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 주서 - 무성(武成)

 

▣ 무성(武成)


『史氏記武王往伐, 歸獸, 祀群神, 告群后와 與其政事하여 共爲一書하니 篇中에 有武成二字일새 遂以名篇하니라

今文無, 古文有하니라』


『 사씨(史氏)가 무왕(武王)이 가서 정벌하고 군마(軍馬)를 돌려보내며,

여러 신(神)에게 제사(祭祀)하고 제후(諸侯)들에게 고한 것과 정사(政事)를 기록하여 함께 한 책을 만들었다.

편(篇) 가운데 무성(武成)이란 두 글자가 있으므로 마침내 이것으로 편명(篇名)을 삼았다.

금문(今文)에는 없고 고문(古文)에는 있다.』

 

 

▣ 제1장(第一章)


『 1월 임진일(壬辰日) 방사백(旁死魄) 익일(翼日)『[다음날]』인 계사일(癸巳日)에

왕(王)이 아침에 주(周)『[호경(鎬京)]』로부터 행하여 가서 상(商)나라를 정벌하였다.』

『 1월은 건인월(建寅月)이니, 정월(正月)이라고 말하지 않고 1월이라고 말한 것은

상(商)나라는 건축월(建丑月)을 정월로 하여 12월을 정삭(正朔)으로 삼았으므로 1월이라고 말한 것이니,

〈태갑(太甲)〉과 〈태서(泰誓)〉에 자세히 보인다.

임진(壬辰)은 〈태서(泰誓)〉의 무오일(戊午日)로 미루어 보면 마땅히 1월 2일이 된다.

사백(死魄)은 초하루이니, 2일이기 때문에 방사백(旁死魄)이라고 말하였다.

익(翼)은 명일(明日)이니, 먼저 임진(壬辰) 방사백(旁死魄)이라 기록하고

그런 뒤에 계사일(癸巳日)에 상(商)나라를 정벌했다고 말한 것은

후세에 아무 날을 말할 적에 반드시 먼저 아무 삭(朔)을 말함과 같다.

주(周)는 호경(鎬京)이니, 경조(京兆)의 호현(î-縣) 상림(上林)에 있었으니,

바로 지금의 장안현(長安縣) 곤명지(昆明池) 북쪽 호피(鎬陂)가 이곳이다.』

 


▣ 제2장(第二章)


『 4월 재생명(哉生明)에 왕(王)이 상(商)나라로부터 오시어 풍(豊)에 이르러 무(武)를 쉬고 문(文)을 닦으시어

군마를 화산(華山)의 남쪽에 돌려보내고 소를 도림(桃林)의 들에 풀어놓아

천하(天下)에 〈무력(武力)을〉 쓰지 않을 것임을 보였다.』

『 재(哉)는 비로소이니, 시생명(始生明)은 월(月)3일이다.

풍(豊)은 문왕(文王)의 옛 도읍이니, 경조(京兆)의 호현(î-縣)에 있었으니,

지금의 장안현(長安縣) 서북쪽 영대(靈臺) 풍수(豊水)의 가이니, 주(周)나라 선왕(先王)의 사당(祠堂)이 이곳에 있었다.

산의 남쪽을 양(陽)이라 한다. 도림(桃林)은 지금의 화음현(華陰縣) 동관(潼關)이다.

〈악기(樂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황하(黃河)를 건너 서쪽으로 와서 말을 화산(華山)의 남쪽에 풀어놓아 다시 타지 않고

소를 도림(桃林)의 들에 풀어놓아 다시 일을 시키지 않았으며, 수레와 갑옷에 피를 발라 부고(府庫)에 보관하고

창과 방패를 거꾸로 실어 호피(虎皮)로 포장하였으니, 천하(天下)에서는 무왕(武王)이 다시 병력을 쓰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  이는 마땅히 ‘만성열복(萬姓悅服)’의 아래에 있어야 할 것이다.』

 


▣ 제3장(第三章)


