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파우스트]
괴테의 삶과 작품세계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1749~1832)는
1749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추밀원 고문관을 지내는 부유하고 교양이 있는
아버지와 감성과 재능을 갖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년 괴테를 위하여 여러 명의 가정교사를 두고
엄격하게 교육을 시켰고 어머니는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어
풍부한 상상력을 배양시켜 주었다.
고향인 프랑크푸르트의 자유 분방한 분위기는
훗날 괴테의 세계 시민성과 국제주의적 정신에 큰 영향을 주었다.
1765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했다.
1770년에는 스트라스부르로 유학하여 헤르더를 만나
종래의 문학관을 분쇄하고 반 라이프치히적인 것에 대한 눈을 떴다.
그것은 계몽주의에서 천재주의로, 오성에서 이성으로, 인공에서 자연으로,
규칙에서 자유로의 변신인 것이다.
그는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문명(文名)을 떨치게 되었으며
질풍노도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발한 창작 활동을 벌였다.
1791년에는 궁전극장의 총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실러와 친분을 맺었고,
1806년 나폴레옹의 바이마르 공화국 침입당시 1789년부터 같이 지내던
클리스티아네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파우스트』,
『빌헤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친화력』,『서동시집』 등이 있다.
괴테란 이름을 누구나 들어 봤을 것이다.
나 또한 중학교 때의 ‘젊은 베르테르’란 소설을 통해 그 이름을 처음 접했다.
이미 중학교 때 그의 작품을 읽어볼 정도로 괴테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세계적인 작가이다.
솔직히 서양문학의 이해란 수업이 있지 않았다면 그냥 스쳐 지나쳤을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괴테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모두 깊은 뜻을 지니고 있어,
인간이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 뜻을 받아들이고 소화시켜 삶에 도움이 되는
교양을 쌓아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
이런 까닭에 그의 작품들은 불후의 고전으로 아직도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82년간의 생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인 경지의 예지를 터득하기도 했으나,
사랑이나 슬픔에 기꺼이 그의 모든 존재를 내어 맡기곤 했다.
내적 혼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활 규율을 엄수하면서도
삶, 사랑, 사색의 신비가 투명할 정도로 정제되어 있는
마술적 서정시들을 창조하는 힘을 잃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60년 가까이 노력해온 작품 파우스트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마지막 말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끌고 간다.’는 말로 맺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지상에서는 실현할 수 없는 남성의 비원이기도 하다.
여성은 그에게 있어 남성의 영원한 인도자요, 창조적 삶의 원천인 동시에
정신과 영혼의 가장 숭고한 노력의 구심점이었다
행복은 지식과 어떤 상관관계를 이룰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보면서
모든 학문에 능통한 주인공이 그 무엇인가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모습에서 배움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음을 새삼 깨닫는다.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가 60년에 걸쳐 완성한 희곡형식의 파우스트,
서사시의 형식으로 드라마에 빠져드는듯한 생동감이 있었다.
또한 신학과 천문학 법률에 능통한 지식덕분에 지상과 천상세계를 넘나들고
현대와 고대를 한장소에서 다루는 특이하고도 광범위한 무대에 숨이 가빠질때도 있었다.
글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처음에 주님과 악마의 계약이 있었고
그 계약에 의해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에게 조건부 계약을 맺는다.
아무리 지식을 쌓아도 가치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아 방황하던중
그는 악마의 손을 빌어 향락과 쾌락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더욱더 커져가는 괴로움뿐이었다
그의 본성은 선함이었던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후회와 함께 악마와 함께한 모든삶이 파괴된다.
그리고 용서와 구원이라는 가톨릭교리의 본질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주님은 인간에게 끝까지 사랑을 베푸신다.
악마가 제아무리 달콤함으로 인간을 꾀이지만
인간에게 선악의 선택권을 부여하고 말없이 지켜보고 계시는지 모른다.
그리고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파우스트는 24년동안 인간의 본능대로 마음껏 향락에 빠져본결과
그것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괴로운가를 깨달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이다.
어쩌면 나도 살면서 파우스트처럼 누군가의 힘을 빌어
내 마음대로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이기에 그 본능을 어떻게 승화시켜 나가느냐가
인간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통해 세상에 던진 메세지는 무엇이었을까?
