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잠든 부처를 깨우라.(불타 석가모니)
내 안에 잠든 부처를 깨우라.
와타나베 쇼코 <불타 석가모니> 책 이야기
인도에서는 인생을 네 시기로 나눈다.
첫째는 학생기(學生期)로 스승에 집에 살면서
베타와 그 밖의 경전을 배운다.
이 시기가 끝나면 두 번째는 가주기(家住期)인데
집에 돌아와 결혼하고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해 나간다.
이렇게 살다가 사내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면
아버지는 가산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숲 속에 들어가
검소한 종교생활을 한다.
이것이 세 번째 임주기(林住期)다.
그리고 네 번째 유행기(遊行期)가 되면
모든 집착을 떨처 버리고 홀가분하게
집이나 소유물 없이 머리와 손톱과 수염을 깎고
바리때와 지팡이와 물병만을 가지고 걸식으로 생활을 한다.
인도에서는 옛날부터 이처럼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걸식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그리고 걸식을 하는 수행자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는다.
부처 생존 당시 인도 코살라국의 수도 슈라바스티에
니이다이라는 천민이 있었다.
인도 사회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똥을 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자만 지나가도 불결하다고 여겼으며,
손발이 귀족에 몸에 닿기만 해도 잘리게 되는 불가촉천민이었다.
니이다이는 샤카무니라는 이름의 성자가 계급제도를 부정하면서
"사람은 원래 신분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행위가 신분을 결정짓는다"라고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어느 날 니이다이는 똥이 가득한 통을 메고 밭으로 가다가
마침 부처가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부처를 만나려고 모여 있었다.
니이다이도 가까이 가서 부처를 만나고 싶었지만
자신에 몰골이 너무 초라해 길 모퉁이에 숨어 버렸다.
그런데 부처가 사람들을 헤치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니이다이는 너무도 당황해 서둘러 피하려다가
그만 똥통이 벽에 부딪쳐 깨어 저버렸다.
똥이 사방에 튀어 자신이 똥물을 뒤집어쓴 것은 물론이고
부처에게 까지 그 똥물이 튀었다.
니이다이는 똥이 쏟아진 바닥에 주저 않아 울며 용서를 빌었다.
잘못하면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부처는 자비로운 눈으로 니이다이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어 이른다.
"니이다이여, 내 손을 잡고 일어나 나와 함께 강으로 가서 씻자."
부처는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니이다이는 어쩔 줄 몰라하며 말했다.
"저같이 천한 자가 어찌 부처님과 함께 가겠습니까?"
부처가 말했다.
"염려하지 마라. 나의 진리는 맑고 깨끗한 물과 같아서
모든 것을 받아들여 더러움을 씻어 낸다.
나의 진리 안에서는
부유하고 가난하고 귀하고 천한 것들이 모두 하나다."
니이다이는 훗날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
부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불교 전체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불교는 단순히 부처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라,
부처가 발견한 진리를 부처의 안내에 따라 발견해 나가는
자발적인 추구의 길이다.
부처를 이해하는 것은
곧 나의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다.
부처의 전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불타 석가모니>의 저자 와타나베 쇼코는
불교의 근본을 '게으름 없는 정진'이라는 한마디에 요약하고 있다.
부처의 마지막 유계도 이것이었다.
"비구니들이여, 너희들에게 할 말은 이렇다.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미국 인구 가운데 9백만 명이, 그리고 프랑스 인구 중 6백만 명이
스스로를 불교도라 여긴다는 설문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지만
인류의 스승이며 지난 2천5백 년간 인류의 스승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한 불타 석가모니가
어떤 생을 살았으며 또 그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이는 드물다.
불교의 문제점인 기복신앙과 잘못된 믿음들은
부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부처는 나의 기도를 들어주는 신앙의 대상으로 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구도의 길을 떠난 인간의 원형으로 접근해야 한다.
어린 태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도 병에 걸리고 병을 피할 수 없는데도
남이 병에 걸린 것을 보면 싫어하면서
자신의 일을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도 언젠가는 병에 걸릴 것이고
병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남이 앓는 것을 보고 싫어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지금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뽐내는 사람은 반드시 자멸하고 만다.
또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도 노인이 되고 늙음을 피할 수 없는데도
남이 늙는 것을 보면 싫어하면서 자신을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것이고
늙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남이 늙는 것을 보더라도 싫어하지 않는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젊고 앞길이 창창하다고 뽐내는 사람은 반드시 자멸하고 만다.'
인도의 문화는 과거 3천 년 동안 바라문 문화가 그 중심을 이루었다.
이 바라문 세력은 기원전 1천 년경 인도 서북부에 들어와
처음에는 인더스 강 유역에 펼쳐지다가 수백 년 동안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갠지스 강 유역에 이르렀다.
이 민족을 아리아 인종이라고 하는데
피부가 희고 금발이며 코가 높은 것이 특색이다.
민족학이나 비교언어학적 입장에서 보면
이란인, 그리스인, 로마인, 게르만인들과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다.
