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예수의 풍류 정신

 

공자와 예수가 풍류객(風流客)이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보기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풍류객이 아니었다고 어떻게 부정 할 수 있을까?
공자가 시(詩)와 음악을 즐겼고, 예수 또한 시인(詩人)으로서 선사(禪師) 못지않았다.

 
<논어>에 의하면 공자는 구구절절이 예와 악을 말했고 시와 음악을 즐겼다.
예수는 <복음서> 곳곳에서 선문답(禪問答)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세속적인 집착과 욕망에서 초연 할 것을 말했다.
공자도 한 때는 제도적 정치권에서 정치를 행사하기도 했지만
나라가 도(道)를 버리고 혼탁해 질 때는 정사를 떠나 열국을 주유하면서 13년간의 유랑생활을 하기도 했다.

 
예수는 비록 30세라는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와 사막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며
'하늘의 뜻'을 깨닫고는 그 길로 갈릴리 주변 농촌을 떠돌며 민중을 교화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시경>과 <서경>등의 고전을 두루 섭렵한 공자는
시(詩) 300수를 한 마디로 요약하여, '사무사(思無邪)'라고 이르면서,
인간 행동의 출발점을 삿됨이 없는 '순수함'에서 찾았던 것이다.


예수 또한 천국입성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로 어린아이 같은 '동심(童心)'을 강조했다.
순수와 동심의 세계는 낭만적 풍류객들이 지니는 공통적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와 예수는 낭만주의자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주나라의 찬란한 문화와 예악(禮樂)을 찬탄하고 기렸던 것처럼,
예수 또한 도래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낭만적 세계를

그의 시적 은유 속에서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미 자연 속에서, "들에 핀 백합화와 공중에 나는 새"를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을 보고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두려움 없는 오늘의 즐거운 하루를 살라고 권하고 있다(마태6:26-28).
합리주의적 이성(理性)은 분명히 내일을 위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해야 하지만
예수는,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 낱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마태6:34)."고 말한다.

 

이는 "하늘의 덕이 내게 있으니, 환퇴라는 사람이 나를 어찌 해치겠는가?"라고 했던
공자의 배짱이나, 빌라도의 법정에서 "진리가 내게 있으니", 무엇을 두려워 하리요? 하며
떳떳이 서 있는 예수의 자태에서도 진리 앞에 비굴해지지 않는

멋지고 당당한 풍류객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화랑도들이 풍류를 즐기면서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풍류객이라 해서 도피적이고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위험이나 속박 앞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 있는' 정신이야 말로 풍류 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나 예수는 시대적 제약을 뛰어 넘어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비판적인 이상적 자유정신을 사회 속에 혹은 공동체 속에 불어 넣고자 했다.

 

미혼 청년으로서의 예수는 결혼과 가정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 있었지만, 당시의 유대 풍토와 정치 사회적 배경은
예수가 그렇게 자유롭게 활동 할 수 있을만한 여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는 결코 아니었다.
이는 공자의 시대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이들 두 정치-종교적 사상가들은 어떻게 낭만적 분위기 속에서
시대를 개척하고 이끌어 가고자 했는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들이 각기 주장했던 그 호탕한 낭만적 풍류정신을

<논어>와 <복음서> 속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공자는 인생을 풍류(樂)에서 완성하고자 했다.
이것은 그가 "시(詩)에서 흥기하고, 예(禮)에서 일어서며, 풍류(樂)에서 완성된다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태백/8)."고 했던 짧은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성어악(成於樂)'이라고 했을 때, '악(樂)'은 일차적으로 음악을 말 할 수 있으나,
음악 속에는 이미 시(詩)가 내포 되어 있고,

그 속에 감미롭고 멋있는 조화가 깃들어 있으니, 풍류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는다.

 
공자에게서 예악(禮樂)의 정신은 나라를 형성하는 기초가 됨과 동시에 완성의 경지다.

