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주서-금등(金등)


 
▣ 금등(金등)


『武王有疾하시니 周公以王室未安하고 殷民未服하여 根本易搖라
故로 請命三王하여 欲以身代武王之死어시늘 史錄其冊祝之文하고 幷敍其事之始末하여 合爲一篇이라
以其藏於金등之¤#일새 編書者因以金¦$名篇하니 今文古文皆有하니라』

『唐孔氏曰 發首로 至王季文王은 史敍將告神之事也요 史乃冊祝으로 至屛璧與珪는 記告神之辭也요
自乃卜으로 至乃퀁는 記卜吉及王病퀁之事也요 自武王旣喪已下는 記周公流言居東及成王迎歸之事也라』

 

『무왕(武王)이 질병이 있자, 주공(周公)은 왕실(王室)이 아직 편안하지 못하고 은(殷)나라 백성들이 복종하지 아니하여 근본이 흔들리기 쉽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세 왕(王)에게 명(命)을 청하여 자신으로써 무왕(武王)의 죽음을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사관(史官)이 그 책축(冊祝)의 글을 기록하고 아울러 그 일의 시말(始末)을 서술하여 합하여 한 편(篇)을 만들었다.
금등(金¦$)『[쇠사슬로 묶어 봉함함]』한 궤에 보관하였기 때문에 책을 엮는 자가 인하여 금등(金¦$)이라고 편(篇)을 이름한 것이니,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에 모두 있다.』

『당(唐)나라 공씨(孔氏)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부터 왕계(王季)와 문왕(文王)에 이르기까지는 사관(史官)이 장차 신(神)에게 고하려는 일을 서술한 것이며,
‘사내책축(史乃冊祝)’으로부터 ‘병벽여규(屛璧與珪)’까지는 신(神)에게 고한 말을 기록한 것이며,

‘내복(乃卜)’으로부터 ‘내추(乃퀁)’까지는 점괘의 길함과 무왕(武王)의 병이 쾌유된 일을 기록한 것이며,

‘무왕기상(武王旣喪)’으로부터 이하는 주공(周公)이 유언(流言) 때문에 동쪽에 거하다가 성왕(成王)이 맞이해 돌아온 일을 기록한 것이다.”』


 

▣ 제1장(第一章)


『 상(商)나라를 이긴 지 2연(年)에 왕(王)이 병이 있어 즐겁지 못하였다.』

『 연수(年數)를 기록한 것은 상(商)나라를 이긴 지가 오래지 않았음을 나타낸 것이다. 불예(弗豫)는 열예(悅豫)하지 못한 것이다.』

 


▣ 제2장(第二章)


『 두 공(公)『[태공(太公)과 소공(召公)]』이 말하였다. “내 왕(王)을 위하여 목복(穆卜)을 하겠다.”』

『 두 공(公)은 태공(太公)과 소공(召公)이다.
이씨(李氏)가 말하기를 “목(穆)은 공경하고 화한 뜻이 있으니, 목복(穆卜)은 공복(恭卜)이란 말과 같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옛날에 국가(國家)에 대사(大事)가 있어 점을 치게 되면 공경(公卿)과 백집사(百執事)가 모두 그 자리에 있어 성

일(誠一)하고 화동(和同)하여 복서(卜筮)의 명령을 들었다. 그

러므로 그 점(占)을 이름하여 목복(穆卜)이라 한 것이니, 하문(下文)에 성왕(成王)이 풍뢰(風雷)의 변고로 인하여

왕(王)과 대부(大夫)가 모두 관(冠)을 쓰고 금등(金¦$)을 열어 글을 보고서 점친 것이 이것이다.

선유(先儒)는 오직 목(穆)을 경(敬)이라 하였으니, 이른바 ‘목복(穆卜)하지 말라’는 뜻에 통하지 않는다.』


 

▣ 제3장(第三章)


『 주공(周公)이 말씀하기를 “우리 선왕(先王)을 근심하게 할 수 없다.” 하시고,』

『 척(戚)은 근심하고 번뇌하는 뜻이다. 무왕(武王)의 병 때문에 우리 선왕(先王)을 근심하고 번뇌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니,
두 공(公)의 점(占)을 물리친 것이다.』

 

 
▣ 제4장(第四章)
 

『 주공(周公)이 스스로 자신의 일로 삼으시어 세 단(壇)을 만들되 터를 똑같이 하고,
〈세 단(壇)의〉 남방(南方)에 단(壇)을 만들되 북향(北向)을 하고

주공(周公)이 여기에 서시어 벽(璧)을 놓고 규(珪)를 잡고는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에게 고유(告由)하였다.』

『 공(功)은 일이다. 흙을 쌓음을 단(壇)이라 하고 땅을 깨끗이 닦아 놓은 것을 선(?)이라 한다.