『 정미일(丁未日)에 주(周)나라 사당(祠堂)에 제사(祭祀)할 적에 방(邦)•전(甸)과 후(侯)•위(衛)의 제후들이 크게 분주하여

두(豆)와 변(쮹)을 잡더니, 3일이 지난 경술일(庚戌日)에 시(柴)•망(望)하여 크게 무성(武成)을 고유(告由)하였다.』

『 준(駿)은 《이아(爾雅)》에 “신속함이다.” 하였다. 주묘(周廟)는 주(周)나라 선조(先祖)의 사당(祠堂)이다.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긴 일을 선조(先祖)의 사당(祠堂)에 제사(祭祀)하여 고유(告由)할 적에

이때 가까이는 방(邦)•전(甸)과 멀리는 후(侯)•위(衛)의 제후들이 모두 크게 분주하여 일을 잡아서 제사(祭祀)를 도왔다.

두(豆)는 나무로 만든 그릇이고, 변(쮹)은 대나무로 만든 그릇이니, 제기(祭器)이다.

이미 선조(先祖)의 사당(祠堂)에 고유(告由)하고, 불을 태워 하늘에 제사(祭祀)하며 산천(山川)을 바라보고 제사하여

무공(武功)이 이루어짐을 고유(告由)하였으니,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데 이르고 친함으로부터 높은 데에 이른 것이다.』

『  이는 마땅히 ‘백공수명우주(百工受命于周)’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 제4장(第四章)


『 기생백(旣生魄)에 여러 나라의 총군(¾4君)과 백공(百工)들이 주(周)나라에서 명(命)을 받았다.』

『 생백(生魄)『[어둠이 나옴]』은 보름 뒤이다.

사방(四方)의 제후(諸侯)와 백관(百官)들이 모두 주(周)나라에서 명(命)을 받았다.

무왕(武王)이 새로 즉위함에 제후(諸侯)와 백관(百官)들이 모두 새 군주(君主)를 뵈온 것이니, 시작을 바로잡은 것이다.』

『  이는 마땅히 ‘시천하불복(示天下弗服)’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 제5장(第五章)


『 왕(王)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아! 여러 제후(諸侯)들아.

선왕(先王)『[후직(后稷)]』이 나라를 세워 토지를 열어 놓으셨는데, 공류(公劉)가 전인(前人)의 공렬(功烈)을 돈독히 하고

태왕(太王)에 이르러 처음으로 왕자(王者)의 자취를 터닦았으며, 왕계(王季)가 왕가(王家)에 근로하셨다.

그리고 우리 문고(文考)이신 문왕(文王)께서 능히 공(功)을 이룩하시어 크게 천명(天命)에 응하여

사방(四方)의 중하(中夏)를 어루만지시니, 큰 나라는 그 힘을 두려워하고 작은 나라는 그 덕(德)을 그리워한 지가 9년이었는데,

대통(大統)을 이루지 못하시고 별세하셨으므로 나 소자(小子)가 그 뜻을 이었노라.”』

『 군후(群后)는 제후(諸侯)이다. 선왕(先王)은 후직(后稷)이니, 무왕(武王)이 추존(追尊)한 것이다.

후직(后稷)이 처음 태(邰)나라에 봉해졌으므로 나라를 세우고 토지를 열었다고 말한 것이다.

공류(公劉)는 후직(后稷)의 증손(曾孫)이니, 《사기(史記)》에 “후직(后稷)의 업(業)을 닦았다.” 하였다.

태왕(太王)은 고공단보(古公亶父)이니, 오랑캐를 피하여 빈(ª')을 떠나 기산(岐山)에 거주하자,

빈(ª')땅 사람들이 어질게 여겨 따라온 자가 시장(市場)에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시경(詩經)》에 “기산(岐山)의 남쪽에 거하여 실로 처음으로 상(商)나라를 정벌했다.” 하였으니,

태왕(太王)이 비록 일찍이 상(商)나라를 정벌할 뜻이 있지는 않았으나 태왕(太王)이 처음으로 민심(民心)을 얻어

왕업(王業)의 이루어짐이 실로 이때에 터전한 것이다.

