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가 된 신부(神父)님


안녕하십니까?
얼마 전 카톨릭의 수장인 새로운 교황(敎皇)이 탄생되셨습니다.
다음날 프란치스코 새 교황께서는 이른 아침부터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을 예고 없이 들렀습니다.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오래 된 성당에서 교황은 성직자들과 기도를 올렸죠.
선출 다음날 바티칸 성소에 머물던 이전 교황들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어 콘클라베에 참석하기 전 머물던 로마의 숙소에 들러

손수 짐을 챙기고 숙박비도 계산했다고 메스컴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선출 당일에도 교황들이 걸치던 화려한 망토를 입지 않았고

준비된 전용 승용차 대신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소탈함을 보여줬습니다.
그는 숙소에 돌아갈 때 교황 전용 승용차가 준비돼 있었지만 다른 추기경들과 버스를 함께 타기 원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강복(降福)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먼저 여러분에게 부탁을 드립니다.
주교가 그 백성을 축복하기 전에, 여러분이 주님께서 저에게 복을 내려주시도록 기도하여 주시기를,
곧 자기 주교를 위하여 강복을 청하는 백성의 기도를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어떠하신지요?

로마 카토릭에도 대 변혁이 찾아올 모양입니다.
벌써 이 땅에도 그런 변혁의 조짐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신부(神父)님 하면 권위적으로 보이기만 하는 신부 사회에 멋진 신부님이 등장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들을 기쁘게 하며 새로운 신부상(神父像)을 보여주시고 있어 널리 알립니다.

얼마 전 영동고속도로 ○○휴게소.

박씨는 휴게소 미화원으로 일한 지 이 날로 꼭 한 달째입니다.
그런데도 ‘아저씨’란 호칭이 영 낯섭니다.
지난 27년 동안 ‘신부님’이란 소리만 듣고 살았기 때문이죠.
안식년을 이용해 휴게소 미화원으로 취직한 ‘청소부가 된 신부님’,

박 신부님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12시간 동안

휴게소 광장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며 빗자루 질을 합니다.
물론 그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주변에 한 명도 없죠.
그런데 어느 신문사기자가 이 사실을 알고 기습취재를 나온 것입니다.
‘기습’에 깜짝 놀란 신부님은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일인데”하며

사람들 눈을 피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습니다.
“사람들 사는 게 점점 힘들어 보여서 삶의 현장으로 나와 본 거예요.
저는 신학교 출신이라 돈 벌어본 적도 없고, 세상 물정에도 어두워요.
신자들이 어떻게 벌어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집 장만하고, 유지비를 내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그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소위 ‘빽’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농공단지에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갔는데 나이가 많아 받아주는 데가 없었죠.
그래도 아는 사람이 힘을 써줘서 겨우 휴게소 미화원 자리를 얻기는 했지만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니란 걸 피부로 느꼈습니다.

 

그는 출근 첫날 빗자루를 내던지고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화장실 구역을 배정받았는데 허리 펴 볼 틈도 없이 바쁘고 힘이 들었습니다.
대소변 묻은 변기 닦아내고, 발자국 난 바닥 걸레질하고, 담배 한대 피우고 돌아오면 또 엉망이고….
그래도 일이 고달픈 건 견딜 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멸시는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느 날, 한 여성이 커피 자판기 앞에서 구시렁거리며 불평을 했습니다.
무엇을 잘못 눌렀는지 커피가 걸쭉하게 나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상태였죠.
박 신부는 휴게소 직원으로서 자신의 동전을 다시 넣고 제대로 된 커피를 뽑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성이 “고마워요.

저건(걸쭉한 커피) 아저씨 드시면 되겠네.” 라며 돌아서는 데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제가 그때 청소복이 아니라 신사복 차림이었다면 그 여성이 어떤 인사를 했을까요?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되죠.”

박 신부는 “그러고 보면 지난 27년 동안 사제복 덕분에

분에 넘치는 인사와 대접을 받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눈물 젖은(?) 호두과자도 먹어 보았다고 합니다.
아침식사를 거르고 나왔는데 허기가 져서 도저히 빗자루 질을 할 수가 없었죠.
하는 수 없이 호두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트럭 뒤에 쪼그려 앉아 몰래 먹었습니다.
손님들 앞에서 음식물 섭취와 흡연을 금지하는 근무규정 때문이죠.

그의 한 달 세전 월급은 120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는 “하루 12시간씩 청소하고 한 달에 120만원 받으면

많이 받는 것인지 적게 받는 것인지요?” 하고 기자에게 물었습니다.
또 “언젠가 신자가 사다준 반팔 티셔츠에 10만원 넘는 가격표가 붙어 있던데…”라며
120만원의 가치를 따져보며 어떻게 이 월급을 받고 신자들이 살아가는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신자들은 그런데도 헌금에 유지비에 건축기금까지 낸다.”며

“이제 신자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퇴근하면 배고파서 허겁지겁 저녁식사하고 곧바로 곯아떨어진다.”며
“본당에 돌아가면 그처럼 피곤하게 한 주일을 보내고 주일미사에 온 신자들에게
평화와 휴식 같은 강론을 해주고 싶다”고 말문을 닫았습니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의 한 달 체험을 사치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오늘 여기 그만 두면 안도의 한숨을 쉬겠죠.
하지만 이곳이 생계 터전인 진짜 미화원이라면 절망의 한숨을 쉴 것입니다.
그나마 이 일마저 잃으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어떻습니까?

