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제11장 색은행괴장(素隱行怪章)
주역의 귀신관 소략
1
子曰 素隱行怪를 後世에 有述焉하나니 吾弗爲之矣로라.
자왈 색은행괴를 후세에 유술언하나니 오불위지의로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은벽(은밀)한 것을 찾아내고 괴이한 짓을 행하는 것을
후세에 칭술하는 이가 있나니 나는 그렇게 하지 않노라
素 : 본디 소, 여기서는 索(찾을 색)으로 보아야 함.
2
君子 遵道而行하다가 半途而廢하나니 吾弗能已矣로라.
군자 준도이행하다가 반도이폐하나니 오불능이의로라.
군자가 도를 따라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두나니 나는 능히 그만두지 못하노라.
遵 : 좇을 준
3
君子는 依乎中庸하야 遯世不見知而不悔하나니 唯聖者아 能之니라.
군자는 의홍중용하아 돈세불견지이불회하나니 유성자아 능지니라.
군자는 중용에 의지해서 세상을 은둔해서 (남들이) 알아주는 것을 보지 못하더라도
후회하지 아니 하나니 오직 성인이라야 능하느니라.
遯 : 피할 돈(둔), 은둔할 돈(둔)(주역 괘명일 때는 ‘돈’, 세상을 피한다는 뜻의 遯世는 '돈세'로 읽는다.)
[본문 해설]
이 세상에는 옹벽한 곳에서 귀신이나 도깨비 등 잡된 것을 찾아내
여기에서 기이한 것이 생긴다며 괴이한 짓으로 사술이나 조화를 부리고 세상을 현혹되게 하고,
더 나아가서 후세 사람들은 이를 칭술(稱述)하며 책으로 엮어내고 가르쳐 전파하기까지 한다.
공자께서 이는 결코 중용지도가 아니기에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군자가 도를 따라가다가 그만두면 아니함만 못하다.
보통 사람들이 중도에 그만두는 이유는 제대로 도를 실천하지 않고 건성으로 닦아나가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나는 그만두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도를 늘 진실로 일상화하여
그만두려 해도 그만 두지 못함을 얘기한 것이다.
‘遯’은『주역』33번째 괘명이기도 하다.
천산돈(天山遯 : )괘를 보면 소인은 욕심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해 그쳐 있는 것이고,
군자는 욕심을 버리고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소인이 안에서 실권을 주고 더욱 득세해나가고 군자의 바른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세상을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군자가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소인을 피해 물러나는 것이다.
아무 때나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기대를 걸고 버텨보면서 때를 보아 진정으로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는 것이다
(遯而亨也ㅣ나 剛當位而應이라 與時行也ㅣ니라 小利貞은 浸而長也일새니 遯之時義ㅣ 大矣哉ㅣ라 :
물러나서 형통하나, 강한 것이 位에 마땅해서 응함이라. 때로 더불어 행함이라.
小利貞은 점차 길어지기 때문이니, 돈의 때와 뜻이 크도다).
때가 되어 기꺼이 물러났기에 후회가 있을 수가 없다.
또한 세상을 물러나 은둔해 있어도 ‘벼슬자리를 버리고 괜히 떠나왔나’,
‘왜 다시 나에게 벼슬 자리를 권하지 않나’하고 원망하거나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은
군자는 중용의 도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遯世하였기에 민망함이 없다(遯世无悶)는 말은 두 번 나온다.
『주역』건괘 문언전 제2절 초구 효사에
“子曰 龍德而隱者也니 不易乎世하며 不成乎名하야 遯世无悶하며
不見是而无悶하야 樂則行之하고 憂則違之하야 確乎其不可拔이 潛龍也라
(공자 이르길 용의 덕이되 숨어 있는 것이니 세상을 바꾸지 아니하며
이름을 이루지 아니하여서 세상을 피하여도 민망함이 없으며,
옳다함을 보지 못해도 민망함이 없어서 즐거우면 행하고
근심하면 어겨서 확고하여 가히 뽑을 수 없는 것이 잠룡이라)” 하였다.
용덕이 숨어 있다는 것은 군자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때가 아니기에 굳이 세상을 바꾸지도 않으며(不易乎世)
이름을 내려고도 하지 않아서(不成乎名) 세상을 떠나 은둔해 있어도 민망할 것이 없고(遯世无悶)
나를 옳다고 인정해주는 이가 없어도 속끓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不見是而无悶).
이렇게 해서 즐거우면 한번 나름대로 행하여 보고 세상이 근심되면 꾹 참고 어겨 등지고(樂則行之 憂則違之),
확고부동하게 잠겨 잡아 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잠룡이라(確乎其不可拔潛龍也) 하였다.
