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예수 (Jesus)

 

 

Jesus of Galilee, Jesus of Nazareth라고도 함.

BC 6경 유대~ AD 30경 예루살렘.
20세기 세계 인구의 1/3 이상이 믿는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기독교(基督敎)의 창시자.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온 구세주(救世主)로,
목수 요셉의 약혼녀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聖靈)으로 잉태되어,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30세 때,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많은 기적을 행하면서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알리며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그의 활동에 반감을 가진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로마 총독에게 고발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사형에 처해졌다.

 

예수의 행적과 메시지들은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앙에는 신학적 동기와 전제가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의 진정한 생애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예수에 대한 많은 자료에는 예수가 BC 7~6년경에 베들레헴 혹은 나사렛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한다.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탄생설이 유력한데,
예수는 육적인 아버지가 없고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정통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이다.
예수의 가족으로는 어머니 마리아(미리암)와 목수인 아버지 요셉,
형제 야고보(야곱)·요셉·유다·시몬(구약 족장의 이름들) 등이 있는데,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마르코의 복음서〉 6장에 언급되어 있다.

예수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쳤다.
예수의 설교 안에 있는 모든 이념과 이미지는 하느님 자신이 그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매우 가까이 있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하나의 사상으로 집약된다.
예수는 결국 정치적 반란자로서 로마 법에 따라 형을 선고받았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석가모니 [Sakyamuni, 釋迦牟尼]

 


본명은 Gautama Siddhārtha. ?

인도 코살라 왕국 샤키아 공화국 카필라바스투~ ?
인도 마가다 왕국 말라 공화국 쿠시나라.
BC 6~4세기경에 인도에서 활동한 불교의 창시자.


성은 고타마(Gautama),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로서,
중부 네팔의 석가족(釋迦族)의 중심지 카필라 성(Kapila城)에서

정반왕(淨飯王)과 마야(摩耶)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29세 때 인생의 고뇌 해결을 위하여 출가하여,
35세에 부다가야(Budda-gayā)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그 후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명의 수행자를 교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성립했으며,
각지를 다니며 설법을 하다가 80세에 입적하였다.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산스크리트 어 이름은 ‘샤키아무니(Śākyamuni)’이다.

 

석가모니라 칭할 때, 석가(釋迦)는 북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Śākya)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의 진리를 깨달아 성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며,
같은 취지에서 세존(世尊:또는 釋尊)으로도 불리는 등 많은 호칭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이 '붓다'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음사하여 '불타'(佛陀)라 하고,
더 약칭하여 '불'(佛)이라고도 부른다.
불교 특유의 용어로서 붓다는 '깨달은 자'를 뜻하며,
교리의 전개 과정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구제자로서 다수의 붓다를 상정하여 소위 '부처'로 통용된다.
남방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라고 부르는데, 고타마(Gotama:산스크리트로는 Gautama)는 석가모니의 성이다.
일부의 경전에서는 BC 1~AD 2세기 무렵 서북인도에 침입하여
인도에서 널리 사용된 사카력(曆)을 만들어낸 사카(Saka)족도 석가로 쓰는 예가 있으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공자 예수 석가 공동성명(共同聲明)

 

공자가 이 세상에 다시온다면
사당과 제삿상을 없에버리고
지금 당장 살아있는 네 부모나 잘 모시라고 할겁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온다면
호화스런 거대한 교회를 다 팔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전부 다 나누어주고
사랑이나 잘 하고 살라고 할겁니다.

 

석가가 이 세상에 다시온다면
거대한 금불상 다 팔아버리고
산에서 내려와 자비나 잘 베풀고 살라고 할겁니다.

 

인과 예를 가르쳤더니
허례허식이나 못된 욕심에 빠지고

 

사랑하라 가르쳤더니

시기와 질투 탐욕에 물들어
교회나 키우고 목사를 하느님 처럼 섬기고

 

자비를 가르쳤더니
불상에다 빌고 스님을 부처 인 양 받드니

 

논어에도 성경에도 불경에도 쓴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어느놈들이 나를 팔아 장사하는거야...
이 몹쓸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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