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Bach, JS)가 왜 음악의 아버지 인가?-이런저런 이야기

 

바 하 Bach, Johan Sebastian (1685.3.21~1750.7.28 )

 

독일 아이제나흐 태생인 바하는 지금까지의 그의 가문의 풍습에 따라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10세에 부모를 잃은 그는 오르가니스트인 그의 형의 집에서 지냈는데,
그곳에서 피아노의 전신인 클라비어라는 악기를 배웠다.

 

그는 마침내 명 오르가니스트가 되었으며
18세기까지의 음악의 모든 경향을 한데 모아 비약적인 성과을 올렸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베토벤, 바그너 등에게 독일 음악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고 하겠다.

그가 활약한 시기는 바이마르 궁정의 약 10년간이며
쾨텐 궁정 악장으로서 실내악과 오케스트라곡, 독주곡 등을 많이 썼다.
다음은 1723년부터 27년간의 라이프치히 시대로, 창작에 있어서 활약한 시대였다.
칸타나, 오라토리오, 수난곡 등 성악의 대작과 오르간곡 등을 많이 작곡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독실한 신자였는데, 음악으로서 신에게 봉사하는 데에 그 생애를 바쳤다.
그의 풍부한 멜로디와 절묘한 대위법의 취급에 의해 한없는 아름다움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기교의 밑바닥에는 종교적인 신념이 깃들여 있다.

그는 대위법의 작법에 기반을 두면서도 여기에 화성적인 수법을 가미시켰다.
말하자면 화성적인 복음악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토벤은 그를 가리켜 화성의 아버지라고 말한 바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대 미사곡, 마태 수난곡, 토카타 d단조 오르간곡, 기악 독주곡, 중주곡, 합주곡, 협주곡 등
여러 방면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그리고 12평균율의 조율법에 의한 48곡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하의 작품은 47권의 전집으로 되어 있고, 죽은지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널리 연주되고 있다.
바하는 1685년, 중부 독일의 튀링언 州의 아이세나하 市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거리의 악사였고, 삼촌도 교회 오르가니스트였다.

바하는 이러한 음악적인 피를 이어받고 있었으므로 음악가가 된 것이지만
그러한 유전을 믿지 않는다 해도 그가 나면서부터 음악적인 공기를 호흡하고
음악적인 자극을 받았음은 사실일 것 이다.
그러한 어린 시절의 행복한 날은 얼마 계속되지 못하였다.

 

9세때 어머니를, 그 이듬해에 아버지를 여인 바하는
오르소르프에서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있던 맏형 요한에게로 가게 되었다.
이 형은 바하 이전의 중남미 독일의 최대의 오르가니스트 였던 요한 파헬벨에 사사한 일이 있었다.
바하는 형 요한을 통하여 훗날 "파헬벨 코랄'이라 불리는 코랄 전주곡의 작곡 수법이라든가
간결하고도 요령있는 푸가의 서법을 배웠다.

 

1703년 4월, 18세가 된 바흐는 처음으로 바이마르 궁전 악단에 바 올리니스트로 취직하게 되었다.
같은해 8월부터 그 근처의 아른슈타트(1703-1707), 뮐하우젠(1707-1708)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는데,
이 시대가 바하가 작곡가로써 활동한 초기이다.
연구심이 왕성하고 혈기에 넘치는 바하는 열성을 다해 일하는가 하면
때로는 내동댕이친채 아랑곳하지 않았으므로 물의를 일으켰다.

 

특히 유명한 이 시대의 일화요, 말썽거리는 1705년의 뤼베크방문이었다.
바하는 이 해 10월 한 달의 휴가를 얻어 뤼베크로 향했다.
북스테후데의 음악에 매혹된 바하가 돌아온 것은 이듬해 1월이었다.
아른슈타트의 성직 회의는 바하를 호되게 문책하 였다.
그 문책의 문서에는 직무를 소홀이 하였다든가,
성가대 훈련에 무성의하였 다는 문책이외에도 오르간 코랄연주에
귀에 설은 음을 많이 섞었으며 거기에 대해 문책을 받자 극단적으로 짧게 했다는 조목이 있다.
아직 완성도 상에 있는 바하의 인품을 엿볼수 있어 흥미롭다.

그는 이 직책에서 물러난 다음 뮐하우젠으로 간다.
뮐하우젠의 교회오르가니스트가 된 바하는 아른슈타트에서 알게 된
먼 친척뻘인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바하가 뮐하우젠에 있던 기간은 1년 정도였으며
별로 신통한 공적은 남기지 않았으나 바야흐로 오르가니스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소수의 교회 칸타타 작곡에 손을 대게 되었다.

