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주서-무일(無逸)


 

▣ 무일(無逸)

 

『逸者는 人君之大戒니 自古有國家者 未有不以勤而興하고 以逸而廢也라

益이 戒舜曰 罔遊于逸하며 罔淫于樂이라하니 舜은 大聖也로되

益이 猶以是戒之하니 則時君世主 其可忽哉아 成王初政에 周公이 懼其知逸而不知無逸也라

故로 作是書以訓之하시니라 言則古昔하고 必稱商王者는 時之近也요 必稱先王者는 王之親也요

擧三宗者는 繼世之君也요 詳文祖者는 耳目之所逮也라

上自天命精微로 下至죻畝艱難, 閭里怨詛히 無不具載하니 豈獨成王之所當知哉리오 實天下萬世人主之龜鑑也라

是篇은 凡七更端에 周公이 皆以嗚呼發之하사 深嗟永歎하시니 其意深遠矣라 亦訓體也니 今文古文皆有하니라』

 

『 편안함은 인군의 큰 경계이니, 예로부터 국가를 소유한 자가 부지런함으로써 일어나고 편안함으로써 폐하지 않은 자가 있지 않다.

익(益)이 순(舜)을 경계하기를 “편안함에 놀지 말며 즐거움에 빠지지 말라.” 하였으니,

순(舜)은 큰 성인(聖人)인데도 익(益)이 오히려 이 말로 경계하였으니, 시군(時君)과 세주(世主)가 이것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성왕(成王)이 처음 정사를 다스리자,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이 그 편안함만 알고 편안하지 말아야 함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므로 이 글을 지어 훈계한 것이다.

말할 때마다 옛것을 말하고 반드시 상(商)나라 왕(王)을 칭한 것은 시대가 가깝기 때문이요, 반드시 선왕(先王)을 칭한 것은 왕의 어버이이기 때문이며,

삼종(三宗)『[은(殷)의 중종(中宗)•고종(高宗)•조갑(祖甲)을 가리킴]』을 든 것은 대를 이은 임금이기 때문이요,

문조(文祖)『[문왕(文王)]』를 자세히 말한 것은 이목(耳目)이 미친 바이기 때문이다.

위로는 천명(天命)의 정미함으로부터 아래로는 밭두둑의 어려움과 여리(閭里)의 원망하고 꾸짖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재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어찌 홀로 성왕(成王)만이 알아야 할 것이겠는가. 실로 천하(天下) 만세(萬世)에 인주(人主)의 귀감이다.

이 편(篇)은 무릇 일곱 번 단서를 바꿨는데, 주공(周公)이 모두 ‘오호(嗚呼)’로써 발하여 깊이 슬퍼하고 길이 탄식하였으니, 그 뜻이 심원하다.

이 또한 훈체(訓體)이니,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에 모두 있다.』

 


 

▣ 제1장(第一章)

 

『 주공(周公)이 말씀하였다. “아! 군자는 무일(無逸)『[안일(安逸)하지 않음]』을 처소로 삼습니다.』 

『 소(所)는 처소와 같으니, 군자(君子)는 무일(無逸)을 처소로 삼아 동하고 고요하고 먹고 그침이 여기에 있지 않음이 없으니,

하던 것을 중지하면 이른바 소(所)가 아니다.』

 

 
 

▣ 제2장(第二章)

 

『 먼저 가색(稼穡)『[농사일]』의 어려움을 알고 편안하면 소인(小人)『[백성]』들의 의지함을 알 것입니다.』

『 먼저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알고 편안하다는 것은 부지런함으로써 편안함에 거하는 것이다.

의(依)는 가색(稼穡)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소민(小民)들이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농부가 밭에 의지함은 물고기가 물에 의지하고 나무가 흙에 의지함과 같으니,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죽고 나무는 흙이 없으면 마르며, 백성은 농사가 아니면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순(舜)은 밭갈고 심음으로부터 황제가 됨에 이르렀고,

우(禹)와 직(稷)은 몸소 농사지어 천하(天下)를 소유하였고, 문왕(文王)•무왕(武王)의 기업은 후직(后稷)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사민(四民)『[사(士)•농(農)•공(工)•상(商)]』의 일은 농사보다 수고로운 것이 없고, 생민(生民)의 공은 농사보다 더 성대한 것이 없다.

