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집요(聖學輯要) - 제3편. 정 가(正家)
제3편. 정 가(正家)
신이 살피건대,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자기가 몸소 도(道)를 행하지 아니하면 처자에게도 도가 행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부리는 데 도(道)로써 하지 아니하면 처자에게도 <영(令)이> 행해지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자신이 도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으로써 말하는 것이요,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가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부리되 도로써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로써 말한 것이며,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영〔令〕이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개 자기 몸을 닦고 난 다음에야 집안을 바르게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정가(正家)를 수기(修己) 다음 차례에 둔 것이오니,
이 아래는 치인(治人)하는 도입니다.
제1장. 정가 총론(正家總論)
신이 살피건대, 집안을 바루는〔正家〕데에는 모두 절목(節目)이 있기 때문에, 이제 대강의 줄거리를 논한 것들을 가지고 첫머리에 밝힙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는 근본이 있는데, 자기 자신을 일러 말한 것이요,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는 법도가 있는데, 그 집을 말한 것이다.
근본은 반드시 단정해야만 하는데, 근본이 단정하려면 마음을 정성스럽게 해야 하며,
법도는 반드시 선해야만 하는데 법도가 선하려면 어버이를 화평하게 해야한다. (주자(周子) 통서(通書))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칙(則)은 사물의 본받을 수 있는 것을 법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데,
속어(俗語)로 칙례(則例)·칙양(則樣) 같은 말이 바로 이것이다.
마음이 정성스럽지 아니하면 몸을 바룰 수가 없으며, 어버이가 화평하지 아니하면 그 집안이 다스려질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그 집안 사람을 가르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이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집밖에 나가지 아니 하고서도 나라에 가르침을 이룩하는 것이다.
효도〔孝〕라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길이요, 공경〔弟〕이라는 것은 어른을 섬기는 길이며,
자애〔慈〕라는 것은 여러 사람을 부리는 길이다. (대학(大學))
주자는 말하기를, "효도·공경·자애는 자기 자신을 먼저 수양하여 집안에서 가족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임금을 섬기고, 웃어른을 섬기며, 여러 사람을 부리는 길도 이 방법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이것이 집안은 위에서 다스려지고 가르침은 아래에서 이룩된다는 이유이다." 하였습니다.
역(易)에 이르기를, "부모가 부모의 할 일을 하고, 자식이 자식의 할 일을 하며, 형이 형의 할 일을 하고,
아우가 아우의 할 일을 하며, 남편이 남편의 할 일을 하고, 아내가 아내의 할 일을 할 것 같으며,
집안의 규범이 바로 서게 되고, 집안이 바르게 되면 천하가 안정된다." 하였습니다. (가인괘(家人卦)104) 단사(彖辭))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부자·형제·부부가 각기 그도를 지키면 곧 그 집안의 가도(家道)가 바로 서게 된다.
한 집안의 가도를 미루면 천하의 모든 일에 미칠 수가 있다.
예로부터 성왕(聖王)은 자기를 공손하게 하고, 집안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지 아니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그 집안의 가도가 이미 지극하면, 근심하거나 수고하지 아니하여도 천하는 다스려진다." 하였습니다.
사람의 도리와 기강을 바르게 하고, 은혜와 덕을 두텁게 하는 것이 집안 사람이 해야 할 도이다. (정자(程子) 역전(易傳))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사람의 도리와 기강을 바르게 한다면 신분의 높고 낮음이 분명해지고,
은혜와 덕을 두텁게 한다면 웃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이나 뜻이 서로 잘 맞게 될 것이다.
이 두 일이 아울러 실행되어야만 집안을 처리하는 도가 분명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의 도리와 기강을 바르게 하는 일을 반드시 먼저 해야만 하는 것이니,
사람의 도리와 기강이 바르게 되지 아니하고서도 은혜와 덕이 두터워진 적은 아직껏 없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임금의 집안이 잘 정돈된다면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고,
임금의 집안이 잘 정돈되지 아니하면서 능히 그 천하를 잘 다스린 사람은 없다.
이런 때문에 성현(聖賢)이라고 불리운 임금으로서 능히 그 정사(政事)를 잘한 이는 집안을 정돈하는 일을 근본으로 삼지 아니한 적이 없다.
대개 남자는 밖으로 그 위치를 바르게 하고, 여자는 안으로 그 위치를 바르게 함으로써 부부간의 분별이 엄격하게 되는 것은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요,
처(妻)는 위에서 몸을 정제하고, 첩(妾)은 아래에서 이어받아서 적(嫡)과 서(庶)의 분별이 정해지는 것이 집안이 다스려지는 것이며,
덕이 있는 이를 본받고 성색(聲色)을 경계하며, 엄격하고 공경할 만한 사람을 가까이 하며,
재주 있고 잘하는 체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요,
집안의 말이 <밖에> 새어 나지 아니하고 밖의 말이 안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뇌물 꾸러미가 통하지 아니하고 <권력 세도에> 청탁하는 일이 행해지지 아니하는 것이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안방 잠자리 속에서의 사랑은 늘 옳은 일을 가리기가 일쑤이니,
이 때문에 비록 뛰어난 영웅의 재간을 가지고서도 오히려 술과 여자에게 곤욕을 당하고,
애정(愛情)에 빠져서 능히 스스로를 이겨내지 못하는 자가 있다.
만일 자기의 마음을 바로 잡고, 자신의 덕을 닦아서 예의로써 행동하여,
사람을 나의 덕에 심복하게 하고 나의 위엄을 두려워하게 하지 않는다면, 또한 무엇으로 그 궁중왕래를 바르게 하고,
그 청탁을 막아내며 그 친척들을 단속하여 화란(禍亂)이 싹트는 것을 막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道)는 바른 윤리(倫理)와 돈독한 은의(恩義)의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으니,
다음의 글에서는 이것을 미루어 설명하기로 합니다.
< 주 >
104) 「주역」64괘 중 37번째 괘 이름.
제2장. 효 경(孝敬)
신이 살피건대, 효도는 모든 행동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道)는 효도와 공경하는 일을 그 첫째로 삼습니다.
◆ 사친(事親)의 도에 대한 총론
공자는 말하기를, "신체(身體)와 모발〔髮〕과 피부 등은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니,
감히 <그것을> 훼손하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처음이며, 입신(立身)하여 도를 실천하고 후세에 이름을 떨쳐서,
그것으로써 부모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일이 효도의 마지막이다.
대체로 효도는 부모를 섬기는 일에서 시작하고, 임금을 섬기는 일이 중간이 되며, 입신하는 것을 그 마지막에 둔다." 하였습니다. (「효경」하동)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사람의 신체는 부모가 물려준 것이니, 스스로 아껴서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능히 입신하여 도(道)를 실천한다면 곧 자기의 이름이 후세에 떨쳐지고, 부모의 이름까지도 역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다." 하였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감히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아니하며,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은 감히 다른 사람에게 거만하게 하지 아니한다.
사랑하고 공경하여 부모를 극진히 섬긴다면 덕과 교화가 백성에게 더해지고, 온누리에 모범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천자가 하는 효도이다.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효도라는 것은 사랑하고 공경하는 데서 벗어나지 아니할 따름이니,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질투하고 미워하는 일이 없어지며,
부모를 공경하는 심정을 미루어서 다른 사람을 존경하면, 남을 낮추어 보거나 업신여기는 바가 없을 것인데,
<이를> 위에서 몸소 실천한다면 도덕과 교화가 자연 아랫사람의 본보기가 되어서,
천하 사람들은 모두 그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웃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아니하면 높은 지위에 있어도 위태롭지 아니하고,
자제(自制)하고 절도가 있어 법도를 존중하면 가득 차 있어도 넘치지 아니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여야만 능히 그 사직(社稷)을 잘 보존할 수가 있고,
그 백성들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제후(諸侯)가 하는 효도이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제절(制節)은 스스로 예절을 적당하게 조절하여 지킴이요,
근도(謹度)는 법규와 제도를 삼가서 지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왕(先王)이 법으로 마련한 의복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아니하고, 선왕의 법(法)이 있는 말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道〕아니하며,
선왕의 덕 있는 행동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한 다음에야 능히 그 종묘(宗廟)를 잘 보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경(卿)과 대부(大夫)가 하는 효도이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법(法)은 법도(法度)이며, 도(道)는 말한다〔言〕는 뜻이다.
종(宗)이라고 함은 사람이 여기에 모이어〔宗〕<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것이다.
경과 대부는 모두 사당이 있으므로, 그 때문에 종묘를 보존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효도로써 임금을 섬기면 충(忠)이요, 공경으로써 웃어른을 섬기면 순(順)이 된다.
충과 순을 잃지 아니하고 그것으로 위를 섬긴 연후에야, 능히 그 제사 지내는 일을 잘 지켜 나갈 수가 있는데, 이는 곧 선비가 하는 효도이다.
진씨는 말하기를, "부모를 섬기는 효도를 옮겨서 임금을 섬기면 곧 충성이 되며, 부모를 섬기는 공경을 옮겨서 웃어른을 섬기면 곧 순함〔順〕이 된다.
위〔上〕는 곧 임금과 웃어른을 가리킨다.
선비는 전답과 녹(祿)이 있어 그것으로 제사를 받들 수 있기 때문에, '제사 받드는 일을 지킨다.'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늘의 도〔道〕를 따르고 땅의 이(利)를 이용하여, 몸가짐을 조심하고 씀씀이를 절약〔節用〕하여서 그것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니,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하는 효도이다.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하늘의 도를 따른다는 것은, 하늘이 낳아서 자라게 하고 거두어 간직하는 <도리에> 따라,
밭갈고 김매는 일과 곡식을 거둬들이는 일을 각각 그 <알맞는> 때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땅의 벼와 수수〔稻梁〕, 기장과 피〔黍稷〕등을 각각 적당하게 심는 것을 말한다.
몸가짐을 조심〔謹身〕한다는 것은 자신의 분수를 지켜서 망령된 일을 하지 않는 것이요,
씀씀이를 절약한다는 것은 쓰는 일에 검소하게 하여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능히 이와 같이 할 수만 있다며, 몸이 안정되고 힘이 넉넉하여 그것을 가지고 그 부모를 봉양할 수가 있는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천자(天子)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효도하는 일에 처음과 끝이 없고서도 환란이 미치지 아니하는 자는 없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부모를 섬기는데 능히 처음과 끝이 있지 아니한 자는 재앙이 반드시 그 자신에게 미친다." 하였습니다.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일은 그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공경을 다하고, 봉양할 때에는 그 즐거움을 다해 드리며,
병환에 계시면 그 근심을 다하고, 돌아가시면 그 슬픔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 때에는 그 엄숙함을 다할 것이니,
<위의> 다섯 가지를 다 갖춘 연후에야 능히 부모를 잘 섬길 수가 있다.
진씨는 말하기를, "다한다는 것은 지극한 것을 말한 것이요, 즐겁다는 것은 얼굴 표정을 유쾌하게 보이고, 상냥스러운 모습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자식으로서 부모를 섬기는 마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털끝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한 것이 없어야 효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맹의자(孟懿子)105)가 효도를 물으니, 공자는 말하기를, "어기지 말라." 하였습니다. (「논어」하동)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어기지 말라고 한 것은 사리에 어그러지지 아니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번지(樊遲)106)가 모시고〔御〕가는데, 공자가 그에게 일러 말하기를, "맹손씨(孟孫氏)가 나에게 효도를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어기지 말라'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공자는 맹의자가 아직 통달하지 못하여 능히 묻지 않으니,
그 가리킨 뜻을 알지 못하고 부모가 시키는 일에만 순종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라고 여길까 염려하여,
번지에게 말하여서 그 뜻을 드러낸 것이다." 하였습니다.
번지가 말하기를,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하니,
공자는 말하기를, "살아서는 예로써 섬기고 죽어서는 예로써 장사지내며 예로써 제사지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살아서 섬기고, 죽어서 장사지내며,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부모 섬기는 일의 처음과 끝은 <모두> 갖춘 것이다.
예는 곧 이치를 알맞게 갖춘 것이니, 사람이 부모를 섬기는 일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로 일관하고 구차하게 아니하면
그 부모를 높이는 것이 지극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호씨(胡氏)는 말하기를, "사람이 그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는 마음은 비록 한정이 없다고 하지만,
분수에는 한도가 있으므로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구차하고 간략하며, 검소하고 누추한 것을 말합니다.)
능력이 없으면서도 <과분하게> 하는 것이 (사치하고 사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다 같이 불효에 속한다.
이른바 예로써 한다는 것은 그 <능력대로> 할 수 있는 바를 하는 것뿐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살아서 섬기는 도리에 대한 말씀
○무릇 사람의 자식이 되어 해야 할 예(禮)는, 겨울에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는 일과,
저녁에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새벽에 문안을 드리는 일과, 밖에 나갈 때 반드시 여쭙고, 돌아오면 반드시 뵙는 일과,
노는 곳이 반드시 일정함이 있어야 하고, 익히는 것은 반드시 일정한 것이 있어야 하며,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에 늙었다는 말을 써서는 아니 되는 것들이다. (「예기」하동)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따뜻하게 해서 그 추위를 막아 드리며, 서늘하게 해서 시원하도록 하고,
주무실 자리를 정해 드리고 그 안부를 살피며, 외출하면 나간다고 여쭙고, 귀가하면 돌아왔다고 여쭈어야 된다.
'노는 데에 일정함이 있어야 한다.' 함은 몸이 다른 곳에 가지 아니한다는 말이요,
'익히는 것은 일정한 것이 있어야 한다.' 한 것은 마음을 다른 데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효자가 노부모를 봉양할 때에는,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그 뜻을 어기지 아니하며,
그 보고 듣는 것〔耳目〕을 즐겁게 해드리고 그 잠자는 처소를 편하게 해 드리며, 음식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한다." 하였습니다.
방씨(方氏)는 말하기를, "부모를 봉양하는 데 물질로 봉양하면 족히 그 입과 몸을 봉양할 뿐이지만,
정성으로써 봉양할 것 같으면, 족히 그 뜻을 받들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부모가 사랑하는 것을 역시 사랑해야 되고, 부모가 존경하는 것을 역시 존경해야 된다.
개나 말이라도 다 그렇게 할 것이거늘,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증자(曾子)의 말은 여기에서 그침.)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효자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씨는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으므로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바를 역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효자로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온화한 기운이 있고, 온화한 기운이 있는 자는 반드시 기뻐하는 안색이 있으며,
기뻐하는 안색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냥스런 모습을 가진다. 효자는 <부모 섬기기를> 옥(玉)을 잡는 것같이 하고,
가득 찬 것을 받드는 것같이 하며, 동동 촉촉(洞洞蜀蜀)하여 이기지〔勝〕못하는 것같이 하고, 장차 잃을 것같이 한다.
위엄을 부리며 근엄한 모습으로 조신(操身)하는 것은 부모를 섬기는 바 도리가 아니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동동이라 함은 공경하는 데에 겉과 속의 차이가 없음이요, 촉촉이라 함은 성실하여 거짓이 없음을 가리킨다.
이긴다는 것은 당해 낸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진씨는 말하기를, "온화한 기운, 기뻐하는 안색, 상냥스런 모습 등은 모두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러나는 것이요,
옥(玉)을 잡는 것 같고, 가득 찬 것을 받드는 것 같으며, 이기지 못하는 것 같고, 장차 잃을 것 같다고 하는 것은
모두 공경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사랑과 공경이 함께 지극하면 그것이 바로 효자의 도(道)이다." 하였습니다.
소리 없는 데에서 듣고 형상이 없는 데에서 본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부모의 뜻을 먼저 알고, 그 뜻을 이어받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씨는 말하기를, "늘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면 마치 <부모의> 형상을 보고 <부모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아서,
부모가 장차 자식에게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을 듯하다고 함이다." 하였습니다.
부모가 병환이 나면 장가든 성인은 빗질을 하지 않고 길 가는 데 활개치고 걸어다니지 아니하며 말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지 아니하며, 고기를 먹는 게 입맛이 변할 정도에까지 이르지 아니하고,
술을 마시는 데 용모가 변할 정도까지 이르지 아니하며, 웃어도 잇몸〔齒本〕을 드러내지 않고,
노하여도 욕설하는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다가 병환이 나으면 다시 그 전대로 돌아간다.
진씨는 말하기를, "이 말은 부모의 병환을 봉양하는 예를 말한 것이다.
빗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몸치장을 안하는 것이요, 활개를 치지 않는다는 것은 맵시를 내지 아니하는 것이며,
게으르지 않다는 것은 다른 일에는 미치지를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고기를 실컷 먹어서 입맛이 변할 정도에 이르지 않게 하고,
술을 마셔서 훈훈하게 취하여 안색이 변할 정도에 이르지 않게 할 뿐이다. 치본(齒本)은 잇몸을 말한다.
웃을 때 잇몸이 드러나면 이것은 큰 웃음이다.
성내어 꾸짖는 것을 욕설이라고 한다.
성이 나서 욕설하는 데에 이르면 이는 대단히 노한 것이다.
모두 근심 걱정을 잊어버린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경계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부모를 섬기는 데 은밀〔幾〕하게 간(諫)하고, 그 뜻을 살펴보아 따르지 아니하더라도
또 애써서 공경하고 어기지 아니하며 원망하지도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논어(論語))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이 장(章)과 (예기(禮記)의) 내칙(內則)의 말은 서로 앞뒤가 된다. 기(幾)는 미(微)이다.
'은밀하게 간한다.'함은, 이른바 부모가 잘못이 있으면 흥분을 가라앉히고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유순한 음성으로 간하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이른바 이하는 도두 내칙(內則)의 글입니다. 아래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 뜻이 따르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뜻은 부모의 뜻을 말합니다.)
또 공경하고 어기지 아니한다.'는 말은, 이른바 간하여도 부모가 만약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시 공경하고 효도하되,
즐거워하게 되면 또 다시 간하는 것을 말한다. '애쓰면서도 원망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이른바 그 고향 마을에서 죄를 얻느니 보다는,
오히려 익숙히(숙(孰)은 숙(熟)자와 같습니다.) 간할 것이니,
부모가 노하여 기뻐하지 아니하거나, 그래서 종아리를 맞아 피가 흐른다 할지라도 감히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다시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명의〔公明儀〕가 증자(曾子)에게 묻기를, "선생님〔夫子〕은 가히 효도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증자가 말하기를, "그것이 무슨 말인가. 그것이 무슨 말인가.
군자의 이른바 효도라는 것은 먼저 부모의 뜻을 알고, 부모의 하고자 하는 뜻을 이어받아서,
부모를 도(道)로써 깨우쳐 드리는 것이나, 다만 나는 봉양만 할 뿐인데, 어찌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예기」하동)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깨우쳐 드린다는 것은 비유하고 설명하여 깨닫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자식된 자는 평소에 능히 사리로써 그 부모를 잘 깨우쳐 허물이 없게끔 모셔야 한다.
이는 마치 신하가 임금을 섬길 적에 그릇된 마음을 바로 잡아 그것을 도(道)에 맞도록 인도하는 것과 같다.
<이를> 그 허물을 보고 난 다음에 간하는 데 비하면, 공(功)이 백 갑절이나 되는 것이기 때문에
군자는 오히려 그렇게 하기를 어렵게 여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사람의 자식으로서 효도하는 데에는 정밀한 것도 있고 거친 것도 있습니다.
따뜻하게 해드리거나, 시원하게 해드리거나, 잠자리를 보아 드리거나, 문안을 드리는 일은 효도 중에서도 조촐한 것이고 정성으로 봉양하고,
사랑으로 공경하는 일은 효도 중에서도 정밀한 것입니다.
안색을 즐겁게 하고 용모를 순후하게 하며 소리가 없어도 듣고 형체가 없어도 보는 것은, 정밀하고도 정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평소에 봉양하는 것을 말한 것뿐입니다.
만일 부모가 질병이나 우환을 당하면, 마땅히 그 근심을 다하여야 하고 만일 부모가 잘못〔過惡〕을 저지르는 일을 당하면,
마땅히 익히 간하여야 하며, 먼저 부모의 뜻을 알고, 부모가 하고자 하는 뜻을 이어받아서 부모에게 도(道)를 깨우쳐 드려야지 만,
지극한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거친 것으로부터 정밀한 것에 들어가는 그 순서는 이와 같습니다.
정밀한 것과 거친 것에는 본래 어렵고 쉬운 것이 있지만, 다만 그 거친 것을 극진히 다하여야만 능히 그 정밀한 것을 다할 수가 있는 것이니,
그것은 쉽다고 해서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또한 어렵다고 해서 스스로 그만두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문왕(文王)·무왕(武王)과 우순(虞舜)이 한 일을 인용하여 그 실적을 드러내겠사오니, 바라옵건대 효심에 유의하옵소서.
문왕(文王)은 세자(世子)로 있을 때에, 왕〔王季〕에게 문안하는 일을 하루에 세 번하였다.
첫닭이 울면 옷을 입고 침전(寢殿) 문밖에 이르러 번(番) 들고 있는〔御〕내수(內)에게 묻기를 "오늘 안부가 어떠하신가." 하여
내수가 대답하기를, "편안하십니다." 하면, 문왕이 곧 기뻐하고, 대낮에 가서도 역시 그렇게 하고, 저녁에 가서도 그렇게 하였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내수는 궁 안뜰에서 잔일을 보는 신하요, 어(御)라 하는 것은 그 날의 당직자를 말한다.
세자가 그 부모를 문안드리는 일은 아침저녁으로 두 번하는 것이 예이지만,
문왕은 하루에 세 번하였으니,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행실이었다." 하였습니다.
편하지 않은 일이 있으면 내수가 그것을 문왕에게 고한다.
그러면 문왕은 근심스러운 안색으로 황급히 갔는데, 능히 신도 바르게 신지 못하였다.
왕계가 보통 때와 같이 식사를 하게 된 연후에 자신의 식사도 역시 그 전대로 하였다.
식사를 올리면 반드시 그 차고 뜨거운 것을 여러 모로 살펴보고〔在〕, 식사를 물리면 반드시 드신 분량을 물어보고는,
음식 일을 맡아보는 이에게 명해 말하기를, "먹다 남은 음식을 다시 올리지 말아라〔末〕." 하고, "예, 알았습니다." 하여야만 물러나갔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재(在)자는 살핀다는 뜻이오, 식사 드신 것을 물어본다는 것은 그 식사 드신 분량이 많은가 적은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말(末)은 하지 말라는 뜻과 같고, 원(原)은 두 번 다시란 뜻이니, 일단 식사를 들고 남은 음식을 두 번 다시 올려서는 아니된다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무왕(武王)도 그대로 따라서 행하였는데 감히 더할 수가 없었다.
문왕(文王)이 병환이 있으며 무왕(武王)이 그 갓과 띠를 풀지 아니하고 곧 병 간호를 하였는데,
문왕이 밥 한 술을 들면 역시 밥 한 술을 들고, 밥 두 술을 들면 역시 밥 두 술을 들었다.
장씨(莊氏)는 말하기를, "천하의 이치란 지극히 다하면 다시 더할 것이 없는 것인데,
문왕(文王)이 부모를 섬기는 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이르지 아니한 것이 있었겠는가.
음식이란 혹시 거칠 수도 있고, 혹시 여러 번 먹을 수도 있어, 주리고 배부른데 따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의 병환 때문에, 뜻이 전혀 음식에는 있지 않아 밥 한 술, 두 술 드는 것을 부모의 하는 대로 따를 뿐이요,
감히 평소 때와 같이 사사로운 욕심에 맞게 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우순(虞舜)의 아버지는 완악(頑惡)하였고 어머니는 간특〔〕하였으며, 상(象)은 <또> 방자하였는데,
그것을 효도로써 능히 잘 화합〔諧〕시키고, 점점 나아가〔烝〕나쁜 데 이르지 않게 하였다. (우서(虞書) 요전(堯典))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순(舜)의 아버지를 고수()라고 부른다.
마음 속에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과 신의의 도리가 없는 것을 완악이라 한다.
어머니는 순(舜)의 계모이다. 입으로 정성스럽지 않고 미덥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을 간특이라고 한다.