이 시대의 그의 칸타타는 바이마르 후기 이후의 작품에 비교하면,
아직 이탈리아풍의 레시타티브와 아리아의 영향이 적고
북독일풍의 중후한 모데토 스타일의 칸타타 작풍에 따라
솔로와 중창, 합창이 매우 유연하게 추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오르간 음악의 거장인 젊은 바하는 명연주자였을뿐 아니라
뛰어난 설계자요, 동시 연주자이기도 했다.
그는 오르간 개조에 대한 의견이라든가 새 오르간 감정과 시주에 대한 의뢰를 받기도 했다.

바하는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바이마르 궁전에서,
그 당시 갓시작된 이탈리아 협주곡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이다.

중후하고 폴리포닉한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음악과
라틴적인 명쾌한 형식감을 지닌 협주곡의 형식은 이내 바하를 사로 잡았다.

이윽고 알비노니, 마르첼로 등의 작품을 모델로 하여,
그것을 오르간 또는 쳄발로 독주용으로 편성한 수 많은 작품을 쓰게 된다.

 

1717년의 연말 바하는 바이마르를 떠나 작센지방의 소도시 쾨텐으로 옮겨 가, 그 곳 궁전 악장이 되었다.
그를 맞이한 것은 당시 23세의 안할트 쾨텐의 군주 레오폴트였다.
이 젊은 영주는 아름다운 테너 음성을 가지고 있었다.
궁정악단에도 참가하여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고,
쳄발로 앞에 앉아 통주저음의 반주를 맡을 정도로 아마추어의 범주를 넘는 음악가였다.

 

쾨텐의 궁정악단에는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시피스 외에
궁정악사 자격을 가진 비올라 다 감바의 명수 아벨,
그리고 풀룻의 베르디히와 프라이타크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하는 이 사람들을 위해 많은 실내악곡을 만들었는데,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이 6곡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와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다.

쾨텐 시대의 바하는 후에 젊은 시절의 친구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속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음악을 사랑하고,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은 군주를 모시고 그 분 밑에서 평생을 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언제까지나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1720년 초여름, 그가 군주를 따라 보헤미아의 피서지 카를스바트에 갔다가
7월에 돌아와 보니 그의 부재중에 아내가 이미 죽어 장례식까지 끝나 있었다.
1723년 봄 바하는 라이프리치히의 성 토마스교회 부속학교의 합창장으로 옮겨갔다.

그때 39세의 바하는 65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27년간을 이 곳에서 지내게 된다.

이 시기를 통해서 그는 고금의 대작곡가 바하로부터 차츰 시대에 뒤처지는 고고한 거장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라이프리치히 시대의 최초의 약 7년간에 바하는 오늘날에 현존하는
그의 교회칸타타 약 2백곡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작품을 썼다.

바하는 이 작품들을 성토마스 교회 부속학교의 30명 남짓한 합창대와
10여명도 채 안 되는 관현악으로 연주해야만 했다.

1730년 이러한 연주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건의서를 라이프니치 시의회에 제출하였으나 무시당하자,
그 즈음부터 차츰 교회 음악에 대한 열의를 잃게 되었다.
그 후의 대작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1734)"는 의외일 만큼 전작으로부터 많이 차용했고
미사곡 b단조는 라이프니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드레스덴 선제후의 궁정 예배당을 위해 씌어졌다.

 

바하는 만년의 1741년과 1747년의 두 번에 걸쳐 베를린을 방문했고
대왕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전에서 오르간과 쳄발로의 묘기를 피력하였다.
최초의 방문때는 베를린주재 대사를 섬기던 골든베르크를 위해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작곡하였고,
두번째 방문때 "음악의 헌정"이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받쳐졌다.

1750년 전 해에 일어 났던 뇌졸증의 발작과 시력감퇴로 체력이 두드러지게 약해졌는데,
수술과 치료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그해 7월 28일 밤 8시 45분,
사랑하는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65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바하는 죽고 가족은 흩어져으며 그 악보는 산일하였다.
바하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거의 기억되지 않았다.
그러나 바하의 작품은 지금 인류의 가장 귀중한 보물의 하나로 되어 있다.

현대의 서양 클래식음악이 모두 한꺼번에 사라진다 해도
바하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만 남아 있다면 현재의 음악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할 만큼
음악사에서 바하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얼마나 큰 것인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은 바하를 가리켜 "작은 개울이 아니라 드넓은 바다"라고 한 것은
베토벤 역시 바하의 풍부한 독창성과 그의 창조성, 다양성등을 알아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200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바하의 모든 곡들과 정신과 영혼이 음악가에게 살아 있는지 모른다.