아리아인은 <베타>라는 오래된 경전을 지니고 있었다.
이 <베타>에 의지해 세습적인 바라문이
'희생' 등의 종교의식을 집행함으로써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베타>는 절대 신성하며,
바라문은 나면서부터 최고라고 결정되어 있었다.
아리아인의 생활은 주로 목축이었다.
따라서 우유나 유제품에 의존했으므로
바라문과 함께 소를 신성한 것으로 믿었다.
이들이 들고 온 <베타> 경전들에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훗날 인도 대륙 안에서 탄생한 <우파니샤드>에는
인도 사상 전체의 특징을 이루게 된 윤회사상이 등장한다.
이것이 바라문의 세계 밖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학자들 간의 의견이 일치한다.
사람은 죽은 후에 그 생전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신들이 사는 천상에 태어나거나
또는 감옥과 같은 지하의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또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설
그리고 이 상태가 한없이 되풀이된다는 이야기
선한 과보로 천상에 태어났더라도
언젠가는 또 인간계나 그 이하로도 떨어지므로
이처럼 죽었다 다시 태어나고 태어났다가 다시 죽는
윤회는 결국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한번 죽어 버리고 모든 것이 다 끝난다면 간단한데
몇 번이고 생사를 되풀이해야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지겹고 끔찍한 일이다.
이런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것이 기원전 6세기경 인도 사상계의 중심 과제였다.
사상계라고는 하지만 종교나 철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이나 교양에 관계없이
적어도 자신의 생활을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윤회사상은 바라문교 쪽에서 보면 매우 못마땅했다.
왜냐하면 바라문은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한 존재라고 뽐냈는데.
윤회사상에 의하면 사람은 자신의 행위 결과에 따라
신도 되고 지옥에도 떨어지며 또는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다양한 신분을 갖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바라문일지라도 이다음 생애는 노예로 태어날 수도 있고
이와 반대일 수도 있다면 이미 바라문 지상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데 불교와 자이나교를 비롯해 기원전 6세기 이후의 종교는
대부분 윤회사상을 전제로 한다.
바로 이 무렵 인도 북쪽 끄트머리, 지금의 네팔에 속하는
룸비니라는 작은 마을에서
장차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가 될 한 아이가 탄생했다.
이 아이와 관련된 모든 사건들은 이 윤회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마침내 그 윤회의 사슬을 끊고
더없이 높은 해탈에 이르는 것을 정점으로 한다.
<불타 석가모니>는 이 아이가 장차 생사윤회에서 벗어난 부처가 되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고 최후에 육신을 벗기까지의 과정을
총 38장으로 낱낱이 그려 보인다.
각 장마다 부처의 삶에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
<자카타>에 등장한 그의 전생이야기들로부터 시작해
이 생에서의 탄생, 성장, 결혼, 출가, 고행, 그리고 깨달음,
가르침, 열반에 이르기까지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마다
부처의 전체적인 삶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사건들이
상세한 해설과 함께 영화처럼 펼쳐진다.
가장 생생한 장면 중 하나는 궁극에 깨달음을 얻기 전
환영의 악마인 마라의 도전을 받는 대목이다.
6년 동안 고행하는 싯다르타의 신변을 엿보며
방해할 틈만 노리던 마라는 끝내 그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라는 다음과 같이 부드러운 말씨로 싯다르타를 유혹한다.
"목숨이 있어야만 수행도 할 수 있소.
당신 같은 수행 방법으로는 천에 하나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소.
마음을 억제하거나 번뇌를 끊어버리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일이오.
그런 짓은 그만두시오.
훨씬 즐거운 방법이 얼마든지 있지 않소.
바라문이 하는 것처럼 불을 섬기고 제물을 바치면
얼마든지 공덕이 쌓일 것이요."
마라의 유혹에 싯다르타는 이렇게 대답한다.
"마라여, 내가 구하는 것은 단순한 이익이 아니다.
목숨은 언젠가 죽음으로 끝날 터이니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강물이 아무리 많아도 쉴 새 없이 바람이 불면
마침내 말라 버리듯이,
고행을 계속하면 육체나 피는 마르지만
내 마음만은 항상 고요히 가라앉는다.
나는 의욕과 노력과 정신을 통일한 의지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지혜도 있다.
헛되이 살아서 무엇할 것인가.
나는 너의 군대를 잘 알고 있다.
제1군은 애욕이다.
제2군은 의욕 상실이고,
제3군은 굶주림과 목마름이며,
제4군은 갈망이다.
제5군은 비겁이고,
제6군은 공포이며,
제7군은 의혹이고,
제8군은 분노다.
그리고 제9군은 슬픔이다.
그 위에 명예욕까지 갖추고 있다.
나는 너의 군대와 싸우겠노라."
싯다르타의 말을 들은 마라는 맥없이 물러갔다.
연기(緣起)=<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법칙>란 말은
여러 가지로 널리 쓰이는데
그 기본적인 것이 십 이 인연이다.