세 단(壇)은 세 왕(王)의 자리이니 모두 남향(南向)을 하고,

세 단(壇)의 남쪽에 별도로 한 단(壇)을 만들되 북향(北向)을 하였으니,

공(周公)이 설 자리이다. 치(植)는 둠이다.

규벽(圭璧)은 신(神)을 예우(禮遇)하는 물건이니, 《시경(詩經)》에 “규벽(圭璧)을 이미 다하였다.” 하였고,

《주례(周禮)》에 “규(圭)로 강신(降神)하여 선왕(先王)에게 제사한다.” 하였다.

주공(周公)이 두 공(公)의 점을 물리치고 스스로 자신의 일로 삼은 것은 두 공(公)이 무왕(武王)의 안부를 점침에 불과하니,

주공(周公)이 형(兄)을 사랑함이 간절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여김이 지극하여, 조(祖)•부(父)의 앞에 충성스럽고 간절하여

하문(下文)에 말한 바와 같은 것을 다할 수 없음이 있었으니, 이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일로 삼은 것이다.

또 두 공(公)이 목복(穆卜)을 하게 되면 반드시 종묘(宗廟)에 기도(祈禱)하여 조정(朝廷)에서 복서(卜筮)하는 예(禮)를 사용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상하(上下)가 떠들어서 인심(人心)이 동요된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이 종묘(宗廟)에서 하지 않고 특별히 단(壇)과 선(?)을 만들어 스스로 기도한 것이다.』

 


▣ 제5장(第五章)


『 태사(太史)가 다음과 같이 책축(冊祝)『[책(冊)에 축문(祝文)을 씀]』을 하였다.

“당신의 원손(元孫) 아무가 모질고 급한 병을 만났으니,

당신 세 왕(王)은 비자(丕子)『[원자(元子)]』의 책임이 하늘에 있으니, 저로써 아무의 몸을 대신하소서.』

『 사(史)는 태사(太史)이다.

책축(冊祝)은 지금의 축판(祝版)과 같은 따위이다. 원손모(元孫某)는 무왕(武王)이다.

구(즲)는 만남이요, 여(쪵)는 모짊이요, 학(虐)은 사나움『[급함]』이다. 비자(丕子)는 원자(元子)이다.

단(旦)은 주공(周公)의 이름이다. 무왕(武王)이 모질고 급한 병을 만났으니, 당신 세 왕(王)은 원자(元子)의 책임이 하늘에 있다.

무왕(武王)이 하늘의 원자(元子)가 되었으니, 세 왕(王)은 마땅히 그 보호할 책임을 하늘에게서 맡았으니 죽게 해서는 안되며,

만일 죽게 하고자 할진댄 자신으로써 무왕(武王)의 몸을 대신할 것을 청한 것이다.

‘우천(于天)’의 아래에 의심컨대 빠진 글이 있는 듯하다.

구설(舊說)에 “하늘이 무왕(武王)을 데려간다.”고 한 것은 옳지 않다.

하문(下文)에 “나는 아버지에게 어질어 순하며 귀신을 섬길 수 있다.”는 등의 말을 살펴보면

모두 조(祖)•부(父)의 인귀(人鬼)를 주장하여 말한 것이며, “상제(上帝)의 뜰에서 명하였다.” 하고,

“하늘의 보배로운 명(命)을 내림을 실추(失墜)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늘이 무왕(武王)을 명함이 이와 같이 크시니,

세 왕(王)이 하늘의 보배로운 명을 실추(失墜)해서는 안됨을 말한 것이니, 글 뜻을 볼 수 있다.』

『 또 살펴보건대 죽고 삶은 천명(天命)에 있는데 주공(周公)이 자신으로 무왕(武王)의 죽음을 대신하고자 하였으니, 혹자는 이를 의심한다.

이때를 당하여 천하(天下)가 아직 편안하지 못하고 왕업(王業)이 견고하지 못하니, 만일 무왕(武王)이 죽으면 종사(宗社)가 기울고 위태로우며,

생민(生民)이 도탄에 빠져 그 변고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주

공(周公)은 충성(忠誠)이 간절하고 지극하여 그 죽음을 대신하여 위급함을 풀고자 해서 그

 정신이 감동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삼왕(三王)에게 명령을 받은 것이다.

