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이야기

 

소크라테스(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소크라티스,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에 의해 '신성 모독죄와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로 기원전 399년에 71세의 나이로 사약을 마셔 사형을 당했다.

 

흔히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불린다. 실존철학의 거장인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위대한 사상가들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는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다.
플라톤이 20대인 시절,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끝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며,
이는 그의 귀족주의(철인정치) 지지의 큰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의 증손 제자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사례가 없다.
이런 결과,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언급한 사료들은 역사적으로 정확성을 내세울 까닭이 없었으며, 때론 당파적이기까지도 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처형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생애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철학·기하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사상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 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하던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장인이 아레테(ἀρετή, 훌륭함, 탁월함이라는 뜻)을 발휘하려면 자신의 기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듯,
인간으로서의 아레테, 즉 덕을 발휘하려면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다이몬은 일종의 귀신에 포함됨)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
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도덕론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가 부패하던 시기였고, 이로 인한 개인윤리 타락이 극심한 시대였다.
그는 여러 악덕을 '무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덕은 이성적 사고의 기초 하에 생겨난다.
또한, 덕의 확대는 사회를 더 이성적인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점이다.
또한, 이성의 냉소로 인한 부덕함이란 개념 자체를 비판했다.
그는 악덕한 자는 필연적으로 앎이 부족한 무지한 상태에 있다고 봤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냉소적 이성'은 성립할 수 없다고 봤다.
그의 이러한 지행합일론은 그가 윤리·도덕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그는 일상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했으며, 자신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청년들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리고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사후 '스토아학파'에 의해 계승됐으며, 기독교의 윤리관에도 큰 영향을 줬다.

 

영혼 중심적 사고

소크라테스는 육체-영혼 이원론자였다.
그는 육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그저 껍데기일 뿐이고, 만 지식은 영혼 안에 내재된 개념이라고 봤으며, 영혼은 불멸한다고 봤다.
인간은 영혼을 소유한 존재이지만, 육체의 감각적 요소에 의해 영혼에 내재된 진리를 통찰하는 것을 계속 방해 당한다고 봤으며,
그는 이를 극복하면 만 지식을 얻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극복 방법은 바로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 산파술로 감각으로 인해 얻은 여러 '오류'를 하나씩 잡는 것에 있다고 봤다.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여 그는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죽음'을 긍정하기도 했다.

 

변론과 크리톤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문서를 참고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
이 경구가 처음 등장한 것은 로마시대이며 말한 사람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로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했던 몇가지 사례들이 있다.
반면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제의하지 않음으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정당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고 친구인 크리톤에게 밝힌다.
그러나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평소의 냉정한 변증법적·이성적 논법을 구사하지 않고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모습으로 크리톤을 설득하고 있기에 이는 진의를 모두 파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변론》'과 《크리톤》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 중 《크리톤》에 실린 모습이 과장되어
《변론》에 담긴 법령 불복종자로서의 모습을 누르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는데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말은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진리조차도 회의하고 가짜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기껏해야 인위적인 실정법을 무조건 옹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철학과 법의 기본 성격조차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다.[5]

 

산파술

소크라테스는 구두언어 - 흔히 당대에 로고스(Logos)라 불리던 - 의 형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구두언어는 지(知)의 매개인 정신을 다른 상대방에게 전하는 유일한 운송 수단으로 봤다.
즉, 그에게 있어서 구두언어는 현대의 관점에서 말하는 단순한 규칙적인 음파의 개념이 아닌,
발화자의 사유 자체를 어떠한 오류도 없이 밖으로 내보내서, 듣는 이의 사유에 영향을 주는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했는데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즉각적인 답을 주는 것보단 거꾸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선호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견이 무지에 기인한 의견 또는 그에 준하는 단견일 수 있다는 것을 았다.
그는 자신이 만 지식을 알지 않는 한 단견으로 토론을 중지시켜서 '앎의 변증'을 멈추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질문에서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끝 없이 질문했으며,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생을 통해 자신이 직접 책을 쓴 일이 없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으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을 낳았다.
또한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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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이야기

 

 

플라톤(고대 그리스어: Πλάτων, Plátōn, "넓은, 어깨 폭이 넓은";, 영어: Plato /ˈpleɪtoʊ/;
기원전 428년/기원전 427년 또는 기원전 424년/기원전 424년 ~ 기원전 348년/기원전 347년)은
서양의 다양한 학문에 영향력을 가진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었고,
현대 대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아카데메이아’를 아테네에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그의 실제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에서 폭넓은 주제를 강의하였으며,
특히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등 많은 철학적 논점들에 대해 저술하였다.
플라톤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대화편》이다.
비록 일부 편지들은 단지 그의 이름을 붙여서 내려오고 있기는 하지만,
플라톤에 의한 진짜 《대화편》은 모두 온전하게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의 합의에 따라, 그리스인들이 플라톤의 것으로 생각하는
‘알키비아데스 l과‘클레이토폰’ 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의심스럽거나
또는 ‘데모도코스’와 ‘알키비아데스 Il’ 등과 같은 대화편들은 대개는 위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편지들은 대개 거의 모두 위조된 것으로 여겨지며, 일곱번째 편지만이 예외로서 위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이었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있는 내용과 주장 중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견해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견해인지에 대한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어떠한 것도 글로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종종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플라톤의 많은 아이디어들, 적어도 그의 초기 연구들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것을 빌려오거나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가 이성 우위의 전통을 가진 서양 철학에 미친 영향은 더할 수 없이 크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라고 평했다.