공자는 예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예절(禮節)이다,

예절이다 말하지만 어디 옥(玉)과 비단(帛)만을 말하겠는가?
음악이다,

음악이다, 말하지만 어디 종(鐘)과 북(鼓)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鐘鼓云乎哉. 양화/11)?"

이 말의 뜻은 예절에는 옥(玉)과 비단이 필요하지만 다만 그것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요,
내면에 공경하는 바가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고,
음악에는 종(鐘)과 북이 필요하지만 그것 자체보다는 소리의 조화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는 예악은 '공경'과 '조화로움'이라고 요약하여 말 할 수 있다.
예가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하고 조화로운 음악과 풍류가 없으면
그 나라의 문화가 뒤떨어진 것으로 예술적 인생과 국가의 완성작이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풍류정신은 <논어>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우선 첫 편에서 학문하는 기쁨과 벗과의 만남에서도 드러난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학이/1)?"
배우는 기쁨도 좋지만 벗과의 사귐은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공자에게서는 배움을 통한 앎(知)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단순히 알고 있다는 '지식(知識)' 그것보다는

지식이나 도리를 좋아하는 것(好)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것보다는 즐거워하는 것(樂)이 더 낫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옹야/18)는 것이 공자의 지론이다.

인식도 중요하지만 인식을 넘어선 가치 있는 존재의 차원에 더욱 중요성을 두고 있다.
인식이 시작이라면 존재는 완성인 셈이다.
그러기에 인생은 무엇보다 즐거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즐거움 없는 인생을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즐거움은 꼭 부유한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공자는 "가난하지만 즐거워하며 사는 자(貧而樂.)"를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는 자(貧而無諂)" 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학이/15).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고백 한 단면을 들어보자.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베개 삼아 누워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
의롭지 않은 부귀는 나에게 뜬 구름과 같다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술이/15)."

참으로 풍류도의 모범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난해도 불의한 재물을 탐하지 않고,

거친 밥반찬으로도 즐거워 할 줄 아는 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공자는 그의 제자 안회도 "한 대나무 그릇의 밥을 먹고 표주박으로 물을 마시며,
누추한 거리에 살면서,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워하는

그 근심 중에도 즐거워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回也不改其樂. 옹야/9)."고 칭찬한다.

고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는 자가 진정한 풍류인일 것이다.
그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풍류로 근심을 잊는 사람(樂以忘憂. 술이/18)"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즐거워하는 일에도 종류가 있다.
무엇을 즐기며 살라는 말인가?
즐기는데도 유익한 것이 있고 해로운 것이 있다고 공자는 충고한다.

그 이롭고 해로움이 어디 한두 가지 이겠는가마는

공자는 각각 세 가지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즐거워하는 데는 유익한 것이 세 가지가 있고,

즐거워하는데 해로운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예악(禮樂)의 절도를 따르기를 즐거워하고,
다른 사람의 선한 것을 말하기 즐거워하며,

현명한 벗을 많이 사귀는 것을 즐거워하면 유익하다.
교만하게 즐기기를 좋아하고,

편히 놀고먹는 것을 즐기며,

향락에 빠지는 것을 즐겨하면 손해가 된다
(益者三樂, 損者三樂, 樂節禮樂, 樂道人之善, 樂多賢友 益矣. 樂驕樂, 樂佚遊, 樂宴樂, 損矣. 계씨/5)."

 

세 가지 유익한 즐거움을 요약해 보면

예악(禮樂)의 정신, 이웃의 선함에 대한 칭찬, 현명한 벗과의 사귐이다.

그러한 즐거움 대신에 교만, 방탕, 향락에 빠지는 즐거움은 결국 해가 된다는 것이다.
우선 예악의 즐거움이 유익하다 했는데, 공자는 제(齊)나라에 갔을 때,
순임금 때부터 전해 오던 음악인 소(韶)를 듣고

석 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음악에 심취한 적이 있다.


그리하여 공자는 "음악이 이런 경지에 이를 줄은 미처 몰랐다

(不圖爲樂之至於斯也. 술이/13)."고 고백한다.

