속의 마음을 없애지 않아서 실심(實心)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가 주차(奏箚)69)에서 이르기를, "사대부(士大夫)로서 의견을 아뢰는 자들이, 폐하의 몸에다 근본을 두지 못하고,
어떤 사건의 지엽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니 신(臣)은 그 정치가 나오는 근본을 단정히 하고,
사물에 응하는 근원을 맑게하여 폐하의 정대하고 굉원(宏遠)하신 의도를 도와서, 천하의 일을 다 성지(聖志)의 바라시는 대로 되게 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신이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한 생각이 싹트면 반드시 이것이 천리(天理)냐, 인욕(人欲)이냐를 삼가 살피시고,
만일 천리이면 공경으로써 충하시되 조금이라도 막히지 않게 하시며, 만일 인욕이라면 공경으로써 극복하시되 조금도 얽혀 막히지 않게 하시어,
언어와 동작으로부터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데까지도 이것으로써 미루어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아시면 행사하시는데 힘이 부족하지 않을까 두렵게 여기시고,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아시면 버리시는데 결단성이 없지 않을까 두려워 하신다면 성심(聖心)이 환하게 트여서
안팎이 서로 투철하여 털끝만한 사욕도 그 사이에 끼일 수 없게 되고,
천하의 일은 폐하의 원하시는 바의 뜻대로 아니 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몸에 노여워하는〔〕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고,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한다. (「대학」하동)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몸에 있다고 하는 몸은 마땅히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분치(忿)는 노(怒)한다는 것이다. 대개 이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작용이므로, 사람에게 없을 수 없다.
그러나 한 번 있어 살피지 못한다면, 욕(欲)이 움직여서 정이 이겨, 그 작용의 행하는 바가 바른 것을 잃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이 네 가지는 다만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미리 마음 속에 있어서는 안된다.
만약 노여운 마음이 있으면 죄 있는 자를 때려 주되, 그러고 나면 마음이 바로 화평하면 이것은 그 마음을 두지 않은 것이다.
만약 마음이 늘 화평하지 못하면 이는 곧 마음을 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마음은 물(物)에 얽히면 즉시 동(動)하게 되고 물에 얽히는 까닭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일이 오기 전에 기대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요,
<둘째는> 일이 이미 끝났는데도 아직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는 것이며,
<세째는> 바로 일에 응하여 편중(偏重)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물에 결박하여 매여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는 것이므로 다른 일이 면전(面前)에 오게 되면,
곧 어긋나게 되는 것이니 어찌 마음의 바른 것을 얻겠는가. 성
인의 마음은 형연(瑩然)히 허명(虛明)하여, 사물을 보면 크나 작으나 4방 8면으로 물에 따라 응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이 마음에는 처음부터 그런 일들이 있지 않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가 단주(州)에서 다리를 수리할 때, 긴 통나무 하나가 부족하여 널리 민간에 구하였다.
뒤에는 나들이 하다가도 숲의 좋은 나무를 보게 되면 꼭 계산하여 보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마음에는 한 가지 일〔事〕도 있어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으나, 가슴 속에 오래 두고 뉘우치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습니다.
마음이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마음이 있지 않다면 곧 주재하는 것이 없어서 그 몸을 검속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이 마음의 신령한〔靈〕것은 한 몸의 주(主)가 되는 것이므로,
진실로 그 바른 것을 얻어서 이에 있지 아니함이 없다면, 귀·눈·코·입과 사지백해(四肢百骸)가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 없이 그 일에 이바지하고,
동정(動靜)·어묵(語默)·출입(出入)·기거(起居)가 오직 내가 할 대로 하게 되어서 이(理)에 맞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몸은 여기에 있으되 마음은 저기로 팔려서 혈육의 몸〔軀〕을 관섭(管攝)하는 것이 없어서,
얼굴을 들어 새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려 다른 사람에게 딴 소리 하지 않는 일이 드물다." 하였습니다.
○또, "오늘의 배우는 자들이 놀라운 진보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다만 마음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하건대, 내가 소년시(少年時)에 동안(同安)에서 살았는데,
밤에 종 소리가 울리면 한 번 울리는 소리가 끊어지기도 전에 이 마음은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경계하고 반성하였으며, 이 때문에 위학(爲學)은 모름지기 치지(致志)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마음은 반드시 내 몸 속〔腔子裏〕에 있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강자(腔子)는 구각(軀殼)과 같은 말입니다.
○남헌 장씨(南軒張氏)는 말하기를, "마음이 있다는 것은 공경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교봉 방씨(蛟峯方氏)는 말하기를, "위에서는 마음이 있는 것의 병을 말한 것이요, 여기서는 마음이 없는 것의 병을 말한 것이다.
신이 살피건대, 이는 비록 마음이 있고 마음이 없는 구별이 있지마는, 그 실상은 마음이 편벽되게 얽히는 것이 있으므로,
주재를 세울 수가 없어서 있지 않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유심과 무심은 두 병이 아닙니다.
◆ 다음은 함양과 성찰에 대한 통론
○이윤(伊尹)은 말하기를, "이〔〕하늘의 밝은 명령〔明命〕을 돌아본다〔顧〕." 하였습니다. (상서(商書) 태갑(太甲))
주자(周子)는 말하기를, "고(顧)는 항상 눈〔目〕을 거기에 두는 것을 말한것이요, 시()는 이〔此〕와 같은 말이다.
하늘의 밝은 명(命)은 곧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서, 나의 덕(德)이 된 것이니, 항상 눈을 여기에 둔다면 밝지 않을 때가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다만 도리가 오래도록 눈 앞에 있는 것을 보며, 사물에 막히거나 꺼리끼지 않게 되어서,
한 사물도 있지 않으면 그 형상(形象)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쌍봉 요씨(雙峯饒氏)는 말하기를, "정존(靜存)과 동찰(動察)은 다 돌아보는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보이지 않는 데서도 삼가고 들리지 않는 데서도 두려워하며,
그 동함에는 물에 당하여 이치를 보고〔卽觀物理〕일에 따라 마땅한 것을 헤아리는 것, 이것을 항상 눈을 거기에 둔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호계수(胡季隨)는 말하기를. "아직 발하기 전은 다만 함양(涵養)할 것이요,
발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성찰(省察) 공부를 할 것이니, 함양하는 것이 익숙할수록 성찰도 더욱 정(精)하여 진다." 하였습니다.
불경(不敬)하지 말고〔母〕엄연(儼然)히 생각하듯 하며, 말〔辭〕이 편안하며 일정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예기(禮記))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무(無)는 금지하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범씨(范氏)는 말하기를, "경례(經禮) 삼백(三百)과 곡례(曲禮) 삼천(三千)을 한마디로 말하게 되면, 불경(不敬)한 것이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불경(不敬)하지 않으면 상제(上帝)라도 대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그 말이 편안하고 조용하며, 안정되지 못한 사람은 그 말이 가볍고 빠르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경의(經意)를 해석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는 것〔主一〕을 공경이라 하고, 잡념을 가지지 않는 것〔無適〕을 일(一)이라 한다." 하였습니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을 물으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다만 달려가지 않는 것인데,
예를 들면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한 일〔一事〕을 끝내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을 하려고하여,
마음에 일일이 가려 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의 갈피〔千頭萬緖〕를 갖고 있는 것과 같은데, 학문은 다만 전일(專一)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설씨(薛氏)는 말하기를, "첫 걸음을 가면 마음이 첫 걸음에 있고, 두 걸음을 가면 마음도 두 걸음 위에 있는 것을 공경〔敬〕이라 한다.
만일 첫 걸음에 마음은 두세 걸음 밖에 있고, 두 걸음에 마음이 다섯 여섯 걸음 밖에 있으면 공경이 아니다.
따라서 글씨를 쓴다든가 처사(處事)하는 데서도 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니, 첫 글자를 쓰면 마음이 첫 글자에 있고,
첫 일을 할 때는 마음도 첫 일에 있어서, 일마다〔件件〕전일하면 바로 공경〔敬〕이다." 하였습니다.)
○각헌 채씨(覺軒蔡氏)는 말하기를, "주일(主一)이란 것은 동정(動靜)을 포괄한다.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이 담연(湛然)하여 항상 존(存)하면 이것은 정할때 주일한 것이요,
일이 있을 때는 마음이 이 일에 응하여 다시 다른 일이 섞이지 않으면 이것은 동할 때 주일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일이 없을 때는 공경〔敬〕이 이면(裏面)에 있고, 마음 속을 이르는 것입니다.
일이 있을 때는 공경이 일 위에 있어서, 일이 있든 없든 나의 공경은 일찍이 간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程子)는, '배움은 전일(專一)한데에 이르러야 좋다.'하였는데, 대개 전일하면 일이 있든지 없든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정제(整齊)하고 엄숙(嚴肅)하면 마음이 곧 전일해지는 것인데 전일하면 그르거나 편벽된 것이 범(犯)하지 않는다.
엄위(嚴威)와 엄각(儼恪 : 공경하고 조심함)은 공경의 도가 아니지만, 공경에 이르려면 모름지기 이를 좇아 들어가야 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이천(伊川)의 정제 엄숙(整齊嚴肅)의 한 마디는 간절하고 지극한 공부를 사람에게 말하여 주었다." 하였습니다.
○상채 사씨(上蔡謝氏)는 말하기를, "공경은 항상 성성(惺惺)하는 법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성성(惺惺)이란 곧 마음이 혼매(昏昧)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공경을 저에 엄숙한 것으로 말한 것이 진실로 옳다.
그렇지만 마음이 만약 혼매하여 촉리(燭理)에 밝지 않다, 비록 억지로 위엄을 부린들 어찌 공경이 될 수 있겠는가.")하였습니다.
○화정 윤씨(和靖尹氏)는 말하기를," 공경이란 것은 그 마음을 거두어 들여서 일물(一物)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윤씨(尹氏)는 말하기를, 공경에는 형(形)과 영(影)이 없고, 다만 심신(心身)을 수렴하면 곧 주일(主一)인 것이다.
예컨대, 사람들이 신을 모신 사당〔神祠〕에 가서 경건한 자세를 가질 때에,
그 마음을 수렴하고 다시 털끝만한 잡념도 없이 하면, 그것이 주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 선생의 (정자(程子)와 사씨(謝氏)와 윤씨(尹氏)입니다.)
공경〔敬〕에 대한 말이 다른 것을 물었더니, 주자이 대답하기를, "비유하면 이 방〔室〕으로 사방에서 다 들어올 수 있지만,
만약 한 쪽으로 따라서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나머지 세 쪽〔三方〕에서 들어오는 곳도 다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요자회(廖子晦)는 말하기를, "정자(程子)는, '주(主)가 있으면 실(實)하여진다.'하였고,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주가 있으면 실하게 되고, 외환(外患)이 들어 올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주가 있으면 허(虛)하여진다.'고 하였는데,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주가 있으면 허하여진다고 한 것은 간사한 것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허(虛)와 실(實)의 두 설(說)은 비록 같지 않지만, 모두 공경을 위주(爲主)로하여 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자회(子晦)의 말은 매우 좋다.
공경하면 곧 안으로 욕심이 싹트지 못하고, 밖으로 유혹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안에서 욕심이 싹트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면 허(虛)요,
밖에서 유혹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 실(實)로서 이것은 단지 동시적인 일이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여덟 가지는 공경의 뜻을 논한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예기(禮記) 표기(表記)의 '군자가 장중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하고, 편안 하고 방자하면 날로 게으르다.'는 말을 가장 좋아했다.
대개 보통 사람의 정(情)은 기탄 없게 되면 날로 광탕(曠蕩)하여지고, 스스로 검속(檢束)하면 날로 규구(規矩)를 이룬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공경은 백사(百邪)를 이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공경은 사람을 붙들어 주는 도리이다.
사람이 기탄없이 행동하고 몹시 게으를 때 공경하면, 바로 이 마음을 붙들어 주고 받쳐 주게 되는데,
항상 이와 같이 하면, 비록 방벽사치(放僻邪侈 : 아무 꺼리낌 없이 제 마음대로 분수에 넘친 치레만 함)하려는 의사가
조금 있더라도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공경은 인욕(人欲)을 대적(對敵)하는 소이(所以)인 것이니, 사람이 항상 공경하면 천리(天理)가 스스로 밝아지고
인욕이 올라 오지 못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네 가지는 공경이 인욕을 이기는 것을 논한 것입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정(靜)한 가운데 사사로운 마음이 넘쳐 나오게 되는 것은 배우는 사람들의 통환(通患)이다.
마땅히 경(敬)을 위주로하여, 사사로운 뜻이 싹트는 것이 주로 어떠한 일인지를 깊이 살피고,
그 가장 심각한 곳에 나아가 무섭게 억누르는〔窒懲〕노력을 가하여, 오래 순숙(純熟 : 완전히 익음) 하여지면 스스로 그 효력을 볼 것이다.
" 하다가도, 또 곁에서 따로 한 소념(小念)이 생겨서 점차 널리 퍼져 가는 것이니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평소 지경(持敬)하는 데는 정(靜)한 때가 가장 좋으나, 일에 임하면 염증이 나고 게을러진다든가.
일에 임하여 혹 힘을 쓰면 분요(紛擾)한 것을 깨닫는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공경을 지니고 있을 때에 갑자기 생각에 끌려 가버리게 되니, 이 세 가지 것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공경을 따로 하나의 일로 간주하기 때문에, 염증이나 권태를 느끼고 생각에 이끌려 가는 것이다.
공경은 다만 자기의 한 마음이 항상 성성(惺惺)한 것이요, 이것을 따로 어떤 일로 간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생이 묻기를, "백우(伯雨)는 어떻게 공부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정좌(靜坐)를 배우고 생각을 억눌렀다."고 한다.
말하기를, "억눌러서는 안되고 다만 방퇴(放退)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방퇴(放退)는 다만 염려(念慮)에 끌려 함께 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전혀 사려(思慮)가 없다는 것은 안되고, 단지 간사한 생각이 없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오로지 마음을 잡고 있다가 놓아버리면 문득 다시 해이하여 흩어지니 어찌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것은 그렇게 힘써 잡을 것은 아니다.
만약 힘써 잡으려 하면 또 한 개의 마음을 더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만약 마음을 놓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정신을 일으키면 이것이 곧 공경〔敬〕공부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고요히 정좌(靜坐)를 오래하고 있으면 <어느>한 생각이 발동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 생각이 어떤 일을 하려는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만약 좋은 것이라면 마땅히 그대로 진행할 것이요, 혹시 일을 요량하는 데 투철하지 못하다면 더 생각을 해 볼 것이며,
만약 좋지 못한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신이 이와 같이 깨닫게 된다면 공경의 공부는 곧 그 속에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공경하는 마음이 있으면 몸 가짐이 자연히 수렴(收斂)되고 힘써 조절되기를 〔安排〕기다리지 않아도 온 몸이 저절로 안정되어진다.
만약 너무 힘써 몸을 조절하려 하면 오래하기가 어렵고 병통이 생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정연하게 수렴하면 너무나 힘쓰는데 빠지게 되고 조용히 마음을 놓으면 또 해이해져서 타락하게 되니,
이것이 배우는 자의 공통되는 근심이다.
그러나 정자(程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역시 반드시 이렇게 스스로 공부해 가면서 덕이 성하게 되면
자연히 이럭 저럭 하여도 그 정당한 것을 얻게 된다.'하였다.
지금은 역시 마땅히 정연하게 수렴하는데 힘쓰되, 다만 몸가짐을 너무 조절해서는 안 된다.
이는 곧 병통을 이룩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위의 7조목은 병통을 살펴 다스리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정심(正心)의 처음은 마땅히 자기의 마음을 엄한 스승(嚴師)으로 삼아서 모든 동작(動作)을 하게 되면, 두려운 바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1·2년 동안 굳세게 지켜 가면 자연히 마음이 바르게 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공경이란 송연(然 : 황송하여 옹송그림)히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듯하다는 뜻인데,
항상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듯하게 되면 감히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못하게 되고 성(誠)에 나아갈 수 있다." 하였습니다.
○면재 황씨(勉齋黃氏)는 말하기를, "공경은 주일무적(主一無敵)을 말한다고 정자(程子)는 말하였으나,
선생(주자朱子를 가리킴)의 설은 또한 '공경은 오직 두려워하는 것이 거기 가까운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공경은 이 마음이 숙연(肅然)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것을 말한다.
두려워하면 마음이 하나〔一〕로 주재〔主〕된다.
가령 종묘(宗廟)에 들어가 군부(君父)를 뵈올 때는 스스로 잡념이 없게 되고,
한가하여 제 멋대로 행동할 때에는 생각이 어수선하고 혼란하여 하나로 주재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설은 서로 표리(表裏)가 되므로, 배우는 자가 체험해 보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각헌 채씨(覺軒蔡氏)는 말하기를, "사람의 일심(一心)은 허령 지각(虛靈知覺)한 것이니,
항상 숙연(肅然)하여 어지럽지 않고, 형연(炯然)하여 어둡지 않으면 고요하여는
이(理)의 본체가 존재하고 감응하여는 이(理)의 작용이 행하여지지 않는 것이 없다.
다만 허령 지각이 능히 욕심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므로,
곧 이 마음의 체용(體用)도 따라 어두워지고 어지러운 것이며, 이 때문에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실로 척연(두려워하는 모양)하고 송연(悚然)하여, 항상 귀신이나 부사(父師)가 위에 임한 듯이 하며,
아래로는 깊은 못이나 살얼음이 있는 듯이 할 수 있다면 허령 지각이 스스로 어둡거나 어지러운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공경의 뜻이 오직 두려워하는 바가 거기 가깝다는 것이다." 하옵니다.
이상 네 가지는 두려움을 가지고 공경〔敬〕의 뜻을 풀이한 것입니다.
○남헌 장씨(南軒張氏)는 말하기를, "이계수(李季修)가 묻되, '공경은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요
진실로 게을러서는 아니 되나, 해가 저 안식(安息)할 때에도 마땅히 때에 따라 힘 쓸 것이다.'하였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해가 져서는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공경인 것이니, 해가 져 안식하는 것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가히 공경의 이치를 논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공경이 있지 않을 때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대개 주야(晝夜)의 동정(動靜)에 마땅히 끊임이 없어야 할 것이니. 만약 밤이 되어 안식하는 것을 공경이 아니라고 한다면, 공경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설씨(薛氏)는 말하기를, "'공경은 덕(德)이 모이는 것이라.'고 한 옛말이 있는데, 이 말은 아주 체득(體得)해야 할 말이다.
대개 도(道)의 묘한 것은 헤아릴수가 없고 정(定)한 바가 없으나, 오직 공경하면 능히 엉겨 모여서 이 이치가 항상 있게 된다.
