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Kǒngzǐ
공자(孔子) 이야기
공자(중국어: 孔子, 병음: Kǒngzǐ, 쿵쯔) 또는 공부자(중국어: 孔夫子, 병음: Kǒngfūzǐ, 쿵푸쯔, 라틴어: Confucius 콘푸키우스,
유가철학의 비조,유교의 시조(始祖)로 떠받들어지는 고대 중국의 정치가, 사상가이다.
노나라의 무관 숙랑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공자의 자(子)는 경칭으로 '선생'이라는 뜻이 된다.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사상가,교육자이고,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시인이기도 하다.
흔히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히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정치적으로는 요순우 삼황 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유를 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 에 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魯)의 무관인 숙량흘(叔梁紇)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孔子)" 또는 "공부자(孔夫子)"로 불린다.
"공자(孔子)"의 호칭에서 "자(子)"는 성인(聖人)인 공자를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그 뒤 여러 번 추증되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에 추봉되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曲阜)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부친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모친 안씨(이름은 징재)를 맞아 공자를 낳았으나,
부친인 숙량흘(叔梁紇)과 모친인 안징재(顔徵在, 옌쩡짜이)는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었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60대 후반이였고 안징재는 13세의 소녀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후세에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공자의 조상은 주나라의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으며 공자의 3대 전에 노나라로 옮겨 왔다.
그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부친 숙량흘은 무사였다. 부친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딸만 아홉이었고 아들은 하나 뿐이었다.
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가 된 이유는 집안의 장남인 맹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되는 공자의 가계는 보통 그의 부친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숙까지 언급되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소년 시절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약288센티미터)으로 '장인'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자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기원전 549년 3세에 아버지 숙량흘이 사망하였다.
공자는 어머니 안징재를 따라 궐리로 이사하였다.
기원전 536년 결혼, 기원전 535년 어머니 안징재가 사망했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3년상을 마친 뒤 아버지 숙량흘의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으나 마을의 늙은 선생 밑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어릴 때부터 제사 흉내를 내며 놀았다고 하며 고실, 즉 예로부터의 종교의례·제도·관습에 밝았다고 한다.
이윽고 17세 때부터 말단 관리가 되어 일을 보면서 노나라의 대학에서 《시경》과 《서경》 등을 배웠고,
또 여러 가지 의식을 맡아보는 관리에게서 예법도 배웠으며, 음악도 배웠다.
공자는 《시경》과 《서경》의 저자인 주공을 청년 시절부터 사모하였고, 평생 동안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관료 생활
공자는 30세쯤 되자 관리로서의 지위도 오르고, 또한 학문도 많은 진전을 보였다.
공자는 정치는 법률보다는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주공이 다스리던 시대처럼 예의가 바르고 평화로운 세상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중국 유랑
36세 때 노나라에 삼환(맹손·숙손·이손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노나라의 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갔다.
공자도 그 뒤를 따라 기원전 517년에 제나라에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과 신하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진리를 가르쳤다.
거기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적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경공은 공자를 고문으로 용하여 이를 실시하려 했으나,
예절의 번잡함과 비현실적임을 지적하여 반대하는 대부 안영의 진언으로 좌절되었다.
이에 실망하여 2년 만에 귀국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때 중도재가 되었다.
공자는 52세가 되었을 무렵 대사구로 지위가 올랐다.
그 이듬해에는 노나라의 정공을 따라 제나라와의 강화 회의에 참석하여 제나라에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도록 하였으며,
난신인 대부 소정묘를 죽였다(기원전 496년. 실제로는 그러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때 제나라에서는 사람을 몰래 숨어들어가게 하여 노나라를 위협하려고 하였으나 공자는 그것을 꿰뚫어보고
회의 장소에 들어가려고 하는 남자를 잡아서 화를 미리 막고 노나라에 유리하게 강화를 맺었다.
삼환씨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계환자가 주위 나라의 계략에 속아 쾌락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직을 사직한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송·조·정·진·태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다.
정치 활동
공자의 인망은 갑자기 높아져서 기원전 499년에는 최고 재판관으로 임명되었고 또한 외교관도 겸하게 되었다.
공자는 순장당할 뻔한 아이를 구하고, 제나라 경공과의 회동에서 입심으로 노나라가 잃은 땅 찾고,
삼환이 거느린 세가지 성, 삼성을 허무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계손사의 책략에 도중에 중단된다.
