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한정록(閑情錄)<숨어 사는 즐거움>-

 

세상을 등져 세상을 사랑하다.

 

 

이태백의 시에 "淸風明月不用一錢買"
"청풍명월은 일전이라도 돈을 들여 사는 것이 아니다"라 하였고
소동파의'적벽부'에서는 이르기를
"저 강상(江上)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듣노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노니 빛이 되도다 .
갖자해도 금할 이 없고 쓰자 해도 다할 날이 없으니
이것은 조물의 무진장이다" 라고 하였으니
소동파의 뜻은 대개 이태백의 시구에서  나온 것이다.
무릇 바람과 달은 돈을 들여 사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아무리 가져도 누가 금할 이가 없는 것이니, 이는 이태백과 소동파의 말이 진실이다.
그러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몇 사람 되지 않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도 일 년 동안에 또한 몇 날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없이 한가하게 있으면서 돈을 들여 사는 것도 아니요
게다가 그것을 가진다 하여 누가 갖지 못하게 금할 이도 없는
이 청풍명월을 보고서도 즐길 줄을 모른다면
이는 자기 스스로 장애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은 이미 이름 지어진 세상에 새로 이름 하나를 받아 세상에 태어 난다.
그리고 그이름이 세상에 아름답게 남겨지기를 꿈꾸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미 이름 지어진 세상이 답답하여 속세와 불화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름을 남기기보다 이름을 지우며 사는 것이 더 아름다운 인생이라 느끼며 산다.
이런 사람들은 이름이 있는 세상에서 이름이 없는 여백을 살고자 한다.
그들은 즐거운 은둔을 꿈꾸며 산다.

허균의 <한정록(閑情錄)>은 세상에 자유를 그리는 운둔자의 독서장이다.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나 조선시대를 살지 않은 시대의 불화자(不和者)
허균이 꿈꾼 삶의 그림이자 계획서이며 실천서이다.
은둔(隱遁),고일(高逸),한적(閑適),퇴휴(退休)에서는
그가 도달하고자 했던 자족하며 살아가는 은둔자의 유유자적한 모습이 그려진다.
유흥(遊興),아치(雅致),숭검(崇儉),임탄(任誕),광회(曠悔),유사(幽事),
명훈(名訓),정업(靜業),현상(玄賞),청공(淸供),섭생(攝生)에서는
산림에서 줄겁게 사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옮기고 있다.
그는 깨끗한 글씨로 고서의 은둔자 이야기 들을 베껴 두곤 했는데 
이것이 후일 <한정록(閑情錄)> 이 되었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찌 벼슬을 더럽다 하여 버리고 산람에서 오래 살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그 도가 세속과 맞지 않고 그 운명이 때와 어긋난다 하여 
고상함을 빌미로 세상을 피한 자의 그 뜻은 역시 비장한 것이다.
다음 날 언젠가 그 숲 아래에서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을 버린 선비를 만나게 될 때에 
이 책을 꺼내 가지고 서로 즐겨 읽는다면 내 타고난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

 
<숨어사는 즐거움>은<한정록>을 읽기 쉽게 한글로 풀고
오늘날의 정서와 지나치게 동떠러진 이야기나 자질구레한 고사 등을 추려 내어
우리도 허균과 벗하여 독서할 수 있도록 옮긴이가 엮은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보다
'우리가 어떻게 있는가?'가 진정으로 중요한 질문임을 발견하게 된다.
은둔도 삶의 태도이다.
속세의 규범들은 하늘이 내린 천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사물들에 인위적인 구분을  만들어 가둔다.
그것에서 벗어나 사물들을 자유롭게 하고 각각이 자유롭되
서로 함께 있어도 해치지 않는 이름 없는 세계를 여는 태도가 바로 은둔이다.
그래서 숨어사는 자가 된다 함은
무진장한 만물의 다채로움으로 활짝 열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송나라 사마광이 말하였다.
정신과 육체가 피로할 적에는 낚싯대를 던져 고기를 낚거나,
옷자락을 잡고 약을 캐거나,개천물을 돌려 꽃밭에 물을 대거나,
도끼를 들어 대나무를 쪼개거나,뜨거운 물로 손을 씻거나,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관망하거나,
이리저리 한가로이 거닐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기거나 하면 좋다.
그때 밝은달이 제때에 떠오르고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면
움직이고 멈추는 데 구애가 없어서 나의 이목폐장(耳目肺腸)이 모두 나의 자유가 되므로
마냥 고상하고 활발하기만 하여,이 하늘과 땅 사이에 또 다시
그 어떤 낙이 이를 대신할 수 있을지도 잊게 된다.  
 