마음이 공경하면 능히 엉겨 모여서 덕이 마음에 있게 되며, 용모〔貌〕를 공경히 하면 엉겨 모여서 능히 덕이 용모에 있게 되면,
귀·눈·입·코와 같은 종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공경하지 않으면 마음이 방일(放逸)하여, 온 몸이 해이하게 이지러져서 비록 사람의 형체가 있다고 해도,
그 실상은 괴연(塊然 : 홀로 있는 모양)한 혈기의 몸뚱이일 뿐이요 만물〔物〕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敬)이란 한 글자가 곧 덕을 엉겨 모으는 근본이고, 천형진성(踐形盡性)하는 요령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공경으로써 덕을 모은다는 말입니다.
군자는 공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리〔義〕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여 공경과 의리가 서게 되면 덕(德)이 고립되지 않는다.
역(易) 곤괘(坤卦) 문언(文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군자는 공경을 주로 하여 그 안을 곧게 하고 의리를 지켜서 그 밖을 방정하게 한다.
공경이 서면 안이 곧게 되고 의리가 나타나 밖이 방정하게 되는 것인데, 의리가 밖에 나타난다는 것은 밖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공경과 의리가 서 있으면 그 덕이 성할 것이니, 덕이 고립되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본령(本領)은 마땅히 공경을 위주로 삼고 또 집의(集義)의 공효를 얻어
이욕(利欲)이 가리는 것을 물리치면 공경에 더욱 도움이 되는 것이니, 다만 이 하나의 진작과 경각이 동정(動靜)을 관통(貫通)하는 것이다.
단지 일이 없을 때는 한결같이 지양(持養)하여야 하나, 일이 있으면 시비(是非)와 취사(取舍)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안을 곧게 하고 밖을 방정하게 하는 구별이 있게 되는 것이며, 동정으로 판연히 이물(二物)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존양(存養)을 익숙하게 하고 나서 태연하게 행해 나가면, 길이 나아갈 수 있다."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는 데만 힘쓰고, 밖을 방정하게 하는데는 힘쓰지 아니한다면 어떠합니까." 하니,
정자는 말하기를, "안〔中〕에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안이 곧지 않은 것을 걱정할 뿐이요,
안이 바르면 반드시 밖에도 방정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오봉 호씨(五峯胡氏)는 말하기를, "공경한다는 것은 의리를 밝게 하는 소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리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말로는 이렇게 하였는데, 모름지기 스스로가 공부를 해 가야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한다는 것〔敬以直內〕은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없고 가슴 속이 통연(洞然)하며,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는 표리(表裏)가 한결같은 것이요, 의리로써 밖을 방정히 한다는 것〔義以方外〕은 바른 곳을 보면 이렇게 결정하고,
바르지 않은 것을 보면 그렇지 않게 결정하여, 절연(截然 : 칼로 끊은 듯이 확연한 모양)히 방정하게 하여서, 반드시 스스로 공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성문(聖門)에서 배운 사람들은 한 귀(句)를 물을 때에, 성인이 한 귀로 답해 주면 곧 이해하여 실천에 옮겼다.
지금은 말만 많이 하고 실행하려고는 하지 않지만, 만약 실지로 공부를 해보려면,
단지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의 여덟 자(字)를, 일생동안 다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경〔敬〕이 게으른 것을 이기는 이는 길(吉)하고 게으른 것이 공경을 이기는 이는 멸(滅)하며,
의리가 욕심을 이기는 이는 순(順)하고 욕심이 의리를 이기는 이는 흉(凶)하다. 대대례(大戴禮)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공경하면 설 수 있고, 게으르면 쓰러지는 것이다.
이(理)로서 일에 따르는 것은 의리요, 이로서 일에 따르지 아니하는 것은 욕심이다.
공경과 의리는 체용(體用)이다." 하였습니다.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공경하면 만가지 선(善)이 함께 서고, 게으르면 만가지 선이 함께 폐해진다.
의로우〔義〕면 이(理)가 주재되고 욕심스러우면 물이 주재하여, 길흉 존망(吉凶存亡)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인데,
옛 성인들은 이미 이것을 조심하였다." 하였습니다.
(차단(此段)의 말은 단서(丹書)70)에서 나온 것입니다. 단서에는 황제(黃帝)·전제(帝) 도(道)가 실린 까닭으로 옛〔上古〕성인들이라 한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공경과 의리를 겸비〔夾持〕하면, 이것으로부터 곧 천덕(天德)에 상달(上達)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협지(夾持)의 두 자(字)를 놓은 것은 매우 좋다.
경(敬)은 안〔中〕에서 주재하고, 의리는 밖에서 막아, 둘이 서로 겸비〔夾持〕하여, 놓아 두려고 해도 되지 않아 조금도 주실(走失)이 있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아래에서는 물욕(物欲)에 물들지 않고, 다만 천덕에 상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공경〔敬〕은 체(體)요, 의리〔義〕는 용(用)이라 하여 비록 내외(內外)로 나눈다 하더라도 그 실은 공경이 의리를 겸비하고 있습니다.
대개 안을 곧게 하는 경은 공경으로서 존심(存心)하는 것이요, 밖을 방정하게 한다는 의리는 공경으로써 일에 응하는 것입니다.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에 발명이 친절하므로 삼가 다음에 기록합니다.
잠(箴)에 이르기를,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높이 바라보며, 마음을 정(靜)하게 하여, 상제(上帝)에 대월(對越)하라.
(이것은 정(靜)에 어김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발의 움직임은 무겁게 해야 하고, 손의 움직임은 공순해야 하며, 땅을 가려서 밟고 개미둑〔蟻封〕은 돌아가라.
(의봉(蟻封)은 개미둑이요, 협소한 땅도 능히 돌아서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동(動)에 어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문(門)을 나갈 적에는 손님을 보는 듯하며, 일하기를 제사 받들 듯이 하라.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 감히 혹 쉽게 하지 말라. (이것은 겉〔表〕의 바른 것을 말합니다.)
입을 지키기는 병(甁)같이 하고 뜻을 막기는 성(城)같이 하라. 조심하고 조심하여 가볍게 하지 말라. (이것은 속〔裏〕의 바른 것을 말합니다.)
동으로 간다 하고는 서로 가지말 것이며, 남으로 간다 하고 북으로 가지 말라.
일을 당하면 간직하여 다른 데로 가지말라. (이것은 마음의 바른 것이 일에 미치는 것을 말합니다.)
두 가지로써 마음을 이(貳)로 하지말 것이며, 세가지로써 마음을 셋으로 하지 말 것이며 오직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만변(萬變)을 관찰하라.
(이것은 일은 주일(主一)하여 마음에 근본함을 말합니다.)
여기에 종사(從事)하는 것을 지경(持敬)이라 하는데, 동정(動靜)에 어기지 않게 하며 표리(表裏)를 서로 바르게 하라.
이것은 윗 글을 다 맺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사욕이 만갈래로 일어나서, 불을 놓지 않아도 뜨거우며, 얼음이 얼지 않아도 차진다.
(수유(須臾)는 때를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무적(無適)하지 못하는 병통을 말합니다.)
조금〔毫釐〕이라도 어긋나는 것이 있게되면, 천지(天地)의 위치가 바뀌어, 삼강(三綱)이 이미 문란하게 될 것이고, 구법(九法)71)도 무너질 것이다.
(호리(毫釐)는 일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의 주일(主一)하지 못하는 병통을 말합니다.)
아아, 너희들은 생각해야 하고 공경해야 할 것이다. 묵경(墨卿)에게 이 경계를 맡겨서 감히 영대(靈臺 : 마음)에 고(告)한다." 하였습니다.
이 일편(一篇)은 총괄하여 맺는 것입니다.
○서산 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공경의 뜻은 여기에 이르러 더 남은 것이 없으니,
성학(聖學)에 뜻을 둔 이는 마땅히 익히며 반복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의 집 양쪽에는 좁은 방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한가한 날은 그 안에서 묵좌(默坐)하여 독서하였으니,
왼쪽은 경재(敬齋)라 이름하고, 오른 쪽은 의재(義齋)라 이름하여, 기록하기를,
"주역〔易〕을 읽고 두 가지 말을 얻은것은,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이며,
학문하는 큰 요령은 이와 바꿀 것이 없다고 여겼으나, 힘쓸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중용」을 읽고 수도(修道)의 가르침을 논한 것을 보니, 반드시 계신 공구(戒愼恐懼)를 처음으로 삼아야만 지경(持敬)하는 근본을 얻으며,
또 「대학」을 읽고 명덕(明德)의 차례를 논한 것을 보니 반드시 격물 치지(格物致知)를 먼저 하여야만 명의(明義)의 단서(端緖)를 얻을 수 있었다.
이미 본 두가지의 공부는 일동일정(一動一靜)이 서로 용(用)으로 되는 것이었으며,
또 주자(周子)의 태극(太極)의 논에 합쳐져 천하의 이(理)가 유명 거세(幽明鉅細)와 원근 천심(遠近淺深)이 일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완미(玩味)하고 즐거워서, 족히 내가 종신토록 해도 싫지 않을 것이니, 또한 밖으로 사모할 겨를이 어찌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 다음은 존성(存誠)을 반복하여 정심(正心)의 의(義)를 다하였으며, 또한 함양 · 성찰을 겸하여 말씀드림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간사한 것〔邪〕을 막아 그 성실이 존재토록 한다." 하였습니다. (역(易) 건괘(乾卦) 문언(文言))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간사한 것을 막으면 성실은 절로 간직되는 것이니, 사람이 집에서 낮은 담〔坦牆〕을 고치지 않으면 도둑을 막지 못하는 것과 같다.
도둑이 동쪽에서 들어온 것을 쫓으면 다시 서쪽으로 들어오고, 한 도둑을 쫓으면 다시 한 도둑이 들어오는 것은
그 낮은 담을 고쳐서 도둑이 자연히 이르지 않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기 때문에 간사한 것을 막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공경은 간사한 것을 막는 도(道)이니, 간사한 것을 막는 것과 정성을 보존하는 것은 다만 이 한 가지 일이다.
선(善)을 버린다면 곧 악(惡)이요, 악을 버린다면 곧 선인 것인데, 비유하면 문을 나가지 아니하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생각〔思慮〕은 비록 많지만 바른 데서 나온 것이라면, 역시 해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말하기를 "가령 종묘〔宗廟〕에서는 공경을 주로 하고 조정에서는 씩씩한 것을 주로 하며,
군려(軍旅)에서 엄숙한 것을 주로 하는 것이라면 좋으나,
만약 때가 아닌데도 발하여 분연하게 절도가 없다면 비록 바른 것이라도 간사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이(李)선생이 '사람 마음 가운데 커다란 악념(惡念)은 제복(制伏)하기 쉽고,
대단치 않은 이해(利害)를 계교(計較)하여 잠간 오고가는 염려 (이것은 부념(浮念)입니다.) 가 부단히 서로 이어져서
몰아내어 없애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제 보니 사실 그렇다." 하였습니다.
○임천오씨(臨川吳氏)는 말하기를, "범인(凡人)들도 자못 이것이 이(理)가 되고 선(善)이 되는 것을 알며,
저것은 욕(欲)이 되고 악(惡)이 되는 것을 알되, 뜻이 기(氣)를 이기지 못하여, 한가히 홀로 처하는 사이에 간사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인데,
간사한 생각이 있게 되면 곧 막고 누르는 것이 스스로 속이지 않는 성실인 것이다.
대저 이미 간사한 생각이 없다면 생각하는 바가 다 이(理)요, 선(善)이다.
그런나 한 생각이 일어나자 마자 또 한 생각이 싹트거나, 그것이 그치지도 않았는데 여러 생각(諸念)이 서로 이어진다면 이것은 이(二)이요, 잡(雜)인 것이다.
욕(欲)이나 악(惡)은 아니나 역시 간사한 것이라 한다.
대개 먼저 사욕과 악념의 간사한 것을 끊어버린 뒤에 이(二)나 잡된 간사〔邪〕한 것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니,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차례를 어찌 뛰어 넘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시경(詩經) 삼백편(三百篇)의 뜻을 한 마디로 총괄한다면 "생각〔思〕에 간사한 것〔邪〕이 없다." 하엿습니다. (「논어」 ○역시 공자(孔子)의 말)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내용이, 선한 것은 사람의 착한 마음을 감동시켜 일으킬 수 있고,
악한 것은 사람의 나쁜 뜻을 징창(懲創 :징계하고 벌함)할 수 있어, 그 작용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정성(情性)의 바른 것으로 돌아가게 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말은 미완(微婉)하고, 또 각각 한가지 일로 인하여 발한 것도 있어서,
그 전체를 바로 가리킨 것을 구하면, 이보다 명백하고도 다한 것이 있지 아니하므로,
공자〔夫子〕가 '시 3백 편인데 오직 이 한 마디로써 그 뜻을 충분히 다 덮을 수 있다, 한 것이다.
그 사람에게 명시(明示)한 뜻이 깊고 간절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공자의 이 말씀은 시를 논하기 위하여 말한 것인데, 다만 사무사(思無邪)는 성이라고 생각하므로, 정심(正心)의 장(章)에 실었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사무사(思無邪)와 무불경(毋不敬)의 이 두 귀〔二句〕만을 따라 행하면 어찌 어긋남이 있겠는가.
어긋남이 있는 것은 다 불경(不敬)과 부정(不正)에 말미암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소자(邵子)가 말하기를, "입으로 말하는 것은 몸으로 행하는 것보다 못하고, 몸으로 행하는 것은 마음으로 다하는 것만 못하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이 들을 수 있고, 몸으로 행하는 것은 사람이 볼 수 있으며, 마음으로 다하는 것은 신(神)이 알 수 있다.
사람의 총명한 것도 속일 수가 없는데, 하물며 신의 총명한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입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몸이 부끄럽지 않은 것만 못하고, 몸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마음이 부끄럽지 않은 것만 못하다.
입의 허물은 없애기 쉬우나, 몸의 허물은 없애기가 어렵고, 몸의 허물은 없애기 쉬우나, 마음의 허물은 없애기가 어렵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생각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思無邪〕은 성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생각은 말과 실천보다 먼저 있으므로 생각에 간사한 것이 없으면 말하는 바와 행하는 바가 다 간사하지 않은 것이다.
실천에 간사한 적이 없다는 것은 성이 아니며 생각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이 곧 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표리(表裏)가 다 간사하지 않은 것이니, 진정 털끝만한 부정(不正)도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정성이란 것은 하늘의 실리(實理)요, 마음의 본체인데,
사람이 그 본심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사사(私邪)가 있어 가려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공경을 주로 삼아 사사를 다 없애면 본체는 곧 완전하게 됩니다.
공경은 용공(用功)에 긴요한 것이요, 정성〔誠〕은 수공(收功)하는 곳이므로, 공경으로 말미암아 정성으로 이르릅니다.
신이 살피건대, 마음의 본체는 담연(湛然)히 비고 밝아서 빈 거울과도 같고, 평평한 저울대와도 같은데,
물(物)에 감응되어 동하면 칠정(七情)이 응하는 것이니, 이것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다만 기(氣)가 구속되고 욕심이 가려져서 본체가 능히 서지 못하므로 그 작용이 혹시 그 바른 것을 잃기도 하는 것이니,
그 병통은 어둡고 어지러운 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어두움〔昏〕의 병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지혼(智昏)이란 것으로 이는 궁리를 못하여 시비에 몽매(蒙昧)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기혼(氣昏)이란 것으로 게으르고 방일(放逸)하여 잠잘 생각만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어지로운〔亂〕병통도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악념(惡念)이란 것으로 외물(外物)에 유혹되어 사욕을 비교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부념(浮念)이란 것인데, 도거(掉擧) 산란(散亂)하여 (도거(掉擧)는 생각이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끊임 없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생각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므로 부념(浮念)이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은 이 두 가지 병통에 곤란을 겪게 되어, 아직 물에 감응되기 전에는 어둡지 않으면 어지러워서 이미 미발(未發)의 중을 잃고,
물에 감응되었을 때에는 지나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그 이발(已發)이 화(和)할 수 있겠습니까.
군자는 이 때문에 근심하므로 궁리하여 선(善)을 밝히고, 돈독한 뜻으로 기(氣)를 거느리며,
함양하여 정성을 보존하고, 성찰하여 거짓을 버리어 이로써 그 혼란(昏亂)을 다스린 뒤에 감응하지 않았을 때에는,
지허지정(至虛至靜)하여 감공형평(鑑空衡平)한 체(體)가 비록 귀신이라도 그 끝을 엿볼 수 없고
감응할 때에는 절(節)에 맞지 않는 것이 없어서 감공형평의 작용은 유행하여 머물지 않으니,
정대하고 광명한 것은 천지(天地)와 서참(舒慘)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학자의 용력(用力)으로 가장 효과를 얻기 어려운 것은 부념(浮念)입니다.
대개 악념(惡念)은 비록 실(實)하더라도, 만일 성실하게 위선(爲善)에 뜻을 둔다면 이것은 고치는 데 쉽습니다.
다만 부념(浮念)은 무사할 때에 문득 일어났다가 문득 없어져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대개 온공(溫公)의 성의로도 오히려 분란(紛亂)한 것을 근심 하였는데, 하물며 초학자는 어떻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군실(君實 : 사마온공의 자)이 일찍이 사려(思慮)의 분(란(紛亂)한 것을 근심하여,
때로는 밤중에 일어나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니 가위 스스로 고생한다 하겠다." 하였습니다.
다른 날 또 말하기를, "군실이 근년에 와서 그런 병이 점차 비교적 줄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학문을 모르는 사람은 방심하여 그의 생각대로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부념인 불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학자는 정좌수심(靜坐收心)하여 바로 부념의 요란한 것을 알게 됩니다.)
학자는 모름지기 항상 공경을 주로 하여 경각(頃刻)이라도 잊지 말 것이니,
일을 당하면 하나〔一〕를 주장하여, 마땅히 머물러야 할 데에 각각 머무르게 하고,
일이 없이 정좌하고 있을 때에는, 만약 생각이 일어나면 반드시 무슨 일인가 곧 각성하되
악념(惡念)일 것 같으면 곧 용맹하게 단절시키어, 털끝만큼이라도 나타날 실마리〔苗脈〕를 머물러 두지 말 것이요.
만약 선념(善念)이면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일이라면 (이것은 선념이 때에 맞는 것입니다.)그 이치를 궁구할 것이요,
아직 요해(了解하지 못한 것을 요해하여 이 이치를 미리 밝게 할 것이다.
만약 이해(利害)와 관계없는 생각이거나, 혹시 선념일지라도 적당한 때가 아니면 이것은 부념입니다.
부념이 일어나는 것을 일부러 싫어하면 더욱 어지럽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이 싫어하는 마음도 역시 부념인데 부념인 것을 깨달아 안 뒤에는 다만 가볍게 추방하고
이 마음을 수습하여 그것과 함께 가지 말게 하면 그런 생각이 일어나도 다시 그치게 됩니다.
