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이야기

 

소크라테스(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소크라티스,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에 의해 '신성 모독죄와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로 기원전 399년에 71세의 나이로 사약을 마셔 사형을 당했다.

 

흔히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불린다. 실존철학의 거장인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위대한 사상가들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는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다.
플라톤이 20대인 시절,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끝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며,
이는 그의 귀족주의(철인정치) 지지의 큰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의 증손 제자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사례가 없다.
이런 결과,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언급한 사료들은 역사적으로 정확성을 내세울 까닭이 없었으며, 때론 당파적이기까지도 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처형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생애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철학·기하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사상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 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하던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장인이 아레테(ἀρετή, 훌륭함, 탁월함이라는 뜻)을 발휘하려면 자신의 기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듯,
인간으로서의 아레테, 즉 덕을 발휘하려면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다이몬은 일종의 귀신에 포함됨)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도덕론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부패하던 시기였고, 이로 인한 개인윤리 타락이 극심한 시대였다.
그는 여러 악덕을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덕은 이성적 사고의 기초 하에 생겨난다.
또한, 덕의 확대는 사회를 더 이성적인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점이다.
또한, 이성의 냉소로 인한 부덕함이란 개념 자체를 비판했다.
그는 악덕한 자는 필연적으로 앎이 부족한 무지한 상태에 있다고 봤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냉소적 이성'은 성립할 수 없다고 봤다.
그의 이러한 지행합일론은 그가 윤리·도덕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그는 일상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청년들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리고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사후 '스토아학파'에 의해 계승됐으며, 기독교의 윤리관에도 큰 영향을 줬다.

 

영혼 중심적 사고

소크라테스는 육체-영혼 이원론자였다.
그는 육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저 껍데기일 뿐이고, 만 지식은 영혼 안에 내재된 개념이라고 봤으며, 영혼은 불멸한다고 봤다.
인간은 영혼을 소유한 존재이지만, 육체의 감각적 요소에 의해 영혼에 내재된 진리를 통찰하는 것을 계속 방해 당한다고 봤으며,
그는 이를 극복하면 만 지식을 얻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극복 방법은 바로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 산파술로 감각으로 인해 얻은 여러 '오류'를 하나씩 잡는 것에 있다고 봤다.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여 그는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죽음'을 긍정하기도 했다.

 

변론과 크리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문서를 참고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
이 경구가 처음 등장한 것은 로마시대이며 말한 사람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로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기에 이는 진의를 모두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는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말은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5]

 

산파술

소크라테스는 구두언어 - 흔히 당대에 로고스(Logos)라 불리던 - 의 형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구두언어는 지(知)의 매개인 정신을 다른 상대방에게 전하는 유일한 운송 수단으로 봤다.
즉, 그에게 있어서 구두언어는 현대의 관점에서 말하는 단순한 규칙적인 음파의 개념이 아닌,
발화자의 사유 자체를 어떠한 오류도 없이 밖으로 내보내서, 듣는 이의 사유에 영향을 주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했는데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즉각적인 답을 주는 것보단 거꾸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선호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견이 무지에 기인한 의견 또는 그에 준하는 단견일 수 있다는 것을 았다.
그는 자신이 만 지식을 알지 않는 한 단견으로 토론을 중지시켜서 '앎의 변증'을 멈추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질문에서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끝 없이 질문했으며,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았다.
또한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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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


아리스토텔레스(고대 그리스어: Ἀριστοτέλης, 그리스어: Αριστοτέλης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84년 ~ 322년)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다.
물리학, 형이상학, 시, 생물학, 동물학, 논리학, 수사학, 정치, 윤리학, 도덕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저술하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으며, 그리스 철학이 현재의 서양 철학의 근본을 이루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도덕과 미학, 논리와 과학, 정치와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서양 철학의 포괄적인 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자연과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중세 학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그의 견해는 뉴턴 물리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동물학 연구에서 그의 관찰은 19세기까지 정설로 인정되었다.
그의 글에는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논리에 대한 형식 연구가 담겨 있으며, 이러한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에 형식 논리학으로 구체화 되었다.
형이상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800-1400년 까지의 중세시대 유대와 이슬람 전통에서 나타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특히 가톨릭 교회 전통의 스콜라 철학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윤리학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데, 현대에 이르러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출현과 더불어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측면은 오늘날에서 계속해서 활동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러 편의 품위있는 논문과 대화록을 저술했음에도(키케로는 그의 문체를 "황금이 흐르는 강"이라고 묘사하였다.)
오늘날 그가 쓴 글의 대부분은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원래 쓴 글의 3분의 1 정도만 남아있다.


생애

마케도니아의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의 시의(侍醫)였으며 어려서부터 자연 과학에 관심이 컸다.
17세에 아테네로 여행하여 플라톤이 건립한 아카데메이아에서 스승인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20년간 이곳에 머무르며 철학연구에 몰두했다.