주공(周公)이 무일(無逸)의 교훈을 말씀할 적에 먼저 이것을 언급하였으니, 이는 이런 까닭이 있을 것이다.』

 

 
 

▣ 제3장(第三章)

 

『 소인(小人)들을 살펴보면 그 부모(父母)가 가색(稼穡)에 근로하거든 그 자식들은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안일하고 속된 말을 하며 허탄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그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들음도 없고 앎도 없다’고 합니다.”』

『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안일하다는 것은 편안함을 편안함으로 삼는 것이다. 상말을 언(諺)이라 한다.

소민(小民)들을 살펴보면 부모(父母)가 가색(稼穡)에 근로하거든 그 자식들은 환양(턣養)『[편안히 길러줌]』에 생장하여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방종하고 안일하여 스스로 방자하고, 시골의 비루한 말을 익히며, 이미 또 허탄하고 망령되어 이르지 않는 바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또 그 부모(父母)를 꾸짖고 업신여기기를

“옛날 늙은 사람들은 문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다만 스스로 노고하여 스스로 편안히 할 줄을 모른다.”고 말한다.

옛날에 유유(劉裕)가 농무(農畝)에서 분발하여 강좌(江左)『[강동(江東)]』를 취하였는데,

한두번 전한 뒤에는 자손들이 그 의복과 사용하는 물건을 보고는 도리어 비웃으며 말하기를

“전사옹(田舍翁)『[늙은 농부]』은 이것만 누려도 또한 과(過)하다.” 하였으니, 이는 바로 이른바 ‘옛날 사람들은 문견도 없고 앎도 없다.’는 것이다.

만일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공류(公劉)와 후직(后稷)을 전사옹(田舍翁)이라고 말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 제4장(第四章)

 

『 주공(周公)이 말씀하였다 “아! 제가 듣자오니,

옛날 은왕(殷王) 중종(中宗)에 있어 엄숙하고 공손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천명(天命)으로 스스로 다스리며,

백성을 다스림에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황녕(荒寧)『[게으르고 편안함]』하지 않으시니,

그러므로 중종의 향국(享國)『[왕위를 누림]』이 75년이었습니다.』

『 중종(中宗)은 태무(太戊)이다. 엄하면 장중(莊重)하고 공손하면 겸억(謙抑)하고 공경하면 흠숙(欽肅)하고 두려워하면 계구(戒懼)한다.

천명(天命)은 곧 천리(天理)이다. 중종(中宗)이 엄공(嚴恭)하고 인외(寅畏)하여 천리(天理)로써 스스로 그 몸을 검속하고 다스렸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즈음에 이르러도 또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게으르고 편안하지 않으시니, 중종(中宗)의 무일(無逸)의 실제가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향국을 오래한 효험이 있었던 것이다.

살펴보건대 서서(書序)에 “태무(太戊)는 〈원명(原命)〉•〈함예(咸乂)〉 등의 편이 있다.” 하였으니,

짐작컨대 그 당시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다스린 일을 기술한 듯하나 지금은 상고할 수 없다.』

 

 
 

▣ 제5장(第五章)

 

『 고종(高宗) 때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밖에서 수고로워 이에 소인(小人)들과 함께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어나 즉위하시어 곧 양암(亮陰)에서 3년 동안 말씀하지 않았으나 말씀하면 화(和)하였으며,

감히 황녕(荒寧)하지 아니하여 은(殷)나라를 아름답게 하고 안정시켜 작고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이에 혹시라도 원망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종(高宗)의 향국(享國)이 59년이었습니다.』

『 고종(高宗)은 무정(武丁)이니, 즉위하지 않았을 때에 아버지 소을(小乙)이 오랫동안 민간에 거하여 소민(小民)들과 함께 출입하며 일을 같이 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소민(小民)들의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골고루 알게 되었다.