지금 세상에 필부(匹夫)•필부(匹婦)들도 한『[온]』 생각이 정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면 오히려 귀신을 감동시켜 드러나게 응험이 있는데,

하물며 주공(周公)의 원성(元聖)에 있어서랴. 이는 진실로 이러한 이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제6장(第六章)


『 나는 아버지에게 어질어 순해서 재예(材藝)가 많아 귀신을 섬길 수 있으나

원손(元孫)은 나처럼 재예(材藝)가 많이 못하여 귀신을 잘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주공(周公)이 말씀하기를 “나는 조고(祖考)에게 인순(仁順)해서 재간(材幹)이 많고 기예(技藝)가 많아

역사(役使)를 맡길 만하여 귀신을 섬길 수 있으나 무왕(武王)은 나처럼 재예(材藝)가 많지 못하여 역사(役使)를 맡기지 못하여

귀신을 섬길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재예(材藝)는 단지 일하고 사역(使役)함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 제7장(第七章)


『 상제(上帝)의 뜰에서 명(命)하여 펴서 사방(四方)을 도와 너희 자손들을 하지(下地)에 안정하게 하여

사방(四方)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게 하니, 아! 하늘이 내린 보배로운 명을 실추하지 마셔야

리 선왕(先王)들도 또한 길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있으실 것입니다.』

『 무왕(武王)이 상제(上帝)의 뜰에서 명을 받아 문덕(文德)을 펴 사방(四方)을 도와 너희 자손들을 하지(下地)에 안정시켜

사방(四方)의 백성으로 하여금 경외(敬畏)하지 않음이 없게 하니, 임무가 크고 책임이 무거워 죽을 수 없다.

러므로 탄식하고 거듭 말씀하기를 “세 왕(王)은 하늘이 내린 보배로운 명(命)을 실추(失墜)하지 말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거의 선왕(先王)의 제사(祭祀)도 길이 의뢰하여 보존될 바가 있다.”고 한 것이다.

보명(寶命)은 곧 상제(上帝)의 뜰에서 내린 명이니, 보(寶)라고 이른 것은 그 일을 중히 여긴 것이다.』

 


▣ 제8장(第八章)


『 지금 나는 원귀(元龜)가 명(命)한 것을 나아가 살펴볼 것이니,

당신이 나의 말을 허락한다면 나는 벽(璧)과 규(珪)를 가지고 돌아가 당신의 명(命)을 기다리겠지만

당신이 나의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나는 벽(璧)과 규(珪)를 감출 것입니다.”』

『 즉(卽)은 나아감이다. 돌아가 당신의 명(命)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왕(武王)이 편안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병(屛)은 감춤이니, 벽(璧)과 규(珪)를 감춘다는 것은 신(神)을 섬길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무왕(武王)이 죽으면 주(周)나라의 기업(基業)이 반드시 실추될 것이니, 비록 신(神)을 섬기려고 하더라도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爾)라 칭하고 아(我)라 칭하여 인자(人子)가 슬하(膝下)에 있으면서 그 어버이에게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이 또한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함과 그 어버이를 죽었다고 여기지 않는 뜻이니,

주공(周公)의 달효(達孝)『[누구나 공통적으로 칭찬하는 효도]』를 볼 수 있다.』

 

 
▣ 제9장(第九章)


『 세 거북을 점치니, 한결같이 길(吉)함이 거듭하므로 열쇠를 열어 점친 글을 보니, 모두 길하였다.』

『 복서(卜筮)는 반드시 세 사람을 세워 서로 참고하니, 세 거북이란 세 사람이 점친 바의 거북이다.

습(習)은 거듭이니, 세 거북의 조짐이 똑같음을 이른다. 열쇠를 열어 복조(卜兆)의 글을 보니, 모두 길(吉)하였다.』

 

 
▣ 제10장(第十章)


『 주공(周公)이 말씀하였다.

“점(占)의 체(體)는 왕(王)이 해(害)가 없을 것이니, 나 소자(小子)가 새로 세 왕(王)에게 명(命)을 받아 영원히 마침을 도모할 것이다.

이 기다리던 것이니, 여일인(予一人)『[무왕(武王)]』을 생각해 주셨다.”』

『 체(體)는 복조(卜兆)의 체이다.