그리하여 공자는 순임금의 음악인 이 소(韶)의 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선하다(盡美矣, 又盡善也)."
그야말로 음악의 진선미(眞善美)를 극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소리가 아름답다고 할 때의 '미(美)'를 주자(朱子)는

"풍류의 소리와 모양이 성대한 모습"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 순임금의 소(韶)에 비하여, 무왕(武王)의 음악인 "무(武)는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극히 선하지는 못하다(謂武, 盡美矣, 未盡善也. 팔일/25)."고 평한다.

 

공자가 이들 음악을 평가 할 수 있는 것은

공자가 그만큼 음악과 풍류에 깊은 조예가 있음을 말해준다.
공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하면서 그의 사상을 펼치고자 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 온 뒤에 본격적으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유가(儒家)의 경전들을 정리 편찬하였고,
노나라의 음악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위(衛)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 온 뒤에야,

음악이 바르게 되어 아(雅)와 송(頌)이 각각 제 자리를 찾았다
(吾自衛反魯然後, 樂正, 雅頌, 各得其所. 자한/14)."
아(雅)는 <시경>의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를 가리키고,
송(頌)은 주송(周頌), 노송(魯頌), 상송(商頌) 등의 노래로서 모두 명곡에 해당하는 시들이다.

 

한번은 공자가 노나라의 음악을 관장하는 악관(樂官)인 태사(大師)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악은 배울만한 것이다.
처음 시작 할 때에는 여러 소리가 화합을 이루는 듯하고,

이어서 소리가 풀리면서 조화를 이루며,
소리가 분명해지면서 끊임이 없이 이어져 한 곡이 완성된다
(樂其可知, 始作翕如也, 從之純如也, 교如也, 繹如也, 以成. 팔일/23)."

 

공자가 음악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말한 것이지만,

이는 인생의 멋과 조화를 풍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야말로 이러한 예술적 정신은 공자가 늘 강조하는

모든 사상을 핵심으로 갈파한 다음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에 거하며, 인(仁)에 의지하여, 예술(藝)적으로 산다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술이/6)."

무턱대고 예술적 즐거움에만 빠져 산다는 것이 아니라,
도와 덕 그리고 사랑에 기초하여 살면서 예술적 삶을 만끽한다는 뜻이다.

노니는 것에도 기준이 있다는 주장이다.

공자의 이 같은 풍류정신은 철저히 인(仁)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결코 방자한 놀음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禮)가 무슨 소용이며,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음악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人而不仁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팔일/3)?"라는 공자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사실 "어질지 못한 사람은 즐거움도 오래 누리지 못하는 법(不仁者, 不可以長處樂. 이인/2)."이다.

 

공자가 말한 세 가지 유익한 즐거움 중에서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선함을 칭찬해 주는 일이라고 했다.

맹자도 "즐거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선함을 취하였다

(樂取於人以爲善, 孟子/公孫丑 上)."는 유사한 말을 하고 있다.


풍류객은 남의 단점을 보고 비난하기 보다는 남의 장점을 즐겨 말해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세 번째 유익한 즐거움이란 바로 '현명한 벗과의 사귐'이다.
많은 벗이 있지만 얼마나 현명한 사람이 많은지 찾아보기 힘들다.
현명한 사람도 많지 않지만 그 현명한 사람과 사귐을 가지는 일은

더욱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풍류객들은 멋진 도반(道伴)이 있다.

공자는 훌륭한 제자들과 도반이 되었고,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도반으로서의 풍류를 누렸다.

공자의 곁에는 덕행에 뛰어난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염伯牛),
중궁(仲弓)과 언어에 재간을 보인 재아(宰我), 자공(子貢)이 있었고,
정사에는 염유(염有)와 자로(子路),

문학에는 자유(子游)와 자하(子夏)가 각기 재능을 보임으로써(선진/2),
공자의 기쁨이 되었다(선진/12).