상(象)은 순(舜)의 배가 다른 동생의 이름이다. 방자하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말이다.
해(諧)는 화목한 것이요, 증(烝)은 나아간다는 것이다.
순(舜)은 불행히 이들을 만났어도 능히 효도로써 잘 화목하게 하였고,
그들을 선으로써 점점 나아가게 하고 스스로 다스리게 하여, 크게 간특하거나 포악한 데는 이르지 아니하게 한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순(舜)이 부모를 섬기는 도(道)를 다하니 고수()가 기뻐하게〔豫〕되었고,
고수가 기뻐하게 되니 온 천하도 이에 감화되었으며, 또한 온 천하의 부자(父子)의 도가 안정되었다.
이것을 대효(大孝)라고 일컫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맹자(孟子))
주자는 말하기를, "지(低)는 이른다는 것이요, 예(豫)는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고수는 지극히 완악하여 일찍이 순을 죽이려고 했었는데 이에 이르러 기뻐하게 되었으니,
서경(書經)에 이른바, '나쁜 데 이르지 아니하고 역시 믿고 따른〔允若〕다.'(윤약(允若)은 믿고서 그것을 따르는 것입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대개 순은 이 경우에 이르러서도 부모에게 순순히 따랐다.
그러므로 천하의 자식된 자는 천하에 섬기지 못할 부모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부모를 섬기는 것이 순이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힘써서 효도하지 않는 이가 없고, 그 부모된 이도 역시 기뻐하게 되어,
천하의 부모 된 자 역시 자애롭지 아니한 자가 없게 되었으니, 이른바 감화(感化)라고 하는 것이다.
자식은 효도하고 부모는 자애로워 각각 그 처할 곳에 처하여 그 처한 곳이 편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의미가 이른바 안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천하에 본보기가 되어 가히 후세에 까지 전할 수가 있고, 내 한 몸 한 집안에 그치는 효도만이 아니니,
이것이 이른바 대효(大孝)가 되는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이씨(李氏)는 말하기를, "순(舜)이 고수를 기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도리를 다하여 부모를 섬겨 자식된 직분을 공손히 다하고 부모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나중소(羅仲素)107)가 이것을 말하기를, '다만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하니,
요옹(了翁)108)이 듣고 그 말을 좋다고 하면서, '오직 이와 같이 해야만 천하에 부자의 사이가 안정되는 것이다.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거나 아들이 그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항상 옳지 않은 것을 보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문왕(文王)·무왕(武王)은 그 정상 상태에서 처신을 하였고,
우순(虞舜)은 그 변측적인 상황에서 처신을 하였으니, 그 정상 상태에서 처신하는 일은 쉽고 변측적인 상황에서 처신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변측적인 상황에 처하여 그 도(道)를 극진히 다하여야만 대효(大孝)로서 더욱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순이 한 일을 가지고 끝을 맺습니다.
◆ 다음은 죽어서 장사지내는 도리에 대한 말씀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자식이 나서 3년이 되어야만 부모의 품〔懷〕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3년상을 지내는 것은 천하에 공통되는 상례(喪禮)이다." 하였습니다. (논어(論語))
주자는 말하기를, "회(懷)란 안는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3년상을 지낼 때에 아래 단〔齊〕을 한 거친〔疏〕베옷을 입고 미음이나
죽〔粥〕을 먹는 것은 천자(天子)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예이다." 하였습니다. (맹자(孟子))
주자는 말하기를, "자〔齊〕는 옷의 아랫단을 꿰매는〔縫〕것이다.
아랫단을 꿰매지 아니한 상복을 참최(斬衰)라고 하고, 아랫단을 꿰맨 것은 자최(齊衰)라고 한다.
소(疏)는 성글다는 뜻인데, 바로 발이 굵고 바탕이 거친 생베를 말한다.
전()은 미음을 가리킨다. 상(喪)을 당했을 때, 복입는 예법에는 3일만에 비로소 미음을 먹고 장례를 마치고 난 다음부터는 소찬(疏饌)을 먹는 것이다.
이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분의 귀천을 가릴 것 없이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예이다." 하였습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상처가 크면 시일이 오래 가고, 아픔이 심하면 더디게 낫는 것인데,
3년이라고 한 것은 정리(情理)를 헤아려서 예문(禮文)을 만든 것이다.
애통한 것이 아직 다 가시질 아니하고, 사모하는 정이 아직 잊혀지질 아니하더라도 복 입는 일을 이렇게 단정한 것은
죽은 이를 보내는 일에 한도가 있고, 산 이가 회복하는 데는 절도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천지간에 사는 것 중에 혈기(血氣)가 있는 족속들은 반드시 지각(知覺)이 있고, 지각이 있는 것들은 같은 족속끼리 사랑을 모르는 것이 없다.
가령 지금 큰 새나 짐승들의 무리도 짝을 잃게 되면, 달〔月〕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어도 반드시 돌아와서,
그 옛집을 지나가면서 두루 날아 빙빙 돌고 울부짖으며, 주춤거리고 머뭇거리다가 얼마 뒤에야 떠나는데,
작은 것으로는 제비와 참새에 이르기까지도 오히려 잠시 동안 지저귀면서 슬피울다가 떠나는 것이다.
본래 혈기가 도는 족속들 중에서 사람보다 더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사람으로서 그 부모에 대하는 심정은 죽음에 이르러도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못 되었거나 음란한 사람이라면, 그 부모가 아침에 죽었다 하더라도 저녁에는 그것을 잊는 것이니,
그런데 만일 그것을 따른다고 하면, 오히려 새나 짐승들만도 못한 것이다.
그 어찌 능히 서로 무리를 이루어 살겠으며, 문란하지 않겠는가.
수신하는 군자는 곧 3년상을 25개월에 마치는 것이 마치 빠른 사마(駟馬)가 문틈으로 빨리 지나가는 듯이 여겨질 것이니,
그대로 따른다며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은 그것을 위하여 중도(中道)에 맞게 예절을 제정하여 모든 사람이 충분히 정리(情理)를 다 할 수 있도록 만들어
그런 뒤에 상을 벗도록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자사(子思)는 말하기를, "상사(喪事)의 3일만에 빈(殯)하는데, 대개 몸에 부치는 것들은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진실되게 하여,
후회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석 달만에 장례를 하는데, 대개 관(棺)에 부치는 것들을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진실되게 하여,
후회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예기(禮記), 하동. ○자사(子思)의 말은 여기서 그침.)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몸에 부치는 것이란 염습하는 데 갖추어야 할 겉옷과 이불 등을 가리키는 것이요,
관(棺)에 부치는 것이란 같이 묻는 명기(明器)109)와 소용되는 기구를 의미한다." 하였습니다.
○김화응씨(金華應氏)는 말하기를, "관(棺)에 부치는 것이란
그 무덤의 자리·봉분(封墳) 등을 가려서 정하는 일과, 흙을 돋우고 나무를 심는 일같은 것이요,
다만 명기(明器)로 쓰이는 기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천자(天子)는 7일만에 빈하고, 7개월만에 장례를 치룹니다.
제후(諸侯)는 5일만에 빈하고, 5개월만에 장례를 치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대부(大夫)의 예법을 말한 것입니다. 천자와 제후의 예법은 이것을 미루어 가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그 묘자리를 정한다 하는 것은
그 묘자리의 지세가 좋은가 나쁜가를 가려서 정하는 것인데, 만일 지세가 좋으면 신령(神靈)이 편안해서, 그 자손이 번성하게 될 것이다.
지세가 좋다고 하는 것은 흙의 빛깔이 윤택이 나고 초목이 무성한 것이 바로 그 징험(徵險)인 것이다.
그런데 <지세에> 구애받는 자는 지세의 방위를 가리거나 길흉에 따라 날을 결정하기도 하는데 심한 자는 조상을 받들기 위한 계획이 아니라,
오히려 자손의 이익을 위해 염려하니, 더욱 편안하게 모시려는 효자로서의 마음 씀이 아니다.
오직 염려되는 다섯 가지를 삼가지 아니할 수가 없는데, 다른 뒷날 도로가 될 자리가 아닌가,
성곽(城郭)터가 될 자리가 아닌가, 도랑이나 연못이 되지 아니할까, 지위 높고 세도 있는 자에게 빼앗길 자리가 아닌가,
농지로서 갈 땅이 되지 않을까 등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지세가 좋다는 것은 오직 바람을 막을 수 있고, 양지바른 쪽이며,
흙이 두터워서 물이 <땅 속>깊이 있는 것 등이며, 방위(方位)·수파(水破) 등의 풍수설(風水說)에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묘자리를 가리려는 자는 지세의 길흉을 보는 지서(地書)만을 편벽되게 믿고는, 널리 그것을 찾아다니다가
채 <묘자리를> 정하지 못하여 오랫동안 그 부모를 장례지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의혹이 심합니다.
나라 임금의 현궁(玄宮) 같은데 있어서도 반드시 새로운 곳을 가려서 정하는 것은
역대(歷代) 임금의 수(數)가 오래 이어가면 기전(畿甸) 안의 땅은 앞으로 다 산림과 새 짐승의 소굴이 될 것이니, 더욱 계승할 만한 도리가 아닙니다.
중국에서는 역대 임금의 의관(衣冠)을 묻기 위하여 산 하나를 선정하여 그것을 무궁토록 전승(傳承)하게, 하는데
이것은 가히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처음 돌아가면〔死〕 근심하여〔充充〕 궁한 것같이 하고,
이미 빈(殯)하면 놀라서 침착하지 못하여〔瞿瞿〕 구(求)하여 찾는 것을 얻지 못한 것같이 하며,
이미 장사를 지내고 나면 허둥지둥〔皇皇〕하여 마치 바라보고도 이르지 못하는 것같이 한다.
연복(練服:소상을 지나고 나서부터 담제 전에 입는 상복)을 갈아입고 나서는 세월의 빠른 것을 탄식하고,
대상(大祥)을 마치고 나서는 속이 텅 빈 것 같이 허전해한다.
소(疏)에 말하기를, "일이 다하고 그 이치가 다해진 것을 궁(窮)이라 한다.
부모가 처음 사망했을 적에 효자는 땅에 포복(匍匐)하여 통곡하고 마음은 답답하고 형용은 엉거주춤하여,
마치 길을 급히 가다가 막히여서 극에 이르러 다시 더 갈 바가 없는 것과 같이 한다.
궁(窮)은 급하다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구구(瞿瞿)란 눈으로 빨리 돌아보는 모양을 말하는데, 마치 잃은 물건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황황(皇皇)이란 허둥지둥이란 말과 같은 것인데, 부모가 초토(草土)로 돌아가셨으니 효자의 심정이 의탁할 곳이 없어서,
마치 <누가> 돌아오기를 바라는데도 이르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상(小祥)에 이르면 다만 세월이 빨리가는 것을 슬피 탄식할 뿐이며,
대상(大祥)에 이르면 곧 정의가 쓸쓸하고 텅 빈 것같이 허전하여 즐겁지 아니할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자로(子路)는 말하기를, "내가 선생〔夫子〕에게 들으니,
상례(喪禮)에는 그 슬픔이 부족하고 예가 넉넉한 것보다는, 오히려 예가 부족하되 슬픔이 여유가 있어야 하며,
제례(祭禮)에는 그 공경하는 것이 부족하고 예가 넉넉한 것보다는 오히려 예가 부족하되 공경하는 것이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그 예를 알면서도 재물이 없으면
곧 예가 부족할 수 있겠지마는 슬퍼하는 것이나 공경하는 심정은 곧 스스로 다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제사(祭祀) 지내는 도리에 대한 말씀
신이 살피건대, 제사는 먼저 정성스럽고 공경스러운 것을 주로 하며, 번거롭게 여러 번 자주 지내는 것을 예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周)나라의 제도에 천자(天子)의 종묘에 제사 지내는 일은 월제(月祭)(한 달에 한 번만 제사 지냅니다.)에 그치었고,
부열(傅說)은 번거롭게 자주 지내는 것은 제사를 모독하는 것이며, 정성을 드리는 일이 아니라고 고종(高宗)에게 경계하였습니다.
후세에 원묘(原廟)를 다시 설치하는 것은 이미 예의(禮意)에 벗어나게 되었고, 향사(享祀)의 번거로움은 날마다 제사를 지내게까지 되어,
제사를 맡아 보는 유사(有司)는 피로하고 싫증이 나서 정성드리고 공경하는 태도가 모두 결여되었으니,
가히 예가 번거롭고 어지럽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하오니, 반드시 성왕(聖王)께서 깊이 효하는 도에 통달하시와 힘써 고례(古禮)를 회복하셔야만 제사 지내는 법도를 바로잡을 수사 있을 것입니다.
○ 제사는 자주 지내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자주 지내게 되면 번거롭게 되고 번거롭게 되면 곧 공경하지 아니하게 된다.
또한 가끔 지내려고 하지도 말아야 할 것인데, 가끔 지내게 되면 게으르게 되고 게으르게 되면 곧 잊어버리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천도(天道)에 맞추어, 봄에는 체()(약()자로 해야 합니다.)를 지내고 가을에는 상(嘗)을 지낸다.
가을에 내린 서리와 이슬을 군자가 밟는다면, 반드시 구슬픈〔悽愴〕 심정이 있는 것이니, 이는 차가와서가 아닌 것이며,
봄에 촉촉히 적시는 비나 이슬을 군자가 밟으면 반드시 슬픈〔〕 심정이 생기는 것이니,
마치 <부모>가 나타나서 볼 것같은 것이다. (「예기」 하동)
보씨(輔氏)는 말하기를, "군자는 그 부모를 종신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계절이 바뀌고 보이는 것이 달라지면, 곧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치제(致齊)를 안에서 하고 산제(散齊)를 밖에서 하되 제계하는 날, 부모의 거처하시던 곳을 생각하고,
웃으면서 이야기 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뜻하신 것을 생각하고, 그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그 즐겨 잡수시던 것을 생각하여, 3일을 제계하면 부모를 보는 것 같은 것이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치제를 안에서 한다는 것은, 마음 속에 구차 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며,
산제를 밖에서 한다 하는 것은 술을 마시지 아니하고 매운 채소를 먹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소(疏)에 말하기를, "먼저 그 간략한 것부터 생각할 수 있어야 점차 그 세밀한 것에 좋아하시고 즐겨하시던 일을 생각한다." 하였습니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다섯 기(其)자와 그 아랫글에 소위(所爲)라는 것은 모두 부모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비릉모용씨(毗陵慕容氏)는 말하기를, "마음의 직분(職分)은 생각하는 것인데, 생각이 지극하면 곧 통달되지 않는 것이 없다.
대저 그 마음을 둘로 하지 아니하고서 그 제사 지내는 데에 온 마음을 다하므로 형체가 없는 가운데에서도 보면 보이는 바가 있으며,
소리 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들으면 들리는 바가 있는 것이니, 모두가 생각으로 도달한 것이다.
부모가 거처하시고, 웃으시며 말씀하시고, 뜻하시며 좋아하시고, 즐겨하시는 것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데, 그 어찌 형체가 서로 접촉될 수 있겠는가.
생가의 지극한 바에 족히 거기와 통하는 것이다.
'3일 동안 제계하면 부모를 보는 것 같은 것이다.'한 말은 생각이 지극하면 마치 그 계신을 보는 것 같은 것을 말한 것이니,
은미한 것이 나타나고 정성을 가릴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제삿날 방에 들어서면, 그 자리에 모신 분의 모습이 어렴풋이〔然〕 보이는 듯하고, 두루 돌아 방문을 나서면,
숙연(肅然)히 그 몸짓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며, 그 사당 밖에 나아가 들어보면 개연(愾然)히 그 탄식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애연(然)하다는 것은 비슷하여 방불(彷佛)한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요, 숙연(肅然)하다는 것은 마음을 가다듬고 공경하는 모양을 가리킨다.
몸짓하는 소리라는 것은 곧 그 몸가짐과 움직이는 소리를 말한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선왕(先王)이 하던 효도는 곧 부모의 안색을 눈에서 잊지 아니하고, 그 음성을 귀에서 끊지 아니하며,
부모가 마음으로 그 뜻하시는 바와 즐기어 그 하고자 하시는 바를 내 마음 속에서 잊지 않는다.
사랑을 극진히 다하면 곧 계시게〔存〕 되고, 정성을 극진히 다하면 곧 나타나시게〔著〕 된다.
나타나시거나 계시게 되는 것을 내 마음에서 잊지 않는데, 그 어찌 공경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엄릉방씨(嚴陵方氏)는 말하기를, "그 안색을 눈에서 잊지 아니한다는 것은 항상 그를 직접 뵙고 모시는 것같이 하는 것이요,
그 음성이 귀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항상 그 분부를 듣는 것같이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그 정성의 극치를 말한 것이다.
존(存)자는 위의 글에서 잊지 않는다는 세 가지를 말한 것이요,
저(著)자는 위의 글에서 그 자리에 계신 것을 보는 것 같다고 한 이하의 세 가지를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우리 황조(皇祖)께서 뜰에 오르내리던 그 모습을 생각하고,
오직 나〔小子〕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삼가 멈추어 있을 곳에 멈춘다." 하였습니다. (주송(周頌) 민여소자편(閔予小子篇))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황조라는 것은 문왕(文王)을 말한 것이다.(이것은 성왕(成王) 때의 시입니다.)
<이는> 무왕(武王)의 효도를 말한 것인데, 문왕(文王)을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항상 그가 뜰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뵙는 것같이 하였으니,
마치 이른바 '담장에서도 요(堯)를 보고 국〔羹〕에서도 요(堯)를 본다.' 한 말과 같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탕(湯) 임금의 손자 음악을 연주하여 조고(祖考) 앞에 이르시니
우리를 편안하게〔綏〕 하되 사모하여 나타난 이로 하도다." 하였습니다. (상송(商頌) 나편(那篇))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수(綏)는 편안히 한다는 것이다,
사모하여 나타난 이란 것은 정씨(鄭氏)는 말하기를, '나를 편안하게 하되 사모하여 나타난 이로 한다는 것이니
신면(神明)이 나의 마음 속으로 내려와 다다르는 것을 말한다.'하였다.
대개 재계하여 그를 사모하고 제사를 지내어 마치 그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것같이 한다면
이는 곧 그 사람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효로써 수신(守身)하는 데 대한 말씀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부모는 오직 그 <자식이> 병에 걸릴까 염려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부모는 그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이 지극하지 않은 일이 없겠으나,
특히 자식이 질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일상 그것 때문에 근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자식된 자가 이같은 부모의 심정으로써 마음을 쓴다고 할 것 같으면,
무릇 그 몸을 간직하는 바를 스스로 삼가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효도가 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부모를 섬기는 자는 웃자리에 있을 때에는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소란(騷亂)을 피우지 아니하며,
같은 무리〔醜〕 속에 있을 때에는 다투지 아니한다.
웃자리에 있으면서도 교만하다면 망신하게 되고, 아랫사람이 되어 소란을 피운다면 곧 형벌을 받게 될 것이며,
같은 무리 속에서 다툰다면 곧 살상〔兵〕하게 될 것이니,
이 세 가지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삼생(三牲)으로써 봉양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불효가 되는 것이다. (효경(孝經))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추(醜)는 같은 무리를 의미하고, 병(兵)은 칼을 가지고 서로 찌르고 치는 것을 뜻한다.
삼생(三牲)이란 소·양·돼지 등을 가리킨다.
이 세 가지의 좋지 못한 일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그 재앙이 장차 부모에게 미칠 것이므로 큰 불효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입이나 몸에만 맞도록 봉양하는 것으로써, 어찌 그 큰 죄를 족히 씻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증자(曾子)는 말하기를, "신체는 부모가 물려주신 몸〔體〕이다.
부모가 물려주신 그 몸으로써 받들어 행하되 감히 공경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거처가 단정하지 아니한 것도 효도가 아니고, 임금을 섬기는데 충성스럽지 못한 것도 효도가 아니며,
벼슬 자리에 임하여 엄숙하지 못한 것도 효도가 아니고, 친구 사이에 신의가 없는 것도 효도가 아니며,
전쟁터에 나아가서 용기가 없는 것도 효도가 아니다.
이 다섯 가지를 수행하지 아니하면, 재앙이 그 부모에게 미치게 되는 것인데, 어찌 감히 공경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예기」 하동)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행(行)한다는 것은 받드는 것과 같다.
혹은 '부모가 물려 주신 몸으로써 받들되 전쟁터에 나아가 용기가 없는 것이 효도가 아니다.'고 한 것이 무엇인가를 의심하기도 하나,
대개 제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룩한다면, 효도는 곧 그 속에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수목은 그 시기를 가려서 벌목해야 하고, 새나 짐승도 그 시기를 가려서 도살해야 한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나무 하나를 자르고 짐승 한 마리를 죽이는 데도, 그 시기를 가리지 아니한다면 이는 효도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군자는 그 부모를 섬김으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함으로써 만물(萬物)을 사랑한다." 하였습니다.
증자가 병환으로 <이불 밑에서> 그 문하에 있는 제자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나의 발을 헤쳐〔啓〕 보라. 내 손을 헤쳐 보라. 「시경」에 이르기를, '매우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마치 깊은 물가에 서 있는 것같이 하고, 엷은 살얼음을 밟는 것같이 한다.' 하였는데,
이제야 내가 그런데서 벗어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제자들아."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는 말하기를, "계(啓)는 해친다는 것이다.
증자는 평소(平素)에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감히 다치거나 상하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던 까닭에,
이처럼 이불을 헤쳐서 신체를 완전하게 보존했다는 것을 문하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 신체를 보존하는 것이 어려우니 죽어야만 비로소 그 다치고 상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범씨(范氏)는 말하기를, "신체도 오히려 다칠 수가 없는 것인데, 하물며 그 행실이 어긋나서 부모를 욕되게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악정자춘(樂正子春)110)은 말하기를, "하늘이 낳아서 땅이 기르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람이다.
부모가 온전하게 낳아 주신 것을 자식이 온전하게 돌려 준다면 가히 효도라고 할 수 있다.
그 몸을 다치지 아니하고 그 자신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면, 가히 온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군자는 반걸음을 내딛을 때에도 감히 효도를 잊지 아니하고, 한 발자국을 옮길 적에도 감히 부모를 잊지 아니한다.
이 때문에 길을 가되 좁은 지름길로 가지 아니하고 배를 타되 물에서 놀지 아니하여,
감히 부모가 물려주신 몸으로써 위태로운 행동을 하지 아니한다.
한번 말이 입 밖으로 나가더라도 감히 부모를 잊지 아니하기 때문에 나쁜 말이 입에서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분한 말이 내몸에 돌아오지 아니한다.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수치스럽게 하지 아니하면, 가히 효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효도로써 천하에 미루는 것에 대한 말씀
○이윤(伊尹)은 말하기를, "사랑을 심는 것〔立〕은 오직 부모이고, 공경을 심는 것은 오직 웃어른이다.
처음에 집안과 나라로부터 시작해서 온 천하의 사해(四海)에 미친다." 하였습니다. (상서(商書) 이훈(伊訓)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훈계한 말.)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입(立)자는 심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랑하고 공경하면 저기에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드러난다.
나의 부모를 섬기어 남의 부모에게도 미치고, 나의 웃어른을 공경하여 남의 웃어른에게도 미치나니,
집안에서 시작하여 나라에 통달하고, 끝내는 그것을 온 천하에 베푸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사랑하는 것을 부모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백성에게 화목(和睦)을 가르친다는 것이요, 공경하는 것을 웃어른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백성에게 순리(順理)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자애와 화목으로써 가르치면 곧 백성들은 부모를 모시기를 좋아할 것이요,
어른을 공경함으로써 가르치면 곧 백성들은 명령을 받들기를 좋아할 것이다.
효도로 부모를 섬기고 순리로 명령을 받든다면, 그것이 천하에 베풀어져서 행하여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증자는 말하기를, "돌아간 이를 신중하게 모시고 먼 조상을 추모할 것 같으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돌아간 이를 신중하게 모신다는 것은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극진히 지내는 것이요,
먼 조상을 추모한다는 것은 조상의 제사를 정성을 다해 극진히 지내는 것이다.