(염려가 분란할 때에, 이 마음으로 살펴 깨달아 그것이 부념인 줄 알고, 끌려 함께 가지 않으면 차츰 스스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용공(用功)하여 아침 저녁으로 씩씩하게 하여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게으른 생각을 내지 말 것이니,
만일 힘을 얻지 못하여 혹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한 생각이 들 때에는, 역시 반드시 정신을 가다듬어 일으키고,
마음 속을 정결하게 하여 일념(一念)도 없게 하고, 기상(氣象)을 청화(淸和)하게 하여, 오랫동안 순수하게 익혀서, 엉겨 정해지면,
항상 이 마음이 탁월하게 서 있어서, 사물에 이끌려 더럽혀지지 아니하고, 나의 시키는 대로 되어 뜻과 같지 않은 것이 없어서,
본체의 밝은 것이 가려지는 바가 없고, 밝은 지혜가 비추어 권도(權度)가 어긋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정(定)한 연후에 광명(光明)이 있는 것이니, 만약 이역(移易)하여 정하지 않으면, 어찌 광명이 있겠느냐." 하였습니다.)
가장 좋지 않은 것은 급하게 조석(朝夕)으로 효과를 기대하여, 효과가 없으면 곧 타락(墮落)하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정심(正心)은 종신의 사업입니다.
그 중요한 것은 방씨(方氏)의 이른바 "중허(中虛)하면서 주재(主宰)가 있다."는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유념(留念)하시옵소서.
< 주 >
69) 임금에게 올리는 간단한 형식의 상소문(上疏文).
70) 도가(道家) 계통의 서적을 말한다. 〔黃帝頊之道存乎 師尙父曰 在丹書〕《大戴禮武王踐》
71) 홍범(洪範)의 구주(九疇)를 말한다. 〔聖賢之道不明 則三綱淪 而九法〕《韓愈與孟尙書書》
제9장. 검 신(檢身)
신이 상고하옵건대, 정심(正心)은 안을 다스리는 것이요, 검신(檢身)은 밖을 다스리는 것으로서, 이것은 사실 똑같이 하는 일이요,
오늘 정심을 하고 내일 검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공부는 안과 밖의 구별이 있기 때문에 두 장으로 나눈 것입니다.
◆ 다음은 몸을 공경하고 예법을 조심하는 공부에 대한 말씀
공자는 말하기를, "군자는 공경하지 않음이 없지만 몸을 공경하는 것이 큰 일이 된다.
몸이라는 것은 어버이의 가지니, 감히 공경하지 않을 것이랴.
그 몸을 공경하지 못하면 이것은 어버이를 상하는 것이요, 그 어버이를 상하면 이것은 그 근본을 상하는 것이요,
그 근본을 상하면 가지도 따라 망하게 되느니라." 하였습니다. (예기(禮記)하동. ○공자의 말은 여기서 그침.)
장락 유씨(長樂劉氏)는 말하기를, "몸은 비록 내게 있는 것이지만 그 기운은 어버이로부터 받았고 선조에게서 전하여온 것이니,
자기가 가볍게 생각하여 욕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군자는 음탕한 소리와 어지러운 색을 듣고 보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음란한 풍악과 사특한 예절을 가까이 하지 않으며,
태만하고 간사하고 편벽한 기운을 몸에 두지 않아서, 귀·눈·코·입·마음·몸 등의 모든 것이 모두 순하고 바름으로 말미암아 그 의(義)를 행하게 한다.
서산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군자가 스스로 수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없고, 안과 밖으로 그 공이 이르게 하는 것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예법과 음악은 잠시도 몸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니 중심이 잠시라도 화평하지 않고, 즐겁지 않으면 야비하고 간사한 마음이 들어오며,
외모가 잠시라도 장엄하지 않고, 경건(敬虔)하지 않으면 태만한 마음이 쉽게 들어오는 것이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들어온다〔入〕는 한 글자는 바로 그것이 밖에서 유인되어 그렇게 되는 것이요,
본심에 사실 이런 나쁜 것이 있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본시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안을 차지하여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이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사람은 예법이 있으면 편안하고 예법이 없으면 위험하다.
공자는 말하기를, "예법이 없으면 손·발을 둘 데가 없고, 귀·눈을 더 할 데가 없어서, 진퇴(進退)하며 읍양(揖讓)하는 데에 규칙이 없게 된다.
이런 때문에 거처하는 데는 어른과 어린이가 그 분별을 잃으며, 집안에서는 삼족(三族)이 그 화목을 잃으며, 조정에서는 관작(官爵)이 그 차례를 잃으며,
사냥하는 데에는 무술 다루는 일〔戒事〕이 그 계책을 잃으며, 군중〔軍中〕에서는 무공(武功)이 그 법칙을 잃으며,
궁실이 그 절도를 잃으며 양정(量鼎)은 그 원모습을 잃고, 맛이 그 때를 잃으며, 음악은 그 절차를 잃고, 수레는 그 바퀴를 잃으며,
귀신이 그 흠향함을 잃고, 상사에 그 슬픔을 잃으며, 변명하여 설명함에 그 당(黨)(당은 유(類)입니다.)을 잃으며,
벼슬이 그 체모를 잃고, 정사가 그 시책(施策)을 잃으며, 몸에 더하고 앞에 놓음에 모든 움직임이 그 마땅함을 잃는다." 하였습니다.
○관의(冠義)에 말하기를, "대개 사람의 사람된 소이는 예의(禮義)인데, 예의의 시초는 용체(容體)를 바루고, 안색을 정제하고, 말씨를 순하게 함에 있다.
용체가 바르고, 안색이 정제하고, 말씨가 순한 후에 예의가 갖추어져서 바른 군신이 되고,
부자가 친히 하며, 장유가 화목하여, 군신이 바루 되고, 부자가 친해지고, 장유가 화목한 후에 예의가 서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공부하는 이가 예의를 버린다면 배불리 먹고 종일토록 생각하고,
일하는 것이 없이 하류의 백성들같이 되고, 하는 일이란 옷입고 밥먹는 것과 즐기고 노는 즐거움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정숙(正叔)선생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예법에 조심하기를, 4·50년이나 하시니 매우 수고롭고 괴롭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날마다 편안한 곳으로만 다니니 무엇이 괴로우리오.
다른 사람들은 날마다 위태로운 곳으로만 다니니 그것이 수고롭고 괴로운 일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위의(威儀) 용지(容止)의 규칙에 대한 말씀
○「시경」에 이르기를, "주밀한〔抑抑〕위의(威儀)는 덕의 바른 곳〔隅〕이로다.
위의를 공경하고 조심하여야 백성의 법칙이로다." 하였습니다.(대아(大雅)의 억편(抑篇))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억억(抑抑)은 주밀한 것이요. 우(隅)는 가의 모난 곳〔廉角〕이다." 하였습니다.
○정씨(鄭氏) 말하기를, "사람이 위의에 주밀하고 자세한 것은 그 덕이 반드시 엄정(嚴正)함으로서이다.
그러므로 옛날 어진 이는 도를 행하고 마음이 평정하여 밖을 보아서 안을 알 수 있는 것이니
궁실(宮室)의 제도에서 안에 먹줄을 쳐 곧게 하면 밖에 가녁이 모나 바른 곳〔隅廉〕이 있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증자(曾子)는 말하기를, "군자가 도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용모를 움직이는 데에는 사나움과 거만함을 멀리 하고, 안색을 바루 하는데에는 믿음을 가까이 하며,
사기(辭氣)를 내는 데에는 비루하고, 어긋남을 멀리 해야 할 것이다.
<제사 드리는 데 쓰는> 변두(豆)에 관한 일 같은 것은 맡은 사람〔有司〕이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귀하다는 것은 소중하다는 것과 같다. 용모는 온 몸을 들어 말한 것이다.
사나움〔暴〕은 거칠고 사나움이요, 거만한 것〔慢〕은 버릇 없는 것이다.
믿어움〔信〕은 진실한 것이니, 안색을 바르게 하는 데에 믿어움을 가까이 한다 함은 안색만 장엄함이 아니다.
사(辭)는 언어요, 기는 성기(聲氣)요, 비루함〔鄙〕은 평범하고 누추한 것〔凡陋〕이다.
어긋남〔倍〕은 배(背)와 같으니 이치에 어긋남을 말하는 것이다.
변()은 대그릇이요, 두(豆)는 나무그릇이다.
이 글의 뜻은, 도(道)는 있지 않는 곳이 없지만 군자가 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이 세 가지 일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몸을 닦는 요점이요, 정사를 하는 근본이니 공부하는 이가 마땅히 잘 간수하고 보살펴서 잠시라도 어길 수 없는 것이다.
변두에 관한 일 같은 것은 기구(器具)의 작은 것인데 도의 전체에서 보면 포함하지〔該〕않은 것이 없지만
거기에 대한 것은 맡은 이가 할 일이요, 군자의 중히 여길 바는 아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용모와 사기(辭氣)는 이것이 바로 덕의 표시〔符〕다." 하였습니다.
○여형공(呂滎公)은 항상 말하기를, "뒷날 공부하는 이는 모름지기 기상(氣象)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니 기상이 좋을 때는 온갖 일이 잘 된다.
기상이라는 것은 사령(辭令)과 용지(容止)의 경솔하고 진중함과 빠르고 천천히 하는 데에서 넉넉히 볼 수 있다.
군자와 소인을 여기서 분별할 뿐만 아니라, 귀하고 천하며 오래 살고 일찍 죽음도 여기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앉는 것은 시동(尸童)72)같이 하며, 서는 것은 재계함같이 해야 한다.(「예기」하동)
정씨(鄭氏)는 말하기를, "시동이 신의 자리〔神位〕에 있는데 앉기를 반드시 장엄하게 하니, 앉는 법이 반드시 시동이 앉듯이 하여야 하며,
사람이 기대서면 거만하고, 공손하지 못함이 많으니 재계하지 않을 때라도 마땅히 제사지내기 전에 재계함과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사씨(謝氏)는 말하기를, "명도선생(明道先生)이 종일 단정히 앉아 있기를 흙으로 만든 사람〔泥塑人〕같이 하다가도
사람을 대하게 되면 온통 한 덩어리의 화기로 되니, 이른바 바라보면 장엄〔儼然〕하다가도 나아가면 온화하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가 공부하는 이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호(顥:정자의 이름)를 이렇게 보지만 호는 매우 공부에 힘을 쓴다." 하였습니다.)
무릇 시선이 낯 위로 올라가면 거만한 것이요, 띠〔帶〕아래로 내려가면 근심하는 것이요, 옆으로 가면 간악한 것이다.
여씨(呂氏)는 말하기를, "<보는 것이> 낯 위로 올라가는 자는 기운이 교만하니 사람에게 낮추어 대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으며,
띠 아래로 내려가는 자는 그 정신을 뺏긴 것이니 근심이 마음에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눈길이 옆으로 가면 반드시 부정한 마음이 가슴 속에 있는 것이니, 이것은 군자로서 삼가야 할 일이다." 하였습니다.
벤〔割〕것이 바르지 않으면 먹지 않으며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는다. (「논어」○공자의 사실을 기록한 것.)
주자는 말하기를, "잠시라도 바른 데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사씨(謝氏)는 말하기를, "성인은 마음이 바른 데에 자리 잡았으므로 바르지 못한 데에는 작더라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옛날 군자는 반드시 옥을 찻는데, 오른 쪽에는 치(徵)와 각(角)으로 하고 왼쪽에는 궁(宮)과 우(羽)로 하였다. (「예기」하동)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치·각·궁·우는 옥소리에 해당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오음(五音)에 있어서> 치는 일〔事〕이 되고 각은 백성이 되기때문에 오른 쪽에 있으니, 오른 쪽은 동작하는 방위가 되는 것이다.
궁은 임금이 되고, 우는 물건이 되는데 임금의 도는 고요하여야 하고, 물건의 도는 쌓여야 하기 때문에 왼 쪽에 있으니, 왼 쪽은 바로 일 없는 방위이다.
상(商)을 말하지 않은 것은 혹, 그것이 서녘의 쌀쌀한 가을 소리〔肅殺之音〕이기 때문에 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나아가는〔趨〕데에는 채제(采齊)의 <시로>하고 행하는 데에는 사하(肆夏)의 <시로>하며 두루 도는 것(도는 것을 말합니다.)은 규(規)에 맞고,
꺾어 도는 것은 구(矩)에 맞아, 나가면 읍하고 물러가면 처든〔揚〕연후에야 옥소리가 울리는 것이다.
때문에 군자가 수레에 있으면 방울소리〔鸞和之聲〕73)를 듣고, 걸어갈 때에는 옥패물을 올리니 그래서, 그르고 치우친 마음이 들어갈 곳이 없는 것이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나갈 때에는 채제의 시를 노래하여 절차로 삼고, 행할 때에는 사하(肆夏)의 시를 노래하여 절차로 삼는다.
규에 맞는 것은 둥근〔圓〕것이요, 구에 맞는 것은 모난〔方〕것이다.
나가서 앞으로 하면 그 몸이 약간 굽으니 읍하는 것 같고, 물러가서 뒤로 하면 그 몸이 좀 들쳐지기 때문에 처든다고 하는 것이다.
나가고 물러나고, 구부리고, 처드는 것이 모두 거기에 맞는 절차를 얻기 때문에 옥패물의 울리는 소리가 장연(然)하여 들을 만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몸가짐과 행동하는 것〔動容周旋〕이 모두 예법에 맞는 것은 성한 덕이 지극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숙인(淑人) 군자는 그 예의가 어긋나지 않도다.
그 예의가 어긋나지〔〕않으니 사방 나라를 바르게 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조풍시구편(曹風鳩篇))
주자는 말하기를, "특()은 어긋나는 것이니, 일정한 법도가 있고 그 마음이 한결같기 때문에 예의가 어긋나지 않으며,
예의가 어긋나지 않으면 사방 나라를 바루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북궁문자(北宮文子)는 말하기를, "위엄이 있어 두려울 만한 것을 위(威)라 하고, 법도가 있어 법받을 만한 것을 의(儀)라 한다.
임금이 임금으로서의 위의가 있으면 그 신하가 두려워 사모하고, 본받아 법하기 때문에 능히 그 국가를 소유하고 어진 소문이 오래도록 가는 것이며,
신하가 신하로서의 의의가 있으면 그 아랫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사모하기 때문에 능히 그 벼슬자리를 지키고 삼족을 보전하며 가정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하도 모두 이와 같을 것이니, 이래서 위 아래가 서로 굳건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위(衛)나라 시에, '위의가 점잖으니〔〕선택할 것이 없다.'하였는데, 이것은 군신·상하·부자·형제·내외·대소가 모두 위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주(周)나라 시에는 이르기를, '친구들의 돕는 것은 위의로 돕는다.'하였으니, 친구의 도는 반드시 서로 위의로 교훈삼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때문에 군자는 위(位)에 있으면 두려워할 만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은 사랑 받을 만하고, 나가고 물러가는 것은 법도가 될 만하며,
주선하는 것은 본받을 만하고, 용모와 거동은 볼 만하고, 하는 일은 법될 만하고 덕행은 따를 만하고, 성기(聲氣)는 즐길 만하며 동작에 문채가 있고,
언어에 빛이 있어 아랫사람에게 이르르니 이래서 위의가 있다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옛부터 위의를 논하는 이 문자(文子)<의 말>처럼 갖춘 것이 없다.
대개 위(威)란 엄하고 사나운 것이 아니요, 의관을 바루 하고, 첨시(瞻視)를 높이며 의젓하여 사람들이 보고서 존경하는 것이니,
이것이 위(威)라는 것이며, 의(儀)란 수식함이 아니요, 몸 가짐과 동작이 예법에 맞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의(儀)라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경계하고 다듬어서 게으름이 없어야 함에 대한 말씀
○소공(召公)이 무왕(武王)에게 고하기를, "아, 밝은 임금은 덕을 삼가나니, 덕이 성하면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군자를 업신여기면 인심을 다하게 할 수 없고 소인을 업신여기면 그 힘을 다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주서(周書) 여오(旅獒), 하동)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덕이 성하면, 몸가짐과 옷차림이 모두 예법에 맞아 능히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어질 것이니,
덕을 삼가는 것은 그 지극한 데에까지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말한 것이다.
덕이 지극하지 않으면 업신 여기는 마음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
군자를 업신여기면 안색을 보고 일어나, 저편에서 반드시 펄쩍 뛰고 멀리멀리 바라보면서 가버릴 것이니, 어찌 그 마음을 다하리요,
소인을 업신여기면 비록 미천하고 위엄을 무서워하여 부리기 쉬울 것 같지만,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신명이 있을 것이니
또한 어찌 능히 그 힘을 다할 것이랴." 하였습니다.
귀 · 눈의 가는 대로만 따라가지 않으면 모든 일의 절도가 정(貞)하기만 하다.
채씨는 말하기를, "정(貞)은 바른 것이다. 귀·눈의 좋아하는 대로 따라 가지 않으면 온갖 하는 일이 바르기만 할 뿐이다." 하였습니다.
밤·낮으로 혹시라도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다.
조그마한 행실에 긍지(矜持)하지 않으면 끝내는 큰 덕에 누(累)가 되는 것이니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 데 공이 한 삼태기 모자라는데서 무너지게 된다.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혹시(或)는 만일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긍(矜)은 긍지한다는 의미의 긍이다." 하였습니다.
○여씨(呂氏)는 말하기를, "이것이 곧 덕을 조심하는 공부이다.
혹(或)이라는 한 글자가 가장 의미가 있으니 한 번이라도 잠시 쉬면 이것은 덕을 조심함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임금의 한 몸은 온갖 일〔萬化〕의 근원이니 진실로 이치에 있어 털끝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이것은 곧 생민(生民)에게 무궁한 해를 끼치는 것으로서 창업 수통(創業垂統)74)의 <큰 일을> 계승하는 길이 아니다.
무왕 같은 성인도 소공 이 이렇게 경계하였으니, 후대의 임금으로서 깊이 생각하고 다시금 명념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옵건대, 마음은 몸의 임자가 되고 몸은 마음의 그릇이 되는데, 임자가 바르면 그릇도 당연히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자연히 바루되게만 맡겨 두고 검칙(檢飭)하며 정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대학」의 차례에 수신이 정심(正心)의 뒤에 있는 것인데,
그 힘쓰는 방법은 용모와 시청(視聽)과 언어와 위의를 한결같이 천리에 좇을 따름입니다.
형상과 빛깔〔形色〕은 천성이니, 한 몸 가운데 움직임과 고요함이 어느 것이 천칙(天則)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는 이 법칙을 밝히는 것이요, 성의·정심·수신은 이 법칙을 행하는 것이니,
두 가지가 모두 갖추어져야만 몸소 행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세상사람 중에는, 혹, 얼굴과 겉모습은 수식하여 매우 볼 만하게 하면서도 안에는 <착한 마음을> 지키고 보존하는 노력이 없는 이가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좀도둑〔穿〕에 비할 것이니 의논할 것이 되지 못합니다.
