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 하서(夏書)
▣ 하서(夏書)
『夏는 禹有天下之號也니 書凡四篇이라 禹貢은 作於虞時로되 而繫之夏書者는 禹之王이 以是功也일새니라』
『 하(夏)는 우(禹)가 천하(天下)를 소유한 칭호이니, 하서(夏書)는 모두 4편(篇)이다.
〈우공(禹貢)〉은 우(虞)나라 때에 지어졌는데 하서(夏書)에 단 것은 우(禹)가 왕(王)이 된 것이 이 공(功) 때문이어서이다.』
○ 서경 - 하서 - 우공(禹貢)
○ 서경 - 하서 - 감서(甘誓)
○ 서경 - 하서 - 오자지가(五子之歌)
○ 서경 - 하서 - 윤정(胤征)
서경 - 하서 - 우공(禹貢)
▣ 우공(禹貢)
『上之所取를 謂之賦요 下之所供을 謂之貢이라
是篇은 有貢有賦로되 而獨以貢名篇者는
孟子曰 夏后氏는 五十而貢하니 貢者는 較數歲之中하여 以爲常이라하시니
則貢又夏后氏田賦之總名이라 今文古文皆有하니라』
『 위에서 취하는 것을 부(賦)라 하고 아래에서 바치는 것을 공(貢)이라 한다.
이 편(篇)은 공(貢)이 있고 부(賦)가 있는데, 유독 공(貢)이라고 편(篇)을 이름한 것은
맹자(孟子)가 말씀하기를 “하후씨(夏后氏)는 50무(畝)에 공법(貢法)을 썼으니,
공(貢)이란 몇 년의 중간치를 비교하여 일정함을 삼는 것이다.” 하였으니,
공(貢)은 또 하후씨(夏后氏) 전부(田賦)의 총칭인 것이다.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에 모두 있다.』
▣ 제1장(第一章)
『 우(禹)는 토지를 분별하고 산(山)을 따라 나무를 제거하여 고산(高山)과 대천(大川)을 정해 놓으셨다.』
『 부(敷)는 분별이니, 토지(土地)를 분별하여 구주(九州)를 만든 것이다.
전(奠)은 정함이니, 고산(高山)•대천(大川)을 정하여 주(州)의 경계를 구별한 것이니,
예를 들면 연주("州)의 제수(濟水)와 황하(黃河), 청주(靑州)의 바다와 대산(岱山), 양주(揚州)의 회수(淮水)와 바다,
옹주(雍州)의 흑수(黑水)와 서하(西河), 형주(荊州)의 형산(荊山)과 형산(衡山), 서주(徐州)의 바다와 대산(岱山)과 회수(淮水),
예주(豫州)의 형산(荊山)과 황하(黃河), 양주(梁州)의 화양(華陽)과 흑수(黑水) 같은 것이 이것이다.
홍수(洪水)가 멋대로 흘러 구역을 분별할 수 없으므로 우(禹)가 구주(九州)의 지역을 분별하여 산의 형세에 따라 편의를 보아서
나무를 베고 길을 통하게 하여 다스렸으며, 또 그 지역에 있는 산(山)중에 높은 것과 천(川)중에 큰 것을 정하여 기강(紀綱)을 삼으셨으니,
이 세 가지는 우(禹)가 홍수(洪水)를 다스린 대요(大要)이다. 그러므로 글을 지은 자가 먼저 서술한 것이다.』
『 ○ 증씨(曾氏)가 말하였다. “우(禹)가 구주(九州)를 분별한 것은 사사로운 지혜를 쓴 것이 아니요,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에 구역(區域)이 각기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성토(星土)의 법에는 구야(九野)가 있고, 땅에 있는 것은 반드시 고산(高山)과 대천(大川)이 있어
한격(限隔)이 되어서 풍기(風氣)가 이 때문에 통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그 사이에 살아 또한 각기 풍속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禹)가 고산(高山)과 대천(大川)의 한계를 따라 구별하여 구주(九州)를 만들고, 또 산이 높은 것과 물이 깊고 큰 것을 정하여
그 주(州)의 진(鎭)으로 삼고 그 제사(祭祀)를 차례로 정하여 그 나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신 것이다.”』
▣ 제2장(第二章)
『 기주(冀州)이다.』
『 기주(冀州)는 제도(帝都)『[경사(京師)]』의 땅이다.
삼면(三面)이 황하(黃河)에 접해 있으니, 연하("河)의 서쪽이요 옹하(雍河)의 동쪽이요 예하(豫河)의 북쪽이니,
《주례(周禮)》〈직방(職方)〉에 “하내(河內)를 기주(冀州)라 한다.”한 것이 이것이다.
8주(州)는 다 강계(疆界)『[경계(境界)]』를 말하였으나 기주(冀州)는 말하지 않은 것은 나머지 주(州)의 이른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씨(켒氏)가 말하였다. “이는 또한 경사(京師)를 높인 것이니, 왕자(王者)는 밖이 없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 제3장(第三章)
『 이미 호구산(壺口山)을 시작하여 다스리시어』
『 시작하여 다스림을 재(載)라 한다. 호구(壺口)는 산 이름이니,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하동군(河東郡) 북굴현(北屈縣) 동남(東南)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습주(쳚州) 길향현(吉鄕縣)이다.』
『 ○ 이제 살펴보건대, 기재(旣載)라고 말한 것은 기주(冀州)는 제도(帝都)의 땅이니,
우(禹)가 명을 받아 홍수(洪水)를 다스리기 시작함에 마땅히 먼저하여야 하는 것이다.
호구(壺口) 등지(等地)를 경시(經始)하여 황하(黃河)의 세(勢)를 줄였으므로 기재(旣載)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禹)가 홍수(洪水)를 다스려 공(功)을 베푼 순서는 모두 하류(下流)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다음은 연주("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예주(豫州), 양주(梁州), 옹주(雍州)의 순서였으니,
연주("州)가 가장 지역이 낮으므로 먼저 하였고, 옹주(雍州)가 가장 지역이 높으므로 홀로 뒤에 하였다.
우(禹)가 말씀하기를 “내 구천(九川)을 터서 사해(四海)에 이르게 하고, 견(죻)과 회(澮)를 깊이 파서 내에 이르게 했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공력(功力)을 쓴 본말(本末)이다.
먼저 구천(九川)의 물을 터놓아 바다에 이르게 했다면 물의 큰 것이 돌아갈 곳이 있을 것이요,
또 견(죻)과 회(澮)를 깊이 파서 내에 이르게 했다면 물의 작은 것이 빠질 곳이 있을 것이니,
이는 모두 하류(下流)로부터 물의 형세를 소통하여 줄인 것이다.
〈우공(禹貢)〉의 글을 읽고 우왕(禹王)이 공(功)을 베푼 순서를 찾으려면 마땅히 여기에서 자세히 살펴야 한다.』
▣ 제4장(第四章)
『 양산(梁山)과 기산(岐山)을 다스리시며,』
『 양(梁)과 기(岐)는 모두 기주(冀州)의 산이다.
양산(梁山)은 여량산(呂梁山)이니, 지금의 석주(石州) 이석현(離石縣) 동북쪽에 있다.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양산(梁山)은 진(晉)의 망산(望山)이다.” 하였으니, 바로 기주(冀州)의 여량산(呂梁山)이다.
여불위(呂不韋)가 말하기를 “용문(龍門)을 뚫지 않고 여량산(呂梁山)을 파기 전에는 황하(黃河)가 맹문(孟門)의 위로 나왔다.” 하였으며,
또 《춘추(春秋)》에 “양산(梁山)이 무너졌다.” 하였는데, 좌씨(左氏)와 곡량(穀梁)은 모두 진(晉)나라 산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또한 여량산(呂梁山)을 가리킨 것이다.
역도원(¦]道元)은 이르기를 “여량산(呂梁山)의 돌이 우뚝 솟아 황하(黃河)의 흐름이 격동하고 부딪쳐서 천지(天地)를 진동한다.” 하였으니,
이는 우(禹)가 이미 호구산(壺口山)에서 일을 시작하고 곧바로 양산(梁山)을 다스린 것이다.
기산(岐山)은 지금의 분주(汾州) 개휴현(介休縣)에 있었으니,
호기산(狐岐山)으로 승수(勝水)가 나오는 곳이니 동북쪽으로 흘러 분수(汾水)로 주입한다.
역도원(¦]道元)은 이르기를 “후위(後魏)가 호기산(胡岐山)에 육벽(六壁)을 설치하여 이석(離石)에 있는 여러 호(胡)를 막았다.
그리하여 인하여 큰 진(鎭)이 되었다.” 하였으니, 지금 육벽성(六壁城)은 승수(勝水)의 곁에 있는 바, 실로 옛날 황하(黃河) 길의 험한 곳이다.
두 산은 하수(河水)가 경유하는 곳이니, 이것을 다스림은 황하(黃河)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선유(先儒)가 옹주(雍州)의 양산(梁山)과 기산(岐山)이라고 한 것은 옳지 않다.』
▣ 제5장(第五章)
『 이미 태원(太原)을 닦아서 악양(岳陽)『[태악산(太岳山) 남쪽]』에 이르게 하며,』
『 수(修)는 곤(툵)의 공을 인하여 닦은 것이다.
넓고 평평한 곳을 원(原)이라 하니, 지금의 하동로(河東路) 태원부(太原府)이다. 악(岳)은 태악(太岳)이다.
《주례(周禮)》〈직방(職方)〉에 “기주(冀州)는 산진(山鎭)이 곽산(쥦山)이다.” 하였고,
〈지리지(地理志)〉에 “곽태산(쥦太山)은 곧 태악(太岳)이니 하동군(河東郡) 체현(³.縣)의 동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진주(晉州) 곽읍(쥦邑)이다.
산의 남쪽을 양(陽)이라 하니 곧 지금의 악양현(岳陽縣) 지역이니, 제요(帝堯)가 도읍한 곳이다.
양자운(揚子雲)의 기주잠(冀州箴)에 “악양(岳陽)이 도읍이다.” 하였으니, 이것이다.
분수(汾水)는 태원(太原)에서 나와 태악(太岳)을 경유하여 동쪽으로 황하(黃河)에 들어가니, 이는 분수(汾水)를 인도한 것이다.』
▣ 제6장(第六章)
『 담회(覃懷)에서 공적(功績)을 이루어 횡장(衡캕)에 이르게 하였다.』
『 담회(覃懷)는 지명(地名)이니, 〈지지(地志)〉에 “하내군(河內郡)에 회현(懷縣)이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회주(懷州)이다.
증씨(曾氏)는 말하기를 “담회(覃懷)는 평지이니, 마땅히 맹진(孟津)의 동쪽, 태행(太行)의 서쪽에 있을 것이니,
내수(쪫水)가 그 서쪽에서 나오고, 기수(淇水)가 그 동쪽에서 나온다.” 하였다.
홍수(洪水)가 산을 싸고 언덕을 오를 때를 당하여 평지에서는 공(功)을 이루기가 어렵기 때문에 저적(底績)이라 한 것이다.
횡장(衡캕)은 수명(水名)이니, 횡(衡)은 횡(橫)의 고자(古字)이다.
〈지지(地志)〉에 장수(캕水)가 둘이니, 하나는 “상당군(上黨郡) 첨현(沾縣) 대민곡(大쮈谷)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의 평정군(平定軍) 악평현(樂平縣) 소산(少山)으로 이름을 청장(淸캕)이라 하고,
하나는 “상당군(上黨郡) 장자현(長子縣) 녹곡산(鹿谷山)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의 노주(潞州) 장자현(長子縣) 발구산(發鳩山)으로 이름을 탁장(濁캕)이라 한다.
역도원(¦]道元)은 “이 물을 형수(衡水)라 하고 또 횡수(橫水)라 이르니, 동쪽으로 업(쵘)에 이르러 청장(淸캕)과 합류(合流)하고,
동북으로 부성(阜城)에 이르러 북하(北河)에 들어간다.” 하였다.
업(쵘)은 지금의 노주(潞州) 섭현(涉縣)이고, 부성(阜城)은 지금의 정원군(定遠軍) 동광현(東光縣)이다.』
『 ○ 또 살펴보건대, 상흠(桑欽)이 이르기를 “두 장수(캕水)가 근원은 다르나 하류(下流)가 서로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고,
당(唐)나라 사람도 말하기를 “장수(캕水)가 홀로 바다에 도달하니, 독(瀆)으로 삼을 것을 청합니다.” 하여
황하(黃河)로 들어간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우(禹)가 황하(黃河)를 인도함에 홍수(?水)와 대륙(大陸)으로부터
갈석(碣石)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게 해서 본래 서산(西山)의 아래를 따라 동북쪽으로 흘러갔었다.
주(周)나라 정왕(定王) 5년에 황하(黃河)가 영력(?礫)으로 옮겨가니, 점점 옮겨가서 동쪽으로 갔으나
한(漢)나라 초기에도 장수(캕水)는 그대로 황하(黃河)로 들어갔는데,
그 후 황하(黃河)가 옮겨져 날로 동쪽으로 가서 장수(캕水)를 취함이 더욱 멀어졌다.
상흠(桑欽) 때에 이르러서는 황하(黃河)가 대비(大Ý2)로부터 이하는 이미 옛 길이 아니어서 장수(캕水)는 따로 바다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상흠(桑欽)과 당(唐)나라 사람이 말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 제7장(第七章)
『 토질은 백색(白色)이고 덩어리가 없는 양토(壤土)『[고운 흙]』이며』
『 한(漢)나라 공씨(孔氏)는 “흙덩이가 없는 것을 양(壤)이라 한다.” 하였고, 안씨(顔氏)는 “부드러운 흙을 양(壤)이라 한다.” 하였다.
하씨(夏氏)는 말하기를 “《주관(周官)》에 대사도(大司徒)가 12토양의 물건을 분별하여
여기에 심을 종자를 알아서 가색(稼穡)과 수예(樹藝)를 가르치고, 토균(土均)의 법(法)으로 오물(五物)과 구등(九等)을 분별하여
천하(天下)의 지정(地征)『[땅에 대한 세금]』을 제정한다.” 하였으니,
백성들에게 수예(樹藝)를 가르침과 땅에 따라 공물(貢物)을 제정함은 진실로 토지를 구분함을 먼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토지의 마땅함을 분별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으니, 백(白)은 색깔을 분별한 것이요, 양(壤)은 그 성질을 분별한 것이다.
초인(草人)이 토양에 따라 씨앗을 담그는 법에 붉고 단단한 땅에는 소뼈를 쓰고, 붉은 토질에는 양의 뼈를 쓰고,
분양(墳壤)에는 고라니 뼈를 쓰고, 마른 늪지대에는 사슴 뼈를 쓰니,
농토에 따라 씨앗을 담그고 다스림에 각각 색깔과 성질에 따라 마땅히 사용해야 할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 증씨(曾氏)는 말하였다. “기주(冀州)의 땅이 어찌 다 백양(白壤)이겠는가마는 이렇게 말한 것은
토회(土會)의 법(法)『[토질(土質)에 따라 공세(貢稅)를 내는 법]』은 그 많은 것을 따라 논하기 때문이다.”』
▣ 제8장(第八章)
『 부(賦)는 상(上)에 상(上)이니 섞어서 상(上)에 중(中)을 내기도 하며, 전(田)은 중(中)에 중(中)이다.』
『 부(賦)는 전(田)에 따라 내는 바의 미곡(米穀)과 병거(兵車)의 따위이다.
착(錯)은 섞임이니, 부(賦)는 제(第) 1등(等)이나 섞어서 제(第) 2등(等)을 내는 것이다.
전(田)은 제(第)5등(等)이니, 부(賦)가 전(田)보다 4등급이 높은 것은 땅이 넓고 사람이 조밀하기 때문이다.』
『 임씨(林氏)가 말하였다. “기주(冀州)는 부(賦)를 먼저하고 전(田)을 뒤에 한 것은 기주(冀州)는 왕기(王畿)의 땅이니,
천자(天子)가 직접 다스리는 곳이라서 장포(場圃)와 원전(園田), 칠림(漆林) 따위를 아울러서 세금을 내게 하니,
《주관(周官)》의 〈재사(載師)〉에 기재되어 있는 바, ‘부(賦)가 모두 전(田)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賦)를 궐토(厥土)의 아래에 속하게 하였고,
나머지 주(州)는 모두 전(田)에서 나오는 부(賦)이므로 전(田)을 먼저하고 부(賦)를 뒤에 한 것이다.”』
『 또 살펴보건대, 구주(九州)에 9등(等)의 부(賦)는 다 주(州)마다 세입(歲入)의 총수를 구주(九州)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서로 비교하여 9등(等)을 만든 것이요, 이러한 등급의 전(田)이라 하여 이러한 등급의 부(賦)를 내도록 한 것은 아니다.
기주(冀州)에 유독 공(貢)『[공물(貢物)]』•비(?)『[폐백]』를 말하지 않은 것은
기주(冀州)는 천자(天子)의 봉내(封內)의 땅이라서 공(貢)•비(?)에 일삼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제9장(第九章)
『 항수(恒水)와 위수(衛水)가 이미 물길을 따르며, 대륙(大陸)이 이미 농사를 짓게 되었다.』
『 항(恒)과 위(衛)는 두 물의 이름이다.
항수(恒水)는 〈지지(地志)〉에 “상산군(常山郡) 상곡양현(上曲陽縣) 항산(恒山) 북곡(北谷)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의 정주(定州) 곡양현(曲陽縣) 서북쪽 항산(恒山)이니, 동쪽으로 구수(?水)로 들어간다.
설씨(薛氏)는 말하기를 “동쪽으로 흘러 구수(?水)와 합류(合流)하여 영주(瀛州) 고양현(高陽縣)에 이르러 역수(易水)로 들어간다.” 하였고,
조씨(켒氏)는 말하기를 “지금의 항수(恒水)는 서남쪽으로 흘러 진정부(眞定府) 행당현(行唐縣)에 이르러 동쪽으로 흘러 자수(滋水)에 들어가며,
또 남쪽으로 흘러 형수(衡水)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이는 옛 길이 아니다.
위수(衛水)는 〈지지(地志)〉에 “상산군(常山郡) 영수현(靈壽縣) 동북쪽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곧 지금의 진정부(眞定府) 영수현(靈壽縣)이니 동쪽으로 호타하(î"´=河)로 들어간다.
설씨(薛氏)는 말하기를 “동북쪽으로 호타하(î"´=河)와 합류하여 신안군(信安軍)을 지나 역수(易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종(從)은 그 길을 따름이다.』
『 대륙(大陸)은 손염(孫炎)은 이르기를 “거록(鉅鹿)의 북쪽 광아(廣阿)의 늪이니, 황하(黃河)가 지나는 곳이다.” 하였고,
정씨(程氏)는 말하기를 “거록(鉅鹿)은 고하(古河)『[옛날 황하(黃河)]』와 거리가 매우 머니,
황하(黃河)가 일찍이 형주(邢州)를 경유하여 흘러간 적이 없으니, 거록(鉅鹿)의 광아(廣阿)는 옳지 않다.” 하였다.
《이아(爾雅)》를 살펴보면 “높고 평평한 곳을 육(陸)이라 한다.” 하였으니, 대륙(大陸)이란 사방에 산과 언덕이 없어서 넓은 평지이다.
우왕(禹王) 때에 황하(黃河)는 전주(캷州)와 상주(相州) 이북으로부터 다 서산(西山)
『[태행산(太行山)]』의 기슭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 왕횡(王橫)이 모두 높은 지역에 있다고 기재하였으니,
패주(貝州)와 기주(冀州)로부터 고강(枯?)의 남쪽에 이르기까지에 있는 고하(古河)는 대체로 모두 서산(西山)의 종지(踵趾)
[기슭]를 뚫고 흘러가다가 신강(信?)의 북쪽을 지남에 미쳐서는 서산(西山)의 세가 끊겨서 사방이 드넓은 평지이므로
이 땅을 대륙(大陸)이라 일렀으니, 바로 하문(下文)에 “북쪽으로 대륙(大陸)에 이른다.”는 것과 합치된다.
그러므로 수(隋)나라는 조주(趙州)의 소경(昭慶)을 고쳐서 대륙현(大陸縣)이라 하였고,
당(唐)나라는 또 녹성(鹿城)을 떼어서 육혼현(陸渾縣)을 설치하였는바,
모두 거록(鉅鹿)의 대륙(大陸)은 황하(黃河)와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또한 북쪽지역에서 찾으니,
두우(杜佑)와 이길보(李吉甫)가 “형주(邢州), 조주(趙州), 심주(深州) 세 고을이 대륙(大陸)이다.” 한 것이 맞는다.
작(作)은 밭갈아 다스릴 만함을 말한 것이니, 수해(水害)가 이미 그침에 평지의 넓은 곳을 또한 밭갈아 다스릴 만한 것이다.
항수(恒水)와 위수(衛水)는 물이 적으나 지역이 멀고, 대륙(大陸)은 땅이 평평하고 황하(黃河)와 가깝기 때문에
전부(田賦)의 뒤에 공(功)을 이룬 것이다.』
▣ 제10장(第十章)
『 도이(島夷)가 피복(皮服)을 입고 와서 공물(貢物)을 바쳤다.』
『 바다의 굽이를 도(島)라 하니, 해도(海島)의 오랑캐가 피복(皮服)을 입고 와서 공물(貢物)을 바친 것이다.』
▣ 제11장(第十一章)
『 오른쪽으로 갈석(碣石)을 끼고서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 갈석(碣石)은 〈지지(地志)〉에 “북평군(北平郡) 여성현(驪城縣) 서남쪽 하구(河口)의 땅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평주(平州)의 남쪽이다.
기주(冀州)는 북방(北方)에서 공부(貢賦)를 수송해 올 때에, 북해로부터 황하(黃河)로 들어와서 남향(南向)하여 서쪽으로 돌 때
갈석(碣石)이 오른쪽으로 도는 사이에 있으므로 “오른쪽으로 낀다.”고 한 것이다.』
『 정씨(程氏)가 말하였다. “기주(冀州)는 제도(帝都)가 되어 동(東)•서(西)•남(南) 삼면(三面)이 황하(黃河)와 접해 있으니,
다른 주(州)의 공부(貢賦)는 모두 황하(黃河)에 도달함을 이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세 방위는 또한 굳이 쓸 것이 없고,
북쪽 경계는 한(漢)나라의 요동군(遼東郡)•요서군(遼西郡)•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지역이니,
그 물에 요하(遼河)•유수(濡水)•호타하(î"´=河)•역수(易水)와 같은 것은 다 중간지역이 높아서 황하(黃河)와 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북해(北海)로부터 온 뒤에야 황하(黃河)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 또 살펴보건대, 역도원(¦]道元)이 말하기를 “여성(驪城)의 바닷가에 돌이 용도(甬道)와 같은 것이 수십 리가 있으며,
산마루에 큰 돌이 있는데 기둥의 모양과 같으니, 위소(韋昭)가 이것을 갈석(碣石)이라 하였다.
이 산이 옛날에는 하구(河口)의 바닷가에 있었기 때문에 공물(貢物)을 들여오는 황하(黃河)의 길을 기록한 것인데,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물에 침몰되어서 바닷물 속에 잠겼으니, 이미 강안(江岸)과 거리가 5백여 리나 된다.” 하였다.
《전국책(戰國策)》에 “갈석(碣石)이 상산군(常山郡) 구문현(九門縣)에 있다.”고 한 것은 이름이 우연히 같은 것인 듯하며,
정씨(鄭氏)는 “구문현(九門縣)에는 이 산(山)이 없다.” 하였다.』
▣ 제12장(第十二章)
『 제수(濟水)와 황하(黃河)에 연주("州)가 있다.』
『 연주("州) 지역은 동남쪽은 제수(濟水)를 점거하고 서북쪽은 황하(黃河)에 이른다.
제수(濟水)와 황하(黃河)는 도수(導水)『[물을 인도함]』에 보인다.
소씨(蘇氏)가 말하기를 “황하(黃河)와 제수(濟水)의 사이는 거리가 멀지 않다.