이름에 사물을 묶어놓지 않는 자유자적한 삶은
자연을 벗삼아 자연을 사람같이 대하고
인간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사람을 자연을 대하는 것처럼 대한다.
빛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향이 되는 것이 막힘이 없다.
자유로운 눈으로 사물을 만나면 만물은 본성대로 자기를 바꿔 가며 춤추기 시작한다.
각기 흥에 겨워 들썩여도 다른이의 흥겨움을 방해하지않고
서로의 흥취에 들고 남이 장애가 없다.


임탄편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왕휘지는 산음(山陰)에 살았다.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잠이 깨자 방문을 열어 놓고 술을 따르라 명한 뒤,
사방을 보니 온통 흰빛이었다.
일어나서 거닐며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외다가
갑자기 벗인 대규 생각이 났다.
이때 대규는 섬계에 있었다.
그는 작은 배를 타고 밤새 가서 대규 집 문에 이르렀다가 들어가지 않고 돌아섰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그는 답한다.
"내가 흥이 일어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니,
어찌 꼭 대규를 보아야 하는가?."
만물은 만남도 헤어짐도 없이 저절로 함께 있는 벗으로 사귀니
은둔자의 삶은 외로울 틈이 없다.

 


예찬의 집에 청비각이 있었는데
깊고 아늑하여 속세의 티끌이 없었다.
그 안에 수천 권의 서책이 있었는데 모두 그가 손수 교정한 것이었고,
경사제자(經史諸子)로부터 불가와 도가의 글까지 모든 서책을 날마다 읊조리곤 하였다.
집 안에는 예스러운 골동품과 희귀한 거문고가 좌우에 널려 있고,
집 주위에는 송계난죽(松桂蘭竹)이 빙 둘러 있었다.
집 밖에는 높은 나무와 긴 대나무들이 깊고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자면 그는 지팡이와 신발을 끌고
그 주위를 마음 내키는 대로 산보하면서 때로 시구를 읊조리며 즐겼다.
그래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가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은둔이라고 하면 세상을 원망하여 속세를 등지고 혼자서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은둔을 위해서 반드시 깊은 산중이나 동굴 같은 은신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속세 밖에서 속세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한 거리를 두는 것,
삶을 명랑하게 만드는 여백 으로서의 세계를 마음에 품는 것이 바로
"세속에 육침(陸沈)하며 이 세상을 피하노라,
금마문(金馬門) 안 궁궐 속에서도 세상 피하고 몸 보존할 수 있는데,
어찌 꼭 깊은 산속 쑥대 집 밑이어야 하리" 라고 노래한 동박삭의 지혜일 것이다.