플라톤이 사망하고 나서 소아시아로 옮겼다.
기원전 342년부터 기원전 340년까지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드로스의 가정교사로 있었다.
그가 준 《일리아스》는 대왕이 늘 좌우에 간직하는 서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왕의 정치사상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기원전 335년 왕이 페르시아 원정 길에 오르자, 리케이온에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12년간 강의와 연구에 종사했다.
오늘날 전해지는 방대한 학술서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 초고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는 녹음이 우거진 소요로를 거닐면서 강의하여 '소요 학파'라는 이름을 얻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신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고소당해,
신변에 위험을 느껴 고향인 칼키스로 가서 이듬해 죽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움으로 리케이온 학교에 도서관을 만들어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도 만들었다.
신학자들은 그의 책이 자기들의 생각과 일치하였으므로 학문의 기초로 삼았다.

이 밖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법률과 도덕도 연구하였다.
그는 스승 플라톤이 관념론적 이상주의임에 대하여 경험론적 현실주의자로 지적되고 있으며, 예술에 관해서도 플라톤과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
예술을 일종의 '모방'으로 보는 점은 플라톤과 같으나, 플라톤이 '모방의 모방'으로 생각하여
이데아의 참된 인식을 흐려 놓는 것으로 인정한 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을 카타르시스(정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논리학

전 분석론(Prior Analytics)의 편찬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논리학의 선구자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그가 창안한 개념은 19세기에 수리논리학 분야에서의 발전이 있기까지 서양 논리학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에 관한 이론이 연역 추론의 핵심적인 부분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자연관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보편성을 향해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이 보편성은 특정한 것에서 멀리 떨어져 존재하며,
이와 같은 보편성은 그들의 원형(原型) 또는 전형으로써 주장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특정한 것에서 보편성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사물들의 본질(essence of things)이라 칭하였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적인 방법이란 특정한 현상에 대한 연구로부터 본질에 관한 지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포괄하며,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 또는 형상(form)이라 불린 것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이들과 유사한 형태로의 관상(contemplation),
다시 말해 인식하는 양식에 이르기까지의 하향적인 과정을 취한 플라톤의 방법과 차이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형상(form)'은 여전히 현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기초를 가리키지만 이와 동시에 특정한 사물에 '구체화'되어 있다.
플라톤의 방법이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의 연역 추론에 기반해 있는 것이라면, 그의 방법은 귀납적이면서 연역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용어 중에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는 말은 자연계의 현상을 탐구하는 철학의 한 부분이며,
이는 현대의 물리학, 생물학 등의 분야를 포괄한다.
현대에 들어서 철학(philosophy)은 윤리학이라든지 논리가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형이상학(metaphysics)과 같은
보다 더 포괄적이고(generic) 모호한 분야에 한정되었다.
현대의 철학은 자연계에 관한 경험적인 연구를 과학적 방법이라는 용어를 활용하여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활동 분야는 지적 탐구(intellectual inquiry)의 모든 분야를 넘나든다.

 

4원소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4 개의 원소는 다음과 같다:
뜨겁고 건조한 성질을 지닌 불(Fire)
차갑고 건조한 성질을 지닌 흙(Earth)
뜨겁고 습한 성질을 지닌 공기(Air)
차갑고 습한 성질을 지닌 물(Water)

하지만 물이 수소원자 2개와 산소원자 1개로 이루어졌는게 밝혀지고,
공기도 사실 산소, 질소 등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고
흙도 여러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게 밝혀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 틀렸다는 게 증명되었다.

 

사원인

운동하고 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 연구를 자연학이라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4가지 원인을 들었다(四因論).
그는 재료의 측면, 형상의 측면, 작용의 측면, 그리고 목적의 측면에서 그 원인을 답하였다.
질료인은 대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탁자에 대한 재료의 측면은 나무이며, 차에 대한 재료의 측면은 고무와 철이 되는 것이다.
행동을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며, 어떤 특정한 것이 다른 것보다 우위에 위치하는 것 또한 아니다.
즉, 책상은 나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책상이 있는 것이다.
형상인은 그 대상이 무엇인지, 즉 정의, 형태, 특성이나 원형(原型, archetype)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을 나타낸다.
기초적인 원리나 일반적인 법칙에 의거한 설명을 활용한다. 형상인은 인과관계의 필수적인 것만을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물건이 존재하기 이전에 누군가가 가지는 청사진이 더 간단하고도 형식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즉, 책상은 책상의 형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작용인은 변화 또는 변화의 끝이 처음 시작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무언가가 만들어지게 만드는 무언가와 무언가가 변화를 겪게 만드는 변화'를 결정하며,
살아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함으로써 변화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 근거로 작용한다.
인과 관계에 관한 현대적인 이해를 반영하며, 특정한 현상 또는 요인으로서의 근거에 관한 개념을 포괄한다.
즉, 책상은 어떤 목수가 이 책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목적인은 사물이 있는 목적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목적은 목적성을 띄거나 그렇지 않은 것 모두를 포함한다.
목적인은 대상이 원래 쓰이는 용도에 관한 것이다. 즉, 책상은 위에 누워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위에 책을 놓고 책을 읽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은 또한 의지나 동기, 합리적인 것, 윤리적인 것과 같이 행동에 대한 목적을 부여하는 정신적인 원인에 관한 현대적인 개념을 포괄한다.