연주("州)의 지경은 동남쪽으로 제수(濟水)를 점거하고 있으니, 제수(濟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황하(黃河)가 옛날에는 북쪽으로 흘러 연주("州) 지역이 북쪽으로 갈석(碣石)과 하서(河西) 지역까지 다 차지하였는데,
뒤에 갈석(碣石) 지역은 바다속에 잠기고 황하(黃河)는 더욱 남쪽으로 옮겨 가서
제수(濟水)와 황하(黃河)의 사이가 비로소 거리가 멀지 않게 된 것이니, 소씨(蘇氏)의 말이 반드시 옳지는 않을 듯하다.』
『 ○ 임씨(林氏)가 말하였다. “제(濟)는 고문(古文)에 제(?)로 되어 있으니,
《설문(說文)》의 주(註)에 ‘이는 연주("州)의 제수(濟水)이다.’ 하였다.
수(水)를 따르고 제(齊)를 따른 것은 《설문(說文)》의 주(註)에 ‘상산(常山)의 방자현(房子縣) 찬황산(贊皇山)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이 두 글자는 음(音)은 같으나 뜻이 다르니 마땅히 고문(古文)을 바른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제13장(第十三章)
『 구하(九河)가 이미 물길을 따르며,』
『 구하(九河)는 《이아(爾雅)》에 첫째는 도해(徒駭), 둘째는 태사(太史), 셋째는 마협(馬頰), 넷째는 복부(覆?),
다섯째는 호소(胡蘇), 여섯째는 간결(簡潔), 일곱째는 구반(鉤盤), 여덟째는 격진(鬲津)이며,
그 하나는 황하(黃河)의 경류(經流)『[큰 물줄기]』이다.
그런데 선유(先儒)는 황하(黃河)의 경류(經流)를 알지 못하고는 마침내 간(簡)과 결(潔)을 나누어 둘이라 하였다.
기도(旣道)라 한 것은 그 길을 순히 따르는 것이다.』
『 ○ 살펴보건대, 도해하(徒駭河)는 〈지지(地志)〉에 “호타하(î"´=河)이다.” 하였고,
《환우기(¶]宇記)》에는 “창주(滄州)의 청지(淸池) 남쪽에 있다.” 하였으며, 허상(許商)은 “평성(平城)에 있다.” 하였다.
마협하(馬頰河)는 《원화지(元和志)》에 “덕주(德州)의 안덕(安德), 평원(平原) 남동쪽에 있다.” 하였고,
《환우기(¶]宇記)》에는 “체주(³/州)의 적하(滴河) 북쪽에 있다.” 하였으며, 《여지기(輿地記)》에는 “곧 독마하(篤馬河)이다.” 하였다.
복부하(覆?河)는 《통전(通典)》에 “덕주(德州)의 안덕(安德)에 있다.” 하였다.
호소하(胡蘇河)는 《환우기(¶]宇記)》에 “창주(滄州)의 요안(饒安), 무체(無³/), 임진(臨津) 세 현(縣)에 있다.” 하였고,
허상(許商)은 “동광(東光)에 있다.” 하였다. 간결하(簡潔河)는 《여지기(輿地記)》에 “임진(臨津)에 있다.” 하였다.
구반하(鉤盤河)는 《환우기(¶]宇記)》에 “악릉(樂陵)의 동남쪽에 있으니, 덕주(德州)의 평창(平昌)으로부터 온다.” 하였고,
《여지기(輿地記)》에는 “악릉(樂陵)에 있다.” 하였다.
격진하(鬲津河)는 《환우기(¶]宇記)》에 “악릉(樂陵)의 동쪽에 있으니, 서북쪽으로 흘러 요안(饒安)으로 들어간다.” 하였고,
허상(許商)은 “격현(鬲縣)에 있다.” 하였으며, 《여지기(輿地記)》에는 “무체(無³/)에 있다.” 하였다.
태사하(太史河)는 소재(所在)를 알지 못한다.』
『 한대(漢代)로부터 이후로 구하(九河)를 연구한 것이 매우 상세하나 한대(漢代)는 옛날과 가까웠는데도 다만 셋을 찾아냈을 뿐이었는데,
당(唐)나라 사람이 누대(累代)에 걸쳐 전해오는 말을 모아서 마침내 여섯을 찾아냈으며,
구양민(歐陽쭿)의 《여지기(輿地記)》에 또 그 하나를 찾아내었다.
그런데 혹은 새로운 하수(河水)인데 옛 이름으로 기록하고, 혹은 한 지역인데 서로 두 말을 하니,
요컨대 모두 옳은 듯하나 옳지 못하여 근거한 바가 없으며, 드러난 오류로 말하면 반고(班固)는 호타하(î"´=河)를 도해(徒駭)라 하였으니,
호타하(î"´=河)는 고하(古河)와 상관이 없음을 알지 못한 것이고, 악사(樂史)는 마협(馬頰)을 한(漢)나라의 독마하(篤馬河)에 해당시켰다.
정씨(鄭氏)는 찾아도 찾을 수 없자, 또 이르기를 “구하(九河)는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여덟 곳의 흐르는 물을 막아
스스로 땅을 넓힌 것이다.” 하였는데, 제방을 굽게 쌓는 것은 제(齊)나라가 금한 것이니,
황하(黃河)를 막는 것은 마땅히 환공(桓公)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수(河水)는 막을 수 있으나 황하(黃河)의 물길을 다 평평히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 근거가 없는 말이다.
오직 정씨(程氏)는 “구하(九河)지역이 이미 바다속에 잠겼다.” 하고는 갈석(碣石)이 구하(九河)가 된 증거를 인용하여,
“지금 창주(滄州) 지역은 북쪽으로 평주(平州)와 접경하여 서로의 거리가 5백여 리이니, 우(禹)의 구하(九河)가 마땅히 이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뒤에 바닷물 속에 잠겼으므로 그 자취가 남아있지 않다.” 하였다.』
『 구하(九河)가 바다에 침몰되지 않았을 때에는 지금의 해안으로부터 동북쪽으로 다시 5백 리가 평지이니,
하(河)가 나뉘어 아홉이 된 것은 이 5백 리 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또 상문(上文)에 “오른쪽으로 갈석(碣石)을 낀다.”고 말하였으니,
구하(九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갈석(碣石)이 그 서북쪽 벼랑에 있었을 것이다.
구하(九河)는 물길이 변천하여 미루어 상고하기가 어려우나 갈석(碣石)은 산기슭과 정상을 통틀어 모두 돌이니
쓰러지거나 침몰되지 않았을 텐데, 지금 연주("州), 기주(冀州) 지역에 이미 이러한 돌이 없으며,
평주(平州)의 정남쪽에 산이 있는데 갈석(碣石)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직도 바닷속에 있으니,
창주(滄州)의 강안(江岸)과 5백여 리의 거리이며, 드높이 솟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하(古河)가 지금 바다가 된 곳으로부터 북쪽으로 향하여 옆으로 흘러가서 비로소 나뉘어 아홉이 된 것이니,
황하(黃河)의 물길이 이미 바다로 빠져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한(漢)나라의 왕횡(王橫)은 “옛날에 하늘에서 항상 비가 내리고 동북풍(東北風)이 불어 바닷물이 서남쪽으로 넘쳐서
수백 리를 침몰시켰다.” 하였으니, 구하(九河) 지역이 이미 바닷물 속에 잠긴 것이다.
역도원(¦]道元)은 또한 이르기를 “구하(九河)와 갈석(碣石)이 바다에 둘러싸여 침몰되었다.” 하였다.
후세의 유자(儒者)들은 구하(九河)를 평지에서 찾을 줄만 알고, 갈석(碣石)의 있고 없음을 찾아서 증거로 삼을 줄은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전후(前後)의 이설(異說)이 끝내 귀숙(歸宿)함이 없었다.
구하(九河)의 땅이 아닌 곳에서 억지로 천착(穿鑿)하여 찾았으니, 당연히 지리(支離)하여 얻을 수 없는 것이다.』
▣ 제14장(第十四章)
『 뇌하(雷夏)에 이미 물이 모이며,』
『 택(澤)은 물이 모인 것이다.
뇌하(雷夏)는 〈지지(地志)〉에 “제음군(濟陰郡) 성양현(城陽縣) 서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복주(©0州) 뇌택현(雷澤縣) 서북쪽이다.
《산해경(山海經)》에 “못 가운데 뇌신(雷神)이 있는데 용의 몸에 사람의 얼굴이니, 그 배를 두드리면 우레가 울린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본래 하택(夏澤)이었는데, 이 신(神)을 인하여 뇌하(雷夏)라 이름한 것이다.
홍수(洪水)가 멋대로 흘러 못으로 들어감에 못이 받아들이지 못하였으니, 또한 범람하여 물이 치달려 파괴하였다.
그러므로 물이 다스려진 이후에 뇌하(雷夏)가 못이 된 것이다.』
▣ 제15장(第十五章)
『 옹수(Ã5水)와 저수(沮水)가 모여 함께 흐른다.』
『 옹(Ã5)과 저(沮)는 두 물의 이름이다.
옹수(Ã5水)는 증씨(曾氏)는 말하기를 “《이아(爾雅)》에 ‘물이 하수(河水)로부터 나온 것을 옹(Ã5)이라 한다.’ 하였고,
허신(許愼)은 ‘하수(河水)의 옹수(Ã5水)는 송(宋)에 있다.’ 하였으며,
또 ‘판수(?水)는 진류군(陳留郡) 준의현(浚儀縣)의 음구(陰溝)를 받아 몽(蒙)에 이르러
옹수(Ã5水)가 되어서 동쪽으로 사수(泗水)에 들어간다.’ 하였고,
《수경(水經)》에 ‘판수(?水)는 음구(陰溝)에서 나와 동쪽으로 몽(蒙)에 이르러 저환(狙?)이 된다.’ 하였으니,
옹수(Ã5水)가 곧 판수(?水)이다. 옹수(Ã5水)의 하류(下流)는 수수(첲水)로 들어간다.
저수(沮水)는 〈지지(地志)〉에 ‘수수(첲水)는 패국(沛國)의 망현(芒縣)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수수(첲水)가 그 저수(沮水)인가 보다.” 하였다.
조씨(켒氏)는 말하기를 “《이아(爾雅)》에 ‘하수(河水)에서 나온 것을 옹(Ã5)이라 하고, 제수(濟水)에서 나온 것을 초(ê4)라 한다.’ 하였으니,
운(韻)에서 찾아보면 저(沮)에는 초(楚)의 음(音)이 있으니, 두 물은 하수(河水)와 제수(濟水)의 구별이다.” 하였다.
두 말이 누가 옳은지 상세하지 않다. 회(會)는 물이 합하는 것이요, 동(同)은 합하여 하나로 흐르는 것이다.』
▣ 제16장(第十六章)
『 뽕나무가 잘 자라는 곳에 이미 누에를 칠 수 있으니, 이에 언덕에서 내려와 평지에 산다.』
『 상토(桑土)는 뽕나무가 잘 자라는 토지이다. 기잠(旣蠶)은 뽕나무로 누에를 칠 수 있는 것이다.
누에의 성질은 습기를 싫어하므로 홍수가 물러간 뒤에 누에를 칠 수 있다.
그러나 구주(九州)가 모두 그 이로움을 힘입었는데 유독 연주("州)에서 이를 말한 것은 연주("州) 지역은 뽕나무가 잘 자라니,
후세에 복수(©0水)가의 상간(桑間)에서도 오히려 이것을 징험할 수 있다. 땅이 높은 것을 구(丘)라 한다.
연주("州) 지역은 대부분 비하(卑下)한 곳에 있어서 수해(水害)가 특히 심하여 백성들이 모두 구릉에 의지해 살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내려와 평지에 거주한 것이다.』
▣ 제17장(第十七章)
『 토질은 검고 분기(墳起)하니, 풀은 무성하고 나무는 자란다.』
『 분(墳)은 토맥(土脈)이 분기(墳起)함이니, 좌씨(左氏)가 이른바 ‘술을 땅에 붓자 땅이 부풀어 올랐다.’는 것이 이것이다.
요(繇)는 무성함이다. 조(條)는 자람이다.』
『 ○ 임씨(林氏)가 말하였다. “구주(九州)의 형세는 서북쪽은 산이 많고 동남쪽은 물이 많으니,
산이 많으면 초목이 잘 자람은 굳이 쓸 것이 없다.
연주("州)•서주(徐州)•양주(揚州) 세 주(州)는 가장 동남쪽의 하류에 위치해 있으니,
이들 지역은 비습(卑濕)하고 저여(沮Â_)하여 홍수(洪水)에 해를 당하여 초목이 제대로 생장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요(繇)하기도 하고 조(條)하기도 하며, 요(夭)하기도 하고 교(喬)하기도 하며, 혹은 점점 자라고 총생하였다.
그러므로 이 세 주(州)에 대해 특별히 말하여 수토(水土)가 다스려져서 초목 또한 그 본성을 이룰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 제18장(第十八章)
『 전(田)은 중(中)에 하(下)이고, 부(賦)는 정(貞)이니, 13년을 다스려야 다른 주(州)와 똑같게 된다.』
『 전(田)은 제(第)6등(等)이고 부(賦)는 제(第)9등(等)이다.
정(貞)은 바름이니, 연주("州)는 부세(賦稅)가 가장 박하니
천하(天下)에 군주(君主) 노릇하는 자는 부세(賦稅)를 박하게 함을 정도(正道)로 삼음을 말한 것이다.
13년을 다스려야 다른 주(州)와 똑같게 된다는 것은 연주("州)는 황하(黃河) 하류의 충돌하는 곳에 해당하여,
물이 격류하고 여울이 사나우며, 지역이 평평하고 흙이 부슬부슬하여 피해가 더욱 심하니,
이제 수해가 비록 다스려 졌으나 비습(卑濕)하고 저여(沮Â_)함이 반드시 다 제거되지는 못해서
땅이 넓고 사람이 희소하여 생리(生理)가 적으니, 반드시 13년을 다스린 뒤에야 부세(賦稅)하는 법을 다른 주(州)와 똑같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전부(田賦)를 위하여 말하였으므로 그 글을 궐부(厥賦)의 아래에 소속시킨 것이다.
선유(先儒)는 우(禹)가 홍수(洪水)를 다스리는 데에 걸린 햇수라 하고,
또 이 주(州)가 홍수(洪水)를 다스림이 가장 뒤에 끝나서 주(州)가 아홉번째로 성공했다 하여
상문(上文)에 ‘궐부정(厥賦貞)’이란 것을 ‘부(賦) 또한 제(第)9등(等)이어서 주(州)와 바로 서로 맞는다.’ 하였는바,
이는 자못 의의(意義)가 없으니, 그 말이 옳지 않다.』
▣ 제19장(第十九章)
『 공물(貢物)은 옻과 생사(生絲)이고 광주리에 담아서 바치는 폐백은 무늬 있는 직물이다.』
『 공(貢)은 아랫사람이 그 지역에서 나는 것을 윗사람에게 바치는 것이다.
연주("州) 지역은 옻나무와 뽕나무가 잘 자라므로 옻과 생사를 바친 것이다. 비(비)는 대나무로 만든 그릇이니, 광주리 등속이다.
옛날에 폐백 등속을 광주리에 담아서 바쳤으니, 경문(經文)에 “비궐현황(?厥玄黃)『〔검고 누런 비단을 광주리에 담았다〕』”이 이것이다.
직문(織文)은 직물에 무늬가 있는 것이니, 금(錦)•기(綺) 등속이니, 한 가지 색깔이 아니므로 직문(織文)이라고 총괄한 것이다.
임씨(林氏)가 말하였다. “공(貢)이 있고 또 비(?)가 있는 것은 바치는 바의 물건을 광주리에 넣은 것이다.”』
▣ 제20장(第二十章)
『 제수(濟水)와 탑수(?水)에 띄워 황하(黃河)에 도달한다.』
『 배가 물에 떠가는 것을 부(浮)라 한다. 탑(?)은 황하(黃河)의 지류(枝流)이다.
연주("州)의 공부(貢賦)를 제수(濟水)와 탑수(?水)에 띄워 황하(黃河)에 도달한 것이다.
제도(帝都)인 기주(冀州)는 삼면(三面)이 황하(黃河)와 접해 있으니, 황하(黃河)에 도달하면 제도(帝都)에 도달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지지(地志)〉에 “탑수(?水)는 동군(東郡)의 동무양현(東武陽縣)에서 나와 천승현(千乘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고,
정씨(程氏)는 “이것은 바로 한하(漢河)이니, 탑수(?水)와는 절대로 다르다.” 하였다.
그러나 또한 탑하(?河)의 소재를 분명히 말하지 못했으니, 그 지역이 상세하지 않다.』
▣ 제21장(第二十一章)
『 바다와 대산(岱山)에 청주(靑州)가 있다.』
『 청주(靑州) 지역은 동북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대산(岱山)에 이른다.
대(岱)는 태산(泰山)이니, 지금의 습경부(襲慶府) 봉부현(奉符縣) 서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 제22장(第二十二章)
『 우이(췗夷)가 이미 경략(經略)되니,』
『 우이(췗夷)는 설씨(薛氏)가 “지금의 등주(登州) 지역이다.” 하였다.
약(略)은 경략(經略)하여 봉진(封畛)『[두둑]』을 만듦이니, 바로 〈요전(堯典)〉의 우이(췗夷)이다.』
▣ 제23장(第二十三章)
『 유수(流水)와 치수(淄水)가 옛 물길을 따른다.』
『 유(流)와 치(淄)는 두 물의 이름이다.
유수(Ä9水)는 〈지지(地志)〉에 “낭야군(琅Â7郡) 기현(箕縣)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의 밀주(密州) 거현(죥縣) 동북쪽에 있는 유산(Ä9山)이며, “북쪽으로 창도(昌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지금의 유주(Ä9州) 창읍(昌邑)이다.
치수(淄水)는 〈지지(地志)〉에 “태산군(泰山郡) 내무현(萊蕪縣) 원산(原山)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의 치주(淄州) 치천현(淄川縣) 동남쪽 70리 지점에 있는 원산(原山)이며,
“동쪽으로 박창현(博昌縣)에 이르러 제수(濟水)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지금의 청주(靑州) 수광현(壽光縣)이다.
기도(其道)는 물이 그 길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상문(上文)에서 ‘기도(旣道)’라고 말한 것은 우(禹)가 물길을 만든 것이요,
여기에서 ‘기도(其道)’라고 말한 것은 범람함이 제거되자 물이 그 옛길을 찾은 것이다.』
『 임씨(林氏)가 말하였다. “하수(河水)와 제수(濟水)의 하류를 연주("州)에서 받고, 회수(淮水)의 하류를 서주(徐州)에서 받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의 하류를 양주(揚州)에서 받는다.
청주(靑州)는 비록 바다와 가까우나 여러 물에 충돌을 당하지 않아 다만 유수(流水)와 치수(淄水) 두 물이 옛 길을 순히 따르면
그 공(功)이 끝나니, 다른 주(州)에 비하면 힘을 씀이 가장 적게 든 것이다.”』
▣ 제24장(第二十四章)
『 토질은 희고 분기(墳起)하니, 바닷가는 넓고 갯벌이다.』
『 빈(濱)은 가이니, 바닷가의 땅이 광막(廣漠)하고 척로(斥鹵)한 것이다.
허신(許愼)이 말하기를 “〈갯벌을〉 동방(東方)에서는 척(斥)이라 이르고 서방(西方)에서는 노(鹵)라 하니,
척로(斥鹵)는 짠 땅으로 소금을 구울 수 있는 곳이다.” 하였다.』
▣ 제25장(第二十五章)
『 전(田)은 상(上)에 하(下)이고, 부(賦)는 중(中)에 상(上)이다.』
『 전(田)은 제(第)3등(等)이고, 부(賦)는 제(第)4등(等)이다.』
▣ 제26장(第二十六章)
『 공물(貢物)은 소금과 갈포요, 해물은 섞어 바친다.
대산(岱山)의 골짜기에서 나오는 생사(生絲)와 모시, 납과 소나무와 괴이한 돌이다.
내주(萊州)의 오랑캐가 방목을 하니, 광주리에 담아서 바치는 폐백은 산뽕나무에서 나오는 생사이다.』
『 염(鹽)은 척지(斥地)『[갯벌]』에서 나오는 것이다. 치(퀪)는 가는 갈포이다.
착(錯)은 섞임이니, 해물이 한 종류가 아니므로 착(錯)이라고 말한 것이다.
임씨(林氏)는 말하기를 “이미 총괄하여 해물이라고 일렀으면 진실로 한 물건이 아닌 것이다.
이는 양주(揚州)의 ‘치혁우모유목(齒革羽毛惟木)’과 문세(文勢)가 서로 같으니, 착(錯)은 별도로 한 물건이 되니,
‘석공경착(錫貢磬錯)’의 착(錯)『[숫돌]』과 같다.” 하였으니, 이치가 혹 그럴 듯하다.
견(죻)은 골짜기이니, 대산(岱山)의 골짜기이다. 시(쳝)는 삼이다. 괴석(怪石)은 괴이한 돌이다.
임씨(林氏)는 말하기를 “괴석(怪石)을 바치는 것은 진실로 의심스러워할 만하니,
짐작컨대 반드시 기용(器用)의 꾸밈을 하는데 필요하여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요,
단지 괴이(怪異)한 돌을 바쳐서 완호(玩好)로 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였다.
내이(萊夷)는 안사고(顔師古)가 “내산(萊山)의 오랑캐이니, 제(齊)나라에 내후(萊侯)와 내인(萊人)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의 내주(萊州) 지역이다.” 하였다. 작목(作牧)은 방목할 수 있음을 말함이니, 오랑캐들은 목축을 생업으로 삼는다.
염(6)은 산뽕나무이니, 산뽕나무의 생사(生絲)는 그 질김이 거문고와 비파 줄에 합당하다.
소씨(蘇氏)가 말하였다. “오직 동래(東萊)만이 이 생사(生絲)가 있으니,
이것으로 비단을 만들면 견고하고 질겨서 보통 것과 다른 바, 내인(萊人)들은 이것을 산견(山繭)이라 한다.”』
▣ 제27장(第二十七章)
『 문수(汶水)에 띄워 제수(濟水)에 도달한다.』
『 문수(汶水)는 태산군(泰山郡) 내무현(萊蕪縣) 원산(原山)에서 나오니 지금의 습경부(襲慶府) 내무현(萊蕪縣)이며,
서남쪽으로 제수(濟水)에 들어가니 지금의 운주(홿州) 중도현(中都縣)에 있다.
치수(淄水)는 내무현(萊蕪縣)의 원산(原山) 북쪽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바다로 들어가고,
문수(汶水)는 내무현(萊蕪縣)의 원산(原山) 남쪽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제수(濟水)로 들어간다.
황하(黃河)에 도달함을 말하지 않은 것은 연주("州)를 따랐기 때문이다.』
▣ 제28장(第二十八章)
『 바다와 대산(岱山)과 회수(淮水)에 서주(徐州)가 있다.』
『 서주(徐州) 지역은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회수(淮水)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대산(岱山)에 이르는데,
서쪽으로 제수(濟水)를 말하지 않은 것은 대산(岱山)의 남쪽과 제수(濟水)의 동쪽은 서주(徐州)이고,
대산(岱山)의 북쪽과 제수(濟水)의 동쪽은 청주(靑州)가 되니, 제수(濟水)를 말하면 구별할 수 없으므로 생략한 것이다.