옹(雍)은 화함이니, 말을 발함에 화순(和順)하여 이치에 마땅한 것이다.

가(嘉)는 아름다움이요 정(靖)은 편안함이니, 가정(嘉靖)은 예악(禮樂)과 교화(敎化)가 편안히 살고 생업을 즐기는 가운데 성대한 것이다.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백성들과 함께 휴식하였으니, 정(靖)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하나 가(嘉)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

소대(小大)가 이에 혹시라도 원망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만민(萬民)이 모두 화합한 것이다.

내옹(乃雍)은 화함이 몸에 발한 것이요, 가정(嘉靖)은 화함이 정사에 발한 것이요, 원망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화함이 백성들에게 드러난 것이다.

나머지는 〈설명(說命)〉에 보인다. 고종(高宗)의 무일(無逸)의 실제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또한 향국(享國)을 오래한 효험이 있었던 것이다.』

 

 
 

▣ 제6장(第六章)

 

『 조갑(祖甲)에 있어서는 왕(王)노릇하는 것이 의롭지 않다 하여 오랫동안 소인(小人)『[서민(庶民)]』이 되었었는데,

일어나 즉위하여서는 이에 소인들의 의지함을 알아 서민들을 보혜(保惠)『[보호하고 은혜롭게 함]』하였으며, 감히 환과(鰥寡)들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조갑(祖甲)의 향국(享國)이 33년이었습니다.』

『 《사기(史記)》에 “고종(高宗)이 죽음에 아들 조경(祖庚)이 즉위하고,

조경(祖庚)이 죽음에 동생 조갑(祖甲)이 즉위했다.” 하였으니, 조갑(祖甲)은 고종(高宗)의 아들이고 조경(祖庚)의 아우이다.

정현(鄭玄)은 말하기를 “고종(高宗)이 조경(祖庚)을 폐위하고 조갑(祖甲)을 세우고자 하니, 조갑(祖甲)은 이것이 의롭지 않다 하여 민간으로 도망하였다.

그러므로 왕(王)노릇 하는 것이 의롭지 않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한(漢)나라 공씨(孔氏)는 조갑(祖甲)을 태갑(太甲)이라 하였으니, 이는 《국어(國語)》에 “제갑(帝甲)이 혼란하여 7대에 죽었다.” 하였는데,

공씨(孔氏)는 이러한 것들을 기재한 것을 보고는 생각하기를 “제갑(帝甲)은 반드시 주공(周公)이 칭한 자가 아닐 것이며,

또 ‘불의유왕(不義惟王)’이 〈태갑(太甲)〉의 ‘자내불의(玆乃不義)’라는 글과 유사하다.” 하여, 마침내 여기에 칭한 조갑(祖甲)을 태갑(太甲)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장(章)의 “오랫동안 소인이 되었었는데 일어나 즉위하였다.”는 말과

상장(上章)에 “이에 소인들과 함께 행동하다가 일어나 즉위하였다.”는 말을 살펴보면 문세(文勢)가 바로 유사하니,

이른바 ‘소인(小人)’은 모두 지위가 미천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요, 마음이 험하고 작은 사람을 말한 것이 아니며,

‘작기즉위(作其卽位)’도 또한 태갑(太甲)이 정사를 되돌려받아 떳떳함을 생각한 뜻을 볼 수 없다.』

『 또 살펴보건대, 소자(邵子)『[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고종(高宗)은 59년, 조경(祖庚)은 7년, 조갑(祖甲)은 33년이다.” 하여,

세차(世次)와 역년(歷年)이 모두 《서경(書經)》과 부합하는데, 또한 태갑(太甲)을 조갑(祖甲)이라 하지 않았다.