 

자연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質料, 휠레)와 형상(形相, 에이도스)간의 상호작용이라는 생각으로 자연을 해명하려고 하였다.
질료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원소재로서 이것이 형상에 의해서 형태가 주어짐으로써
비로소 구체적인 사물이 되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는 관찰이나 경험을 플라톤과는 달리 중요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모든 분야에 이르고 있지만, 500종 이상의 동물을 관찰, 기록하고 분류하였다.
《동물지(動物誌)》 9권, 《동물 부분론》 4권, 《동물 발생론》 5권 등을 저술하고, 형상과 질료의 철학으로 설명하였다.
암컷은 재료 즉 질료를, 수컷은 계획 즉 형상을 제공하고, 생물의 성장에 따라서 형상이 완성하고
더욱이 그것은 "자연은 불필요한 일은 하지 않는다"라 하는 관점에 입각한 해부학적 구조, 발생학적인 기관 발달의 연구를 했다.
그의 날카로운 관찰은, 고래나 평활(平滑), 상어의 태생(胎生)을 발견하였고, 꿀벌의 생태나 닭의 부화 등의 정밀한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은 성과에 입각하여 생물의 분류를 하였고, 또 생물의 종(種)은 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완전도를 늘린다고 하고 생물의 11개의 계급을 만들었다.
이것이 '자연의 계단'이라는 생각이며, 완전도는 발생학적인 기준에 의거한 것이었다.

생물학에 이어서 그는 물리학, 천문학으로 고찰을 진행시켰는데, 경험·관찰 혹은 생산 기술과의 관련은 생물학과 비교하면 훨씬 적었다.
따라서 그 성과도 역시 생물학에 비해서 뒤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파급시킨 영향은 매우 크며, 근대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적 학문의 부정(否定)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물질은 연속적이며, 허공(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反)데모크리토스적 입장을 취하고, 모든 땅 위의 물질은 흙·물·공기·불의 4원소로 되었으며,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참된 원소인 제1질료가 열냉·건·습의 4개 기본적인 형상 2개씩을 얻어서 생성된 것이다.
제1질료가 열·습을 얻어서 기(氣)로, 건·열로 불, 건·냉으로 흙, 습·냉으로 물이 된다.
이 4원소는 그에 의하면 단일체이며, 4성질은 분리시킬 수 있으므로 상호의 변환은 가능해진다.
이 이론이 연금술을 장기에 걸쳐서 밑받침하였던 것이다.

천계(天界)를 만드는 원소는 아이테르로서, 땅 위와는 다르듯이 지상과 천체의 운동도 서로 다르다.
항성과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계속해서 등속 원운동을 하고 있다.
원은 완전한 도형이며, 원운동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상의 물체가 갖는 운동은 본질적으로 상승이거나 낙하, 즉 직선운동이라고 보고, 천체와 지구의 운동을 마주 놓았다.
지상의 물리학을 천계에 적용시킬 순 없는 것이지만 이 생각은 결국 17세기 뉴턴에 의해 뒤집힐 때까지는 정통적(正統的) 학리로서 인정되고 있었다.
또 그의 역학에서는 자유 낙하의 속도는 무게에 비례하고 공기의 저항에 반비례하는,
즉 무거운 것일수록 빨리 낙하한다는 견해를 취하지만, 이것이 갈릴레이에 의해서 부정된 사실은 유명하다.

 

광학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몇몇 광학에 관한 뛰어난 이론의 소유자였다.
기원전 350년에 쓰여진 그의 저서 '난제들'(Problemata)에 초창기의 카메라에 해당하는 암상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이 담겨 있다.

 

 

서양 철학사

고대 철학

중세 철학

근현대 철학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밀레토스 학파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학파

피타고라스, 필롤라오스

엘레아 학파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멜리소스, 제논

다원론자

레우키포스,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사고라스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히피아스, 프로디코스, 안티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헬레니즘-로마 제국 철학

키니코스 학파

디오게네스

스토아 학파

제논, 키케로,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신플라톤주의

플로티노스, 히파티아

키레네 학파, 메가라 학파 , 회의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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