《이아(爾雅)》에 제수(濟水)의 동쪽을 서주(徐州)라고 한 것은
상(商)나라는 청주(靑州)가 없어서 청주(靑州)를 서주(徐州)에 겸병하였기 때문이며,
《주례(周禮)》에서 정동(正東)을 청주(靑州)라고 한 것은 주(周)나라는 서주(徐州)가 없어서 서주(徐州)를 청주(靑州)에 겸병했기 때문이다.』
『 임씨(林氏)가 말하였다. “한 주(州)의 지경은 반드시 네 면의 이름『〔至〕』이 있는데
일곱 주(州)에 모두 다만 두 면의 이름만을 말한 것은 이웃 고을로 서로 나타나기 때문이며,
이 주(州)에 이르러 유독 삼면(三面)을 기재한 것은 다만 바다와 대산(岱山)을 말하면 청주(靑州)인가 혐의하고,
다만 회수(淮水)와 바다를 말하면 양주(揚州)인가 혐의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바다와 대산(岱山) 및 회수(淮水)를 말한 뒤에야 서주(徐州)의 경계가 비로소 구별되는 것이다.”』
▣ 제29장(第二十九章)
『 회수(淮水)와 기수(沂水)가 다스려지니,』
『 회(淮)와 기(沂)는 두 물의 이름이다. 회(淮)는 도수(導水)에 보인다.
증씨(曾氏)는 말하기를 “회수(淮水)의 근원은 예주(豫州)의 경내에서 나와 양주(揚州)와 서주(徐州) 사이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니,
범람하여 폐해가 됨이 특히 서주(徐州)에 있었다. 그러므로 회수(淮水)의 다스림을 서주(徐州)에서 말한 것이다.” 하였다.
기수(沂水)는 〈지지(地志)〉에 “태산군(泰山郡) 개현(蓋縣) 애산(艾山)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의 기주(沂州) 기수현(沂水縣)이니,
남쪽으로 하비(下찖)에 이르러 서남쪽으로 사수(泗水)로 들어간다.
증씨(曾氏)는 말하기를 “서주(徐州)에 물을 기(沂)라고 이름한 것이 한둘이 아니니,
역도원(¦]道元)은 이르기를 ‘물이 이구산(尼丘山) 서북쪽에서 나와 노(魯)나라의 우문(雩門)을 경유하는 것을 또한 기수(沂水)라 한다.’ 하였고,
‘물이 태공(太公) 무양(武陽)의 관석산(冠石山)에서 나온 것을 또한 기수(沂水)라 한다.’ 하였으나
기수(沂水)의 큰 것은 태산(泰山)에서 나온다.” 하였다.』
『 또 살펴보건대, 서주(徐州)의 물은 사수(泗水)•문수(汶水)•변수(큱水)•곽수(¹水)가 있는데,
유독 회수(淮水)와 기수(沂水)를 말한 것은 《주례(周禮)》〈직방씨(職方氏)〉에 “청주(靑州)의 내는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이고,
못은 기수(沂水)와 술수(핤水)이다.” 하였는데, 주(周)나라는 서주(徐州)가 없어 청주(靑州)에 겸병하였으니,
주(周)나라의 청주(靑州)는 곧 우(禹)의 서주(徐州)이다.
그렇다면 서주(徐州)의 내는 회수(淮水)보다 큰 것이 없으니 회수(淮水)가 다스려졌으면 사수(泗水)로부터 이하의 모든 냇물을 알 수 있으며,
서주(徐州)의 못은 기수(沂水)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기수(沂水)가 다스려졌으면 술수(핤水)로부터 이하의 모든 못을 알 수 있다.』
▣ 제30장(第三十章)
『 몽산(蒙山)과 우산(羽山)이 곡식을 심을 수 있다.』
『 몽(蒙)과 우(羽)는 두 산(山)의 이름이다.
몽산(蒙山)은 〈지지(地志)〉에 “태산군(泰山郡) 몽음현(蒙陰縣) 서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기주(沂州) 비현(費縣)이며,
우산(羽山)은 〈지지(地志)〉에 “동해군(東海郡) 축기현(祝其縣) 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해주(海州) 구산현(£~山縣)이다.
예(藝)는 곡식을 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 제31장(第三十一章)
『 대야택(大野澤)이 이미 물이 모여 흐르니,』
『 대야(大野)는 못의 이름이니, 〈지지(地志)〉에 “산양군(山陽郡) 거야현(鉅野縣)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제주(濟州) 거야현(鉅野縣)이니, 거(鉅)는 곧 큼이다. 물이 모여 다시 흐름을 저(캜)라 이른다.
《수경(水經)》을 살펴보면, 제수(濟水)가 승씨현(乘氏縣)에 이르러 둘로 나뉘어서 남쪽은 하수(?水)가 되고 북쪽은 제수(濟水)가 된다.
역도원(역道元)은 이르기를 “한 물은 동남쪽으로 흐르고 한 물을 동북쪽으로 흘러 거야택(鉅野澤)으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대야(大野)는 제수(濟水)가 끊기는 곳이 되니, 물이 모인 것이 크다.
하승천(何承天)은 말하기를 “거야(鉅野)가 광대하여 남쪽으로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인도하고
북쪽으로는 청제(淸濟)와 연결한다.” 하였으니, 서주(徐州)에 제수(濟水)가 있음을 이에 볼 수 있다.
또 운주(홿州)의 중도(中都) 서남쪽에 또한 대야피(大野陂)가 있으니, 혹은 이 모두 대야(大野) 지역인 듯하다.』
▣ 제32장(第三十二章)
『 동원(東原)이 다스려짐에 이르렀다.』
『 동원(東原)은 한(漢)나라의 동평국(東平國)이니, 지금의 운주(홿州)이다.
조씨(켒氏)는 말하기를 “동평(東平)은 예로부터 수해(水害)가 많아서 여러번 성(城)을 옮겼다.
함평년간(咸平年間)에 또다시 동남쪽으로 성(城)을 옮겼으니, 이 지역이 낮고 습함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지평(底平)은 수해가 이미 제거되어 다스려짐에 이른 것이다.
후인(後人)들은 이 지역이 평평하다 하여 동평(東平)이라고 일렀다.
또 살펴보건대, 동원(東原)은 서주(徐州)의 서북쪽에 있는데 동(東)이라고 말한 것은 제수(濟水)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동평국(東平國)은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에 또한 제동국(濟東國)이라 하였으니,
대야(大野)와 동원(東原)이 제수(濟水)를 표시한 것임을 더욱 알 수 있다.』
▣ 제33장(第三十三章)
『 토질은 붉고 차지고 분기(墳起)하니, 초목이 점점 자라 총생하였다.』
『 흙이 차짐을 식(埴)이라 한다. 식(埴)은 매끄러운 것이니, 차진 것이 기름의 매끄러움과 같은 것이다.
주(周)나라에는 진흙을 쳐서 만드는 공인(工人)이 있었고, 노씨(老氏)는 “진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든다.”고 말하였으니,
토성(土性)이 차지고 매끄러우며 세밀하므로 치고 빚어서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점(漸)은 점점 자람이니, 《주역(周易)》에 이른바 ‘목점(木漸)’이란 것과 같으니, 날로 무성함에 나아가 그치지 않음을 이른다.
포(包)는 총생(叢生)함이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대나무가 총생한다.’는 것과 같으니, 총생하여 빽빽해짐을 말한 것이다.』
▣ 제34장(第三十四章)
『 전(田)은 상(上)에 중(中)이고, 부(賦)는 중(中)에 중(中)이다.』
『 전(田)은 제(第)2등(等)이고 부(賦)는 제(第)5등(等)이다.』
▣ 제35장(第三十五章)
『 공물(貢物)은 오색의 흙과 우산(羽山) 골짝의 여름철 꿩과 역산(쵝山)
남쪽의 우뚝이 자라는 오동나무와 사수(泗水)의 물가에 떠있는 경쇠이다.
회수(淮水)의 오랑캐들은 조개와 구슬과 어물을 바치니, 광주리에 담아서 바치는 폐백은 검은 비단과 섬(纖)과 호(縞)이다.』
『 서주(徐州)의 토질은 비록 붉으나 오색의 흙이 또한 사이에 있으므로 공물(貢物)로 바치도록 한 것이다.
《주서(周書)》〈작락(作?)〉에 이르기를 “제후(諸侯)가 주(周)나라에서 명(命)을 받아야 대사(大社)를 국중(國中)에 세우는데,
그 담을 동쪽은 청토(靑土), 남쪽은 적토(赤土), 서쪽은 백토(白土), 북쪽은 이토(驪土)『[흑토(黑土)]』이며,
중앙은 황토(黃土)를 거듭 쌓는다.” 하였다.
장차 제후(諸侯)를 세우게 되면 그 방면의 흙을 파서 황토(黃土)로 싸고 흰 띠로 감싸서 토봉(土封)을 만든다.
그러므로 “삭토(削土)를 주실(周室)에서 받았다.”고 하였으니,
여기에 오색의 흙을 바친 것도 짐작컨대 또한 여기에 쓰기 위한 것인 듯하다.』
『 우견(羽죻)은 우산(羽山)의 골짜기이다. 하적(夏翟)은 꿩은 오색을 갖췄으니, 그 깃털이 정모(旌쭨)를 만드는데 합당하다.
염인(染人)의 직책에 “가을에 염하(染夏)를 한다.” 하였는데, 정씨(鄭氏)가 말하기를 “염하(染夏)는 오색을 물들이는 것이다.” 하였다.
임씨(林氏)는 말하기를 “옛날 거복(車服)과 기용(器用)에 꿩으로 장식한 것이 많으니, 다만 정모(旌쭨)만이 아니다.” 하였다.
증씨(曾氏)는 말하기를 “산꿩 중에 오색을 갖춘 것이 우산(羽山)의 골짝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이 산 이름을 우(羽)라 한 것은 이 때문인가 보다.』
『 역(쵝)은 산 이름이다. 〈지지(地志)〉에 이르기를 “동해군(東海郡) 하비현(下찖縣) 서쪽에 갈역산(葛쵝山)이 있고,
고문(古文)에 역산(쵝山)이라 했다.” 하였으니, 하비(下찖)는 지금의 회양군(淮陽軍) 하비현(下찖縣)이다.
양(陽)은 산의 남쪽이다. 고동(孤桐)은 우뚝하게 자라는 오동나무이니, 그 재목이 금슬(琴瑟)을 만드는데 합당하다.
《시경(詩經)》에 “오동나무가 자람이여. 저 아침해가 뜨는 곳에 있다.” 하였으니, 초목(草木)이 생장(生長)함은 해를
향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사(泗)는 물 이름이니, 노국(魯國)의 변현(卞縣) 도허(桃墟) 서북쪽 배미산(陪尾山)에서 나온다.
근원에 네 물이 있으니, 네 물이 함께 인도하므로 인하여 물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서남쪽으로 팽성(彭城)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하비(下찖)를 지나 회수(淮水)로 들어가니,
변현(卞縣)은 지금의 습경부(襲慶府) 사수현(泗水縣)이다. 빈(濱)은 물가이다.
부경(浮磬)은 돌이 물가에 드러나서 마치 물 위에 떠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는 옳지 않다.
사빈(泗濱)은 반드시 수중(水中)만이 아니요 사수(泗水)의 부근에 떠있는 것이니,
돌이 흙 가운데에 떠 있어서 근착(根着)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다.
지금 하비(下찖)에 석경산(石磬山)이 있으니, 혹자는 옛날 경쇠를 취하던 땅이라고 한다.
증씨(曾氏)는 말하기를 “석(石)이라고 이르지 않은 것은 경쇠를 이룬 뒤에 바쳤기 때문이다.” 하였다.
회이(淮夷)는 회수(淮水)의 오랑캐이다. 빈(퓞)은 조개의 별칭이다. 기(쨑)는 및이다.
진주는 복식(服飾)으로 삼고 어물(魚物)은 제사(祭祀)에 사용한다.
지금 호주(濠州)•사주(泗州)•초주(楚州)에서 모두 회수(淮水)의 백어(白魚)를 바치니, 이 또한 옛날의 유제(遺制)인가 보다.
하적(夏翟)이 우견(羽죻)에서 나오고, 고동(孤桐)이 역양(쵝陽)에서 나오고, 부경(浮磬)이 사빈(泗濱)에서 나오고,
진주와 어물(魚物)이 회이(淮夷)에서 나와 각기 생산되는 지역이 있으니,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역을 상세히 말하여 바치게 한 것이다.』
『 현(玄)은 적흑색의 폐백이니, 〈무성(武成)〉에 이르기를 “현(玄)•황(黃)을 광주리에 담아 바친다.” 하였다.
섬(纖)과 호(縞)는 모두 비단이니, 예(禮)에 “또다시 기년(期年)이 되면 대상(大祥)을 지내는데 흰 호(縞)에 삼베옷을 입으며,
한 달을 걸러 담제(쩘祭)를 지내는데 담제(쩘祭)를 지내고 섬(纖)을 입는다.” 하였으며,
《예기(禮記)》에 “유우씨(有虞氏)는 호의(縞衣)로 노인을 봉양하였다.” 하였으니, 섬(纖)과 호(縞)는 모두 비단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 증씨(曾氏)가 말하였다. “현(玄)은 붉으면서 흑색이 있는 것이니, 이것으로 곤룡포(袞龍袍)를 만듦은 제사(祭祀)하기 위한 것이요,
현단복(玄端服)을 만듦은 제계(齊戒)하기 위한 것이요, 관(冠)을 만듦은 수복(首服)『[관(冠)을 가리킴]』으로 삼는 것이다.
검은 날줄에 흰 씨줄을 섬(纖)이라 하니, 섬(纖)과 호(縞)는 모두 흉(凶)함을 버리고 길(吉)함으로 나갈 때 입는 것이다.”』
▣ 제36장(第三十六章)
『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에 띄워 황하(黃河)에 도달한다.』
『 허신(許愼)은 말하기를 “판수(?水)는 진류(陳留)의 준의현(浚儀縣) 음구(陰溝)를 받아 몽택(夢澤)에 이르러
옹수(Ã5水)가 되어서 동쪽으로 사수(泗水)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회수(淮水)와 사수(泗水)가 황하(黃河)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옹수(Ã5水)가 사수(泗水)에 이르기 때문이다.
허신(許愼)은 또 말하기를 “사수(泗水)는 제수(?水)를 받아 동쪽으로 회수(淮水)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사수(泗水)가 대야택(大野澤)에 이르러 제수(?水)와 합하니,
그렇다면 사수(泗水)의 상류는 제수(?水)로부터 근원하여 또한 황하(黃河)에 통할 수 있는 것이다.』
▣ 제37장(第三十七章)
『 회수(淮水)와 바다에 양주(揚州)가 있다.』
『 양주(揚州) 지역은 북쪽으로는 회수(淮水)에 이르고 동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 제38장(第三十八章)
『 팽려(彭쪾)가 이미 물이 모여 흐르니,』
『 팽려(彭쪾)는 〈지지(地志)〉에 “예장군(豫章郡) 팽택현(彭澤縣) 동쪽에 있다.” 하였으니,
강서(江西)와 강동(江東)의 여러 물을 합하여 예장(豫章)•요주(饒州)•남강군(南康軍)의 세 주(州)의 땅을 점거하니,
이른바 파양호(´?陽湖)라는 것이 이것이다. 도수(導水)에 자세히 보인다.』
▣ 제39장(第三十九章)
『 양조(陽鳥)『[기러기]』가 사는 곳이다.』
『 양조(陽鳥)는 양지(陽地)를 따르는 새이니, 기러기를 이른다.
지금 팽려(彭쪾)의 모래섬과 물가 사이에 천백 마리로 떼를 지어 있으니,
양조(陽鳥)가 사는 곳을 기록한 것은 〈하소정(夏小正)〉에 기러기가 북쪽으로 향한다고 기록한 것과 같다.
못물이 이미 모여 흘러서 모래섬과 물가가 이미 다스려지니, 새들 또한 거처할 곳을 얻어서 그 본성을 이루었음을 말한 것이다.』
▣ 제40장(第四十章)
『 삼강(三江)이 이미 바다로 들어가니,』
『 당중초(唐仲初)의 〈오도부(吳都賦)〉 주(註)에 “송강(松江)의 아래 70리에서 나뉘어 흘러
동북쪽으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누강(婁江)이라 하고, 동남쪽으로 흐르는 것을 동강(東江)이라 하며,
여기에 송강(松江)을 합하면 삼강(三江)이 된다.” 하였으니, 이 지역을 지금도 삼강구(三江口)라 이름한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 이른바 “범려(范쪾)가 배를 타고 삼강(三江)의 어구로 나갔다.”는 것이 이것이다.』
『 ○ 또 살펴보건대, 소씨(蘇氏)는 이르기를 “민산(岷山)의 강(江)을 중강(中江)이라 하고, 파총(?¾4)의 강을 북강(北江)이라 하고,
예장(豫章)의 강을 남강(南江)이라 하니, 이는 곧 도수(導水)에 이른바 ‘동쪽으로 북강(北江)이 되고,
동쪽으로 중강(中江)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중(中)•북(北) 두 강이 있다면 예장(豫章)의 강(江)이 남강(南江)이 됨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여기서 삼강(三江)이라 함은 의거할 만하다.
그러나 강(江)•한(漢)이 한양(漢陽)에 모여서 수백 리를 합류(合流)하여 호구(湖口)에 이른 뒤에 예장강(豫章江)과 합하고
또 천여 리를 합류(合流)한 뒤에 바다로 들어가니, 다시 이것을 가리켜 셋이라고 할 수 없다.
소씨(蘇氏)는 그 말이 통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마침내 “맛이 다르다.”는 말을 하였으나
우(禹)가 홍수(洪水)를 다스림은 본래 백성을 위하여 해로움을 제거한 것이니,
어찌 육우(陸羽)의 무리처럼 맛을 구별하고 차를 끓여서 구복(口腹)의 계책을 하였겠는가.
또한 그 말이 궁함을 볼 수 있으니, 이 말이 사람을 혹하기 쉬우므로 아울러 언급한다.』
『 혹자는 “강수(江水)와 한수(漢水)는 양주(揚州)의 큰 못인데 어찌하여 쓰지 않았는가?” 하고 의심한다.
〈우공(禹貢)〉의 글을 쓴 법이 소통하고 뚫음에 공력을 많이 허비한 것은 비록 작은 물이라도 반드시 기록하고,
공력을 베푼 것이 없는 것은 비록 큰 물이라도 생략했으니,
강수(江水)와 한수(漢水)는 형주(荊州) 이하가 옛 길을 편안히 따라 깊이 파거나 다스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쓰지 않음에 있는 것이다. 하물며 바다로 흘러들어감을 형주(荊州)에서 진실로 자세히 말하였으니,
이 또한 서로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공(禹貢)의 글을 쓴 법이다.』
▣ 제41장(第四十一章)
『 진택(震澤)이 안정됨에 이르렀다.』
『 진택(震澤)은 태호(太湖)이다 《주례(周禮)》〈직방(職方)〉에 “양주(揚州)의 숲을 구구(具區)라 한다.” 하였고,
〈지지(地志)〉에 “오현(吳縣)의 서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소주(蘇州) 오현(吳縣)이다.
증씨(曾氏)는 말하기를 “진(震)은 삼천(三川)이 진동(震動)했다는 진(震)과 같으니, 지금 호수의 물이 뒤집히는 것이 이것이다.
구구(具區)의 물은 많이 진동(震動)하여 안정하기 어려우므로 진택(震澤)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지정(底定)이란 안정함에 이르러 진탕(震蕩)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 제42장(第四十二章)
『 살대와 큰 대가 이미 퍼져 잘 자라니, 풀은 여리게 자라며 나무는 높이 자라고 흙은 진흙이다.』
『 소(篠)는 살대이고, 탕(?)은 큰 대이다. 곽박(郭璞)은 말하기를 “대나무가 마디가 넓은 것을 탕(?)이라 한다.” 하였다.
부(敷)는 폄이니, 홍수가 제거됨에 대가 이미 퍼져서 자라는 것이다. 여리게 자라는 것을 요(夭)라 한다.
교(喬)는 높음이다. 도니(塗泥)는 수천(水泉)이 있어 습한 것이니, 낮은 지역은 물이 많아 그 흙이 진흙이다.』
▣ 제43장(第四十三章)
『 전(田)은 하(下)에 하(下)이고, 부(賦)는 하(下)에 상(上)이니, 위로 섞어 낸다.』
『 전(田)은 제(第)9등(等)이고, 부(賦)는 제(第)7등(等)인데 섞어서 제(第)6등(等)을 내는 것이다.
‘하상상착(下上上錯)’이라고 말한 것은 본래 부세(賦稅)를 9등(等)으로 설치하여 나누어 3품(品)을 만들었으니,
하(下)에 상(上)과 중(中)에 하(下)는 품(品)이 다르다. 그러므로 글을 바꾸어 하(下)에 상(上)인데 위로 섞어 낸다고 말한 것이다.』
▣ 제44장(第四十四章)
『 공물(貢物)은 금속 세 가지와 요(瑤)와 곤(琨)과 살대와 큰 대와 상아와 가죽과 깃털과 털과 나무이다.
해도(海島)의 오랑캐는 훼복(卉服)을 입으니, 광주리에 담아서 바치는 폐백은 직패(織貝)이며,
싸가지고 오는 귤과 유자는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면 바친다.』
『 삼품(三品)은 금(金)•은(銀)•동(銅)이다.
요(瑤)와 곤(琨)은 옥돌의 이름이니, 《시경(詩經)》에 “무엇을 허리에 찼는고. 옥(玉)과 요(瑤)이다.” 하였다.
곤(琨)은 《설문(說文)》에 “아름다운 돌로 옥과 같은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을 취하여 예기(禮器)를 만들 수 있다.
살대의 재목은 화살의 살을 만드는 데에 합당하고, 탕(?)의 재목은 악기의 관(管)을 만드는 데에 합당하다.
탕(?)은 또한 부절(符節)을 만들 수 있으니, 《주관(周官)》의 〈장절(掌節)〉에 ‘영탕(英?)『[수저를 담아두는 그릇]』’이 있다.
코끼리는 상아가 있고, 물소와 외뿔소는 가죽이 있으며, 새는 깃털이 있고, 짐승은 털이 있다.
나무는 편(?)나무와 재(梓)나무와 예장(豫章)나무 등속이다. 상아와 가죽은 수레와 갑옷을 만들 수 있고,
깃털과 털은 정모(旌쭨)를 만들 수 있고, 나무는 동우(棟宇)『[들보와 기둥]』와 기계(器械)의 쓰임에 대비할 수 있다.
도이(島夷)는 동남쪽 해도(海島)에 있는 오랑캐이다. 훼(卉)는 풀이니, 갈월(葛越)『[갈포와 부들로 짠 베]』과 목면(木綿) 등속이다.
직패(織貝)는 비단 이름이니, 짜서 자개 무늬를 만든 것이니, 《시경(詩經)》의 ‘패금(貝錦)’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지금 남이(南夷)의 목면(木綿) 중에 정(精)하고 좋은 것을 또한 길패(吉貝)라 이르니,
해도(海島)의 오랑캐들이 훼복(卉服)을 입고 와서 공물(貢物)을 바치되 직패(織貝)의 정(精)한 것을 광주리에 넣어 가지고 온 것이다.
포(包)는 싸는 것이다. 작은 것을 귤(橘)이라 하고 큰 것을 유(柚)라 한다. 석(錫)은 반드시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린 뒤에 바치고,
해마다 바치는 일정한 것이 아니다. 장씨(張氏)가 말하였다.
“반드시 바치라는 명령이 내려야 비로소 바치는 것은 제사(祭祀)에 올리고 빈객(賓客)을 연향(燕享)하게 되면 바치라고 명령하고,
구복(口腹)의 욕심을 위해서는 명령을 냄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 제45장(第四十五章)
『 강(江)과 바다로 물결을 따라 내려가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에 도달한다.』
『 물결을 따라 내려감을 연(沿)이라 한다.
강(江)을 순류(順流)하여 바다로 들어가서 바다로부터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河)에 도달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서주(徐州)를 따랐기 때문이다.
우왕(禹王) 때에는 강(江)과 회수(淮水)가 아직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바다를 따라 내려갔는데,
오(吳)나라 때에 이르러 비로소 한구(?溝)를 개통하고 수(隋)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넓혀서 강(江)과 회수(淮水)의 배들이 비로소 통하게 되었다.