그 결론은 사랑이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을 가치있게 만드는 윤활유임을
확인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청소년 탈선의 원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난보다는 사랑의 결핍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가난속에서도 자생력을 키워가지만
물질이 넘치는데 사랑이 결핍되면 그 속에서 탈선의 독이 피어나고 있음을 알게된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는 사랑을 나누고 살때 삶의 가치를 느끼며 인간다울 수 있으리라.
또한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알아야 한다.
봄에 싹이나고 여름에 무성해지고 가을이면 낙엽이 지고 겨울이면 죽는것이
자연의 순리이듯 인간도 태어나 늙고 죽는것은 자연스러움이요,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부분이라는 생각으로 비바람과 뜨거운 태양 아래서 알곡을 빚어내는 자연처럼
나도 내게 주어진 숙명을 사랑으로 감싸나가야 함을 다시한번 다짐해본다.
글을 좋아하는 바보, Faust 를 좋아하는 바보 한은섭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독일어: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일 ~ 1832년 3월 22일)는
독일의 작가이자 철학자, 과학자이다.
바이마르 대공국에서 재상직을 지내기도 하였다.
생애
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다.
왕실 고문관인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학과 성경 등을 읽었다.
북독일계 아버지로부터는 '체격과 근면한 생활 태도를,
남독일계의 어머니로부터는 예술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짓는 흥미'를 이어받았다.
어린 나이에 신년시를 써서 조부모에게 선물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67년에 첫 희곡 ‘연인의 변덕’을 썼다.
1770년 슈트라스부르크(스트라스부르) 대학 재학 당시
호메로스 , 오시안 ,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에 눈을 떴으며,
‘ 질풍노도 운동 (Sturm und Drang)’의 계기를 마련했다.
법률 사무소에서 견습생으로 있던 중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의 체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이다.
1775년 바이마르 로 이주하여 그곳을 문화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행정가로 국정에 참여해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고,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지질학, 색채론 등 인간을 설명하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786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했고,
1794년 실러를 만나 함께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1796년에는 대표적인 교양소설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를 썼다.
1805년 실러의 죽음으로 큰 충격에 빠지지만 이후에도 창작 활동과 연구는 끊임이 없었고,
[ 색채론 ](1810), [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1821), [ 이탈리아 기행 』(1829) 등을 완성했다.
스물네살에 구상하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완성한 역작
[ 파우스트 ]를 마지막으로 1832년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천재교육을 받았으며, 7년 전쟁 중 그의 고향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 극과 회화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레트헨과의 사랑(1763년-1764년)이 깨어진 후 16세 때 입학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1765년-1768년), 안나카타리나 쇤코프와 연애를 하였고,
이 체험을 통해 로코코풍의 시나 희곡을 발표하였는데 목가조의 희극 <애인의 변덕>, <공범자>가 그것이다.
분방한 생활로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하여 요양 중(1768년-1770년), 수산네 폰 클레텐베르크(1723-1774)와의 교제를 통하여,
경건한 종교감정을 키웠으며,
또한 신비과학이나 연금술에 흥미를 기울였다.
회복 후, 177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법률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러던 중에 헤르더와 상봉해, 문학의 본질에 눈뜨고 성서, 민요,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에 친숙해졌다.
그의 영향으로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당시 지배적이었던 프랑스 고전주의 미학에의 반발이 심해졌다.
제센하임의 목사의 딸인 프리데리케 브리온을 사랑하여 민요풍의 청신소박한 서정시를 지었고,
대승원의 건물을 보고 고딕 건축의 진가를 터득하기도 하였다?.
귀향후 변호사를 개업(1771년)하였으나, 관심은 오히려 문학에 쏠려 《괴츠 폰 베를린힝겐》
(1773년)의 초고를 정리하고 다름슈타트의 요한 메르크(1741-1791)와 친교를 맺었다.
1772년 법률실습을 위해 베츨라어 고등법원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샤를로테 부프(1753-1828)를 알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슈투름 운트 드랑기의 대표작인 희곡 《괴츠 폰 베를린힝겐》 및 비극 《클라비고》,
비극 《슈텔라》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여 작가적 지위를 확립했다.
초기 바이마르
1775년 4월 릴리 쇠네만과 약혼했지만 얼마 후 파혼하고,
당시 18세였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의 군주 카를 아우구스트 공에게 초청되어 11월 바이마르에 도착했다.
바이마르 시절 전기의 약 10년간(1775년 - 1786년)에는
정무를 담당하여 추밀참사관, 추밀고문관, 내각수반으로서 치적을 쌓는 한편
광물학·식물학·골상학·해부학 등의 연구에도 정진했다.