계손사는 노나라 삼환 계손, 맹손, 숙손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이 무렵, 공산불뉴는 삼환과 계손사의 전횡에 맞써 반란을 일으켰다.
영화에서는 부정적으로 인물로 그려지나, 실제 공자도 삼환도 전횡에 불만이 있어 공산불뉴가 초청했을 때 갈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나라 제자였던 맹의자, 남궁도등의 만류 때문에 가지 않게 된다.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는 계손사을 타도하려고 여러 가지로 계책을 꾸몄으나 일이 막 성사되려는 단계에 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계손사의 미움을 받아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대여섯 명의 제자와 함께 자기를 등용해 줄 왕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10년이나 걸린 이 방랑 생활은 공자에겐 가장 괴로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도 공자를 오래 등용하지 않았다. 왕들은 올바른 길보다도 효과가 빠른 부국강병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이 지금 당장 실현되지 않을 것을 알자 미래에 희망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공자의 정치가로서의 생활은 끝나고, 교육가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교육 활동
공자는 중국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던 고서들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안회, 자하, 자로 등이 유명하다.
또 원래 노나라에 있던 연대기를 《춘추》라는 책으로 다시 편찬했다고 한다.
공자는 만년을 불행하게 지내다가(아들인 백어가 50세로 죽고, 그 후에 가장 사랑하는 제자인 안회와 자로도 잇달아 죽었다.
공자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어졌다"고 하며 슬퍼하였다.) 애제자인 안자, 자로 등을 잃고 상심에 빠지기도 했다.
아들 백어가 사망하자 그는 며느리를 개가시켰고, 어린 손자를 양육하였다.
그의 손자 자사는 뒤에 공자의 애제자의 한사람인 증자를 스승으로 받들고 문하생이 되어 공자의 사상과 학맥을 이어나갔다.
제자들
공자의 문하(門下)에서는 걸출한 대학자가 무수히 배출되었는데, 육경(六經)에 통달한 이만 해도 무려 7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을 가리켜 '칠십자(七十子)'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학식이나 덕망, 재능이 출중하여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열 사람의 제자를 가리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한다.
이들은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자로(子路), 자유(子有), 자하(子夏) 등이었다.
공문의 많은 제자들 중 안회(顔回)의 학문과 덕이 가장 뛰어났다.
이는 스승인 공자와 동문 선후배 등이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안회는 스승인 공자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 그를 크게 상심시켰다.
그의 학통을 후대에 전한 인물은 증자와 자궁(子弓)이었다.
덕행(德行)으로는 안회(顔回), 민손(閔損), 재백우(再伯牛), 중궁(仲弓)이며,
언행은 재예(宰豫), 자공(子貢)이며, 정사(政事)에는 재구(再求, 자유(子有)의 본명), 중전(仲田, 자로(子路)의 본명)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이다. 그 외에도 증자(曾子), 자장(子張), 자궁(子弓), 유자(有子)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증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가르쳤고, 훗날 맹자(孟子)가 자사에게서 배웠으니,
맹자학파는 증자가 배출한 셈이다. 자궁의 손제자들 중에 한 분파는 순자와 한비자로 이어졌고 이는 법가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만년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따라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다.
공자는 만년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 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하였다.
공자는 73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에도 수 천 년 동안이나 이어지며
중국을 비롯하여 이른바 '중화(中華)'의 국제 질서에 속한 동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종범(宗範)이 되었다.
또 공자는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 각국에서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되고 있다.
72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어록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 내려와 천 수백 년에 걸쳐 중원과 동북아 사회의 정치, 윤리 도덕의 규범이 되었다.
사후
738년 당나라 현종은 공자를 왕으로 추봉하여 '문선왕'(文宣王)의 시호를 내렸다.
1008년 송나라 진종은 시호 지성(至聖)을 추시하여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 되었다.
원나라에와서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되었다.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다른 별칭도 수여되었다.
1645년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사상
정치관
공자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교육에 임할 때 목표로 삼은 것은 군자(君子)의 양성이었다.[3]
군자란 원래는 한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공자는 그러한 지위에 어울리는 도덕적 인격 · 정치적 능력 · 인문적 교양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공자는 군자의 양성이라는 교육 목표를 위한 텍스트 또는 경전으로
춘추시대 이전의 여러 나라의 민요나 주나라의 조정에서 의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가요 등을 편집한
《시경(詩經)》과 주나라가 천명(天命)을 받아 왕조를 창시할 시기의 왕조의 기록류를 정리한 《서경(書經)》 등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것을 사용하였다.