맹자(孟子)가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를 터놓아 강(江)으로 주입했다.”고 한 것은 기록한 자의 잘못이다.』
▣ 제46장(第四十六章)
『 형산(荊山)과 형산(衡山) 남쪽에 형주(荊州)가 있다.』
『 형주(荊州) 지역은 북쪽으로는 남조형산(南條荊山)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형산(衡山)의 남쪽까지 다한다.
형산(荊山)과 형산(衡山)은 각각 도산(導山)에 보인다. 당(唐)나라 공씨(孔氏)가 말하였다.
“형주(荊州)에서 형산(衡山)의 남쪽까지 이른다고 한 것은 남방에서는 오직 형산(衡山)만이 커서 형양(衡陽)이라고 말한 것이니,
그 지역이 이 산에만 그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 남쪽을 싸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 제47장(第四十七章)
『 강수(江水)와 한수(漢水)가 바다에 조종(朝宗)하며,』
『 강(江)•한(漢)은 도수(導水)에 보인다. 봄에 뵙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뵙는 것을 종(宗)이라 하니,
조종(朝宗)은 제후(諸侯)가 천자(天子)를 알현하는 명칭이다.
강(江)•한(漢)이 형주(荊州)에서 합류하니, 바다와 거리가 아직 멀다.
그러나 물길이 이미 안정되어 막히거나 멋대로 터지는 피해가 없었다.
비록 바다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그 형세가 이미 바다로 달려가니,
마치 제후(諸侯)들이 왕(王)에게 조종(朝宗)『[조회(朝會)]』함과 같은 것이다.』
▣ 제48장(第四十八章)
『 구강(九江)이 매우 바르게 흐른다.』
『 구강(九江)은 곧 지금의 동정호(洞庭湖)이다.
《수경(水經)》에는 “구강(九江)은 장사(長沙)의 하전(下雋) 서북쪽에 있다.” 하였고,
《초지기(楚地記)》에는 “파릉(巴陵)의 소상(瀟湘)의 못이 구강(九江)의 사이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악주(岳州) 파릉현(巴陵縣)은 곧 초(楚)나라의 파릉(巴陵)이고, 한(漢)나라의 하전(下雋)이다.
동정호(洞庭湖)가 바로 그 서북쪽에 있으니, 동정호(洞庭湖)가 구강(九江)이 됨은 분명하다.
지금 원수(沅水)•점수(漸水)•원수(元水)•진수(辰水)•서수(敍水)•유수(酉水)•예수(澧水)•자수(資水)•상수(湘水)가
모두 동정호(洞庭湖)에서 합류하니, 짐작컨대 이 때문에 구강(九江)이라 이름한 듯하다.
공(孔)은 심함이요 은(殷)은 바름이니, 구강(九江)의 물길이 심히 그 바름을 얻은 것이다.』
『 ○ 살펴보건대,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구강(九江)은 여강군(廬江郡)의 심양현(尋陽縣)에 있다.” 하였고,
《심양기(尋陽記)》에 “구강(九江)의 이름은 첫째는 오강(烏江), 둘째는 방강(õ!江), 셋째는 오백강(烏白江), 넷째는 가미강(嘉靡江),
다섯째는 견강(죻江), 여섯째는 원강(源江), 일곱째는 늠강(쬎江), 여덟째는 제강(提江), 아홉째는 균강(튳江)이다.” 하였다.
이제 살펴보건대, 한(漢)나라 구강군(九江郡)의 심양(尋陽)은 바로 〈우공(禹貢)〉의 양주(揚州) 지역인데,
당(唐)나라 공씨(孔氏)는 또 “구강(九江)의 명칭이 근대(近代)에 시작되었다.” 하니, 족히 근거할 수 없다.
또 구강(九江)이 강의 갈래가 나누어진 것을 취했다면
또한 반드시 수미(首尾)와 장단(長短)이 대략 균등하게 분포된 뒤에야 지목하여 아홉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물 사이에는 마땅히 한 모래섬이 있을 터인데, 구강(九江)의 사이는 모래와 물이 서로 번갈아서 마침내 17개의 길이 되었으니,
지금 심양(尋陽) 지역에서는 장차 용납할 곳이 없다.
더구나 모래섬이 출몰하여 그 형세가 일정하지 않으니, 과연 지리(地理)의 일정한 명칭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설사 물의 갈래가 나뉘어진 것이 아홉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구강(九江)이 이미 물길을 따랐다고 말할 것이요
심히 바르다고 말할 수가 없으며, 도강(導江)에 마땅히 구강(九江)으로 나뉘었다고 말할 것이요
구강(九江)을 지나갔다고 말할 수가 없으니, 반복하여 참고해 보면 구강(九江)은 심양(尋陽)이 아님이 매우 분명하니,
본조(本朝)의 호씨(胡氏)가 동정호(洞庭湖)를 구강(九江)이라고 한 것이 맞다.
증씨(曾氏) 또한 이르기를 “도강(導江)에 ‘구강(九江)을 지나서 동릉(東陵)에 이른다.’ 하였으니,
동릉(東陵)은 지금의 파릉(巴陵)이니, 현재 파릉(巴陵)의 위가 곧 동정호(洞庭湖)이다.” 하였다.
아홉 물이 합함으로 인하여 마침내 구강(九江)이라 이름하였므로 하문(下文)의 도수(導水)에 ‘구강(九江)을 지난다.’고 말한 것이다.
경문(經文)의 예(例)에 “큰 물이 작은 물과 합함을 과(過)라 한다.” 하였으니, 동정호(洞庭湖)가 구강(九江)이 됨이 더욱 분명하다.』
▣ 제49장(第四十九章)
『 타(´=)와 잠(潛)이 이미 물길을 따르니,』
『 《이아(爾雅)》에 “물이 강(江)에서 갈라져 나온 것을 타(´=)라 하고 한(漢)에서 갈라져 나온 것을 잠(潛)이라 한다.” 하였으니,
물이 강(江)•한(漢)에서 나온 것은 모두 이 명칭이 있는 것이니, 이는 형주(荊州)의 강(江)•한(漢)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살펴보건대, 남군(南郡) 지강현(枝江縣)에 타수(´=水)가 있으나 그 흐름이 강(江)으로 들어가고 강(江)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화용현(華容縣)에 하수(夏水)가 있으니, 머리는 강(江)에서 나오고 꼬리는 면(沔)으로 들어가는데 또한 이것을 타(´=)라고 한다.
잠수(潛水)로 말하면 보이는 것이 없다.』
▣ 제50장(第五十章)
『 운택(雲澤)에서 흙이 나오고 몽택(夢澤)이 다스려졌다.』
『 운(雲)•몽(夢)은 못 이름이다.
《주관(周官)》〈직방(職方)〉에 “형주(荊州)의 택수(澤藪)를 운몽(雲夢)이라 하는데 사방 8∼9백 리이고 강남과 강북을 점거했다.” 하였으니,
화용(華容)•지강(枝江)•강하(江夏)•안륙(安陸)이 다 이 지역이다.
《좌전(左傳)》에 “초자(楚子)가 강(江)을 건너 운택(雲澤) 가운데로 들어갔다.” 하였고,
또 “초자(楚子)가 정백(鄭伯)을 데리고 강남(江南)의 몽택(夢澤)에서 사냥했다.” 하였으니,
합하여 말하면 하나이고 나누어 말하면 두 못인 것이다.
운토(雲土)는 운택(雲澤) 지역은 흙만 보일 뿐이고 몽작예(夢作乂)는 몽택(夢澤) 지역은 이미 밭갈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운역(雲쵞)과 몽택(夢澤)은 지형에 높고 낮음이 있으므로 물이 떨어짐에 선후(先後)가 있고, 인공(人工)에 조만(早晩)이 있는 것이다.』
▣ 제51장(第五十一章)
『 토질(土質)은 진흙이니, 전(田)은 하(下)에 중(中)이고, 부(賦)는 상(上)에 하(下)이다.』
『 형주(荊州)지역은 양주(揚州)와 같다. 그러므로 전(田)은 양주(揚州)에 비하여 다만 1등급을 더하였는데,
부(賦)가 제(第)3등(等)인 것은 지역이 넓고 인공(人工)이 닦여졌기 때문이다.』
▣ 제52장(第五十二章)
『 공물(貢物)은 깃과 털과 상아와 가죽, 금속의 세 종류와 참죽나무 줄기와 전나무와 잣나무, 거친 숫돌과 고운 숫돌과 화살촉과 단사(丹砂)이다.
균로( )와 싸리나무 화살은 세 고을에서 유명한 것을 바친다.
싸서 궤에 넣는 것은 청모(菁茅)이며, 광주리에 담아서 바치는 폐백은 현훈(玄 )과 기(璣)와 끈이니, 구강(九江)에서는 큰 거북을 얻으면 바친다.』
『 형주(荊州)의 공물(貢物)은 양주(揚州)와 대체로 같은 것이 많다.
그러나 형주(荊州)에서 우(羽)•모(毛)를 먼저 말한 것은 한(漢)나라 공씨(孔氏)가 이른바 “좋은 것을 먼저 한다.”는 것이다.
살펴보건대, 《주례(周禮)》〈직방씨(職方氏)〉에 “양주(揚州)의 이로움은 금과 주석이고,
형주(荊州)의 이로움은 단사와 은(銀)과 상아와 가죽이다.” 하였으니, 형주(荊州)와 양주(揚州)에서 생산되는 것이 우열이 없지 않다.
춘(?)•괄(£*)•백(柏)은 세 나무의 이름이니, 춘목(?木)『[참죽나무]』은 가죽나무와 비슷한데 활의 근간을 만들 수 있고,
괄목(£*木)『[전나무]』은 잣나무 잎에 소나무 몸이다.
여(礪)와 지(砥)는 다 숫돌이니, 지(砥)는 세밀함으로 이름하고 여(礪)는 거침으로 칭한 것이다.
노(»*)는 화살촉으로 쓰기에 합당한 것이니, 숙신씨(肅愼氏)가 석노(石»*)를 바쳤다는 것이 이것이다. 단(丹)은 단사(丹砂)이다.
균로(튳ó_)는 대나무 이름이고, 고(¹.)는 나무 이름이니, 모두 화살을 만들 수 있다.
“동안우(董安于)가 진양(晉陽)을 다스릴 적에 공궁(公宮)의 담을 모두 갈대와 쑥으로 만든 거적자리와 가시나무로 덮으니,
그 높이가 한 길이 넘었다. 조양자(趙襄子)가 화살을 쏘아 시험해 보니,
그 견고함이 균로(튳ó_)도 통과하지 못했다.” 하였으니, 균로(튳ó_)는 대의 견고한 것이니, 그 재목이 화살대에 합당한 것이다.
고(¹.)는 숙신씨(肅愼氏)가 고시(¹.矢)『[싸리나무 화살]』를 바쳤다는 것이 이것이다.
삼방(三邦)은 그 지역이 상세하지 않다. 저(底)는 이룸이니, 균로(튳ó_)와 싸리나무 화살에 유명한 것을 바침을 이룬 것이다.
궤(튛)는 갑(匣)이다. 청모(菁茅)는 가시가 있고 등골이 셋이니, 제사(祭祀)에 술을 거를 때에 쓰는 것을 바치는 것이니,
이미 싸고 또 갑에 넣는 것은 공경함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초(楚)나라의 공물(貢物)인 포모(包茅)가 들어오지 않아
왕(王)의 제사(祭祀)에 쓰지 못하여 술을 거를 수 없다고 책하였고,
또 《관자(管子)》에 “강(江)•회(淮)의 사이에서 한 띠풀에 등골이 셋인 것을 청모(菁茅)라 한다.” 하였으니,
청모(菁茅)는 한 물건이다. 공씨(孔氏)는 “청(菁)『[순무]』으로써 김치를 담근다.” 하였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지금 진주(辰州)의 마양현(麻陽縣) 포모산(苞茅山)에 포모(苞茅)가 나오는데, 가시가 있고 등골이 셋이다.
훈(텛)은 《주례(周禮)》의 〈염인(染人)〉에 “여름에는 훈현(텛玄)을 물들인다.” 하였으니, 훈(텛)은 붉은색의 폐백이다.
기(璣)는 구슬이 둥글지 않은 것이다. 조(組)는 끈의 종류이다. 대귀(大龜)는 1척(尺) 2촌(寸)이니,
이른바 나라의 수귀(守龜)『[큰거북]』라는 것이니, 항상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공물(貢物)로 삼지 않고 만약 우연히 얻으면 위에 바쳐 올리게 하는 것이다.
납석(納錫)이라고 말한 것은 아랫사람이 위에 올린다는 말이니, 그 일을 중히 한 것이다.』
▣ 제53장(第五十三章)
『 강(江)과 타수(´=水)•잠수(潛水)•한수(漢水)에 띄워 낙수(洛水)를 넘어서 남하(南河)에 이른다.』
『 강수(江水)•타수(´=水)•잠수(潛水)•한수(漢水)는 물길의 출입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세는 강수(江水)•타수(´=水)로부터 잠수(潛水)•한수(漢水)에 들어간다. 유(逾)는 넘음이다.
한수(漢水)는 낙수(洛水)와 통하지 않으므로 배를 놔두고 육지로 가서 낙수(洛水)에 이르고, 낙수(洛水)로부터 남하(南河)에 이르는 것이다.
정씨(程氏)가 말하였다.
“곧바로 강수(江水)•한수(漢水)에 띄우지 않고 겸하여 타수(´=水)•잠수(潛水)를 쓴 것은 나오는 공물(貢物)의 편리함에 따라
혹은 경류(經流)를 따르고 혹은 지파(枝派)『[지류(支流)]』를 따라서 일을 편리하게 함을 기약할 뿐이다.”』
▣ 제54장(第五十四章)
『 형산(荊山)과 황하(黃河)에 예주(豫州)가 있다.』
『 예주(豫州) 지역은 서남으로는 남조형산(南條荊山)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대하(大河)『[황하(黃河)]』에 이른다.』
▣ 제55장(第五十五章)
『 이수(伊水)•낙수(洛水)•전수(ç/水)•간수(澗水)가 이미 황하(黃河)에 들어가며,』
『 이수(伊水)는 《산해경(山海經)》에 “웅이산(熊耳山)에서 이수(伊水)가 나오니,
동북으로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이르러 북쪽으로 낙수(洛水)로 들어간다.” 하였으며,
곽박(郭璞)은 이르기를 “웅이(熊耳)는 상락현(上洛縣) 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상주(商州) 상락현(上洛縣)이다.
〈지지(地志)〉에 “이수(伊水)는 홍농군(弘農郡) 노씨현(盧氏縣) 웅이산(熊耳山)에서 나온다.” 한 것은 잘못이다.
낙수(洛水)는 〈지지(地志)〉에 “홍농군(弘農郡) 상락현(上洛縣) 총령산(¾4領山)에서 나온다.” 하였고,
《수경(水經)》에는 “환거산(?擧山)이다.” 하였으니, 지금의 상주(商州) 낙남현(洛南縣) 총령산(¾4領山)이며
“공현(鞏縣)에 이르러 하수(河水)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공현(鞏縣)이다.』
『 전수(ç/水)는 〈지지(地志)〉에 “하남군(河南郡) 곡성현(穀城縣) 체정(替亭)의 북쪽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하남현(河南縣) 서북쪽에 옛 곡성현(穀城縣)이 있으니, 북쪽 산(山)은 실로 전수(ç/水)가 나오는 곳이다.
“언사현(偃師縣)에 이르러 낙수(洛水)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언사현(偃師縣)이다.』
『 간수(澗水)는 〈지지(地志)〉에 “홍농군(弘農郡) 신안현(新安縣) 동쪽에서 나와 남쪽으로 낙수(洛水)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신안(新安)은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신안(新安)과 면지(푎池)의 사이에 있으니,
지금의 면지현(푎池縣) 동쪽 23리 지점인 신안성(新安城)이 이것이다.
성(城) 동북쪽에 백석산(白石山)이 있으니, 곧 간수(澗水)가 나오는 곳이다.
역도원(¦]道元)은 이르기를 “세상에서 광양산(廣陽山)이라 이른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간수(澗水)는 지금의 면지(푎池)에서 나와 신안(新安)에 이르러 낙수(洛水)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수(伊水)•전수(ç/水)•간수(澗水)는 낙수(洛水)에 들어가고 낙수(洛水)는 황하(黃河)에 들어가는데,
여기에서 이수(伊水)•낙수(洛水)•전수(ç/水)•간수(澗水)가 황하(黃河)에 들어간다고 말하여,
마치 네 물이 서로 합류하지 않고 각기 황하(黃河)에 들어가는 것처럼 말한 것은 한수(漢水)는 강(江)에 들어가고,
강(江)은 바다에 들어가나 형주(荊州)에서 강(江)과 한수(漢水)가 바다에 조종(朝宗)한다고 말한 것과 뜻이 같으니,
네 물이 나란히 흘러서 크고 작음이 서로 필적(匹敵)할 만하기 때문이다. 하문(下文)에 자세히 보인다.』
▣ 제56장(第五十六章)
『 형수(滎水)와 파수(波水)가 이미 물이 모여 흐른다.』
『 형(滎)과 파(波)는 두 물의 이름이다.
제수(濟水)는 지금의 맹주(孟州) 온현(溫縣)에서 황하(黃河)에 들어가고 속으로 흘러 황하(黃河)를 넘어 남쪽으로 넘쳐 형수(滎水)가 되니,
지금의 정주(鄭州) 형택현(滎澤縣) 서쪽 4∼5리 지점인 오창(敖倉) 동남쪽에 있으니, 오창(敖倉)은 옛날의 오산(敖山)이다.
살펴보건대, 지금 제수(濟水)는 단지 황하(黃河)에 들어가고 다시는 황하(黃河)의 남쪽을 통과하지 않으며,
형독수(滎瀆水)가 하수(河水)를 받는 곳에 석문(石門)이 있으니, 이곳을 형구(滎口) 석문(石門)이라 이른다.
정강성(鄭康成)은 이르기를 “형수(滎水)는 지금 막아서 평지가 되었는데, 형양(滎陽)의 백성들은 아직도 그곳을 형택(滎澤)이라 이른다.” 하고
역도원(¦]道元)은 말하기를 “우왕(禹王)이 평지로 범람하는 물을 막아서 형양(滎陽) 아래에서
하수(河水)를 동남쪽으로 이끌어 회수(淮水)•사수(泗水)•제수(濟水)를 통하게 하여 하수(河水)를 나눠 동남쪽으로 흐르게 하였는데,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왕경(王景)으로 하여금 형수(滎水)의 옛 못을 동쪽으로 준의(浚儀)에 주입시키고 준의거(浚儀渠)라 일렀다.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형양현(滎陽縣)에 낭탕거(狼蕩渠)가 있으니,
머리『[초입(初入)]』에 제수(濟水)를 받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남쪽을 낭탕(狼蕩)이라 하고, 북쪽을 준의(浚儀)라 하니, 실제는 하나이다.
파수(波水)는 《주례(周禮)》〈직방(職方)〉에 ‘예주(豫州)는 냇물이 형수(滎水)와 낙수(?水)이고,
못이 파수(波水)와 자수(æ>水)이다.’ 하였고, 《이아(爾雅)》에는 ‘물이 낙수(洛水)에서 나온 것을 파(波)라 한다.’ 하였으며,
《산해경(山海經)》에 ‘누탁산(婁ü'山)에 파수(波水)가 그 북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곡수(穀水)에 주입한다.’ 하였다.” 하여
두 말이 똑같지 않은데 누가 옳은지 자세하지 않다. 공씨(孔氏)가 형수(滎水)와 파수(波水)를 한 물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 제57장(第五十七章)
『 하택(?澤)을 인도하여 맹저(孟캜)에 이르게 하였다.』
『 하택(?澤)은 〈지지(地志)〉에 “제음군(濟陰郡) 정도현(定陶縣) 동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흥인부(興仁府) 제음현(濟陰縣) 남쪽 3리 지점이다. 이곳에 하산(?山)이 있으므로 그 못을 이름하여 하택(?澤)이라 한 것이다.
제수(濟水)가 경유하는 곳이니, 《수경(水經)》에 “남제(南濟)는 동쪽으로 원구현(寃句縣) 남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정도현(定陶縣) 남쪽을 지나고, 또 동북쪽에 하수(?水)가 동쪽에서 나온다.” 한 것이 이것이다.
피(被)는 미침이다. 맹저(孟캜)는 《이아(爾雅)》에 맹제(孟諸)로 되어 있다.
〈지지(地志)〉에 “양국(梁國) 수양현(첲陽縣) 동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남경(南京) 우성현(虞城縣) 서북쪽 맹제택(孟諸澤)이 이곳이다. 증씨(曾氏)가 말하였다.
“피(被)는 덮임이니, 하수(?水)가 넘치므로 그 남은 물줄기를 인도하여 맹저택(孟캜澤)에 들어가게 한 것이니,
항상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피(被)라고 말하였다.”』
▣ 제58장(第五十八章)
『 토질은 양토(壤土)이며 낮은 지역은 분기(墳起)하고 성글다.』
『 흙의 색깔을 말하지 않은 것은 색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노( )는 성근 것이다.
안씨(顔氏)가 말하기를 “검고 성근 것을 노( )라 한다.” 하였다. 토질(土質)에 고하(高下)의 차이가 있으므로 따로 말한 것이다.』
▣ 제59장(第五十九章)
『 전(田)은 중(中)에 상(上)이고 부(賦)는 섞어 내니, 상(上)에 중(中)이다.』
『 전(田)은 제(第)4등(等)이고, 부(賦)는 제(第)2등(等)인데 섞어서 제(第)1등(等)을 낸다.』
▣ 제60장(第六十章)
『 공물(貢物)은 옻과 삼베와 갈포와 모시이며 광주리에 담아서 바치는 폐백은 가는 솜이니,
경쇠를 연마하는 숫돌은 바치라는 명령이 있으면 바친다.』
『 임씨(林氏)가 말하기를 “《주관(周官)》〈재사(載師)〉에 칠림(漆林)에 대한 세금은 20분에 5이니,
주(周)나라는 세금으로 내었으나 여기서는 공물(貢物)로 삼은 것은 예주(豫州)가 주(周)나라에 있어서는 기내(畿內)였기 때문에
재사(載師)가 세금을 관장하고 공물(貢物)을 내도록 하지 않은 것이며,
우왕(禹王) 때에는 예주(豫州)가 기외(畿外)에 있었으므로 공물(貢物)을 냄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으니,
이 뜻을 미루어 보면 기주(冀州)에서 공물(貢物)을 말하지 않은 것도 알 수 있다.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모시를 짜서 삼베와 마전한 베를 만든다.” 하였다.
그러나 경문(經文)에 단지 시(쳝)와 저(紵)를 바친다고 말하였으니, 성포(成布)인지 미성포(未成布)인지는 상세하지 않다.
광(£6)은 가는 솜이다. 경착(磬錯)은 경쇠를 다스리는 숫돌이니, 항상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므로 일정한 공물이 아니요,
반드시 바치라는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린 뒤에 바치는 것이니, 양주(揚州)에서의 귤(橘)•유(柚)와 같다.
그러나 양주(揚州)에서는 귤(橘)•유(柚)를 먼저 말하였는데 여기서는 석공(錫貢)을 먼저 말한 것은 귤(橘)•유(柚)는 싼다고 말하였으니,
궐비(厥?)의 글에 혐의가 없기 때문에 석공(錫貢)을 말한 것이 뒤에 있고, 경착(磬錯)은 궐비(厥?)의 글과 서로 연결됨을 혐의하기 때문에
석공(錫貢)을 말한 것이 앞에 있는 것이니, 이는 글을 쓰는 방법이다.』
▣ 제61장(第六十一章)
『 낙수(洛水)에 띄워 황하(黃河)에 도달한다.』
『 예주(豫州)는 제도(帝都)와 거리가 가장 가까워서 예주(豫州)의 동쪽 지역은 곧바로 황하(黃河)로 들어가고,
예주(豫州)의 서쪽 지역은 낙수(洛水)에 띄운 뒤에야 황하(黃河)에 이른다.』
▣ 제62장(第六十二章)
『 화산(華山) 남쪽과 흑수(黑水)에 양주(梁州)가 있다.』
『 양주(梁州) 지역은 동쪽으로는 화산(華山)의 남쪽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흑수(黑水)를 점거하였다.
