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탁월한 기능을 발휘케 하는 그러한 궁극적 목적이란 무엇인가.?
궁극적 목적이란 그것이 다른 무엇에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뜻의 궁극성과,
더이상 아무것도 보탤 필요가 없는 자족함이라는 뜻의 완전성의 두 측면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이 두가지 성질을 갖춘 그 긍극적 목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리스토스텔레스의 윤리관은 천당가기 위해서 존재한다 든가,
신이나 신의 중개자에 의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존재한다 는 후대 기독교의 종말론적
구원론적 세계관과는 매우 다른것이다.그리고 훨씬 비종교적인 건강함이 있다.
그리고 인간을 신 앞에 왜소하게 비하시키지도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이 무엇이냐에 관한 것이다.
"행복"은 "기분 좋게 몽롱한 심적 상태(a mental state of euphoria)"가 아니다.
대개 현대인이 "행복하다"는 말을 쓸 때는 애인을 만나 몽롱하게 기분좋거나,
상을 받아 흥분되었다거나 하는 심리적 상태를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유다이모니아"는 심적 상태가 아닌
"성공적 삶"을 말하는 갓이다.
그것은 정적인 상태가 아닌 동적인 활동(dynamic activity)이다.
물론 "성공적 삶"이란 "아레떼"라는 희랍인들의 일반적 관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당연히 "성공적 삶"이란 인간이 인간적으로서의 특유한 총체적 기능을 가장 잘 발현하는 활동을 구현하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잘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는 영원이나 불멸이나 불사나 불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언어들은 모두 종교적 언어이다.
인생의 진리에 영원불변은 없다.
인간은 죽으면 끝이다.
아니 죽어도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결국 잊혀지고 만다.
인류의 역사에서 수없는 신들의 이름도 잊혀지고 말았다.
신들의 역사는 사실 알고보면 초라한 것이다.
지금 제우스를 믿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제우스는 관광상품이 되어 입장료수입으로 돈을 좀 벌고 있을 뿐이다.
야훼가 그런 신세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 있는가!
태양도 영원하지 않다.
앞으로 50억년이면 소진해버린다.
그럼 지구도 끝난다.
생명도 끝난다.
인류의 역사도 끝나버리는 것이다.
영원은 없다.불변은 없다.
하나님도 불변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 인간이 믿고 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지속태"일 뿐이라고 공자-자사는 말한다.
희노애락의 삶 속에서 중용을 "지속"하는 것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
그것처럼 지고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
지속이란 불변이 아니라 변화이며 시간 속에서 유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 알마만큼 지속해야 할까?1억년?평생?100년?
공자는 말한다
3개월만이라도 지속해 보아라!
아니 중용을 3개월 지속하는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보다 더 영원하단 말입니까?
공자는 힘주어 말한다."그렇구 말구.암~그렇구 말구"
공자는 말한다.
식과 색의 중용을 삼 개월만 지속해 보아라!
과연 그대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삼 개월이라도 실천해본 적이 있는가?
과연 그대는 항상 데리고 잘 수 있는 아리따운 여인이 옆에 있는데
삼 개월동안 색(色)을 멀리해 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결재시간에 갇힌 스님의 이야기가 아니다.
평범한 선남선녀의 일상적 삶 속에서의 이야기다.
중용의 용(庸)은 범용(凡庸)과 항상(恒常)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삼 개월만 철저히 중용을 지킬 수 있어도
그 후로는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그냥 굴러가게 된다고....
2012.11.24.한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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