만일 그의 타고난 바탕이 욕심이 적어서 물욕의 유인을 받지 않고 마음 편하게 혼자서 즐기며, 다만 안으로 마음을 바르게만 하여,
반드시 외모에 구속할 것이 없다하는 이도 역시 도에는 들어갈 수 없고 끝내 세속중의 호인(好人)이 되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외모가 장엄하지 못하면 마음도 게으르게 되어 방탕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을 것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래서 그 마음을 바루 하고서도 또 그 몸을 잘 다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에 대한 단속이 없는 자는 마음이 반드시 바루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마음을 바루 하였다면 무슨일이나 바르도록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자기의 몸으로 부정한 것에 안심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몸을 닦지 않음도 역시 마음의 부정 때문입니다. 밝은 생각으로 유의하시기 바라나이다.
< 주 >
72) 옛날에 제사지낼 때에 신위(神位) 대신으로 그 자리에 앉히던 어린 아이를 가리킨다.
〔孝子之祭 不見親之形象 心無所繫 立尸而主意焉〕《儀禮 士虞禮注》
73) 수레의 위에 달린 난(鸞)과 화(和)의 두 방울소리를 말한다. 〔鸞在衡 和在軾〕《禮記玉 藻君子聞鸞和之聲註》
74) 어느 왕조를 처음으로 창건한 것을 창업이라 하고, 그 후대에 물려 준 것을 수통(垂統)이라 하니 통은 그 계통을 말하는 것이다.
제10장. 회덕량(恢德量)
신이 상고하옵건대 상편 9장에서 이미 몸닦는 차례를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다시 회덕량(恢德量)·보덕(輔德)·돈독(敦篤)의 3장으로 거듭 그 남은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 덕량이 넓지 못하면 적은 것을 얻어도 만족하고, 한 구비〔一曲〕에 치우쳐서 고명박후(高明博厚)한 지경에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덕량을 넓히는 것이 몸을 검속하는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 덕을 나아가게 하는 도량을 넓힘에 대한 말씀
공자는 말하기를, "잘한 것은 남이 하였다 하고, 잘못한 것은 제가 하였다 하면 백성이 다투지 않는다.
이런고로 군자는 <자신의> 능한 것으로 남을 병들게 여기지 않고,
남의 능하지 못한 것으로 그 사람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예기)
엄릉 방씨(嚴陵方氏)는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네가 교만하지 않으면 천하의 <사람들이> 너와 더불어 잘하는 것을 다투지 않으며,
네가 자랑하지 않으면 천하의 <사람들이> 너와 더불어 공을 다투지 않는다.'하였다.
잘한 것은 남이 하였다 하고, 잘못한 것은 제가 하였다고 한다면, 교만하고 자랑하지 않는다고 할 만하다.
때문에 백성이 다투지 않는것이다." 하였습니다. (임천 오씨(臨川吳氏)는 말하기를,
"백성이 화(化)하면 역시 잘한 것을 남에게 사양하여 다른 사람과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사람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잘한 것을 자기의 소유로 하면 그 잘한 것을 상실하고, 능한 것을 자랑하면 그 공을 상실한다. (상서열명(商書說命))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스스로 그 잘한 것을 소유하면 자기가 더 힘쓰지 않아서 덕이 이지러지며,
스스로 그 능한 것을 자랑하면 사람이 힘을 다하지 않아서 공이 떨어진다." 하였습니다.
○동래 여씨(東萊呂氏)는 말하기를, "도리는 무궁한 것이니
공부하는 이는 먼저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였습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땅의 형세는 곤(坤)하니 군자가 본받아 후한 덕으로 만물을 심는다." 하였습니다. (곤괘(坤卦) 상사(象辭))
정자는 말하기를, "군자는 땅의 후한 형상을 보아서, 깊고 후한 덕으로 모든 물건을 용납하여 싣는다." 하였습니다.
함(含)하고, 홍(弘)하고, 광(光)하고, 대(大)하여 만물〔品物〕이 모두 형통한다." (곤괘(坤卦) 단사(彖辭))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함·홍·광·대의 네 가지로 곤도(坤道)를 형용한 것이다.
함은 포용(包容)하는 것이요, 흥은 너그러운 것이요, 광은 밝은 것이요, 대는 넓고 두터운 것이다.
이 네 가지가 있기 때문에 능히 하늘의 공을 이어받드는 공을 이루어서 만물이 모두 형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묻기를, "사람들이 의론을 할 때에는 대부분 자기 마음 그대로 하고
함용(含容)하는 기운이 없는데 이것은 기운이 불평한 것이 아닙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원래 이것은 기운이 불평한 것이지만 역시 도량이 좁은 것이다.
사람의 도량이란 학식을 따라 자라지만 또 학식은 높으면서도 도량이 자라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학식이 사실 이르지 못함이다.
대개 다른 일은 사람이 모두 억지로 할 수도 있지만, 학식이나 도량만은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사람은 두초(斗)75)의 도량도 있고, 부곡(釜斛)76)의 도량도 있으며,
종정(鍾鼎)77)의 도량도 있고 강하(江河)의 도량도 있는데 강하의 도량이 역시 큰 것이다.
그러나 <강하는> 물 가가 있고 때로 가득 차기도 한다.
오직 천지(天地)의 도량은 가득 차는 일이 없기 때문에 성인은 천지의 도량인 것이다.
성인의 도량은 도(道)요, 보통 사람으로서 도량이 있는 것은 타고난 바탕이니 타고난 바탕에 있는 도량은 한정이 있는 것이다.
대저 <인간들의> 6척 몸뚱이의 역량은 다만 이런 것이니, 가득 차지 않으려 하여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등애(鄧艾)78)는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나이 70에 처세가 매우 좋았지만,
촉(蜀)나라를 항복받아 공이 있게 되면서는 <그 마음이> 움직였으며,
<진(晋)나라 정승> 사안(謝安)79)은, 소식을 듣고 객을 대하여 바둑을 두며 보고가 들어와도 기뻐하지 않다가
<바둑을 다 두고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나막신 굽〔齒〕이 부러졌으니 억지로 하는 일은 끝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 사람이 크게 취한 후에 더욱 공손하고 조심하는 자가 있기도 한데, 다만 더욱 공손하고 조심하는 것은 <그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비록 함부로 구는 자와는 같지 않지만 술에 의하여 움직여진 점은 한 가지이다.
또 귀공자가 있어 지위가 더욱 높아지면서도 더욱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낮추어 겸손하기만 하는 것은 이것도 바로 움직인 것이다.
교만 무례한 자와는 같지 않다고 하지만 그 지위로 하여 <본심이> 움직여진 것은 한 가지이다.
오직 도를 아는 이는 도량이 자연 넓고 커져서 애써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 중에 소견이 낮고 보잘 것 없는 이가 있는데, 다름 아니라, 역시 학식과 도량이 부족한 탓이다." 하였습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마음이 크면 온갖 물건이 모두 통하고, 마음이 작으면 온갖 물건이 모두 병든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공부하는 이는 모름지기 기개와 도량을 길러 열리고 넓게 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설씨(薛氏)는 말하기를, "첫째로, 혼후(渾厚)하며, 포함(包涵)하고,
조용하며, 광대(廣大)한 기상이 있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도량이 좁은 자는 물건을 용납하지 못하니, 좁고 막힌 데에서 만 가지 병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 다음은 무리를 포용하는 도량을 넓힘에 대한 말씀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는 무리에 임함에 어둠으로써 하여 밝게 한다." 하였습니다. (명이(明夷)82)의 상사(象辭))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밝음을 쓰기를 지나치면 살핌에 손상이 된다. 너무 살피면 일을 다하여 함(含)·홍(弘)의 도량이 없기 때문에,
군자는 그 밝게 살피는 것을 끝까지 하지 않고 어둠을 쓴다.
그런 후에야 능히 물건을 용납하고 무리를 화목하며, 무리가 친하고 화목하는 것이니, 이것은 어둠을 쓰는 것이 그대로 밝음이 되는 것이다.
만일 스스로 그 밝은대로 하여 살피지 않는 것이 없다면 관후(寬厚)·함용(含容)의 덕이 없으며,
인정이 어그러지고 의심하여 불안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무리를 다스리는 도를 잃는 것이니,
이야말로 밝지 못함이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완악한 이에게 성내고 미워하지 말며, 한 평범한 사람에게 갖춤을 구하지 말라. (주서(周書) 군진(君陳) 하동)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사람이 아직 화하지 못하였음을 분하여 하지 않으며,
그 사람이 능히 할 수 없는 것을 갖추어 구하지 않음이다." 하였습니다.
○위개(衛)는 말하기를, "사람이 미치지 못함이 있으면 정(情)으로써 용서하고,
옳지 못한 의사로 서로 관계하면 이치로써 보아둘 것이다. 때문에 종신토록 기쁘고, 성내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반드시 참음이 있어야 일을 이룸이 있으며, 용납함이 있어야 덕이 커지게 된다.
채씨는 말하기를,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계교를 어지럽힌다.'하였으니
반드시 참는 바가 있은 후에야 능히 이룸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억지로 제어하고, 힘으로 기르는 의사가 있다,
만일 넓고 여유 있으며 너그러워서 크게 둘러싼 듯이 여지가 있다면 이야말로 덕의 큰 것이다.
참는 것은 일을 말함이요, 용납하는 것은 덕을 말함인데, 각기 깊고 옅음으로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공평한 도량을 넓히는 일에 대한 말씀
○편(偏)함이 없고, 피(陂)함이 없어 왕의 의(義)를 좇고, 좋은 것을 한다고 하지 말고 왕의 법도를 좇을 것이며,
싫은 것이 있다 하지 말고, 왕의 길을 좇아라.
편(偏)함도 없고 당(黨)함도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蕩蕩)하며,
당함도 없고 편함도 없으면 왕도가 평평(平平)하며, 반(反)함도 없고, 측(側)함도 없으면 왕도가 정직(正直)할 것이다. (주서홍범(周書弘範))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편(偏)은 중도가 못됨이요, 피(陂)는 공평하지 못함이다.
작호(作好)와 작오(作惡)는 좋아하고 미워함으로 더한다는 뜻이다.
"(장씨(張氏)는 말하기를, "천하에 공변됨이 있으면, 좋아함과 미워함을 지을 수 없다. 짓는다면 <그것은> 그른 것이다." 하였습니다.)
당(黨)은 공변되지〔公〕못함이요, 반(反)은 정상과 어긋남이고, 측(側)은 바르지 못한 것이다.
편·피·호·오는 자신의 사사로움이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요, 편·당·반·측은 자신의 사사로움이 일에 나타나는 것이다.
탕탕(蕩蕩)은 넓고 먼 것이요, 평평은 평이한 것이며, 정직은 치우쳐 사특하지 않음이다." 하였습니다.
○손씨(孫氏)는 말하기를, "큰 길은 매우 평탄하지만 백성은 지름길을 좋아하는데,
욍의 도(道)와 왕의 길〔路〕은 이른바 매우 평탄한 그 길이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공변된 것은 하나인데, 사사로운 것은 일만 가지로 다르다.
인심이 같지 않음이 얼굴이 다름과 같은 것이니, 다만 이것이 사심(私心)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안팎을 합하여 물건과 나를 평등하게 하는 것이 도를 보는 큰 실마리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이 마음이 휑하여〔曠然〕털끝만한 사사로운 뜻도 없으면 곧 하늘·땅과 도량을 같이 하는 것이니,
여기에 천하를 한 집으로 삼고 중국으로 한 사람을 삼는 의사가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옵건대, 도량의 넓지 못함은 기질(氣質)의 병에 있사온즉,
덕과 도량을 넓히는 데는 다른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질을 바로잡는 한 가지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따로이 한 장(章)을 만든 것은 임금의 덕은 더욱 그 도량을 크게 함에 있는 것이므로 특별히 내세운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천승(千乘)83)의 나라를 얻고서도 크게 생각치 않고 겸연하고 스스로 겸손하는 자가 있으며,
한 고을의 조그마한 벼슬〔一命之官〕을 얻고도 거만하게〔肆然〕높은 척하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도량이 크고 작은 때문입니다.
도량이 작은 자는 그 병통이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편곡(偏曲)이요, 둘째 자긍(自矜)이요, 셋째 호승(好勝)입니다.
편곡한 자는 정체(停滯)하고 두루하지 못하니, 공평한 마음으로 이치를 살피지 못하며, 자긍하는 자는 적게 얻은 데에도 만족하니,
뜻을 겸손하게 하여 덕에 나가지 못하며, 호승하는 자는 그른 것을 꾸미기에 태연하여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서 선(善)을 좇지 못하니,
세 가지가 모두 하나의 사심을 따름입니다.
아, 하늘과 사람은 원래 한 가지로서 다시 분별이 없었지만,
하늘과 땅은 사(私)가 없고 사람은 사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늘·땅과 더불어 그 큼을 같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인은 사가 없기 때문에 덕이 하늘·땅에 합치는 것이며, 군자는 사를 버리기 때문에 행실이 성인에 합치는 것이니,
공부하는 이는 마땅히 그 사를 극복하고 도량을 넓혀서 군자와 성인에 미치기를 애써야 할 것입니다.
사를 다스리는 방법은 학문하는 것뿐이니 학문이 나아가면 도량도 커지는 것으로서, 타고난 바탕의 좋고 나쁜 것은 의논할 것이 아닙니다.
힘쓰고 또 힘써 그치지 않아, 마음이 환하게 트여서 털끝만한 사사로운 뜻도 그 사이에 관계하는 일이 없게 된다면,
순(舜)과 우(禹)가 천하를 소유하고서도 관계하지 않으며 문왕(文王)이 도를 바라보면서도 아직 보지 못한 것같이 하는 것도
여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유의하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 주 >
75) 두(斗)는 한 말, 초()는 한 말 두되들이의 대그릇(竹器). 도량이 좁은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76) 부(釜)는 6말 4되, 곡(斛)은 10말 드는 그릇이며 두초의 도량보다 조금 큰 것을 말한다.
77) 종(鍾)은 6곡(斛) 4두(斗)가 드는 그릇이며, 정(鼎)은 큰 솟이니 상당히 도량이 넓은 것을 말한다
78)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사람. 원제(元帝) 때 종회(鍾會)와 함께 촉(蜀)을 공격하여 크게 전공을 세워
후주(後主)를 항복받아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름. 뒤에 종회의 미움을 사서 반역죄로 모함되어 처형당하였다.
79) 진(晉)나라 양하(陽夏) 사람. 자는 안석(安石). 인품이 고결하여 젊어서부터 명망이 높았다.
뒤에 환온(桓溫)의 부름을 받고 벼슬길에 나왔으며 부견(符堅)의 100만 군대를 회비(淮肥)에서 대파하여 태보(太保)가 되었다.
80) 진(晉)나라 양하(陽夏) 사람. 사안(謝安)의 조카로 자는 현도(玄度).
사안의 천거로 건무장군(建武將軍)이 되어 정병(精兵) 8천을 이끌고 진왕 부견(符堅)의 100만 대군을 비수(肥水)에서 대패시켰다.
81) 진(晉)나라 때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의 하나인 전진(前秦)의 왕.
자는 영고(永固) 또는 문옥(文玉). 전연(前燕)과 전량(前)을 항복시킨 후 강북을 통일,
이어 동진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려고 하였으나 진(晉)나라 사현(謝玄) 등에게 패전하고 돌아와 뒤에 부하에게 살해 당하였다.
82) 「주역」64괘 중 36번째 괘.
제11장. 보 덕(輔德)
신이 상고하온즉, 천자로부터 필부(匹夫)에 이르기까지 친구를 기다려서 덕을 이루지 않음이 없으니,
증자의 이른바, "친구로 인(仁)을 돕는다."는 말이 이것입니다.
스스로 <몸을> 다스리는 조목들은 이미 앞에서 갖추어 말하였으므로 보덕(輔德)에 대한 것을 그 다음으로 하여,
바른 선비를 친히 하여 간하는 것을 좇아 허물을 고치는 뜻을 논술합니다.
◆ 바른 선비를 친근히하는 일에 대한 말씀
공자는 말하기를, "유익한 친구가 세 친구요, 손해 되는 친구가 세 친구이다.
곧은〔直〕친구와, 성실한〔諒〕친구와, 들은 것이 많은 친구는 유익하고,
편벽(便)된 친구와, 아첨을 잘하는 친구와, 편영(便)된 친구는 손해가 된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는 말하기를, "친구가 곧으면 자기의 허물을 듣게 되고,
친구가 진실하면 정성스러운 데에 나아가게 되며, (양(諒)은 믿음직스러움입니다.) 친구가 들은 것이 많으면 밝은 데에 나아가게 된다.
편(便)은 익숙한 것이니, 편벽은 위의(威儀)에 익숙하고 곧지 못함이다.
선유(善柔)는 잘 뵈여 기쁘게 하는 데에만 잘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이며, 편영은 입으로 말하는 데에만 익숙하고 듣고 본 실적이 없는 것이니,
세 가지는 손해와 이익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따르는 신하〔僕臣〕가 바르면 임금도 바르고, 따르는 신하가 아첨하면 임금은 제가 잘난〔自聖〕줄 안다.
임금의 덕도 신하에서 오고, 부덕(不德)도 신하에서 온다. (주서(周書) 경명편(命篇) ○목왕(穆王)이 백경(伯)에게 명하여 태복정(太僕正)을 삼은 글.)
채씨는 말하기를, "자성(自聖)은 스스로 성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여씨(呂氏)는 말하기를, "옛날부터 소인이 임금의 덕을 깎아버려 어둡고 사납고 사치하고 방종하게 하는 일이 어찌 다함이 있으리요.
스스로 잘난 체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해되는 것이 옅은 것 같은데, 목왕이 홀로 이 말로써 결단해 말한 것은
대개 소인이 그 임금을 혹하게 하여 반드시 헛된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부풀게 하여 거만스럽게 스스로 잘난척하게 되면
누구나 자기 같은 사람이 없다 하고, 제 말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런 후에는 법도 있는 사람과 바른 말하는 선비는 날로 멀어가며, 유쾌하고 마음대로 하는 일이 혹시라도 그 사이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스스로 잘난 척 하는 징조가 이미 나타나서 온갓 병이 따르는 것이다.
어둡고, 사납고, 사치하고, 방종한 것은 모두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니 의논할 것이 못된다." 하였습니다.
종축(宗祝)은 사당에 있고, 삼공(三公)은 조정에 있으며, 삼로(三老)는 학교에 있다. 왕의 앞에는 무당이요,
뒤에는 사관(史官)이며, 복서(卜筮)와 고유(侑)가 모두 좌우에 있으니, 왕은 중앙에 거하여 중심에 하는 것이 없다.
