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영혼의 편지)
요즘 버스 정류장에 보면 "반 고흐" 라는 큰 글씨로 쓴 광고 문구를 볼 수 있다.
그래 반 고흐 작 영혼의 편지라는 책을 살짝 엿보기로 하자.
1889년 5월8일 고흐는 한 요양원에 들어간다.
그해 1월 그가 했던 사업 가운데 가장 성공적이었던 고갱과의 협업 관계는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그린 자화상 사건으로 깨지고 말았다.
동생 태오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아오고 있었지만,그 돈으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었었다.
빵마져 살 수 없는 궁지로 내몰리고 있던 그는 식비를 절약하기 위해 질이 안 좋고 딱딱하여 씹기조차 어렵고,
소화도 안되는 빵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거비까지 내는 건 더욱 어려운 일.
요양원에 들어간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 중에서 생활비가 가장 덜 들기 때문이었다.
그 용양원에서 6월9일 고흐는 동생인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지난 해 아를에서 그린 "론 강 너머 별이 빛나는 밤"을 곧 있게 될 앙데팡당전에 출품하려면
"이 작품이 어떤 사람에게 내 것보다 나은 밤의 장면을 그리는 데 아이디어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했다.
또한 "비록 고갱과 베르나르의 최근 작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 두 습작 "별이 빛나는 밤"과 "올리브 과수원"은
그들의 작품과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적었다.
7월7일 고흐는 요양소에 들어오기전에 생활하던 노란 집으로 자신의 짐과 작품들을 가지러 간다.
그러나 짐을 맡겨 뒀던 친척이 보관 상태도 안 좋았을 뿐 아니라 작품들도 형편없는 쓰레기라고 생각하여
크로키와 스케치 대부분은 버리고 유화는 인근 고물상에 헐값으로 팔아넘긴 뒤였다.
고물장수는 자신의 친구에게 싼값에 이 작품 몇 점을 넘겼고
이 친구는 경영하던 호텔에 몇 점을 걸어 놓는다.
또한 고물상에 있던 작품들은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이 구매하여 자신의 집에 걸어 놓거나 물건을 싸는 용도로 사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의 투숙객들이 이 작품들을 높이 평가하면서 사 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작품의 값이 뛰어오른다.
고흐가 그렇게 바라던 물감 값보다 더 비싼 값에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는 시점이 드디어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 고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몇 해 전 장기 투숙했던 독일의 한 여관 인근 들판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한 고흐는
곧바로 죽지도 못하고 피를 흘리며 여관까지 왔고,
여관에서 의사와 여관 주인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별이 빛나는 밤"은 동생 테오에게 1889년 9월28일 전달 되었고,
테오는 이 작품을 1890년4월에 열린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
카달로그에는 'No.832,Le Cypres'라고 적힌다.
빈센트 반 고흐,그의 그림은 명작이 되었다.
그리고 불행했던 그의 삶은 그림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자신의 손으로 두 귀를 자른 광기의 화가
언제나 돈 걱정을 해야 했고 동생 테오의 재정 지원이 없었다면 굶어 죽었을 사람
마지막에는 반복되는 발작으로 그림마져 뜻대로 그리지 못했던 사람
지독한 불행은 그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의 그림의 후광이 되었다.
위대한 예술은 고통 가운데 피어난다고 하지만,모든 고통 받는 이가 진정한 예술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반 고흐,영혼의 편지>는 불행과 광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흐의 영혼에 다가가도록 돕는 책이다.
'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자화상'등 고흐가 남긴 수많은 작품에는 지상의 고통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강렬한 색과 꿈틀대는 선들이 이끌어 가는 곳에 불행한 예술가의 우울과 신경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고흐 그림의 비밀을 제3자의 설명 없이 고흐의 목소리로 전달한다.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로 구성된 이책에는 궁핍한 생활,동생에 대한 부채감,
계속되는 발작으로 점철된 고흐의 불행한 삶이 고통을 견디며
영원을 꿈꾸는 위대한 영혼과 함께 씨실과 날실로 얽혀 있다.
그는 스물일곱아라는 늦은 나이에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전에는 그는 미술품 상점의 직원으로 전도사로 일했지만 언제나 주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고
심지어 그의 가족들에게마저 신뢰를 얻지 못했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안정된 직장 없이 방황했고 생계유지를 위해 노력했어야 할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는 '최하 중의 최하급'인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가난했고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예의와 관습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림을 시작하기 전이나 후에나 죽을 때까지 고흐는 자신에게 찍힌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에 괴로워했다.