예수에게도 12제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도 특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의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던 제자요 도반이었다.
예수는 즐겨 자기와 함께 하는 자들을 향하여 '친구'라고 불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고로 풍류객은 진선미(眞善美)를 예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공자와 예수도 물론 그랬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일생을 걸고 투쟁하며 살았고,

선의 도리를 펼치기 위해 '선인지도(善人之道)'를 늘 강조했다.

공자의 제자 자장(子張)이 '착한 사람의 도'를 물었을 때,
공자는 "성현의 가르침과 행적을 밟지 않고는 역시 높은 경지에 들어 갈 수 없다

(不踐跡, 亦不入於室. 선진/19)."고 말했다.
그만큼 공자 스스로 선(善)의 실천을 성현의 자취에서 찾을 만큼

높은 수준의 덕성을 연마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공자는 자신이 늘 걱정했던 것 4가지를 말하는데,
예컨대 "덕(德)을 닦지 못하는 것,

배움을 강구하지 못하는 것,
의를 듣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

선하지 못한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술이/3)"을 말하는 가운데서

'선함'을 고치지 못하는 것을 늘 염려했다.

덕(德)을 수련하고 학문(學)을 연마하며 의(義)를 지키고 선함(善)을 유지하는 것,

이것을 공자는 강조했다는 이야기다.

 

공자는 착한 사람의 통치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리하여 그는 "선한사람(善人)이 나라를 백 년 동안 다스리면
잔인한 사람을 교화시켜 사형시키는 일을 없앨 수 있다
(善人 爲邦百年, 亦可以勝殘去殺矣.)"는 말에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자로/11).

 
그는 또 "선한 사람이 칠 년 동안 백성을 가르치면 전쟁에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善人 敎民七年, 亦可以卽戎矣. 자로/29)."라고 말할 정도로

선인(善人)의 통치는 감화력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물론 선한 사람의 감화력은 백성이 목숨을 내어 줄 정도로 크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지,
전쟁을 조장하려는 말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로 '선함'은 공자의 중심 사상인 '지(知), 인(仁), 용(勇)을 모두 포괄하고
거기에 예(禮)를 갖춤으로써 얻어지는 최종적인 덕목에 해당한다.

 

공자는 이 선(善)을 예(禮)와 결부시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지혜로 맡은 일을 마치고, 인(仁)으로 그것을 능히 지키며,
장엄한 용기로 백성들에게 임하더라도

예(禮)로써 백성들을 움직이지 않으면 선하지 못한 것이다
(知及之, 仁能守之, 莊以리之, 動之不以禮, 未善也. 위령공/32)."

 

그런가 하면 공자는 미(美)에 대한 풍부한 감성으로

소리(音)와 빛(色)과 언어(詩)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이미 앞서 보았듯이 순임금의 음악인 소(韶)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선함'을 느꼈거니와,
"공자가 평소에 늘 말하는 것은 <시경>과 <서경>과 예(禮)를 실천하는 것
(子所雅言, 詩書執禮. 술이/17)."이었다는 점을 보아서도 시(詩) 정신으로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공자는 자기의 아들 백어(伯魚)에게도 "시(詩)를 공부했느냐(學詩)?"고 묻고,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하자,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

(不學詩 無以言. 계씨/13)."라고 충고한다.

또 아들 백어에게 한번은 더욱 구체적으로

<시경>에 나오는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배웠느냐고 묻고,
"그것을 모르면 담장만 정면으로 쳐다볼 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서있는 것과 같다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 양화/10)."고 했다.

 

공자는 언어의 미학(美學)을 중시했던 까닭이다.
공자는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너희들은 어찌하여 시를 배우지 않느냐?"라고 하면서,
시 공부의 유익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는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사물을 잘 관찰 할 수 있으며,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고,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나무와 풀의 이름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된다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양화/9)."