왕계(王季)는 능히 근로하여 그 업(業)을 계승하고, 문왕(文王)에 이르러서는 능히 그 공(功)을 이루어 크게 천명(天命)을 받아서

사방(四方)의 중하(中夏)를 어루만져 편안히 하니, 큰 나라는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함부로 하지 못하고,

작은 나라는 그 덕(德)을 그리워하여 자립(自立)할 수 있었다.

문왕(文王)이 서백(西伯)이 되어 정벌을 마음대로 한 뒤로부터 위엄과 덕(德)이 더욱 천하(天下)에 드러났는데

9년만에 붕(崩)하였다. 대통(大統)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문왕(文王)의 덕(德)이 천하(天下)를 받을 수 없어서가 아니요,

이때 주왕(紂王)의 악(惡)이 아직 천하(天下)를 잃는데는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왕(文王)이 천하(天下)를 편안히 함을 마음으로 삼았으므로

나 소자(小子) 또한 천하(天下)를 편안히 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은 것이다.』

『  이는 마땅히 ‘대고무성(大告武成)’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 제6장(第六章)


『 상(商)나라의 죄(罪)를 지극히 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와 지나가는 곳의 명산(名山)•대천(大川)에 고유(告由)하여

말씀하기를 “도(道)가 있는 사람의 증손(曾孫)인 발(發)은 장차 상(商)나라에 크게 바로잡음이 있을 것이니,

이제 상왕(商王) 수(受)가 무도(無道)하여 하늘이 내린 물건을 함부로 버리며, 증민(烝民)들을 해치고 포학하게 하며,

천하(天下)에 도망한 자들의 주인이 되어 마치 못과 숲에 모이듯 합니다.

나 소자(小子)는 이미 어진 사람을 얻어 감히 상제(上帝)를 공경히 받들어서 어지러운 꾀를 막으니,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이 모두 따르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 지(底)는 지극함이다. 후토(后土)는 사(社)이니, 구룡씨(句龍氏)가 후토(后土)가 되었다.

《주례(周禮)》〈대축(大祝)〉에 “왕(王)이 큰 산천(山川)을 지나게 되면 제사(祭祀)한다.” 하였다.

공씨(孔氏)가 말하기를 “명산(名山)은 화산(華山)을 이르고 대천(大川)은 하수(河水)를 이르니,

풍(豊)과 호(鎬)로부터 조가(朝歌)에 가려면 반드시 화산(華山)을 지나고 황하(黃河)를 건너간다.” 하였다.

왈(曰)은 무왕(武王)이 신(神)에게 고유(告由)한 말씀을 든 것이다.

도(道)가 있다는 것은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주왕(周王)’ 두 글자는 사신(史臣)이 추후에 더한 것이다.

정(正)은 곧 〈탕서(湯誓)〉에 “감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는 정(正)과 같다. 췌(萃)는 모임이다.

주왕(紂王)이 물건을 버리고 백성을 해치며 천하(天下)에 도망한 죄인들의 주인이 되어서 마치 고기가 못에 모이듯이 하고

짐승이 숲에 모이듯이 한 것이다. 인인(仁人)은 공씨(孔氏)가 말하기를 “태공(太公)•주공(周公)•소공(召公)의 무리이다.” 하였다.

약(略)은 모략(謀略)이다. 비(쯸)는 《광운(廣韻)》에 “따름이다.” 하였다.

인인(仁人)을 이미 얻었으면 공경히 상제(上帝)를 받들어서 어지러운 꾀를 막고 끊을 수 있으니,

안으로 화하(華夏)와 밖으로 만맥(蠻貊)들이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태공(太公)이 주(周)나라로 돌아온 것은 문왕(文王)의 세대에 있었고,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은 주(周)나라의 가까운 친척이니, 획(獲)이라고 이를 수 없다.

이는 인인(仁人)이 상(商)나라로부터 온 것일 것이다.” 라고 말한다.