지극히 바른 것을 지킬 뿐이다. (예기)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사당에는 종축이 있고, 조정에는 삼공(三公)이 있으며,
학교에는 삼로(三老)와 오경(五更)84)이 있어 예교(禮敎)를 밝혀 천하를 착하게 하는 것이 아님이 없는데,
임금이 그 가운데 거처하니 그 마음이 무엇을 할 것인가. 임금이 도리의 지극히 바름을 지키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서산 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무당은 제사를 맡아서 귀신의 일로 왕께 고하고,
(무당은 제사를 맡아 본래 부정한 것이 아니었는데, 후에 와서 잘못 변하여 사특한 말로 사람을 혹해서 바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관은 글을 맡아서,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일로 왕께 고하며, 점치는 것을 맡은 자는 길·흉의 사실로 왕께 간하고,
판수 늙은이〔之〕(곧 판수는 악관〔侑〕이니 음악으로 식사 때 반주하는 벼슬아치다.)는 노래와 시로 왕께 간한다.
한사람의 몸인데, 좌·우·전·후에서 끼고 도우니 비록 잠시나마 마음대로 하려 하지만 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초어(楚語)에 이르기를, '옛날 위(衛)나라 무공(武公)은 나이 95세이지만 오히려 온 나라에 글로 주의시켜 이르기를,
경(卿) 이하로 스승과 선비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있는 사람이라면 나를 늙었다 버리지 말고,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공손하게 하고 조심하며 서로 경계하라.
내가 수레에서는 여분(旅賁)의 규정(「주례」에, "여분씨는 창과 방패를 가지고, 수레를 호위하여 나가는 일을 맡았다.
수레가 멈추면 수렛바퀴를 버틴다." 하였습니다.)이 있고, 집에 자리잡으면 관사(官師)의 법이 있으며,
궤()를 의지하면 송훈(誦訓)의 간(諫)(관사는 중하사(中下士)85)요, 송훈은 글 외우는 일을 맡은 벼슬이다.)이 있고,
침실에 있으면(설어(御)의 주의 설어는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이다.)가 있고, 일에 당하면 고()·사(史)의 인도가 있으며,
사사로이 거처할 때에는 사공(師工)의 외움이 있는데,(고사는 천도(天道)를 아는 자요, 사공은 악관이다.) 사관은 글에 실수하지 않으며,
눈 먼 이는 외우는 데에 실수하지 않아서 가르쳐 모신다.
여기서 좋은 경계문을 지어 스스로 경계한다.'하였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니 예성무공(睿聖武公)이라 시호하였다." 하였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의지〔馮〕(의지하는 것입니다.)할 이도 있고, 도울 이도 있으며 효도하는 이도 있고
덕이 있는 이도 있어서 인도〔引〕하고 도우〔翼〕면,
편안하고 즐거운 군자〔豈弟君子〕를 사방에서 법받으리로다." 하였습니다. (대아(大雅) 권아(卷阿)편)
주자는 말하기를, "빙(馮)은 가히 의지가 됨을 말함이요, 익(翼)은 가히 도욱이 됨을 말함이다.
효(孝)는 능히 어버이를 섬기는 사람을 말함이요, 덕은 자신에게서 얻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引)은 앞에서 인도함이요, 익은 좌우에서 돕는 것이다.
개제군자(豈弟君子)는 왕을 가리킨 것이니, 어진 이를 얻어 스스로 보좌하기를 이같이 한다면,
그 덕이 날로 닦아져서, 사방에서 법으로 삼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동래 여씨(東萊呂氏)는 말하기를, "어진 이의 행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반드시 효가 있고 덕이 있다고 한 것은 무슨 일인가.
대개 임금은 항상 자상(慈祥) 독실한 사람과 함께 거처하면, 선의 실마리를 일으키고 덕성(德性)을 함양(涵養)하며 조급한 것을 진정하고,
사특한 것을 소멸하여, 날마다 고치고 달마다 화하는 것이 언어간에 있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사람 <쓰는 잘못>을 나무랄 것이 아니며, 정사의 실수를 비난할 것이 아니다.
대인(大人)이라야만 능히 임금의 마음 그른 것을 바르게 하나니, 임금이 어질면 어질지 않은 이가 없고, 임금이 옳으면 옳지 않은 이가 없으며,
임금이 바르면 바르지 않은 이가 없다. 한 번 임금을 바르게 하면 국가가 안정된다." 하였습니다. (「맹자」하동)
조씨(趙氏)는 말하기를, "적(適)은 허물〔過〕이요, 간(閒)은 그르게〔非〕여기는 것이요, 격(格)은 바루함〔正〕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임금의 사람 잘못 쓰는 것을 허물하여 비난할 것이 아니며, 행정의 실수를 비난할 것이 아니다.
대인의 덕이 있는 이라면, 능히 임금 마음의 바르지 못한 것을 바루하여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면 나라가 다스리지 못함이 없다.
대인은 큰 덕의 인물인데, 몸을 바루하면 물건이 바루되는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천하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짐은 임금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달려 있다.
마음이 그르면 정사에 해가 되는 것이니, 이것은 밖에서 생기는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옛날 맹자가 세 번 제(齊)나라 임금을 보고서도 일을 말하지 않으니 문인(門人)들이 의심하자,
맹자가 말하기를, '내가 먼저 그 사특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니 마음이 바루된 후에야 천하의 일이 따라서 다스려지는 것이라.'하였다.
대저 정사의 실수와 사람 쓰는 데의 잘못은 아는 자라면 고칠 수 있고, 곧은 자는 간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일마다 고쳐야 하고 <고친> 후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 나중에는 아주 고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 사람 쓰는 것이 글렀다.>고 하여 사람마다 버리고, 버린 후에도 다시 그런 사람을 쓴다면 나중에는 이루다 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므로 재상의 직책은 반드시 임금 마음의 그름을 바로하는 데에 있고, 그런 후에는 바루지 않음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임금 마음의 그름을 바로하는 일은, 대인의 덕이 있지 않으면 역시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왕의 지혜롭지 못함을 의혹〔或〕하지 말라.
비록 천하에서 쉽게 나는 물건이라 할지라도, 하루 따뜻하게〔暴〕하고, 열흘 차게 하면 능히 살 것이라고는 없게 된다.
내가 <왕을> 뵈옴이 드문데, 내가 물러나면 차게 하는 자가 이르르니, 내가 <왕의 어진 마음의> 싹을 돋아나게 함이 있다 한들 어찌할 것이랴.
주자는 말하기를, "혹(或)은 혹(惑)자와 <뜻이> 같다. 왕은 제(齊)나라 임금을 가리킨 것 같다. 포(暴)는 따뜻하게〔溫〕함이다.
내가 왕을 볼 때가 적으니 하루 동안 따뜻하게 하는 것과 같으며, 내가 물러나면 아첨하는 무리가 섞여 나오는〔雜進〕날이 많으니,
이것은 열흘 동안 차게하는 것인 즉 비록 싹이 돋아나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내가 또한 어찌할 수 있으랴." 하였습니다.
지금 바둑 두는 것이 작은 기술〔數〕이라고 하지만, 전심치지(專心致志)하지 않으면 될 수 없다.
혁추(奕秋)는 나라에서 제일 바둑 잘 두는 사람이다. 혁추로 두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치게 하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전심치지하여 (혁추의 가르치는 말)만을 듣고, 한 사람은 <그 말을> 듣기는 하지만,
한편 마음으로는 홍곡(鴻鵠)이 날아올 것이라 하며, 활을 당겨 주살〔〕로 쏘아 마칠 것을 생각한다면,
비록 같이 배운다 하더라도 똑같이 잘 두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그들의 지혜가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바둑 두는 것〔奕〕은 위기(圍棋)이다. 수(數)는 기능〔技〕이요, 치(致)는 다하는 것이다.
혁추는 바둑 잘두는 사람인데, 이름이 추(秋)이다. 주살〔〕은 노끈으로 화살을 매어 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범씨(范氏)는 말하기를, "임금의 마음은 오직 수양하기에 있다.
군자는 착한 것으로 수양시키니 지혜롭고, 소인은 악한 것으로 수양시키니 어리석게 된다.
그러나 어진 사람은 멀어지기 쉽고, 소인을 친근하기 쉬우니, 이래서 적은 것이 많은 것을 이기지 못하고, 바른 것이 사특한 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국가에 다스리는 날이 항상 적고, 어지러운 날이 항상 많은 것이 대개 이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정자가 신종(神宗)에게 고하기를, "천하의 일에, 우환은 항상 소홀하고 작게 여기는 데에서 생기고, 뜻은 역시 점점 익혀지는 데에 경계하여야 합니다.
이런 때문에, 옛날 임금은 비록 출입하고 조용한 한가로움〔閒燕〕중에도 반드시 옛 글을 외워 가르치고,
법의 말〔箴〕로 간하는 신하가 있어 좌·우·전·후에 바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그래서 그 덕업(德業)을 이룬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예로써 노성한 어진 선비들을 명하시되, 반드시 직책을 주어 수고롭게만 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편한 자리에 가까히하고 도의를 강론하게 하여 성스러운 덕을 보좌하게 하십시오.
또 천하의 어질고 준걸된 이들을 뽑아서 곁에 모시고 법으로 따르게 하며, 아침저녁으로 맞아 보아서 착한 도리를 개진(開陳)하게 하고,
다스리는 체계를 강마(講磨)하게 하여, 듣고 봄을 넓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성상의 지혜가 더욱 밝고, 큰 계교가 참으로 튼튼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경연(經筵)을 논하는 차자(箚子)86)에서 말하기를, "옛날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하였는데, 어려서부터 가까이 하였습니다.
보는 것은 반드시 바른 일이며, 듣는 것은 반드시 바른 말이며, 좌·우·전·후에 모두 바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습관이 지혜와 함께 자라고 화(化)가 마음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사대부 집에서도 자제(子弟)를 잘 가르치려는 이도 반드시 명망과 덕행이 있고,
단아(端雅)하고 방정(方正)한 선비를 맞아 함께 거처하여, 젖고 물들어 〔薰染〕천성을 이루게 하기 때문에,
'젊어서 이루는 것은 천성인 것 같고, 습관은 자연인 것 같다.'합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폐하는 연세 많으시고 밝고 성스러운 바탕이 원래 타고 나셨다고는 하지만,
보좌 수양하는 길을 다하지 않을 수 없사온대, <그것은> 함양(涵養)하고 훈도(薰陶)함에 있을 뿐입니다.
대개 하루 중에 어진 사대부를 친근히 하는 시간은 많고, 내시(內侍)나 궁녀를 친근히 하는 시간은 적으면,
자연 기질(氣質)이 변화되어 덕기(德器)가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조정에서는 삼가 어질고 덕있는 선비를 선택하여 모시고 권장하고 강의하게 하며,
항상 두 사람을 머물게 하여 낮에는 당직하게 하고, 밤이면 한 사람은 숙직하게 하면서 찾아 물으시도록 하십시오,
때때로 내전에서 불러보시고 조용하고 한가롭게 말씀하신다면 점점 도의를 밝힐 뿐만 아니라,
사람의 정과 물건의 형세와 농사짓는 일의 간난(艱難)한 데에 이르기까지 오래되는 동안에 자연 통달하게 되실 것이니,
그저 항상 궁중에만 계시는 데에 비하여 유익함이 어찌 매우 크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듣사온즉, 가끔가다 한번씩 경연을 열고 두어 줄 글을 강독하며, 여러 신하들이 나열하여 모셔 점잖게〔儼然〕있다가 물러가니,
감정과 의사가 서로 접하지 못한다 하옵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보좌 수양의 공적을 얻으려 하신다면 역시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 다음은 간언(諫言)을 좇는 것에 대한 말씀
○「주역」에 이르기를, "산 위에 못이 있는 것이 함괘(咸卦)87)이니,
군자는 거기에 의하여 허(虛)함으로 사람을 받아들인다." 하였습니다. (함괘(咸卦)의 상사(象辭))
정자는 말하기를, "군자는 산과 못의 기운이 통하는 형상을 보고서 그 속을 허하게 하여 사람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속을 허하게 한다〔虛中〕는 것은 나의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다. 속에 사사로운 주장이 없다면 느껴서 통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습니다.
쾌()한 이(履)는 정(貞)하되 여()하다. (이괘(履卦) 구오88) 효사(九五爻辭))
정자는 말하기를, "쾌()는 굳세게 결단하는 것〔剛決〕이다.
5는 양강(陽剛)한 신분으로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9·5는 이것이 임금자리입니다.) 그 굳세게 결단함에 의존해서 행하는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비록 바르게 되더라도 오히려 위태로운〔危〕것이다.
옛날 성인은 천하의 높은 자리에 거처하여 밝음은 넉넉히 비칠 수 있으며, 강함은 넉넉히 결단할 수 있고, 세력은 넉넉히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찍이 천하의 의논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며, 꼴 베고 나무 베는 한미 <한 사람의 말까지>도 반드시 받아들이니 이래서 성인이 되는 것이다.
만일 스스로의 강명(剛明)함에 맡겨서 결행(決行)하여 돌아보지 않는다면 비록 바르게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위태로운 길이니,
하물며 강명이 부족한 자야 일러 무엇하랴." 하였습니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훈계하여 이르기를,
"아, 선왕께서는 간하는 것을 좇아 거스르지〔〕않으시며 선민(先民)들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하였습니다. (상서(商書) 이훈(伊訓))
채씨는 말하기를, "불()은 거슬리는 것이요, 선민(先民)은 전배(前輩)와 구덕(舊德)을 말함이다.
간하는 것을 좇아 거슬리지 않고, 선민들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은, 착한 것을 즐기는 데 정성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습니다.
말하는 것이 네 마음에 거슬리면 반드시 도(道)에서 <그 거슬리는 이유를> 찾아보고,
말하는 것이 네 뜻에 공손하면 반드시 도가 아닌 것에서 <그 공손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상서의 태갑편〔太甲籍〕 역시 이윤의 말.)
채씨는 말하기를, "굳고 강한 말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요, 공손하고 순한 말은 사람들이 좇기 쉬운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데에서는 반드시 <그 이유를> 도에서 찾아볼 것이지, 문득 마음에 거슬린다고 하여 막아서는 안되며,
좇기 쉬운 데에서는 반드시 <그 이유를> 도 아닌 데에서 찾아볼 것이지, 문득 뜻에 순하다고 하여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개 이윤이 태갑으로 하여금 감정에 치움침을 바로 잡으려함이었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다스리는 길은 별다른 설명이 없는 것이다.
만일 임금으로 하여금 공검(恭儉)하고 착함을 좋아하여 말이 마음에 거슬리면 반드시 <그 거슬리는 이유를> 도에서 찾아보며
말이 뜻에 순하면 반드시 <그 순한 이유를> 도 아닌 데에서 찾아보게 한다면 어찌 다스리지 않음이 있을 것인가.
예로부터 모든 성공의 사실은 곧 이같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고종(高宗)89)이 부열(傅說)90)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네 마음을 계(啓)하여 짐의 마음을 옥(沃)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상서의 열명편〔說命籍〕)
채씨는 말하기를, "계(啓)는 여는〔開〕것이요, 옥(沃)은 물대는〔灌漑〕것이다.
네 마음을 열라는 것은 그 마음을 열어놓고, 숨기지 말라는 것이요, 짐의 마음을 물댄다는 것은,
내 마음을 물대어서 풍족하게〔厭〕하라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약이 아찔하지〔瞑眩〕않으면 병이 낫지〔〕않고, 발 벗고서 땅을 잘 보지 않으면 발이 상하게 된다.
채씨는 말하기를, "방언(方言)에 이르기를, '약(藥)을 먹으면 독(毒)하다는 것을 해대(海垈)91) 지방에서는 아찔〔瞑眩〕하다고 한다.
요〔〕는 낫는다는 말이다. 아찔하지 않는다는 말은 신하의 말이 입을 괴롭게 하지 아니함을 비유한 것이요,
땅을 보지 않는다 함은 나의 행하는 바가 소견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열(說)이 왕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무를 자를 때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이 간언(諫言)을 좇으면 성군(聖君)이 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지극히 착하시면 신하들은 명령하지 않아도 그 뜻을 받들 것이니, 누가 감히 왕의 아름다운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채씨는 말하기를, "나무를 자를 때 먹줄에 따른다고 한 것은 임금이 간언을 좇아야 된다는 것을 비유한 말로서,
간언은 결코 듣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고종(高宗)은 마땅히 자기 <자신>이 간언을 받아들이기에 힘 쓸 것이요, 반드시 신하의 진언(進言)을 책구(責求)할 필요는 없다.
임금이 과연 간언을 좇는다면 신하들은 비록 명령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임금의 뜻을> 알아 받들 것이므로
하물며 이렇게 명령한다면 누가 감히 그 훌륭한 명령에 공경한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겠느냐."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바로잡고자 하는 말을 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잘 못을> 고치는 것이 소중하다.
완곡하게 일러주는 말을 즐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뜻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이 소중하다.
즐겨하면서 실마리를 찾지 아니하고, 좇는 체하면서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어찌할 수 없을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원문(原文)에> 법어(法語)라고 한 것은 <과실을> 바루고자 바로 말하는 것이고,
손언(巽言)이라고 한 것은 완곡하게 지도하는 말이며, 역(繹)이라고 한 것은 실마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허물을> 바루는 말은 사람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좇는다.
그러나 좇는 체하면서 <지적한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면대(面對)했을 때만 좇는 체하였을 뿐이다.
완곡하게 일러주는 말은 귀에 거슬리는 것이 없으므로 반드시 즐겨한다.
그러나 <즐겨하기만 하고 그 말 뜻의> 실마리를 찾지 않는다면 또 그 <말의> 은미(隱微)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한무제(漢武帝) 같은 이는 급암(汲)92)이 곧은 것을 보고서 깊이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장막 가운데에서 그가 아뢰는 말을 옳다고 하였으니 <바른 말을> 좇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제(武帝)는 속으로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만 인의(仁義)를 베풀었으니 어찌 면전(面前)에서만 좇는 것이 아니겠는가.
맹자가 색(色)을 좋아하고 재물을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 논(論)하였을 때, 제선왕(齊宣王)이 어찌 즐거워 하지 않았겠는가.
만약 그 말 뜻의 실마리를 알지 못하였다면 한갓 옛사람의 이른바 색을 좋아한다는 것만을 알고,
그들이 능히 안으로는 원망하는 여자〔怨女〕가 없게 하였고, 밖으로는 고독한 남자〔曠夫〕가 없게 하였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옛사람들의 이른바 재물을 좋아하였다는 것만을 알고, 그들이 능히 제 집에 살고 있는 자는 곡식을 쌓은 창고가 있게 하였으며,
여행하는 자는 휴대할 식량이 있게 하였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양씨(楊氏)는 말하기를, "말하여도 통하지 아니하며, <말을> 막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은 오히려 좋다.