『주역』 28번째 괘인 澤風大過( ) 대상전에도
“澤滅木이 大過ㅣ니 君子ㅣ 以하야 獨立不懼하며 遯世无悶하나리라
(못이 나무를 멸하는 것이 대과니, 군자가 이로써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멀리해도 민망하게 여기지 않느니라)”하여 遯世无悶을 얘기하고 있다.
『논어』 맨 첫머리 學而篇에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이면 不亦君子乎아
(공자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들이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서운해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황석공(黃石公) 『素書(소서)』에도 ‘潛居抱道(잠거포도)’라 하였다.
참다운 군자라면 도를 안고 은거하고 있으니 无悶하고 樂天知命할 수 있는 것이다.
不爲索隱行怪면 則依乎中庸이 而已오 不能半塗而廢하니 是以로 遯世不見知而不悔也라
불위색은행괴면 즉의호중용이 이이오 불능반도이폐하니 시이로 둔세불견지이불회야라
此는 中庸之成德이오 知之盡이며 仁之至니 不賴勇而裕如者라
차는 중용지성덕이오 지지진이며 인지지니 불뢰용이유여자라
正吾夫子之事언마는 而猶不自居也시니라 故로 曰唯聖者라야 能之而已라 하시니라.
정오부자지사언마는 이유부자거야시니라 고로 왈유성자라야 능지이이라 하시니라.
색은행괴를 하지 아니하면 즉 중용에 의지한 것뿐이고
능히 중도에서 그만두지 아니하면 이것으로서 세상을 은둔해 앎을 보지 못해도 후회하지 않느니라.
이것은 중용의 이룬 덕이오, 知의 극진함이며, 仁의 지극함이니 용맹에 힘입지 않아도 여유로워짐과 같음이라.
바로 우리 공자의 일이언마는 오히려 스스로 거처하지 않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오직 성인이라야 능할 따름이라 하셨느니라.
[해설]
본문의 “君子는 依乎中庸하야 遯世不見知而不悔”란 말은
실은 공자 자신의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옛날의 다른 성인들로 돌리신 것은
그만큼 공자가 중용지덕을 갖춘 성인이기에 겸양하게 표현했다고 주자는 설명하고 있다.
[참고] 주역의 鬼神觀
흔히 사람들은 神의 신령스러움은 알지만 그 神이 神이 된 바는 알지 못한다
(人이 知其神之神하고 不知其神之所以神이라)고 황제음부경은 말하고 있다.
자연의 신묘한 이치를 알아서 깨우쳐야 함에도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어떤 초인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기이한 사술에 현혹되어 중용의 도에서 벗어나기에
공자는 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대개 儒家에서는 신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이다.
주역에서 공자는 신을 두루 언급하고 있다.
특히 계사전이나 설괘전을 보면 神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까지 나온다.
계사상전 제9장에 “凡天地之數 五十有五니 此 所以成變化하며 而行鬼神也라
(무릇 천지의 수가 오십오니, 이것으로써 변화하며 귀신을 행하느니라)” 하여
天數와 地數의 합인 55 속에서 음양이 변화를 하고 그것을 귀신이 행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陰이 변하는 것, 즉 음적인 작용은 鬼가 되고, 陽이 변하는 것,
즉 양적인 작용은 神이라고 한다. 鬼는 죽어가는 것(自有而無)을 말하고, 神은 살아나오는 것(自無而有)을 말한다.
앞서 계사상전 제4장에서 “精과 氣가 물건이 되고 혼이 놀아서 변이 되어 이로써 귀신의 정상(情狀)을 안다
(精氣爲物이오 游魂爲變이라 是故로 知鬼神之情狀하나니라)”고 한 뜻도 음양의 변화이기에
“신은 방소가 없고 역은 체가 없다(神无方而易无體)”라 하였다.
따라서 ‘음양은 쉽게 헤아리지 못하기에 이를 神이라(陰陽不測之謂ㅣ 神이라 : 계사상전 제5장)’ 정의하였다.
설괘전 제6장(妙神文)을 보면 구체적으로 神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神也者는 妙萬物而爲言者也니 動萬物者 莫疾乎雷하고
신야자는 묘만물이위언자야니 동만물자 막질호뢰하고
撓萬物者 莫疾乎風하고 燥萬物者 莫한乎火하고
요만물자 막질호풍하고 조만물자 막한호화하고
說萬物者 莫說乎澤하고 潤萬物者 莫潤乎水하고 終萬物始 萬物者 莫盛乎艮하니
설만물자 막설호택하고 윤만물자 막윤호수하고 종만물시 만물자 막성호간하니
故로 水火 相逮하며 雷風이 不相悖하며 山澤이 通氣然後에아 能變化하야 旣成萬物也하니라.
