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átōn(플라톤)
플라톤 이야기
플라톤(고대 그리스어: Πλάτων, Plátōn, "넓은, 어깨 폭이 넓은";, 영어: Plato /ˈpleɪtoʊ/;
기원전 428년/기원전 427년 또는 기원전 424년/기원전 424년 ~ 기원전 348년/기원전 347년)은
서양의 다양한 학문에 영향력을 가진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고,
현대 대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아카데메이아’를 아테네에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그의 실제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에서 폭넓은 주제를 강의하였으며,
특히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등 많은 철학적 논점들에 대해 저술하였다.
플라톤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대화편》이다.
비록 일부 편지들은 단지 그의 이름을 붙여서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플라톤에 의한 진짜 《대화편》은 모두 온전하게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의 합의에 따라, 그리스인들이 플라톤의 것으로 생각하는
‘알키비아데스 l과‘클레이토폰’ 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의심스럽거나
또는 ‘데모도코스’와 ‘알키비아데스 Il’ 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대개는 위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편지들은 대개 거의 모두 위조된 것으로 여겨지며, 일곱번째 편지만이 예외로서 위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있는 내용과 주장 중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견해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견해인지에 대한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것도 글로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종종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플라톤의 많은 아이디어들, 적어도 그의 초기 연구들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것을 빌려오거나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가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크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라고 평했다.
플라톤은 아테나이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우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관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키레네 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었고,
피타고라스 학파를 접하며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어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라케스〉 등을 쓰고,
40세에 귀국하여 〈고르기아스〉, 〈대(大)히피아스〉, 〈소(小) 히피아스〉를 썼다.
그는 그의 이상 국가를 실현해 보고자 친구인 디온의 권고로 시켈리아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초청에 응하였으나,
그의 과두 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얻어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후에 그의 저작을 본 퀴레네 사람 덕분에 구출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아카데메이아 학원을 건립하고 제자 양성에 전력하면서 저작에 몰두하였다.
〈향연〉, 〈파이돈〉, 〈국가〉, 〈파이드로스〉 등 주요 저술이 여기서 이루어졌고, 이 학원은 529년까지 계속되었다.
대학교의 초기 형태인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기원전 357년 디오니시오스 2세의 간청을 받자 망설이던 끝에 다시 시켈리아로 가서 이상 정치를 펴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년 만에 귀국하여 〈법률〉 등 몇 개의 저서를 더 쓴 뒤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파이돈부터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상에서 독립하여 이데아론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학설을 제창하였다.
우리가 삼각형을 생각할 경우에 현실적으로 삼각형을 아무리 정확하게 그린다고 해도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그려 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한 변의 직선마저 완전하게 긋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직선, 완전한 삼각형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인정하고 계산도 하여 해답한다.
결국 현실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현실의 삼각형은 이 이데아를 인정하는 까닭에 삼각형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수학의 대상뿐만 아니라 선(善)의, 미(美)의, 용기의 이데아라는 것도 거기에서 생각해 낼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완전한 선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겠으나 완전한 선의 이데아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보다 이것이 낫다고 하는 비교는 할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꽃은 조락(凋落)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폐허가 되어도 아름다움 자체는 그것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미의 이데아이다.
이 미의 이데아에 현실의 개체가 의탁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개체가 된다. 즉 미의 이데아는 아름다운 개체의 원인이다.
사람의 영혼은 원래 이러한 이데아계(界)에 있었는데 육체를 갖추고 이데아를 망각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진·선·미를 인식하는 것은 영혼이 원래 살던 이데아계를 상기하는 것과 같다는 상기설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의 교육관’ 목적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된 충동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과, 육체와 결합되지 않으며
불사적인 순수한 이성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이지만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완전 지선의 실체계인 이데아를 직관할 수 없으며 세상에 탄생하여 육체 속에 듦으로써 이데아를 잊고 있다.
이 잊었던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상기'하여(상기설),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 부분의 덕이 지혜이며, 정욕적 부분의 덕을 절제,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의 덕을 용기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름(dikaiosyne, 또는 '정의')란 여러 덕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이러한 덕론을 통하여 인간 개인의 윤리학을 논하였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사회 전체의 윤리설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그의 '국가(Politeia)'다.
플라톤의 교육방법
그는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성은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 정치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철인 정치
철인 정치론을 전개한 플라톤은 기본적으로 엘리트에 의한 지배를 옹호한다.
일반적으로 귀족정은 평등사회가 아닌 신분사회를 옹호하는 데, 플라톤 또한 신분사회를 옹호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귀족정의 궁극적인 목적과 그 실현 양태는 일반적인 귀족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귀족정에서의 왕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높은 신분으로써의 도덕적 의무를 중시해야 하는 데,
그 실현은 한가지 예를 들면 왕의 사유재산의 형태로 나타난다.
플라톤은 왕의 사유재산은 오직 공익을 위해서만 쓰여야한다(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밑의 귀족들까지도 사유재산을 공유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신분의 상징인 왕이라면 그만큼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정치 일선을 담당한 일선 ‘귀족’들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 계급에 기반한 귀족 또는 세습에 의한 귀족이 아니라,
철학 지식이 충만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는 ‘지식인에 의한 독재’를 줄곧 주장해왔으며,
시민 계급에 의한 토론 정치인 아테네의 민주정을 ‘우민 정치’라고 비판해 왔다.
뿐만 아니라 그의 ‘네가지 주된 덕’(cardinal virtues)에서는 ‘조화’라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데,
‘네가지 주된 덕’에 맞는 각각의 신분이 각자 맡은 일만을 해야하며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일을 한다거나 서민이 전쟁을 한다는 것과 같은 용기를 보이는 것은 플라톤의 관점에선 ‘사회적 부조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초기 사회주의
오늘날 사회주의라고 하면 일컬어지는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전제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만,
인간은 정치·사회적으로 독립될 수 없는 개인이며, 더 나은 정치·, 사회 체제를 만드려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진리라고 설파했다.
또한 인간은 더 나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이성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 존재라는
목적론적 인간관이란 개념을 만들었기 때문에 초기 관념적 사회주의 기조의 창시자라고 알려졌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으로 계승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