돌아간 분은 소홀히 여기기가 쉬운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잘 추모해야만 후하게 하는 도(道)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스스로 행하면 곧 자기의 덕이 두터워지고,
아래로 백성들이 감화하면 곧 그의 덕도 또한 두터운 데로 돌아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홀아비와 과부도 감히 업신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민(士民)에게 그렇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백성의 환심을 얻어 돌아가신 임금을 섬기는 것이다.
한 집안을 다스리는 자는 그 하인에 대해서도 감히 실수를 하지 아니하는 것인데, 하물며 처와 자식에게야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의 환심을 얻어서 그 부모를 섬기는 것이다.
대개 그 때문에 부모가 살아 계신다면 편안하게 해 드리고,
제사를 지내면 귀신이 흠향하여 재해가 나지 아니하고, 화란이 일어나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효경」 하동)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사람이 화목하면 곧 하늘과 땅도 역시 화목해진다.
처음에는 부모를 사랑하는 심정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고, 마지막에는 남을 사랑하여 복을 받아서 부모에게 미치게 하는 것인데,
이른바 효도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후세의 임금은 그 백성에게 포학하게 하기 때문에, 원수를 맺거나 재화(災禍)를 쌓아서 그 부모를 위태롭게 하고, 다시 종묘에까지 미치게 한다.
그리고서야 성인의 말씀이 진실로 백세(百世)의 밝은 귀감(龜鑑)인 것을 알게 된다." 하였습니다.
옛날의 밝은 임금은 아버지 섬기기를 효도로써 하였기 때문에, 하늘을 밝게 섬기었고,
어머니 섬기기를 효도로써 하였기 때문에 땅을 살려서 섬기었으며, 어른과 어린이가 순위를 지켰기 때문에 아래위의 질서가 다스려졌다.
하늘과 땅이 밝아지고 살펴지면 신명(神明)이 나타나는 것이다.
종묘에 공경을 다하는 것은 부모를 잊지 아니한다는 것이요, 몸을 닦는 데 행동을 신중하게 한다는 것은 그 조상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종묘에 공경을 다하면 귀신이 나타나는 것이다. 효도하고 존경하는 것이 지극하면 신명에 통달하며 광영이 사해(四海)에 비치어 통하지 않는 데가 없다.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하늘과 땅은 사람의 부모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효도로써 섬기면 곧 하늘을 섬기는 이치가 밝아지고,
어머니를 효도로써 섬기면 땅을 섬기는 이치가 살펴진다.
밝히고 살핀다고 한 것은 밝고 뚜렷이 드러나서 마음에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를 섬기는 일이나 하늘과 땅을 섬기는 일이 어찌 두 길〔道〕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그 마음을 잡고 성품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길이다.'하였다.
효도와 공경은 한가지 마음이기 때문에, 효도가 이미 지극하면 곧 공경도 역시 지극할 것이요,
하늘과 사람은 한가지 이치이기 때문에, 신명(神明)에 통달하면 곧 또한 온 천하에 빛나는 것이다.
이것은 효도와 공경의 지극한 공을 미루어서 말한 것이므로, 임금된 이는 마땅히 깊이 체득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신이 살피건대, 사람의 자식된 이는 부모가 낳아 주신 것이기 때문에, 피와 살과 성명(性命)도 모두 다 부모가 물려주신 것입니다.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은혜는 넓은 하늘도 이보다는 지극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도 그 부모를 사랑할 줄 아는 것은 천성(天性)이 그러한 까닭입니다.
다만 물욕에 가려서 그 본심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부모가 물려 주신 몸을 자기의 소유인 것으로 알고는,
부자간에도 바로 남같이 분별하여 낳으시고 기르신 수고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다만 일시적인 은혜가 적은 것만 원망합니다.
그러므로 효도와 사랑의 뿌리는 심어지지 아니하고, 자기의 사사로운 싹이 쉽게 자라서 흔히 자기를 먼저 내세우고
부모를 뒤로 물려 놓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이 몸은 부모가 낳은 것이니 부모가 아니었다면 곧 이 몸이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몸은 나의 소유가 아니고 바로 부모의 소유인 것입니다.
물건을 주어도 역시 감사할 줄 알 것인데, 하물며 몸을 물려 주신 이에게이겠습니까.
힘을 다하고 목숨이 그치도록 다하여도 족히 은혜를 보답할 수 없는 것이니, 사람의 자식된 자로서 능히 이 이치를 알 수 있다면,
곧 생각이 사랑하고 공경하는 도(道)에 그 반이 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효도하는 데 있어서 혹시 사랑할 줄은 알면서도 능히 공경할 줄을 모르고,
혹시 사랑하고 공경할 줄은 알면서도 능히 그 도(道)를 극진히 다할 줄을 모르기도 합니다.
필경에는 사랑은 그 인(仁)을 완전하게 하는 데 이르게 되고, 공경은 그 의(義)를 완전하게 하는 데 이르게 되어야만
가히 낳아 주신 바를 욕되게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 사람의 성명(性命)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며, 그 성명 가운데 모든 이치가 다 구비되어 있는 것인데,
한 가지 이치라도 밝혀지지 아니했거나 실천되지 못했다면 내가 부모에게 받은 바의 본체(本體)에 결함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본 모습을 부족한 것 없이 실천하여야만 본체(本體)가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성인처럼 인도(人道)를 지극히 다하지 않고서는 족히 효도를 다하였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이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몸가짐을 근신하지 않게 되고 왕왕 더러운 지경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으로 항상 부모를 생각하고 있다면 한 번쯤 잘못되는 일만 있어도 송연(悚然)히 놀라고 두려워하되,
마치 부모를 훼상하는 일이 있는 것같이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곧 부모가 물려 주신 몸이 항상 청명정대(淸明正大)한 경지에 서서 우러러,
운행하는 질서의 법도를 본받아 족히 하늘을 섬길 수 있고,
굽어보고는 두터운 덕을 본받아 족히 땅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을 미루어 온 천하 사해(四海)에 통달하게 한다면 준칙이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준(準)은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준칙(準則)으로 삼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식으로 어찌 마음이 통쾌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또 제왕의 효도는 필부의 그것과 차이가 있는 것이며, 조상의 유업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더욱 정성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낱 필부가 자손에게 십금(十金)의 재간을 물려 주더라도, 그 자손은 오히려 잘 간직하려고 하는 것인데,
하물며 백 년의 사직(社稷)과 천 리의 봉강(封疆)을 들어서 물려 주신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만일 털끝만치라도 스스로 한가해 하고 스스로 편안해 하는 생각이 있다면,
곧 효도하는 생각에 결함이 되고 선왕의 사업이 훼손되는 것인데, 하물며 감히 방자하게 방탕하여 종묘를 위태롭게 하거나,
선군(先君)을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한 나라의 임금은 흔히 그 모후(母后)를 섬기는데 있어서도, 궁중에 예의가 엄격하여 정의(情意)가 가로막혔기 때문에,
일반 사람의 모자가 아침 저녁으로 유쾌하고 유순하게 지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환시(宦侍)나 부녀자들이 거짓된 충성으로 참소와 이간질을 쉽게하여,
명철한 임금의 효행을 손상시키고 현철한 모후(母后)의 자애로운 심정을 감손시키므로,
만일 효도와 공경이 본래 신실하여 신명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참소하는 말도 역시 우려할 만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금으로 궁중의 공통된 우환이오니, 삼가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시기 바랍니다.
< 주 >
105) 춘추(春秋)시대 노(魯)나라 대부(大夫) 중손하기 (仲孫何忌). 맹손씨(孟孫氏)라고도 한다.
106) 중국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 공자의 제자 이름은 수(須). 자는 자지(子遲). 노나라 계씨(季氏)에게 벼슬하였다.
107) 중국 송(宋)나라 남검(南劍) 사람. 이름은 종언(從彦) 양귀산(楊龜山)의 제자로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있었다.
108) 중국 송(宋)나라 대 사람. 이름은 관(瓘). 요옹(了翁)은 그의 호임. 저서로 요옹역설(了翁易說), 존요집(尊堯集) 등이 있다.
109) 장사지낼 때 무덤 속에 시체와 함께 묻는 식기(食器), 악기(樂器), 즙기(汁器), 무기(武器) 등 여러 가지 기물(器物).
110) 중국 춘추(春秋)시대 노(魯)나라 사람. 증자(曾子)의 제자(弟子)로 부모에 대한 효성이 두터웠다.
제3장. 형 내(刑內)
신이 살피건대, 집을 다스리는 데는 먼저 아내를 바르게 하여야 합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아내를 바르게 하여 형제<간에> 이르고 그리하여 집과 나라를 다스린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효경장(孝敬章) 뒤에 형내(刑內)장을 두었습니다.
◆ 다음은 선(善)이 본보기가 될 만한 것에 대한 말씀
「역경」에 이르기를, "집안 사람의 도(道)는 여자의 바름〔貞〕을 이로운 것으로 한다." 하였습니다. (가인괘(家人卦) 단사(彖辭))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집안 사람의 도로서는 여자가 발라야 이로운 것이 있다.
여자가 올바르게 되면 곧 가도(家道)가 발라진다.
다만 여자의 정절만을 말한 것은 여자가 올바르게 되면, 곧 남자도 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먼저 아내를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아내가 올바르게 되면 곧 남편도 바르게 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여자는 안에서 그 위치를 바르게 하여야 하고, 남자는 밖에서 그 위치를 바르게 하여야 한다.
남녀가 바른 것은 천지의 대의(大義)이다. (가인괘 단전(彖傳))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존비(尊卑)와 내외(內外)의 도(道)가 바르게 되어야 비로소 천지 음양의 대의에 합치한다." 하였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꾸룩꾸룩(關關) 저구새(雎鳩)는 강가에서 속삭이고,
요조(窈窕)한 숙녀(淑女)는 군자의 좋은 짝〔逑〕이라." 하였습니다. (주남(周南)의 관저(關雎)편)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꾸룩꾸룩〔關關〕이라는 것은 암컷과 수컷이 상응해서 화답하는 소리이다.
저구(雎鳩)는 물새로서 그 모양이 오리나 갈매기와 비슷한데, 지금 양자강과 회수(淮水) 사이에 <깃들고> 있다.
정한 짝이 있어서 서로 그 짝 사이를 문란하게 하지 아니하고,
항상 나란히 헤엄치고 놀면서도 서로 너무 가까이 달라 붙지는 않는데 대개 그 성질이 그러한 것이다.
요조(窈窕)라는 것은 얌전하고 정숙하다는 뜻이요, 군자는 문왕(文王)을 가리킨 것이다.
구(逑)는 짝이란 말이다.
문왕(文王)은 나면서부터 성덕(聖德)이 있었으며, 또 성녀(聖女) 사씨(氏)를 얻어 배필로 삼았는데,
궁중 안의 사람들이 그녀가 처음 이르렀을 적에 그 얌전하고 정숙한 덕을 보았기 때문에, 이 시를 지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광형(匡衡)은 말하기를, "배필은 사람을 낳는 시초가 되고 만복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혼인의 예가 바르게 되어야만 만물이 이루어져서 천명을 다하게 된다.
공자(孔子)가 「시경」을 논하면서 관저(關雎)장을 그 맨처음으로 삼은 것은 태상(太上)(임금을 말한 것입니다.)은 백성의 부모인 까닭으로,
왕과 부인의 행위가 천지와 짝하지 않으면 곧 신령의 계통을 받들어 만물의 정당한 것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경」에, '정숙하고 아름다운 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다.'고 한 것은
능히 그 정숙한 것을 다하고 그 지조를 변치 아니하여, 위의를 갖추어 욕정을 느끼는 감정이 없고
사사롭게 즐기려는 의도가 그 거동에 드러나지 아니한 것을 말한 것이다.
대개 그렇게 하여야만 가히 지존(至尊)의 짝이 될 수가 있고, 종묘를 받드는 주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은 기강(紀綱)의 으뜸이며 임금이 교화(敎化)를 이룩하는 실마리이다.
상고 시대 이래로 삼대의 흥망〔興廢〕이 이것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송(宋)나라 범조우(范祖禹)111)가 선인왕후(宣仁皇后)112)에게 아뢰기를,
"황제가 황후를 맞아들이는 일은 국가의 대사(大事)이며 만세의 근본입니다.
이는 나라의 복록이 걸려 있고 백성의 덕화에 앞서는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먼저 알아야 될 일이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문벌〔族姓〕이요, 둘째는 여자의 덕행이며, 세째는 예를 융숭하게 하는 것이요, 넷째는 널리 의논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문벌이라는 것은 옛날의 제왕은 혼인할 적에 반드시 옛성인의 자손이거나, 공이 있고 어진 이의 후예로써 하였고,
비천한 자로서 위로 임금과 짝을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 복록이 성대하고 자손이 번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문벌은 귀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여자의 부덕〔女德〕이란 것은 삼대가 일어날 적에는 모두 현숙한 후비(后妃)가 있었고,
망할 적에는 모두 요녀〔嬖女〕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夏)나라가 일어나게 된 것은 도산(塗山)113) 때문이요, 그것이 망하게 된 것은, 말희(喜)114) 때문입니다.
은(殷)나라 상탕(商湯)이 일어나게 된 것은 유융(有)115) 때문이요, 망하게 된 것은 달기(己)116) 때문입니다.
주(周)나라가 일어나게 된 것은 강원(姜嫄)117) 때문이요, 망하게 된 것은 포사(褒)118)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성현들이 기록한 시(詩)와 서(書)에 실려서 후세에까지 오래도록 거울로 삼는 것입니다.
정숙하고 착한 숙녀를 간택하여온 천하의 어머니에게 본보기로 삼아서 육궁(六宮)119)을 바르게 하는 것인데,
덕이 없이 누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안방 깊숙이 있는 규수(閨秀)의 덕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문벌을 보고 조(祖)·부(父)를 보며, 그 가풍을 살피어 여러 가지로 참작해 보면 역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예를 융숭히 한다〔隆禮〕는 것은
천자는 그 후비(后妃)와의 관계가 마치 하늘이 땅에 있어서와 해가 달에 있어서와 양(陽)이 음(陰)에 있어서
서로 기다린 뒤에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애공(哀公)이 묻기를, '면례복(冕禮服)을 입고 그 신 이하는 친영례(親迎禮)는 너무 과중하지 아니한가요.' 하자,
공자(孔子)는 슬픈 기색을 지으면서 대답하기를, '두 성(姓)이 아름답게 결합하여 선왕의 뒤를 계승하여
천지·종묘·사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 임금께서는 어찌 너무 과중하다고 하십니까.'" 하였으니,
공자는 대개 그 말은 대단히 그르다고 한 것입니다.
예를 살피건대, 관례와 혼례에는 오직 사대부의 예만 있고, 천자와 제후의 예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대(三代) 이래로 오직 사대부의 예에 미루어 그것을 높여서 천자나 제후의 예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의 부부관계는 천자(天子)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다 같기 때문입니다.
천하에 어찌 홀로 존귀하여 배우(配偶) 없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는 융숭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널리 의논한다〔搏議〕는 것은 옛날의 천자는, 그 후비(后妃)를 맞이할 때에 상공(上公)이 그를 맞이하였고,
제후가 그것을 주관해 모셨으니, 나라에 대사가 있으면 대신들이 미리 알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견을 아뢰는 이는 반드시 '이것은 폐하(陛下)의 가정일이므로, 바깥 사람이 참여하여 알 바가 아닙니다.' 고 하지마는,
예로부터 흔히 임금을 그르친 것은 바로이런 말 때문이었습니다.
천자는 온천하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안팎의 일은 어느 것이나 집안일이 아닌 것이 없으며,
대신들이 그것을 미리 알아서는 안 될 이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임금이, 한 사람의 정승을 임용하거나 한 사람의 근신(近臣)을 진급시키는 데도,
반드시 천하 여망에 부합하도록 하는 것인데, 하물며 황후를 세워 그를 천하의 어머니로 삼으려고 하는데 있어서이겠습니까.
이제 폐하가 선택한 바를 성씨를 들어서 대신들에게 널리 묻는 것만 같은 것이 없으니,
만일 임금의 뜻이 이미 정해졌고, 여럿의 의견이 모두 같다고 한다면 점을 쳐도 합당하게 될 것이고,
귀신도 일치하여 하늘과 사람의 생각이 같이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닭이 울었어요. 조정에는 신하들이 차 있어요.
닭의 울음이 아니라 청파리의 우는 소리였다오." 하였습니다.(제풍(齊風) 계명편(鳴篇))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옛날의 왕비는 처소에서 임금을 모실 때에 날이 밝을 무렵에는 반드시 임금에게 고하기를, '닭이 이미 울었습니다.
조정에 조회하러 모인 신하들이 이미 가득 차 있습니다.' 하여, 그 임금이빨리 일어나 조회에 나가 보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은 닭이 울었던 것이 아니었고 바로 청파리가 우는 소리였다.
대개 현숙한 왕비는 새벽에 일찍 일어날 무렵이 되면 언제나 늦을까 염려하여, 그 비슷한 소리만 들어도 그것이 정말 <닭우는 소리>인가 여기었다.
이는 그 마음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데 있는 것이며, <만약> 편안한 욕망에 머문 것이라면 어찌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시인이 그 사실을 서술해서 찬미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주(周)나라 선왕(宣王)120)의 비(妃) 강후(姜后)는 현숙하고 덕이 있어서, 일이 예가 아니라면 말하지 아니하였고,
행실이 예가 아니라면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선왕(宣王)이 일찍이 저녁에 빨리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났었기 때문에,
강후(姜后)가 이에 비녀와 귀고리를 벗어 버리고 영항(永巷: 궁녀를 가두는 일종의 유치장)에서 대죄(待罪)하면서,
유모를 시켜 왕에게 아뢰기를, "첩이 재덕이 없어서 첩의 음탕한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군왕으로 하여금 예를 잃게 하여 조회에 늦게 하였으니, 군왕이 색(色)을 즐겨서 덕을 잃게 된 것을 드러내었습니다.
대개 색을 즐겨 하면 반드시 사치를 좋아하게 될 것이고, 사치를 좋아하면 반드시 향락을 다하게 될 것이며,
향락을 다하면 반드시 어지러움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지러움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을 만든 것은 첩이오니, 감히 첩에게 죄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더니,
왕이 이르기를, "과인(寡人)이 덕이 없어서 스스로 지은 허물이요, 부인의 죄가 아니오." 하고는,
드디어 강후를 복위시키고, 정사(正事)에 힘을 써서 아침 일찍 조정에 나가고 저녁 늦게 물러나와,
문왕(文王)·무왕(武王)의 업적을 이어받아 주(周)나라 왕실의 왕업을 부흥시켰습니다.
○ 당(唐)나라 태종(太宗)121)의 문덕(文德)황후 장손(長孫)122)씨가 그림으로 풀이된 전기(傳記)를 즐기어,
예로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는 선한 일, 악한 일들을 보고서 스스로의 거울로 삼아서, 엄숙히 예법을 받들고 효도로 고조(高祖)를 섬겼습니다.
성품이 검소하여 의복도 몸에 맞으면 그뿐이었습니다.
황제와 더불어 말할 때에 천하일에 언급하다가 사양해 말하기를,
"암탉이 울어 새벽 일을 맡게 되면 그 집안이 다 망한다고 하는 데도 좋겠습니까." 하고는,
황제가 굳이 요구해도 끝내 대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후에 조정에서 죄를 지은 자가 있어서 황제가 노하여 포박하여 다스림에, 그 마음이 풀릴 때를 기다려서 천천히 사리를 펴서 설명하였고,
끝내 억울한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친정 오빠인 무기(無忌)123)는 황제가 아직 자리에 오르기 전에 사귄 친구로서, <황제의> 천명을 도운 1등 공신이었기 때문에,
황제가 끌어서 정권을 맡기려고 하자, 황후는 굳이 불가하다고 하였으며, 몰래 <오빠에게도> 사양하게 하였으므로,
황제는 마지못하여 들어 주었더니, 황후의 기뻐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황후>의 병환이 다급하여 태자(太子)가 대사(大赦)를 내릴 것과 도인(道人)을 불러 재앙을 막자고 청하려 하니
황후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는 것이요, 인력으로 연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복을 닦아서 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내가 악한 일을 하지 아니하였고, 착한 일을 하였다 하지만, 효험이 없다면 무엇을 구하겠는가.
대사(大赦)는 나라의 중대한 일이요, 불교와 도교(道敎)124)는 이단의 교이기 때문에 다 위에서 할 바가 아닌데,
어찌 나 때문에 천하의 법도를 어지럽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황제에게 청하기를, "상께서는 충신을 용납하여 간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며,
모함하는 참소를 물리치시고, 사냥이나 부역(賦役)에 동원하는 것만 줄이신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후(后)는 일찍이 옛날 부인들의 일을 채집하여 여칙(女則) 10편을 저술하였는데, 그녀가 죽음에 미쳐서 궁사(宮司)가 그것을 아뢰자,
황제는 그것을 보고 통곡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반짝이는 저작은 별〔〕 드문드문〔三五〕동녘에 있네.
근엄히〔肅肅〕, 늦은 밤 이른 새벽 공(公)을 돌보니, 참으로 그 도리는 같지 않구나." 하였습니다. (소남召南 소성小星의 편)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혜()는 작은 모양의 형용이요, 삼오(三五)라는 것은 그 드문 것을 말한다.
대개 초저녁 저물 때나 혹 새벽 동이 트려는 때를 말한다.
숙숙(肅肅)은 근엄한 모습이다.
남국부인(南國夫人)들이 후비(后妃)의 감화를 받아서 (문왕:文王의 비妃 태사太의 감화를 말합니다.) 투기와 질투를 하지 아니하고,
그 아랫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그 여러 첩들이 그를 찬미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대개 궁중의 여러 첩들은 나아가 임금을 모시는 데 감히 온 밤을 지내지 못하고, 별을 보고는 가고 별을 보고는 돌아옴으로써,
그 주어진 분수가 존귀한 분과는 같지 않다는 사유를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임금을 모실 수가 있는 것은 부인의 깊은 은혜 때문이며, 감히 왕래하면서 힘쓰는 수고에 대해서 원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 한(漢)나라 현종(顯宗)125)의 명덕왕후(明德皇后) 마씨(馬氏)126)가,
나이 13세 때에 태자의 궁에 들어와 위로는 음황후(陰皇后)(광무후(光武后)입니다.)를 받들어 모시고,
옆으로 같은 지위를 대할 때에는 예절이 잘 갖추어졌으므로 아래 위가 다 편안하여졌습니다.
현종(顯宗)이 황제로 즉위하자 황후 다음에 가는 귀인(貴人)으로 삼았습니다.
그 때 후(后)의 전 어머니의 큰딸 가씨(賈氏)도 역시 뽑혀 들어와 숙종(肅宗)을 낳았는데,
황제는 왕후에게 자식이 없다 하여 그를 양육하게 하고 이르기를, "사람이 반드시 자기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랑으로 기르는 것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가 될 뿐이다." 하였습니다.
후는 이에 온 마음을 극진히 다하여 사랑으로 길러서 수고롭게 근심하는 것이 친자식에 대하는 것보다도 더 과하였습니다.
숙종의 효성스러운 성품은 순박하고 두터웠으며, 은혜로운 성품은 천생으로 지극해서 모자간의 사랑은 시종 작은 티끌만큼도 틈이 나지 아니하였습니다.
후(后)는 언제나 그 황사(皇嗣:황제의 후계자)가많지 않은 것을 탄식하고 근심하여,
좌우 사람을 추천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 같이 하였습니다.
후궁 가운데 가까이 보는 자가 있으면 매양 위로하고 받아들였으며, 만약 <황제의> 총애하는 바가 빈번하면 곧 융성하게 대우를 더하였습니다.