고로 수호 상체하며 뢰풍이 부상패하며 산택이 통기연후에야 능변화하야 기성만물야하니라.
(신이라는 것은 만물을 묘하게 함을 말한 것이니 만물을 움직이는 것이 우레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을 흔드는 것이 바람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을 말리는 것이 불보다 말리는 것이 없고,
만물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못보다 기쁘게 하는 것이 없고, 만물을 적시는 것이 물보다 적시는 것이 없고,
만물을 終하여 始하는 것이 艮보다 성한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물과 불이 서로 따르며,
우레와 바람이 서로 거스르지 아니하며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한 후에야 능히 변화하여 만물을 다 이루느니라)
공자는 만물을 묘하게 하는 것이 신이라 하였다.
그래서 ‘신은 묘하다’ 해서 神妙하다고 한다.
위의 건삼련 하늘과 아래 곤삼절 땅, 곧 천지는 곧 하나의 신이 된다.
이 신묘함에서 우레와 바람과 물과 불과 산과 못이 되는 후천 팔괘 방위도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즉 건곤괘를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 괘인 자녀괘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다.
神也者라는 속에 건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유가에서 죽은 조상과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모는 신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신묘함으로 아들이 나오고 딸이 나오는 것이기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즉 자식은 부모의 신이 아니면 나올 수 없고, 만물은 천지의 신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妙神文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만물을 움직이는 것은 우레보다 더한 것이 없어 봄에 만물이 약동해 나오는 것을 東方震
우레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만물을 마구 흔드는 것은 바람보다 더한 것이 없다.
바람은 장녀인 음괘( )이므로 장남인 양괘( ) 우레보다는 움직임이 부드러워 물체를 흔들어준다.
신을 말함에 있어서 우레신은 움직이는 것만 맡고 있으며 바람신은 흔드는 걸 맡고 있다.
만물을 우레와 바람으로서 동요시키는 것이다.
만물을 말리는 것은 불보다 더한 것이 없다.
중녀인 離虛中( ) 불신은 젖은 것을 말려주는 신이다.
만물을 기쁘게 하는 것은 못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소녀인 兌上絶( ) 못신은 기쁨의 신이다.
만물을 불리는 것은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
중남인 坎中連( ) 물신은 적셔서 윤택하게 해주고 생명을 불려주는 신이다.
만물을 끝내고 만물을 비롯하는 것은 艮보다 더한 것이 없다.
소남인 艮上連( )은 후중히 그치는 신으로 終則有始의 매듭 역할을 한다.
다른 자녀괘들의 경우는 형이하적 괘상인 雷 風火 澤 水를 들어 표현했지만
만물을 종시하는 이 산괘의 경우는 유달리 형이상적인 괘명인 艮으로써 표현하였다.
이 간괘가 선천을 마치고 후천을 여는 근본 핵심(형이상적인 태극의 역할)이 된다는 것을 공자가 특별히 강조한 듯하다.
여기서 천지는 숨어버렸다.
말하자면 부모가 돌아가서 신으로 화한 것인데 부모는 자식한테 재산도 넘겨주고 혈육의 대까지 넘겨준다.
왕가의 인군으로 말하자면 태자에게 다 넘겨주는 것이다.
저 위에 있던 하늘이 서북방으로 가서 쭈그리고 있고 아래에 있던 땅은 서남방으로 가서 쭈그리고 있다.
이렇게 하여 천지는 서북과 서남에서 신이 되어 움츠리고 있다.
신이 되어 ‘動만물, 撓만물, 燥만물, 說만물, 潤만물, 終만물과 始만물’의 후천적인 用事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용은 선천팔괘의 교역으로 인한 것인데 六坎水( )와 三離火( )의 물과 불이 서로 미치고(水火相逮),
四震雷( )와 五巽風( )의 우레와 바람이 서로 거슬리지 않으며
七艮山( )과 二兌澤( )의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하고(山澤通氣)
그런 뒤에야 능히 변화해서 모든 만물을 다 이루게 되고 후천의 이치가 정립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만물을 묘하게 하는 신의 작용이라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천지자연의 지극히 정미롭고도 신묘한 작용에 의해 변화해서
調和를 이루는 이치가 곧 주역에서 말하는 귀신이자 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귀신은 가득찬 것을 해롭게 하고 겸손함에는 복을 준다
(鬼神은 害盈而福謙이라 : 주역 15번째괘인 地山謙괘 대상전)”하여,
교만한 자에게 재앙과 손해를 입히고 겸손한 자에게 복과 길함을 준다는 것이 우리나라 전통의 기본적인 귀신관이다.
