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과 구절초

 

 

 

 

 

세상물정에는 숙맥이고 작은 일에도 바보스럽게 잘 웃는 한 여인이 있다.
숫기가 없어 연애도 한번 못해 본 체 중매로 결혼을 하였으나
그렇게 만난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잘 난 사람인 줄 알고 사는 여인이다.
겁이 많아 혼자서는 여행도 못 다니고 이상하게 생기거나 날 것은 잘 먹지도 못한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 나무도 꽃도 잘 알지 못한다.
벚나무 열매가 벚찌인지 뽕나무 열매가 오디인지도 모르고,
장사익의 찔레꽃이란 노래를 좋아하지만 정작 찔레꽃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기를 굴 때나 냄새나는 음식을 만들 때,
거실에 있는 화초가 그 냄새를 싫어 할 것 같아
공기 맑은 베란다에 내다 놓는다고 하는 대목에선
어설픈 지식보다는 진실로 자연을 사랑하는 고운 심성을 느낄 수 있다.
잘난 구석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노라고 한다.
기계치에 방향치에 길치에 숫자치에.... 바보 치자가 줄줄이 달렸노라고 한다.
옆에서 보기에도 그래 보인다.

그런데도 그 여인이 좋아 보이니 나도 바보 속(屬)인가 보다.
나는 여태껏 그녀가 남 칭찬하는 말은 들었어도
남의 흉을 보거나 자기 자랑하는 걸 보지 못했다.

왜 항상 남의 얘기 듣기만 하고 말이 없느냐고 하면
자기는 아는 게 별로 없다보니 할 말도 별로 없노라고,
그보다는 남의 얘기 듣는 게 더 좋노라고 한다.

 

그저 겸손의 말 같지만 어쩌면 이 말은 성숙된 수양과
훌륭한 처세의 모범 답안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 앞에서 잘난 체 자기의 식견을 떠벌려 봤자 결과는 본전이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거나 겸양이 결여된 섣부른 지식의 피력은

자칫 현학으로 비취기 쉬우며
아는 바를 내 뱉는 다고 그 지식이 재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나 남의 얘기를 새겨들으면 분명히 남는 것이 있다.
그녀의 내부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얻은 지식을
잘 마름질해 차곡차곡 쌓아 둔 창고 같은 게 있을 것 같다.

남 앞에 나서거나 자기 의견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녀가 못났거나 배움이 모자라는 건 결코 아니다.

어쩌다 접하는 그녀의 글 속에서 그녀의 지성과 철학을
엿 볼 수 있으며 용모 또한 반듯하기 때문이다.

 

망설임 없이 자기의 부족함과 무식함을 진솔하게 얘기 할 때는

바보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바보스러움 속에 감추어진 순수와 진실을 느낄 수 있다.

자기가 진실만을 얘기하듯 남의 말도 당연히 진실일 걸로 믿는다.

남의 말의 진위(眞僞)를 가리지 못해

몇 번이고 크다란 곤경에 빠졌던 나로서는
아직도 고이 간직한 그 순수가 부럽기도 하고
그 순수를 간직할 수 있게 울이 되어준 주위 환경 또한 부럽다.

 

남의 말을 의심해 볼 줄도 모르고

반론을 제기 할 줄도 모르는 것은 단지 바보여서 그럴까.

황희가 벗들과 담론을 나누고 있었다.

갑이란 벗의 말끝에 “자네 말이 옳으이.”하고 황희가 동감을 표시했다.

을이란 친구가 갑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자 “자네 말도 옳구먼.”하지 않는가.

옆에 있던 아내가 “이 사람 말도 옳다,
저 사람 말도 옳다니 당신도 참 딱하구려.”하고

황희의 줏대 없음에 핀잔을 주자
“듣고 보니 당신 말도 맞구만.” 해서 좌중은 한바탕 웃음판이 되었다.
훗날 명 제상이 된 황희 정승의 일화이다.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칭찬하는 자세는 최고의 덕목이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비판하기 이전에

자기 생각에 오류가 없는가를 먼저 생각 해 보는 것은
자기의 성장과 함께 화합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아무리 자만이 넘치는 사람도 항상 자기를 존중해 주는 사람의 의견은
쉽사리 무시하지 않는다.

어쩌다 그녀 앞에서 잘난 사람들 사이에서 덩달아 잘난 체를 하고 난 뒤
나중에 뒤돌아보면 한없이 부끄러워 질 때가 있다.

나의 자만과 경솔함에 비해 그녀의 겸손함과 신중 함은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나지 않는가! 

세상엔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는 사람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자기들이 나서면 모두가 태평가를 부를 수 있도록 만들 것 같이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문제 투성이고

오히려 잘난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자꾸만 삐거덕거린다.

세상은 잘난 사람이 많다고 잘난 세상이 되는 건 아닌가 보다.

칡나무와 등나무는 둘 다 다른 물체를 감고 올라가며 자라는 덩굴식물이다.
이들에겐 물체를 감고 올라 갈 때,

항상 오른쪽으로만 감고 올라가는 공통된 습성이 있다.
경우에 따라선 왼쪽으로 오를 수도 있으련만 한사코 오른쪽으로만 오른다.
이런 외고집 때문에 둘은 한 물체를 타고 오른다 할지라도 평생 만날 일이 없다.
그래서 서로의 의견이 평행선을 그으며 화합하지 못하는 모양을
칡 갈(葛) 등나무 등(藤)자를 써서 갈등이라 하지 않던가.

 

어쩌면 잘난 사람들은 칡나무 아니면 등나무일지도 모른다.
하늘 끝까지 올라 보았자 독야청청이다.
스스로 바보라고 여기는 사람보다는

서로 잘난 사람들 사이에는 항상 갈등이 생긴다.
그것은 자기의 유식에 도취하여

세상엔 왼쪽으로 오르는 길도 있다는 걸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절초는 들국화의 일종이다.
우리가 시골길 섶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들국화는 대부분 구절초와 사촌간인 쑥부쟁이나 개미취다.
그들은 사람들의 왕래가 비교적 잦은 들이나 야산에

무리 지어 피어 예쁜 자태를 다투어 뽐낸다.

 

구절초는 쑥부쟁이나 개미취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다른 점이 한 두 가지가 있다.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산 속 덩굴사이나 바위틈에 주로 피면서
향기가 거의 없는 쑥부쟁이나 개미취와 달리 은은한 향기를 가졌다.

찾는 이 없는 한적한 어디쯤, 아홉 구비(九折) 역경을 딛고서 곧은 꽃대 밀어 올려,
하얀 얼굴 자기만의 향기로, 청초하게 피어 있는 초롬한 자태.

우리네 옛 여인의 현신이런가!

 

향기는 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구한 영혼에서 풍겨져 나오는 사람의 향기는

그 어떤 꽃보다도 주위를 아름답고 향기롭게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얘기를 관심 있게 들어 주고
잔잔한 미소로 무언의 공감을 표시하는 성숙된 자세의 그녀는
뭇 나무나 덩굴들 사이에 피어 난 한 떨기 구절초 같다.
그녀를 닮아야겠다는 이상주의와 그래가지고는 험한 세상 살기 힘들지 하는
현실주의 사이에서의 갈등은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다.

 

꽃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마음을 가진 여인의 예기.

 

2011.11.07. 한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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