복조(卜兆)의 길(吉)함을 보니, 왕(王)의 질병이 해가 없을 것이니, 내가 세 왕(王)의 명(命)을 새로 받아 영원히 마침을 도모한다고 한 것이다.

자유사(玆攸俟)는 곧 상문(上文)에 이른바 ‘돌아가 기다린다’는 것이다.

일인(一人)은 무왕(武王)이니, 세 왕(王)이 우리 무왕(武王)을 생각하여 편안하게 함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 세 왕(王)에게 새로 명(命)을 받았다고 말하고, 하늘에게 새로 명(命)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과연 하늘이 무왕(武王)을 데려 가려고 함을 말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 제11장(第十一章)
 

『 주공(周公)이 돌아가 축책(祝冊)을 금등(金¦$)의 궤 안에 넣으시니, 왕(王)이 다음날에 병이 나으셨다.』

『 책(冊)은 축책(祝冊)이다. 궤(¤#)는 복서(卜書)를 보관해 두는 궤이고, 금등(金¦$)은 쇠사슬로 묶은 것이다.

익일(翼日)은 공(公)이 돌아간 다음날이다. 추(퀁)는 나음이다.

살펴보건대 금등(金¦$)의 궤는 바로 주(周)나라 왕가(王家)에서 복서서(卜筮書)를 보관해두는 물건이니,

언제나 점을 치면 신(神)에게 고한 말을 책(冊)에 쓰고, 점이 끝나면 책(冊)을 궤에 넣어 보관하였으니, 전후(前後)에 점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전에 주공(周公)이 세 거북을 점치니 한결같이 거듭 길(吉)하므로 열쇠를 열어 글을 보았다는 것도 이 궤를 연 것이며,

뒤에 성왕(成王)이 풍뢰(風雷)의 변고를 만나 점을 치려고 하여 금등(金¦$)을 연 것도 또한 이 궤를 연 것이다.

복서(卜筮)하는 물건은 선왕(先王)이 감히 함부로 하지 않으므로 그 궤를 쇠사슬로 묶어 보관한 것이며,

주공(周公)이 처음으로 이 궤를 만들어 이 책축(冊祝)을 보관해서 후래(後來)에 자신을 해명할 계책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 제12장(第十二章)


『 무왕(武王)이 별세하시자, 관숙(管叔)은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라에 유언(流言)을 퍼뜨리기를

“공(公)이 장차 유자(孺子)『[성왕(成王)]』에게 이롭지 못하다.” 하였다.』

『 관숙(管叔)은 이름이 선(鮮)이니, 무왕(武王)의 동생이고 주공(周公)의 형(兄)이다.

여러 아우는 채숙(蔡叔) 도(度)와 곽숙(쥦叔) 처(處)이다.

유언(流言)은 근거가 없는 말이니, 물의 흐름이 저쪽으로부터 여기에 이름과 같은 것이다.

유자(孺子)는 성왕(成王)이다. 상(商)나라 사람들은 형(兄)이 죽으면 아우가 즉위(卽位)한 자가 많았다.

무왕(武王)이 붕(崩)하고 성왕(成王)이 어려 주공(周公)이 섭정(攝政)하자, 상(商)나라 사람들이 진실로 이미 이것을 의심하였으며,

또 관숙(管叔)은 주공(周公)에게 형이 되므로 더더욱 〈왕위(王位)를〉 넘보았다.

그러므로 무경(武庚)과 관숙(管叔)•채숙(蔡叔)이 나라에 유언(流言)을 퍼뜨려 성왕(成王)을 위태롭게 만들고 두렵게 하여 주공(周公)을 동요시킨 것이다. 사관(史官)이 관숙(管叔)이 여러 아우들과 함께 했다고 말하고 무경(武庚)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삼숙(三叔)『[세 아우인 관숙(管叔)•채숙(蔡叔)•곽숙(쥦叔)]』의 죄(罪)를 깊이 나타내려 한 것이다.』

 


▣ 제13장(第十三章)


『 주공(周公)이 두 공(公)에게 고하기를 “내가 피하지 않으면 나는 우리 선왕(先王)에게 고할 수 없다.” 하셨다.』

『 피(µ?)는 피(避)로 읽는다.

정씨(鄭氏)의 《시전(詩傳)》에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유언(流言) 때문에

동도(東都)『[낙양(洛陽)]』에 피하여 거하였다.”는 것이 이것이다.