 

이것은 한 마디로 공자의 시학(詩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학>에서 시인과 역사가를 비교하며,
역사가는 지난 과거의 특정 사실에 중점을 둔다면 시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하는
인간의 보편성에 초점을 둔다고 했던 것과 같이,
공자의 시학 또한 인간의 제반 사항에 대한 보편적 문제에까지 통찰하는

지혜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공자에게서 시는 단지 시적 감흥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인간들 사이 혹은 자연과의 구체적인 사귐의 문제까지도
도움을 주는 유익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공자는 또한 '이인위미(里仁爲美. 이인/1)'라 하여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또한 아름다운 공동체임을 노래한다.
어진 사람들만이 풍류를 함께 오래도록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인/2). 미(美)는 덕(德)이 뒷받침 될 때 빛을 발한다.

 

공자가 아름다움을 칭송하기는 했지만 덕(德)이 따르지 않는 아름다움은 볼품이 없다고 말한다.
"만일 주공과 같이 아름다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 태백/11)."

그리고 아름다움은 단점보다는 장점을 계발하는 데서 더 아름다워진다.
군자는 실로 "아름다움을 남의 이끌어 주되, 남의 나쁜 점을 이루어 주지 않는다
(君子 成人之美, 不成人之惡. 안연/16)."는 공자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풍류(樂)에는 절도가 필요한 법이다.
공자는 <시경>의 [주남(周南)]에 첫 번째 나오는 시편인 '관저(關雎)'의 말을 인용하면서,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슬퍼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는다
(樂而不淫, 哀而不傷. 팔일/20)."고 말한다.

즐거움과 슬픔도 몸이 상할 정도로 정도에 지나치지 않고

적절한 중도(中道)가 필요한 법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무엇에나 '중정화평(中正和平)'하는 정신이 풍류의 기상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공자가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했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知者樂水, 仁者樂山. 옹야/21)"고 했던 것도

물에게서 그 흐름을 보고 지혜를 얻으며,
산을 통해 그 고요함을 보고

지혜롭고 어진 자들이 풍류의 멋과 기상을 키웠던 것을 알 수 있다.

동(動)과 정(靜)에서 동정을 살피고

지혜롭고 자비롭게 인생을 대처하는 능력이야 말로 풍류객의 기질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예수의 풍류정신을 살펴볼 차례다.
예수는 풍부한 감성과 탁월한 시적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슐라이엘마허(Schleiermacher)라는 독일의 낭만주의적 경향의 신학자가
'종교'를 '절대 의존 감정'이라는 말로 표현 했듯이,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절대 의존 감정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하늘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 감정이 없었다면,
그는 그렇게 가난하고 척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죽음으로 내 몰면서까지

과단성 있게 '천국 복음'을 외치며 유랑의 삶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절대 의존 감정'이라고 말 할 때, 우리는 세 가지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절대'라는 말과 '의존'이라는 말, 그리고 '감정'이라는 말이다.

 

신앙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다.
예수가 진정한 풍류객일 수 있었던 것도,

공자가 철저하게 '하늘의 도'와 '천명(天命)'을 믿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와 세계를 절대적으로 믿었던 데서 가능했다.

그리고 예수는 그러한 절대적 신뢰관계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간까지 '진리'되신 하나님을 '의존'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정신세계는 합리적 이성 보다는 어쩌면 초 이성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인간-사랑이라는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사랑을 실천한 감성의 사람이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예수는 하나님을 믿는 절대적 신뢰 속에서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소유자였다.
그가 말하는 여러 가지 비유들은 모두 상상력의 소산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천국의 비유들은

그 어느 시인도 추종하기 힘든 탁월한 문학적 비유를 제시하고 있다.

 

네 가지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를 비유하는 '씨뿌리는 비유"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때,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태13:3-9)."

 

이러한 비유 외에도 앞서 말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라든가,
가라지의 비유,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 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
모두 "비유가 아니면 말하지 아니하였다(마태13:34)."고 마태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의 이 같은 상상력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다고 믿은바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탁월한 시적 정서를 가지고

현재와 미래의 일을 통찰하는 예지가 탁월했기 때문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예수는 풍류객이 지녀야 할 시적 상상력뿐만 아니라 방랑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서른 살의 청년 예수의 공적인 생애 대부분은 유랑하는 설교자의 삶이었다.
그가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더욱 많은 방랑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정학적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광야

그리고 갈릴리 등지를 거쳐 광활한 지역을 방랑걸식하며 걸어 다녔다.