화산(華山)은 곧 태화산(太華山)이니 도산(導山)에 보이고, 흑수(黑水)는 도수(導水)에 보인다.』
▣ 제63장(第六十三章)
『 민산(岷山)과 파산(?山)에 이미 곡식을 심으며,』
『 민(岷)과 파(?)는 두 산의 이름이다. 민산(岷山)은 〈지지(地志)〉에 “촉군(蜀郡) 전저도현(캶°7道縣) 서쪽 변방 밖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무주(茂州) 문산현(汶山縣)에 있으니, 강수(江水)가 나오는 곳이다.
조씨(켒氏)가 말하기를 “촉(蜀)은 산이 강의 근원에 가까운 것을 통틀어 민산(岷山)이라 하니,
봉우리가 연하고 메가 이어져서 중첩되고 험하여 원근(遠近)을 상세히 알 수 없다.
청성산(靑城山)과 천팽산(天彭山) 등 둘러싸여 있는 여러 산(山)이 모두 옛날의 민산(岷山)이니,
청성산(靑城山)은 곧 그 첫번째 봉우리이다.” 하였다.
파총산(?¾4山)은 〈지지(地志)〉에 “농서군(쫿西郡) 저도현(°7道縣)에 있다.” 하였으니, 양수(¬|水)가 나오는 곳이며,
또 “서현(西縣)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흥원부(興元府) 서현(西縣)과 삼천현(三泉縣)이다.
파총산(?¾4山) 하나가 두 현(縣)에 걸쳐있는 것이다. 내와 평원이 이미 깨끗이 씻겨져서 물이 흘러가고 막히지 않아 범람하는 폐해가 없으니,
이들 산이 이미 곡식을 심을 수 있는 것이다.』
▣ 제64장(第六十四章)
『 타수( 水)와 잠수(潛水)가 이미 물길을 따른다.』
『 이는 강(江)•한(漢)의 별류(別流)로서 양주(梁州)에 있는 것이다.
타수( 水)는 〈지지(地志)〉에 “촉군(蜀郡) 비현(찗縣)에 강타(江´=)가 동쪽에 있으니, 서쪽으로 대강(大江)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비현( 縣)은 지금의 성도부(成都府) 비현(찗縣)이다. 또 〈지지(地志)〉에 “촉군(蜀郡) 문강현(汶江縣)에 강타(江´=)가 서남쪽에 있으니,
동쪽으로 강(江)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문강현(汶江縣)은 지금의 영강군(永康軍) 도강현(導江縣)이다.
잠수(潛水)는 〈지지(地志)〉에 “파군(巴郡) 탕거현(宕渠縣)에 잠수(潛水)가 서남쪽으로 강(江)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탕거(宕渠)는 지금의 거주(渠州) 유강현(流江縣)이다.
역도원(¦]道元)은 이르기를 “탕거현(宕渠縣)에 큰 구멍이 있어 잠수(潛水)가 그리로 들어가니,
강산(죃山) 밑을 통과하여 서남쪽으로 땅속으로 흐르다가 밖으로 나와서 남쪽으로 강에 들어간다.” 하였다.
또 〈지지(地志)〉에 “한중군(漢中郡) 안양현(安陽縣)에 첨곡수(?谷水)가 서남에서 나와 한수(漢水)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첨(?)은 음(音)이 잠(潛)이며, 안양현(安陽縣)은 지금의 양주(洋州) 진부현(眞符縣)이다.』
『 ○ 또 살펴보건대, 양주(梁州)는 바로 강(江)•한(漢)의 근원인데 여기에서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민산(岷山)이 곡식을 심을 수 있는 것은 강(江)을 인도하였기 때문이고,
파산(?山)이 곡식을 심을 수 있는 것은 양수(¬|水)를 인도하였기 때문이며, 타수(´=水)가 옛 길을 따르면 강(江)이 다하고,
잠수(潛水)가 옛 길을 따르면 한수(漢水)가 다한 것이다.
위에 민(岷)•파(?)를 기록하고 아래에 타(´=)•잠(潛)을 기록하였으니, 강(江)•한(漢)의 원류(源流)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 제65장(第六十五章)
『 채산(蔡山)과 몽산(蒙山)에 여(旅)제사를 지내어 다스려짐을 고하며,』
『 채(蔡)와 몽(蒙)은 두 산의 이름이다. 채산(蔡山)은 《여지기(輿地記)》에 “지금의 아주(雅州) 엄도현(嚴道縣)에 있다.” 하였다.
몽산(蒙山)은 〈지지(地志)〉에 “촉군(蜀郡)의 청의현(靑衣縣)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아주(雅州) 명산현(名山縣)이다.
역도원(¦]道元)은 이르기를 “산이 위는 합하고 아래는 벌어졌으며,
말수(沫水)가 그 사이를 경과하여 혼애(턎崖)의 수맥이 빨라서 역대에 폐해가 되었는데,
촉군태수(蜀郡太守) 이빙(李ª-)이 병력을 징발하여 혼애(턎崖)를 뚫어 평평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이 두 산은 우왕(禹王) 때에 있어서도 공력을 씀이 많았던 것이다.
산에 제사함을 여(旅)라 하니, 여평(旅平)은 홍수(洪水)를 다스리는 공(功)을 마치고 여제(旅祭)를 지낸 것이다.』
▣ 제66장(第六十六章)
『 화이(和夷)에 공적을 이루었다.』
『 화이(和夷)는 지명이다.
엄도현(嚴道縣) 이서(以西)에 화천(和川)이 있고 이도(夷道)가 있으니, 혹 그 지역인 듯하다.
또 살펴보건대, 조씨(켒氏)가 말하기를 “화이(和夷)는 두 물 이름이다.
화수(和水)는 지금의 아주(雅州) 형경현(滎經縣) 북쪽 화천(和川)이니,
물이 남만(南蠻)의 경계인 나암주(羅햺州) 동서쪽으로부터 와서 몽산(蒙山)을 경유하니,
이른바 청의수(靑衣水)로서 민강(岷江)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수(夷水)는 파군(巴郡) 어복현(魚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흔산현( 山縣) 남쪽을 지나가고,
또 동쪽으로 이도현(夷道縣) 북쪽을 지나서 동쪽으로 강(江)에 들어간다.” 하였다.
이제 두 말을 살펴보면 모두 기필할 수 없으나, 단 경문(經文)에 공적을 이루었다는 것이 셋인데,
담회(覃懷)와 원습(原쳚)이 이미 모두 지명이었으니 이것은 지명일 듯하며, 혹 지명이 물을 따를 수도 있으니, 또한 알 수 없다.』
▣ 제67장(第六十七章)
『 토질은 푸르고 검으니』『 여(黎)는 검음이다.』
▣ 제68장(第六十八章)
『 전(田)은 하(下)에 상(上)이고 부(賦)는 하(下)에 중(中)이니, 3등(等)으로 섞어 낸다.』
『 전(田)은 제(第)7등(等)이고 부(賦)는 제(第)8등(等)인데 제(第)7등(等)과 제(第)9등(等)을 섞어 내는 것이다.
살펴보건대, 부세(賦稅)를 섞어 다른 등급을 내는 것을 혹자는 “해에 풍흉(豊凶)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혹자는 “호구(戶口)에 증감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이는 모두 틀린 말이다.
짐작컨대 지력(地力)에 높고 낮음이 있어 연분(年分)이 똑같지 않으니,
《주관(周官)》에 토지가 일역(一易)•재역(再易)이라는 것과 같은 따위일 것이다.
그러므로 부세(賦稅)의 등급 또한 높고 낮은 연분(年分)이 있는 것이니,
기주(冀州)의 정부(正賦)는 제(第)1등(等)이나 간세(間歲)『[격년(隔年)]』로 제(第)2등(等)을 내며,
양주(揚州)의 정부(正賦)는 제(第)7등(等)이나 간세(間歲)로 제(第)6등(等)을 내며,
예주(豫州)의 정부(正賦)는 제(第)2등(等)이나 간세(間歲)로 제(第)1등(等)을 내며,
양주(梁州)의 정부(正賦)는 제(第)8등(等)이나 간세(間歲)로 제(第)7등(等)과 제(第)9등(等)을 내는 것이다.
당시에 반드시 조목(條目)이 자세히 갖춰져 있었을 터인데 이제 남아 있지 않으며,
《서경(書經)》에 기재한 것은 다만 범례(凡例)일 뿐이다.
만약 해의 풍흉(豊凶)과 호구(戶口)의 증감(增減)이라고 한다면 아홉 주(州)가 다 그러할 것이니,
어찌 홀로 기주(冀州)•양주(揚州)•예주(豫州)•양주(梁州)의 네 주(州)에서만 말했겠는가.』
▣ 제69장(第六十九章)
『 공물(貢物)은 옥경(玉磬)과 부드러운 쇠와 은(銀)과 강철과 노경(»*磬)『[석경(石磬)]』과
곰과 큰곰과 이리와 살쾡이와 직피(織皮)『[직물과 피복(皮服)]』이다.』
『 구(즩)는 옥경(玉磬)이고, 철(鐵)은 유철(柔鐵)『[정철(正鐵)]』이다. 누(鏤)는 강철(剛鐵)이니, 새길 수 있는 것이다.
경(磬)은 석경(石磬)이다. 쇠를 말하면서 은보다 먼저한 것은 쇠의 이익이 은(銀)보다 많기 때문이다.
후세에 촉(蜀)땅의 탁씨(卓氏)와 정씨(程氏)가 쇠를 불리는 것으로써 부유함이 봉군(封君)에 비견되었으니,
양주(梁州)의 이익이 더욱 쇠에 있었던 것이다. 직피(織皮)는 양주(梁州) 지역은 산림이 많아 짐승들이 달리는 곳이니,
곰과 큰곰, 여우와 살쾡이 이 네 짐승의 가죽은 만들면 갖옷이 되고, 연한 털은 짜면 털방석이 되는 것이다.』
『○ 임씨(林氏)가 말하였다. “서주(徐州)는 부경(浮磬)을 바치며, 이 주(州)는 이미 옥경(玉磬)을 바치고 또 석경(石磬)을 바쳤으며,
예주(豫州)는 또 경착(磬錯)을 바쳤으니, 이로써 보면 당시의 악기는 경쇠가 가장 중함을 알 수 있으니,
어찌 그 소리가 각(角)이어서 청탁(淸濁)과 소대(小大)의 중간에 있어 가장 그 화(和)함을 얻기 어려운 때문이 아니겠는가.”』
▣ 제70장(第七十章)
『 서경산(西傾山)으로 환수(桓水)를 따라 와서 잠수(潛水)에 떠오며,
면수(沔水)를 넘으며, 위수(渭水)로 들어가서 하수(河水)를 가로지른다.』
『 서경(西傾)은 산 이름이다. 〈지지(地志)〉에 “농서군(쫿西郡) 임도현(臨쩿縣) 서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조주(쩿州) 임담현(臨潭縣) 서남쪽이다.
환(桓)은 물 이름이니, 《수경(水經)》에 “서경산(西傾山)의 남쪽에서 환수(桓水)가 나온다.” 하였다.
소씨(蘇氏)가 말하기를 “한수(漢水)는 처음 나오면 양수(¬|水)라 하고, 동남쪽으로 흐르면 면수(沔水)라 하고,
한중(漢中)에 이르러 동쪽으로 가면 한면(漢沔)이라 한다.” 하였다.
역도원(¦]道元)은 말하기를 “서경산(西傾山)으로부터 가맹(¡.萌)에 이르러 서한(西漢)에 떠오니 서한(西漢)은 곧 잠수(潛水)이다.” 하였다.
서한(西漢)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진수(晉壽)의 경계에 이르러 양지진(¬|枝津)이 막혀있고,
남쪽으로 메 북쪽을 지나 빙 돌아서 한면(漢沔)을 접하며, 한천(漢川)을 지나 포수(褒水)에 이르고,
포수(褒水)를 넘어 아령(衙嶺)의 남계(南溪)에 이르며, 사천(斜川)에 주입하고 무공(武功)에 이르러 북쪽으로 위수(渭水)에 들어간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 어떤 사람이 상서(上書)하여 포수(褒水)와 사수(斜水)의 물길과 조운도(漕運道)를 통하고자 하므로
일을 장탕(張湯)에게 내려 물으니, 이르기를 “포수(褒水)는 면수(沔水)와 통하고 사수(斜水)는 위수(渭水)와 통하니, 모두 조운할 수 있습니다.
남양(南陽)을 따라 면수(沔水)에 오르고 포수(褒水)로 들어가며,
포수(褒水)는 물이 끊겨 사수(斜水)에 이르므로 사이의 백여 리를 수레로 수송하여 사수(斜水)를 따라 위수(渭水)로 내려오니,
이와 같이 하면 한중(漢中)의 곡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였다.
경문(經文)에 면(沔)과 위(渭)를 말하고 포(褒)와 사(斜)를 말하지 않은 것은 큰 것을 통하여 작은 것을 나타낸 것이다.
포(褒)와 사(斜)의 사이에 물이 백여 리나 끊겨 있다. 그러므로 유(逾)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경문(經文)에는 마땅히 위수(渭水)를 넘는다고 말해야 할 터인데 이제 면수(沔水)를 넘었다고 말한 것은 이 또한 알 수 없다.
하(河)를 끊고 건넘을 난(亂)이라 한다.』
▣ 제71장(第七十一章)
『 흑수(黑水)와 서하(西河)에 옹주(雍州)가 있다.』
『 옹주(雍州) 지역은 서쪽으로는 흑수(黑水)를 점거하고 동쪽으로는 서하(西河)에 이르니,
서하(西河)라고 이른 것은 기주(冀州)를 위주하여 말한 것이다.』
▣ 제72장(第七十二章)
『 약수(弱水)가 이미 서쪽으로 흐르며』
『 유종원(柳宗元)이 말하기를 “서해(西海)의 산에 물이 있으니,
흩어져 힘이 없어서 지푸라기도 띄우지 못하여 지푸라기를 던지면 쓰러지고 가라앉아 밑바닥에 이른 뒤에 멈춘다.
그러므로 약수(弱水)라 이름하였다.” 하였다.
기서(旣西)는 인도하여 서쪽으로 흐르게 한 것이다. 〈지지(地志)〉에 “장액군(張掖郡) 산단현(刪丹縣)에 있다.” 하였고,
설씨(薛氏)는 “약수(弱水)는 토곡혼(吐谷渾)의 경계인 궁석산(窮石山)에서 나와
산단(刪丹) 서쪽으로부터 합려산(合黎山)에 이르러 장액현(張掖縣)에 있는 하수(河水)와 합류한다.” 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통감(通鑑)》에 “위(魏)나라 태무제(太武帝)가 유연(柔然)을 공격할 적에 율수(栗水)에 이르러 서쪽으로 가서
도원수(쪂園水)에 이르러 군대를 나누어 수색하고, 또 약수(弱水)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탁사산(ü'邪山)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약수(弱水)는 도원수(쪂園水)의 서쪽, 탁사산(ü'邪山)의 동쪽에 있다.
《북사(北史)》에는 “태무제(太武帝)가 도원수(쪂園水)에 이르러 군대를 나누어 수색하여 동쪽으로 한해(瀚海)에 이르고
서쪽으로 장액수(張掖水)를 접하였으며, 북쪽으로 연연산(燕然山)을 건넜다.”고 기재하였으니, 《통감(通鑑)》과 다소 다르다.
아마도 한해(瀚海)와 장액수(張掖水)가 약수(弱水)에 가까운가 보다.
정씨(程氏)는 《서역전(西域傳)》을 근거해서 “약수(弱水)가 조지(條支)에 있다.” 하여, 증거를 끌어댄 것이 매우 자세하다.
그러나 장안(長安)에서 서쪽으로 1만 2천 2백 리를 가야 하고, 또 백여 일이 걸려야 비로소 조지(條支)에 이른다.
옹주(雍州)와 거리가 이와 같이 머니, 우왕(禹王)이 어찌 먼 곳까지 그 흐름을 인도하였겠는가. 그 말이 옳지 않다.』
▣ 제73장(第七十三章)
『 경수(涇水)가 위수(渭水)와 예수(汭水)에 속하며』
『 경(涇)과 위(渭)와 예(汭)는 세 물의 이름이다.
경수(涇水)는 〈지지(地志)〉에 “안정군(安定郡) 경양현(涇陽縣) 서쪽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의 원주(原州) 백천현(百泉縣) 견두산(ð>頭山)이며, “동남쪽으로 풍익(馮翊)의 양릉현(陽陵縣)에 이르러 위수(渭水)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지금의 영흥군(永興軍) 고릉현(高陵縣)이다.
위수(渭水)는 〈지지(地志)〉에 “농서군(쫿西郡) 수양현(首陽縣) 서남쪽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의 위주(渭州) 위원현(渭源縣) 조서산(鳥鼠山) 서북쪽 남곡산(南谷山)이며,
“동쪽으로 경조윤(京兆尹) 선사공현(船司空縣)에 이르러 하수(河水)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지금의 화주(華州) 화음현(華陰縣)이다.
예수(汭水)는 〈지지(地志)〉에 예(芮)로 되어 있으니,
“부풍군(扶風郡) 견현(?縣) 현포수(弦蒲藪)에 예수(芮水)가 서북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경수(涇水)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지금의 농주(쫿州) 견원현(?源縣) 현포수(弦蒲藪)에 예수(汭水)가 있다.
《주례(周禮)》〈직방(職方)〉에 “옹주(雍州)의 내는 경수(涇水)와 예수(汭水)이다.” 하였고,
시(詩)에 “예국(汭鞠)에 나아가 산다.” 한 것은 모두 이것을 말한 것이다.
속(屬)은 연속함이니, 경수(涇水)가 위수(渭水)와 예수(汭水) 두 물에 연속한 것이다.』
▣ 제74장(第七十四章)
『 칠수(漆水)와 저수(沮水)가 이미 따르며,』
『 칠(漆)과 저(沮)는 두 물의 이름이다.
칠수(漆水)는 《환우기(¶]宇記)》에 “요주(耀州) 동관현(同官縣) 동북(東北)쪽 경계로부터 와서
화원현(華原縣)을 경유하여 저수(沮水)와 합류한다.” 하였다.
저수(沮水)는 〈지지(地志)〉에 “북지군(北地郡) 직로현(直路縣) 동쪽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의 방주(坊州) 의군현(宜君縣) 서북쪽 경계이다.
《환우기(¶]宇記)》에 “저수(沮水)는 방주(坊州) 승평현(昇平縣) 북쪽 자오령(子午嶺)에서 나오니 세속에서 자오수(子午水)라 칭하고,
아래로 유곡천(楡谷川)•자마천(慈馬川) 등과 합류하여 마침내 저수(沮水)가 되며,
요주(耀州) 화원현(華原縣)에 이르러 칠수(漆水)와 합류하고, 동주(同州) 조읍현(朝邑縣)에 이르러 동남쪽으로 위수(渭水)에 들어간다.” 하였다.
두 물이 서로 대등하므로 아울러 말한 것이다. 기종(旣從)은 위수(渭水)를 따르는 것이다.』
『 또 살펴보건대, 〈지지(地志)〉에 “칠수(漆水)가 부풍현(扶風縣)에서 나온다.” 하였는데,
조씨(켒氏)는 “이는 빈(ª&)의 칠수(漆水)이다.” 하였으며,
《수경(水經)》에 “칠수(漆水)는 부풍군(扶風郡) 두양현(杜陽縣)에서 나온다.” 하였는데,
정씨(程氏)는 “두양(杜陽)은 지금의 기산(岐山) 보윤현(普潤縣) 지역이다.” 하였으니, 또한 한(漢)나라 칠현(漆縣)의 경내이다.
그 물이 위수(渭水)에 들어감이 풍수(Ì>水)의 위에 있어서 경문(經文)에서 위수(渭水)를 서열한 절차와 합하지 않으니,
이는 〈우공(禹貢)〉의 칠수(漆水)가 아니다.』
▣ 제75장(第七十五章)
『 풍수(Ì>水)가 함께 흐른다.』
『 풍수(Ì>水)는 〈지지(地志)〉에 풍(?)으로 되어 있으니, 부풍군(扶風郡) 호현(î-縣) 종남산(終南山)에서 나오니,
지금의 영흥군(永興軍) 호현산(î-縣山)이다. 동쪽으로 함양현(咸陽縣)에 이르러 위수(渭水)로 들어간다.
동(同)은 위수(渭水)와 함께 흐르는 것이다. 위수(渭水)는 조서산(鳥鼠山) 동쪽에 풍수(Ì>水)는 남쪽에서 주입하고
경수(涇水)는 북쪽에서 주입하고,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는 동북쪽에서 주입하니,
속(屬)이라 말하고 종(從)이라 말하고 동(同)이라 말한 것은 모두 위수(渭水)를 위주하여 말한 것이다.』
▣ 제76장(第七十六章)
『 형산(荊山)과 기산(岐山)에 여(旅)제사를 지내고, 종남산(終南山)과 돈물산(惇物山)으로부터 조서산(鳥鼠山)에 이르며,』
『 형(荊)과 기(岐)는 두 산의 이름이다. 형산(荊山)은 곧 북조형산(北條荊山)이다.
〈지지(地志)〉에 “풍익(馮翊) 회덕현(懷德縣) 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요주(耀州) 부평현(富平縣) 굴릉원(掘陵原)이다.
기산(岐山)은 〈지지(地志)〉에 “부풍군(扶風郡) 미양현(美陽縣) 서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봉상부(鳳翔府) 기산현(岐山縣) 동북쪽 10리 지점이다. 종남(終南)과 돈물(惇物)과 조서(鳥鼠)는 또한 모두 산 이름이다.
종남(終南)은 〈지지(地志)〉에 “고문(古文)은 태일산(太一山)을 종남산(終南山)이라 하였는데
부풍군(扶風郡) 무공현(武功縣)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영흥군(永興軍) 만년현(萬年縣) 남쪽 50리 지점이다.
돈물(惇物)은 〈지지(地志)〉에 “고문(古文)은 수산(垂山)을 돈물(惇物)이라 하였는데 부풍군(扶風郡) 무공현(武功縣)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영흥군(永興軍) 무공현(武功縣)이다.
조서(鳥鼠)는 〈지지(地志)〉에 “농서군(쫿西郡) 수양현(首陽縣) 서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위주(渭州) 위원현(渭源縣) 서쪽이니, 세속에서 청작산(靑雀山)이라 부른다.
세 산을 들고 다스린 바를 말하지 않은 것은 위에 이미 여(旅)제사를 지냈다는 글을 받았기 때문이다.』
▣ 제77장(第七十七章)
『 평원(平原)과 습지(쳚地)에 공적을 이루어 저야택(캜野澤)에 이르렀다.』
『 넓고 평평한 곳을 원(原)이라 하고, 하습(下濕)한 곳을 습(쳚)이라 하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그 습지(쳚地)와 평원(平原)을 헤아린다.”는 것이 곧 이를 가리킨 것이다.
정씨(鄭氏)는 말하기를 “그 땅이 빈(ª&)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빈주(ª&州)이다.
저야(캜野)는 〈지지(地志)〉에 “무위현(武威縣) 동북쪽에 휴도택(休屠澤)이 있으니, 고문(古文)에 저야(캜野)라 한다.” 하였으니,
지금의 양주(凉州) 고장현(姑臧縣)이다. 홍수(洪水)를 다스려 성공함이 높은 곳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왔으므로
먼저 산을 말하고 다음에 원습(原쳚)을 말하고 다음에 피택(陂澤)을 말한 것이다.』
▣ 제78장(第七十八章)
『 삼위(三危)가 이미 집을 짓고 사니, 삼묘(三苗)가 공(功)이 크게 펴졌다.』
『 삼위(三危)는 곧 순(舜)이 삼묘(三苗)를 귀양보낸 땅이니, 혹자는 돈황(燉煌)이라 하나 그 지역이 상세하지 않다.