나는 생각하건대 획(獲)은 얻었다는 말이니, 〈태서(泰誓)〉에 이른바 인인(仁人)이니, 반드시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경전(經傳)에 어찌 전함이 없겠는가.』

『  이는 마땅히 ‘우정벌상(于征伐商)’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 제7장(第七章)


『 하늘이 이룬 명(命)을 공경히 받들어 이러므로 내가 동쪽으로 정벌하여 사녀(士女)들을 편안히 하니,

사녀(士女)들이 검은 비단과 누런 비단을 광주리에 담아서 우리 주왕(周王)을 밝힘은 하늘의 아름다움이 진동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큰 읍(邑)인 주(周)나라에 귀부(歸附)하였습니다.』

『 성명(成命)은 상(商)나라를 내치는 정해진 명(命)이다. 비(비)는 대그릇이요, 현황(玄黃)은 색(色)이 있는 폐백이다.

하늘이 정한 명(命)을 공경히 받들었다.

그러므로 내가 동쪽으로 정벌하여 사녀(士女)들을 편안히 하니,

사녀(士女)들이 주(周)나라가 온 것을 기뻐하여 광주리에 현황(玄黃)의 폐백을 담아서

우리 주왕(周王)의 덕(德)을 밝힘은 하늘의 아름다움이 진동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우리 큰 읍(邑)인 주(周)나라에 귀부(歸附)한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현황(玄黃)은 천지(天地)의 색깔이니,

현황(玄黃)의 비단을 광주리에 담은 것은 우리 주왕(周王)이 천지(天地)의 덕(德)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라고 한다.』

『  이는 마땅히 ‘기승궐지(其承厥志)’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 제8장(第八章)


『 너희 신(神)들은 부디 나를 도와서 억조(億兆)의 백성을 구제하여 신(神)의 부끄러움이 되게 하지 마소서.

” 이미 무오일(戊午日)에 군대가 맹진(孟津)을 건너가 계해일(癸亥日)에 상(商)나라 교(郊)에 진을 치고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을 기다리더니, 갑자일(甲子日) 매상(昧爽)에 수(受)가 그 군대를 거느리되 숲처럼 많이 하여

목야(牧野)에 모이니, 그들은 우리 군대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고, 앞에 있는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들어 뒤에서 공격하여 패해서

피가 흘러 방패가 떠다녀 한 번 융의(戎衣)『[전복(戰服)]』을 입음에 천하(天下)가 크게 안정되었다.

이에 상(商)나라의 정사(政事)를 되돌려서 정사(政事)는 옛날을 따르고, 기자(箕子)를 가둔 것을 풀어주고

비간(比干)의 묘를 봉분(封墳)하고 상용(商容)의 마을에 경례하며, 녹대(鹿臺)의 재물을 흩어주고

거교(鉅橋)의 곡식을 풀어서 크게 사해(四海)에 주니, 만백성(萬百姓)들이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 휴명(休命)은 상(商)나라를 이기는 명(命)이다.

무왕(武王)이 군대를 상(商)나라 교(郊)에 주둔하고 옹용(雍容)하여 핍박하지 않아 주왕(紂王)의 군대가 오기를 기다려 이겼는데

사신(史臣)이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을 기다렸다고 말하였으니, 형용을 잘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숲과 같다는 것은 《시경(詩經)》에 이른바 “그 모임이 숲과 같다.”는 것이니, 주왕(紂王)의 무리가 비록 숲과 같이 많았으나

모두 우리 군대에게 대적하려는 뜻을 가진 자가 없고, 주왕(紂王)의 앞에 있던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들고서

도리어 뒤에 있는 무리를 공격하여 패주(敗走)시켰다.

