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제2장 시중장(時中章)
1
仲尼曰 君子는 中庸이오 小人은 反中庸이니라.
중니왈 군자는 중용이오 소인은 반중용이니라.
중니(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중용이오 소인은 반중용이니라.
中庸者는 不偏不倚無過不及而平常之理니 乃天命所當然이요
중용자는 불편불의무과불급이평상지리니 내천명소당연이요
精微之極致也라 唯君子라야 爲能體之요 小人은 反是니라.
정미지극치야라 유군자라야 위능체지요 소인은 반시니라.
중용이라 하는 것은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기울어지지도 아니하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어서 늘 그대로의 이치이니
이에 천명의 당연한 것이고 정미롭고 은미한 극치니라
오직 군자라야 능히 그 중용을 체행을 하고 소인은 이와 반대되는 짓을 하느니라.
2.
君子之中庸也는 君子而時中이오 小人之反中庸也는 小人而無忌憚也니라.
군자지중용야는 군자이시중이오 소인지반중용자는 소인이무기탄야니라.
군자의 중용은 군자이면서 때로 중을 하고 소인의 반중용은 소인이면서 꺼림이 없느니라.
王肅本에 作小人之反中庸也라 하야늘 程子이 亦以爲然하시니 今從之하노라
왕숙본에 작소인지반중용야라 하야늘 정자이 역이위연하시니 금종지하노라
君子之所以爲中庸者는 以其有君子之德하야 而又能隨時以處中也하고
군자지소이위중용자는 이기유군자지덕하야 이반능수시이처중야하고
小人之所以反中庸者는 以其 有小人之心하야 而又無所忌憚也니라
소인지소이반중용자는 이기 유소인지심하야 이우무소기탄야니라
蓋中無定體하야 隨時而在하니 是는 乃平常之理也니라
개중무정체하야 수시이재하니 시는 내평상지리야니라
君子는 知其在我라 故로 能戒謹不覩하고 恐懼不聞하야 而無時不中이요
군자는 지기재아라 고로 능계근부도하고 공구불문하야 이무시불중이요
小人은 不知有此하니 則肆欲妄行하야 而無所忌憚矣리라.
소인은 부지유차하니 즉사욕망행하야 이무소기탄의리라.
왕숙본에 소인이 중용에 반한다고 지었거늘 정자가 또한 써 그렇다고 하니
이제 따르노라 군자가 써 중용을 한다는 것은 그 군자의 덕이 있으면서
또한 능히 때를 따라 써 중에 처함이요 소인이 써 중용에 반한다는 것은
그 소인의 마음이 있어서 또한 기탄하는 바가 없느니라.
대개 중이라 하는 것은 정한 체가 없어서 때를 따라서 있으니 이것이 이에 늘 평상의 이치이라.
군자는 그 내게 있음을 아느니라.
그러므로 보지 않을 적에 경계하고 삼가며 듣지 않았을 적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여 때로 중을 하지 않음이 없고,
소인은 이것이(중용이 내 마음에 있음을) 있음을 아지 못하니
방자한 욕심이 망령되이 움직여서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느니라.
[해설]
‘中無定體’는 주역에 나오는 ‘神无方而易无體(신은 방소가 없고 역은 체가 없다)’의 이치와 같다.
때와 장소에 따라 신비로운 신의 작용이 나타나므로 방소가 없고
역 또한 때마다 다르게 점괘가 나오므로 일정한 체가 없듯이 중이라 하는 것도
정해진 체가 없어 때에 따라 나타남을 설명한 글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중용은 항상 삼가고 두려워하는 반면 소인의 반중용은 거리낌없이 망령되이 행동한다.
右는 第二章이라
此下十章은 皆論中庸하야 以釋首章之義며 文雖不屬이나
차하십장은 개논중용하야 이석수장지의며 문수부속이나
而意實相承也니라 變和言庸者는 游氏曰 以性情으로 言之면 曰中和요
이의실상승야니라 변화언용자는 유씨왈 이성정으로 언지면 왈중화요
以德行으로 言之면 則曰中庸이 是也니라 然이나 中庸之中은 實兼中和之義라.
이덕행으로 언지면 즉왈중용이 시야니라 연이나 중용지중은 실겸중화지의라.
이 아래 열장은 다 중용을 논해서 머리장의 뜻을 해석함이니
글이 비록 연결되지는 아니하나 뜻은 실로 서로 이어지니라.
和를 변하여 庸이라고 하는 것은, 유씨가 말하기를 성정으로 말하면 가로되 중화요,
덕행으로써 말하면 중용이 이것이라.
그러나 중용의 가운데에 실지로 중화의 뜻을 겸하느니라.
제일먼저 나오고 있는 仲尼(중니)라는 말은 공자의 字(자)이다.
어릴 때 名(명)이라는 이름을 얻고 커서 20세가 되었을 때 字(자)라는 이름을 얻는다.
어릴 때 이름은 태어난 모습이 유별나게 짱구라서 머리꼭대기가 언덕처럼 평평하다 하여
언덕 구(丘)자를 썻다고 (사기) 孔子世家에 적혀 있다.
그리고 중니는 공자의 부모가 곡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尼山(니산)에서 빌어서 났기 때문에 붙여진 자(字)인 것이다.
손자인 자사가 할아버지를 字로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서 정설은 없다.
그러나 손자가 할아버지를 字롤 부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법은 없었으며
구체적인 변별력 때문에 자로써 부르는 것은 무방하다고 [중용혹문]에 쓰여져 있다.
제3장부터는 모두 자왈(子曰)로 되어 있는데 유독 제일 처음 나오는 로기온자료에 "仲尼曰"이라고 한것은
이미 子思 당대에 "字" 즉 한 학파의 스승(Master)으로 불리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과 구별키 위하여 중니(仲尼)라는 字를 밝혔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하면 다음에 나오는 "子曰"은 당연히 "공자왈"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데 중니라는 말은 제30장에 한 번 다시 나온다.
그리고 제30장에서 중니가 언급되는 맥락은 중니를 극한으로 존승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제2장에서 처음으로 "중니"라는 말은 쓰고
계속 "字"로써 일관하였다가 제30장에서 다시 "중니"라는 말을 ㅆ는 자사의 수법은
"중니"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중니왈"은 "나의 위대한 할아버지 중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라는 식의
사적인 느낌과 공문(孔門)에 대한 무한한 프라이드가 담겨져 있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다음은 "君子"와 "小人"의 테마이다.
군자와 소인의 관해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그대로의 의미로 새겨도 무방하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라든가,
신분의 차이라든가,부의 소유의 차이에 의하여 외면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의 위대성은 인간을 보편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데에 있다.
공자 자신이 천한 출신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공자는 출신이나 신분에 의하여
인간이 규정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고대사회의 사상가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덕성이다.
희랍의 모든 사상가가 "노예제"를 긍정한 위에서 평범한 시민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인간" 관에는 인간의 수준에도 못미치는 노예가 깔려있다.
서양의 보편적 인간관은 실제로 미국의 "노예해방"이후에나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有敎無類(유교무류)"라고 언명한다.
가르침이나 배움에는 류적 차별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배우면 군자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분차별성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뚯일 뿐 아니라
인간의 계발가능성에 대하여 차별성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참으로 위대한 사상이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이 참으로 실현된 사회가 20세기 대중사회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변화를 인식 못하고 스스로 자신에게 제약을 가하고 있을 뿐이다.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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