더구나 은(殷)나라 왕(王) 29세(世) 중에 갑(甲)으로 이름한 자가 다섯 임금인데,

태(太)•소(小)•옥(沃)•양(陽)•조(祖)로 구별하였으니, 마땅히 두 사람을 모두 조갑(祖甲)이라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어(國語)》는 잘못된 것을 그대로 전하고 오류를 계승하였으며 잘못된 말을 널리 기록하여 다 믿을 수 없으니,

요컨대 주공(周公)의 말씀을 바른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 하문(下文)에 주공(周公)이 “은왕(殷王) 중종(中宗)으로부터 고종(高宗)과 조갑(祖甲)과 우리 주문왕(周文王)에 이르기까지”라고 말씀하였으니,

급(及)이란 말은 그 선후의 차례를 따라 낱낱이 열거하는 말이니, 조갑(祖甲)이 조갑(祖甲)이 되고 태갑(太甲)이 아님이 분명하다.』

 

 
 

▣ 제7장(第七章)
 

『 이로부터 그 뒤로 즉위하는 왕(王)들이 태어나면 편안하였으니, 태어나면 편안하였기 때문에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며,

소인들의 수고로움을 듣지 못하고 오직 탐락(耽樂)을 따랐습니다.

이로부터 그 뒤로 또한 능히 장수한 이가 없어 혹은 10년, 혹은 7∼8년, 혹은 5∼6년, 혹은 3∼4년이었습니다.”』

『 지나치게 즐김을 탐(耽)이라 한다.

범연히 말하기를 삼종(三宗)『[중종(中宗)•고종(高宗)•조갑(祖甲)]』의 뒤로 부터 군위(君位)에 오른 자들이 태어나면 편안하여

가색(稼穡)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서민들의 수고로움을 듣지 못하고는 오직 탐락(耽樂)을 따라 성명(性命)을 해치고 생명을 상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삼종(三宗)의 뒤로는 또한 능히 수고(壽考)한 이가 없어서 오랜 자는 10년, 7∼8년에 불과하고, 짧은 자는 5∼6년, 3∼4년일 뿐이었으니,

탐락(耽樂)이 심하면 심할수록 향년(享年)이 더욱 촉박한 것이다.

무릇 사람들이 장수하기를 바라고 요절함을 싫어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 편(篇)은 오직 향년(享年)의 길고 길지 않음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이는 그 바라는 바를 열어주고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바를 금한 것이다.』

 

 


 

▣ 제8장(第八章)

 

『 주공(周公)이 말씀하였다. “아! 그 또한 우리 주(周)나라에서도 태왕(太王)과 왕계(王季)께서 능히 스스로 억제하고 두려워하셨습니다.』

『 상(商)나라는 오히려 딴 세대이므로 또 우리 주(周)나라의 선왕(先王)을 가지고 고한 것이다.

태왕(太王)과 왕계(王季)가 능히 스스로 겸억(謙抑)하고 근외(謹畏)했다고 말한 것은

장차 문왕(文王)의 무일(無逸)을 논하려 하였으므로 먼저 그 원류(源流)의 깊고 긺을 서술한 것이다.

대저 억외(抑畏)는 무일(無逸)의 근본이니, 종사(縱肆)하고 태황(怠荒)함은 모두 자랑하고 기탄함이 없는 자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문(下文)에 문왕(文王)을 말할 때에 유(柔)라 하고 공(恭)이라 하고 불감(不敢)이라 말했으니,

이는 모두 태왕(太王)과 왕계(王季)의 억외(抑畏)하는 마음을 근원하여 말한 것이다.』

 

 
 

▣ 제9장(第九章)

 

『 문왕(文王)께서 나쁜 의복으로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과 농사일에 나아가셨습니다.』

『 비복(卑服)은 우왕(禹王)이 말씀한 ‘나쁜 의복’과 같은 것이다.

강공(康功)은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이고, 전공(田功)은 백성을 기르는 일이다.

문왕(文王)이 의복을 받듦에 있어서는 생각하는 바가 있지 않고, 이 백성을 편안히 기름에 전념하였다.