한편 공자는 주나라의 권위가 쇠퇴하여 이윽고 땅에 떨어지는 춘추시대에 속한
노나라의 연대기적 역사서인 《춘추(春秋)》를 편술(編述)했다는 말이 있듯이 영고성쇠가 거듭되는 난세(亂世)를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군자의 양성을 목표로 한 공자의 교육은 전통문화를 내용으로 하는 텍스트와
난세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현실을 응시하고 통찰하는 눈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설명된다.
인 의 예 지
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의예지'였다.
공자의 경우 '예'란 아직 훗날의 유교처럼 덕목(德目)의 하나는 되지 못했었다.
그것은 공자가 존경했던 주공에 의해서 대성한 중국 고대의 전통문화라는 것과 가깝고 종교의례·제도·관습을 그대로 개괄하는 말이었다.
공자는 주공의 시대, 즉 주왕조 창시기의 사회 본연의 모습을 재현시킴을 이상적 목표로 삼았다.
그는 그 이상목표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禮)의 학습·습득(習得)을 제자들에게 부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세(亂世)에 살고 인간을 응시하는 눈을 가졌던 공자는 예가 지니는 의미를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에게서 추구했으며
예를 실천하는 인간에게서 인간의 주체성, 즉 '인(仁)'을 발견했다.
공자 교육의 중심은 '인'의 완성이나 혹은 인간형성을 궁극목표로 했던 것이다.
이전 문헌에 나오는 인이라는 말은 남자답다든가 훌륭한 풍채, 외모의 아름다움을 뜻함에 불과했으나
여기서 비로소 공자에 의해서 특별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겠다.
공자의 사상의 핵심은 '인'으로서 스스로 이를 명백하게 규정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박애,도(道),덕,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휴머니즘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바르게 하고,이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책임과 본분을 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4] 남을 부축하며,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이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공자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어려운 것임을 시사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 도,덕(德)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德治主義)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직관(直觀)이 있다.
그는 처음에 위정자 특히 최고 책임의 소재자(所在者)인 군주에 기대를 걸어 각국을 역방하면서 자기 주장을 설명했었다.
뛰어난 덕(德)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의 덕을 높여 그 결과 도덕이 고루 퍼져 세상이 저절로 평화가 된다는 바로 그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亂世)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를 교육하고 제자들에게 '인'의 학습을 시킴으로써 고전(古典)의 지식이나 정치기술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치의 요로에 참여케 함으로써
난세를, 유혈이 따르는 강권주의가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사상이 현실적이어서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서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개발시켰다.
그의 사상은 살아 있을 때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 자사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 무제 이후 중국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한국·일본 등 중국의 주변 국가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가정의 불행
공자는 3세에 아버지를 잃고 생모 안징재와 살았으나 안징재 역시 소년기에 사망했다.
만년에 그의 아내는 제사상에 육포(肉脯)를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처하였다.
그러나 외아들인 백어 마저 공자 자신보다 일찍 사망했다.
백어의 두 부인 역시 이름과 성씨, 친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
백어의 가정생활 역시 순탄치 못하여 첫 며느리를 출처하였고, 그 뒤에 얻은 며느리에게서 손자 공급을 본다.
그러나 백어가 사망하면서 새 며느리 역시 어린 손자를 그에게 남겨두고 서씨(庶氏) 집안으로 재혼하였다.
기타
◾ 공자의 문하에서 성선설(맹자)과 성악설(순자)이 탄생하였다.
◾ 보통 유교는 제자 중 증자-자사로 이어지는 학파를 유교의 적통 학파로 간주한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이자 증자의 제자였던 자사의 손제자(제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을 스승으로 하여 학맥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학파가 형성되었다.
◾ 공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인 자궁(子弓)의 제자로 이어지는 학파에서 순자가 나왔다.
유교의 한 학파를 형성하였으나 자궁과 순자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에서는 전국시대에 이사, 상앙 등의 법가로 발전했다.
◾ 곡부 공씨는 공자 이전에도 선조가 있었으나, 가문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공자를 시조로 간주한다.
◾ 한국의 공씨는 원나라 때 고려로 건너온 공자의 후손 공소(孔紹)를 시조로 한다.
원나라 순제의 조정에서 한림원학사를 지낸 공소는 원나라의 멸망의 조짐이 보이자 고려로 건너왔고 한국 공씨들의 선조가 되었다.