 

예수는 열두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여행을 떠날 때에

갖추어야 할 자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마태10:10)."

평화의 복음을 전하면서 입은 옷 하나로 방랑 걸식하라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떤 성이나 마을을 가던지,
그 중에서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다음 장소로 떠나기까지 그곳에서 일시적으로 체류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일행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평안을 빌어주고 배척하는 자들의 집에서는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태10:14)."고 말한다.

주면 얻어먹고 복음을 전하고, 안주면 그만으로 돌아섰다.
전형적인 풍류가 아닌가?

예수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의 선포에

분명하고 확신에 찬 의지가 있었다.
그 복음의 내용은 물론 '새 계명'에서 언급 되듯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 된다.

그 사랑의 복음, 혹은 '천국 비밀'을 전하는 길에,
밥 한 그릇 혹은 냉수 한 그릇 대접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 번 다시 말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뜻이다.

사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멀리 있거나 특수한 성소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접하는 자들의 마음(가슴)에서 피어나는 것이었다.

 

언젠가 예수는 예루살렘과 가버나움이라는 지점의 중간쯤에 위치한
에발산 기슭의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 우물가에 앉게 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음식을 사러 동네로 들어갔다.
이 때 한 여인이 우물가로 다가와서 대뜸 예수가 예언자인줄 알고
"하나님을 어디서 예배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 때,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여, 내말을 믿으라.
이 산(그리심)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靈)과 진리(眞理)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지금이 이때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요한3:3-26)."

 

예수가 이렇게 말한 뜻은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 이후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 사람간의 오래된 지역감정이 있었고,
그들 각각의 성소(聖所)가 따로 있었으며

자기들의 성소가 참된 예배처라고 서로 다투고 있을 때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소를 지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진정한 유일 성소로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 여인의 질문 속에서 한 마디 말로 일축하여
성소의 문제를 지역적으로나 건축물에 제한을 두지 않고

영혼이 거하는 마음이 성소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마음이다.
"네 마음이 곧 성전"이라는 뜻이다.
마음이 진정한 처소이기 때문에 고정 된 장소는 의미가 축소되거나 상실 되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주처열반(無住處涅磐)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예수는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진정한 천국의 장소가 어디인지를 유랑하며 설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유랑하는 설교자가 되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이로써 예수에게는 기존의 오래된 지역감정을 무너뜨릴 수 있었고,
유대인들이 거리끼는 '이방의 도시' 사마리아에 가서도 천국의 복음을 외치고 다녔던 것이다.

예수가 보기에 화려한 궁전과 높은 성벽은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게 하거나 그곳에 가두고 있었고,
하나님을 자기들 위주로 고문시키고 있는 현장이나 다름없었다.

예수는 이러한 성전과 성벽에 대한 깊은 회의와 반감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수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 했던 것(마태21:13)이나,
성전에서 채찍을 들었던 예수의 모습에서

당대의 종교적 타락이 얼마나 심했던 것인가를 알게 해 준다(마태21:12-17).
이는 제사장들의 타락상에 대한 예언자적 분노이기도 했다.

 

예수를 유랑하는 풍류객이 되게 하였던 또 하나의 가능성은
광활한 광야를 배경으로 한 유목민의 정신적 풍토였을 것이다.
족장 아브라함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유목민의 삶의 전통을

예수도 이어 받았고,
예수의 탄생 자체도 예루살렘 성 내의 어디가 아니라,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서 유목민의 광야와 연결점이 있는 곳이다.

예수는 어릴 적에 나사렛에 있는 예배당을 정기적으로 다니며 예배를 드렸으나
마을을 떠난 후, 방랑 설교자와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 소문이 난 후에
고향을 방문할 정도로 유랑 생활을 지속했다(마태13:53-58).