삼묘(三苗)를 귀양보낸 것은 홍수(洪水)를 다스리기 이전에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삼위(三危)에 이미 거주할 수 있었으니,
삼묘(三苗)가 이에 공(功)이 크게 펴짐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살펴보건대, 순(舜)이 삼묘(三苗)를 귀양보낸 것은 악함이 특히 심한 자를 귀양보내고, 그 다음인 자를 옛 도읍에 세웠었는데,
이제 이미 귀양간 자는 공(功)이 크게 펴졌으나 옛 도읍에 거주하는 자는 아직도 걸오(桀춝)『[교만]』하여 복종하지 않은 것이다.
삼묘(三苗)의 옛 도읍은 산천이 험하고 막혔으니, 기습(氣習)이 그러한 것이다.
지금의 호남(湖南) 요동(홒洞)에 때로는 아직도 몰래 나와 도둑질하는데, 사로잡아 물어보면 대부분 묘성(猫姓)이라 하니,
아마도 그 유종(遺種)인가보다.』
▣ 제79장(第七十九章)
『 토질은 누런 양토(壤土)이니,』
『 황색(黃色)은 흙의 정색(正色)이다. 임씨(林氏)가 말하기를 “물건은 그 떳떳한 성품을 얻은 것이 가장 귀하니,
옹주(雍州) 지역은 누런 양토(壤土)이므로 그 토지가 다른 고을에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 제80장(第八十章)
『 전(田)은 상(上)에 상(上)이고, 부(賦)는 중(中)에 하(下)이며,』
『 전(田)은 제(第)1등(等)인데 부(賦)는 제(第)6등(等)인 것은 땅이 좁고 인공(人功)이 적기 때문이다.』
▣ 제81장(第八十一章)
『 공물(貢物)은 구림(球琳)『[아름다운 옥]』과 낭간(琅 )이다.』
『 구림(球琳)은 아름다운 옥(玉)이고, 낭간(琅¡:)은 옥돌로 진주와 비슷한 것이다.
《이아(爾雅)》에 “서북쪽에서 아름다운 것은 곤륜허(昆侖虛)의 구림(球琳)과 낭간(琅 )이 있다.” 하였다.
지금 남해(南海)에 청랑간(靑琅 )이 있으니, 산호(珊瑚) 등속이다.』
▣ 제82장(第八十二章)
『 적석(積石)에 띄워 용문(龍門)의 서하(西河)에 이르러 위수(渭水)와 예수(汭水)로 모인다.』
『 적석(積石)은 〈지지(地志)〉에 “금성군(金城郡) 하관현(河關縣) 서남쪽 강중(羌中)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선주(픧州) 용지현(龍支縣)의 경계이다.
용문산(龍門山)은 〈지지(地志)〉에 “풍익(馮翊) 하양현(夏陽縣)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하중부(河中府) 용문현(龍門縣)이다.
서하(西河)는 기주(冀州)의 서하(西河)이다.
옹주(雍州)에 공물(貢物)을 바치는 길이 두 가지가 있으니, 동북 지역은 적석(積石)으로부터 서하(西河)에 이르고,
서남 지역은 위수(渭水)와 예수(汭水)로 모인다. 위(渭)•예(汭)를 말하고 하(河)를 말하지 않은 것은 양주(梁州)의 글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주(州)의 공부(貢賦)도 마땅히 한 길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 예(例)를 말하여 서로 나타낸 것이다.』
『 ○ 살펴보건대, 형서(邢恕)가 주청하기를 “희하로(熙河路)에 내려가서 배 5백 척을 만들어 황하(黃河)에 흐르는 물길을 따라 놓아 내려보내서 회주(會州)의 서쪽 소하(小河) 안에 이르러 숨겼다가 희하로(熙河路)로 방출(放出)하소서.” 하였는데,
조사(漕使)인 이복(李復)이 아뢰기를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형서(邢恕)가 이 배를 사용하여 병력(兵力)을 싣고 물결을 따라 내려가서
흥주(興州)를 취하고자 하오니, 살펴보건대 회주(會州)의 서쪽 소하(小河)의 짠물은 그 넓이가 한 길에 미치지 못하고,
깊이가 겨우 3척에 그치니, 어찌 배를 감춰 둘 수 있겠습니까?
황하(黃河)는 회주(會州)를 지나 위정산(韋精山)에 들어가면 돌산이 험하고 좁아서
위로부터 폭포로 흘러 곧바로 내려옴에 높이가 수십 길이니, 배가 어떻게 이곳을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또 서안주(西安州)의 동쪽에 이르러 대하(大河)가 나뉘어 6∼7개의 물길이 되어서 위수(渭水)의 남산(南山)으로 흩어져 흐르는데,
수십 리를 역류(逆流)하여야 비로소 다시 합하니, 역류하는 곳은 물이 얕고 여울에 자갈이 섞여 있어서 배로 싣고 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만약 새어 나가면 반드시 하(夏)나라에게 모욕과 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 하니,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형서(邢恕)의 계책이 이복(李復)의 말과 같다면 잘못되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공부(貢賦)를 운반하는 길을 말한 것에도 또한 “적석(積石)에 띄워서 용문(龍門)의 서하(西河)에 이른다.” 하였으니,
고래(古來)로 이 곳의 황하(黃河) 물길은 진실로 주즙(舟楫)이 통한 것인데 이복(李復)의 말이 마침내 이와 같음은 어째서인가?
우선 이것을 기록하여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 제83장(第八十三章)
『 직피(織皮)는 곤륜(줸崙)과 석지(析支)와 거수(渠搜)인데 이들 서융(西戎)이 펴짐에 나아갔도다.』
『 민륜(岷崙)은 곧 황하(黃河)의 근원이 나오는 곳이니, 임강(臨羌)에 있다. 석지(析支)는 하관(河關)의 서쪽 천여 리 지점에 있다.
거수(渠搜)는 《수경(水經)》에 “황하(黃河)가 삭방(朔方)으로부터 동쪽으로 돌아서 거수현(渠搜縣)의 옛 성 북쪽을 경유한다.” 하였으니,
삭방(朔方)과 가까운 땅이다. 세 나라가 모두 가죽으로 만든 옷을 바쳤으므로 직피(織皮)를 앞에 놓았고,
모두 서방(西方)의 오랑캐 부락이므로 서융(西戎)으로 총괄한 것이다. 즉(卽)은 나아감이다.
옹주(雍州)는 수토(水土)가 이미 다스려짐에 남은 공(功)이 서융(西戎)에 미쳤다. 그러므로 끝에 붙인 것이다.』
『 ○ 소씨(蘇氏)가 말하였다.
“청주(靑州)•서주(徐州)•양주(揚州) 세 고을은 모두 내이(萊夷)와 회이(淮夷)와 도이(島夷)가 광주리에 넣어 폐백을 바치고,
이들 세 나라 또한 직피(織皮)를 광주리에 넣어 바쳤는데, 다만 옛 말에 전도되고 상략함이 있을 뿐이다.
이 글은 마땅히 ‘궐공유구림랑간(厥貢惟球琳琅¡:)’의 아래, ‘부우적석(浮于積石)’의 위에 있어야 하니,
간편(簡編)이 탈오(脫誤)되었으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 내가 생각컨대, 양주(梁州) 또한 직피(織皮)를 광주리에 넣어 폐백으로 바쳤으니, 소씨(蘇氏)의 말이 옳을 듯하다.』
▣ 제84장(第八十四章)
『 견산(ð>山)에 물을 인도하시되 기산(岐山)에 미쳐 형산(荊山)에 이르며,
황하(黃河)를 넘어 호구(壺口)와 뇌수(雷首)로부터 태악(太岳)에 이르며, 지주(底柱)와 석성(析城)으로부터 왕옥(王屋)에 이르며,
태행(太行)과 항산(恒山)으로부터 갈석(碣石)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
『 이 아래는 산을 따라 물을 인도한 것이다. 견산(ð>山)•기산(岐山)•형산(荊山)은 모두 옹주(雍州)의 산이다.
견산(ð>山)은 〈지지(地志)〉에 “부풍군(扶風郡) 견현(ð>縣) 서쪽 오산(吳山)인데 고문(古文)에 견산(?山)이라 한다.” 하였으니,
지금의 농주(쫿州) 오산현(吳山縣) 오악산(吳嶽山)이다. 《주례(周禮)》에 “옹주(雍州)의 진산(鎭山)은 악산(嶽山)이다.” 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환우기(¶]宇記)》에 “농주(쫿州)의 견원(?源)에 견산(ð>山)이 있으니, 견수(ð>水)가 나오는 곳이니,
〈우공(禹貢)〉에 이른바 견산(ð>山)이다.” 하였다.
조씨(켒氏)는 이르기를 “지금의 농산(쫿山), 천정산(天井山), 금문산(金門山), 진령산(秦嶺山)은 모두 옛날의 견산(ð>山)이다.” 하였다.
기산(岐山)과 형산(荊山)은 옹주(雍州)에 보인다.
호구(壺口)•뇌수(雷首)•태악(太岳)•지주(底柱)•석성(析城)•왕옥(王屋)•태행(太行)•항산(恒山)은 모두 기주(冀州)의 산(山)이니,
호구(壺口)•태악(太岳)•갈석(碣石)은 기주(冀州)에 보인다.
뇌수(雷首)는 〈지지(地志)〉에 “하동군(河東郡) 포판현(蒲坂縣) 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하중부(河中府) 하동현(河東縣)이다.
지주(底柱)는 돌이 대하(大河)의 중류에 있는데, 그 모습이 기둥과 같으니, 지금의 섬주(陝州) 섬현(陝縣) 삼문산(三門山)이 이것이다.
석성(析城)은 〈지지(地志)〉에 “하동군(河東郡) 호택현(濩澤縣) 서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택주(澤州) 양성현(陽城縣)이니,
조씨(켒氏)가 말하기를 “산(山)의 봉우리가 사면이 성(城)과 같다.” 하였다.
왕옥(王屋)은 〈지지(地志)〉에 “하동군(河東郡) 원현(垣縣) 동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강주(絳州) 원곡현(垣曲縣)이니,
조씨(켒氏)가 말하기를 “산의 모양이 지붕과 같다.” 하였다.
태행산(太行山)은 〈지지(地志)〉에 “하내군(河內郡) 산양현(山陽縣) 서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회주(懷州) 하내(河內)이다.
항산(恒山)은 〈지지(地志)〉에 “상산군(常山郡) 상곡양현(上曲陽縣) 서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정주(定州) 곡양(曲陽)이다.』
『 유(逾)는 우왕(禹王)이 형산(荊山)으로부터 황하(黃河)를 지나간 것이다.
공씨(孔氏)는 “형산(荊山)의 산맥이 황하(黃河)를 넘어 호구(壺口)와 뇌수(雷首)가 되었다.” 하였는데, 이는 옳지 않다.
우왕(禹王)이 홍수(洪水)를 다스림에 산을 따라 나무를 제거하였으니,
그 표시한 바의 여러 산(山)의 명칭은 반드시 높고 커서 강역(疆域)을 분별하고, 넓고 커서 백성들이 안정하여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가 기록하여 시공(施功)한 차제(次第)를 나타낸 것이요,
애당초 그 맥락의 소자래(所自來)를 미루어서 지금의 장법(葬法)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려는데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만약 반드시 실제로 산맥을 가지고 말한다면 더욱 그 말이 그릇되고 망령됨을 볼 수 있다.
하북(河北)의 여러 산은 근본 산맥이 모두 대북(代北)의 환(¶])•무(武)•남(嵐)•헌(憲) 등 여러 주(州)로부터
높은 곳을 타고 와서 그 등마루 이서(以西)의 물은 서쪽으로 흘러 용문(龍門)의 서하(西河) 상류로 들어가고,
그 등마루 이동(以東)의 물은 동쪽으로 흘러 상건수(桑乾水)와 유주(幽州)•기주(冀州)의 여러 물이 되어서 바다로 들어가며,
서쪽 한 가지는 호구(壺口)와 태악(太岳)이 되고, 다음 한 가지는 분수(汾水)•진수(晉水)의 근원을 싸고
남쪽으로 나와서 석성(析城)과 왕옥(王屋)이 되었고, 또 서쪽으로 꺾여서 뇌수(雷首)가 되었으며,
또 다음의 한 가지는 바로 태행(太行)이 되었고, 또 다음의 한 가지는 바로 항산(恒山)이 되었다.
그 사이에 각각 심(沁)•노(潞) 등 여러 냇물이 막혀 있어서 서로 연결되지 않으니,
어찌 견산(ð>山)•기산(岐山)으로부터 황하(黃河)를 넘어 이 여러 산이 되었겠는가.
산을 경리(經理)『[다스림]』한 것은 이미 각 주(州)의 아래에 붙였고,
여기에는 또 조목조목 나열하여 자세히 기록하였으니, 산의 경위(經緯)를 다 볼 수 있다.
왕씨(王氏)『[왕숙(王肅)]』와 정씨(鄭氏)『[정원(鄭元)]』는 세 가닥을 넷으로 나열했다는 명칭이 있으나 다 온당치 못하다.
이제 도자(導字)를 살펴보면 나누어 남쪽•북쪽 두 가지로 만들어서 강하(江河)를 기강(紀綱)으로 삼았고,
둘 가운데 또 나누어서 둘로 삼은 것이니, 이는 북조(北條)로 대하(大河)의 북쪽 지역에 있는 산들이다.』
▣ 제85장(第八十五章)
『 서경(西傾)•주어(朱쵄)•조서(鳥鼠)로부터 태화(太華)에 이르며,
웅이(熊耳)•외방(外方)•동백(桐柏)으로부터 배미(陪尾)에 이르게 하였다.』
『 서경(西傾)•주어(朱쵄)•조서(鳥鼠)•태화(太華)는 옹주(雍州)의 산이고,
웅이(熊耳)•외방(外方)•동백(桐柏)•배미(陪尾)는 예주(豫州)의 산이다. 서경(西傾)은 양주(梁州)에 보인다.
주어(朱쵄)는 〈지지(地志)〉에 “천수군(天水郡) 기현(冀縣)의 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진주(秦州) 대담현(大潭縣)이니,
세속에서는 백암산(白巖山)이라 부른다. 조서(鳥鼠)는 옹주(雍州)에 보인다.
태화(太華)는 〈지지(地志)〉에 “경조윤(京兆尹) 화음현(華陰縣) 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화주(華州) 화음현(華陰縣) 20리 지점이다.
웅이(熊耳)는 상주(商州) 상락현(上洛縣)에 있으니, 예주(豫州)에 상세히 보인다.
외방(外方)은 〈지지(地志)〉에 “영천군(潁川郡) 숭고현(崇高縣)에 숭고산(崇高山)이 있는데, 고문(古文)에 외방(外方)이라 했다.” 하였으니,
지금의 서경(西京) 등봉현(登封縣)에 있다.
동백(桐柏)은 〈지지(地志)〉에 “남양군(南陽郡) 평씨현(平氏縣) 동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당주(唐州) 동백현(桐柏縣)이다.
배미(陪尾)는 〈지지(地志)〉에 “강하군(江夏郡) 안륙현(安陸縣) 동북쪽에 횡미산(橫尾山)이 있는데,
고문(古文)에 배미(陪尾)라 했다.” 하였으니, 지금의 안주(安州) 안륙(安陸)이다.
서경(西傾)에 도(導)를 말하지 않은 것은 도견(導ð>)의 글을 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북조(北條)로 대하(大河)의 남쪽 지역에 있는 산들이다.』
▣ 제86장(第八十六章)
『 파총산( 山)을 인도하되 형산(荊山)에 이르며, 내방산(內方山)으로부터 대별산(大別山)에 이르게 하였다.』
『 파총(?¾4)은 곧 양주(梁州)의 파(?)이니, 산의 모양이 무덤과 같으므로 파총(?¾4)이라 이르는 바, 양주(梁州)에 자세히 보인다.
형산(荊山)은 남조형산(南條荊山)이니, 〈지지(地志)〉에 “남군(南郡) 임저현(臨沮縣)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양양부(襄陽府) 남장현(南章縣)이다. 내방(內方)•대별(大別)도 또한 산 이름이다.
내방(內方)은 〈지지(地志)〉에 “장산(章山)이니, 고문(古文)에 내방산(內方山)이라 한다.
강하군(江夏郡) 경릉현(竟陵縣) 동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형문군(荊門軍) 장림현(長林縣)이다.
《좌전(左傳)》에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싸울 적에 초(楚)나라가 한수(漢水)를 건너 진을 쳐서 소별산(小別山)으로부터
대별산(大別山)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한수(漢水)와 가까운 산이니, 지금의 한양군(漢陽軍) 한양현(漢陽縣) 북쪽 대별산(大別山)이 이것이다.
〈지지(地志)〉와 《수경(水經)》에 “안풍(安豊)에 있다.”고 한 것은 옳지 않다.
이는 남조(南條)로 강(江)•한(漢)의 북쪽 지역에 있는 산들이다.』
▣ 제87장(第八十七章)
『 민산(岷山)의 남쪽으로부터 형산(衡山)에 이르며, 구강(九江)을 지나 부천원(敷淺原)에 이르게 하였다.』
『 민산(岷山)은 양주(梁州)에 보인다. 형산(衡山)은 남악(南嶽)이다.
〈지지(地志)〉에 “장사국(長沙國) 상남현(湘南縣)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담주(潭州) 형산현(衡山縣)이다.
구강(九江)은 형주(荊州)에 보이다.
부천원(敷淺原)은 〈지지(地志)〉에 “예장군(豫章郡) 역릉현(歷陵縣) 남쪽에 박양산(博陽山)이 있으니,
고문(古文)에 부천원(敷淺原)이라 한다.” 하였으니, 지금의 강주(江州) 덕안현(德安縣) 박양산(博陽山)이다.
조씨(켒氏)가 “파양(´?陽)에 있다.” 한 것은 옳지 않다.
이제 살펴보건대, 조씨(켒氏)는 파양(´?陽)에 박양산(博陽山)이 있고 또 역릉산(歷陵山)이 있으니,
〈지지(地志)〉의 역릉현(歷陵縣)이란 명칭에 응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파양(´?陽)은 한(漢)나라의 옛 현(縣) 지역이니, 또 역릉현(歷陵縣)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산 이름이 우연히 같은 것이니, 근거삼을 수 없다.
강주(江州)의 덕안(德安)이 비록 근사하나 이른바 부천원(敷淺原)이라는 것은 그 산이 매우 작고 낮으니, 또한 드러내어 나타낼 위치를 볼 수가 없다.
오직 노부(盧阜)는 대강(大江)과 팽려(彭쪾)의 교차지점에 있으며, 가장 높고 또 크니, 마땅히 기록할 것이나 모두 고거(考據)가 없으니,
산천(山川)의 이름이 고금이 혹 달라서 전하는 자가 반드시 진실을 얻지 못할 듯하다.
우선 아는 자를 기다린다. 과(過)는 경과(經過)함이니, 견산(ð>山)을 인도함에 황하(黃河)를 넘어간다는 뜻과 같다.
공씨(孔氏)는 “형산(衡山)의 산맥이 연하여 뻗어서 부천원(敷淺原)이 되었다.” 하였는데, 이 또한 옳지 않다.
민산(岷山)의 산맥이 북쪽 한 가지는 형산(衡山)이 되어 동정호(洞庭湖)의 서쪽에 다하고,
남쪽 한 가지는 계령(桂嶺)을 넘어 북쪽으로 원균(袁筠) 지역을 경유하여 덕안(德安)에 이르니,
이른바 부천원(敷淺原)이라는 것은 두 지맥의 사이로, 상수(湘水)가 사이에 끊겨 있다.
형산(衡山)은 상수(湘水)의 서남쪽에 있고 부천원(敷淺原)은 상수(湘水)의 동북쪽에 있으니,
형산(衡山)의 산맥이 연하여 뻗어 구강(九江)을 지나서 부천원(敷淺原)이 된 것이 아님이 매우 분명하다.
또 그 산천(山川)의 등마루와 원류(源流)가 모두 눈앞에 나와 있는데도 고금(古今)의 이설(異說)이 이와 같으니,
하물며 작은 산, 끊긴 항구로 수천백 년을 지난 것을 오히려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민산(岷山)에 도(導)를 말하지 않은 것은 파총(?¾4)을 인도한다는 글을 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남조(南條)로 강(江)•한(漢)의 남쪽 지역에 있는 산들이다.』
▣ 제88장(第八十八章)
『 약수(弱水)를 인도하되 합려(合黎)에 이르러 남은 물줄기를 유사(流沙)에 들어가게 하였다.』
『 이 이하는 내를 깊이 판 것이다. 약수(弱水)는 옹주(雍州)에 보인다. 합려(合黎)는 산 이름이니,
《수서(隋書)》〈지지(地志)〉에 “장액현(張掖縣) 서북에 있는데, 또한 강곡(羌谷)이라 칭한다.” 하였다.
유사(流沙)는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사주(沙州) 서쪽 80리 지점에 있으니, 모래가 바람을 따라 흘러 다니므로 유사(流沙)라 한다.” 하였다.
물을 소도(疏導)『[소통하여 인도함]』함을 이미 각 주(州)의 아래에 붙였고,
여기에 또 물줄기를 나누어 자세히 기록하였으니, 물의 경위(經緯)를 다 볼 수 있다.
내를 파는 공(功)이 산을 따라서 시작되었으므로 물을 인도함이 산을 인도함보다 다음이 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산과 물이 모두 서북쪽에서 근원하였다.
그러므로 우왕(禹王)이 산을 서술하고 물을 서술할 때에 모두 서북쪽으로부터 동남쪽에 이르러,
산을 인도함은 견산(ð>山)과 기산(岐山)을 먼저하고, 물을 인도함은 약수(弱水)를 먼저한 것이다.』
▣ 제89장(第八十九章)
『 흑수(黑水)를 인도하되 삼위(三危)에 이르러 남해(南海)에 들어가게 하였다.』
『 흑수(黑水)는 〈지지(地志)〉에 “건위군(죦爲郡) 남광현(南廣縣) 분관산(汾關山)에서 나온다.” 하였고,
《수경(水經)》에는 “장액(張掖) 계산(鷄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돈황(燉煌)에 이르고,
삼위산(三危山)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남해(南海)로 들어간다.” 하였고,
당(唐)나라 번작(樊綽)은 “서이(西夷)의 물에 남쪽으로 흘러 남해(南海)에 들어가는 것이 모두 넷이니,
구강(區江)•서이하(西珥河)•여수(麗水)•미약강(쭶?江)이니, 모두 남해(南海)로 들어간다.
여수(麗水)라고 칭하는 것이 곧 옛날의 흑수(黑水)이니, 삼위산(三危山)이 그 위에 높이 임해 있다.” 하였다.
상고해 보건대, 양주(梁州)와 옹주(雍州) 두 주(州)는 서쪽 변경이 모두 흑수(黑水)를 경계로 삼으니,
이는 흑수(黑水)가 옹주(雍州)의 서북쪽에서 곧바로 양주(梁州)의 서남쪽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중국은 산세의 등마루가 대체로 모두 서북쪽으로부터 왔으니,
적석(積石)•서경(西傾)•민산(岷山) 등마루 이동(以東)의 물은 이미 하수(河水)와 한수(漢水), 민강(岷江)으로 들어가고,
등마루 이서(以西)의 물은 곧 흑수(黑水)가 되어서 남해로 들어간다.
〈지지(地志)〉와 《수경(水經)》, 번씨(樊氏)의 말이 비록 확실한지는 상세하지 않으나 요컨대 이들 지역이다.』
『 정씨(程氏)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번작(樊綽)이 여수(麗水)를 흑수(黑水)라 한 것은 물이 너무 협소하여 경계가 될 수 없을 듯하다.
서이하(西珥河)라고 칭한 것은 《한지(漢志)》의 엽유택(葉楡澤)과 서로 통하고, 넓은 곳은 20리쯤 되니, 이미 두 주(州)를 경계하여 구별할 수 있다.