유사(有司)가 장추궁(長秋宮) (마황후(馬黃后(의 (宮名)입니다.)을 세울 것을 아뢰니,
황제가 아직 말한 바 있지 아니하여서, 황태후(皇太后)가 말하기를 '마귀인(馬貴人)의 덕이 후궁들 가운데서 으뜸이므로 바로 그 사람이 된다'고 하여,
마침내 세워서 황후가 되고 궁위(宮)의 위치를 바르게 하니,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조심하였습니다.
◆ 다음은 악(惡)이 경계가 될 만한 것에 대한 말씀
○ 「시경」 에 이르기를, "똑똑한〔哲〕남편은 성(城)을 이룩하고, 똑똑한 부인은 성을 기울어뜨린다.
아름답고〔懿〕똑똑한 부인이여, 올빼미가 되고 부엉이가 되도다.
부인의 수다스러움은 재해를 불러들이는 계제일진대,
어지러움은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부인이 스스로 만든 것이리라," 하였습니다. (대아(大雅)의 첨앙(瞻仰)편)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철(哲)은 안다는 말이요, 의(懿)는 아름답다는 말이다.
남자가 밖에서 올바른 위치를 취하면 그 나라의 주인이 되는고로, 지혜가 있으면 곧 능히 나라를 세울 수 있다.
부인은 그른 것도 없고 본받을 것도 없는 것을 선(善)이라 할 수 있고 똑똑한 것은 소용이 없다.
똑똑하면 곧 나라를 뒤엎을 따름이기 때문에 이 아름답고 똑똑한 부인은 도리어 올빼미나 부엉이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함으로써 능히 재앙과 변란의 계제를 가져오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어찌 변란이 정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겠는가.
특히 이 부인으로 말미암아서 일어나는 것일 따름이다.
이것은 유왕((幽王)127)이 포사()를 총애한 까닭에 변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일을 풍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포사는 어린 첩이 낳은 딸입니다.
유왕이 그를 총애(寵愛)하여 출입하는데 같이 <어가(御駕)를> 타고 나랏일을 보살피지 아니하였으며,
말을 몰아 사냥하기를 아무 때나 하여 포사의 뜻을 맞추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음란한 데 빠져서, 광대와 기녀들이 그 앞에서 춤과 노래를 밤낮으로 계속하였습니다.
포사가 웃지 않으므로 유왕은 그를 웃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하였으나 끝내 웃지를 아니하였습니다.
유왕이 일찍이 제후(諸侯)들과 더불어 약속하기를, 외적이 침입하여 봉화(烽火)를 올리면 그 군대가 달려 와서 구원하도록 하였는데,
아무 연고도 없이 봉화를 올려 보았습니다.
제후들은 모두 다 달려왔으나 외적은 없었습니다.
그 때 포사가 크게 웃었습니다. 이에 바로 신왕후((申王后)를 폐위하고 포사를 후로 삼았으며, 그를 기쁘게 하려고 번번히 봉화를 올렸습니다.
충심으로 간(諫)하는 자는 죽이고, 오직 포사의 말만을 들었기 때문에 위아래가 서로 아첨만을 일삼았으며, 백성들은 <나라를> 등지고 떨어져 갔습니다.
신후(申候)128)가 견융(犬戎)과 더불어 주(周)나라를 침략해 들어오니, 유왕이 봉화를 올렸으나 군사는 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적은> 마침내 여산(驪山) 아래에서 유왕을 시해(弑害)하고, 포사를 사로잡아 떠나가 버렸습니다.
○ 목강(繆姜)이라 하는 이는 노(魯)나라 선공(宣公)의 부인이며, 성공(成公)의 어머니입니다.
총명하고 슬기로왔으나 행실이 음란하여 숙손교여(叔孫喬如)와 간통하였습니다.
교여가 목강과 모의하여 계맹(季孟)129)을 제거하고, 노나라를 멋대로 천단(擅斷)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나라 사람은 순종하지 아니하였고, 동맹하여 교여를 쫓고 목강은 동궁(東宮)으로 내쫓았는데,
처음 갈 때에 목강이 사람을 시켜 점을 쳐 보았더니, 간괘(艮卦)의 육(六)을 맞추었습니다.
점장이가 말하기를, "이는 간(艮)의 수괘(隨卦)를 말하므로 그 나아가는 것을 따르라 한 것이니,
그대는 반드시 빨리 나올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목강이 말하기를, "옳지 않다. 「주역」에 이르기를, '수(隨)는 원(元)·형(亨)하니 이(利)·정(貞)이라 허물이 없다.'고 하였는데,
원은 선한 일의 제일이요, 형은 아름다운 것이 합한 것이며, 이(利)는 옳은 일이 화한 것이요, 정은 일의 줄기이다.
이 때문에 비록 나온다 하여도 허물이 없는 것이지마는, 지금 나는 부녀자이면서 난(亂)에 참여하였고,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어질지 못하였으니 가히 원이라고 이를 수가 없으며, 나라를 편안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가히 형이라고 이를 수가 없으며, 일을 일으켜서 몸을 해쳤으니 가히 이라고 이를 수도 없으며,
지위를 버리고 음란하였으니 가히 정이라고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네 가지 덕을 가진 자는 따른다 하더라도 허물이 없을 것이겠으나, 나는 모두 다 갖지를 못하였으니 어찌 따를 수 있겠는가.
나는 곧 악한 일만 취하였으니 어찌 허물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이곳에서 죽을 것이고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하더니, 마침내 동궁에서 죽었습니다.
○ 남자(南子)는 송(宋)나라 여자로서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입니다.
영공이 밤에 부인과 더불어 앉았는데, 수레 소리가 덜거덕거리다가 대궐 앞에 이르러 그치고,
대궐을 지나서 다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공이 부인에게 묻기를,
"이것이 누구인 줄 알겠는가." 하자, 부인이 대답하기를, "이는 거백옥(伯玉)130)입니다." 하였습니다.
공이, "무엇으로 그것을 아느냐." 하자, 부인은, "제가 들으니,
예법에 대궐 문앞에서 내리고 노마(路馬: 임금이 타는 말)에게 경계하는 것은 공경을 넓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대개 충신과 효자는 신의와 절조를 드러내어서 하는 것이 아니며, 으슥하고 어두운 데서도 행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는 것인데,
거백옥은 위 나라의 어진 대부(大夫)입니다.
그는 어질고도 슬기로와서 위를 섬기는데 공손하니, 이 사람은 반드시 어둡다고 예를 폐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인줄로 앏니다." 하였습니다. 공(公)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더니 과연 백옥이었습니다.
공이 돌아와서 부인을 놀리려고 일부러 "그 <사람이> 아니다." 하니, 부인이 술잔에 술을 부어 올리면서 두 번 절하고는 공을 축하하였습니다.
공은, "그대는 무엇 때문에 나〔寡人〕를 축하하느냐." 하자, 부인은 "처음 저는 위(衛)나라에 오직 거백옥 한 사람이 있는 줄만 알았는데,
지금 위(衛)나라에 다시 그와 더불어 짝 지을 만한 이가 있으니, 이는 곧 임금에게 신하가 둘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에 어진 신하가 많이 있다는 것은 곧 나라의 복입니다. 저는 이 때문에 축하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 공이 놀래어 말하기를, "훌륭하다." 하고 드디어 그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공이 부인과 더불어 수레를 타고 가는데 공자(孔子)를 다음 수레에 타도록 하고는, 겉으로 뽐내면서 시가를 지나가므로,
공자는 그것을 추하게 여겨 말하기를, "나는 이제까지 덕(德)을 좋아하되 색(色)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하고는 물러나
송(宋)나라로 가버렸습니다.
그 뒤 남자(南子)는 음란한 행실을 하여 송나라의 공자(公子) 조(朝)와 간통하였습니다.
위나라 태자 괴외()가 그것을 알고 그를 미워하였는데, 남자는 영공에게 태자를 모함하기를, "태자가 나를 죽이려 합니다." 하니,
공이 크게 노하므로 괴외는 송나라로 도망쳤습니다.
영공이 죽자 괴외의 아들 첩(輒)이 대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이이가 곧 출공(出公)입니다.
괴외가 다시 들어오자 출공은 노나라로 달아나 버렸으며, 괴외가 임금이 되어 남자를 죽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이 시(詩)는 본래 포사()를 풍자한 것입니다.
여자로 인하여 일어나는 변란은 모두 엎어진 수레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강과 남자의 일을 함께 같이 실었습니다.
옛날부터 요염한 아내는 한 사람뿐이 아닌데, 다만 두 여자만을 인용한 까닭은 무엇인가 하면,
대개 얼굴이 예쁜 것은 음란한 마음을 자극하지 마는, 재주가 없어 어둡고 용렬한 임금이나 미혹시킬 수 있을 뿐이고,
영특한 임금은 반드시 거기에 빠져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총명한 재주와 지혜가 족히 다른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는 이는 가장 두려운 사람인 것입니다.
저 목강과 남자 두 여자는 지(智)는 족히 선과 악을 가릴 수 있었고, 변(辨)은 족히 의리를 밝힐 수 있어서,
그 말을 들어보면 가히 태임(太任)과 태사(太)를 따를 수가 있었는데도, 그 행실을 살펴보면 포사()나 달기(己)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명철한 임금이라도 혹시 그 여색을 아끼고 그 재주를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어서,
차차로 마음이 혹하게 되고 덕을 잃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지적하여 경계하도록 한 것입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이구(李)131)가, '만일 관중(管仲)132)을 오래도록 궁중에 있도록 하였다면
다시 여섯 사람인들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그렇지 않다.
관중이 있을 때에는 환공(桓公)133)의 마음이 변하지 아니하였었다.
만일 이미 마음이 변해 버렸다면 비록 관중인들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마음이 변하고서도 오히려 관중의 정치 의논을 채택하여 썼을 리는 만무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안으로 아름다운 여색〔美色〕을 즐기고 밖으로 어진 신하를 등용하는 것은,
서로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충신이나 훌륭하게 보필한 이들이 급급하게 여색의 총애를 경계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임금이 덕을 좋아하는 정성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지못하면,
곧 임금 베개머리에서 교태를 부리거나 아양떠는 해독이 날로 스며들고 달고 스며들어 깊이 골수에까지 들어박히어서,
임금의 사욕을 막는 법도를 지키는 선비들의 말이 날마다 거슬리고 날마다 어긋나서 이것을 들어도 돌아다보지도 않게 될 것이옵고,
그러면 반드시 거기에 뜻을 잘 맞추고 악을 조장하는 신하는 틈을 엿보아 못된 심복이 되어,
귀여움을 받는 천한 여자를 근간〔根〕으로 삼아서, 안과 밖으로 얽혀서 정령(政令)이 뒤엎어지고,
멸망이 뒤따라서 위태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렴(飛廉)과 악래(惡來)134)는 달기를 근간으로 삼아서 은(殷)나라를 멸망시켰고,
임보(林甫)135)와 국충(國忠)136)이 태진(太眞)137)을 근간으로 삼아서 당(唐)나라를 어지럽혔으니,
정자의 <이>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살피건대, 이것을 형내(刑內)라 장(章)을 이름하였는데 다만 후비(后妃)의 선악만을 논한 것뿐이고,
형처(刑妻)의 도(道)를 말하지 아니한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대개 아내를 법도에 알맞게 대우하는 형처의 도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신의 몸을 닦는〔修己〕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을 닦는 일이 이미 지극해지면 안으로 마음과 뜻이 하나로 되고, 밖으로 용모가 장중하여 언어와 동작이 모두 예의에 맞게 됩니다.
그리고 부부간에 서로 공경하기를 마치 손님을 대하듯 하거나, 이부자리에서 너무 가까이 희롱하는 실수가 없거나,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정숙한 용모를 가질 수 있다면, 역시 후비(后妃)가 보고 감화되어 변할 것입니다.
비록 학문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능히 스스로 삼가고 예의를 이행할 줄 알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고와서, 본래부터 학문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먼저 몸을 닦지 아니하고 스스로 반성하여 본다면, 부끄러운 일이 많은데도 다만 후비(后妃)의 정대할 것만을 요구하며
예모를 갖추는 데 절박하고, 은밀한 때에는 욕정을 함부로 하여 예의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이미 정가(正家)의 근본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니, 어찌 한 집안의 모범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이것보다 더 못한 이는 아름다운 여색에 혹하여 그 바른 이치를 잃어버리고,
후비(后妃)가 비록 현명하더라도 버리고 돌아다보지 아니하며, 사사로이 사랑하는 자에게 빠져서 그 말만을 따르기 때문에,
정사에 해를 끼치고 나라에 재앙을 빚어내게 하는 것인데, 무엇이라고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음식과 남녀 사이에는 큰 욕심이 존재한다." 하였고,
공자(孔子)는, "나는 아직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비록 영웅의 재주로써 그 기개가 일세(一世)를 뒤덮는 이라도 오히려 한 여자에게 마음이 고혹(蠱惑)되어 그 평생을 그르치게 하는 이가 많습니다.
오로지 도(道)만을 준수하고 다스리기를 염원하는 임금으로서, 그 뜻이 선(善)한 데만 있고 다른 물욕에 옮겨지지 아니하는 이라야만,
정(正)으로써 스스로 처신할 수 있고, 또한 능히 정으로써 집안을 잘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옵소서.
< 주 >
111) 중국 송(宋)나라 사람. 자는 순부(淳夫) 또는 몽득(夢得).
사마광(司馬光)과 함께 자치통감(資治痛鑑)의 편수에 참여함.
선인태후(宣仁太后) 생전은 물론 돌아간 뒤로도 정국의 혼미를 걱정하여 건의한 바가 많았다.
112)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왕후. 성은 고씨(高氏).
철종(哲宗)이 즉위한 후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어 섭정(攝政)함.
신당(新黨)을 배격하고 사마광(사마광) 등을 기용하여 원우지치(元祐之治)를 이룩하였다.
113) 중국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왕비. 계(啓)의 모친. 도산씨(塗山氏)의 장녀(長女)이다.
114) 중국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비(妃).
뛰어난 미색(美色)을 지녀 걸(桀)이 항상 가까이 두고 아꼈으나
덕(德)이 부족하여 결국 하나라가 혼란하여 멸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115) 중국 상(商)나라 선조인 설(契)의 어머니로 유융씨(有氏)의 딸이다.
116) 중국 상(商)나라 주왕(紂王)의 비(妃). 유소씨(有蘇氏)의 딸.
왕의 총애를 말고 음탕하고 포악하였다. 뒤에 상의 멸망과 함께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117) 중국 주(周)나라 선조인 후직(后稷)의 어머니. 강(姜)은 성(姓). 원(嫄)은자(字)이다.
118) 중국 주(周)나라 유왕(幽王)의 총비(寵妃).
유왕은 포사가 웃는 것을 보려고 여러 가지로 시험하였으나 웃지 않고 거짓으로 봉수(烽燧)를 울리어
지방의 제후(諸侯)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비로소 웃었다.
그 뒤에 참으로 난리가 나서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이 또 속는 줄 알고 오지 아니하여 주나라가 멸망하였다.
119) 옛날 중국의 황후(皇后)는 정침(正寢)하나 연침(燕寢) 다섯 등 육궁(六宮)을 거느렸다.
120) 중국 주(周)나라 여왕(王)의 아들로 이름은 정(靜)이다.
여왕의 쇠패(衰廢)한 정치를 뒤 이어 다시 선정을 펼쳐서 주실(周室)을 중흥시키는 공업을 이룩하였다.
121) 중국 당(唐)나라 고조(高祖)의 차자(次子)로 이름은 세민(世民)이다.
수(隋)나라 말엽에 고조를 도와 기병하여 당나라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뒤에 왕으로 즉위하여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위징(魏徵) 등과 같은 당시의 명신들을 등용하여
율령(律令)의 찬정(撰定), 군정(軍政)의 정비, 학예(學藝)의 장려 등에 힘써 선정을 베풀고 국세를 내외에 떨쳐
그 유명한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룩하였다.
122) 중국 당(唐)나라 사람 성(晟)의 딸이며 무기(無忌)의 여동생으로 태종(太宗)의 황후가 되었다.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부덕을 갖추어 태종이 선치를 펴는데 있어서 많은 내조를 하였다. 문덕(文德)은 그의 시호이다.
123) 당나라 낙양(洛陽) 사람으로 자는 보기(輔機)이다.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하였고 겸하여 무략(武略)이 있었다.
태종을 도와서 천하를 평정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고종 이후에도 국정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124) 황제(黃帝), 노자(老子), 장자(莊子) 등을 교조(敎祖)로 하는 종교의 한 종류,
무위(無爲) 자연(自然)을 종지(宗旨)로 하고 음양오행설 신선(神仙)설을 혼합하여 불노장생을 구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고구려 때에 들어왔다고 한다.
125) 중국 동한(東漢) 광무제(元武帝)의 제 4자(四子)로 이름은 장(莊)이다.
재위하는 동안 학문을 장려하고 선정에 힘썼다.
또 천축(天竺)으로 사신을 보내서 사문(沙門)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 등을 맞아오고
아울러 불경(佛經)도 들여와 이때 정식으로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현종은 그의 묘호(廟號)이며 시호는 명제(明帝)이다.
126) 중국 후한(後漢) 사람 마원(馬援)의 딸로 부덕이 있어 명제(明帝)의 황후가 되었다. 명덕(明德)은 그의 시호이다.
127) 중국 주(周) 나라의 제12대 왕으로 선왕(宣王)의 아들이다.
요사스런 포사()를 총애하여 백복(佰服)을 낳은 뒤,
이윽고 왕후인 신후(申后)를 폐위시키고 포사를 세웠으며 또 태자 의구(宜臼)를 폐위하고 백복을 세웠다.
뒤에 신후의 친정 아버지인 신후(申侯) 등에게 시해 당하였다.
128) 신왕후(申王后)의 친정 아버지이다.
129) 중국 노(魯) 나라의 권력있었던 대부(大夫)들이다.
둘다 노환공(魯桓公)의 자손으로서 막내아들의 자손이 계손씨(季孫氏)요,
큰아들의 자손이 맹손씨(孟孫氏)인데 계손씨가 더 권력이 강하였다.
또 둘째아들의 자손은 숙손씨(叔孫氏)인데 이들을 삼환(三桓) 또는 삼가(三家)라고도 하였다.
130) 중국 춘추(春秋)시대 위(衛)나라 대부. 이름은 원(瑗). 공자(孔子)의 제자이다.
131) 중국 송(宋)나라 남성(南城)사람. 자는 태백(泰伯), 문장(文章)에 능하였다.
범중엄(范仲淹)의 추천으로 태학설서(太學說書)를 역임했다. 저서로 퇴거류고(退居類稿) 등이 있다.
132) 중국 춘추(春秋)시대 제(齊) 나라의 정치가.
이름은 이오(夷吾). 중(仲)은 그의 자이다.
처음에는 공자규(公子糾)를 섬겼으나 뒤에 다시 제환공(齊桓公)을 섬겨 재상이 되어
제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으며 마침내 제 나라를 당시의 제후들 중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로 만들었다.
133) 중국 춘추시대 제(齊) 나라의 임금. 양공(襄公)의 아우로 이름은 소백(小白)이다.
관중(管仲)을 등용하여 오패(五覇) 중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관중이 죽은 후로 관중의 권유를 어기고
수조(), 역아(易牙), 개방(開方) 등 소인들을 기용하여 정사(政事)를 태만히 하는 바람에 패업(覇業)이 점차 쇠퇴되었다.
134) 모두가 은(殷)나라 주(紂)의 간신들이다.
135) 중국 당(唐)나라 현종(玄宗)때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 호는 월당(月堂)이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중서령(中書令) 등을 역임했다.
성품이 교활하여 권모 술수에 능하였으며 환관(宦官) 비빈(妃嬪)들과 결탁하여 19년 동안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136) 중국 당(唐) 나라 사람. 양귀비(楊貴妃)의 사촌오빠로 현종(玄宗) 때 재상을 역임했다.
성품이 음란하고 방탕하여 당나라를 기울게 한 간신이다. 안록산의 난에 죽었다.
137)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의 귀비(貴妃)로 성은 양(楊)씨 태진(太眞)은 그의 호이다.
재색(才色)이 뛰어나 현종의 총애를 받아 귀비로 책봉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안록산의 난에 죽음을 당했다.
제4장. 교 자(敎子)
신이 살피건대, 부부의 예가 올바르게 세워져야만 교훈(敎訓)의 법도를 거양(擧揚)할 수 있기 때문에,
교자장(敎子章)을 다음에 두었습니다.
◆ 태교(胎敎)에 대한 말씀
옛날에는 부인이 아이를 임신하면 옆으로 누워〔側〕자지 아니하고 비스듬히〔邊〕앉지를 아니하였으며,
외발로〔〕서지 아니하고 맛이 야릇한〔邪味〕 음식은 먹지 아니하였다.
자른 자리가 바르지 아니한 <음식은> 먹지 아니하고 자리가 바르지 아니하면 앉지 아니하였다. (열녀전(列女傳) 하동)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측(側)은 그 몸을 옆으로 눕히는 것이요, 변(邊)은 그 몸을 비스듬히 치우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필()은 피(跛)로써야 마땅할 것인데 한쪽 다리에만 치우치게 몸을 맡기는 것을 말한다.
사미(邪味)는 바르지 않은 맛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사특한 색깔은 보지 아니하고 음란한 소리는 듣지 아니하며, 밤이면 장님으로 하여금 시를 외우게 하고 바른 일을 말하게 한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도(道)는 말한다는 뜻이요, 정사(正事)란 일이 예에 알맞는 것을 가리킨다.
장님에게 시를 외우게 한다는 것은 그 소리가 정밀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이같이 한다면 곧 자식을 낳을 경우 그 형체나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가 남보다 뛰어날 것이다.
진씨는 말하기를, "부인이 임신하였을 때에는 잠자는 일, 먹는 일, 앉는 일, 보는 일, 듣는 일,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하나 같이 모두 다 올바라야만 자식을 낳으면 그 형체나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입교(立敎)의 차례에 대한 말씀
○ 무릇 자식을 낳으면 그 여러 어머니〔諸母〕중에서나, 또는 유능한 자를 가리되, 반드시 너그럽고 인자하며,
사랑스럽고 온화하며, 착하고 공손하며 삼가 <예의를 지키고>, 말을 적게 하는 이를 골라서 그를 자식의 스승으로 삼는다. (「예기」하동)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제모(諸母)라는 것은 여러 첩을 말하는 것이다.
유능한 자라고 한 것은 비록 첩(妾)이 아니라도 가히 자식을 가르칠 스승이 될 만한 자를 말한다." 하였습니다.
사마온공(司馬溫公)138)은 말하기를, "유모가 선량하지 못하다면 비단 그 집안의 가법(家法)을 폐하고 어지럽힐 뿐만 아니라,
아울러서 그가 길러낸 자식도 그를 닮아 같은 유가 되도록 한다." 하였습니다.
자식이 능히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면 오른손으로 밥을 먹도록 가르치고, 능히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사내는 빨리〔唯〕대답을 하도록 하고,
계집애는 느리게〔兪〕대답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사내는 가죽으로 된 주머니〔〕를 차게 하고, 계집애는 실로 만든 주머니를 차게 한다.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사(食) (아랫 글자는 사(食) 입니다.)는 밥이란 뜻이다.
사내나 계집애나 모두 오른손으로 하는 것은 그 강함을 취한 것이다.
유(唯)는 대답하는데 빨리하는 표현이요, 유(兪)는 대답하는데 느리게 하는 표현으로서, 단단한 것과 부드럽다는 것을 뜻한다.
반()은 작은 주머니로서 수건을 담는 것이다.
사내는 가죽을 사용하고 계집애는 비단천을 사용하는데, 역시 단단하다는 것과 부드럽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
또, 한 설명에 의하면, 반()을 큰 띠〔大帶〕라고도 한다." 하였습니다.
나이 여섯 살이 되면, 수(數)와 방위(方位)의 이름을 가르치고, 일곱 살이 되면 사내와 계집애를 같은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며,
음식을 같이 먹지 못하게 한다. 여덟 살이 되면 문을 출입할 때나, 자리에 앉을 때나, 음식을 먹을 때에,
반드시 웃어른이 하고 난 다음에 하도록 하여 비로소 사양(辭讓)하는 것을 가르친다.
