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

 

청주 한씨 중시조 묘와 명당 조건

둥근 산봉우리들 옥구슬로 꿰놓은듯…조선조 왕비 6명 배출

 ◇구슬 같은 봉우리들로 이어진 우백호 자락. 6명의 왕비를 배출한 땅기운으로 풀이한다.

이 기자는 청주 한씨 중시조 묘 취재 길이 초행입니까?”

“아닙니다. 수년 전 어느 풍수학회 간산 길에 동행한 적이 있습니다마는….”

“그럼 강원도 오대산 적멸보궁, 충남 예산 남연군 묘, 전남 장성 여흥 민씨 할머니 묘,

전북 순창 김극뉴 묘도 답산했겠군요.”

청주의 ‘기인풍수’ 오암 이정훈 선생이 현장답사 여부를 묻는 곳을 생각해보니

예로부터 풍수대가들 사이에 8대 명당으로 꼽혀오는 길지들이다.

모두가 수백 년에서 멀게는 1000년이 넘는 세월을 한 곳에 자리하며

후손들의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는 명혈처 들이다.

“오암 선생과 동행을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만 한두 번씩은 발길이 닿은 명당들이네요.”

오암은 전국 산간벽지를 얼마나 뒤지고 돌아다녔는지

불특정 지역 명소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상세한 설명을 자청하고 나선다.

필자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더니 놀랍게도 그곳의 산세와 물길까지 그려낸다.

사랑방 풍수공부 10년보다 간산 길 1년이 앞선다는 현장학습의 지침도 누누이 강조한다.

일행들 간 자신만의 산행 체험담으로 꽃피우는 동안

이상돈 충북지회장(사단법인 정통풍수지리연구학회)의 갤로퍼 승용차가 도착한 곳은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산 18번지.

지관의 판단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전국의 으뜸 명당으로

손꼽히는 청주 한씨 중시조 한란(韓蘭·853∼916)의 묘역이다.

◇청주 한씨 중시조 한란 묘. 봉황포란형의 8대 명당 중 하나로 풍수물형에 맞는 법수를 고루 갖추고 있다.

   이 묘를 쓴 후 조선조에서 재상, 공신 등 숱한 인물이 나왔다.

 

청주 한씨 후예들은 이 묘에 대해 신앙 같은 열정과 믿음을 갖고 있다.

이곳에 중시조 묘를 용사한 뒤 후대 조상들의 벼슬길이 탄탄했음은 물론

현재까지도 문중 발복이 끊이지 않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한란 묘에 와서는 살짝 치솟아 자기 안산 형태를 갖춘 전순(前脣)에서부터 압도당한다.

전순이 무엇인가.

봉문 앞의 공활한 여유 공간으로 내룡맥의 설기를 막아주며

남주작 직사풍을 순화시키는 방조제와도 같은 것이다.

전순도 여러 형태여서 마치 성난 파도가 바닷물을 말아 올리듯 활 모양이어야 하는데

바로 이곳에 와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치아를 봉분으로 가정할 때 전순을 잇몸으로 비유하면 적절할 듯싶다.

오암이 이상돈 박문서 송미옥씨 등 간산 일행을 앞서 제치고

혈처 뒤 입수룡맥에 가 바위를 밟고 서 있다.

“한란 묘에 와서는 이 응기석을 꼭 찾아 보고 가야 해요.

이 암석은 지상보다 지하에 매몰된 부분이 훨씬 웅장합니다.

여기에서 일단 지맥의 운기를 집적했다가 천년 세월에도 끄덕 없는 운세를 공급해 주고 있어요.

명당에는 반드시 갖춰야 할 조건입니다.”

그러고는 필자더러 탐색봉을 꽂아 내토(內土)를 깊이 떠 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지하 암석에 걸려 천심(穿深)이 불가능하다.

암석의 위치는 당판의 혈장을 토해내기 위해 목처럼 조인 모습을 한 속기처(만두) 지점에 있다.

이 지회장이 나경을 꺼내 내룡을 측정한다.

“해방(亥方·북→서로 30도)으로 입수(入首)하면서 몇 차례 분절(分折)했네요.

건(乾)과 해(亥)가 동궁(同宮)이니 목국(木局)으로 법수에 딱 맞아떨어집니다.”

이씨도 개인 사업을 하며 혈처 찾아 전국 산하를 누빈 지 22년째라고 했다.

그의 법수풀이에는 많은 내공이 쌓였음을 의미한다.

해입수 용맥을 따라 부인 송씨와 합장된 한란 묘 봉분 뒤에서 좌향을 재보니

건좌(서→북으로 45도) 손향(동→남으로 45도)이다.

금체형(金體形)의 현무봉이 경유(서→남으로 7.5도)룡으로 동궁을 이루면서

지맥(枝脈)을 펼쳐 내리닫다가 유혈(乳穴·여인의 젖가슴 형상)로 우뚝 서 버렸다.

오암은 이래서 이 지형이 봉황포란형이라고 말한다.

◇자기 안산을 이루는 혈처 앞의 전순. 최길격으로 꼽힌다.

 

좀 전문적이긴 하지만 한란의 묘가 어떤 법수에 맞아 떨어져 명당인가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풍수 전문용어가 일반 독자들로선 얼른 납득이 안 가겠지만 풍수학인들에게는

참고가 될 듯 싶어 기록해 두고자 한다.

구성법(九星法)에 따라 북현무가 금체형일 때 그 묘에 합당한 좌향은

경(庚) 신(辛) 신(申) 유(酉) 건(乾)좌로 보는데 건좌로 용사돼 있다.

이 좌향에서 조상 음덕을 입는 후손은 경·신·신·유년에 태어나는 사람들에게 주로 집중된다.