그 흐름이 또 곧바로 남해(南海)로 달려가며, 또 한(漢)나라의 전지(?池)는 곧 엽유(葉楡) 지역이다.
무제(武帝)가 처음 전수(?水)와 준수(Á$水)를 개설했을 때에 이 지역에 예로부터 흑수(黑水)의 옛 사당(祠堂)이 있었으니,
오랑캐들은 재적(載籍)『[전적(典籍)]』을 몰라 반드시 부회(附會)하지 못했을 것이며,
번작(樊綽)과 역도원(¦]道元)은 모두 ‘이 못은 느릅나무 잎이 쌓여서 이름을 얻었다.’ 하였으니,
그 물빛이 검은 것은 느릅나무 잎이 쌓이고 젖어서 이루어진 듯하다. 또 그 지역은 바로 촉(蜀)의 정서(正西)쪽에 있고,
또 동북쪽으로 탕창(宕昌)과 거리가 멀지 않으니, 탕창(宕昌)은 곧 삼묘(三苗)의 종예(種裔)『[후예]』들이 사는 곳이다.
삼묘(三苗)가 삼위(三危)에서 공(功)이 펴졌다는 것과 또 서로 응하니, 그 증험이 이처럼 분명할 수 없다.”』
▣ 제90장(第九十章)
『하수(河水)를 인도하되 적석(積石)으로부터 용문(龍門)에 이르며, 남쪽으로 화음(華陰)에 이르며, 동쪽으로 지주(底柱)에 이르며,
또 동쪽으로 맹진(孟津)에 이르며, 동쪽으로 낙예(洛汭)를 지나 대비(大Ý2)에 이르며, 북쪽으로 홍수(?水)를 지나 대륙(大陸)에 이르며,
또 북쪽으로 나뉘어 구하(九河)가 되었다가 함께 합류하여 역하(逆河)가 되어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
『 적석(積石)과 용문(龍門)은 옹주(雍州)에 보인다. 화음(華陰)은 화산(華山)의 북쪽이다. 지주(底柱)는 도산(導山)에 보인다.
맹(孟)은 지명이고, 진(津)은 건너가는 곳이니, 두예(杜預)가 이르기를 “하내군(河內郡) 하양현(河陽縣)의 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맹주(孟州) 하양현(河陽縣)이다. 무왕(武王)의 군대가 맹진(孟津)을 건너갔다는 것이 곧 이곳이니, 지금은 또한 부평진(富平津)이라 이름한다. 낙예(洛汭)는 낙수(洛水)가 교류하는 지점의 안이니,
지금의 하남부(河南府) 공현(鞏縣)의 동쪽에 있다. 낙수(洛水)가 하수(河水)에 들어감은 실로 동남쪽에 있으나
하수(河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동쪽으로 낙예(洛汭)를 지난다고 한 것이다.
대비(大Ý2)는 공씨(孔氏)가 말하기를 “산이 다시 이루어진 것을 비(Ý2)라 한다.” 하였다.
장읍(張揖)은 “성고(成皐)에 있다.” 하였고, 정현(鄭玄)은 “수무(修武)와 무덕(武德)에 있다.” 하였는데,
신찬(臣瓚)은 이르기를 “수무(修武)와 무덕(武德)에는 이 산이 없고, 성고산(成皐山)은 또 다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지금 통리군(通利軍) 여양현(黎陽縣) 임하(臨河)에 산이 있는데, 이것이 대비(大Ý2)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여양산(黎陽山)은 대하(大河)가 쏜살같이 북쪽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지역에 있으므로 우왕(禹王)이 기록한 것이니,
만약 성고(成皐)의 산이라면 이미 동쪽에서 와서 북쪽으로 꺾여 간 지역이 아니며,
또 용문(龍門)이나 지주(底柱)처럼 험하고 막혀서 소통하고 뚫을 필요가 없으며, 서쪽은 낙예(洛汭)와 거리가 이미 너무 가깝고,
동쪽으로 홍수(?水)•대륙(大陸)과 거리가 또 매우 머니, 마땅히 여양(黎陽)에 있는 것을 옳다 하겠다.』
『 홍수(?水)는 〈지지(地志)〉에 “신도현(信都縣)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기주(冀州) 신도현(信都縣) 고홍거(枯?渠)이다.
정씨(程氏)는 말하기를 “주(周)나라 때에 하수(河水)가 영력(?礫)으로 옮겨갔다가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 또다시 돈구(頓丘)를 향해 동남쪽으로 흐르니, 우왕(禹王)때 하수(河水)의 자취와는 크게 어긋난다.
〈지지(地志)〉에 ‘위군(魏郡) 업현(쵘縣)에 옛 대하(大河)가 있으니, 동북쪽에 있어서 곧바로 바다로 통한다.’ 하였으니,
의심컨대 곧 우왕(禹王)의 옛 하수(河水)인 듯하다.” 하였다. 맹강(孟康)은 “왕망하(王莽河)이다.” 하였는데, 이는 옳지 않다.
옛 홍독(?瀆)은 당주(唐州)•패주(貝州)로부터 성북(城北)을 경유하여 남궁(南宮)으로 들어가고, 신도(信都)를 꿰뚫으니,
대저 북향(北向)하여 신도(信都)의 북쪽에 있는 옛 하수(河水)로 들어가서 ‘북쪽으로 홍수(?水)를 지난다.’는 글과 부합하니,
마땅히 신도(信都)에 있는 것을 옳다 하겠다.
대륙(大陸)은 기주(冀州)에 보이고, 구하(九河)는 연주("州)에 보인다.
역하(逆河)는 짐작컨대, 바닷물이 역조(逆潮)하여 얻은 이름인 듯하다.
구하(九河)가 이미 바다로 침몰했으면 역하(逆河)는 그 하류에 있었을 것이니, 진실로 다시 있을 수가 없다.
하수(河水)가 위에서 나뉘어져 아홉이 되었다가 아래에서 합하여 다시 하나가 되었으니,
그 분파(分播)하고 합동(合同)함은 모두 수세(水勢)의 자연이니, 우왕(禹王)이 단지 순히 하여 인도했을 뿐이다.』
『 이제 살펴보건대, 《한서(漢書)》〈서역전(西域傳)〉에 장건(張騫)이 끝까지 찾아간 하원(河源)에서 이르기를 “하수(河水)는 두 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총령(蔥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우전(于Æ)에서 나온다.
우전(于Æ)은 남산 아래에 있는데 이 물은 북쪽으로 흘러서 총령하(蔥嶺河)와 합하여 동쪽으로 포창해(蒲昌海)에 주입(注入)한다.
포창해(蒲昌海)는 일명(一名) 염택(鹽澤)이니, 옥문(玉門) 양관(陽關)과 거리가 3백여 리이다.
이 물은 정체하여 겨울이나 여름에 불어나거나 줄지 않고, 땅속으로 흘러 남쪽으로 적석(積石)으로 나온다.” 하였다.
또 당(唐)나라 장경년간(長慶年間)에 설원정(薛元鼎)이 토번(吐蕃)에 사신(使臣)으로 갈 적에
농서(쫿西)의 성기현(成紀縣) 서남쪽으로부터 변방 2천여 리를 나가서 하원(河源)을 막하(莫賀) 연적미(延積尾)에서 찾아내니,
비마려산(찘磨黎山)이라 칭한다. 이 산(山)은 가운데가 높고 사방이 낮으니, 이른바 곤륜(崑崙)이다.
동북쪽으로 흘러서 적석하(積石河)와 서로 연결되니 하수(河水)의 근원이 맑고 겨울과 봄에 건너갈 수 있다.
아래는 차츰 합류하여 색깔이 붉어지고 더욱 멀어짐에 다른 물이 함께 주입하여 마침내 탁해진다.
토번(吐蕃) 또한 말하기를 “곤륜(崑崙)은 그 나라의 서남쪽에 있다.” 하니, 두 말 중에 설씨(薛氏)가 옳은 듯하다.
하수(河水)는 적석(積石)으로부터 3천여 리를 흐른 뒤에 용문(龍門)에 이르는데, 경문(經文)에 단지 한 번 적석(積石)을 쓰고
방향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득히 멀어서 생략한 것이다.
용문(龍門) 이하는 그 경유한 바를 따른 것이니, 북쪽에서 남쪽으로 간 것을 기록할 때에는 “남쪽으로 화음(華陰)에 이른다.” 하고,
남쪽에서 동쪽으로 간 것을 기록할 때에는 “동쪽으로 지주(底柱)에 이른다.” 하고,
또 동향하여 경유한 땅을 자세히 기록할 때에는 “맹진(孟津)•낙예(洛汭)•대비(大Ý2)”라 하고,
또 동쪽에서 북쪽으로 간 것을 기록할 때에는 “북쪽으로 홍수(?水)를 지나갔다.” 하고,
또 북향하여 경유한 땅을 자세히 기록할 때에는 “대륙(大陸)•구하(九河)”라 하고, 또 바다로 들어간 곳을 기록할 때에는 “역하(逆河)”라 하였다.
낙예(洛汭)로부터 이상은 하수(河水)가 산밑을 흘러가니 그 지역을 다 상고할 수 있으나
대비(大Ý2)로부터 이하는 강안(江岸)이 평지보다 높으므로 물이 터지고 유동하여 물과 육지가 변천하니,
홍수(?水)•대륙(大陸)•구하(九河)•역하(逆河)를 다 실제를 가리키기 어렵다.
그러나 위로 대비(大Ý2)를 찾고 아래로 갈석(碣石)을 찾아서 방향을 따라 옛 자취를 분변한다면 아직도 상고할 수 있다.
그 자세한 것은 상문(上文)에 자세히 보인다.』
『○ 또 살펴보건대, 이복(李復)이 이르기를
“동주(同州)의 한성(韓城) 북쪽에 안국령(安國嶺)이 있으니, 동서가 40여 리이며, 동쪽으로 대하(大河)에 임하였다.
빈하(瀕河)『[황하가]』에 우왕(禹王)의 사당이 있는데 산(山)이 끊기고 하수(河水)가 나오는 곳에 있다.
우왕(禹王)이 용문(龍門)을 뚫을 적에 당(唐)나라 장인원(張仁愿)이 쌓은 동수강성(東受降城)
동쪽에서 시작하여 북에서 남으로 와서 이 산에 이르러 다하였다.
두 강안(江岸)에는 석벽(石壁)이 우뚝이 서 있고, 대하(大河)가 산협(山峽)의 사이 천수백 리를 감고 흐르다가
이곳에 이르러 산이 열리고 강안(江岸)이 넓어지니, 물길이 활연(豁然)히 분방(奔放)하여 노기(怒氣)가 넘쳐 바람이 일고,
소리가 수만의 우레와 같다.” 하였다.
이제 살펴보건대 옛말에 우왕(禹王)이 용문(龍門)을 뚫었다고 하나 그 뚫은 이유가 상세하지 않고,
전설(傳說)에 내려오기를 단지 옛것을 인하여 닦고 열어서 막히는 것을 제거하여 수세(水勢)를 터놓았다고 할 뿐이다.
그런데 이제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수강성(受降城) 이동으로부터 용문(龍門)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우왕(禹王)이 새로 뚫어 만든 것이니,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우왕(禹王)이 뚫기 이전에 하수(河水)의 옛 길은 어느 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씨(李氏)의 학문이 지극히 해박한데, 이 말은 또 무엇을 근거하였는지 알 수 없다.』
▣ 제91장(第九十一章)
『 파총산( 山)에 양수( 水)를 인도(引導)하여 동쪽으로 흘러 한수(漢水)가 되며, 또 동쪽으로 창랑(滄浪)의 물이 되며,
삼서(三챩)를 지나 대별산(大別山)에 이르러 남쪽으로 강(江)에 들어가며, 동쪽으로 돌아 택(澤)이 되어 팽려(彭쪾)가 되며,
동쪽으로 북강(北江)이 되어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
『 양( )은 물 이름이니, 《수경(水經)》에 “양수( 水)는 농서군( 西郡) 지도현( 道縣) 파총산(?¾4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무도(武都)에 이른다.” 하였다. 상거(常¸<)는 말하기를 “한수(漢水)는 두 근원이 있으니, 이는 동쪽 근원이니,
곧 〈우공(禹貢)〉에 이른바 ‘파총산( 山)에 양수( 水)를 인도했다.’는 것이요,
서쪽 근원은 곧 농서군( 西郡) 파총산( 山) 회천(會泉)에서 나오니 처음 근원을 면수(沔水)라 한다.
가맹( 萌)을 지나 한수(漢水)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동쪽 근원은 지금 서현(西縣)의 서쪽에 있고, 서쪽 근원은 지금 삼천현(三泉縣)의 동쪽에 있다.
역도원( 道元)이 “동•서의 두 냇물이 모두 파총산(?¾4山)에서 나와 함께 한수(漢水)가 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수원(水源)이 파총산(?¾4山)에서 발원(發源)하여 양수( 水)가 되고, 무도(武都)에 이르러 한수(漢水)가 되고,
또 동쪽으로 흘러 창랑(滄浪)의 물이 된다. 역도원(¦]道元)이 “무당현(武當縣) 북쪽 40리 지점의 한수(漢水) 가운데에 모래섬이 있으니,
창랑주(滄浪洲)라 하고 물을 창랑수(滄浪水)라 한다.”한 것이 이것이다.
물의 경력(經歷)은 땅을 따라 이름을 얻으니, ‘된다’고 이른 것은 다른 물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삼서(三 )는 물 이름이니, 지금의 영주( 州) 장수현(長壽縣) 마석산(磨石山)에서 발원(發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는 것을 서수( 水)라 하고,
복주(復州) 경릉현(景陵縣) 경계에 이르러 오는 것을 또 차수(?水)라 이름하니, 의심컨대 곧 삼서(三 )의 하나인 듯하다.
그러나 《좌전(左傳)》의 장서(캕챩)와 원서(ä|챩)를 상고해보면 물가가 되니, 알 수 없다.
대별산(大別山)은 도산(導山)에 보이니, 강(江)에 들어가는 곳은 지금의 한양군(漢陽軍) 한양현(漢陽縣)에 있다. 회(匯)는 도는 것이다.
팽려(彭쪾)는 양주(揚州)에 보인다. 북강(北江)은 상세하지 않다.
바다에 들어가는 곳은 지금의 통주(通州) 정해현(靜海縣)에 있다.』
『 ○ 이제 살펴 보건대, 팽려(彭쪾)는 고금(古今)의 기재(記載)에 모두 지금의 파양호(´?陽湖)라 하였다.
그러나 이 호수는 강(江)의 남쪽에 있어서 한수(漢水)가 강(江)으로 들어가는 곳과 거리가 이미 7백여 리이며,
모인 물은 요신(饒信)•휘무(徽撫)•길감(吉툺)•남안(南安)•건창(建昌)•임강(臨江)•원균(袁筠)•융흥(隆興)•남강(南康) 등 여러 주(州)의 물이 합류하니, 한수(漢水)로부터 들어와 돌아 택(澤)이 된 것은 아니다.
또 강에 들어가는 곳은 서쪽은 여부(廬阜)이고 동쪽은 호구(湖口)로 모두 석산(石山)이 우뚝하게 서 있고 물길이 매우 좁으니,
한수(漢水)가 강으로 들어간 뒤 7백여 리를 마침내 가로질러 남쪽으로 흘러 파양호(´?陽湖)로 들어가고,
다시 가로질러 북쪽으로 흘러 북강(北江)이 될 리가 없다. 또 파양호(´?陽湖)는 여러 주(州)의 물이 합류해서 모여 못이 되었으니,
물이 넘쳐서 막은 것이요, 애당초 강(江)•한(漢)이 의뢰한 뒤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강(江)•한(漢)에 의뢰할 것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여러 물이 모인 것이 날로 막히고 달로 높아지니,
형세가 또한 다시 강(江)•한(漢)이 흘러 들어옴을 용납할 수가 없다.
이제 호구(湖口)를 가로질러 건너는 곳은 북쪽으로는 강(江)•한(漢)의 탁류(濁流)이고 남쪽으로는 파양(´?陽)의 청창(淸漲)『[맑은 물]』이니,
이른바 ‘한수(漢水)가 돌아 택(澤)이 되어 팽려(彭쪾)가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없다.
파양(´?陽)의 물이 이미 호구(湖口)에서 나와 남쪽 강안(江岸)을 의지하여 대강(大江)과 서로 버티고 동쪽으로 흐르니,
또 이른바 ‘가로질러 북강(北江)이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없다.
또 경문(經文)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지금의 팽려(彭쪾)가 이미 대강(大江)의 남쪽에 있으니,
경문(經文)에 마땅히 남쪽으로 돌아 팽려(彭쪾)가 되었다고 말할 것이요 동쪽으로 돈다고 말할 수가 없으며, 강(江)을 인도함에
마땅히 남쪽으로 회택(匯澤)에 모인다고 말할 것이요 북쪽으로 회택(匯澤)에 모인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회택(匯澤)이 이미 남쪽에 있으면 경문(經文)에 마땅히 북쪽으로 북강(北江)이 되었다고 말할 것이요
동쪽으로 북강(北江)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으니, 지금 지망(地望)을 가지고 서로 비교해 보면 크게 위배된다.
지금 여강(廬江)의 북쪽에 이른바 소호(巢湖)라는 것이 있는데 호수는 크나 물이 얕다.
매년 4∼5월 사이에 촉령(蜀嶺)의 눈이 녹아서 대강(大江)을 범람할 때에는 물이 넘쳐 호수로 들어오고,
7∼8월이 되어 대강(大江)이 수위가 떨어지면 호수물이 빠져서 강을 따라 동쪽으로 흐르니, 동쪽으로 돌고 북쪽으로 돈다는 글에 부합된다.
그러나 파양호( 陽湖)는 사방이 5∼6백 리이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기록하여, 작은 것을 기록하고 큰 것을 빠뜨렸을 리가 없다.
일찍이 사리(事理)와 정세(情勢)로써 살펴보건대 홍수의 피해는 하수(河水)가 가장 심하였으니,
짐작컨대 당시 용문(龍門)과 구하(九河) 등지에 일이 급하고 백성이 곤궁하여 형세가 중하고 부역이 번거로우므로 우왕(禹王)이 친히 가서 몸소 감독하였고,
강(江)과 회수(淮水)로 말하면 지역이 편벽되고 물이 급히 흘러서 굳이 소통시키고 뚫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진실로 이미 통행되었으므로
혹 관속(官屬)들을 나누어 보내서 가서 살펴보게 하여도 또한 가능했을 것이다.
하물며 동정호(洞庭湖)와 팽려호(彭쪾湖)의 사이는 바로 삼묘(三苗)가 거주하는 곳으로 수택(水澤)과 산림(山林)이 깊고 어두워 측량할 수 없는 곳이다.
저들이 그 험조(險阻)함을 믿고서 완악하여 일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관속(官屬)으로서 간 자들도 반드시 갑자기 감히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단지 팽려(彭쪾)가 택(澤)이 됨만 알았고, 한수(漢水)가 돌아 못이 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였으며,
단지 소호(巢湖)에 강수(江水)가 진흙인 것처럼 생각하였고, 팽려(彭쪾)의 근원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잘못되어 돈다고 말하고 북강(北江)이라고 말한 것이니,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렇다면 파양호( 陽湖)가 팽려(彭 )인 것은 틀림없다.』
▣ 제92장(第九十二章)
『 민산(岷山)에 강(江)을 인도하여 동쪽으로 나뉘어 타수(´=水)가 되며, 또 동쪽으로 예수(澧水)에 이르며,
구강(九江)을 지나 동릉(東陵)에 이르며, 동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모여 회택(匯澤)이 되며, 동쪽으로 중강(中江)이 되어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
『 타( )는 강(江)이 나뉘어 양주(梁州)에 흐르는 것이다. 예(澧)는 물 이름이다.
《수경(水經)》에 “무릉(武陵)의 충현(充縣)에서 나와 서쪽으로 장사(長沙)의 하전현(下雋縣)에 이르러 서북쪽으로 강(江)에 들어간다.” 하였고,
정씨(鄭氏)는 “경문(經文)에 도(道)라 말하고 회(會)라 말한 것은 물이고, 지(至)라 말한 것은 혹 산(山)이나 혹 택(澤)이니,
예(澧)는 마땅히 산(山)•택(澤)의 이름일 것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하문(下文)의 구강(九江)에 예수(澧水)가 이미 그 하나에 참여되었으니, 물이 아님이 분명하다. 구강(九江)은 형주(荊州)에 보인다.
동릉(東陵)은 파릉(巴陵)이니, 지금의 악주(岳州) 파릉현(巴陵縣)이다.
《지지(地志)》에 “여강군(廬江郡) 서북에 있다.” 한 것은 옳지 않다. 모여서 회택(匯澤)이 되고 중강(中江)이 된 것은 상장(上章)에 보인다.』
▣ 제93장(第九十三章)
『 연수(沇水)를 인도하되 동쪽으로 흘러 제수(濟水)가 되어 하수(河水)에 들어가며, 넘쳐 형수(滎水)가 되며,
동쪽으로 도구(陶丘)의 북쪽으로 나오며, 또 동쪽으로 가택(텹澤)에 이르며,
또 동북쪽으로 문수(汶水)와 모여서 다시 북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
『 연수(沇水)는 제수(濟水)이니, 발원하면 연수(沇水)라 하고, 이미 동쪽으로 흐르면 제수(濟水)라 한다.
〈지지(地志)〉에 “제수(濟水)는 하동군(河東郡) 원곡현(垣曲縣) 왕옥산(王屋山) 동남쪽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의 강주(絳州) 원곡현(垣曲縣)의 산이다. 처음 왕옥산(王屋山) 산정(山頂)의 벼랑 밑에서 발원(發源)하니 연수(沇水)라 칭하고,
나타났다가 다시 숨어서 동쪽으로 지금의 맹주(孟州) 제원현(濟源縣)으로 나오니 근원이 둘이다.
동쪽 근원은 주회(周廻)가 700 보(步)로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으며, 서쪽 근원은 주회(周廻)가 685보(步)로 깊이가 한 길이다.
합류하여 온현(溫縣)에 이르니 이것을 제수(濟水)라 하니, 괵공대(¹~公臺)를 지나 서남쪽으로 하수(河水)에 들어간다.
일(溢)은 가득차서 넘침이다. 다시 하수(河水)의 남쪽으로 나와 넘쳐서 형수(滎水)가 되니, 형(滎)은 곧 형파(滎波)의 형(滎)으로,
예주(豫州)에 보인다. 다시 동쪽으로 도구(陶丘)의 북쪽으로 나오니 도구(陶丘)는 지명(地名)이다. 다시 이루어진 것을 도(陶)라 하니,
지금의 광제군(廣濟軍) 서쪽에 있고, 또 동쪽으로 가(텹)에 이르니 가(텹)는 곧 가택(텹澤)이니,
또한 예주(豫州)에 보인다. 이른다『〔至〕』고 말한 것은 제음현(濟陰縣)에 따로 가택(텹澤)의 물줄기가 있으니,
제수(濟水)의 흐름이 이 지역에 이르렀을 뿐이기 때문이다. 문(汶)은 북쪽 문수(汶水)이니, 청주(靑州)에 보인다.
또 동북쪽으로 동평부(東平府) 수장현(壽張縣) 안민정(安民亭)에 이르러 문수(汶水)와 합류해서
지금의 청주(靑州) 박흥현(博興縣)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 당(唐)나라 이현(李賢)은 이르기를
“제수(濟水)는 정주(鄭州)로부터 동쪽으로 활주(滑州)•조주(曹州)•운주(홿州)•제주(濟州)•제주(齊州)•청주(靑州)를 관통하여
바다에 들어간다.” 하였고, 본조(本朝)의 악사(樂史)는 “지금의 동평(東平)•제남(濟南)•치천(淄川)•북해(北海) 지역 가운데에 물이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청하(淸河)라 한다.” 하였다.