한(漢)나라 공씨(孔氏)는 “관숙(管叔)에게 형벌(刑罰)을 이루었다는 피(µ?)이다.” 하였으니, 주살(誅殺)함을 이른다.

삼숙(三叔)이 유언(流言)을 퍼뜨리기를 “공(公)이 장차 성왕(成王)에게 이롭지 못하다.” 하였으니,

공(周公)이 어찌 대번에 군대를 일으켜 주벌(誅罰)할 수 있었겠는가.

또 이때에 왕(王)이 막 공(公)을 의심하고 있었으니, 공(公)이 장차 왕(王)에게 청하여 주벌(誅罰)할 수 있었겠는가.

장차 스스로 주벌(誅罰)하였을 것이니, 청하였다면 왕(王)이 반드시 따르지 않았을 것이요,

청하지 않고 스스로 주벌(誅罰)하였다면 또한 〈훌륭한〉 주공(周公)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피하지 않으면 나는 우리 선왕(先王)에게 고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피하지 않으면 의리에 다하지 못한 바가 있어 지하(地下)에서 선왕(先王)에게 고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공(公)이 어찌 스스로 자신을 위한 계책을 하였겠는가. 또한 그 충성을 다할 뿐이다.』


 

▣ 제14장(第十四章)


『 주공(周公)이 동쪽에 거한 지 2년에 죄인(罪人)을 이에 얻었다.』

『 동쪽에 거함은 나라의 동쪽에 거한 것이다.

정씨(鄭氏)가 “동도(東都)에 피하여 거했다.” 한 것은 무엇을 근거하였는지 알 수 없다.

공씨(孔氏)는 동쪽에 거한 것을 동정(東征)이라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유언(流言)이 일어날 때를 당해서는 성왕(成王)이 죄인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2

년 뒤에 왕(王)이 비로소 유언(流言)을 퍼뜨린 것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임을 안 것이다. 이에 얻었다는 것은 더디게 여긴 말이다.』

 

 
▣ 제15장(第十五章)


『 뒤에 주공(周公)이 시(詩)를 지어 왕(王)에게 드리고 이름하기를 ‘치효(´(Î)’라 하니, 왕(王)이 또한 주공(周公)을 꾸짖지 못하였다.』

『 치효()『[올빼미]』는 나쁜 새이니, 딴 새의 둥지를 부수고 알을 가져감으로써

무경(武庚)이 관숙(管叔)•채숙(蔡叔)과 왕실(王室)을 무너뜨림을 비유한 것이다.

초(쿓)는 꾸짖음이다. 상문(上文)에 죄인을 이에 얻었다고 말하였으니, 이때에 성왕(成王)의 의심이 이미 10에 4∼5가 제거된 것이다.』

 


▣ 제16장(第十六章)


『 가을에 곡식이 크게 성숙하여 아직 수확하지 않았는데 하늘이 크게 천둥번개를 치고 바람이 부니,

벼가 모두 쓰러지고 큰 나무가 뽑히므로 나라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왕(王)이 대부(大夫)들과 모두 변(弁)을 쓰고서 금등(金¦$)의 글을 열어 마침내 주공(周公)이 스스로 자신의 일로 삼아

무왕(武王)을 대신하려던 말씀을 얻게 되었다.』

『 왕(王)이 대부(大夫)들과 모두 변(弁)을 쓰고서 금등(金¦$)의 글을 열어 장차 하늘의 변고를 점치려 하다가

우연히 주공(周公)이 책축(冊祝)에 명(命)을 청한 말씀을 얻은 것이다.

공씨(孔氏)는 “두 공(公)『[태공(太公)과 소공(召公)]』이 왕(王)을 창도하여 열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옳지 않다.

살펴보건대 ‘추대숙(秋大熟)’이 ‘이년(二年)’의 뒤에 연결되어 있으니,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맞이하여 돌아옴이 2년 가을인 것이다.

동산(東山)〉의 시(詩)에 “내가 보지 못한 지가 지금 3년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동쪽에 거한 것이 동정(東征)이 아님이 분명하다.

주공(周公)이 동쪽에 거한 지 2년에 성왕(成王)이 풍뢰(風雷)의 변고로 인하여 친히 맞이해 돌아오자,

삼숙(三叔)이 유언(流言)을 퍼뜨린 죄를 품고 마침내 무경(武庚)을 위협하여 배반하므로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명하여 정벌하였으니,

동정(東征)하기 위하여 가고 온 수미(首尾)가 또 따로 3년인 것이다.』

 


▣ 제17장(第十七章)


『 두 공(公)과 왕(王)이 여러 사관(史官)과 백집사(百執事)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실입니다.