나쁜 의복은 한 가지를 들어 말한 것이니, 궁실과 음식에 있어서 스스로 받들기를 박하게 하였음을 모두 유추할 수 있다.』

 

 
 

▣ 제10장(第十章)

 

『 아름답게 부드럽고 아름답게 공손하시어 소민(小民)들을 품어 보호하시며, 환과(鰥寡)들에게 은혜를 입혀서 생기가 나게 하시어,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와 해가 기울 때에 이르도록 한가히 밥먹을 겨를도 없으시어 만민(萬民)들을 모두 화합하게 하셨습니다.』 

『 휘(徽)와 의(懿)는 모두 아름다움이다. 측(퀣)은 해가 기우는 것이다.

부드러움을 아름답다고 일렀으면 유약『[나약]』함의 유(柔)가 아니요, 공손함을 아름답다고 일렀으면 주공(足恭)『[지나친 공손]』의 공(恭)이 아니다.

문왕(文王)은 부드럽고 공손한 덕(德)이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의 성함을 지극히 하였다.

그리하여 화하고 평이하여 백성들을 가까이 해서 소민들은 품어 보호해주고 환과(鰥寡)들에게는 은혜를 입혀 생기가 나게 하였다.

혜선(惠鮮)이라고 말한 것은 환과(鰥寡)의 사람들이 머리를 떨구고 기운을 잃고 있는데, 물건을 주고 구휼하여 살 뜻이 있게 한 것이다.

아침으로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에 이르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로부터 해가 기울 때에 이르기까지 밥 한 끼 먹는 시간도 한가한 겨를이 없어

모두 만민을 화합하여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는 이가 없게 하고자 한 것이다.

문왕(文王)은 마음이 백성들에게 있어 스스로 근로『[노고]』함을 알지 못함이 이와 같으셨으니,

어찌 진(秦)나라 시황(始皇)이 형석(衡石)『[저울]』으로 결재하는 문서를 달고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위사(衛士)들을 시켜 밥을 날라 오게 하여 유사(有司)들의 임무를 대신한 자의 행위이겠는가.』

『 〈입정(立政)〉에 “여러 말과 여러 옥사와 여러 삼갈 바를 겸한 바가 없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은 또 일을 일삼은 것이 없는 듯하다. 〈무일(無逸)〉을 잃지 않으면 문왕(文王)의 수고로움을 알 수 없고,

〈입정(立政)〉을 읽지 않으면 문왕(文王)의 편안함을 알 수 없으니, 이 두 글을 합하여 보면 문왕(文王)이 종사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제11장(第十一章)


『 문왕(文王)이 감히 유람과 사냥을 편안히 여기지 아니하여 여러 나라의 정부(正賦)로 바치는 것만을 받으시니,

문왕(文王)이 천명(天命)을 받은 것이 중신(中身)『[중년]』이었는데 향국(享國)이 50년이었습니다.”』

『 유람과 사냥은 나라에 일정한 제도가 있으니, 문왕(文王)은 감히 편안히 놀고 법도가 없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위로 함부로 낭비하지 않기 때문에 아래로 지나치게 취함이 없어서 여러 나라에서 정부(正賦)로 바치는 것만을 받아

떳떳한 공물(貢物)의 정수(正數) 이외에 멋대로 걷음이 없었던 것이다. 서방(庶邦)이라고 말했으면 백성을 알 수 있다.

문왕(文王)은 서백(西伯)이 되어 거느리고 있는 여러 나라가 모두 떳떳한 바침이 있었으니,

《춘추(春秋)》에서 패주(覇主)에게 물건을 바쳤던 것을 반반(班班)히 볼 수 있으며,

당(唐)나라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송사(送使)의 제도가 있었으니, 제후들이 방백(方伯)에게 물건을 바친 지가 오래되었다.

명을 받았다는 것은 제후가 됨을 말한 것이다.

중신(中身)은 한(漢)나라 공씨(孔氏)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97세에 별세하였으니,

즉위할 때의 나이가 47세였다.” 하였으니, 중신(中身)이라고 말한 것은 완전한 수(數)를 든 것이다.