그 밖에 카를 아우구스트 공의 모후 아나 아말리아, 시인 크리스토프 빌란트,
고전적 교양미가 풍부한 폰 크네벨 소령, 궁정가수 코로나 슈뢰터 등 궁정 안의 사람들과 밀접한 친교를 맺었다.
괴테는 이런 정무나 사회 및 자연연구를 통하여 자연과 인생을 지배하는 법칙을 터득하고
자기 억제를 배우며 슈투름 운트 드랑적인 격정을 극복하여 점차 평정과 원숙의 도를 더해 갔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에 의한 감화가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우아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일곱 아이의 어머니였으나, 괴테의 이상적인 여인상이었다.
부인에 대한 애정과 동경, 절도와 체념, 이러한 것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시인에게 내면적인 평정을 갖게 하였다.
이런 내면적 변화에 응하여 저술된 것이 비극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산문판 1779년),
《토르콰토 타소(》(작성: 1780. 3. 30.-1789. 7. 31.)와 서정시 <인간성의 한계> <신성(神性)> 등의 시 작품들이다.
이탈리아
이탈리아 여행 중의 괴테,《캄파냐 로마나에 있는 괴테》, 티슈바인(Johann Heinrich Wilhelm Tischbein) 1787년 작
그러나 다른 한편 초기 바이마르의 이 10년간은 궁정생활의 중압으로 마음의 안정을 빼앗겨
정돈된 창작활동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으므로 1년반에 걸쳐서 이탈리아로(1786년-1788년) 여행을 떠났다.
이에 관해서는 후일 《이탈리아 기행》(1816)과 《제2차 로마 체재》(1829)에 자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탈리아에서 괴테는 남국의 밝은 자연과 고미술에 접함으로써
고귀한 내용을 완성된 형식으로 표현하는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운문판 1786년)와 《토르콰토 타소 》(최초출판: 1790년 2월)는 그의 대표작이며,
《에그몬트》(1787)는 슈투름 운트 드랑에서 고전주의로 옮겨가는 과도기의 작품이다.
바이마르
괴테는 1788년 6월 무렵에 독일로 귀국하여,
그해 7월에는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와 동거하여 1789년 12월 25일 장남 아우구스트를 낳았다.
그런데 1789년 7월 14일에 발발된 프랑스 혁명으로 괴테는 1792년에는 아우구스트 공을 따라
제1차 대프랑스 전쟁에 종군하여 발미 전투(1792년 9월)와 마인츠 포위전(1793년 4월-1793년 7월)에 참전했다.
그리고 그 직후 독일 문학사상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괴테와 실러의 상봉이었다.
1794년 7월말, 예나 자연과학 회의의 귀로에 종합적, 직관적인 괴테와 이념적, 분석적인 실러는,
괴테의 식물변형론을 통해 상호 이해하여, 1805년의 실러 별세 때까지 친교를 계속했다.
양자간에 교환된 서한은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가장 귀중한 자료로 되어 있다.
실러와 사귀는 동안에 저술된 주요작품에는
교양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1795/1796)와 서사시《헤르만과 도로테아》(1797)가 있다.
실러의 사후, 만년에 접어든 괴테는 《시와 진실》등 일련의 자서전을 저술하기 시작하는 한편,
이미 착수했던 창작의 완성에 힘썼다.
《친화력(親和力)》,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와 《파우스트》를 완성했고,
또한 《서동시집》(1819), 《마리엔바트의 애가》(1823)를 저술했다.
그의 만년에 관해서는 요한 페터 에커만(1792-1854)의 《괴테와의 대화》에 상술돼 있다.
업적
궁정극장의 감독으로서 경영·연출·배우 교육 등 전반에 걸쳐 활약했다.
1806년에 《파우스트》제1부를 완성했고 별세 1년전인 1831년에는 제2부를 완성했으며,
연극을 세계적 수준에 올려놓았다.
자연과학 분야에 까지 방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연극면에서는 셰익스피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고전작가들을 평가했고, 또한 그리스 고전극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종교
괴테는 루터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리스본 지진(1755)과 7년 전쟁(1756-1763)을 계기로 신앙에 회의를 가졌다.
1782년 괴테는 "난 반 기독교인이나 말뿐인 기독교인(un-christian)이 아니라
비 기독교인(non-christian)이다."라고 말했다.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이탈리아 기행》
《파우스트》
《서동시집》
시 〈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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