아홉 살이 되면 날짜 세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수란 것은 일(一)·십(十)·백(百)·천(千)·만(萬)을 말하고, 방위(方位)의 이름이란 것은 동·서·남·북을 말한다.
날짜를 센다는 것은 초하루·보름과 육갑(六甲)139)을 아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나이 열 살이 되면 바깥 스승에게 나가서 공부하고, 거처는 바깥방에서 하며,
글〔書〕과 셈을 배우고 옷은 비단으로 저고리나 바지를 해 입지 않으며, 예를 처음대로 따라 행하고,
아침저녁으로 어린이의 범절을 배우되 주로 간단하고 진실한 것을 익힌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서(書)는 육서(六書)140)를 말하고, 계(計)는 구구셈을 말한다.
비단으로 저고리나 바지를 해입지 않는 것은 너무 따뜻하기 때문이다.
예를 처음대로 따라 행한다는 것은, 모두 처음 배운 방법에 따라서 동작한다는 것이다.
이〔肄〕는 익힌다는 뜻이요, 간(簡)은 간략하고 요긴하다는 뜻이며, 양(諒)은 진실하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간단하여 알기 쉽고 진실하여 믿기 쉬운 일을 익히는 것을 말한다.)
나이 열 세 살이 되면 악(樂)을 배우고, 시(詩)를 읽으며 작(勺)을 춤추고, 성동(成童)이 되면 상(象)을 추며 활쏘기와 말달리는 법을 배운다.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작(勺)은 주송(周頌)의 작시(酌詩)인데, 수작〔酌〕을 노래하는 풍류 가락의 춤으로서
문무(文舞: 문(文)을 상징하는 특정의 복장을 하고 추는춤)를 말하고, 상(象)은 주송(周頌)의 무시(武詩)인데,
코끼리〔象〕를 노래하는 풍류 가락의 춤으로서 무무(武舞)라 말한다." 하였습니다.
스무 살이 되면 관례(冠禮)를 행하고 비로소 예(禮)를 배우며, 갖옷과 비단옷을 입고 대하(大夏)춤을 출 수가 있다.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실행해 나가고, 널리 배우되 남을 아직 가르치지 못하며, 그 미덕을 마음 속에 지니되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비로소 예(禮)를 배운다는 것은,
성인(成人)의 도(道)로서 마땅히 <제사지내는> 길례(吉禮),
<상을 당했을 때의> 흉례(凶禮), <군에 들어갔을 때의> 군례(軍禮),
<손님을 대할 때의> 빈례(賓禮) <관례(冠禮)·혼례(婚禮)인> 가례(嘉禮) 등,
오례(五禮)를 다 함께 아울러 배워서 익혀야 된다는 것이다.
대하(大夏)는 하(夏)나라의 우(禹)가 지은 음악인데,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것이다.
남을 가르치지 아니한다는 것은 배운 것이 아직 정숙하지 못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스승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속에 지니되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는 것은 마음 속에 깊숙이 그 미덕을 쌓아 두기는 하되,
그 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옛날 사람은 자식을 낳아서 그가 능히 스스로 밥먹을 줄 알거나, 능히 말할 줄 알게 되면,
곧 그를 소학(小學)의 법도를 가르쳐 미리 교육을 시켰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지각이나 생각에 있어 아직 주장이 투철하지 못하므로 곧 격언(格言)과 지당한 의론으로써
날마다 그 앞에서 얘기하고 비록 잘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또한 마땅히 배우고 익히게 하면 귀에 차고 마음에 가득하여
오래 가면 스스로 편안히 익혀져서 마치 그것이 본래부터 있는 것같이 되어, 비록 다른 말로써 현혹시킨다 할지라도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좀 장성하게 되면, 사사로운 생각과 편벽스런 호기심이 마음 속에 싹트고,
뭇사람들의 말들이 밖에서 호리기 때문에 순수하고 완전한 것을 바라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자제(子弟)가 재주가 뛰어나거나 경솔한 것이 염려되는 자는,
다만 경학(經學)과 책을 읽는 것 (책을 외우는 것입니다.) 을 가르칠 것이며 문장을 짓는 것은 가르쳐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나이 서른 살에 아내를 갖고 비로소 남자의 할 일을 처리하며, 널리 학문을 배우고 친구를 공손하게 대하여 그 뜻을 본다.
진씨는 말하기를, "남자의 할 일이라는 것은 토지를 받고〔受田〕141) 정치에 참여하며, 부역에 나가는 것이다.
방(方)자는 상(常)자와 같다.
친구를 공손하게 대한다는 것은 친구들과 순하게 화합하여 교제한다는 것이다.
뜻을 본다는 것은 그 의지(意志)의 향하는 바를 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나이 40살에 비로소 벼슬을 하게 되고 일을 대하여 지모를 짜내며, 생각을 발표하여,
도리에 합치할 것 같으면 복종을 하고, 옳지 아니하면 그만두고 떠나간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방(方)은 대(對)한다는 뜻이요, 물(物)은 일〔事〕이란 말과 같다.
일에 따라서 지모를 짜내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나이 50살에 명을 받아 대부(大夫)가 되고, 벼슬자리에 나아가 정사(政事)를 맡아 보며〔服〕, 나이 70살에 치사(致仕)한다.
진씨는 말하기를, "복〔服〕자는 맡는다〔任〕는 뜻과 같고, 벼슬자리에 나가 정사를 맡아본다는 것은
나라의 대사(大事)에 참여하여 듣는 것을 말한다. 치사한다는 것은 맡은 일을 모두 군주에게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세자(世子)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말씀
○ 무릇 삼대(三代)의 임금은 그 세자(世子)를 가르치는 것을 반드시 예(禮)와 악(樂)으로써 하였다.
악(樂)은 안을 닦는 것이고 예(禮)는 밖을 닦는 것이다. 안에서 예와 악이 서로 교차하면 밖으로 그 형체가 드러난다.
이런 까닭으로, 그 성취되는 것이 <더욱> 나아가며, 공경하고 화하고 문채가 나게 된다. (「예기」하동)
진씨는 말하기를, "안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 속에 쌓인 사특한 것을 쓸어 없앤다는 것이요,
밖을 닦는다는 것은 그 공손하고 엄숙한 범절을 닦아 이루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악(樂)은 안에서 밖으로 통달하고, 예(禮)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다.
이 두 가지는 술에 훈훈히 취한 듯이 통달하여, 서로 틈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 성취되는 것은,
다만 <더욱> 나아가서 즐거워하며, 공경하고 화하고 문채가 나게 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진씨는 말하기를, "공경하여 성실한 덕이 있고,
또 온화하고 윤택(潤澤)하여 문채 나는 기상이 있게 되면, 예(禮)와 악(樂)의 가르침이 큰 것이다." 하였습니다.
태부(太傅)·소부(小傅)를 두어서 그를 가르치게〔養〕하는 것은, 부자(父子)·군신(君臣)의 도리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태부는 부자(父子)·군신(君臣)의 도리를 살펴서 그를 가르치고,
소부는 세자(世子)를 받들어서 태부(太傅)의 덕행(德行)을 보고 살펴서 그것을 깨우치게 한다.
태부는 앞에 있고 소부는 뒤에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곧 보(保)가 있고, 밖으로 나가면 곧 사(師)가 있다.
이로써 가르치고 깨우쳐서 덕을 이룩하게 하는 것이다.
사(師)라는 것은 일로써 가르치고 덕으로써 깨우치게 하는 것이요,
보(保)라는 것은 그 몸을 삼가 조심함으로써 그를 도와 인도하여 도(道)로 귀착하게 하는 것이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양(養)은 조용하게 그 길을 열어 줌으로써, 그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착한 성품을 길러 주어서,
그로 하여금 자연히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살펴서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이 덕을 닦음으로써 그에게 보이는 것이요,
살펴서 깨우친다는 것은 언어로 그 뜻을 설명함으로써 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태부(太傅)는 그 자신의 행동으로써 가르치고, 소부(小傅)는 언어로서 가르치는 것인데, 대개 서로 협력하여 계발하는 것이다.
사(師)라는 것은 일로써 가르치고 덕으로써 깨우치게 하는 것인데,
그에게 부모를 섬기는 일을 가르치게 되면 바로 효도하는 덕을 알게 되고,
그에게 웃어른을 섬기는 일을 가르치게 되면 바로 공경하는 덕을 알게 되므로,
이는 천하에 일 이외의 다른 덕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보(保)라는 것은 곧 세자(世子)의 몸을 안전하게 호위하여 그를 돕고 그를 인도하여, 그 도(道)에 돌아가게 하는 것인데,
귀·눈·입·몸이 사욕으로 동하지 않게 하는 것이, 이른바 도(道)란 것이니 천하에 몸 이외에 또 다른 도는 없는 것이다.
한 세자에게 네 사람이 붙들어 도와 주고 곁에서 받들어 주는데, 어찌 가르침이 통달하지 않을 수가 있겠으며,
어찌 덕망이 이룩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남의 자식노릇을 할 줄 알아야만 가히 남의 부모노릇도 할 수가 있는 것이요,
남의 신하노릇을 할 줄 알아야만 가히 남의 임금 노릇도 할 수가 있는 것이며, 남을 섬길 줄 알아야만 능히 남을 부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자를 길러 가르치는 일을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엄릉방씨(嚴陵方氏)는 말하기를, "임금의 자리나 아버지의 자리에 있으면 부리고 명령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어찌 신자(臣子)로서 남을 섬기는 도를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한 가지 일〔一物〕을 행하고 세 가지 선(善)을 모두 얻을 수가 있는 것은 오직 세자가 태학(太學)에 입학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세자가 태학에 입학하게 되면
첫째로 나라 사람들이, "장차 나의 군주가 될 터인데 나에게 나이로써 사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할 것이니,
"부모가 살아 계셔서 그렇다." 한다면, 일반 사람도 부자간의 도리를 알게 될 것이요,
둘째로, "장차 나의 군주가 될 터인데 나에게 나이로써 사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할 것이니,
"임금이 그 자리에 계시므로 예법이 그러하다." 한다면, 일반 사람도 군신간의 의리에 밝게 될 것이며,
세째로, "장차 나의 군주가 될 터인데 나에게 나이로써 사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할 것이니,
"어른을 어른으로써 <대접하는> 것이다." 한다면, 일반 사람도 어른과 어린이의 범절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자식의 <도리로써> 하게 되는 것이고,
군주가 자리에 계시면 신하의 <도리로써> 하게 되는 것이니,
신자(臣子)의 도리를 지키는 것은 군주를 귀히 여기고 부모를 모시는 길이다.
부자(父子)·군신(君臣)·장유(長幼) 간의 도리를 터득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이다.
옛말〔語〕에 '악정(樂正)은 학업의 일을 주로 맡고, 부사(父師)는 그 덕이 성취하는 것을 맡아서,
한〔一〕사람이 선량해지면 만국(萬國)이 그 때문에 다스려진다." 하였는데, 이는 세자(世子)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일물(一物)이란 한 가지 일〔事〕을 말한다.
어(語)는 옛말을 말한다.
악정(樂正)은 세자에게 시(詩)와 서(書)를 가르치는 일을 주관하는 자이고,
부사(父師) (태사(太師) 입니다.)는 그 덕을 성취하는 일을 주관하는 자이다.
일유(一有)는 서경(書經)에 한 사람〔一人〕이라고 씌어 있는데, 세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세자가 크게 선(善)하면 곧 만방(萬邦)이 모두 바르게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세자 자신이 군주를 존숭하고 부모를 친근히 모시며, 웃어른을 존경하는 도리를 천하에 제창한다면,
사람이 흡연(翕然)히 모여들어서, 보고 본받지 아니할 자가 있겠는가.
진(秦)·한(漢) 이후로 예(禮)와 악(樂)이 이미 모두 폐하여지고,
또 사(師)·보(保)의 가르침과 나이를 따져서 세자를 가르치는 예의가 없어졌으니,
세자는 탄생하면서부터 귀하고 교만스러운 습관에 익숙된다.
이것이 옛과 같이 다스려지지 않는 소이이다." 하였습니다.
○ 보부편(保傅篇)에 이르기를, "사람의 성품은 서로 거리가 대단히 먼 것이 아닌데도,
무엇 때문에 삼대(三代)의 군주는 도(道)가 있어 길었고, 진(秦)나라 군주는 도가 없어 짧았는가.
그 까닭을 가히 알 수가 있다.
옛날의 왕(王)은 태자(太子)가 탄생하게 되면 본래 예로써 받들어 길렀고,
선비에게 그를 맡겨 유사(有司)로 하여금 재계하여 엄숙하게 하고, 단정한 예복으로 남교(南郊)142)에서 뵙게 하는 것인데,
이는 하늘을 뵙는 것이다. 대궐 앞을 지날 적에는 수레에서 내리고, 종묘 앞을 지날 적에는 빨리 걸어가는 것인데, 이는 효자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날때〔赤子〕부터 스스로 그 가르침이 진실로 다 이행되는 것이다.
어린 나이로서 지각이 있으면
삼공(三公)·태사(太師) (태부(太)傅·태보(太)保 입니다.)·
삼소(三少)(소사(少師)·소부(少傅)·소보(小保)입니다)가,
진실로 효(孝)와 인(仁)과 예의를 밝혀 인도(引導)하여 간사한 사람을 물리치고, 나쁜 행동을 보지 않게 한다.
모두 천하의 올바른 선비를 뽑되 효도 있고 우애있으며, 견문이 넓고 도덕과 학문이 있는 자로써 하여 그를 보살피고 돕도록 하여
태자와 함께 거처하고 출입하도록 한다.
태자는 탄생하면서부터 바른 일을 보고 바른 말을 듣고 바른 길을 가는 것은 전후좌우(前後左右)에 있는 사람이 모두 바르기 때문이다.
대개 바른 사람과 함께 거처하게 되면 바르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마치 제(齊)나라에 나서 자란다면 제나라 말을 잘하지 못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만일 바르지 못한 사람과 함께 거처하게 되면 그 바르지 못한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이는 마치 초(楚)나라에 나서 자란다면 초나라 말을 잘하지 못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어려서 이루는 것은 마치 타고난 성품과 같고, 습관은 마치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과 같다.' 하였다.
태자가 조금 자라면 학교에 들어가 스승을 받들어 도(道)를 묻고, 물러나와 익혀서 태부(太傅)에게 점고(點考)받으며,
태부(太傅)는 그 도리에 어긋난 것을 벌하고, 그 미치지 못한 것을 바로잡는다면, 곧 덕과 지능이 자라서 이치와 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태자가 이미 관례(冠禮)를 하고 성인(成人)이 되어 보부(保傅)의 엄격한 가르침을 벗어난다면, 곧 허물을 기록하는 사관이 있고
음식 거두는 것을 주관하는 벼슬아치가 있으며, 선(善)을 본받도록 올리는 깃대가 있고, 잘못을 써붙여 비방하는 나무가 있으며,
과감하게 간(諫)하는 북이 있다. 고사(史)가 시를 읊고 공(工)143)이 잠언(箴言)으로 간하는 것을 외우며,
대부(大夫)가 지혜〔謀〕를 가르치고, 사(士)144)가 백성의 말을 전하여 습관이 지혜와 같이 자란다.
그러므로 간절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다.(간(諫)하는 것이 비록 간절하다 하더라도 능히 그것을 잘 받아들일 수가 있어서,
부끄러움이나 한스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교화가 마음과 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도(道)에 합하는 것이 마치 타고난 성품과 같다.(도(道)에 합치하는 바가 마치 성품이 저절로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대개 삼대(三代)가 오래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태자를 도와서 인도하는데 이같이 갖추었기 때문이다.
진(秦)나라에 이르자 그렇지 못하여, 본래 사양하고 겸손한 태도를 귀히 여기던 풍속은 없어지고,
고자질하는 것을 최상(最上)으로 여겼으며, 본래 귀중하게 여기던 예의는 생각하지도 아니하여, 형벌하는 것을 최상으로 여겼다.
조고(趙高)를 호해(胡亥: 진시황의 아들)의 사부(師傅)로 삼아 그에게 옥사(獄事)를 가르치니,
배우는 것이 사람의 목을 베거나 코를 베는 형벌이 아니면 삼족(三族)을 멸(滅)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호해는 오늘 제위(帝位)에 오르자 내일부터 사람을 싫어하여,
충성으로 간하는 자를 가리켜 비방하는 자라 하고 깊이 계책을 세우는 사람을 가리켜 요망한 말을 하는 자라고 하였으며,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기를 마치 풀이나 띠풀을 베는 것같이 여겼으니,
이것이 어찌 호해가 성품이 악하기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그를 인도하는 도가 이치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담에 말하기를, '앞에 가는 수레가 뒤집혀지면 뒤따르는 수레가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진나라의 대(代)가 빨리 끊어지게 된 이유는, 그 바퀴 지나간 자취를 볼 수가 있는데도 이것을 피하지 않는다면,
뒤따라 가는 수레가 또 필연적으로 뒤집혀지게 될 것이다.
천하의 운명은 태자에게 달려 있으며, 태자가 선(善)하게 되는 것은
일찌기 일러 가르치는 것과 좌우에서 보좌하는 이를 선택하는 일에 달려 있는 것이다.
대개 좌우에서 바르게 가르친다면 태자는 바르게 되는 것이며,
태자가 올바르게 되면 천하가 안정되는 것이다."
(신씨(愼氏)는 말하기를, "보부(保傅)편은 비록 한(漢)나라 가의(價誼)가 지은 것이나, 대체로 옛날 사람들이 남겨 놓은 말이다."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근세(近世)에 이르러 제왕이 그 자식을 가르치는 법이 소홀하고 관심이 적어서,
대개 그 가르치는 방법이 기억하거나 외우거나 글쓰거나 편지하는 공부에 지나지 아니하며,
일찌기 인(仁)·효(孝)·예·(禮)·의(義)의 학습으로 계도하는 일은 없다.
용모와 말씨, 기품과 의복, 기구와 쓰임새 같은 것이 비록 사치의 극치에 달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찌기 이를 절제한 일은 없었다.
따르는 관속들은 그 숫자만 갖추었을 뿐 보부(保傅)로서 엄격한 지도는 없었고,
경전(經典)을 강독하여 예의는 갖추었으나 경계하여 바로 잡는 이익은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출입하고 거처를 같이하여 서로 친밀하고 흉허물 없는 사이가 된 사람들로는,
환관(宦官)이나 가까이 모시는 자나 청소하는 자나 심부름꾼 따위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대개 제왕의 평생에 마땅히 전해 주어야 될 근본은 위로 소중한 종묘와 사직이 있고, 아래로 사해(四海)에 백성들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앞에는 조종(祖宗)이 창업하셔서 물려 주신 어려움이 있고, 뒤에는 자손이 오래도록 번영하게 해야 할 계획이 있는데도 자손을 돕고
가르쳐야 할 방법이 이와같이 소홀하니, 이는 마치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이 있는데
그것을 도둑떼가 우굴거리는 네거리 길가에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 어찌 위태롭지 아니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삼대(三代)에 세자를 교육시키는 방법이 예기(禮記)와 보부(保傅)편에 다 갖추어져 있는데,
근세(近世)에는 그것이 유실(流失)되었다고 주자(朱子)도 상세하게 언급을 하였습니다.
대개 사람이 공경하는 바가 있으면 방지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멋대로 방탕하지 아니하는 것인데,
그래야만 능히 마음이 움직여 성정을 누르고, 학문에 나아가 덕을 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후세의 교육이 매우 소홀하고 간략한데, 6·7세가 되면 바로 보좌하는 관리나 요속(僚屬)들이 있어서, 이미 임금이 될 공부를 하게 되어,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고, 나아가 강론하는 벼슬아치가 너무나 존대하고 떠받들어서,
스승의 도(道)가 허물어지고 없어져서 때때로 접견은 한다고 하지만 바른 말로 간하고 훈계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다만 환관(宦官)과 궁첩(宮妾)들이 날마다 친근하여 편히 즐기는 놀이로서 인도하며 사치스러운 기구에 습관이 되도록 해 주기 때문에,
옛일과 옛 습관이 모두가 바르지 못하니 이와 같이 하고서 세자(世子)의 학문이 이루어지거나 도덕이 서서,
만세(萬世)의 신민들이 우러러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도와 덕 있는 선비를 선발하여 사부(師傅)로 삼아서, 세자로 하여금 공경을 극진히 다하게 하여,
스승의 도를 엄정히 하여 보고 느끼는 데에서 본을 받게 하며,
보좌하는 요속들도 모두 단정하고 뜻이 바르며 도가 있는 선비를 선발하여 밤낮으로 함께 같이 있게 하면서,
좌우에서 붙들어 보좌하게 하고 훈습(薰習)시켜 천성(天性)을 이루게 하되, 잘못이 있으면 기록하고 게으르면 경계하여,
세자로 하여금 언제나 마음으로 근신하게 하여, 스스로 안일한 여가를 갖지 못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만 학문이 날마다 성취할 수 있고, 덕이 날마다 높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군주는 세자에게는 법칙이 되는 것입니다.
군주가 스스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위에서 방탕하고 방자스럽게 할 것 같으면
곧 세자가 본받을 모범을 취할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니,
그렇다면 저 사부(師傅)와 요속(僚屬)들이 어질지라도 역시 앞으로 조정에 있기가 불안해져서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가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도로써 가르쳐 기르려해도 가히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그 자손에게 꽤〔智謀〕를 주어 공경할 자(子)를 편안케 한다." 하였고,
「서전」에 이르기를, "우리 후인(後人)을 도와서 인도하되, 모두 다 정(正)으로써 하고 결함〔缺〕이 없다."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것을 깊이 생각하시옵소서.
< 주 >
138) 중국 송대(宋代)의 학자,
정치가, 자는 군실(君實). 신동(神宗) 초년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관을 사직했다가,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다시 재상으로 기용되어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는 신법들을 모두 개혁하였다.
저서로 자치 통감(資治通鑑) 등이 있으며 온국공(溫國公)을 추증하였다.
139) 60갑자(甲子)를 뜻한다.
140) 한자(漢字)의 구성과 운용에 대한 여섯 가지의 기본 방법.
지사(指事)―추상적으로 사물의 뜻을 나타낸 것으로 상·하(上·下) 따위,
회의(會意)―이미 구성된 두 개의 문자를 합쳐서 뜻을 나타낸 것으로 무신(武信) 따위,
형성(形聲)―이미 구성된 문자에서 일부는 뜻을, 일부는 음을 취하여 합친 것으로
강·하(江·河) 따위, 전주(轉注)―문자의 모양을 전변하여 쓴 것으로
고·노(考·老) 따위, 가차(假借)―다른 문자를 차음(借音)하여 쓰는 것으로 영·장(令·長) 따위이다.
141) 주(周)나라 때에는 토지가 모두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농가 한 집당 백묘(百畝:8천평)씩 받아서 경작하였다.
여기서 토지를 받는다는 것은 남자가 성인이 되어서 새로 한집을 창립을 하면 새로 백묘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142) 중국의 법규에는 오직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는데, 그 제사는 남교(南郊)에다 단(壇)을 쌓고 거기서 지낸다.
그러므로 왕세자가 하늘을 뵈려면 남교로 가는 것이다.
143) 악공(樂工)을 말한다. 그가 경계하는 잠언(箴言)을 모아서 드렸다.
144) 하급 관원인데 주나라 관제에는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의 세 등급의 사(士)가 있었다.
제5장. 친 친(親親)
신이 살피건대, 부모에 대한 효도와 자식에 대한 자애를 미루어 나가는 데는 친척을 친애하는〔親親〕장을 다음에 놓았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아가위나무〔棠〕꽃이여, 환하게〔〕활짝 피지〔〕 않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내 형제만 같으리." 하였습니다. (소아(小雅) 상체(常)편. 하동)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악()은 화사하게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불(不)은 어찌 그렇지 아니한가. 하는 뜻이다.
위위()라는 것은 빛나고 밝은 모습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은 형제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노래이다." 하였습니다.