십 이 인연은 우리들 인간의 상태
요즘 말로 하면 '실존'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어 간다.
이는 일반적인 진리인 동시에
또한 우리들 개개인의 운명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인생문제 자신의 근본 문제에 생각이 미칠 때면
언제나 우리는 이 벽에 부딪친다.
보리수 아래서 좌선해 최고의 진리를 탐구한 싯다르타에게도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최후의 열쇠였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은 무엇에 의해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태어난다'는 사실을 원인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점점 거슬러 올라가면 마침내
무명(無明=진리를 깨닫지 못한 마음상태)을 발견하게 된다.
그 무명이 근원적인 원인이다.
그는 이와 같이 살펴 나갔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렇게 생각해 나간다.
늙음과 죽음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태어나지 않으면 늙음과 죽음은 없다.
그럼 태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존이 없으면 된다.
이와 같이 생존에서 시작해 집착, 갈망, 접촉,
여섯 감각, 모양과 물체, 인식, 현상, 무명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결국은 무명이 없어지면 현상도 없고
현상이 없으면 인식도 없다는 식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늙음과 죽음도 없다.
이렇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 버리는 것이
인생의 문제를 마지막으로 해결하는 길이다.
첫째 인간의 실존을 괴로움이라고 이해할 것.
이 괴로움은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대립하는
그런 괴로움이 아니고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비록 행복의 절정에 있을 때라도
거기에 반드시 맺혀 있는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은 인간적 실존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둘째 괴로움의 원인을 밝힐 것.
우리들이 생존하는 바탕에는 욕망과 욕구가 가로놓여 있다.
갈망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맹목적 의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이고 개체적이기도 한 동시에
집단적 또는 생물적 본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셋째 괴로움의 원인인 갈망을 없앨 것.
이것이 실제적인 해결이다.
넷째 갈망을 없애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이 필요하다.
이것을 도(道)라고 부르는데
불교의 실천 덕목이 여기에 해당한다.
책의 마지막 35장부터 38장은
한 위대한 성인의 최후를 위한 장이며,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니르바나(열반)에 들어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부처는 앞으로 교단을 어떻게 이끌어 가면 좋으냐는
제자 아난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아난다여, 현제도 내가 입적한 뒤에도
자신을 등불 삼고 의지처로 삼아 남에게 의지하지 마라.
진리를 등불 삼고 의지처로 삼아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만이 수행에 열정을 가진 수행승으로서
내 뜻에 가장 맞는 사람이다."
부처의 전기 중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이자
뛰어난 불교 입문서이고 인생의 지침서로 일컬어지는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
아널드 토인비는
'불교와 서양의 만남은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현대인이 가져야 할 종교는
진리를 근본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고도 했다.
옮긴 이 법정스님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 사람을 모르고 그의 사상이나 가르침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불타 석가모니의 경우처럼 그의 삶이 곧 그의 사상을 나타낸다면 더욱 그렇다.
그가 한평생을 어떻게 살았으며
그 새대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키쳤는가가 곧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열쇠다.
그리고 그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는
불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이 될 것이다.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생애를
이제 와서 펼쳐 보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전의 전기를 보면 대부분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데 치우쳐 있었다.
많은 불타 전기 중에서 역자가 선뜻 이 책을 골라 번역한 것은
저자가 확신을 갖고 다른 불타 전기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투철한 안목을 열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이 책을 구해다 읽으면서
그전에 건성으로 지나쳤던 불교의 몇몇 현상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고, 속으로 깨친 바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내 눈이 더욱 열리고 팔에 힘이 오르면
직접 불타 전기를 한번 써 보고 싶다는 자극을 강하게 받았다.
힌디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에 능통한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학자
와다나베 쇼코는 평생에 걸친 그의 불교 공부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불타 석가모니>를 탄생시켰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들을 뒤져 가면서 불타의 일생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종교적이면서 실증적이고 객관환된 시선으로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부처의 전기 이면서 단순한 한 위인의 생애에 한정되지 않고
마치 한 권의 흥미진진한 문명 발달론을 읽는 것처럼
부처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상과 당시 사상의 흐름,
문화적인 경향에 대해서도 다룬다.
이 책의 원 제목은 <신석존전.新釋尊傳>이며
다이호린카쿠에서 1966년 초판본이 출간되었고
2005년 지쿠마쇼보에서 문고판이 간행되었다.
법정 스님의 번역본은 1975년 샘터에서 <부처님의 일생>으로
문고판이 처음 나왔으며, 그 후 판형을 바꾸어 <불타 석가모니>로
동쪽나라를 거쳐 2010년 문학의 숲에서 새롭게 펴냈다.
부처의 또 다른 전기로는 카렌 암스트롱의 <붓다>
(국내 번역본은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디팩 초프라가 쓴 '사람의 아들 붓다' 등이 있다.
오늘도 법정스님이 평소 즐겨 읽었다는 책 50권 중 한 권을 소개해 보았다.
HanEunSeob idio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