플라톤은 아테나이의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배우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관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키레네 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었고,
피타고라스 학파를 접하며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어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라케스〉 등을 쓰고,
40세에 귀국하여 〈고르기아스〉, 〈대(大)히피아스〉, 〈소(小) 히피아스〉를 썼다.

그는 그의 이상 국가를 실현해 보고자 친구인 디온의 권고로 시켈리아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초청에 응하였으나,
그의 과두 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얻어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후에 그의 저작을 본 퀴레네 사람 덕분에 구출되어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아카데메이아 학원을 건립하고 제자 양성에 전력하면서 저작에 몰두하였다.
〈향연〉, 〈파이돈〉, 〈국가〉, 〈파이드로스〉 등 주요 저술이 여기서 이루어졌고, 이 학원은 529년까지 계속되었다.
대학교의 초기 형태인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기원전 357년 디오니시오스 2세의 간청을 받자 망설이던 끝에 다시 시켈리아로 가서 이상 정치를 펴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년 만에 귀국하여 〈법률〉 등 몇 개의 저서를 더 쓴 뒤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파이돈부터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상에서 독립하여 이데아론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학설을 제창하였다.
우리가 삼각형을 생각할 경우에 현실적으로 삼각형을 아무리 정확하게 그린다고 해도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그려 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한 변의 직선마저 완전하게 긋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직선, 완전한 삼각형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인정하고 계산도 하여 해답한다.
결국 현실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현실의 삼각형은 이 이데아를 인정하는 까닭에 삼각형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수학의 대상뿐만 아니라 선(善)의, 미(美)의, 용기의 이데아라는 것도 거기에서 생각해 낼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완전한 선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겠으나 완전한 선의 이데아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보다 이것이 낫다고 하는 비교는 할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꽃은 조락(凋落)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폐허가 되어도 아름다움 자체는 그것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미의 이데아이다.
이 미의 이데아에 현실의 개체가 의탁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개체가 된다. 즉 미의 이데아는 아름다운 개체의 원인이다.

사람의 영혼은 원래 이러한 이데아계(界)에 있었는데 육체를 갖추고 이데아를 망각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진·선·미를 인식하는 것은 영혼이 원래 살던 이데아계를 상기하는 것과 같다는 상기설을 주장하였다.

 

‘플라톤의 교육관’ 목적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된 충동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과, 육체와 결합되지 않으며
불사적인 순수한 이성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이지만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완전 지선의 실체계인 이데아를 직관할 수 없으며 세상에 탄생하여 육체 속에 듦으로써 이데아를 잊고 있다.
이 잊었던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상기'하여(상기설),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 부분의 덕이 지혜이며, 정욕적 부분의 덕을 절제,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의 덕을 용기라고 하는 것이다.
'올바름(dikaiosyne, 또는 '정의')란 여러 덕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이러한 덕론을 통하여 인간 개인의 윤리학을 논하였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사회 전체의 윤리설을 주장하였다. 그것이 그의 '국가(Politeia)'다.


플라톤의 교육방법

그는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이며,
기개의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의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성은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 정치론을 전개했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 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철인 정치

철인 정치론을 전개한 플라톤은 기본적으로 엘리트에 의한 지배를 옹호한다.
일반적으로 귀족정은 평등사회가 아닌 신분사회를 옹호하는 데, 플라톤 또한 신분사회를 옹호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귀족정의 궁극적인 목적과 그 실현 양태는 일반적인 귀족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귀족정에서의 왕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같은 높은 신분으로써의 도덕적 의무를 중시해야 하는 데,
그 실현은 한가지 예를 들면 왕의 사유재산의 형태로 나타난다.
플라톤은 왕의 사유재산은 오직 공익을 위해서만 쓰여야한다(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밑의 귀족들까지도 사유재산을 공유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신분의 상징인 왕이라면 그만큼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정치 일선을 담당한 일선 ‘귀족’들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 계급에 기반한 귀족 또는 세습에 의한 귀족이 아니라,
철학 지식이 충만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는 ‘지식인에 의한 독재’를 줄곧 주장해왔으며,
시민 계급에 의한 토론 정치인 아테네의 민주정을 ‘우민 정치’라고 비판해 왔다.

뿐만 아니라 그의 ‘네가지 주된 덕’(cardinal virtues)에서는 ‘조화’라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데,
‘네가지 주된 덕’에 맞는 각각의 신분이 각자 맡은 일만을 해야하며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일을 한다거나 서민이 전쟁을 한다는 것과 같은 용기를 보이는 것은 플라톤의 관점에선 ‘사회적 부조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초기 사회주의

오늘날 사회주의라고 하면 일컬어지는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전제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만,
인간은 정치·사회적으로 독립될 수 없는 개인이며, 더 나은 정치·, 사회 체제를 만드려는 것이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진리라고 설파했다.
또한 인간은 더 나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이성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 존재라는
목적론적 인간관이란 개념을 만들었기 때문에 초기 관념적 사회주의 기조의 창시자라고 알려졌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으로 계승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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