그는 혹 깨우치면 오히려 고칠 수도 있고, 실마리를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좇는 체하고 즐겨하는 듯하면서 고치지 않고,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람은 마침내 고치지도 않고,
실마리를 생각치도 않을 것이니, 성인(聖人)이라도 <이런 자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좌전(左傳)에, "은공(隱公) 5년 봄에 공이 당(棠)에 가서 물고기를 구경하려고 하니,
장희백(臧僖伯)이 간하기를, '무릇 사물이 큰 일을 강구(講求)하기에 부족하고,
그 재목이 기용(器用)에 대비(對備)할 만하지 못하다면 임금은 그것을 거론(擧論)하지 않는 법입니다.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을 충실하게 만드는 것은 하인〔隸〕들의 할 일이요, 관리들이 맡아 처리할 일이지, 임금이 관여하실 바가 못 됩니다.'하였다.
공(公)이 말하기를, '내 장차 전국을 순시(巡視)하려 한다.'하고, 드디어 순싯길에 오르니, 희백(僖伯)은 병이 났다 핑계하고 쫓아가지 아니하였다.
희백이 죽고나서 공이 말하기를, '숙부(叔父)가 과인(寡人)에게 감의(憾意)가 있었더니 과인이 감히 잊을 수가 없구나.'하고
관등(官等)을 한 계급 높여서 장사 지내었다." 하였습니다.
호씨(胡氏)는 말하기를, "희백이 간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병을 핑계하고 수행하지 아니한 것은 충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은공이 희백의 관등을 한 계급 높여서 장사지내 주었던 것도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은공은 감히 그의 충성을 잊지 못하면서도 그의 간언은 들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곽공(郭公)이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면서 등용하지 못하여 끝내 나라가 멸망하는 데 이르게 하였음과 같은 것이다.
그에게 <화(禍)가> 미친 것은 당연하다." 하였습니다.
(<화가> 미쳤다고 한 것은 종무(種巫)에서의 시해(弑害) 당함을 말합니다. 은공의 아우 환공(桓公)이 공을 종무에서 시해하였습니다.
○임씨(林氏)는 말하기를, "곽공(郭公)은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면서 등용하지 못하여 나라가 멸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고,
은공은 충간(忠諫)을 착하게 여기면서 쓰지 못하여 몸을 망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옛날부터 헛된 이름만 드러나고 실행함이 없어서 패망(敗亡)하기에 이른 자가 많은데 살피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 다음은 허물을 고치는 것에 대한 말씀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풍(風)과 뇌(雷)는 보태는〔益〕것이니,
군자(君子)는 그것을 본받아 선(善)을 보면 자신에게 옮겨 <실천하고> 허물이 있으면 고친다." 하였습니다. (익괘(益卦)93) 상사(象辭))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바람이 맹렬하면 우뢰가 빠르고, 우뢰가 급하면 바람이 성내어, 이 두 가지는 서로 보태는 〔益〕것이다.
군자는 바람과 우뢰가 서로 보태는 현상〔益之象〕을 보고 자신에게 보탬이 되는 것을 찾는다.
선(善)한 것을 보고 능히 자신에게 옮겨 실천할 수 있다면, 온 세상의 선(善)한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허물이 있을지라도 능히 고친다면 허물은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탬이 되는 것으로 이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선한 것을 <보고> 자신에게 옮기기를 마땅히 바람처럼 빠르게 하고,
허물을 고치는 일을 마땅히 우뢰의 사나움과 같이 <단호하게 고쳐야> 한다."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허물이 있고도 고치지 아니하면 이것을 허물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는 말하기를, "허물이 있을 때 능히 고친다면 허물 없는 데로 돌아가지만,
고치지 아니하면 그 허물이 드디어 이루어져서 장차 고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허물을 부끄럽게 여겨서 아닌 것처럼 조작하지 말라. (상서(商書) 열명(說命))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허물〔過誤〕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지만, 그것을 허물이 아닌 것처럼 조작하는 것은 고의(故意)에서 나온다." 하였습니다.
자공(子貢)94)은 말하기를,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食)이나 월식(月食)과도 같아서, 허물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고,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 하였습니다. (「논어」하동)
면재 황씨(勉齋黃氏)는 말하기를, "허물이 있을 때는 명백하게 드러나서 덮거나 가리움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으며
<있던 허물을> 고친 때는 맑고 투명하여서 티나 흠〔瑕疵〕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다 우러러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자하(子夏)95)는 말하기를, "소인(小人)은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꾸민다.〔文〕."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문(文)이란 꾸민다는 뜻이다.
소인은 허물 고치기를 꺼리고 스스로 속이는 것은 꺼리지 아니하므로 반드시 <허물이 아닌 것처럼> 꾸며서 그 허물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하였습니다.
○신안 진씨(新安陳氏)는 말하기를, "군자는 허물을 숨기지 아니하기 때문에 허물이 생기면 사람들이 볼 수 있고,
허물을 빨리 고치기 때문에 허물이 없어져서 사람들이 다 우러러보기를 마치 해와 달같이 한다.
비록 일식이나 월식을 간혹 면하지 못할지라도 도로 밝아지면 무엇이 광명에 손상되겠는가.
소인(小人)은 허물을 숨겨서 덮어 가리어 고치지 아니하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는 데> 굳이 인색하여
더욱 그 허물을 중하게 하므로 더욱 어둡고 더욱 심하여진다. 어찌 해와 달같이 명백하고 투철한 기상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자로(子路)96)는 남이 허물을 말하여 주면 기뻐하였다. (맹자)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그는 <자신에게 허물이 있다고 충고하는 말을>들으면 기뻐하여 고쳤으니,
그가 스스로 몸을 닦는 데는 이와 같이 용감하였다." 하였습니다.
○주자(周子)97)는 말하기를, "중유(仲由: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말 듣기를 기뻐하여서 훌륭하다는 이름이 무궁하였는데,
지금 사람들은 허물이 있을 때 남이 규정(規正)하여 주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한다.
마치 병을 숨기고 의사(醫師)를 꺼려하여 마침내 자기의 몸을 죽음에 빠뜨리게 함과 같은데, <이를> 깨닫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자로(子路)는 역시 영원히 후세(後世)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진실로 <자신의> 허물을 듣기를 원한다면 다만 <일러주는 말을> 하나하나 관용(寬容)하여 받아들여야 하되
다시 그것이 사실이고 사실 아닌 것을 따지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면 일의 크고 작음 없이 사람들은 다 말하여 주기를 좋아하여 숨기는 마음이 없을 것이다.
만약 하나 하나 계산하고 배교하여 기어이 변명하고 <옳고 그름을> 논쟁한다면 아마 허물을 일어주면 기뻐한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습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멀지 않아 돌아와, 후회하는 데 이르지 않으니, 크게 길(吉)하다." 하였습니다. (복괘(復卦)98) 초구(初九)의 효사(爻辭))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잃은 뒤라야 돌아옴이 있다. 잃지 않는다면 무슨 돌아옴이 있겠는가.
다만 잃었으나 머지않아 돌아온다면 후회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니, 크게 선(善)하고 길(吉)하다는 것이다.
학문을 하는데 다른 길이 없다. 다만 불선(不善)임을 알면 속히 고치고 선(善)한 것을 좇을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쌍봉 요씨(雙峯饒氏)는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에는 선(善)의 단서가 끊임없이 이어져 있어서 본시부터 서로 연속되고 있다.
사물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이에 비록 간혹 조금 잘못됨이 있더라도,
그 <잘못이> 마음에 걸리어 스스로 불안(不安)하게 여기는 뜻이 이미 마음 속에 싹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천지의 물(物)을 생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것〔露呈〕으로서 맹자(孟子)가 말한 바,
'두려워하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惻隱之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다만 반성하고 살펴서 사욕을 이기고 허물을 다스리는 공력을 더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비록 선(善)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오더라도 선(善)에 돌아가는 실천이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욕심에 방종하여 함부로 망령되이 행하니 그 후회함이 따라갈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수양을 잘하는〔善用力〕이가 진실로 이 마음이 싹틈으로 해서 재빨리 <선(善)에> 돌아가, 후회하기에까지 이르지 않게 하면
사람의 욕심〔人欲〕은 사라지고 천리(天理)가 돌아올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안씨(顔氏)의 아들이 거의 <현인(賢人)에> 가깝구나. 불선(不善)함이 있으며 일찍이 알지 못한 적이 없고,
알면 일찍이 다시 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습니다. (역경(易經) 계사(繫辭))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안자(顔子)와 같은 지위에 있는 이가 어찌 불선(不善)함이 있었겠는가.
이른바 불선이라고 말한 것은 다만 조금 어긋나고 잘못됨이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조금 어긋나고 잘못됨이 있었는가 하면 곧 능히 그러함을 알고, 알기만 하면 곧 고치어서 다시는 <불선이> 싹트지 않도록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선(善)이 아님을 알고 일찍이 다시 하지 아니한 것은 허물을 두 번 거듭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다만 안자가 <잘못임을> 알고는 다시 행하지 아니한 것을 어려운 일인 줄만 알고,
도무지 잘못이 있을 때, 일찍이 <그것을> 모르는 적이 없었다는 것, 그 자체가 정말 어려운 것임을 알지 못한다.
지금 사람이 또한 도리를 얻을 줄 아는 이는 있다.
<그러나> 일이 눈앞에 도달하면 도리어 다만 사욕(私欲)에 따라 처리하고 전날에 알고 있던 것은 모두 잊어버린다.
이것은 일찍이 바르게 알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자(顔子)는 타고난 자질(資質)이 지극히 맑은 물과 같이 좋아서 가느다란 티라도 반드시 나타났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내 나이가 16·7세 되었을 때 사냥하기를 좋아하였다.
얼마 뒤에 스스로, '이제 이것을 좋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말하였더니, 주무숙(周茂叔)99)이 말하기를, '어찌 말을 쉽게 하는가.
다만 그 마음(사냥을 좋아하는 마음)이 잠재해 있어서 <그저 밖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이니,
하루 아침에 싹트게 되면 다시 처음과 같게 될 것이다.'하였다.
그 뒤 12년 되던 해 연말에 집에 돌아가다가 들〔野〕에서 사냥하는 사람을 보고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뻐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과연 그 마음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았다." 하였습니다.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주자(周子)는 공부에 힘을 씀이 깊기 때문에 쉽게 말할 수 없음을 알았으며,
정자(程子)는 마음을 다스림〔治心〕이 세밀하기 때문에 능히 눈에 보이는 것에 좇아 성찰(省察)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배우는 자는 경계해 살피고 극기(克己)해 다스리는 노력을 더욱 힘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남헌 장씨(南軒張氏)는 말하기를, "무릇 <배워서> 익히는 일〔習〕을 중단함이 있음은 마음의 허물〔心過〕이 해치기 때문이다.
마음의 허물은 더욱 방지하기 어려운데, 한 번 마음 속에 싹트게 되면 비록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는 없으나
내가 항시로 익히는 공부는 이미 사이가 끊어진 것이다. 살피는 것을 늦추면 <마음의 허물은> 불어나고 자란다.
사람들은 옛 버릇에만 안일(安逸)해져서 작은 일이라고 소홀하게 여긴다.
이런 <버릇을> 어찌 익숙한 습관이 되도록 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
오늘 한 가지 잘못된 생각을 고통스럽게 여겨 고치지 않으면 내일에 이 생각이 또 생기게 되어 쌓여서 습관으로 익어버리면
상시로 익히는 공부〔時習之功〕가 소각(銷却)되며, 이 두 가지가 함께 성립될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두려워한다. <마음의 허물이> 속에서 싹트면 반드시 깨닫고,
깨달으면 깊이 경계하여 끊기를 동엽(棟葉)을 분간하 듯하여 다시 계속되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하면 허물있는 지경은 저절로 소원하여지고 상시로 익히는 공부에 전심(專心)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덕(德)에 이르고 도(道)로 응고(凝固)할 수 있는 것이다.
안자(顔子)가 <허물을> 두 번 거듭하지 않았던 것은, 한번에 아주 단절(斷絶)시키고 다시 생기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나의 거실(居室)을 불이(不貳)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였습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바른 데로> 돌아오는 것을 머뭇거리는 것은
흉(凶)하며 군주(君主)된 도리에 어긋난 것이다." 하였습니다. (복괘(復卦) 상륙효(上六爻) 의 상사(象辭))
정자는 말하기를, "돌아오면 도(道)에 합당한 것인데, 이미 돌아오기를 주저하고 있으니 도(道)와 서로 어긋난다.
그러니 흉(凶)한 것을 알 수 있다.
남의 임금된 자가 위에 있어서 여러 국민을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천하의 선(善)한 것에 좇아야 할 것인데,
<선으로> 돌아오는 것을 주저하고 있으니 임금된 도리에 어긋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여 보건대, <임금의> 덕업(德業)을 도와 이루는 데는 바른 선비를 친근하게 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또 반드시 간언(諫言)에 따르는 것〔從諫〕과 허물을 고치는 것〔改過〕을 합하여 한 장(章)으로 한 것은,
남의 임금된 이가 어진 선비를 좋아하는 것은 한갓 그 사람을 친근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차 그 사람의 선(善)한 것을 취하여 자기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보충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간언이 있으면 반드시 좇고,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는 것은 곧 덕(德)을 진취시키고 업(業)을 닦는 데 바탕으로 하려는 것입니다.
만일에 한갓 그 어진 선비의 이름만을 흠모(欽恭)하여 공연히 측근에 두고는 간하는 말이 있어도 좇지 않고,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다면, 어진 선비가 어찌 헛된 예우(禮遇)에 얽매어 자기의 소신을 잃으려고 하겠습니까.
반드시 기회를 보아 물러가서 고반(考槃: 은거실(隱居室)을 지어 마음대로 즐기는 것)을 즐기려할 것이며,
임금의 측근에 있는 자는 아첨하여 총애만을 얻으려는 무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가 위망(危亡)에 이르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만약 현인(賢人)이라고 이름하는 자가 앉아서 영화와 총애를 받으면서,
충성스럽고 바른 간언으로 <임금의 허물을> 바로 잡아 구하여 주는 유익함이 없다면 역시 현자는 써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현명(賢明)한 임금은 바른 선비를 신중하게 선택하여서 날마다 함께 있으며,
함양(涵養)하고 그 <덕에> 훈도(薰陶)되어 자기의 욕심을 이기고 선(善)을 좇아서 덕(德)이 날로 높아지고, 왕업(王業)은 날로 넓어지는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책임이 경연(經筵)에 있다."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 주 >
83) 제후(諸侯). 승(乘)은 수레를 세는 단위.
주대(周代)에 있어서 전시에 천자(天子)는 만승(萬乘), 제후(諸侯)는 천승(千乘)을 내도록 되어 있었다.
84) 장로(長老)의 칭호. 옛날에 천자(天子)가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을 두어 부형(父兄)의 예로 섬겼다. 〔食三老五更於大學〕《禮記, 樂記》
85) 사(士)는 관직이 없는 선비가 아니고 하급 관리인데, 그 사중에는 상·중·하의 세 계급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대의 관제(官制)이다.
86) 간단한 형식으로 하는 상소문이다.
87) 「주역」64괘 중 31번째 괘이름이다.
88)주역」, 64괘중 10번째 괘 이름.
89) 중국 상(商)나라의 어진 임금으로 이름은 무정(武丁)이다.
90) 상(商)나라 고종(高宗) 때의 어진 신하.
존래 토목공사장의 일꾼이었는데 고종이 훌륭한 인물이라하여 당시의 재상으로 발탁하여 국정(國政)을 맡기어 중흥의 대업을 이루었다.
91) 중국의 동해(東海)와 태산(泰山)의 중간에 위치한 땅의 이름. 순(舜) 임금이 설치한 12주(州) 중의 하나이다.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지방으로 대(垈)는 곧 태산을 가리킨다.
92) 한(漢)나라 복양(陽) 사람. 성격이 강직하여 곧은 말을 잘하였다.
하루는 한무제(漢武帝)가 갓을 벗고 있었는데 급암이 그것을 지적할까 두려워 장막 속으로 피하여 그가 하는 말을 윤허하였다.
93) 「주역」64괘 중 42번째 괘 이름.
94)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 사람. 공자의 제자로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자공은 그의 자(字). 공문(孔門) 십철(十哲) 중의 한 사람이다.
95) 공자의 제자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자하는 그의 자(字). 공자보다 44세 아래로 시(詩)에 뛰어났다.
96) 공자의 제자.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 자로는 그의 자(字)임.
공문(孔門) 10철(十哲)중의 한 사람으로 정치방면에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용맹이 있었는데
위(衛)나라에서 벼슬하다가 공리(孔)의 난에 전사하였다.
97) 주렴계(周濂溪)의 존칭.
98) 「주역」64괘 중 24번째 괘 이름.
99) 중국 송(宋)나라 도주(道州) 사람. 이름은 돈이(敦) 무숙(茂叔)은 그의 자(字)임.
송(宋)·이학(理學)의 개산조(開山祖)이다. 이정(二程)이 모두 그 제자이며 저서로 태극도설(太極圖設)과 통서(通書)등이 있다.
제12장. 돈 독(敦篤)
신이 생각하여 보건대, 몸을 닦는 공부는 앞에 다 자세하게 기술하였으나,
오히려 중도에 폐지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기 때문에 돈독장(敦篤章)을 그 다음에 두었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처음이 있지 않음은 없으나 끝이 있는 것은 드물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돈독(敦篤)이라고 한 것은 끝을 돈독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 돈독(敦篤)한 공부에 대한 말씀
증자(曾子)는 말하기를, "선비는 넓고 굳건하지 않을 수 없다. 임무는 무겁고 길은 멀다." 하였습니다. (「논어」하동)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넓다〔弘〕고 한 것은 관대(寬大)하고 넓음을 의미하고,
굳건하다〔毅〕고 한 것은 굳세고 인내성〔强忍〕이 있음을 뜻한다.
(신안 진씨(新安陳氏)는 말하기를, "관대하면 용납하여 받아들임이 많을 것이며, 넓으면 받들고 싣는 것이 클 것이다.
굳세면 잡아지키는 것이 견고할 것이며, 인내력이 있으면 짐을 지는 것이 오래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넓지 아니하면, 그 무거움을 견딜 수 없고 강인하지 아니하면 그 먼 곳에 이를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인(仁)을 자기의 임무(任務)로 하였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라야 그칠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인(仁)이라는 것은 인심(人心)의 온전한 덕(德)인데,
반드시 몸으로 본받아 이것을 힘써 실행하고자 한다면 정말 무겁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가닥의 호흡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라도, 이 뜻을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기를 용납하지 아니하므로 정말 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하늘의 운행은 건전(健全)하다.