그리하여 자기들끼리 도륙(屠戮)하여 마침내 피가 흘러 방패가 표류함에 이르렀으니, 사신(史臣)이 그 실제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주왕(紂王)의 무리가 마음이 떠나고 덕(德)이 떠났으나 다만 형세에 눌려서 감히 동하지 못할 뿐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무왕(武王)의 조벌(弔伐)하는 군대로 인하여 비로소 기회를 타고 틈을 타서 원망과 노여움이 폭발하여

창을 거꾸로 들고서 서로 도륙하여 그 혹렬(酷烈)함이 마침내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또한 주왕(紂王)이 백성들에게 원망을 쌓음이 이와 같이 심함을 볼 수 있으며,

무왕(武王)의 군대는 칼날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번 병갑(兵甲)을 입음에 천하(天下)가 마침내 크게 정해진 것이다.』

『 내(乃)는 일을 잇는 말이니, 주왕(紂王)의 학정(虐政)을 되돌려 상(商)나라 선왕(先王)의 옛 정사(政事)를 따른 것이다.

식(式)은 수레 앞에 가로로 댄 나무이니, 공경할 대상이 있으면 고개를 숙여 여기에 기댄다.

상용(商容)은 상(商)나라의 현인(賢人)이다. 여(閭)는 종족이 거주하는 이문(里門)이다. 뇌(賚)는 줌이다.

무왕(武王)이 잔해(殘害)한 자를 제거하고 폭악(暴惡)한 자를 제거하며 충성스러운 자를 드러내고 어진 자를 이루며,

곤궁한 자를 구휼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은택이 천하(天下)에 미치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모두 마음으로 기뻐하여

정성으로 복종하였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은(殷)나라 백성들이 말하기를

‘왕(王)이 인인(仁人)에 대해 죽은 자도 오히려 그 묘(墓)를 봉분해 주니, 하물며 산 자이겠는가.

왕(王)이 현인(賢人)에 대해 망자(亡者)도 오히려 그 마을에 정표를 하니, 하물며 생존한 자이겠는가.

왕(王)이 재물에 있어 모은 것도 오히려 흩어주니, 하물며 다시 거두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였다.

당(唐)나라 공씨(孔氏)가 말하였다. “이것이 기뻐하여 복종한 일이다.”』

『  이는 마땅히 ‘망불솔비(罔不率쯸)’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 제9장(第九章)


『 관작(官爵)을 나열함은 다섯 가지로 하되 땅을 나누어줌은 세 가지로 하며,

벼슬을 세우되 현자(賢者)로 하고 일을 맡기되 능력이 있는 자로 하며,

백성의 다섯 가지 가르침을 소중히 하되 음식과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특히 유념(留念)하며,

신(信)을 돈독히 하고 의리를 밝히며, 덕(德)을 높이고 공(功)에 보답하니, 의상을 드리우고 손을 꽂고서 천하(天下)가 다스려졌다.』
『 작위(爵位)를 나열함을 다섯 가지로 했다는 것은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이며,

땅을 나누어줌을 세 가지로 했다는 것은 공(公)은 백리(百里)이고, 백(伯)은 70리이고, 자(子)는 50리의 세 등급(等級)이다.

벼슬을 세우되 현자(賢者)로 하면 불초(不肖)한 자가 진용(進用)될 수 없고,

일을 맡기되 능력이 있는 자로 하면 재주 없는 자가 임용될 수 없는 것이다.

오교(五敎)는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형제(兄弟)•장유(長幼)의 다섯 가지 떳떳한 가르침이며,

음식으로 산 사람을 봉양하고 상례(喪禮)로 죽은 사람을 장송(葬送)하고 제사로 멀리 가신 선조(先祖)를 추모(追慕)하니,

오교(五敎)와 삼사(三事)는 인기(人紀)『[인륜]』를 세워 풍속을 후하게 하는 것이니, 성인(聖人)이 매우 중요시하는 것이다.

돈(惇)은 돈후(敦厚)함이다.

신(信)을 돈후하게 하고 의(義)를 밝혀서 신(信)과 의(義)가 섬에 천하(天下)에 힘쓰지 않는 풍속이 없으며,

덕(德)이 있는 자를 관직(官職)으로 높여주고, 공(功)이 있는 자를 상(賞)으로 보답하여

관직(官職)과 상(賞)이 행해짐에 천하(天下)에 권면되지 않는 선(善)이 없었다.