후손들에게 발복되는 햇수의 주기는 삼합오행에 따라

사(巳·뱀) 유(酉·닭) 축(丑·소)년이므로 이 해를 찾아 가업을 일으키거나 창업을 해야 한다.

이때 출생 띠와 발복 년이 겹치면 무슨 일을 해도 대길이라는 게 풍수에서 보는 연운(年運)법이다.

한란 묘 앞에는 ‘개국벽상공신 삼중대광태위’라고 쓰인 한자 묘비가 뚜렷하게 음각돼 있다.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고 마을 안을 지나갈 때 집 앞 우물을 퍼 식수로 제공하고

함께 종군한 뒤 공을 세워 얻은 훈작이다.

그때 그 우물 모양이 네모졌다 하여 방정(方井)이라 불러 왔는데

모진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어 현재까지도 오가는 길손들의 목을 축여 주고 있다.

생가도 옛 그대로는 아니지만 복원되어 잘 보존되고 있다.

◇한란이 태조 왕건에게 떠 주었다는 방정수.

 

풍수에서 사신사를 논하며

▲북현무는 수두(垂頭)하여 정지한 듯 해야 하고

▲남주작은 상무하여 미동이 느껴지면 더욱 좋고

▲좌청룡은 완연한 듯 우렁참이 최선이며

▲우백호는 서로 위호하며 조화있게 짜여야 법수에 맞는 물형이라 한다.

한란 묘 앞에 서면 ‘바로 이런 곳을 말함이구나’를 초보자도 감지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우백호 끝자락이 도로 굴착공사로 흠결로 드러난 것인데

국책사업 앞에 누군들 어쩌겠는가.

“조선왕조에서만 청주 한씨 문중에서 왕비 6명을 비롯해

상신(相臣) 13명, 공신 24명, 부마 4명, 대제학 1명을 배출했습니다.

충북 일대에 한씨 집성촌이 많은데 후손 모두가 이 묘의 음덕으로 알고 섬깁니다.

옥구슬을 꿰놓은 것처럼 둥근 봉우리들로 연이어 솟아 있는 우백호의 기세를 보세요.

” 오암은 자신의 문중내력을 말하듯 자세히 소개한다.

세조 등극의 정란을 도와 영의정이 된 칠삭둥이 한명회, 한석봉의 천하명필,

3·1독립운동의 만해 한용운 선사를 누가 모를 것인가.

역사에 우뚝 선 그들 모두가 문중을 빛낸 인물들이다.

잠시 봉분 앞에서 물이 빠지는 파구를 살펴 보는데 왼쪽에 신도비가 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나경으로 계측하니

미(未·남→서로 30도)향 파구, 갑(甲·동→북으로 15도)향 신도비다.

물길을 중요시하지 않는 산악풍수에서야 얼핏 스쳐 갈 수도 있지만,

득수와 파구를 내세우는 풍수학계 입장에선 탄복할 일이다.

삼합(三合)오행에 맞춰 정확하게 배치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삼합오행이란

나경의 12지지(地支) 중 좌와 향을 신자진(申子辰) 인오술(寅午戌) 해묘미(亥卯未)

사유축(巳酉丑)의 4대국으로 나눠 양택과 음택의 길흉화복을 가늠하는 택지법이다.

집 안에 우물을 팔 때는 물론 묘 앞에 비석을 세울 때 요긴하게 쓰이며

특히 비보풍수에 널리 활용된다. 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묘역 앞의 신도비각. 문중에서는 성역으로 관리하고 있다.

 

‘신자진’은 양 옆의 신과 진을 무시하고 가운데 자의 오행을 따라 판단하면 된다.

나머지도 같은 요령이다.

자는 북쪽에 해당하며 물기를 머금으므로 수국(水局)에 배당된다.

인오술은 오가 남쪽 불기운이어서 화국(火局),

해묘미는 묘가 동쪽 나무여서 목국(木局),

사유축은 유가 서쪽 금속성이어서 금국(金局)으로 분리한다.

이때 좌측의 인신사해는 역마살, 가운데 자오묘유는 도화살,

우측의 진술축미는 화개살에 해당함을 유의해야 한다.

삼합의 관측은 나경 3층에 표시된 오행으로 찾는다.

한란 묘는 건좌(건·해 동궁)이므로 목국이다.

여기서 묘의 건좌, 갑향의 신도비, 미향의 파구를 이으면 신기하게도 정삼각형으로 연결되며

세 좌향 모두 목국에 해당한다.

나머지 수국 화국 금국도 같은 배치로 연결하면 길격으로 구성된다. 이것이 삼합오행이다.

삼합 중 이합만 맞아도 대길이라 했는데 이 묘는 삼합일치다.

황천살과 팔요풍도 해당이 안 돼 더욱 금상첨화다.

묘역을 내려오며 비각 안내문을 보니 영조 24년(1748)에 신도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당시 이미 삼합오행에 합당하도록 비보배치 했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바로 밑에는 한란이 태조 왕건에게 떠 주었다는 방정수가 땡볕에도 쉼 없이 솟구치고 있다.

자고로 당판 앞 융취수(融聚水)는 진응수(眞應水)라 하여 명당조건 중 최길격으로 여겨 왔다.

거듭되는 간산 길에서 명당과 흉지를 수없이 교차하며 만나지만

‘모두가 명당’이라는 혈처엘 가보면 무언가 느껴지는 감이 다르다.

결론적으로 얻어지는 확신 같은 것은 무엇인가.

“천하제일 명당 찾아 묘 잘 쓰고 발복되어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만 있다면

억만금이 아깝겠소.

그런데 남의 명당 골라주는 풍수지관들은 왜 못사는지 모르겠다니까….”

 

Faust-바보 한은섭 퍼온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