군자(君子)는 <이 괘상(卦象)을 보고> 스스로 노력하여 쉬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건괘(乾卦)의 상사(象辭).)
광평 유씨(廣平遊氏)는 말하기를, "지극히 성실하여 쉼〔息〕이 없으니 하늘의 운행은 건전하다.
쉬지 않을 수 없는데 쉬지 아니함은〔未能無息而不息〕 군자가 스스로 힘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항상 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늘의 이치가 항상 행하여 고루 흘러서 쉬지 않으리라." 하였습니다.
군자가 온종일 쉼이 없이 노력하고, 저녁에는 반성하여 삼가고 조심하면 위태한 일이 있을지라도 허물은 없을 것이다. (건괘(乾卦) 구삼(九三)의 효사)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낮과 저녁에 게을리 하지 않고 두려워하며 조심한다면, 비록 위태한 곳에 있을지라도 허물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은 매상(昧爽)에 일어나 그 덕(德)을 크게 밝히고〔丕顯〕,
앉아서 아침을 기다렸다." 하였습니다. (상서(商書)의 태갑(太甲) 하동. ○이윤이 태갑에게 고(告)한 말.)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매상(昧爽)이라고 한> 매(昧)는 어두움이고, 상(爽)은 밝음이니,
매상이라 하면 날이 샐까 말까 할 때이다. 비(丕)는 크다는 뜻이고, 현(顯)은 또한 밝다는 뜻이다.
선왕(先王)(선왕(先王)은 탕(湯)입니다.)은 말이 샐까 말까 할 때에 깨끗이 씻고,
그 덕(德)을 크고 밝게 하고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서 <덕(德)>을 행하였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제 왕위를 이으신 왕이 새로운 천명(天命)을 받으셨으니 그 덕(德)을 새롭게 해야 한다.
끝이나 처음이나 오로지 한결같게 함이 곧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채씨는 말하기를, "덕(德)을 새롭게 하는 요점(要點)은 한결같이 하는데 있을 뿐이다.
끝이나 처음이나 한결 같아서 간단(間斷)이 없으면 이것이 곧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군자의 배우는 일은 반드시 날로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니,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은 날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날로 새로워지지 않는 자는 반드시 날로 퇴보(退步)한다.
전진(前進)하지 아니하면서 후퇴하지 아니하는 자는 없다.
오직 성인(聖人)의 도(道)만이 나아감도 물러남도 없으니 그 나아간 바가 극치에 이른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영가 정씨(永嘉鄭氏)는 말하기를, "거울을 보다가 얼굴이 더러워졌으면 반드시 씻을 것이며,
옷을 털다가 깃이나 소매에 때가 묻었으면 반드시 세탁할 것이요, 거처하는 방에 책상이나 창이나 벽에 먼지〔塵〕가 있으면 반드시 털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면서도 마음 속의 신명(神明)의 집에 대하여서는 더러워지고 때가 묻고 먼지가 나날이 쌓여도 씻거나 털어버릴 줄 모른다면,
작은 것은 살피면서 큰 것은 버려두는 것이며, 겉은 살피면서 안은 버려두는 것이니,
그 유사(類似)한 <사리를> 확충하지〔充〕못함이 역시 심하지 아니한가."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군자는 식사(食事)를 마치는 사이에도 인(仁)에 어긋남이 없다.
조차(造次)에서도 반드시 이것을 지키고 전패(顚沛)에도 반드시 이것을 지킨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식사를 마치는 사이〔終食之間〕라는 것은 한 번 식사하는 사이이고,
조차(造次)란 것은 급거(急遽)하고 구차(苟且)한 때이며, 전패(顚沛)란 것은 엎드러지고 자빠져서 유리(流離)되는 경우이다.
대체로 군자가 인(仁)에서 떠나지 아니함이 이와 같아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인(仁)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인(仁)의 도(道)는 지극히 커서 전력을 다하여 쉬지 않고 본받는 자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전체(全體)라고 한 것은, 인(仁)의 전체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고, 전력을 다하여 본받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전체라는 것은 천리(天理)가 혼연(渾然)하여 한 터럭만큼도 섞인 것이 없다는 것이요,
쉼이 없다는 것은 천리가 유행(流行)하여 한 번이라도 쉬는 사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알면 반드시 좋아하고, 좋아하면 반드시 찾으며, 찾으면 반드시 얻는다.
옛 사람의 배움이란 이것이 한평생의 일이었다.
과연 쓰러지거나 엎어지거나 급하고 구차한 경우를 <막론하고> 반드시 이 <인(仁)>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어찌 도리(道理)를 얻지 못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속히 이루어지기〔速成〕를 바라지 말며, 중도에서 폐지하는 것을 용허(容許)하지 않고,
부지런히 힘써서 죽은 뒤에라야 그치는 것이 좋다." 하였습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오곡(五穀)은 씨앗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성숙하지 아니하면 가라지나 피〔荑稗〕만도 못한 것이다.
무릇 인(仁)도 역시 이것을 익혀야 할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윤씨(尹氏)는 말하기를, "날마다 새롭게 하여 그치지 않으면 익혀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말에는 가르침이 있고, 행동에는 법도가 있으며, 낮에는 하는 일〔有爲〕이 있고, 밤에는 얻는 것이 있으며,
숨 한 번 쉴 때에도 함양(涵養)함이 있고, 눈 한 번 깜박이는 사이에도 tod각함이 있다. (장자정몽(張子正蒙))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법언(法言)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아니하니, 말에는 가르침이 있는 것이요,
선왕의 덕행(德行)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아니하니, 행동에 법이 있는 것이다.
온종일 부지런하게 일하니 낮에는 할 일이 있는 것이며, 야기(夜氣)를 기르는 것이니, 밤에 얻음이 있는 것이다.
공기〔氣〕가 드나드는 것을 숨을 쉰다〔息〕고 한다. 한번 숨쉬는 동안에도 반드시 함양하는 바가 있다.
눈 한 번 깜박하는 것을 일순(一瞬)이라고 한다. 일순간에도 반드시 생각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군자는 어디에서나 언제나 배운다는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반대로 나태의 병폐에 대한 말씀
○공자는 말하기를, 싹〔苗〕이 나왔어도 뛰어나지 못한 것이 있고, 뛰어나지만 결실되지 못한 것이 있다." 하였습니다. (「논어」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곡식이 처음 나는 것을 싹이라 하고, 꽃이 피는 것을 빼어난다고 하며, 곡식으로 성숙하는 것을 결실(結實)이라고 한다.
대개 배워서 성취하는 데 이르지 못함이 이와 같은 점이 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스스로 힘쓰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하였습니다.
○남헌장씨(南軒張氏)는 말하기를, "종묘(種苗)를 기르는 데는 김매고 북돋우는 때를 놓지지 않고, 그 생리(生理)에 거스리지 아니하여,
비와 이슬에 불어나고 밤으로 자라나서, 처음과 끝이 한결같아야 그의 성숙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버려둔 채 김매지 아니하거나 <인력(人力)으로> 뽑아 올려 성장을 도우며, 하루는 덥게 쬐어주고,
열흘은 춥게 하는 정도가 되면, 싹이 나서는 빼어나지 못하고, 빼어나서도 성숙하지 못하는 것이다.
배우는 일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소질(素質)은 있으나 배우지 아니함은, 싹은 나왔으나 빼어나지 않는 것과 같고,
배우고서도 몸에 지니지 못한다면 빼어나기는 하였으나 결실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니 공자가 말하기를,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으며,
더러운 흙으로 된 장벽(牆壁)은 흙손질〔〕할 수 없는 것이니, 재여를 꾸짖어〔註〕무엇하겠느냐."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낮잠〔晝寢〕은 낮이 되어서 잠자는 것이다. 오〔〕는 흙손〔〕이다.
그의 지기(志氣)가 혼미하고 나태하여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여(與)는 어조사이다.
주(註)는 책(責)과 같으니 꾸짖는 것이다. 꾸짖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곧 심각하게 꾸짖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호씨(胡氏)는 말하기를, "재여(宰予)가 지(志)로써 기(氣)를 거느리지 못하고 안이(安易)하고 나태하니,
이것은 편안하고자 하는 기(氣)가 스스로 경계하는 지(志)를 이겨서 나태한 것이다.
옛 성현(聖賢)들 치고 일찍이 게으름과 거칠고 편안한 생각이 들까 두려워하여
부지런히 힘써서 쉬지 않고 스스로 굳세게 하지 아니한 이가 없었으니 이것이 공자가 재여를 심각하게 꾸짖은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여 보건대, 군자의 배우는 일은 성근(誠勤)하고 독실(篤實)해야 할 따름입니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어서 전진하지 아니하면 후퇴합니다. 만약 성근하고 독실하지 아니하면 어찌 성취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는 말하기를, "먼저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얻는다." 하였습니다. 공부가 지극하면 필경 효과가 오는 것인데, 어찌 미리 기약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은 먼저 얻기부터 하려는 데 병폐가 있습니다.
미리 기약만 하고 공부는 지극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행한지 얼마 안 되어서 이내 싫어하고 권태로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우는 자의 공통된 병폐입니다. 먼 곳에 가는 자가 한 걸음에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가까운 데서부터 점차로 가야됩니다. 높은 곳에 오르는 자는 단번에 뛰어오를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낮은 곳에서부터 점차로 딛고 올라가야 합니다.
진실로 그 길을 잃지 않고, 부지런히 차례대로 질서있게, 날마다 공정(功程)을 정하여 전진할 뿐 후퇴됨이 없게 하면,
멀다고 못 갈 곳이 없고, 높다고 못 오를 곳이 없습니다.
사람의 심정(心情)이 제각기 즐기는 바가 있으나, 배우는 것을 낙(樂)으로 여기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가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니,
그 가리는 바를 알아서 힘써 제거하여야 합니다.
성색(聲色)에 가리워진 자는 노래와 여색(女色)을 멀리 하기에 힘 쓸 것이며,
재화(財貨)와 이익(利益)에 가리워진 자는 재물을 천하게 여기고 덕(德)을 소중히 여기기를 힘쓸 것이며,
치우치고 사사로운 것에 가리워진 자는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좇기를 힘써야 합니다.
무릇 덮여 가리워짐이 있는 것은, 오로지 그 근본을 끊도록 힘써야 하고, 공부를 실천하는 일에는 어려움과 쉬움을 교계(較計)하지 말고,
용감하고 힘 있게 나아가며, 절실하게 괴로움을 참으면서 단연코 물러서지 아니하면,
공부가 진행되는 상태가 처음에는 매우 험난하고 막히지만, 뒤에는 점차로 조리(條理)가 시원하게 밝혀지며,
처음에는 매우 혼란하지만 뒤에는 점차로 정리될 것이며, 처음에는 매우 어렵고 빽빽하지만 뒤에는 점차로 통달하여 편리할 것이며,
처음에는 매우 담박하지만 뒤에는 점차로 맛이 있어서, 반드시 정(情)이 발로(發露)되어 배우는 것을 낙(樂)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 천하의 물건이 배우는 일보다 더한 것이 없게 될 것이니,
어느 겨를에 바깥 것을 사모(思慕)하여 이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고 늦추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안자(顔子)가 파(罷)하고자 하였으나 파할 수 없었던〔欲罷不能〕까닭입니다.
원하건대 예념(睿念)을 여기에 머무르게 하소서.
제13장. 수기 공효(修己功效)
신이 살펴보건대, 용공(用功)이 지극하면 반드시 효험(效驗)이 있는 데에 이르는 것이므로, 다음에는 공효를 차례로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지(知)와 행(行)이 겸비(兼備)하고 표리(表裏)가 하나같이 되어, 성인(聖人)의 경지에 들어가는 상태까지 다 말하였습니다.
◆ 지(知)를 거쳐서 행(行)에 도달하는 효험에 대한 말씀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오직 군자만이 온 천하 <사람들의> 뜻을 능히 통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동인괘(同人卦)100)의 단사(彖辭))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천하 <사람들의> 뜻은 천차만별(千差萬別)이지만 이치는 하나이다.
군자는 이치에 밝은 까닭에 능히 온 천하 <사람들의> 뜻에 통달할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억조창생(億兆蒼生)의 마음 보기를 한 사람의 마음과 같이 하는 것은 이치에 통탈하기 때문일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그칠 곳을 알고 나서야 정(定)할 수 있고, 정(定)하고 나서야 정(靜)할 수 있으며,
정(靜)한 뒤라야 안(安)할 수 있고, 안(安)한 뒤라야 생각〔慮〕할 수 있으며, 생각한 뒤라야 능히 얻을 수 있다. (대학(大學))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그칠 곳〔止〕이라는 것은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니, 즉 지선(至善)이 있는 곳이다.
그칠 바를 알면 뜻에 정(定)한 방향이 있는 것이다.
(옳고 그른 것이 명백하여지면 반드시 선(善)에 향하고 악(惡)을 등질 것입니다.)
정(靜)하다고 한 것은 마음이 망령되게 움직이지 않음을 말한다.
(옳고 그른 것이 이미 정하여졌으므로, 다른 옆길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아서,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고요한 것입니다.)
안(安)하다고 한 것은 처(處)하는 바가 편안하다는 것을 말한다.
(나의 권도(權度)101)를 바르게 하여 사물(事物)에 응(應)하니, 때에 따라 곳에 따라 태연(泰然)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한다〔慮〕고 한 것은 처사(處事)가 정순(精純)하고 자세함을 말한다.
(사물(事物)이 앞에와 닿으면 다시 모름지기 살펴야 할 곳을 궁구하고 연구하여 처리하는 것입니다.)
얻는다〔得〕고 한 것은 그 그쳐야 할 곳을 얻었음을 말한다. (행하여 지극히 선(善)한데 그침을 얻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정(定)·정(靜)·안(安)의 세 글자를 비록 차례로 나누었으나 서로의 거리는 멀지 않고, 다만 얕고 깊음이 있을 뿐이다.
실은 그칠 바를 알게 되고 나서는 모두 용이하게 전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안(安)하고 나서 능히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한 뒤라야 능히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진취(進就)하기 어려운 곳이다.
많은 <사람들은> 안(安)하는 곳까지 이르러서는 멈춰 버리는 것이다.
○쌍봉 요씨(雙峯饒氏)는 말하기를,
"저울에 비유하면 그칠 바를 안다〔知止〕는 것은 저울 위의 눈을 아는 것이요,
생각한다〔慮〕고 한 것은 장차 물건을 달려고 할 즈음에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는 것과 같다.
능히 얻을 수 있다〔能得〕고 한 것은, 바야흐로 가볍고 무거운 것을 정확하게 저울질해 알아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定)·정(靜)·안(安)은 일이 이르기 전에 있는 것이요, 생각한다〔慮〕는 것은 일이 바야흐로 도래(到來)할 즈음에 있는 것이다.
이 정(定)·정(靜)·안(安)과 생각하는 네 가지는 바로'그칠 바를 안다〔知止〕.'는 데서
'능히 얻을 수 있다〔能得〕.'는 경지에 도달하는 연결된 통로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행(行)을 거쳐서 지(知)에 도달하는 효험에 대한 말씀
○맹자는 말하기를, "자신에게로 되돌려 살펴보아 진실로 그러하면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 하였습니다. (맹자(孟子))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義), 부자(父子) 사이의 친(親)같은 도리는 본래 우리의 몸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진실로 그러하다〔誠〕는 것은, 진실로 이러한 이치가 있다는 뜻이다.
자기의 신상(身上)을 점검(點檢)하여 보아서 과연 잘못된 일이 없고, 임금을 섬기는 데 정말 충성하였으며,
아버지를 섬기는 데는 진정 효도를 다함으로써, 각각 그 마땅한 바를 다하여 한 터럭만큼도 미진한 곳이 없으면 우러러봐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봐서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서 자연히 쾌활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반성하여 보아 조금이라도 부실(不實)한 구석이 있으며,
마음이 부끄러워서 스스로 편안할 수가 없을 것이니 어떻게 즐거울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자신을 반성하여 보아, 갖추고 있는 이치가 모두 악취(惡臭)를 싫어하고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도리에 충실> 하였다면 그의 행하는 바는 애써 노력함을 기다리지 않고라도 이롭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니,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삼(參:증삼(曾參))아, 우리의 도(道)는 하나로써 궤였다〔一貫〕." 하니, 증자(曾子)는, "예" 하고, 대답하였다. (논어)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삼아〔參乎〕라고, 한 것은 증자(曾子)의 이름을 불러서 일러준 것이다.
꿰였다〔貫〕고 한 것은 관통한다는 것이다. '예'〔唯〕라고 한 것은 대답하는 것이 빠르고 의심이 없다는 것이다.
성인(聖人)의 마음은 혼연(渾然)히 한 가지 이치이다.
그러나 널리 응용되고 곡진하게 합당하여 응용(應用)함이 각각 같지 않다.
비유하건대 천지〔天地〕의 지성(至誠)이 쉼〔息〕이 없어서 만물(萬物)이 제각기 그 곳〔所〕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증자가 그의 용(用)에 있어서는 대개 이미 일에 따라 정밀하게 살피고 힘써 행하였으나, 다만 그 체(體)가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공자는 그가 진실로 쌓고 힘씀이 오래여서 장차 얻는 바가 있을 것을 알았다.
그런 까닭에 불러서 일러준 것이며, 증자는 과연 능히 묵묵히 그 가르침을 깨닫고 재빨리 응답하여 의심함이 없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 하나〔一〕라고 한 것은 한 마음이란 뜻이다.
꿴다〔貫〕는 것은 온갖 일이니 다만 이 한 마음의 이치로 여러 가지 이치를 다 관통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꿴다고 한 것은 흩어진 돈닢과 같고, 하나라고 한 것은 꿰는 노끈과 같다.
증자가 허다한 산전(散錢)을 모두 세었으나 다만 꿸 노끈 하나가 없었으므로 공자가 문득 꿰미를 집어 준 것이다.
지금 만약 한 닢의 산전도 없으면서 다만 한 가닥의 꿰미만 사용한다면 또한 무엇을 꿰겠는가.
이제 꿰는 것〔一〕을 얻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고 다만 꿰일 것을 깊이 깨달아 얻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다.
관통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꿰이는 것을 얻는다고 말할 수 없다.
천품(天稟)이 높은 자는 흘러서 석가(釋伽)나 노자(老子) <같은 이단자(異端者)>가 되어버릴 것이고,
천품이 낮은 자는 다만 한 개의 조리없는 흐리멍덩한 물사(物事)를 만들고 말 것이다." 하였습니다.
○연평(延平)선생은 말하기를,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항상 가슴 속을 시원스럽게 터놓고 쇄락(灑落)하게 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이 설(說)은 매우 좋다.