상문(上文)에 검소함을 숭상하고 고아와 외로운 자들을 구휼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고 유일(遊佚)을 경계한 것은 모두 문왕(文王)의 무일(無逸)의 실제였다.

그러므로 그 향국(享國)이 역년(歷年)의 오램이 있었던 것이다.』

 

 
 

▣ 제12장(第十二章)

 

『 주공(周公)이 말씀하였다.

“아! 지금으로부터 이어서 사왕(嗣王)께서는 그 구경과 편안함과 유람과 사냥을 지나치게 하지 않으신 것을 본받으시어 만민(萬民)의 올바른 바침만을 받으소서.』

『 칙(則)은 본받음이다. 기(其)는 문왕(文王)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음(淫)은 지나침이다.

금일로부터 이왕(以往)『[이후]』으로 사왕(嗣王)은 문왕(文王)이 구경과 편안함과 유람과 사냥을 지나치게 하지 않으신 것을 본받아

만민(萬民)이 정부(正賦)로 바치는 것만을 받으라고 한 것이다.

상문(上文)에 유전(遊田)을 말하고 관일(觀逸)을 말하지 않은 것은 큰 것으로 작은 것을 포함한 것이며,

서방(庶邦)을 말하고 만민(萬民)을 말하지 않은 것은 먼 것으로 가까운 것을 나타낸 것이다.』

 

 
 

▣ 제13장(第十三章)
 

『 한가히 여겨 ‘오늘에만 탐락한다’고 말씀하지 마소서.

이는 백성들이 본받을 바가 아니며, 하늘이 순하게 여기는 바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임금의 잘못을 크게 본받을 것이니, 은왕(殷王) 수(受)가 미란(迷亂)했던 것과 같이 해서 주덕(酒德)에 빠지지 마소서.”』

『 무(無)는 무(毋)와 통하고 황(皇)은 황(遑)과 통한다.

훈(訓)은 본받음이요, 약(若)은 순함이요, 칙(則)은 본받음이다.

스스로 너그럽고 한가하게 말하기를 “오늘만 우선 이 탐락을 한다.”고 하지 말라.

하룻동안 탐락(耽樂)하는 것이 진실로 해롭지 않을 듯하나 아래로는 백성들이 본받을 바가 아니요 위로는 하늘이 순하게 여기는 바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 잘못된 행실을 크게 본받을 것이니, 상(商)나라 사람들이 수(受)에게 화(化)하여 술마시는 것을 숭상하는 유(類)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뒤이어 말씀하기를 “상왕(商王) 수(受)가 침미(沈迷)한 것과 같이 하여 주덕(酒德)에 빠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술에 빠짐을 덕(德)이라고 말한 것은 덕(德)은 흉함이 있고 길함이 있으니,

한자(韓子)『[한유(韓愈)]』의 이른바 “도(道)와 덕(德)은 빈자리가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

 

 
 

▣ 제14장(第十四章)


『 주공(周公)이 말씀하였다. “아! 내 듣자오니,

옛날 사람들은 오히려 서로 훈계하고 고하며 서로 보호하고 순히 하며 서로 가르쳤으므로 백성들이 혹 서로 속이거나 과장하여 환(幻)을 하지 않았습니다.』

『 서(胥)는 서로이며, 훈(訓)은 경계함이며, 혜(惠)는 순함이며, 주(?)는 속임이며, 장(張)은 허탄함이다.

명칭을 변하고 실제를 바꾸어 보는 자를 속이는 것을 환(幻)이라 한다.

탄식하여 말씀하기를 “옛사람들은 덕업(德業)이 이미 성하였으나 그 신하들이 오히려 서로 더불어 경계하고 고하며

서로 더불어 보호하고 순히 하며 서로 더불어 가르쳤으니, 보혜(保惠)라는 것은 보호하여 기르고 받들어 순종함이니 다만 경계하고 고할 뿐만이 아니며,

교회(敎誨)는 바로잡고 성취하는 뜻이 있으니 또 단지 보호하고 순히 할 뿐만이 아니다.