서양음악사상 가장 많은 음악가를 배출한 바하의 가문은 ,
1685년에 태어난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바하의 가계는 멀리 16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그들의 집안은 대대로 중부독일의 튀링겐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을 해 온
전형적인 프로테스탄트 가문이었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를 창시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바하 집안의 활동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아이젠나하에서
그 신앙적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바하의 인생과 음악을 움직이게 해준 대부분의 사람들이
루터파의 신앙생활에 충실했었다는 것이 첫째 이유가 될 것이다.

바하의 아버지는 요한 암브로시우스(Johann Ambrosius Bach)이며,
그에게는 요한 크리스토프(Johann Christoph Bach)라는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그들 쌍둥이 형제의 맏형이 게오르그 크리스토프(Georg Christoph Bach)인데,
이 3형제를 낳아준 요한 크리스토프와 그의 아버지인 요하네스 등은
모두가 유명한 악사들로 훗날 J.S.Bach가 태어날 수 있는 혈통적 유전질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하 역시 20명에 달하는 많은 자녀를 두었다.
그 중에서도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Wilhelm Frideman, 1710-1784)과
차남인 카알 필립 에마누엘(Karl Phillip Emamuel Bach, 1714-1788),
막내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 등은
모두가 뛰어난 음악가로서 바하의 가문을 빛나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 유럽에서 뛰어난 음악활동을 펼침으로써 바하와 헨델을 정점으로 하는
바로크음악과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비인 고전악파의 징검다리 구실을 해주었다는 점에서도 그들이 차지한 음악사적인 위치가 크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야말로
200여년간에 걸친 바하의 가문의 음악을 총결산하면서
세계 음악사상 가장 높은 봉우리로 우뚝 솟은 거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음악의 물줄기는 바하로부터 흘러 나와서 다시 바하로 되돌아갈 만큼,
그의 이름이 차지하는 음악사적 비중은 너무나 크고 당당하다.

그래서 바하를 가리겨 "음악의 아버지"라고 스스럼없이 일컬으고 있으며,
그 이름에 합당할 만큼 바하의 음악은 인류의 위대한 음악 문화적 유산으로 길이 흠모되고 있는 것이다.

 

바하의 이름자인 bach는 독일어로 '작은 시냇물'이란 뜻이다.

그러나 악성 베토벤은 바하를 가리켜
"당신은 작은 시냇물이 이나라 드넓은 대양입니다."라고 멋진 비유를 했다.
사실 바하의 이름으로 작곡되어진 모든 음악들이야말로 어떤 대해보다도 드넓으며,
어떤 계곡보다도 깊고 오묘하다.
평생동안을 프로테스탄트적 신앙생활을 지켜 가면서 써낸
수많은 종교 음악을 비롯해서 기악곡과 관현악곡에 이르는 모든 부문에 이르기까지
바하는 엄청난 대작업을 이루어낸 것이다.

 

헨델(G.F.Handel)과 함께 바로크시대를 총결산 했던 바하는
1749년 봄 뇌졸증의 발작과 함께 시력감퇴 현상이 일어나 체력이 눈에 띠게 줄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력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이 잘 못 돼서
결국 1750년 7월 28일 밤 8시 45분 경에 바하는 위대한 65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부인 안나 막달레나가 임종을 지켜봤다.

 

바하가 죽고 난 뒤에 그의 가족들은 이리 저리 흩어졌으며
수많은 악보도 분실되거나 손상되어 버린채 그의 이름은 점점 세상 사람들의 귀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을 비롯한 후세 사람들의 끈질긴 노고에 힘입어
바하는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고, 모든 곡들이 연주회장의 레파토리에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 바하의 음악작품들이 인류의 가장 귀중한 보물로 대접 받고 있는 이유도
그가 써낸 음악들이 인류의 정신사적 흐름을 가장 농밀하게 표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항상 신앙적 구도의 길을 버리지 않았던 생활관과 음악관이
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하야말로 인류가 갖는 가장 고귀한 음악가였다고 해도 좋을 그런 사람이었다.


◆바하 주요 작품

1. 관현악 모음곡 제 2번 B minor (BWV 1067)
2.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BWV 1046~1051)
3.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D minor (BWV 1043)
4. 음악의 헌정 (BWV 1079)
5.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 (BWV 846~869), 제2권 (BWV 870~893)
6.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BWV 1001~1006)
7. 무반주 첼로 모음곡 (BWV 1007~1012)
8. 마태 수난곡 (BWV 244)
9. 플루트 소나타와 비올라 다 감바 소나타 (BWV 1027~1035)
10. 커피 칸타타와 농민 칸타타 (BWV 211 & BWV 212)

대충 바하의 일생은 이렇구요.
바하는 ..서양음악사를 집대성한 위대한 존재로서
우수한 후손들과 많은 제자들을 두었기 때문에
후대 음악의 발전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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