◾ 당나라 현종 때 문선왕으로 추존된 이후 공자를 모신 사당은 문묘(文廟)로 부른다.
신라시대에 한국으로 문묘가 전래되었으며, 이후 고려, 조선에 가서는 성균관에 공자의 사당을 모시므로
문묘는 한국에서는 성균관의 다른 별명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철학
백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미적 부분을 존중하는 것은 유교가 공자 사상의 장점이다.
반면 존비친소(尊卑親疎)적 규범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을 들면 유가의 삼년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자는 부모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사람의 도에 맞다고 여겼는데,
묵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비판자들은 삼년상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이며,
그와 같은 관념이 백성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자, 사상과 묵자 이론은 존비친소(尊卑親疎)적 규범에 관한 부분은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 이상의 차이라기 보다는 방법론적 차이이다.
공자, 묵자의 사상을 서양 철학으로 분류하면 유심론에 가깝기 때문에 공유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아이러니는 법가와 교리화된 성리학의 외형적 형질이 동일한 요소가 있다.
따라서 공자의 인의지예(仁義禮智)의 도을 교리화한 성리학은 법가주의적 틀을 이식하였다고 판단 할 수 있다.
성리학은 유교에 뿌리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적으로 법가에 더 가까운 사상이다.
공자 사후에 변형된 맹자, 순자의 유교 이론, 성리학은 공자와는 무관하다.
추종자들은 자신의 좋아하는 요소를 확장하였고, 성리학은 더욱 심하게 변형된 이론이다.
성리학의 경직성 때문에 공자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존재 하는데, 성리학의 문제까지 공자가 떠넘기는 것은 유교 변형의 역사을 보면 적절하지는 않다.
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이였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은 하나의 문장으로서 명백히 개념이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박애,도(道),덕,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휴머니즘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책임과 본분을 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남을 부축하며,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 규정했다.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구분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는 도,덕(德)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인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德治主義)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는 당초 위정자 특히 최고 권력자인 군주에게 기대를 걸어 각국을 편력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설명했다.
군주가 덕(德)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이에 따라 백성의 덕도 높아져 그 결과로서 도덕이 고루 퍼진다면
온 세상이 저절로 평화로워진다는 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亂世)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인'을 터득하게 함으로써 학식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을 장래 정치의 요직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난세를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개발시켰다.
또한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공자가 예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의가 무슨 소용이겠는가!'라 하였으며
또한 공자와 자하의 대화에서 채색은 흰 바탕이 있은 연후에야 가능하다는 비유를 들어 예의 근본에 대해 강조한 것에 따르면
공자의 '예'는 외면적 사회규범의 측면도 가지지만 그 바탕에 정직한 마음(直)이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백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미적 부분을 존중하는 것은 유교가 공자 사상의 장점이다.
반면 존비친소(尊卑親疎)적 규범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유가의 삼년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자는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사람의 도에 맞다고 여겼는데,
묵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비판자들은 삼년상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이며, 그와 같은 관념이 백성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자, 사상과 묵자 이론은 존비친소(尊卑親疎)적 규범에 관한 부분은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 이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 차이이다.
공자, 묵자의 사상을 서양 철학으로 분류하면 유심론에 가깝기 때문에 공유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공자의 사상은 생시에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曾子)·자사(子思)를 거쳐 맹자(孟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漢)의 무제(武帝)이후 중국의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또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공자의 제자
공문십철
칠십자
민자건(閔子騫), 노나라 공족 민손(閔損)은 자에 성을 붙인 이름이다.
염백우(冉伯牛), 공문십철의 선비로 덕행의 선비다.
자로(子路), 염구와 함께 노나라 정치가이다.
염유(冉有), 계손사 가문의 가신으로 공자에게 배운 전술로 제나라에게 승리했다.
유약(有若), 증자와 함께 대표적인 공자의 제자이다.
안회(顔回), 노나라 공족으로 자는 자연(子淵)이다.
중궁(仲弓), 중궁은 염옹의 자이다.
자공(子貢), 본명은 단목사이다. 위나라 유학자이다.
자유(子遊), 오(吳)나라 사람으로 문학에 뛰어 났다.
증자(曾子), 산동성 출신 유가 철학자이다.
자하(子夏), 위나라 출신이다. 주/위/노/정 공족은 왕족이므로 이름 앞에 자(子)을 붙였다.
남궁도(南容韜), 노나라 출신 공자의 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