대체로 이러한 경지는 견식(見識)이 분명하며 함양(涵養)함이 순수하고 성숙한 효험으로서,
진실히 누적(累積)된 공용(功用) 속에서 나오는 것이요, 하루아침에 억지로 끌어다 힘써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臣)이 살펴보건대, 지(知)와 행(行)은 비록 선후(先後)로 나누었으나 실은 동시에 함께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이는 지(知)를 거쳐서 행(行)에 도달하고 어떤 이는 행을 거쳐서 지에 도달합니다.
◆ 다음은 속을 경유하여 겉으로 나타나는 효험에 대한 말씀
○군자는 안으로 살펴서 병〔疾〕됨이 없고 뜻에 미워함〔惡〕이 없다.
<사람들이> 군자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은 오로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는 일이다. (중용(中庸))
주자는 말하기를, "구()는 병(病)이란 뜻이다. 뜻〔志〕에 미워함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과 같다.
○서산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신령하여서 터럭만큼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속이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마음에 만족해 할 수 없는 것이 있게된다. 이것이 이른바 병〔〕이 된다는 것이요, 또한 이른바 <마음에>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다.
오직 깊은 곳에 있으면서 드러난 데서와 같이 <행동>하고, 홀로〔獨〕 있으면서도 여러 사람과 같이 있는 것처럼 하여,
자신을 반성할 때에 병되거나 부끄러워할 것이 없으며, 이것이 군자가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나는 점으로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부(富)하면 집이 윤택(潤澤)하여지고, 덕(德)이 있으면 몸이 윤택하여진다. 마음이 넓으면 몸이 편안하게 펴진다〔〕.
그런 까닭으로 군자는 반드시 뜻을 정성〔誠〕되게 한다. (대학(大學))
주자는 말하기를, "반()은 편안하고 펴진다는 것이다.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넓고 크고 너그러우며 평온하여서 몸이 항상 펴지고 편안하게 된다.
덕(德)이 몸을 윤택하게 한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대개 선(善)이 속에서 충실하여 밖으로 드러남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옥루(屋漏)102)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펴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인)·의(義)·예(禮)·지(智)가 마음에 뿌리를 박으면 그밖에 나타남이 수연(然)하게 얼굴에 드러나고 등 뒷면에도 풍부하여진다.
사체(四體)에 베풀어져 사체는 말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깨우치게〔喩〕된다." 하였습니다. (맹자(孟子))
주자는 말하기를, "밖에 나타난다고 한 것은 드러나 보인다는 것이고,
수연(然)하다고 한 것은 맑고 화(和)하고 윤택한 모양이며, 풍부하여진다〔〕고 한 것은 풍후(豊厚)하고 차서 넘친다는 뜻이다.
사체(四體)에 베푼다고 한 것은 동작(動作)과 위의(威儀)에 드러나 보이는 것을 말한다.
깨우친다〔喩〕고 한 것은 깨닫는 것〔曉〕과 같다.
'사체는 말하지 아니하여도 깨우친다.'한 것은 사체가 나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능히 나의 뜻을 깨달아 안다는 뜻이다.
대체로 물욕에 구애가 없으면 성(性)의 사덕(四德)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그 쌓인 것이 성(盛)하게 되면 겉으로 나와서 드러나 보이는 것이므로,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순응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음악〔樂〕은 마음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요, 예(禮)라고 한 것은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음악은 화(和)를 다하게 되고, 예(禮)는 순(順)함을 다하게 된다.
마음 속이 화하고 밖이 순하면 백성들이 그의 얼굴 빛만 보아도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그의 용모(容貌)를 바라보기만 하여도 백성들은 쉽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덕(德)이 빛나 마음 속에 움직이면, 백성들이 받들어 듣지 않는 자가 없으며,
이(理)가 밖으로 발로(發露)하면 백성들이 받들어 순응하지 않는 자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악(禮樂)의 도(道)를 이루어 이것으로 시행한다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예기(禮記))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속에서 움직이면 능히 마음을 다스릴 수 있고, 밖에서 움직이면 능히 몸을 다스릴 수 있으며,
지극히 화(和)하고 지극히 순하면 잠깐 사이의 불화도 불순(不順)도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남을 감동시키는 효험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지(知)와 행(行) 겉과 속〔表裏〕을 합하여, 얕은 데서부터 깊은 데 이르는 것과 성(聖)스럽고 신비스러운 것의 극치에 대한 말씀
맹자는 말하기를, " 하고자 할 만한 것을 선(善)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맹자」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천하의 이치가 선(善)한 것은 반드시 하고자 할 만하고, 악(惡)한 것은 반드시 미워할 만한 것이다.
그 사람됨이 마음가짐, 일의 처리함, 자기 몸을 수행(修行)하고 남을 접대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다 하고자 할 만하고 미워할 수 없다면,
선인(善人)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자기의 몸에 소유하는 것을 믿음성〔信〕이라고 한다.
주자는 말하기를, "모든 선(善)이라고 하는 것을 진실로 다 <자기의 몸에> 가지고,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惡臭)를 싫어함과 같이 하며, <선(善)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함과 같이 한다면,
믿음성있는 사람〔信人〕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인(善人)이라는 것은 혹은 그의 천품이 아름답거나 혹은 배워 알아서 힘쓰고 사모하여 도달한 이도 있으나 반드시 그가 참으로 그렇게 하여,
과연 능히 잃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힘을 씀〔用力〕이 오래되고, 진실로 이러한 선(善)을 몸에 지녀서 터럭만한 허위(虛僞)도 없어야만
믿을 만한 사람〔信人〕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충실(充實)한 것을 아름답다〔美〕고 한다.
주자는 말하기를, "이미 믿어우면 행하기에 반드시 힘 쓸 것이요, 지키는데 반드시 견고(堅固)할 것이다.
오로지 이렇게만 한다면 가진 바 선(善)은 그의 몸에 충족(充足)하고 포만(飽滿)되어,
비록 미세(微細)한 곡절(曲折)에도 역시 모두가 맑고 화(和)하며, 순수하고 의젓하여 불선(不善)한 것이 섞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른바 아름다운 사람〔美人〕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충실하여 광채가 나는 것을 크다고〔大〕한다.
주자는 말하기를, "화하고 순한 것이 속에 쌓여서 꽃답고 고운 것이 밖에 나타나며,
미(美)가 그 가운데 있어서 사지(四肢)에 창달(暢達)되고,
사업(事業)에 발휘(發揮)되면 덕업(德業)이 지극히 성대(成大)하여서 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미(美)는 능히 내부를 채워 줄 뿐이고, 반드시 그것이 밖에 나타나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이렇게 하여 마지아니하면 그 내면에 채워진 선(善)이 가득하여 지고 넘쳐서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이 몸에 있어서는 낯빛을 수연(然)하게 하고 등〔背〕을 풍부하게〔〕하여 사체(四體)에 드러나게 한다.
그것이 일에 있어서는 덕(德)은 성대(盛大)하게 하고 인(仁)은 성숙(成熟)하여서 천하가 아름답고 광명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대인(大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커서 화(化)하는 것을 성(聖)이라고 하고, 성(聖)하여 알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고 한다.
주자는 말하기를, "커서 능히 화(化)하게 되어, 그 큰 것으로 하여금 아무런 다시 볼 만한 자취가 없는 경지에 이르게 하면,
생각하지 아니하고 힘쓰지 아니하여도 조용히 <저절로> 도(道)에 맞는데,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능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크고도 화(化)하지 아니하면 그 크다는 것이 아직 방체(方體)와 형적(形跡)의 <테두리를> 이탈하지 못한 것이다.
반드시 덕(德)이 성대(盛大)한 자는 날로 성대함을 더하고, 인(仁)이 성숙한 자는 날로 성숙함을 더하면,
소위 크다는 것〔大者〕은 봄이 무르익어 얼음이 풀리듯 혼연히 자취도 없어,
천지(天地)와 그 덕이 합치하고 일월(日月)과 광명이 합치하며, 사계절(四季節)과 질서가 합치하고 귀신(鬼神)과 길흉(吉凶)이 합치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커서 화한다는 것〔大而化之〕은 오직 이(理)와 자기가 하나로 되는 것이다.
아직 화(化)하지 못한 자는 사람이 자〔尺〕를 잡고 물건을 재는 것과 같지마는, 화하게 되면 몸이 곧 자가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대(大)는 할 수가 있지만,
화(化)한다는 것은 <인위로> 할 수가 없고, 다만 성숙(成熟)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성(聖)에 이르면 도(道)에 나아가고 덕(德)으로 들어가는 공부가 더할 수 없이 극진하게 된다.
이것은 성덕(盛德)과 지선(至善)의 극치(極致)인 것이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신묘(神妙)함이 반드시 귀와 눈으로도 능히 다 보고 들을 수 없으며,
마음의 생각으로도 능히 추측(推測)할 수 없는 바가 있는데, 이런 것을 이른바 신(神)이라는 것이요,
성인(聖人)의 위에 다시 신인(神人)이 있다고 한 것은 아니다.
대개 하고자 하는 것〔可欲〕에서 크다〔大〕는 것에 이르기까지는 생각하고 힘씀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마는,
성(聖)하고 또 신(神)한 것에 이르러서는 생각하고 힘쓰는 것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고 힘써서 그치지 아니하는 일 없이는 또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위의 성(聖)과 신(神)의 설을 이어 성인의 도에 대해 극론(極論)함
공자는 네 가지를 끊었습니다. 사의(私意)가 없고〔毋〕, 기필(期必)함이 없으며,
고집(固執)함이 없고, 사사로운 아집(我執)이 없었습니다. (「논어」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끊었다는 것〔絶〕은 완전히 없앤 것이다.
없다는 무(毋)자는 사기(史記)에 무(無)자로 썼으니 옳다.
사의(私意)라고 한 것은 사사로운 뜻〔意〕이다.
기필(期必)이라고 한 것은 꼭 그렇게 하고야 말겠다고 기약하는 것이다.
고집(固執)한다고 한 것은 고루(固陋)하게 집념을 가지고 정체(停滯)하는 것이다.
아집(我執)이라고 한 것은 사사로운 자기 본위의 생각이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끝이 되고 처음이 되는 것이다.
사사로운 생각에서 일어나서 기필(期必)하는 데서 수행(遂行)되고, 고집하는 데서 머물러서 자기 본위의 주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체로 사의(私意)와 기필은 항상 사전(事前)에 있고, 고집과 아집은 항상 사후(事後)에 있다." 하였습니다.
○정자는 말하기를, 여기에 무(毋)자는 금지(禁止)하는 말이 아니다.
성인(聖人)이 이 네 가지를 끊었는데 무슨 금지의 말이 소용되겠는가.
성인의 마음은 하늘과 더불어 일체(一體)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성인의 마음은 밝은 거울 같고 고요하게 머물러 있는〔靜止〕물과 같다." 하였습니다.
○장자는 말하기를, "네 가지 중에 하나라도 있다면 천지와 더불어 서로 같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1절은 성인(聖人)의 마음을 말한 것입니다.)
공자는 <용모(容貌)가> 온화(溫和)하면서도 엄숙하고, 위의(威儀)가 의젓하면서도 사납지 아니하며, 공손하면서도 안서(安舒)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여()는 엄숙한 것이다.
사람의 덕성(德性)은 본래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나 기질(氣質)의 주어진 바가 편파(偏頗)되지 않음이 드물다.
오직 성인(聖人)만이 전체가 혼연되어 음양과 덕이 합치되는 까닭에
그 중화의 기〔中和之氣〕가 용모(容貌)에 나타나 보임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1절은 성인의 용모(容貌)를 말한 것입니다.)
군자(君子)는 움직이면 대대(世世)로 천하의 도리가 되어, 행(行)하면 대대로 천하의 법도(法度)가 되며,
말하면 대대로 천하의 준칙(準則)이 된다. 멀리서는 첨망(瞻望)하며, 가까운 데에서는 싫어하지 아니한다. (「중용」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동(動)한다고 한 것은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겸하여 말함이요,
도(道)라고 한 것은 법도와 준칙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법(法)은 법도이고, 칙(則)은 준칙이다." 하였습니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멀리 있는 자는 그의 덕(德) 입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바라고 흠모(欽慕)하는 뜻이 있으며,
가까운 곳에 있는 자는 그의 행(行)함이 떳떳함에 익숙하여져서 싫어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1절은 성인의 언행(言行)을 말한 것입니다.)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 능히 그 성(性)을 다할 수 있으며, 그 성(性)을 다할 수 있으면 사람의 성(性)을 다할 수 있다.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물(物)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며, 물(性)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천지와 더불어 병립할 수 있다.
주자는 말하기를, "천하의 지성(至誠)이라고 한 것은 성인(聖人)의 덕(德)의 성실함이 천하에 더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 성(性)을 다한다고 한 것은 덕(德)이 성실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이 없고,
천명(天命)이 나에게 있는 것을 살피고 좇아서 거대한 것이나 미세한 것, 정순(精純)한 것이나 조잡한 것에도 터럭만큼의 미진(未盡)함이 없는 것이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도 또한 나의 성(性)이며, 다만 품부(稟賦)된 형기(形氣)가 같지 아니하여 차이가 있을 뿐이다.
능히 다한다〔能盡之〕한 것은 아는 것이 밝지 않음이 없고,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말한 것이다.
찬(贊)이라고 한 것은 돕는다〔助〕는 것과 같고, 천지와 더불어 병립한다 함은
하늘과 땅과 더불어 병립(竝立)하여서 셋〔三〕이 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1절은 성인(聖人)의 덕업(德業)을 말한 것입니다.)
신(臣)이 살펴보건대, 성인의 덕(德)은 천지와 함께 일체(一體)가 되어서 신묘(神妙)함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러한 경지에>도 달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 같으나, 진실로 능히 공부를 쌓을 수만 있다면 이르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지 않는 것을 근심할지언정 불능(不能)한 것을 근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요(堯)·순(舜)·주공(周公)·공자 같은 이는 나면서부터 알아서 편안하게 행하여 점차로 조금씩 전진하는 공부가 없었지만,
탕왕(湯王)·무왕(武王)이하는 배워서 알고 힘써서 행(行)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이미 천성(天性)에 돌리는 공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보다 아래에 있는 자들은 비록 괴롭게 애써 배워 알고 힘써 행하였으나 성공(成功)한 뒤에는 동일(同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명도(程明道)를 보고 혼연(渾然)한 천성(天成)만을 좋아하고 그가 죽도록 애써 공부에 종사한 것은 알지 못하며,
회암(晦菴)을 보고 바다같이 넓고 하늘같이 높음만을 좋아하고
작은 수(銖)103)에서 거듭하고 치〔寸〕에서 거듭 쌓아올리는 공부에 종사하였음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에 능히 그의 길을 따라 걸어간 발자국을 밟으면서 그 울타리를 지나서 문지방 안의 깊숙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갓 앞 사람의 교훈을 가져다가 입에 올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법칙은 눈앞에 있건만 잘 배우는 자가 대(代)마다 나오지 않는 까닭입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성인(聖人)을 나는 얻어 볼 수 없다. 군자나마 얻어 보았으면 좋겠다." 하였습니다.
성인의 천부적(天賦的) 자질의 아름다움은 진실로 보통 사람이 미치기를 바랄 수 없는 바이나,
만약 군자라면 천품의 좋고 나쁜 것을 물론하고 다 배워서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건만 또한 얻어 볼 수조차도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군자로서 전진하고 전진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어찌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은 하고자 할 만한 선〔可欲之善〕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천지와 병립하고,
화육을 돕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다만 지(知)를 쌓고 행(行)을 거듭하며, 그 인(仁)을 숙습(熟習)하기에 있을 따름입니다,
성현이 큰 길을 지시(指示)함이 명백하고 평탄하건만, 사람들이 잘 지나가는 이가 드무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평범한 필부(匹夫) 한 사람이 학문을 하여도 오히려 천지와 병립(竝立)하고 화육(化育)을 돕는 것으로 표준을 삼는데
하물며 제왕(帝王)이겠습니까. 옛날의 제왕도 반드시 나면서부터 저절로 선(善)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태갑(太甲)과 같은 이는 전형(典刑)을 전복(顚覆)시켰으나, 마침내 진실한 덕(德)을 이루기에 이르렀으며,
성왕(成王)은 유언(流言)을 살피지 못하였으나 마침내는 상벌(賞罰)을 합당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뒷 세상의 제왕들이 모두 두 임금의 시초〔初〕로써 경계를 삼아야 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행한 것을 살펴보면 모두 그 두 임금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능히 뜻을 겸손하게 하여 힘써 배우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개 제왕의 바탕은 반드시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정기(精氣)를 많이 모으고 사물을 쓰는〔用〕일은 넓습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나라를 멸망시킨 군주일지라도 재기(才器)가 남보다 뛰어난 자는 많습니다.
오직 그 재주를 정당하지 못한 데에 써서 도리어 재주의 누(累)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높게 높게 자존(自尊)하여 간하는 신하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편안하고 즐거운 것을 스스로 즐겨하여 <화복(禍福)이 서로> 기복(起伏)하는 것은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퇴폐(頹廢)하고 타락하여 스스로 단념(斷念)하여, 떨치고 일어나지 못합니다.
나날이 비루하여지고 다달이 더러워져서, 작게는 몸이 위태롭고 국토(國土)가 깎이게 되며,
크게는 몸이 죽고 나라가 멸망하게 되니,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 온갖 선한 것이 성(性)에 갖추어져 있어서 밖에서 찾는 것은 용허(容許)하지 않습니다.
공(功)을 쌓는 것은 자기에게 연유할 뿐이요, 타력(他力)을 의지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도, 또한 나에게 있는 것이어서 누구도 감히 막지 못합니다.
이러한데 배우기를 일삼아 맑고, 넓은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고서 도리어 욕심을 일삼아서 더럽고 낮은 것을 꾀하니,
아, 또한 생각하지 않음이 지나친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전하 자신의 마음에 돌려서 찾으시고, 선성(先聖)을 바라보며 사모하시옵소서.
위로는 황전(皇天)과 조종(祖宗)이 내려주신 책임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신하와 뭇 백성들의 바라고 바라는 여망(輿望)을 좇으소서.
독실하게 성현의 학문을 믿고 성실하게 실천하여 차례를 따라 나아가기를 밤낮없이 부지런히 하면,
반드시 고명(高明)하고 박후(博厚)한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몸을 닦는 공(功)을 다하여 이 세상으로 하여금 요(堯)·순(舜)과 같은 임금을 얻어볼 수 있게 하시고,
이 백성들로 하여금 요·순의 세계와 같은 은택을 입게 한다면, 영원한 후세까지 행복됨이 매우 클 것입니다.
< 주 >
100) 「주역」64괘 중 13번째 괘 이름.
101) 권(權)은 저울〔衡〕을 가리키며 도(度)는 자〔尺〕를 말한다.
102) 방의 서북쪽으로 깊숙하여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어두운 곳.
103) 중량의 아주 낮은 단위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