할미새〔脊令〕가 둔덕에 있는데, 위급한 곤난을 당하고 있구나.
사이좋은 친구가 있다 하나 길이 한탄만 하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척령(脊令)은 물가에 사는 새다.
날 때에는 곧 울부짖고 걸을 때에는 곧 몸을 뒤흔들어 위급하고 곤란한 의미가 있으므로 그것으로써 홍을 일으킨 것이다." 하였습니다.
○ 동래여씨(東來呂氏)는 말하기를, "그 친근히 해야 할 이를 소홀히 하거나,
그 소홀히 할 이를 친근히 한다는 것은 그 본심(本心)을 잃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詩)는 친구가 형제만 같지 못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개 친근하거나 성긴 사이의 분별을 제시함으로써 도리켜 그 근본에 따르도록 한 것이다.
본심이 이미 얻어지면 곧 친근하고 성긴 것이 질서있게 차례가 잡힐 것이고, 형제가 친근하면 곧 친구간의 의리도 돈독해질 것이다.
처음부터 친구에게"대해서 박절하게 하자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잡스럽게 하여 공손하지 못하다면 비록 친구에게 후덕하다고 할지라도 이는 마치 근원이 없는 물과 같아서,
아침에 가득차도 저녁에 없어질 것이니, 어찌 가히 보존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처자식이 화합함이 마치 비파와 거문고 타는 것 같도다. 형제가 화목하여야〔翕〕, 즐겁고 또한 즐겁다.〔湛〕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흡(翕)은 화합한다는 뜻이요, 담(湛)은 즐거움이 오래도록 계속된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 첩산사씨(疊山謝氏)는 말하기를, "형제가 화목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곧 가정의 분위기가 어긋나서 어지럽지 아니한 것이 없게 되어,
비록 처와 자식을 거느리는 즐거움이 있다 할지라도 역시 그 즐거움은 불안하게 될 것이다.
오직 형제가 화락하면 한 집안의 우애가 서로 화목하지 않을 수 없으며, 역시 처와 자식의 즐거움이 오래 갈 수 있는 것이다.
대개 천성(天性)으로 화합한 것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어지러워진다면 사람의 화합하는 것 역시 불안해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요(堯)가 그 큰 덕〔俊德〕을 잘 밝혀〔明〕그것으로써 그 구족(九族)145)을 친(親)하게 하고,
그 구족이 이미 화목하게〔睦〕되니 백성을 다 같이〔平〕 밝게〔章〕 다스리고,
그렇게 해서 백성이 모두 밝게 소명(昭明)해졌다. (우서(虞書) 요전(堯典))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명(明)은 그것을 밝힌다는 뜻이요.
준(俊)은 크다는 뜻이다.
구족이란 고조(高祖)대로부터 현손(玄孫) 대에 이르는 직계친(直系親)을 중심으로, 방계(傍系)를 포함하는 것으로
가까운 데를 들어 먼데를 겸한 것이니 오복(五服) 이성(異姓)의 친척도 역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목(睦)은 친하여 화목하다는 뜻이요, 평(平)은 다 같다는 뜻이며, 장(章)은 밝힌다는 뜻이다.
소명(昭明)은 모두 능히 스스로 그 덕을 밝힌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왕씨(王氏)는 말하기를, 친(親)은 친근하게 한다는 뜻이요. 목(睦)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서로 친근하게 한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 공족(公族)이 죄가 있으면, 세 번 그 죄를 용서해 주고 난 다음에 형벌을 준다. (예기)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공족(公族)이 죽을 죄가 있다면, 곧 전인(甸人)에게 넘겨 목을 매어〔磬〕죽인다.
(경(磬)은 목을 매달아 죽이는 것입니다.
전인(甸人)은 시골을 관장하는 벼슬아치이니, 그것을 숨기고 남에게 보이려 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거리에서 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 형죄(刑罪)는 역시 전인(甸人)에게서 고(告:국문할 국鞠자로 읽습니다.)하도록 되어 있다.
공족에게는 궁형(宮刑)146)은 없다.
사건을 처리하는 옥사(獄事)가 이루어지면 유사(有司)가 공(公)에게 죄상을 고하기를, '아무개의 죄는 사형〔〕에 처한다.' 하면,
공이, '그 죄를 용서해 주라.' 한다. 유사가 또, '사형에 처한다.' 하면,
공은 또, '용서해 주라.' 한다. 유사가 또, '사형에 처한다.' 하며
세 번 용서를 청하는 데 미쳐서는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 달려 나가 전인에게 처형을 하도록 한다.
공이 또 사람을 시켜 그를 쫓아 따라가게 하여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 죄를 사면하여 주기 바란다.'고 전한다.
유사가, '미칠 수 없다.' 하면, 돌아가서 공에게 그 처형한 일을 보고하고,
공이 흰 상복을 입고 거(擧)147)하지를 아니하고 친히 통곡한다." 하였습니다.
○ 장락진씨(長樂陳氏)는 말하기를, "공의 처지로써 법을 극진하게 다하지 아니하며 의(義)로써 은혜를 가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세 번 용서를 빌어 또 그것을 따라 가되 미치지 못하여야만, 흰 상복을 입고 거(擧)하지 아니하고 변(變)에 대처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친한 이를 더 친히 하는 것은 집안의 급한 일인데, 친한 이를 더 친하게 하는 일은 비단 한 가지 도만이 아닙니다.
한 종족(宗族)가운데에는 어질고 어리석은 것이 같지 아니하니 돈독하고 화목한 은혜는 마땅히 균일하여야 하며,
취하고 버리는 것은 마땅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후하게 양육하고 부지런히 가르쳐서 그 재덕(才德)이 현저한 자는 택하여 친히 등용하고,
그 재덕이 없어서 등용해 쓸 수 없는 자는 그로 하여금 녹(祿)만이라도 먹게 한다면, 곧 종족(宗族)도 보전할 수 있고,
정사에도 결함되는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후세에는 그 알맞는 중도(中道)를 얻지 못하여 편벽되게 믿고는 위임해 버리니,
곧 왕명(王令)을 제멋대로 천단(擅斷)하게 되어 제제할 수 없게 되고,
또 만일 폐단을 교정하여 억제하는데 너무 지나치게 한다면 비록 현명하고 유능한 자가 충성하기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등용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가 다 선왕(先王)께서 친한 이를 더 친하게 하게 하시던 의리가 아닌 것입니다.
주는데는 절제가 있는 것이고, 접견하는 데는 때가 있어야 하며, 따뜻하고 관대한 것으로 열어 주어서,
그 학습한 것을 시험하여 보고, 그로 하여금 각각 자기가 쌓아 온 것을 전개시키도록 하되,
유능한 자는 권장하고 능하지 못한자를 경계한다면 곧 정(情)과 예(禮)가 병행하고 흥기(興起)하여 선(善)을 하게 될 것입니다.
후세에는 이 알맞는 중도를 얻지 못하여 만일 사사로운 일에 치우쳐서 너무 지나치게 후하게 된다면,
곧 요구하는 일이 있을 경우 반드시 허락하게 되고, 죄가 있더라도 다스리지 아니하여 그 때의 정사에 해를 주게 되는 것이며,
또 만일에 범연(泛然)히 하여 친절하지 아니하면, 도무지 서로 상접할 수 없어서 마치 길가는 사람을 보듯 소홀하게 대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모두 다 선왕(先王)께서 친한 이를 더 친하게 하시던 은덕이 아닌 것입니다.
반드시 사사로운 은혜로써 공의(公儀)를 해치지 말 것이며, 공의로써 사사로운 은혜를 끊지 아니하여,
은(恩)과 의(義)가 다 극진하여야만 친한 이를 더 친하게 하는 도리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시옵소서.
< 주 >
145) 고조(高祖)로부터 증조·조부·부·자신·자손·증손·현손(玄孫)의 직계친(直系親)을 중심으로 하여
방계친(傍系親)으로 고조의 4대손되는 형제, 종형제, 재종형제, 삼종형제를 포함하는 동종(同宗) 친족을 일컫는다.
146) 형벌의 일종. 남자는 거세(去勢)하고 여자는 음부를 유패한다.
147) 식사할 때 음악을 듣지 않는 것이다.
제6장. 근 엄(謹嚴)
신이 살피건대, 윤리를 바로 잡는 일과 은의를 돈독하게 하는 일의 설명은, 위의 네 장(章)에서 그 대개가 진술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두 가지는 근엄(謹嚴)을 위주로 삼은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근엄 장(章)을 놓았습니다.
◆ 부부간의 분별이 근엄해야 한다는 말씀
예(禮)는 부부가 서로 삼가는 데서 비롯되므로, 궁실(宮室)을 정하는 데 있어서 안과 밖을 분별하되, 남자는 밖에서 거처하고 여자는 안에서 거처한다.
깊숙한 내실은 문을 단단히 닫고 혼시(寺)148)가 지키며, 남자는 안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여자는 밖에 나가지 아니한다. (「예기」하동)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부부는 인륜(人倫)의 시초가 되기 때문에 삼가지 아니한다면, 곧 그 인륜의 질서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는 부부가 서로 삼가는 데서 비롯된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남자는 안 일에 관해서 말하지 아니하고, 여자는 바깥 일에 관해서 말하지 아니한다.
제사지낼 경우와 상(喪)을 당하였을 때가 아니면 서로 그릇을 주고 받지를 아니한다.
그 서로 주고 받아야 할 경우라면, 곧 여자가 네모난 대광주리〔〕로써 받는다.
그 대광주리가 없으면, 곧 모두 앉아서 그것을 바닥에 놓아야만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진씨는 말하기를, "제사지내는 일은 엄숙한 경우이요, 상을 당하는 경우는 갑작스러운 때이므로, 다른 혐의가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여자는 반드시 네모난 대광주리를 들어서 주는 자가 그것을 그 가운데에 놓도록 해야 되는 것이다.
모두 앉는다고 한 것은 남자나 여자가 모두 다 무릎을 꿇어 앉는 것을 말한다.
주는 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것을 땅바닥에 놓으면,
곧 받는 자 역시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땅바닥에서 그것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안과 밖에서 우물을 공동으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목욕간〔〕을 공동으로 사용하지 아니한다.
잠자리를 두루 통하게 아니하고 빌어 쓰는 일을 두루 통하게 아니하며, 남자와 여자가 의복을 통해서 입지 아니한다.
안의 말이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바깥 말이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한다.
남자가 안에 들어갈 적에는 휘파람을 불거나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밤에 길을 갈 적에는 촛불을 들고 가되 촛불이 없으면 곧 그만둔다.
여자가 문 밖에 나갈 적에는 반드시 그 얼굴을 싸서 가리고, 밤에 길을 갈 적에는 촛불을 들고 가되, 촛불이 없으면 곧 그만둔다.
길에서는 남자는 오른쪽으로 다니고, 여자는 왼쪽으로 다닌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벽()은 목욕간을 가리킨다." 하였습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집안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막는다면, 후회할 일이 없다." 하였습니다. (가인괘(家人卦) 초구(初九) 효사(爻辭))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한(閑)은 하지 못하게 방지하는 법도를 일러 말한 것이다.
집안을 다스리는 자가 진심으로 법도를 가지고서 분수에 벗어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내지 아니한다면,
사람의 정은 곧 죄를 짓는대로 흘러서, 반드시 후회하거나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과 어린이간의 질서를 상실하거나, 남녀간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거나,
은의(恩義)를 손상하게 되거나, 윤리(倫理)를 해치게 되어, 그 <혼란이> 이르지 아니하는 곳이 없을 것이다.
능히 법도로써 그 분수에 어긋나는 일을 잘 막아낸다면 곧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니, 후회할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부녀자와 아이들이 지나치게 웃거나 떠든다면〔〕, 마침내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가인괘(家人卦) 구삼(九三) 효사(爻辭))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희희()는 웃거나 즐기는 것이 절도가 없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같은 육친인 부자간에는 대개 정(情)으로써 예(禮)를 이기고, 은(恩)으로써 의(義)를 빼앗게 되는 것이다.
오직 강직하게 뜻이 선 사람만이 능히 사사로운 사랑 때문에, 그 정리(正理)를 잃지 않는 것이므로, 마음이 강직한 것을 최선으로 삼는다.
엄격하고 삼가는 것이 지나치면, 비록 정리가 손상되지 않을 수 없으나,
진실로 법도를 세우고 윤리를 올바르게 하면, 바로 은의가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에 희희()하여 절도가 없으면, 법도가 그 때문에 폐지되는 것이요, 윤리가 그 때문에 문란해 지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찌 능히 그 집안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끝내는 패가하는 지경에 이르고, 부끄러워서 후회하고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사람을 대하는 데 근엄해야 한다는 말씀
○ 사람이란 자기가 친애하여도 치우치게 되는 것이요, 자기가 천하게 미워하여도 치우치게 되는 것이며,
자기가 두려워하거나 공경하여도 치우치게 되는 것이요, 자기가 슬퍼하거나 가엾게 여겨도 치우치게 되는 것이며,
자기가 오만하게〔敖〕 굴거나 게을러도〔惰〕 치우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 좋은 점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흔하지 않다. (「대학」하동)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지(之)자는 마치 어(於)자와 같은 것이다.
벽()은 치우친다는 것이다. 이런 다섯 가지는 사람에게 있어 그 본래부터 당연한 법칙이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심정이란 오직 그 향하는 바에 따를 뿐이고, 살펴보는 일을 더하지 아니하니,
그렇게 되면, 반드시 한쪽으로 치우쳐서 자신의 몸을 닦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북계 진씨(北溪陳氏)는 말하기를, "오(敖)는 다만 예(禮)에 간략한 것이며, 타(惰)는 다만 예에 게으른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 첫째 사랑할만하지도 않고, 다음으로 공경할 만하지도 않으며,
다만 보통이라면, 그를 접할 적에 스스로 소홀히 하거나 업신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속담〔諺〕에, "사람이란 자기 자식의 악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논의 벼가 자란 것을 알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언(諺)은 속담을 말한다.
사랑에 빠진 자는 밝지 못하고, 얻기를 탐내는 자는 싫어하는 것이 없는 것인데, 이것은 치우쳐서 해가 되는 것이니,
집안이 가지런히 다스려지지 못하는 까닭이 된다." 하였습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오직 여자와 소인(小人)은 기르기가 어렵다.
그를 가까이 하면 공손하지 못하고, 그를 멀리 하면 원망을 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이 소인이란 역시 심부름시키는 종이나 하인을 말한 것이다.
군자가 신첩(臣妾)에게 장중한 태도로써 임하거나 사랑으로써 용납할 것 같으면, 곧 두 가지 우환이 없어진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적(嫡)·첩(妾)의 분별이 근엄해야 한다는 말씀
○ 처(妻)가 없으면 첩(妾)이 시중을 드는데, 처가 시중드는 밤에는 밤을 감히 차지하지〔當夕〕못한다. (예기)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옛날에는 처와 첩이 시중을 드는데, 각각 그 맡은 날이 정해 있는 법이다.
당석(當夕)이라고 말한 것은 처가 맡은 날에 시중드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엄릉 방씨(嚴陵方氏)는 말하기를, "자기 분수에 넘친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초록빛 의복이여, 겉옷이 초록빛인데 속옷은 노란빛이로다.
근심스런 마음이여, 언제 그것이 멈출〔已〕것인가." 하였습니다. (패풍(風) 녹의편(綠衣篇))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녹색은 푸른 색이 노란 색보다 많이 섞인 간색(間色)이요, 황색은 중앙의 흙을 상징하는 정색(正色)이다.
간색(間色)은 천한 빛깔인데, 그것을 겉옷으로 삼고, 정색(正色)은 귀한 빛깔인데 그것을 속옷으로 삼는다는 것은
모두 다 그 마땅히 있어야 할 바를 잃은 것을 말한다.
이(已)자는 그만 그친다는 뜻이다.
장공(莊公)은 첩(妾)들을 치우치게 총애하여 현혹되었기 때문에, 그 부인 장강(莊姜)이 현숙하였는데도 그 정실(正室) 자리를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詩)를 지어 초록빛으로 만든 겉옷과 노란빛으로 만든 속옷을 대조시켜서,
천한 첩이 높아져서 드러난 반면에 정실 부인이 유폐되어 미미해진 일을 비교하여,
나로 하여금 심란한 마음을 스스로 그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유(辛有)는 말하기를, "두 왕후(王后)를 아우르거나〔竝后〕 서자가 적자(嫡子〕와 대등하게〔匹敵〕 하거나,
정치를 둘이서〔兩政〕하거나, 나라를 쌍립시키는〔禑國〕 일은 어지러운 근본이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춘추(春秋) 좌씨전(左氏傳))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땅에는 왕이 둘이 없으며, 높은 자리에는 두 어른이 없다.
그러므로 첩은 후(后)와 아울러 같은 지위에 나란히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병후(竝后)라 함은 첩(妾)이 후(后)와 같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서자(庶子)는 적자(嫡子)보다 더할 수가 없는 것이며, (필적(匹嫡)이란 서자가 마치 적자와 같은 신분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하는 임금을 흉내내어 참람한 짓을 할 수가 없는 것인데, (양정(兩政)이란 신하가 제멋대로 임금의 명을 천단(擅斷)하는 것이고,
우국(禑國)이란 대부(大夫)의 고을을 마치 국도(國都)와 같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천지의 영구히 불변하는 도리요, 대의(大義)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유(辛有) (주(周)나라의 대부(大夫)입니다.)는 이 네 가지로써 다 함께 말하였는데,
병후(竝后)를 첫머리로 삼았기 때문에, 여기에 서술하게 된 것입니다.
○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총애하는 신부인(愼夫人)과 궁궐 안에서 언제나 황후와 자리를 같이 해서 앉았습니다.
그 행차가 상림(上林)에 이르러 자리를 베풀었을 때에, 원앙(袁)이 신부인(愼夫人) 자리를 (좌(坐)자는 석(席)자와 같습니다.) 끌어 물리쳤습니다.
부인이 노하고 임금 역시 노하니, 앙이 앞에 나와 말하기를,
"신이 들어서 알기로는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에 차례가 유지되어야만 곧 위와 아래가 화목해진다고 하는데,
지금 이미 후(后)가 서 있으므로 부인은 바로 첩입니다.
첩과 주인이 어찌 더불어 자리를 같이 하여 앉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폐하께서는 혼자만 인체(人)149)를 보지 아니하셨습니까." 하였습니다.
임금은 부인에게 타일러 말하고는, 앙에게는 황금 50근(斤)을 내려 주었습니다.
(진씨(眞氏)는말하기를, "문제(文帝)가 다만 그 죄를 용서해 준 것뿐만이 아니라, 또한 상을 내려주는 일까지 있었으니,
앙의 곧은 마음씨는 진실로 가상히 여길 만한 것이겠지만, 문제 역시 현명하였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태자를 정하는 데 근엄해야 한다는 말씀
○ 환공(桓公) 6년9월 정묘(丁卯)에 아들 동(同)150)이 탄생하였다. (춘추경(春秋經). 하동)
호씨(桓氏)는 말하기를, "경서(經書)에 아들 동〔子同〕이 탄생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요,
후세에 적자(嫡子)를 배정(配定)하는 경우에 그 정실(正室)소생의 신분을 빼앗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니 후세에 전하는 교훈의 뜻이 큰 것이다.
이것은 세자에<대하여> 말한 것인데, 세자(世子)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해지는 사람은 없는 것이니, 천자에게 맹세를 하여야만 세자가 되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가의(賈誼)151)의 서(書)에서 이르기를,
'형세가 분명하면 곧 백성이 안정되어 도(道)가 한 길로부터 나오게 되기 때문에,
사람은 재상이 되기 위하여 서로 다투기는 할지라도, 세자가 되기 위해서 농간을 부리지는 아니하는 것이다.
재상의 그 지위는 높고 세자의 지위는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리는 지모(智謀)로써 가히 구할 수는 없는 것이요,
또 힘으로써도 가히 다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상은 가의(賈誼)가 한 말입니다.)
옛날 사람은 세자가 탄생한다면 곧 발표하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나게 하여 그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다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니,
여러 사람들의 중망(衆望)에 부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는 일이 바로 태자를 세울 때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처음 탄생하는 날에 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춘추(春秋)에 자동이 탄생한 일을 삼가 기록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희공(僖公) 5년 여름에, 공(公)과 제후(齊候)·송공(宋公)·진후(陳候)·위후(衛候)·정백(鄭伯)·허남(許男)·조백(曺伯) 등이
수지(首止)에서 왕세자(王世子)와 회합을 가졌다. 그 해 가을 8월에 제후들이 수지에서 맹약을 하였다.
임씨(林氏)는 말하기를, "혜왕(惠王)이 태자 정(鄭)을 폐위시키고 왕자 대(帶)를 세우려 하였다.
그 때문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왕태자와 회합을 가진 것이며, 그것으로 그 태자의 자리를 확정 지은 것인데,
이것은 주나라 왕실의 안정을 꾀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호씨(胡氏)는 말하기를, "왕이 장차 귀여워하는 자식으로 세자의 자리를 바꾸려고 하니,
환공(桓公)이 그 일에 우려를 표시하여, 큰 나라를 끌어 당기고 작은 나라를 붙들어서, 수지에서 회합을 가진 것이다.
그것으로 그 자리가 확정되고 태자는 왕위를 이어 천조(踐祚)하게 되니 이이가 곧 양왕(襄王)이다.
이는 한 번 바로 잡아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도를 모두 다 얻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그것을 칭찬하기를, '관중(管仲)이 환공(桓公)을 도와서 천하를 한 번 바로 잡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다. 만일 관중이 없었다고 하면
나는 머리를 풀고 옷섶을 왼쪽으로 여미면서 살 뻔하였던 것이다."152) 하였습니다.
중국(中國)이 중국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부자와 군신의 큰 윤리가 있었기 때문이요,
그것을 일단 상실하였더라면 오랑캐〔夷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지(首止)에 모여서 맺은 맹약은 위대한 것 중에서도 가장 위대했던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한(漢)나라 문제(文帝) 원년 정월에 유사가 진언(進言)하기를,
"일찍 태자를 세우는 것은 종묘(宗廟)를 존중하여 받드는 일이므로, 태자를 세울 것을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덕이 없어서 상제의 신명(神明)은 아직 감동하지 아니하고,
천하의 백성들이 아직 만족스러운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지금 비록 천하에 재능이 있고 인격이 훌륭한 현성(賢聖) 가운데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을 널리 구하여
천하를 그에게 선양(禪讓)해 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태자를 미리 세워야 한다는 것은
나의 부덕한 것을 더 가중시키는 것이니, 천하를 어찌하겠는가.
천천히 하라." (안(安)은 천천히 하라(徐)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유사는 말하기를, "태자를, 미리 세우자는 것은 종묘와 사직을 정중하게 받들고, 천하를 잊지 않는 길입니다.
후사(後嗣)를 세우는데 반드시 아들로써 정하는 내력이 벌써 오래입니다.
아들 계(啓)(경제(景帝)의 이름입니다.)는 나이도 가장 위이고, 순후하고 인자(仁慈)하므로,
바라옵건대, 그를 세워 태자로 삼으소서." 하니, 상은 곧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 제나라 경공(景公)의 적자(嫡子)는 죽고 그 애첩인 예희(芮姬)가 아들 다(茶)를 낳았습니다.
다는 어린 데다 그 어미는 천하여 행실이 없었습니다.
여러 대부들은 그가 대(代)를 이을 사자(嗣子)가 될까 두려워하여, 진언(進言)하기를,
"여러 아들 중에서 나이가 위이고 가장 어질고 덕있는 자를 택하여 태자로 삼으소서." 청원하였습니다.
경공은 늙어서 후사를 정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싫어하였고,
또 한편으로 다의 모자(母子)를 사랑하여 그를 태자로 세우고 싶었으나, 그 일을 입 밖에 내기를 꺼려하여,
여러 대부에게 이르기를, "다만 낙관(樂觀)할 따름이다. 어찌 나라에 임금이 없을까 근심을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경공이 병으로 눕게 되자 국혜자(國惠子)·고소자(高昭子)에게 명하여, 어린 아들 다를 세워 태자로 삼고 여러 공자(公子)들을 물리치게 하였습니다.