이와 같았기 때문에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가리운 바가 없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취하고 주는 것이 분명하여 어그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의 백성들이 혹시라도 감히 속이고 허탄하여 환(幻)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제15장(第十五章)

 

『 〈내가 위에서 말씀드린〉 이러한 말씀을 듣지 않으시면 사람들이 이것을 본받아서 선왕(先王)의 올바른 법을 변란시켜 작은 일이나 큰 일에 이를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렇지 않으면 그 마음이 어기고 원망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입으로 저주할 것입니다.”』

『 정형(正刑)은 바른 법이다. 성왕(成王)이 상문(上文)의 고인(古人)들이 서로 훈고(訓告)하고 보혜(保惠)하고 교회(敎誨)한 일에 대하여

들어주어 믿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것을 본받아서 군신과 상하가 법도가 아닌 것을 스승으로 본받아 반드시 선왕(先王)의 바른 법을 변란시켜

작은 일이나 큰 일 할것 없이 모두 취하여 어지럽게 변경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선왕(先王)의 법은 백성들에게는 심히 편하나 방종하고 사치한 군주에게는 매우 불편하니,

예를 들면 형벌을 줄여 백성들의 목숨을 중히 함은 백성들이 편하게 여기는 바이나 잔혹한 군주는 반드시 이것을 변란시키며,

부역과 세금을 적게 거두어 민생을 후하게 함은 백성들이 편하게 여기는 바이나 탐욕스럽고 사치한 군주는 반드시 변란시킨다.

그 마음이 어기고 원망하는 것은 원망이 가슴속에 쌓이는 것이요, 그 입으로 저주하는 것은 원망이 밖에 나타나는 것이니,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서 백성들이 마음과 입으로 서로 원망하게 한다면 그 나라가 위태롭지 않은 경우가 있지 않다.

이는 치(治)와 난(亂), 존(存)과 망(亡)의 기틀이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이 간곡히 말씀한 것이다.』

 

 
 

▣ 제16장(第十六章)

 

『 주공(周公)이 말씀하였다.

“아! 은왕(殷王) 중종(中宗)으로부터 고종(高宗)과 조갑(祖甲)과 우리 주문왕(周文王)에 이르기까지 이 네 분이 명철한 지혜를 실천하였습니다.』

『 적(迪)은 밟음『[실천]』이요, 철(哲)은 지혜이다. 맹자(孟子)는 알고 떠나가지 않음을 지(智)의 실제라고 하였으니,

적(迪)이란 말은 이른바 ‘떠나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인주(人主)가 소인들의 의지함을 아나 혹 분려(忿戾)하는 것은 그 앎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인데,

오직 중종(中宗)•고종(高宗)•조갑(祖甲)•문왕(文王)은 진실로 그 앎을 실천하였다.

그러므로 주공(周公)이 적철(迪哲)이란 말로 칭한 것이다.』

 

 
 

▣ 제17장(第十七章)

 

『 그 혹시라도 고하기를 ‘소인들이 너를 원망하고 너를 꾸짖는다’ 하거든 크게 스스로 덕(德)을 공경하여 원망하는 잘못을 짐의 잘못이라 하소서.

진실로 이와 같이 하면 백성들이 감히 노여움을 감추지 않을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 매(폷)는 꾸짖는 말이다. 그 혹시라도 고하기를 “소인들이 너를 원망하고 너를 꾸짖는다.”고 하는 자가 있거든

너는 크게 스스로 덕(德)을 공경하여 자신에게 돌이켜 남을 원망하지 말고,

무훼(誣毁)『[무함하고 훼방함]』하는 허물을 편안히 받아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라고 하라.

윤약시(允若時)는 진실로 이와 같이 할 것이요, 단지 은인(隱忍)하여 노여움을 감추지 않을 뿐만이 아닌 것이다.