분봉(分封)함에 법(法)이 있고 벼슬을 시키고 부림에 요체가 있으며,

오교(五敎)가 닦여지고 삼사(三事)가 거행되며 신(信)과 의(義)가 확립되고 관(官)과 상(賞)이 행해지니,

무왕(武王)이 이에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의상을 드리우고 손을 꽂고서도 천하(天下)가 저절로 다스려졌다.

사신(史臣)이 무왕(武王)의 정치에 대한 본말(本末)을 서술함에 말이 간략하면서도 일이 넓음이 이와 같았다.』

『  이는 마땅히 ‘대읍주(大邑周)’의 아래에 있어야 할 터인데 위에 그래도 빠진 글이 있다.

살펴보건대 이 편(篇)은 편간(編簡)이 착란(錯亂)되어 선후(先後)의 순서가 잘못되었으므로

이제 그 글을 상고(詳考)하여 뒤에 바로잡는 바이다.』

 

 

 

서경 - 주서 - 무성  금고정무성


 
▣ 금고정무성(今考定武成)


『 살펴보건대 유씨(劉氏)『[유창(劉敞)과 유반(劉쮎)]』와 왕씨(王氏)『[왕안석(王安石)]』와 정자(程子)가

모두 개정(改正)한 차서(次序)가 있으므로 이제 이것을 참고하여 정하여 읽기를 이와 같이 하니,

대략 제가(諸家)의 소장(所長)을 모은 것이다.

다만 사월(四月), 생백(生魄), 정미(丁未), 경술(庚戌)의 한 절(節)은

이제 상문(上文)과 《한지(漢志)》의 일진(日辰)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 순서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의심컨대 선유(先儒)들은 ‘왕약왈(王若曰)’을 마땅히 ‘수명우주(受命于周)’의 아래에 붙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생백(生魄)’이 ‘정미(丁未)’와 ‘경술(庚戌)’의 뒤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생백(生魄)의 날에 제후(諸侯)와 백공(百工)들이 비록 와서 명을 청하였으나

무왕(武王)은 아직 조종(祖宗)에게 제사하지 않고 천지(天地)에 고유(告由)하지 않았다 하여 감히 명령을 발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선 명(命)하여 제사(祭祀)를 돕게 하여, 정미일(丁未日)과 경술일(庚戌日)에 교묘(郊廟)에 제사(祭祀)하여

크게 무공(武功)이 이루어짐을 고유(告由)한 뒤에 비로소 제후(諸侯)에게 고하였음을 알지 못한 것이니,

상(上)•하(下)의 사귐과 신(神)•인(人)의 순서가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 유씨(劉氏)는 “‘여소자기승궐지(予小子其承厥志)’의 아래에 마땅히 빠진 글이 있다.” 하였는데,

지금 살펴보건대 진실로 마땅히 빠진 글이 있다.

정자(程子)는 ‘공천성명(恭天成命)’으로부터 이하(以下)의 34자(字)를 그 아래에 연결하였으니,

이미 그 일절(一節)을 얻은 것이며, ‘용부아대읍주(用附我大邑周)’의 아래는 유씨(劉氏)의 이른바 빠진 글이라는 것이니,

그래도 마땅히 십수 마디의 말이 있어야 한다. 무왕(武王)이 혁명(革命)한 초기에 구하(區夏)를 어루만져 소유하였으니,

마땅히 퇴탁(退托)『[겸양]』하는 말씀이 있어,

감히 갑작스레 천명(天命)을 감당하지 못해서 제후(諸侯)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뜻을 보이고,

또 서로 경계하고 삼가는 뜻을 지극히 하여 대략 〈탕고(湯誥)〉의 글과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니,

단지 스스로 자기의 공(功)을 서술함에 그쳐서는 안 된다. ‘열작유오(列爵惟五)’ 이하는 또 사관(史官)의 말이요,

무왕(武王)의 말씀이 아니니, 읽는 자가 이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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