예수가 고향에 돌아와서 훌륭한 설교를 할 때에,

그들은 "이 사람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하면서 배척했다.
그러나 정작 예수는 자기 고향과 집에서는 배척을 받았지만,
배척하는 그들을 향하여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은 곳이 없다(마태13:57)."고 말한다.

 

유랑하는 설교자였지만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던 예수의 매력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이었을까?
예수는 더 이상 자기의 가족과 고향에 자기의 정체성을 가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에서 가족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모두가 '어머니요 형제자매'라고 말함으로써

공동체의 지평을 확대 시킨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는 어디를 가든

누구나 하나님의 동등한 자녀요, 새로운 가족이 된다.
그 가운데는 직업과 신분의 차별이 와해되고 평등 공동체가 실현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족보나 혈통 출신 지역과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혈통적 아버지인 요셉을 더 이상 아버지라 칭하기보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더욱 중시했던 까닭도

사막과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유랑하던 예수가
어느 날 새롭게 인식한 "하늘" 아버지에 대한 깨달음이

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을 체험하고 "하늘 아버지"를 체험한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탔고,
그 사명감은 제자들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한 열정으로 불탔다.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라고 하는 희망의 메시지와,
마음이 낮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천국 복음의 가르침 또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반면에 종교와 정치를 권력과 압제의 수단으로 일삼는 자들을 향해서는
"돌들이 소리 지르며" 너희의 불의를 고발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미 앞에서 본바와 같이 성전을 통해 매매와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
그리고 종교를 빙자한 정치 권력자들에게는 분노의 불을 뿜어댄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마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10:34)."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라.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겠는가(누가12:49)."

 

예수의 의도는 분명해 졌다.
불의를 폭로하고 정의를 회복하려는 것이었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사랑과 용서를 통한 화해의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복음이 전달되어지고 수용 되어질 때는

형제자매로서 하나님 나라의 한 가족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화(禍)가 있으리라고 혹독한 욕을 퍼부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마태12:3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아!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23:29-33)."

 

예수의 분노와 비난은 이러한 한두 가지 예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 할 것이다.
복음서 곳곳에서 외식하고 압제하는 무리들에 대하여
예수는 분노에 찬 격한 음성으로 가식된 종교-정치 지도자들을 비판하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게 와서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했던
예수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노에 찬 경고를 목청껏 외쳤던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과 관용을 강조하며 용서와 화해를 주장하던 예수가
분노에 찬 경고를 거듭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거짓을 버리고 돌아서라는 것이다.
진실 되게 살라는 단 한 가지 이유였다.

예수에게서 하나님은 진리다.
진리 앞에 거짓이 용납되지 않는다.
드러나는 위선을 폭로하고, 검을 주어 치유하고, 불을 질러 태움으로써
모두가 거듭난 '하나님나라'의 광장으로 나아오라는 선포다.

 

예수가 위대했던 까닭도 스스로 모범을 보였듯이
자신을 높이는 자를 낮추려 했고, 낮아진 자를 높여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삶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진리(眞)와 선함(善)과 숭고한 뜻으로
아름다운(美) 매력을 갖춘 예수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적 혼란 속에서
믿음(信)과 소망(望)과 사랑(愛)을 심어 주면서, 새로운 대안 공동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랑과 평화의 풍류객이었다.

"하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했던 예수가 공자를 만날 수 있는 접점도,
"하늘"의 도(道)를 따라 살고자 하던 공자의 덕치(德治)주의적 열망과 동일했다는 점이다.
그들 모두 제자들과 함께 스스로 무욕(無欲)의 비움(虛)과 나눔(施)
그리고 평화로운 공동체적 사귐(交)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땅의 질서와 인간다운 삶의 행복을 위하여
부끄러움 없이 바람처럼 자유로운 정신으로 살았다는 점에서도
이들은 서로 멋진 풍류객으로서의 만남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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