역도원(¦]道元)은 이르기를 “제수(濟水)는 왕망(王莽)의 때를 당하여 냇물이 고갈(枯渴)되었었다.
그후 물이 흘러 물길이 통하고 나루터와 도랑이 형세가 바뀌어서 양척(梁脊)『[산등마루]』을 찾아보고
물길을 찾아봄에 옛날과 똑같지 않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형택(滎澤)과 제하(濟河)는 비록 고갈되었으나,
제수(濟水)는 일찍이 흐름이 끊이지 않은 것이다.』
『 정씨(程氏)는 말하기를 “형수(滎水)를 제수(濟水)라 한 것은 본래 딴 뜻이 없다.
제수(濟水)가 하수(河水)로 들어갈 적에 마침 하수(河水)가 가득하여 넘쳐서 남안(南岸)으로 나온 것이니,
넘쳐서 나온 것은 제수(濟水)가 아니요, 제수(濟水)로 인하여 넘쳤기 때문에 우왕(禹王)이 다시 원래의 명칭(名稱)으로 명명(命名)한 것이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정씨(程氏)가 일(溢) 한 글자를 말한 것은 진실로 근리(近理)하다.
그러나 하수(河水)의 남쪽에서 나온 것이 이미 제수(濟水)가 아니라면 우왕(禹王)이 하수(河水)의 지류(支流)를 그대로 제수(濟水)라고 칭할 리가 없으니,
넘쳤다는 것은 형수(滎水)를 가리켜 말한 것이요 하수(河水)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
또 하수(河水)는 흐린데 형수(滎水)는 맑으니, 형수(滎水)의 물은 하수(河水)가 넘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더구나 경문(經文)에 기록한 것은 단지 연수(沇水)를 인도(引導)하는 조례(條例)를 세워서 끊긴 듯하고 이어진 듯하나 실제는 원류(源流)가 있고,
혹 나타나고 혹 숨으나 맥락(脈絡)을 상고할 수 있다.
선유(先儒)들이 모두 “제수(濟水)는 성질이 아래로 급히 내려가기 때문에 하수(河水)로 들어가 땅을 파서 흐름이 나타났다 숨었다 한다.” 하였다.』
『 남풍증씨(南豊曾氏)『[증공(曾鞏)]』의 〈제주이당기(齊州二堂記)〉에 “태산(泰山)의 북쪽은 제주(齊州)의 동남쪽 여러 골짝 물과
서북쪽으로 흑수만(黑水灣)으로 돌아 나오고, 또 서북쪽으로 백애만(柏崖灣)으로 돌아 나와 갈마(渴馬)의 벼랑에 이르니, 물이 오는 것이 많다.
북쪽으로 꺾여 서쪽으로 감에 빠름이 더욱 심하다가 벼랑 밑에 이르면 잔잔히 멈추며, 벼랑으로부터 북쪽으로는 역성(歷城)의 서쪽에 이르러
50리 지점에 솟아 나오는 샘물이 있으니, 높이가 혹 몇 척(尺)에 이른다.
이 부근의 사람들은 박돌천(Û+突泉)이라 칭한다. 제주(齊州)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일찍이 흑수만(黑水灣)에 겨를 버린 자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발견했다.’ 하니, 샘물이 갈마(渴馬)의 벼랑으로부터 땅속으로 숨어 흐르다가
이에 이르러 다시 나온 것이다. 그 주입하는 곳의 이북(以北)은 낙수( 水)라 이르니, 청하(淸河)에 도달하여 바다에 들어가니,
제수(濟水)로 통하는 배는 모두 이곳에 도달한다. 제주(齊州)에는 단 샘물이 많아 이름이 드러난 것이 십수 개인데 색과 맛이 모두 같으니,
내가 징험해 보건대 모두 낙수(¼3水)의 곁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 그렇다면 물이 땅속으로 숨어 흐르는 것이 진실로 많이 있는데, 유독 형택(滎澤)에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오흥심씨(吳興沈氏) 또한 말하기를 “옛말에 제수(濟水)는 땅속으로 숨어 흐른다 하였으니,
지금의 역하(歷下)에 모든 땅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이 흐르는 물이다. 세상에서는 이르기를 ‘제수(濟水)가 그 밑을 지나간다.’ 하며,
동아(東阿) 또한 제수(濟水)가 경유하는 곳인데 우물물을 취하여 달여 진하게 되면 이것을 아교(阿膠)라 이르니,
이것을 사용하여 흐린 물을 저으면 물이 맑아지고, 사람이 이것을 먹으면 가슴이 막힌 것을 내리고 담(痰)을 소통시키니,
물의 성질이 아래로 달려가서 맑고 무겁기 때문이다.” 하였다.
제수(濟水)가 숨어 흘러 하수(河水)를 건너감은 바로 그 물성(物性)의 떳떳함이요 사리(事理)에 드러난 것인데,
정씨(程氏)가 이를 비난하였으니, 다만 깊이 상고하지 않았을 뿐이다.』
▣ 제94장(第九十四章)
『 회수(淮水)를 인도(引導)하되 동백산(桐柏山)으로부터 동쪽으로 사수(泗水)•기수(沂水)에 모여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
『 《수경(水經)》에 “회수(淮水)는 남양(南陽) 평씨현(平氏縣) 태잠산(胎簪山)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우왕(禹王)이 단지 동백산(桐柏山)으로부터 인도(引導)했을 뿐이다.
동백산(桐柏山)은 도산(導山)에 보이고 사수(泗水)와 기수(沂水)는 서주(徐州)에 보인다.
기수(沂水)는 사수(泗水)에 들어가고, 사수(泗水)는 회수(淮水)에 들어가니, 여기에 모인다고 말한 것은 두 물이 서로 필적할 만하기 때문이다.
바다에 들어가는 곳은 지금의 회포(淮浦)에 있다.』
▣ 제95장(第九十五章)
『 위수(渭水)를 인도하되 조서산(鳥鼠山)과 동혈산(同穴山)으로부터 동쪽으로 풍수(Ì>水)에 모이며,
또 동쪽으로 경수(涇水)에 모이며, 또 동쪽으로 칠(漆)•저(沮)를 지나 하수(河水)에 들어가게 하였다.』
『 동혈(同穴)은 산 이름이다. 〈지지(地志)〉에 “조서산(鳥鼠山)은 동혈산(同穴山)의 지산(枝山)이다.” 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옹주(雍州)에 보인다. 공씨(孔氏)가 말하기를 “새와 쥐가 함께 암놈과 수놈이 되어서 한 구멍에 처한다.” 하였으니,
그 말이 괴이하고 허탄하여 바르지 못하니, 믿을 것이 못된다.
역도원( 道元)은 “위수(渭水)는 남곡산(南谷山)에서 나오니, 조서산(鳥鼠山)의 서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우왕(禹王)이 단지 조서산(鳥鼠山)과 동혈산(同穴山)으로부터 인도(引導)했을 뿐이다.』
▣ 제96장(第九十六章)
『 낙수(洛水)를 인도(引導)하되 웅이산(熊耳山)으로부터 동북쪽으로 간수(澗水)와 전수(ç/水)에 모이며,
또 동쪽으로 이수(伊水)에 모이며, 또 동북쪽으로 하수(河水)에 들어가게 하였다.』
『 웅이(熊耳)는 노씨현(盧氏縣)의 웅이산(熊耳山)이다. 나머지는 모두 예주(豫州)에 보인다.
낙수(洛水)는 총령산(¾4嶺山)에서 나오니, 우왕(禹王)이 단지 웅이산(熊耳山)으로부터 인도했을 뿐이다.』
『 ○ 상고해보건대, 경문(經文)에서 파총산( )에 양수(¬|水)를 인도하고 민산(岷山)에 강(江)을 인도한다고 말한 것은
양수( 水)의 근원이 파산(?山)에서 나오고 강(江)의 근원이 민산(岷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산(山)을 말하고 뒤에 물을 말한 것이다.
하수(河水)를 인도하되 적석산(積石山)으로부터 하고, 회수(淮水)를 인도하되 동백산(桐柏山)으로부터 하고
위수(渭水)를 인도하되 조서산(鳥鼠山)과 동혈산(同穴山)으로부터 하고, 낙수(洛水)를 인도하되 웅이산(熊耳山)으로부터 했다고 말한 것은
모두 그 산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단지 그 산으로부터 인도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물을 말하고 뒤에 산을 말한 것이다.
하수(河水)에 자(自)『[어느 곳으로부터 오는 것]』를 말하지 않은 것은 하수(河水)의 근원은 숨어 흐르는 것이 많으니,
적석산(積石山)은 바로 나타난 곳이므로 적석산(積石山)이라고 말하고 자(自)를 말하지 않은 것이며,
연수(沇水)에 산을 말하지 않은 것은 연수(沇水)는 숨어 흘러서 나오는 곳이 한 곳이 아니므로 그 근원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며,
약수(弱水)와 흑수(黑水)에 산을 말하지 않은 것은 구주(九州)의 밖이라서 생략한 것이다.
작은 물이 큰물과 합류함을 입(入)이라 하고, 큰물이 작은 물과 합류함을 과(過)라 하고,
두 물이 형세가 대등하여 서로 들어감을 회(會)라 하니,
천하(天下)의 물이 하수(河水)보다 큰 것이 없기 때문에 하수(河水)에는 회(會)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는 〈우공(禹貢)〉에 글을 쓴 법이다.』
▣ 제97장(第九十七章)
『 구주(九州)가 함께 하니 사해(四海)의 물가가 이미 집을 지어 살 수 있게 되었다.
구주(九州)의 산에 깎아 여제사(旅祭祀)를 지내며, 구주(九州)의 내에 근원을 깊이 파며,
구주(九州)의 못이 이미 제방이 있으니 사해(四海)의 물이 모여 함께 흐른다.』
『 오(춛)는 물가이니, 이씨(李氏)가 말하기를 “물가의 안에 물과 가까운 곳을 오(춛)라 한다.” 하였다. 피(陂)는 제방이다.
회동(會同)은 옹수(Ã5水)•저수(沮水)의 회동(會同)과 뜻이 같다.
사해(四海)의 물가에 물가의 땅이 이미 정하여 살 수 있고, 구주(九州)의 산이 나무를 베어 길을 통하여 이미 제사(祭祀)해서 고유(告由)하였고,
구주(九州)의 냇물이 물의 근원을 깊이 파서 막힘이 없고, 구주(九州)의 못이 이미 제방이 있어서 터짐이 없고,
사해(四海)의 물이 모여서 함께 하지 않음이 없어서 각기 돌아가는 바가 있으니,
이는 상문(上文)을 모두 맺어서 구주(九州)와 사해(四海)의 수토(水土)가 평치(平治)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 제98장(第九十八章)
『 육부(六府)가 크게 닦여져서 여러 땅이 서로 바르게 되자,
재부(財賦)를 신중히 하되 모두 상(上)•중(中)•하(下) 세 토양(土壤)을 품절(品節)『[분별]』하여 중국(中國)에 부세(賦稅)를 이루었다.』
『 공(孔)은 큼이니, 수(水)•화(火)•금(金)•목(木)•토(土)•곡(穀)이 다 크게 수치(修治)된 것이다.
토(土)는 재물(財物)이 말미암아 나오는 곳이니, 여러 땅이라고 일렀으면 단지 곡식(穀食)이 나오는 땅만이 아니다.
여러 땅에 등급이 있으니, 마땅히 비옥하고 척박함과 높고 낮은 명물(名物)로 서로 바르게 하여 토사(土事)『[토지(土地)의 일]』를 맡겨야 한다.
지(底)는 이름이니, 여러 땅에서 나오는 재물을 인하여 재부(財賦)의 수입을 삼가는 것이니,
《주례(周禮)》에 대사도(大司徒)가 토질(土質)에 마땅한 법(法)으로 열두 토양의 명물(名物)『[토양의 명칭과 생산되는 물건]』을 분변하여
토사(土事)를 맡기는 따위와 같은 것이다. 함(咸)은 다이고, 칙(則)은 품절(品節)함이다.
구주(九州)의 곡식이 나오는 토지를 또 모두 상(上)•중(中)•하(下) 세 등급으로 품절하니,
《주례(周禮)》에 대사도(大司徒)가 열두 토양의 명물(名物)을 분변하여 가색(稼穡)을 가르치는 따위와 같은 것이다.
중방(中邦)은 중국(中國)이니, 토지에 대한 부세(賦稅)는 혹 사방 오랑캐에 미치나 전답(田畓)에 대한 부세(賦稅)는 중국(中國)에만 그친다.
그러므로 “중국(中國)에 부세(賦稅)를 이룬다.” 한 것이다.』
▣ 제99장(第九十九章)
『 토지(土地)와 성(姓)을 내려주었다.』
『 토지(土地)와 성(姓)을 준다는 것은 토지(土地)를 주어서 나라를 세우고, 성(姓)을 주어서 종(宗)을 세우게 함을 말한 것이니,
《좌전(左傳)》에 이른바 “천자(天子)가 덕(德)을 세워서 태어남으로 인하여 성(姓)을 주고 토지(土地)를 주어 씨(氏)를 명(命)한다.”는 것이다.』
▣ 제100장(第百章)
『 나의 덕(德)을 공경하여 솔선(率先)하니, 나의 행함을 어기지 않았다.』
『 이(台)는 나이고, 거(距)는 어김이다. 우왕(禹王)이 수토(水土)를 다스리고 토부(土賦)를 정하고,
제후(諸侯)를 세워서 다스림이 이미 안정되고 공(功)이 이미 이루어졌다.
이 때를 당하여 오직 덕(德)을 공경하여 천하(天下)에 솔선(率先)하면 천하(天下)가 저절로 나의 행하는 바를 어기지 않을 것이다.』
▣ 제101장(第百一章)
『 5백 리는 전복(甸服)이니, 백 리는 부세(賦稅)를 총(總)『[모두]』을 바치고, 2백 리는 낫으로 벤 것을 바치고,
3백 리는 갈(좧)을 바치고, 수송하는 일을 겸하며 4백 리는 곡식을 바치고, 5백 리는 쌀을 바친다.』
『 전복(甸服)은 기내(畿內)의 땅이다. 전(甸)은 밭이고 복(服)은 일이니, 모두 전부(田賦)의 일이기 때문에 전복(甸服)이라고 이른 것이다.
5백 리는 왕성(王城)의 밖에 사면(四面)이 모두 5백 리인 것이다.
벼의 뿌리까지 온전한 것을 총(總)이라 하고, 벼를 벤 것을 질(?)이라 하니 반 짚『[볏짚의 반을 벗긴 것]』이고,
반 짚에 거죽을 벗긴 것을 갈( )이라 한다.
복(服)이라고 한 것은 3백 리 이내는 왕성(王城)과 거리가 가까우니,
단지 총(總)•질(?)•갈(좧)을 바칠 뿐만 아니라 또 수송하는 일을 하게 한 것이다.
유독 갈(좧)에만 말한 것은 앞의 두 가지를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속(粟)은 곡식이다. 안의 백 리는 가장 가까우므로 벼 뿌리까지 아울러 모두 바치고, 밖의 백 리는 그 다음이니 다만 벼를 베어 반 짚만 바치고,
밖의 백 리는 또 그 다음이니, 짚의 거친 거죽을 버리고 바치며, 밖의 백 리는 머니 이 이삭을 버리고 곡식만 바치며,
밖의 백 리는 더욱 머니 곡식『[왕겨]』을 버리고 쌀만 바친다.
그 지역의 원근(遠近)을 헤아려서 전부(田賦)를 바침에 경중(輕重)과 정하고 거친 것을 정하였다.
이는 전복(甸服)의 5백 리를 나누어 다섯 등급을 만든 것이다.』
▣ 제102장(第百二章)
『 5백 리는 후복(侯服)이니, 백 리는 채읍(采邑)이고, 2백 리는 남방(男邦)이고, 3백 리는 제후(諸侯)이다.』
『 후복(侯服)은 후국(侯國)의 일이니, 전복(甸服) 밖에 사면이 또 각기 5백 리씩이다.
채(采)는 경대부(卿大夫)의 읍지(邑地)이다.
남방(男邦)은 남작(男爵)이니 작은 나라이고, 제후(諸侯)는 제후(諸侯)의 작읍(爵邑)이니, 대국(大國)과 그 다음 나라이다.
소국(小國)을 먼저하고 대국(大國)을 뒤에 한 것은 큰 나라는 외적(外敵)의 침입을 막을 수 있고,
작은 나라는 와서 귀부(歸附)함을 편안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후복(侯服) 5백 리를 나누어 세 등급을 만든 것이다.』
▣ 제103장(第百三章)
『 5백 리는 수복(綏服)이니, 3백 리는 문교(文敎)를 헤아리고, 2백 리는 무위(武衛)를 떨친다.』
『 수(綏)는 편안함이니, 수(綏)라고 이른 것은 왕기(王畿)에서 점점 멀어지므로 어루만져 편안히 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후복(侯服)의 밖에 사면(四面)이 또 각기 5백 리씩이다. 규(揆)는 헤아림이다.
수복(綏服)은 안으로는 왕성(王城)과 천리(千里) 밖에 있고, 밖으로는 황복(荒服)과 천리(千里) 안에 있어서 내외(內外)의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러므로 안의 3백 리는 문교(文敎)를 헤아리고, 밖의 2백 리는 무위(武衛)를 떨쳐서, 문(文)으로 안을 다스리고 무(武)로 밖을 다스린 것이니,
성인(聖人)이 화하(華夏)의 구분을 엄격히 한 것이 이와 같다. 이는 수복(綏服) 5백 리를 나누어 두 등급을 만든 것이다.』
▣ 제104장(第百四章)
『 5백 리는 요복(要服)이니, 3백 리는 오랑캐이고, 2백 리는 살(蔡)『[유배지]』이다.』
『 요복(要服)은 왕기(王畿)와의 거리가 이미 멀어서 모두 이적(夷狄)의 땅이니, 문서(文書)와 법령(法令)이 중국(中國)보다 소략하다.
요(要)라고 말한 것은 요약의 뜻을 취한 것이니, 다만 기미(羈쭻)할 뿐이다.
수복(綏服)의 밖에 사면(四面)이 또 각기 5백 리씩이다.
살(蔡)은 방(放)『[유배]』이니, 《좌전(左傳)》에 “채숙(蔡叔)을 유배했다.”는 것이 이것이니, 죄인을 이곳에 유방(流放)하는 것이다.
이는 요복(要服)의 5백 리를 나누어 두 등급을 만든 것이다.』
▣ 제105장(第百五章)
『 5백 리는 황복(荒服)이니, 3백 리는 만(蠻)이고, 2백 리는 유배지이다.』
『 황복(荒服)은 왕기(王畿)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서 경략(經略)한 것이 요복(要服)에 비하여 더욱 소략하다.
황야(荒野)이기 때문에 황복(荒服)이라 이른 것이다. 요복(要服)의 밖에 사면(四面)이 또 각기 5백 리씩이다.
유(流)는 죄인(罪人)을 유방(流放)하는 땅이니, 살(蔡)『[살]』과 유(流)가 모두 죄인(罪人)을 거처하게 하는 곳이나
죄(罪)에 경중(輕重)이 있으므로 땅에 원근(遠近)의 구별이 있는 것이다. 이는 황복(荒服) 5백 리를 나누어 두 등급을 만든 것이다.』
『 ○ 지금 살펴보건대, 복(服)마다 5백 리이니, 오복(五服)이면 2천 5백 리이며, 남북과 동서의 상거(相去)가 5천 리이다.
그러므로 〈익직(益稷)〉에 말하기를 “오복(五服)을 도와 이루되 5천 리에 이르렀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제요(帝堯)는 기주(冀州)에 도읍하였으니, 기주(冀州)의 북쪽 경계는 운중(雲中)과 탁주(ü'州)•역주(易州)를 합하더라도
2천 5백 리가 될 수 없을 듯하며, 가령 있더라도 모두 사막의 불모지이고, 동남쪽에 재부(財賦)가 나오는 곳은
오히려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으로 버려지니, 지형으로 고찰하건대 자못 알 수가 없다.
다만 짐작컨대 고금(古今)의 토지는 성쇠(盛衰)가 똑같지 않으니, 제순(帝舜)의 때를 당하여
기주(冀州) 이북(以北)의 땅이 반드시 황락(荒落)함이 후세(後世)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또한 민(쮆)•절(浙)의 사이가 옛날에는 만이(蠻夷)의 연수(淵藪)였었는데 지금에는 부서(富庶)하고 번성하여
마침내 상국(上國)이 된 것과 같으니, 토지의 흥폐(興廢)는 한 때로 개괄할 수가 없다.』
『 주(周)나라 제도에 구기(九畿)는 후(侯)•전(甸)•남(男)•채(采)•위(衛)•만(蠻)•이(夷)•진(鎭)•번(藩)이며,
기(畿)마다 또한 5백 리이고, 왕기(王畿)는 또 이 안에 들어 있지 않으니, 이것을 합하면 한 방(方)이 5천 리이다.
사방(四方)의 상거(相去)는 만리(萬里)가 되니, 우복(禹服)의 수에 배가 된다.
《한서(漢書)》〈지지(地志)〉에 또한 “동서(東西)가 9천 리이고, 남북(南北)이 1만 3천 리이다.” 하였으니,
선유(先儒)들은 모두 우복(禹服)은 좁고 주(周)나라와 한(漢)나라는 땅이 넓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혹자는 “주복(周服)의 이수(里數)는 모두 방(方)으로 말하였다.” 하고,
혹자는 “고금(古今)의 자가 장단(長短)의 차이가 있다.” 하고,
혹자는 “우왕(禹王) 때는 직방(直方)『[일직선]』으로 계산하였는데 후세에는 사람 발자국의 굴곡(屈曲)으로 취했다.” 하니,
요컨대 모두 정확한 의논이 아니다. 우왕(禹王)의 성교(聲敎)가 미친 것은 지역이 사해(四海)에 다하였으나 강리(疆理)한 것은
다만 오복(五服)으로 제한하였고, 황복(荒服)의 밖에 이르러서는 또 따로 구획(區턛)을 한 것이니,
이른바 “다섯 장(長)을 모두 세웠다.”는 것이 이것이다.
주(周)나라와 한(漢)나라로 말하면 그 땅의 경계까지 다하여 강획(疆턛)한 것이다.』
▣ 제106장(第百六章)
『 동쪽으로 바다에 무젖고, 서쪽으로 유사(流沙)에 입혀지며, 북쪽과 남쪽에 이르러 성교(聲敎)가 사해(四海)에 다 미치자,
우왕(禹王)이 검은 규(圭)를 올려 성공(成功)을 아뢰었다.』
『 점(漸)은 무젖음이요 피(被)는 덮임이요, 기(쨑)는 미침이다.
지역이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말이 깊고 얕음이 있는 것이다.
성(聲)은 풍성(風聲)을 이르고, 교(敎)는 교화(敎化)를 이른다.
임씨(林氏)가 말하기를 “여기에서 떨쳐 듦에 멀리 있는 자가 듣기 때문에 성(聲)이라 이르고,
여기에서 법(法)이 됨에 멀리 있는 자가 본받기 때문에 교(敎)라 이른다.” 하였다.
위에서는 오복(五服)의 제도를 말하고 여기서는 성교(聲敎)가 미치는 바를 말하였으니,
법제(法制)는 한계가 있으나 교화(敎化)는 무궁한 것이다.
석(錫)은 사석(師錫)『[여럿이 올림]』의 석(錫)과 같으니, 수토(水土)가 이미 다스려짐에 우왕(禹王)이 검은 규(圭)를 폐백으로 삼아
성공을 제순(帝舜)에게 고한 것이다. 물빛이 검으므로 규(圭)를 검은색으로 한 것이다.』
'書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경 - 하서 - 윤정(胤征) (0) | 2015.04.29 |
---|---|
서경 - 하서 - 오자지가(五子之歌) (0) | 2015.04.29 |
서경 - 하서 - 감서(甘誓) (0) | 2015.04.29 |
서경(書經)-우서(虞書) 전편 (0) | 2014.11.12 |
書經(서경) (0) | 2012.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