경공이 죽자 태자 다가 그 자리에 섰는데, 이이가 곧 안유자(安孺子)입니다.
여러 공자들은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모두 망명하였습니다.
전걸(田乞) (제나라 대부입니다.) 이 고소자(高昭子)를 쳐서 그를 죽이고,
이에 곧 사람을 시켜 노(魯)나라에 보내어 공자(公子) 양생(陽生) (경공자(景公子)입니다.) 을 불러 들이고는,
여러 대부들에게 양생을 세우기로 맹서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이 이가 도공(悼公)입니다.
안유자를 귀양보내어 죽이고, 예자(芮子)를 축출하였습니다.
예자는 미천한 자였고, 또 유자(孺子)는 어렸기 때문에 권위가 서지 아니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경멸했습니다.
(문제(文帝)는 일찌기 나이 위인 자(長)를 세웠기 때문에 한(漢) 나라가 흥하였고,
반대로 경공(景公)은 미리 세우지도 아니하고 나이 어린 자를 세웠기 때문에 제(齊)나라가 그로써 어지러워졌습니다.
하나는 가히 본받을 만하고 하나는 가히 경계할 만합니다.)
◆ 다음은 친척을 다스리는 데 근엄해야 한다는 말씀
○ 나라가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워지는 일은 오직 여러 관원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벼슬자리는 사사로이 친밀한 자에게 미치지 아니하여야 하고, 오직 그 능력이 있는 자를 등용하여야 하며,
작위(爵位)는 악덕(惡德)한 무리에게 미치지 아니하여야 하고, 오직 어질고 덕있는 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상서(商書) 열명(說命))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육경(六卿)153)과 여러 집사(執事)를 관(官)이라 하고,
공(公)·경(卿)·대부(大夫)·사(士) 등을 작(爵)이라 한다.
관은 일을 맡고 있기 때문에 능이라 하고 작은 덕(德)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질다한 것이다.
오직 현명하고 오직 유능한 이로 하는 것은 잘 다스려지는 길이요,
사사로이 친밀하거나 악덕(惡德)한 이로 하는 것은 어지럽게 되는 길이다." 하였습니다.
○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관과 작을 사사로이 친밀한 이나 악덕한 무리에게 미치게 한다면
사정(私精)에 가리게 되어 하늘의 총명을 법받는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 한(漢)나라 문제 때 두후(竇后)154)의 형 장군(長君)과 아우 소군(少君)은 후(后)가 섰다는 소문을 듣고,
글월을 올려 스스로 후에게 고해 말하였습니다.
후가 황제에게 말하자 황제가 불러 들여서 물으니 그 까닭을 다 말하였습니다.
이에 두후가 그들 손을 붙들고 울고는, 장안(長安)에다가 집을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강후(絳侯) (주발(周勃) 입니다.)·관장군(灌將軍)(영()입니다.) 등이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출신이 미천하므로 불가불 스승을 택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며,
또 다시 여씨(呂氏)를 본받는다면 큰 일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곧 나이 많은 사람 가운데 절도 있고 행실 있는 자를 뽑아 같이 있게 하니,
장군과 소군은 이로 말미암아 물러나 양보하는 군자(君子)가 되었고, 감히 부귀로써 다른 사람에게 교만을 떨지 아니하였습니다.
뒤에 황제가 광국(廣國)(바로 소군의 이름입니다.
소군은 그의 자(字)인 것입니다.)이 현명하기 때문에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사사롭다고 여길까 두려워하여, 오래동안 생각한 끝에 불가하다고 여겨 신도가(申屠嘉)155)를 정승으로 삼았습니다.
○ 성제(成帝)는 건시(建始)156)원년에 그 여러 외숙(外叔)들을 모두 봉(封)하여 후(侯)로 삼았는데,
여름 4월에 누른 안개가 사방으로 둘러싸였습니다.
그런데 상(上)은 그 큰 외숙 대사마(大司馬) 왕봉(王鳳)에게 정사를 맡겼습니다.
이에 유향(劉向)157)은 왕씨(王氏)의 권력과 지위가 너무 성하고 상제는 시(詩)·서(書)·옛글만을 좋아하는 까닭으로,
이에 곧 상서(尙書) 홍범(洪範)에 의해서 상고(上古) 이래로부터 춘추(春秋)와 육국(六國)을 거쳐
진(秦)·한(漢)에 이르는 동안의 상서로운 징조와 천재(天災) 지변(地變)의 기록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그 행적(行跡)을 미루어 복과 재앙을 관련시켰으되, 그 점(占)의 효험을 나타낸 것을 같은 유(類)를 따라 모아서 각각 조목(條目)을 세웠는데,
모두 11편이었습니다.
이름하여 홍범 오행전론(洪範五行傳論)이라 하고, 아뢰어 들이니,
천자는 향(向)이 충성된 정성으로 봉(鳳)의 형제들 때문에 논을 지은 것을 알았으나, 끝내 왕씨(王氏)의 권력을 능히 빼앗지는 못하였습니다.
<또> 왕장(王章)은 봉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 임금의 존재를 가리는 허물을 아뢰자, 상은 깨달은 바 있어서 그것을 받아 들였습니다.
봉은 우려하고 두려워하여 상소를 올리기를 해골이나 성하게 물러갈 것을 애걸하였는데,
그 글의 뜻이 대단히 애처로워서 태후는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들지 아니하였습니다.
상도 어려서부터 봉에게 친히 의탁하였기 때문에, 차마 폐출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곧 상서(尙書)로 하여금 장을 탄핵하도록 하고, 법리(法吏)를 시켜 마침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공경(公卿)들은 봉을 만나면 곁눈으로 흘겨 보았습니다.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성제(成帝)는 본래 장(章)을 유도하여 말을 올리도록 시켜놓고는,
이미 봉을 물리치는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게 되니까 이에 곧 상서로 하여금 장을 탄핵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유인하여 죄에 빠지도록 한 것이다.
어찌 그 농간을 부리는 신하에게는 차마 하지를 못한다 하고 나라를 위하여 충성된 말을 올리는 선비들에게는 차마 할 수가 있는 것이겠는가.
충성된 말을 올리는 선비가 누구를 위해 계획한 일이 길래 조금도 애석한 마음이 없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 신이 살피건대, 성제는 깨달은 바가 있고도 왕씨(王氏)를 물리치는 일을 능히 할 수 없었던 것이니,
이것은 나라의 위급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또 다시 그것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봉이 병들자 왕음(王音)을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봉이 죽자 음이 대사마(大司馬)가 되었습니다.
음이 죽자 왕상(王商)이 대사마가 되었으며, 상이 죽자 왕근(王根)이 대사마가 되었습니다.
근이 병으로 벼슬을 사면하자 왕망(王莽)158)을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도록 하였는데,
왕망은 마침내 한나라의 역적이 되었다가 동한(東漢)이 일어나게 되자, 주살(誅殺) 당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외척(外戚)의 화는 역사상에 끊임없이 기록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두 사람의 경우만을 취하여 여기에 기록하였습니다.
두씨(竇氏)의 현명한 것은 가히 법도로 삼을 만하고, 왕씨(王氏)의 간악한 것은 가히 경계하여야 할 만합니다.
어떤 이는 문제(文帝)가 광국(廣國)을 재상으로 삼지 않은 것을, 내심으로 그를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협의받는 일을 피하려고 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문제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자손들을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 깊었던 것입니다.
광국과 같이 현명한 이도 오히려 나라의 정치권력을 잡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현명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겠습니까.
이것으로써 방벽을 삼았으되, 자손들이 가법(家法)에 어두어서, 역시 외가(外家)때문에 나라를 망쳤는데,
하물며 평소부터 자손을 위하여 남겨 준 계책도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대개 외척이 정사를 어지럽게 한 것은 모두 다 임금이 능히 현명한 사람을 좋아하지 못한 까닭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다만 그 현명한 이를 능히 좋아하지 못한 까닭에 충(忠)·사(邪)·선〔臧〕·악〔否〕을 아득히 분별하지 못하였고,
소원(疎遠)한 신하들은 모두 믿지 못할 것으로 돌려버렸으며, 다만 외척붙이만이 친근하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소인은 이(利)를 보면 의(義)를 잊어버려 비록 부자간이라고 오히려 틈이 나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인데
하물며 외척 권속들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를 깨달은 군자라야만 비로소 임금을 아버지와 같이 사랑할 수가 있어서, 절개를 지키고 의에서 죽을 수가 있는 것인데,
어찌 친하고, 소원한 것이나, 멀고 가까운 구별이 있겠습니까.
이로써 아뢴다면 임금의 외척은 재주와 그 덕망이 겸비하였거나 충성이 현저하게 드러나서
그 때의 청론(靑論)의 종주(宗主)가 되는 이가 아니라면 끝내 그에게 나라의 정사를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그들은 은혜로써 무마하고, 그 재주와 능력을 적절하게 등용하되 그들에게는 그 녹(祿)만은 잃지 않게 하는 것이
본래 외척권속들을 가르치는 선책(善策)이며, 겸손하여 물러나되 스스로 분수를 지키며,
요직에 있지 아니 하고 가족을 보호하여 한 집안을 온전하게 하는 것은 역시 친척들이 스스로 처신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훌륭한 일입니다.
번굉(樊宏)(한(漢) 광무(光武)의 외숙입니다.) 은 말하기를, "부귀가 가득 차서 넘쳐 흐르면 그것을 끝까지 잘 보존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직 없다.
나도 영화와 권세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천도(天道)는 가득 차 넘치는 것을 싫어하고 겸양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니,
전세(前世)의 귀척(貴戚)들이 모두 다 밝은 경계가 되는 것이다.
몸을 보호하고 온전히 하는 일이 어찌 즐겁지 아니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굉은 겸손하고 유순하며, 두려워하고 삼가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처신하여 종족(宗族)은 그 덕화에 물들어 일찌기 범법한 일이 없었으며,
영화와 총애를 종신토록 받았고, 자손들은 그 남은 경사를 받았습니다.
후세의 임금으로서 외가를 보존시키려고 하는 이는 마땅히 이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외척이 권력을 탐내고 세도를 부리기를 즐겨하여, 그칠 줄을 모르고 뻗쳐나가 나라를 위태롭게 하거나,
집안을 패망하게 하는 이도 역시 이것을 본받아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바르게 고치는 것이 옳습니다.
◆ 다음은 환관 · 내시를 대하는 데에 근엄해야 한다는 말씀
○ 「시경」에 이르기를, "교훈도 깨우침도 안되는 것은 부녀자〔婦〕와 환관〔寺〕의 말이다." 하였습니다. (대아(大雅) 첨앙(瞻仰)편)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시(寺)는 환관(宦官)의 뜻이다.
그 말이 비록 많아도 가르치고 깨우치는 이익이 있지 아니한 자는 오직 부인들과 내시(內侍)일 뿐이다.
어찌 그를 가까히 할 수가 있겠는가.
대개 이들 둘은 항상 서로 의지하여 간사한 짓을 일삼는 것인데, 아울러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구양공(歐陽公)이 일찌기 말하기를, '환관들의 끼치는 화는 여자를 총애하는 일보다도 더 심하다.' 하였으니, 그 말이 대단히 적절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로서 가히 경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 공씨(孔氏)는 말하기를, "환관은 임금을 친히 가까히 받드는 자이므로,
평범하고 용렬한 임금은 그 나이 어릴 적에 친숙히 익힌 습관과 아침 저녁으로 심부름시키던 것으로써,
찾아가서 묻는 것을 기탄〔忌憚〕없이 하며, 은혜와 친근한 것만 즐겨하는 기색이 있다.
또한 그 내시(內侍)는 궁중 깊숙히 오래도록 거처하여서 옛 제도에 자못 밝고 임금의 뜻을 잘 탐지하여 알며,
때로는 혹 안색을 화기있게 하기도 하고, 용모를 후하게 하기도 하여, 꾀를 숨기고 간교를 품으며,
때로는 혹시 민첩하게 빨리 대하기도 하고, 기민한 재주로 간교를 꾸미며,
진실을 어지럽게 하여 드디어 보고 듣는 것을 혼미하게 하는 것인데, 어리석은 임금은 이런 자를 신임하여 맡기게 된다.
나라가 멸망하는 것이 이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씨의 말은 환관들의 생각과 태도를 대단히 잘 밝힌 것입니다.)
○장자소(張子韶)는 말하기를, "환관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나라의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요(堯)·순(舜)의 환관은 전(典)과 모(謨)에 알려져 있지 않고, 삼왕(三王)의 환관도 역시 서(誓)와 고(誥)159)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수조()160)가 제(齊)나라에서 알려졌기 때문에 제나라는 어지러워졌고,
이려(伊戾)161)가 송(宋)나라에서 알려졌기 때문에 송나라는 위태롭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 당(唐)나라 환관 구사량(仇士良)162)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게 되어 그 무리들이 사가(私家)로 전송하였는데,
사량이 권세와 총애를 오래토록 변치 아니하고 더욱 더 받을 수 있는 술법을 가르쳐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잠시라도 한가롭게 해서는 안된다.
항상 사치로써 그 이목(耳目)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하되, 날로 새롭게 하고 달고 성대하게 하여, 다시 다른 일에 관심이 미칠 여가가 없게 하여야만 한다.
그렇게 하여야만 가히 제 뜻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가 조심해서 황제가 책을 읽고 유학(儒學)하는 신하와 친근하게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가 전대(前代)의 흥망을 보고 속심으로 근심하거나 두려워 할 줄 알게 되면 우리 무리들은 푸대접을 받게 되며,
물리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니, 그 무리들은 감사해 절하고 돌아갔습니다.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사량(士良)의 이른바 '가히 뜻대로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그렇지 않다.
대저 임금이 덕을 닦고 학문을 강론한다면, 곧 천하가 안정하여 곤충이나 초목이라도 모두 그 있을 바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좌우에 있는 신하로서 그 있을 바를 얻지 못할 수가 있겠는가.
임금이 덕을 닦지 아니하거나 학문을 강론하지 아니한다면 곧 천하가 어지럽게 되어 곤충이나 초목이라도 모두 그 있을 바를 잃게 되는 것인데
하물며, 좌우에 있는 신하로서 그 있을 바를 얻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진(秦)나라의 왕실이 위태롭자 이사(李斯)163)·조고(趙高)164)는 죽음을 당하였고,
한(漢)나라 왕업이 무너지자 장양(張讓)165)·조충(趙忠)166)도 죽음을 당하였다.
사량은 소인이기 때문에 단지 사사로운 권세를 탐내고 총애를 굳게 받는 것만으로써 영화를 누릴 줄만을 알았을 뿐이요,
나라가 패망하고 집안이 파멸하면 그 권세와 총애도 역시 보존할 수가 없게 된다는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량은 오조(五朝)에 걸쳐 정치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고 그 자신만은 비록 요행히 화를 면하였다 할지라도
집안이 파산당하는 화가 마침내 그가 죽은 뒤에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 마존량(馬存亮)167)과 같은 무리들이 권력을 탐낸다든가, 총애를 넘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만 같겠는가.
그러나 사량의 이 말은 옛부터 간사한 신하들이 미처 말하지 못한 바의 것이었다.
임금된 이는 마땅히 이 한 통의 글을 베껴서 그 곁에 놓아 두고서, 반드시 유생을 가까이 하고,
반드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친하게 다룰 것 같으면, 곧 사치로운 것이 임금을 능히 현혹시킬 수 없을 것이며,
간사스러운 아첨이 능히 그 현명을 가리울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곧 사량의 무리들에게 우롱당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환관의 화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반드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그가 임금을 친근히 하여 정이 익숙하여지거나, 그 행동이 숨겨져 차차로 젖어들어간 것이 넓고,
세월이 오래가면 임금은 선(善)을 좋아하는 마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없어지고 해이해지는 까닭입니다.
한(漢)나라에서는 <그들>에게 위력과 권세를 주었으며, 당(唐)나라에서는 병권(兵權)을 맡기게 되어,
그들을 제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던 일이 역사에 현저하게 밝혀져 있는 데, 가히 거울로 삼아 경계할 만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선왕(先王)의 가법(家法)이 엄숙하여서, 2백 년 내려오는 동안 일찌기 환관이 정치에 참여하였던 일은 없었던 것인데,
이것은 실로 근대에서는 드물게 듣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믿고 소홀히 하여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날로 새롭게 단속하고 억제하여, 궁중(宮中)과 모든 관서(官署)가 한 몸이 되어 내시의 무리들에게 사대부를 엄하고
두려운 것으로 여기게 하여야만 선왕의 가법을 가히 오래도록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이 살피건대, 이 근엄(謹嚴)의 장(章)에 집안을 다스리는〔治家〕 도가 다 갖추어져 있다고 봅니다.
대개 내외(內外)를 분별하여 예법으로써 간격을 두게 하면 남녀가 각각 그 올바른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며,
편벽된 사심을 물리치고 공명한 것으로써 임한다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이치에 맞게 되는 것이며,
정실과 첩의 구분을 엄격하게 한다면 곧 위는 화락하고 아래는 공경하게 되는 것이며,
나라의 근본을 정하는데 삼가하고 조심한다면 통일이 되어 백성들이 편안하게 될 것이며,
친척이나 권속들은 겸양하는 덕으로써 가르친다면 의리가 정당해지고 은혜가 융숭하게 되는 것이고,
환관들을 늘 정당한 법규로써 단속하고 거느린다면 양(陽)은 자라나고 음(陰)(환관은 음류陰類 입니다.)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니,
그 강령(綱領)은 예의로써 간격을 두고 공도(公道)로써 임하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예의가 엄정하지 아니하거나, 마음이 공평하지 아니하다면 곧 좋은 말이나 잘한 정사가 모두다 구차스럽게 글월에 쓰이는 수식어가 될 따름입니다.
이른바 예의를 엄정하게 한다는 것은 임금이 거처하는 궁중〔宮〕이 정숙하고,
존비(尊卑)와 장유(長幼)의 질서가 정연하여 감히 그 분수를 넘지를 못하며,
친척 권속들이 삼가하고 조심하여 감히 사사로이 통하거나, 청알(請謁)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또 이른바 마음이 공평하다는 것은 안팎을 한결같이 보고, 조금이라도 편벽한데 얽매이는 일 없이,
내정(內庭)에서 선(善)한 일을 한 이나, 악(惡)을 한자나 친척들 중에서 충성된 일을 한 자나,
죄를 범한 자를 모두다 유사에 돌려서 그 상벌을 논하게 하되, 한결같이 바른 것으로 결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개 이와 같이 하여 윤리가 바로 잡히거나 은의가 돈독하게 된다면 곧 이것을 미루어 치국(治國)·치천하(治天下)를 할 수 있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정당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옵소서.
< 주 >
148) 혼()은 중문(中門)을 말하는 것이요, 시(寺)는 환관으로 즉 중문을 지키는 환관이다.
149) 중국 한(漢) 나라의 고조(高祖)가 죽은 뒤에 그의 애첩이었던 척부인(戚夫人)을
고조의 정실 황후인 여후(呂后)가 팔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빼고 혀를 자른 뒤 뒷간에 서있게 하고 사람돼지라고 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150)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 환공(桓公)으로 동(同)은 그의 이름이다.
151) 중국 서한(西漢)의 학자 정치가. 낙양(落陽) 사람.
23세에 박사(博士)가 되고 문제(文帝)에게 상주하여 예악(禮樂)을 일으키고 제도(制度)를 개혁할 것 등을 역설했다.
뒤에 좌천되어 양왕(梁王)의 태부(太傅)가 되었다가 33세로 요절했다.
저서로 신서(新書) 좌씨전훈고(左氏傳訓) 등이 있다.
152)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옷 섶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었다.
공자가 관중(管仲)의 공로를 칭찬하여 '만일 관중이 아니었더라면 중국 땅이 오랑캐의 나라로 되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이다.
153) 육관(六官)의 장(長). 천관(天官)의 장으로서 궁중의 일을 통할한 총재(宰),
지관(地官)의 장으로서 내정(內政)과 교육을 통할한 사도(司徒),
춘관(春官)의 장으로서 제사·예악을 통할한 종백(宗伯),
하관(夏官)의 장으로서 군사를 장악한 사마(司馬), 추관(秋官)의 장으로서 사법·외교를 장악한 사구(司寇). 동관(冬官)의 장으로서
영조(營造) 공작(工作)을 장악한 사공(司空) 등을 말한다.
154) 중국 한(漢)나라 관진(觀津) 사람.
여태후(呂太后) 때 양가(良家) 자녀로 선발되어 궁녀(宮女)로 들어 갔다.
뒤에 태후가 궁인(宮人)들을 축출하여 제왕(諸王)들에게 하사 할 때 대(代)로 가서 대왕(代王)의 총애를 받아 경제(景帝)를 낳았다.
문제(文帝)가 즉위 하자 황후(皇后)가 되었다.
155) 중국 한(漢)나라 사람. 고조(高祖)를 좇아서 항우(項羽)와 싸웠으며 문제(文帝) 때에 재상이 되었다.
위인이 청렴 정직하였는데 경제(景帝)가 즉위한 뒤로 조조(晁錯)가 용사(用事)하자 그를 미워하며 분통이 터져 죽었다.
156) 한(漢) 성제(成帝)의 연호(年號). BC.31∼28.
157) 중국 전한 시대의 학자. 자는 자정(子政)). 선(宣) 원(元) 성(成) 3제(帝)를 섬겼다.
기원전 26년 광록대부(光祿大夫) 때에 왕의 칙명을 받아 궁중의 장서를 바탕으로 하여 여러 가지 책의 교정을 시작하였다.
저서로는 설원(說苑) 신선(新序) 등이 있다.
158) 중국 전한(前漢) 말기의 참주(僭主). 자는 거군(巨君).
책모(策謨)로써 평제(平帝)를 죽이고 한조(漢朝)를 빼앗아 즉위하여 신(新) 나라를 세웠으나
내치와 외교에 모두 실패하고 재위 15년만에 멸망하였다.
159) 모두 중국 고전(中國古典)인 서경(書經)에 있는 편(篇)의 이름으로
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 감서(甘誓) 탕서(湯誓) 강고(康誥) 중훼지고(中之誥) 등을 가리킨다.
160) 중국 춘추(春秋)시대 제(齊)나라 사람. 제환공(齊桓公)의 내시(內侍)로서 매우 총애를 받았다.
뒤에 환공이 죽자 역아(易牙) 개방(開方) 등과 함께 난(亂)을 일으켰다.
161) 중국 춘추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성은 혜장씨(惠墻氏). 이려(伊戾)는 그의 이름이다.
내시(內侍)로서 태자(太子) 내시의 장(長)을 맡았는데 늘 태자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태자를 모함하여 죽게 하였다가 뒤에 처형당하였다.
162) 중국 당(唐)나라 흥녕(興寧) 사람. 자는 광미(匡美), 20여년
동안 권좌에 있었는데 성품이 잔인 무도하여 많은 사람을 살해 하였다.
163) 중국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 사람. 진(秦)의 객경(客卿)이었으며 그 후 승상(丞相)이 되었다.
시황제(始皇帝)를 도와서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을 확립하고
분서(焚書)에 의하여 사상통일을 강행하였으며 또 소전(小篆)을 만들었다.
뒤에 조고(趙高)의 모함에 의하여 함양(咸陽) 시중에서 처형당하였다.
164) 중국 진(秦) 나라의 환관(宦官).
시황제(始皇帝)가 죽자 거짓 조서를 꾸며 시황제의 장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우둔한 호해(胡亥)를 제 2세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어 이사(李斯)를 죽이고 정승(政丞)이 되어 온갖 횡포한 짓을 많이 하고 음모를 꾸미다
나중에 자신은 처형 당하고 삼족이 멸하였다.
165) 중국 후한(後漢) 영천(穎川) 사람. 영제(靈帝) 때 중상시(中常侍) 벼슬을 지냈다.
임금에게 권유하여 세금을 많이 걷우게 하고 궁실(宮室)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다.