(귀신에 관해서는 중용 제16장에서 자세히 언급된다.)
素는 按漢書에 當作索이니 蓋字之誤也라
소는 안한서에 당작색이니 개자지오야라
索隱行怪는 言深求隱僻之理而過爲詭異之行也라
색은행괴는 언심구은벽지리이과위궤이지행야라
然이나 以其足以欺世 而盜名이라 故로 後世에 或有稱述之者하니
연이나 이기족이기세 이도명이라 고로 후세에 혹유칭술지자하니
此는 知之過而 不擇乎善이오 行之過而不用其中이니 不當强而强者也라
차는 지지과이 불택호선이오 행지과이불용기중이니 부당강이강자야라
聖人이 豈爲之哉시리오.
성인이 기위지재시리오.
素는 『한서』를 상고하건대 마땅히 ‘찾을 색’으로 지었으니 대개 글자가 잘못되었느니라
(잘못 옮겨진 데서 비롯된 것이니라).
‘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짓을 행하는 것’은
은벽한(비과학적인) 이치를 깊이 구해서 지나치게 괴이한 행동함을 말함이라.
그러나 그 족히 써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하는 것이니라(혹세무민함이라).
그러므로 후세에 혹 칭술하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앎이 지나치고 선을 가리지 못함이오,
행동이 지나쳐 그 중을 쓰지 못함이니 마땅히 강해서는 아니 될 때에 강함이라.
성인이 어찌 이러한 짓을 하시리오
按: 상고할 안 僻: 후미질 벽 詭: 속일 궤
遵道而行은 則能擇乎善矣오 半塗而廢는 則力之不足也니
준도이행은 즉능택호선의오 반도이폐는 즉력지부족야니
此는 其知 雖足以及之나 而行有不逮니 當强而不强者也라
차는 기지 수족이급지나 이행유불체니 당강이불강자야라
已는 止也라 聖人이 於此에 非勉焉而不敢廢요 蓋至誠無息하야 自有所不能止也시니라.
이는 지야라 성이이 어차에 비면언이불감폐요 개지성무식하야 자유소불능지야시니라.
도를 따라서 가게 되면 곧 능히 선을 택하고
반쯤 가다 그만두면 즉 힘이 부족함이니
이는 그 아는 것이 비록 거기(도를 따르는 것)에 미치기는 하나 행실이 미치지 못함이 있으니
마땅히 강해야 할 때 강하지 못함이니라.
已는 그침이라.
성인이 이에 힘을 써서 감히 폐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대개 지극한 정성이 쉬지 아니하여 스스로 능히 그만두지 못하는 바가 있음이라.
[해설]
군자가 도를 따라 행한다는 것은
善을 가릴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은 되지만 이를 이끌어나갈 실천 능력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강하지 말아야 할 때 강함(不當强而强)과는 상반되게
정작 강해야 할 때 강하지 못함(當强而不强)을 지적한 것이다.
반면 성인이 도를 행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까봐 억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실함, 지극한 정성 그대로 나가다보니
이것이 몸에 배어 그만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右는 第十一章이라
子思所引夫子之言으로 以明首章之義者 止此하니
자사소인부자지언으로 이명수장지의자 지차하니
蓋此篇大旨는 以知仁勇三達德으로 爲入道之門이라
개차편대지는 이지인용삼달덕으로 위입도지문이라
卽以大舜顔淵子路之事로 明之하시니 舜은 知也오 顔淵은 仁也오
즉이대순안연자로지사로 명지하시니 순은 지야오 안연은 인야오
子路는 勇也라 三者에 廢其一이면 則無以造 道而成德矣라 餘見第二十章하니라.
자로는 용야라 삼자에 폐기일이면 즉무이조 도이성덕의라 여견제이십장하니라.
자사가 부자의 말씀을 끌어 써 머리장의 뜻을 밝힌 것이 이에 그치니
대개 이편의 큰 뜻은 앎(知) ? 어짊(仁) ? 용맹(勇) 세 가지 통한 덕(達德)으로 도에 들어가는 문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 편 머리에 곧 순임금과 안연과 자로의 일로써 밝히시니
순임금은 지적이고 안연은 어짊이고 자로는 용맹이노라.
세 가지 중에 그 하나라도 버리면 도에 나아가서 덕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나머지는 제20장에 나타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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