삼종(三宗)과 문왕(文王)은 소민(小民)의 의지함에 대하여 마음에 진실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인들의 잘못된 말을 책할 겨를이 없었고, 우선 인하여 내 자신이 지극하지 못함을 살펴 원망하고 꾸짖는 말을 즐겁게 들은 것이니,

이 어찌 다만 은인(隱忍)하여 노여움을 감추고 발하지 않음에 그칠 뿐이겠는가.』

 


 

▣ 제18장(第十八章)
 

『 이러한 말씀을 듣지 않으시면 사람들이 혹 속이고 과장하여 환(幻)을 하여 말하기를 ‘소인들이 너를 원망하고 너를 꾸짖는다.’ 하거든

그 말을 그대로 믿을 것이니, 이와 같으면 군주된 도리를 길이 생각하지 않고 그 마음을 너그럽게 하지 아니하여,

죄없는 사람들을 어지럽게 형벌하고 무고한 자들을 죽일 것이니, 이렇게 되면 원망이 함께 모여 그 몸에 총집(叢集)될 것입니다.”』

『 작(綽)은 큼이요, 총(叢)은 모임이다.

성왕(成王)이 상문(上文)의 삼종(三宗)과 문왕(文王)의 적철(迪哲)한 일에 대하여 즐겨 듣고 믿으려 하지 않으면

소인들이 혹 속이고 허탄하여 허실을 바꿔 말하기를 “소민(小民)들이 너를 원망하고 너를 꾸짖는다.” 하거든 너는 그 말을 그대로 듣고 믿을 것이니,

이와 같으면 군주가 된 도리를 길이 생각하지 않고 그 마음을 관대하게 하지 아니하여,

광탄(£9誕)하여 실제가 없는 말로써 의심스럽고 유사한 것을 나직(羅織)하여 죄없는 사람들을 어지럽게 형벌하고 무고(無辜)한 자들을 살육하여,

천하(天下)의 사람들이 화를 받음은 똑같지 않으나 똑같이 원망하여 모두 임금의 한 몸에 모일 것이니, 또한 어찌 이것을 편하게 여기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 대저 〈무일(無逸)〉의 글은 소민(小民)의 의지함을 아는 것으로 한 편의 강령을 삼았고,

이 장(章)은 이미 소민(小民)의 의지함을 알았으면 마땅히 그 앎을 실천해야 함을 거듭 말하였다.

삼종(三宗)과 문왕(文王)은 그 앎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러므로 그 흉차(胸次)『[가슴속]』가 너그럽고 화평하여, 사람들의 원망과 꾸짖음이 그 마음에 개체(芥³3)되지 않은 것이니,

이는 마치 천지(天地)가 만물에 있어 한결같이 장육(長育)할 뿐이니, 미워하고 분해함을 하늘이 어찌 그 사이에 사사로이 노여워하겠는가.

천지(天地)는 만물(萬物)로 마음을 삼고, 인군(人君)은 만민(萬民)으로 마음을 삼는다.

그러므로 인군이 된 자는 요컨대 마땅히 백성들의 원망과 꾸짖음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을 것이요, 백성의 원망과 꾸짖음을 자기의 노여움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군주가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면 백성들이 편안하여 군주 또한 편안하고,

자기의 노여움으로 삼으면 백성들이 위태로워 군주 또한 위태로울 것이니, 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제19장(第十九章)

 

『 주공(周公)이 말씀하였다. “아! 사왕(嗣王)은 이것을 잘 살펴보소서.”』

『 자(玆)는 상문(上文)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무일(無逸)〉 한 편은 일곱 장(章)인데, 장(章) 첫머리에는 모두 먼저 자차영탄(咨嗟詠歎)하는 뜻을 지극히 하고 그런 뒤에야 말하려는 바의 일을 언급하였으며,

이 장(章)에 이르러서는 차탄(嗟歎)하는 것 외에 달리 딴 말이 없고 오직 사왕(嗣王)은 이것을 살펴보라는 말로 끝을 맺었으니,

이른바 ‘말은 다함이 있으나 뜻은 무궁하다.’는 것이니, 성왕(成王)이 이에 깊이 경계함이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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