영제가 죽은 뒤 하상(河上)으로 도망하다가 군사가 급히 추격하자 물에 빠져 죽었다.
166) 중국 후한 시대 사람으로 중상시(中常侍)를 역임했으며 도향후(都鄕候)에 봉해졌다.
성격이 잔학하고 탐욕이 많았는데 뒤에 원소(袁紹)에게 붙잡혀 처형 당하였다.
167) 중국 당(唐)나라 하중(河中) 사람으로 자는 계명(季明)이다.
본래는 환관(宦官)이었는데 소현명(蘇玄明)의 난(亂)을 평정하는데 있어 최고의 공훈을 세워 2백호(二百戶)를 봉하였다.
뒤에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일부러 권좌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한직을 구하여 나갔으며 이어 조용히 벼슬에서 물러났다.
제7장. 절 검(節儉)
신이 살피건대, 정가(正家)하는 범절은 이미 앞 장(章)에서 다 갖추어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절검(節儉)은 무엇보다도 임금에게는 가장 미덕(美德)이 되는 것이므로 표출하여 밝혔습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우(禹)임금은 나로서는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는 것이다.
먹는 음식은 간략〔菲〕하였으나 귀신에게는 효성을 다 하였고,
의복은 거칠었으나 불의(衣)와 면관(冕冠)은 아름답게 하였으며, 궁실(宮室)은 허술하였으나 봇도랑〔溝〕에는 힘을 다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우(禹)임금은 나로서는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논어論語)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간(間)은 벌어진 틈이니, 그 벌어진 틈을 가리켜 논의하여 비난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비(菲)는 소박하다는 뜻이다.
귀신(鬼神)에게 효성한다〔致孝〕는 것은 제사지내는 일을 풍족하고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의복(衣服)이란 늘 입는 보통 옷을 말한 것이다. 불()은 무릎을 가리는 것이니, 가죽으로 그것을 만들었다.
면(冕)은 머리에 쓰는 관인데, 모두 다 제사지낼 때 입고 쓰는 것이다.
봇도랑〔溝〕은 전답(田畓) 사이에 있는 도랑이다. 그것으로써 전답의 경계를 바르게 하고, 가뭄과 장마에 대비한다.
혹시 풍족하거나 혹시 검소한 것은 각각 그의 당한 대로 좇아서 적합하게 하였으므로, 벌어진 간격을 논의하거나 비난할게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번 다시 말하여 깊이 찬미하였던 것이다." 하였습니다.
○ 양씨(楊氏)는 말하기를, "자기 자신을 받드는 일에 대하여는 박하게 하면서 백성들을 위하는 일에는 부지런히 힘썼으며,
종묘(宗廟)와 조정(朝廷)에는 입는 예복은 아름답게 꾸몄으니, 이는 천하를 가지고서도 사사로운 물건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므로,
그 어찌 비난할만한 틈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주공(周公)은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비천한 옷을 입고 강공(康功)과 전공(田功)을 이룩하였다." 하였습니다. (주서(周書) 무일(無逸))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비천한 옷〔卑服〕은 이른바 나쁜 의복이다.
강공(康功)은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는 공덕이요, 전공(田功)은 백성을 기르는 공덕을 말한다.
문왕(文王)은 의복을 받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성품이었고, 오로지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기르는 데만 그 뜻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비천한 옷이라고 한 것은 대개 일단(一端)을 들어 말한 것이다
궁실(宮室)과 음식 등을 받들기도 박하게 하였다는 것을 이것으로써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천자에 즉위한 지 23년이나 되어도 거처하는 궁실(宮室)이나,
새 짐승을 놓아 기르는 동산이나, 수레와 타는 말이나, 의복과 부리는 하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다 증가시킨 것이 없어서
불편한 것이 있어도 번번히 늦추어서 백성들을 이롭게 하였다.
일찍이 임금이 노대(露臺: 지붕이 없는 높다란 집)를 지으려고 목수를 불러들여 설계하도록 하였는데,
비용이 백 금(百金)이나 들게 되었다. 그러자 상제가 말하기를, "백 금이라고 하면 중산층(中産層) 열 집의 재산에 해당된다.
내가 선제(先帝)의 궁실을 받들고서도 항상 그것을 두려워하고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데, 어찌 노대를 지울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는 검은 빛깔의 검소한 비단 옷〔戈〕를 입었으며, 신부인도 땅에 끌리지 않는 옷을 입었고,
휘장과 장막에는 무늬있는 수를 없이 하여 진실하고 순박한 것을 천하에 앞장서서 보여 주었습니다.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문제가 한 이 말에는 두 가지 선(善)한 뜻이 있다.
첫째로 백 금이 중산층 열 집의 재산에 해당된다고 말한 것은 백성들의 생활해 가는 어려움을 염려한 것이며,
다음으로 내가 선제(先帝)의 궁실을 받들고 항상 두려워하고 부끄럽게 될까 여긴다고 말한 것은,
조종(祖宗)의 창업한 어려움을 생각한 것이다.
임금이 항상 이와 같은 마음으로써 있다면 비록 사치를 하도록 권고하여도 역시 하지 아니할 것이다.
무릇 여러 대를 이어 내려오는 임금 중에는 이목(耳目)의 오락만을 자행하는 이가 많이 있는 것이다.
이는 진정 얼마 아니되는 재용(財用)도 생민(生民)의 고혈(膏血)이고 자기가 거처하는 곳이
모두 다 선세(先世)에 대대로 쌓아온 나머지의 공덕 때문임을 알지 못하는 연고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문제가 한 이 말을 두 가지 선(善)한 뜻이 있다. 한 것이니,
가히 후세(後世)에 본받을 법이 될 만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무제(武帝) 때에는 천하가 낭비하고 사치하여 말단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상제가 묻기를,
"내가 백성들을 교화시켜 선량하게 만들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없겠는가, 하니
동방삭(東方朔)168)이 대답하기를,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 등 상고(上古) 때의 일들은
수천 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이 바라옵건대, 가까이 효문황제(孝文皇帝) 당시 덕이 높고 나이가 많은 이들이 모두 다 듣고 본 일들을 진술하겠습니다.
귀히 천자가 되어 부(富)가 사해(四海)를 소유하였는데도 스스로는 검은 빛깔의 검소한 비단 옷〔戈〕을 입었고,
발에는 가죽신(革)을 신었으며, 가죽 띠를 칼 띠로 삼았고, 청포를 바닥에 까는 자리로 만들었으며,
병장기에는 칼날이 없었고 의복〔縕袍〕에는 무늬가 없었습니다.
글 올리는 상서(上書) 주머니를 모아서 대궐의 휘장을 만들고, 도덕을 아름다운 것으로 삼았으며, 인의(仁義)를 주칙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 모습을 우러러보고 그것을 풍속으로 이루어 소연(昭然)히 교화되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토목(土木)에다 무늬와 수를 입히고 마구간의 말에다 아름다운 비단으로 엮은 너울을 씌우며,
궁녀들은 구슬과 보석을 드리우며 빛나는 장식품으로 꾸미고 진기하고 괴이한 것들을 수집하고 있으니,
황제께서는 이 같이 방탕하고 사치스러우면서 백성들에게는 홀로 사치를 하지 못하게 하며
농사짓는데 실패하지 않게 하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진심으로 신(臣)·삭(朔)의 계책을 쓰실 수가 있다면 이것 저것의 휘장을 걷어내어 네 거리에서 불살라 없애버릴 것이며
주마(走馬: 잘 달리는 말)를 내보내 다시 쓰지 아니한다는 것을 보일 것 같으면
요(堯)·순(舜) 때의 융성한 것에 견줄 만큼 다스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동방삭은 가히 백성을 교화시키는 근본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의 검소한 생활이 저와 같았는데, 어찌 풍속이 두터워지지 아니할 수가 있겠으며,
무제(武帝)의 사치스런 생활이 이와 같았는데, 어찌 풍속이 박해지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삭이 가까이 효문(孝文) 때의 일을 진술한 것은 임금을 사랑하는 충정에서 이었고,
다스림의 정확한 의론을 말하였는 데도 무제는 그것을 듣지 아니하였고,
마침내 사치로써 그 나라를 피폐하게 하였으니 애석 하도다." 하였습니다.)
이윤(伊尹)은 말하기를, "너의 검소한 덕을 삼가하여 오로지 장래를 위하는 영원한 계획을 생각하라." 하였습니다.
(상서(商書) 태갑(太甲) ○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훈계한 말)
진씨(眞氏)는 말하기를, "이윤이 재상인 아형(阿衡)169)으로 있을 때에 태갑이 어질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윤이 그를 훈계한 바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대개 검소하면 마음이 작아 생각하는 것이 원대해지고, 사치로우면 마음이 커서 계책이 소홀해지는 것이다.
이 때에 태갑은 욕심으로 법도를 무너뜨리고, 방종으로 예절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마음이 두 가지의 가린바 되니 마치 뜬구름이 해와 달을 가리는 것 같아서 이 훈계가 충성스러운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인(仁)에 처하고 의(義)에 옮겨서 그 본심이 다시 밝아지자,
병을 얻은 근원이 분명히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서 아름답게 끝을 맺어 역사에 밝게 빛나게 되었으니,
이윤의 훈계한 공로가 그 어찌 적은 것이 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검소하다는 것은 덕의 공순한 것이며, 사치라는 것은 악의 큰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검소해 진다면 마음이 항상 방탕하지 아니하여, 경우에 따라서 스스로 적합하게 할 수 있으며,
사치로와 진다면 곧 마음이 항상 바깥으로 치달아 날마다 방자하게 되어 만족한 것이 없는 까닭입니다.
지금 집 안에서 자손의 예를 들어 말한다면 선대(先代)의 조상이 부지런히 일해서 산업을 이룩한 것을
자손이 검소하게 절약하여 간직하는 이는 여러 대에 전하여도 가업(家業)이 쇠하지 않는 것이나,
한 번 사치스럽고 방종한 사람이 나오면 방자스럽게 향락을 일삼아 여러 해를 두고 쌓아온 재물을 하루아침에 탕진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 집안의 흥하고 패하는 것은 그 관련되는 바가 적은 것이나,
국가의 경우라면 조종이 쌓아올린 공은 한 집안을 일으키는데 비유할 수 없는 것이며,
부고(府庫)에 소장(所藏)된 재물은 추호라도 생민의 고혈(膏血)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니
어찌 감히 망령되게 사치를 일삼아서 천재(天財)를 낭비하고 민력(民力)을 곤궁하게 하며,
선조(先朝)에서 이룩한 왕업을 패망토록 하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선왕(先王)들이 여러 대에 걸쳐서 절검을 하여 집안을 거느렸고,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하였기 때문에, 재물에는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고에 쌓인 것이 묵고 묵었으나 연산(燕山) 이후부터는 궁중에서 쓰이는 용도가 날로 늘어나고 사치로와져서,
선왕(先王)이 끼친 옛 기풍은 따르지 아니하고, 그 뒤부터는 우물쭈물 묵은 관습에 젖어서 기강을 바로 잡는 일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쓰는 비용은 날로 위축되어 지금은 궁중에서도 특별하게 호화로운 사치의 행습이 없고,
국내에서도 별로 때 아닌 토목(土木) 공사를 하는 일이 없는데도 한 해의 세입이 능히 한 해의 지출을 지탱해 낼 수가 없어서,
여러 대를 걸쳐 쌓아온 저축은 앞으로 다 고갈되고 말게 되었습니다.
만일 기근(飢饉)의 재해나 병화(兵禍)의 염려가 있게 된다면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궁중에서 입는 의복도 이미 국초(國初)와 달라져 절검하던 것을 시범해 보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평민이 사는 여항(閭巷)에서도 사치하는 풍조가 이루어져서 아름답고 화려한 의복이나 진귀하고 맛있는 성찬(盛饌)으로써
그 재능과 기교를 다투고, 미천한 천민들도 비단 위에서 잠자고 거처하며, 위아래의 규율이 없고, 낭비가 적지 아니하여
인심은 날로 방탕해 지고 백성들의 기력은 날로 곤궁해지니 만일 스스로 성상께서 이것을 고치지 아니한다면
나라가 점점 나라꼴이 되지 아니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고치는 방법은 일반적인 법규로써 처리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위에서부터 요(堯) 임금이 지붕을 띠풀로 잇고 계단을 흙으로 쌓았던 것을 마음으로 삼고
내전(內殿)에서는 마후(馬后)가 몸소 무명옷을 입었던 것을 모범으로 삼아서,
궁중의 쓰임새를 절약하되 검약(儉約)하는 제도는 궁중〔掖庭〕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대부 가정에서 보고 느껴 본 받도록 하고 곧 서민(庶民)에게까지 도달하게 하여야 할 것이니,
그래야만 고질된 관습을 개혁할 수가 있을 것이며, 천재(天財)를 유실하지 아니할 수 있고, 민력은 점점 펼쳐 나가게 될 것입니다.
오거(伍擧: 중국 춘추시대 초(楚)대부)가 이르는 말에, "사욕이 많으면 덕의(德義)가 적어지고,
덕의가 행해지지 않으면 가까운 사람은 어수선하여 흩어지고, 먼 데 사람은 크게 사이가 벌어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옵소서.
< 주 >
168) 중국 한(漢) 나라 염차(厭次) 사람. 자는 만청(曼). 문장을 잘하였으며 해학(諧謔)을 즐겼다.
무제(武帝) 때에 시중(侍中)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늘 해학과 풍자로써 임금을 감동시켰다.
속설(俗說)에,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 먹어 죽지 않고 장수(長壽)하였다 하여 「삼천 갑자(甲子) 동방삭」이라고 일컫는다.
169) 중국 은(殷)나라 때 벼슬 이름. 아(阿)는 의(倚), 형(衡)은 평(平)의 의미로서,
이윤(伊尹)은 탕(湯)이 의지하여 천하를 평정케 한 분이므로 그의 벼슬 이름을 이렇게 호칭했다고 한다.
제8장. 정가 공효(正家功效)
신이 살피건데, 임금이 정가(正家)하는 효과는 부부간의 잠자리 사이에서 쌓이고 쌓이면 그것이 나라의 경내에 넘쳐 흐르게 되고,
그러면 호령을 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풍속을 쉽게 개량할 수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끝을 맺겠습니다.
한 집안이 인(仁)하다면 온 나라가 인해지고, 한 집안이 겸양하다면 온 나라가 겸양해 진다. (「대학」하동)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이것은 교화(敎化)가 온 나라에 이루어지는 효과에 관해서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시」에 이르기를, "그 법도에 어긋남이 없으니 사방의 나라를 바로 잡으리라." 하니
부자(父子)·형제(兄弟)가 본을 받아야만 백성들이 본받게 된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시(詩)는 조풍(曹風) 시구(鳩)편이다." 하였습니다.
○ 묻기를, "부자·형제가 본을 받아야만 백성들이 본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요(堯)·순(舜)은 그 아들을 감화시키지 못하였으며, 주공(周公)은 그 형과 아우를 화목하게 할 수가 없었으니,
이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하였더니, 주자는 말하기를, "성현(聖賢)은 그 보편적인 경우를 논하는 것이요,
요·순과 주공(周公)은 그 변칙에 처하였던 것이다.
천하를 그 아들에게 주지 아니하고 어진 이에게 전해 준 것을 바로 이러한 변칙을 잘 처리한 것이다.
만일 주공이 관숙(管叔)170)을 죽이지 아니하였다면 주(周)나라가 어지럽게 되지 아니하였겠는가.
이것은 부득이 하여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보편적인 경우로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가 안가는 것이다.
아버지로서 고수()171)와 같은 이가 있었고 형과 아우로서 관숙(管叔)과 채숙(蔡叔)172)과 같은 이가 있었던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변칙적인 경우를 논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시(詩)에 이르기를, "요요(夭夭)한 복사꽃이 활짝〔灼灼〕 피었네.
이 딸〔之子〕 시집가니〔歸〕 그 집안〔室〕 화목하리〔宜〕." 하였습니다. (주남(周南) 도요(桃夭)편)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요요(夭夭)는 젊고 고운 모습이고, 작작(灼灼)은 꽃이 성하게 피어나는 모습이다.
지자(之子)란 이 자식이라는 뜻인데, 시집가는 사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부인이 시집가는 것을 귀(歸)라고 한다.
의(宜)는 화순하다는 뜻이요, 실(室)은 부부가 거처하는 곳을 말한 것이며, 가(家)는 한 집안을 말한 것이다.
문왕(文王)의 덕화가 집안으로부터 나라에 미쳐서 남녀가 바르게 되고 혼인을 제 때에 하게 되었기 때문에
시인이 보는 것으로 흥(興)을 일으키고, 그 여자의 현숙한 것을 감탄하여
그가 반드시 그 실가(室家)를 화목하게 할 것을 알겠다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남쪽에 큰 교목(喬木)이 있어도 쉴 수가 없고,(한시(韓詩)에는 사(思)로 쓰였습니다.)
한수(漢水)에 물놀이하는 여자가 있어도<애정을> 구할 수 없네. 한수는 드 넓어 헤엄칠 수가 없고,
양자강은 길어서 뱃놀이〔方〕 할 수가 없어라." 하였습니다. (주남(周南) 한광(漢廣)편)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사(思)자는 어조사(語助辭)이다. 방(方)은 뱃놀이를 말한다.
문왕의 덕화가 가까운 데서부터 먼데로 미쳐서 먼저 양자강과 한수간에 미치게 되어,
그 음란한 풍속을 그것으로써 변하게 하였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놀이하는 여인들도 바라보면
그 단정하고 장엄하며 정숙한 것이 하나도 그 전날에는 다시 구해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키가 큰 교목(喬木)으로써 흥(興)을 일으키고, 양자강과 한수를 비(比)하여 반복해서 그것을 읊고 감탄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정제〔肅肅〕한 토끼 그물〔〕은 말뚝치는 소리에 쩡쩡〔丁丁〕울리네.
용감한〔赳赳〕무사는 공(公)·후(候)의 간성〔干城〕이네." 하였습니다. (주남(周南) 토저(兎)저편)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숙숙(肅肅)이란 정제한 모습이요, 저()는 그물이다.
정정(丁丁)이란 말뚝을 치는 소리이며, 규규(赳赳)란 씩씩한 무사의 모습이다.
간(干)은 방패이므로 간성(干城)이란 모두 외적을 막아내고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덕화(德化)가 행하여 져서 풍속이 아름다워지고 현명하고 재능있는 이가 많아져서,
비록 그물로써 토끼를 잡는 야인(野人) 일지라도 그 재주가 가히 쓸 나한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그 일에 따라 흥을 일으키고, 그것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문왕(文王)의 덕화가 성대하였다는 것을 가히 짐작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주남(周南)은 정가(正家)의 시(詩)입니다.
그러므로 3편의 시를 인용하여 정가의 효과를 밝혀 드러내었습니다.
대개 남녀간이 바르게 됨으로써 양자강과 한수간에 음란하던 풍속을 변화시키었으며,
현명하고 재능있는 이가 많아져서 야인이라도 간성(干城)이 될 만한 자질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덕화한 것이 대단히 깊었던 것입니다.
그 근본을 미루어 살펴보면 이는 문왕이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은 공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는 공적이 쉬지 아니하고,
오랫동안 계속하게 된다면 곧 그 훈증(熏蒸)한 것이 몸에 투철하고, 그 융액(融液)이 널리 두루 퍼져서,
저절로 그만 두지 못하게 되는 것인데, 지력(智力)으로는 능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직 그 뜻이 정성스럽지 아니하거나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지 아니하기 때문에,
정가하는 데까지 능히 미루어 나갈 수가 없는 것이며,
집 안이 바르지 아니하기 때문에 능히 치국(治國)하는 데까지 미루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실로 뜻을 정성스럽게 하여 마음을 바르게 가다듬을 수가 있다면 집안과 나라를 다스리기는 쉬운 것입니다.
옛날의 임금들 가운데는 실로 집 안은 바르게 하지 못하면서도 그대로 나라를 다스려 나갔던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같은 이는 궁 안에 여섯 사람의 총애하는 여자를 두고 있었으면서도,
관중(管仲)을 신임하여 여러 제후(諸侯)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궁중에서 추잡스럼 행동을 많이 하였음에도 위징(魏徵)173)을 등용하여 천하를 다스렸던 것입니다.
비록 인의(仁義)를 빌려서 일시적인 안정상태는 획득할 수가 있었으나, 비유하여 말할 것 같으면 마치 근원이 없는 물과 같아서,
비록 그 물이 넘쳐흐를지라도 말라버리기 쉬운 것이며,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아서, 비록 무성할지라도 말라죽기가 쉬운 것입니다.
환공은 그 자신이 죽어서 장례를 지내지 못하여 시체에서 생긴 벌레가 문 밖에까지 나왔었으며,
제(齊)나라의 혼란은 여러세대에 걸쳐서 안정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태종(太宗)은 비인(非人)에게 부탁하여 그 무덤 앞에 심은 묘목(墓木)이 채 아름드리가 되기도 전에 여자들이 모여
짐승 같은 음란을 피워 천륜을 더럽혔고, 자손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 어찌 삼 대(三代)의 성왕(聖王)들이 자신으로부터 집안에 미치고, 집안으로부터 나라에 미치며,
나라로부터 천하에 미치게 하되, 근원이 있고 근본이 있어서 물줄기가 멀리 흘러서 물결이 성하며,
꽃이 아름다워서 열매가 많이 열리는 것과 같겠습니까?
특히 임금만이 그러할 뿐 아니라 남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임금에게 극진히 충성을 다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끼쳐 주려고 하는 자가 혹시 언어의 학문으로써 말로서만 느끼고 깨달을 것을 구하려 하되,
한 번도 자기 몸을 반성하지는 아니하며, 그 행동을 살핀다면 부끄러움을 면할 수가 없고
그 사람의 집안을 관찰해 볼 것 같으면 화목하고 엄숙하지 아니하여, 남자는 욕심에 끌리어
그 강직한 기품을 잃고, 부녀자는 버릇없이 말하여 그 온순한 것을 잃은 사람이 많은 것이니,
그 어찌 성실로써 능히 임금을 움직일 수가 있겠으며, 혜택을 백성들에게 미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이 궁중 안을 바로 잡지 못하고, 백성을 교화(敎化)시키려고 한다거나, 신하된 자가 그 처자를 바로 잡지 못하고
임금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밭을 갈지 아니하고도 수확을 걷우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어진〔仁〕체하여 잠시나마 일세(一世)를 구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장구하게 가리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국가(國家)의 근본을 바로 잡으시고,
힘껏 선(善)한 도를 행하셔서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뜻으로써
주관예악(周官禮樂)의 제도를 행하신다면 만세(萬世)에 큰 다행일까 합니다.
< 주 >
170)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제3자(子)로 무왕(武王)의 아우이며, 주공(周公)의 형이다.
이름은 선(鮮)인데 관(管)에 봉하였으므로 관숙(管叔)이라 칭한다.
뒤에 반란(叛亂)을 일으켰으므로 주공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171) 중국 우(虞)나라 순(舜) 임금의 아버지 이름.
고수()란 눈이 없는 소경을 지칭하는 말인데 순 임금의 아버지가 눈은 있으나 현우(賢愚)를 분간하지 못하여
소경이나 다를 바 없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불렀다.
172) 중국 주문왕(周文王)의 제5자(子)로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은(殷)을 정벌하고 주(周)를 세운 뒤 채(蔡)에 봉하였으므로 채숙이라 칭한다.
뒤에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하자 채숙이 관숙으로 더불어 의심을 갖고 무경(武庚)과 어울려 반란을 일으키므로
주공이 무경을 처형하고 채숙을 곽린(郭)으로 추방하여 거기서 죽었다.
173) 중국 당(唐)나라 곡성(曲城) 사람으로 자는 현성(玄成)이다.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며 고조(高祖) 때에 비서승(秘書丞)으로 발탁되고
태종(太宗) 때에는 간의대부(諫議大夫),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다.
지략과 담력이 있어서 바른 말을 많이 하였고 당나라 정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로는 군서치요(群書治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