눈에 금세 들어오는 당장의 결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의 잣대는 고흐의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드르지 않다.
번듯한 직장을 가지지 않았고 돈도 벌지 못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세상은 비밀스럽게 일어나는 그 일을 가늠할 잣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흐는 세상이라는 새장에 갇힌 새였다.
하지만 고흐의 영혼은 부조리한 세상에 갇히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눈은 신의 습작과 같은 세상의 불안전함을 넘어서
별이 빛나는 밤 하늘에 닿은 영혼을 꿈꾸었다.
생명을 창조하는 예술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는 예술을 위해 그는 자신의 생명을 던졌다.
고흐는 작업실 냄새가 풍기는 그림에서는 사물이 가진 진실보다 화가의 편견이 드러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차의 대합실과 거리,그리고 아를의 대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밭을 갈고 있는 사람을 실제로 보면 화가가 머릿속으로 구상하던 인체의 비율은 간단히 뒤집어진다.
고흐는 도시의 아카데미에서 관습적으로 그려 내는 선과 색은 세련되긴 하지만
농촌의 아낙들이 일하는 모습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미켈란젤로와 같은 위대한 화가들이 그랫듯이 고흐 역시 사람의 관습에 따른 인체의 표현을 넘어서고자 했다.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을 그리는 일이야말로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었다.
당시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하가들에게 농부,광부,매춘부와 같은 이들은 더럽고 추악한 사람들 이었다.
그들은 보통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없거나 번지르르한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포장되었다.
가령 밭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은 한가로운 농촌의 고요함을 드러내는 장치의 불과했다.
그러나 고흐는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을 포착하고 싶었다.
냄새가 나는 밭과 노동의 찌들어 거칠어진 피부 그라고 그 속에 담긴 역동하는 생명이야말로 고흐가 본 삶의 진실이었다.
"감자 먹은 사람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고흐는 자신이 느낀 생명을 색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색을 찾아 1888년 2월 태양이 찬란한 빛을 지상에 던지는 프랑스 남부 지방 아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체력이 완전히 바닥날 때까지 매일같이 야외로 나가 굳건히 자란 사이프러스,
밀밭,씨를 뿌리는 농부,수확 하고 있는 농촌의 풍경을 그렸다.
고흐는 아를에서 그의 주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사이프러스가 보이는 밀밭" 등을 이리저리 삮이는 색의 향연 속에서
고흐는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 안에 존재하는 영원을 보았다.
살아생전 고흐의 절대적인 지지자이자 비평가였던 동생 테오는 이 시기에 그려진 고흐의 그림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 그림들 모두에서 이전에는 형이 얻지 못했던 강렬한 색채의 힘을 볼 수 있었어.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귀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을텐데,형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더군.
그 그림들은 형이 자연과 생명체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거야.
형이 생명체 안에 본래부터 내제한다고 강렬하게 느끼는 것들.]
고흐는 날 때부터 천재적인 화가는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는 말하려는 것을 더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바로 "그래,내 그림들,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 버렸지.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라고 스스로 고백할 만큼 열정적이었다는 데 있다.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수나 잘못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고흐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지고 캔버스 앞에 섰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훌륭하게 될 거라는 착각은 고흐에게는 자신의 침체와 평범함을 숨기려는 시도일 뿐이었다.
고흐는 "작품을 향한 진지한 열정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고 썼다
그의 열정은 습작 시절부터 스스로를 예술가로 정의하게 했다.
고흐에게 예술가란 누군가로부터 부여받은 타이틀이 아니었다.
이미 무언가를 찾아냈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예술가는 아니었다.
반대로 찾고 있는 것이 무었인지는 뚜렷이 모를지라도 찾기 위해서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예술가였다.
반 고흐가 남기고 간 편지를 통해 우리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넘어서는 예술가의 위대한 정신을 보게된다.
37년 생애 동안 지독한 가난과 고독에 시달렸던 고흐는 후원자이자 동반자였던
네 살 터울의 동생 테오와 1872년 8월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668통이나 되고 그 밖에 어머니,여동생 윌,
동려 화가 고갱과 베르나르 등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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