 
조선은 불교를 숭배하는 것 자체가 탄핵의 대상인 유교 사회였다.
그러나 허균은 유가를 멀리하고 불가와 도가를 가까이 하였다.
이름 높은 고승 사명당과 형제지간처럼 막역한 사이였으며,
불가를 가까이 한다는 죄목으로 삼척부사로 부임한 지 십삼 일 만에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허균은 파직 소식을 접하고서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이나 써야 할 것이고 나는 내 인생을 나대로 살리라"라고 담담히 밝힌다.
허균은 실제로 서산대사로부터 출가 권유를 받기도 하지만
불가의 법에 몸을 담는 것 또한 택하지 않는다.
그는 유가의 법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불가의 법 아래 있기를 원한 게 아니라,
법에서 벗어나 본성대로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는 세상을 버리는 은둔자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한 은둔자였다.
세번의 귀양과 여섯 번의 파직을 당하는 속에서도,
허균은 세상을 더욱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지조 높은 숨어사는 자로서
자기를 세상에 맞추기보다는 세상을 보다 자유롭게 만들고자 했다.
이 같은 허균의 면모는 <홍길동전>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힘은 민중에 있다."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다. "
(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 - '호민론(豪民論)'
호민론<豪民論>,유재론<遺才論> 등의 저술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책들을 통해 그는 인재등용에 있어 신분 제한의 철폐,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나서는 백성인 호민을 두려워할 줄 아는
왕도정치 같은 혁명적인 정치를 주장하였다.
비록 역사는 이 운둔자로부터 달아났으나 그 스스로 그린 세상은 허균을 버리지 않았다.
빼어난 작품들을 저술하는 속에서,
그는 속박 없는 삶에 즐거이 머물 줄 아는 창조적 은둔자였다.
그에게서 탄생한 자유로운 평등 사회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숨 쉴 수 있게 하는 깊은 산중이 되었다.
"보지 못했던 책을 읽을 때 에는 마치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볼 때에는 마치 옛 친구를 만난 것 같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은둔을 즐기는 법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은 나이가 들수록 꾀만 깊어지는 데 있다.
무릇 부싯돌은 금방 꺼져 버리고
황하의 물은 수백 년 만에 한 번씩 맑아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살려 하거나 세속을 떠나려 하거나 간에
모름지기 조화의 기미를 알고 멈춤으로써 조화와 맞서
권한을 다투려 하지 말고 조화의 권한은 조화에게 돌려주고,
자손을 위해서는 복을 심어 자손의 복은 자손에게 물려준 뒤에
물외(物外)의 한가로움에 몸을 맡기고 눈앞의 맑은 일에 유의할 것이다.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한 법정 스님은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자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제자들에게조차 거쳐를 알리지 않고 강원도 산골 오두막,
문명의 도구가 없는 곳에서 줄곧 혼자 생활을 해 왔다.
"내가 산중에 혼자 지내면서도 기죽지 않고 나날이 새로울 수 있는 것은 무었인가
나 자신을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스님은
여러 차례 '곁에서 나 자신을 받쳐 주는 친구' 중의 하나로 이 책을 꼽았다.
산문집 <오두막 편지>의 '허균의 시비 앞에서' 란 글에서 법정 스님은
허균의 유적지를 돌아다본 경험을 들려주며 몇 번이고 읽었던 책을 또다시 꺼내 들었다.
"요즘 나는 등잔불 아래서 허균의 <한정록>을 다시 펼쳐 들고,
옛사람들이 자연과 가까이하며 조촐하게 살던 안빈락도(安貧樂道)의 삶을 음미하고 있다.
몇 해 전에 이 책을 처음 읽고 나서부터 허균을 좋아하게 되었다.
우선 사나이다운 그의 기상과 독서량에 압도되었고
임진왜란을 전후한 파란만장한 생애가 불우했던 지난 왕조사를 되돌아보게 했다.
어느 시대이고 귀재들은 현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내가 세상과 어긋나 죽거나 살거나 얻거나 잃거나 간에
내 마음에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내가 오늘날 미움을 받아 여러 번 명예를 더럽혔다고 탄핵을 받았지만
내게는 한 점의 동요도 없습니다.
어찌 이런 일로 내 정신을 상하게 하겠습니까.'

한 친구에게 보낸 허균의 편지 구절이다.

 

그는 광해군 10년 역모를 꾸몄다 하여 처형된다.
그의 나이 50세 때이다.
허균은 두 차례나 북경에 사신으로 따라가 가재를 털어 4천권이나 되는 많은 책을 구해 온다.
그의 탐구 정신과 방대한 독서량의 원천이 여기에 있다.

요즘 청치인들의 행태을 보면서

안분지족<安分知足> 안빈락도<安貧樂道>의 삶을 살 수 없을까

다시한번 되새기게 된다.

 

 

<숨어사는 즐거움>의 토대가 되는 <한정록>은 원래 총 17권 4책으로 이루어진다.
은둔자의 정신적 물질적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교양서로
중국의 은둔자들에 대한 자료와 농사법에 관한 정보도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은 1961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한 성소부부고의 부록으로 실렸으며,
1980년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한 <허균전서>에도 수록되었다.
1981년 민족문화추진위원호에서 국역하였다.
1610년(광해군2년) "은둔""한적""퇴휴""청사"의 4문으로 편집하였다가,
1618년 내용을 증보하여 16문으로 구성하고 부록을 덧붙였다.
역자 김원우는 이를 바탕으로 현대의 감각에 맞게 새롭게 추려 옮겼으며,
솔에서 <숨어사는 즐거움-은둔과 풍류 이야기> 라 이름 붙여 1996년 7월 발행하였다.
허균은 당대 뛰어난 문장가였음에도 역모의 죄로 죽임을 당하여
그 글이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숨어사는 즐거움>은 더욱 고마운 책이다.
솔은 1997년 5월 민족문화추진위원회가 번역한 <한정록1.2>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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