아! 주공(周公)의 명령이시므로 저희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 주공(周公)이 무왕(武王)의 질병을 점친 것을 두 공(公)이 반드시 모른 것은 아니나

주공(周公)의 책축(冊祝)의 글은 두 공(公)이 아마도 알지 못한 듯하다.

제사(諸史)와 백집사(百執事)는 복서(卜筮)하는 일을 집행하는 사람들이다.

성왕(成王)이 하늘의 변고를 점치게 한 자들은 바로 전일(前日)에 주공(周公)이 무왕(武王)의 병을 점치게 했던 자들이었다.

두 공(公)과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이 스스로 자신의 일로 삼은 말씀을 얻고는 인하여 물었다.

그러므로 모두 이르기를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고는

이윽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는 실로 주공(周公)의 명령이신데 저희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하였으니,

공씨(孔氏)가 “주공(周公)이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 제18장(第十八章)


『 왕(王)이 책축(冊祝)한 글을 잡고 울며 말씀하기를 “목복(穆卜)을 할 것이 없다.

옛날에 공(公)이 우리 왕가(王家)에 근로(勤勞)하셨으나 나 충인(沖人)『[어린 사람]』이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하늘이 위엄을 동하여 주공(周公)의 덕(德)을 밝히시니,

나 소자(小子)가 친히 공(公)을 맞이함이 우리 국가(國家)의 예(禮)에 또한 마땅하다.” 하시고』

『 신(新)은 마땅히 친(親)이 되어야 한다.

성왕(成王)이 금등(金¦$)의 글을 열어 하늘의 변고를 점치려고 하다가 주공(周公)이 책축(冊祝)한 글을 얻고는

마침내 감오(感悟)하여 글을 잡고 울며 말씀하기를 “굳이 다시 점칠 것이 없다.

옛날에 주공(周公)이 왕실(王室)에 근로(勤勞)하셨으나 내 어려서 미처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하늘이 위엄을 동하여 주공(周公)의 덕(德)을 밝히시니,

나 소자(小子)가 친히 공(公)을 맞이하여 돌아옴이 국가(國家)의 예(禮)에 또한 마땅하다.” 하였다.

정씨(鄭氏)의 《시전(詩傳)》에 “성왕(成王)이 이미 금등(金¦$)의 글을 얻고는 주공(周公)을 친히 맞이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정씨(鄭氏)의 학문은 복생(伏生)에게서 나왔고 이 편(篇)은 복생(伏生)이 전한 것이니, 마땅히 친(親)을 바른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친(親)을 잘못 신(新)으로 쓴 것은 바로 《대학(大學)》에 신(新)을 잘못 친(親)으로 쓴 것과 같다.』

 

 

▣ 제19장(第十九章)


『 왕(王)이 교외(郊外)로 나가자, 하늘이 비를 내려 바람을 반대로 불게 하니, 쓰러졌던 벼가 모두 일어났다.

두 공(公)이 나라 사람들에게 명하여 큰 나무가 쓰러진 것을 모두 일으켜 단단히 다지니, 세(歲)『[곡식]』가 크게 성숙하였다.』

『 국외(國外)를 교(郊)라 한다. 왕(王)이 교외(郊外)를 나간 것은 성왕(成王)이 직접 가서 주공(周公)을 맞이한 것이니,

곧 상문(上文)에 이른바 ‘친히 맞이한다’는 것이다.

하늘이 바람을 반대로 불게 하여 감응함이 이와 같이 신속하니, 〈홍범(洪範)〉의 서징(庶徵)을 누가 믿을 수 없다고 말하겠는가.』

『 또 살펴보건대 무왕(武王)이 병이 나은 지 4년에 붕(崩)하였고,

여러 숙(叔)들이 유언(流言)을 퍼뜨려 주공(周公)이 동쪽에 거한 지 2년에 죄인(罪人)을 얻었고,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맞이하여 돌아왔으니, 모두 6년의 일이다.

책을 엮는 자가 〈금등(金¦$)〉의 끝에 이것을 붙여 명(命)을 청한 일의 수말(首末)과 금등(金¦$)의 글이 드러나고 감춰짐을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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