이런 성직자가 있는 한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궁전과 같은 교회를 지어놓고 세습을 일삼으며 초호화 생활을 하는 성직자가

아직 교계(敎界)에는 많이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요?
또한 어느 종교라 할 것 없이 일반화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정말 로마 교황청에서부터 불어오는 이 신선한 변혁의 바람이 전 종교계에 널리 메아리치면 좋겠습니다.
성직자들은 부자(富者)교인들에게만 쩔쩔 맬 것이 아니라

일반 교도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을 섬기는 성직자로 거듭 태어나면 어떨까요!

 

 

 

가화만사성 (家和萬事成)
모두가 아시다시피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이루워진다'라는 말입니다.
옛날부터 전해온 말이지만 시대,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들어맞는 진리라 생각됩니다
가정에서의 근심은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큰 부담이 될 것이며,
이런 부담은 성공에 이르는 길을 막게 될 것입니다.
가정의 평화는 성공의 주춧돌이며, 자녀들이 바르게 커갈수 있는 양분입니다.

 

우리나라 옛 전래동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색시가 시집을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루는 밥을 짓다 말고 부엌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남편이 이유를 물으니 밥을 태웠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은

오늘은 바빠서 물을 조금밖에 길어오지 못했더니
물이 부족해서 밥이 탔다며 이것은 자기의 잘못이라 위로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울음을 그치기는 커녕
감격하여 더 눈물을 쏟았습니다.
부엌 앞을 지나가던 시아버지가 이 광경을 보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사정을 들은 시아버지는 내가 늙어서 근력이 떨어져서 장작을 잘게 패지 못했기 때문에

화력이 너무 세서 밥이 탔다고 아들과 며느리를 위로했습니다.
그 때 이 작은 소동을 들은 시어머니가 와서
이제 내가 늙어서 밥 냄새도 못 맡아서 밥 내려 놓을 때를 알려주지 못했으니

자기 잘못이라고 며느리를 감싸주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모두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잘못을 스스로 반성하고 또 자기가 잘못을 뒤집어쓰면서까지
남을 위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화목이 찾아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대학』과 『여씨춘추』라는 책에 나온 말입니다.
"자신의 몸을 닦고, 가정을 바로잡으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히 한다"라는 말이지요.
유교에서의 말로써 가정을 바로잡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일에는 '수신'이 따라야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올바르게 발전시킨 사람이 가족을 잘 이끌수 있으며, 가족을 잘 이끌음으로써 더 큰일도 할 수 있고,
그것이 곧 자신을 수신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은섭 옮김

 

공자[孔子]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예수 (Jesus)

 

 

Jesus of Galilee, Jesus of Nazareth라고도 함.

BC 6경 유대~ AD 30경 예루살렘.
20세기 세계 인구의 1/3 이상이 믿는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기독교(基督敎)의 창시자.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온 구세주(救世主)로,
목수 요셉의 약혼녀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聖靈)으로 잉태되어,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30세 때,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많은 기적을 행하면서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알리며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그의 활동에 반감을 가진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로마 총독에게 고발되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사형에 처해졌다.

 

예수의 행적과 메시지들은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앙에는 신학적 동기와 전제가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의 진정한 생애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예수에 대한 많은 자료에는 예수가 BC 7~6년경에 베들레헴 혹은 나사렛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한다.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탄생설이 유력한데,
예수는 육적인 아버지가 없고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정통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이다.
예수의 가족으로는 어머니 마리아(미리암)와 목수인 아버지 요셉,
형제 야고보(야곱)·요셉·유다·시몬(구약 족장의 이름들) 등이 있는데,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마르코의 복음서〉 6장에 언급되어 있다.

예수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고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쳤다.
예수의 설교 안에 있는 모든 이념과 이미지는 하느님 자신이 그의 통치를 이루기 위해 매우 가까이 있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하나의 사상으로 집약된다.
예수는 결국 정치적 반란자로서 로마 법에 따라 형을 선고받았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석가모니 [Sakyamuni, 釋迦牟尼]

 


본명은 Gautama Siddhārtha. ?

인도 코살라 왕국 샤키아 공화국 카필라바스투~ ?
인도 마가다 왕국 말라 공화국 쿠시나라.
BC 6~4세기경에 인도에서 활동한 불교의 창시자.


성은 고타마(Gautama),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로서,
중부 네팔의 석가족(釋迦族)의 중심지 카필라 성(Kapila城)에서

정반왕(淨飯王)과 마야(摩耶)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29세 때 인생의 고뇌 해결을 위하여 출가하여,
35세에 부다가야(Budda-gayā)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그 후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명의 수행자를 교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성립했으며,
각지를 다니며 설법을 하다가 80세에 입적하였다.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산스크리트 어 이름은 ‘샤키아무니(Śākyamuni)’이다.

 

석가모니라 칭할 때, 석가(釋迦)는 북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Śākya)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의 진리를 깨달아 성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며,
같은 취지에서 세존(世尊:또는 釋尊)으로도 불리는 등 많은 호칭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이 '붓다'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음사하여 '불타'(佛陀)라 하고,
더 약칭하여 '불'(佛)이라고도 부른다.
불교 특유의 용어로서 붓다는 '깨달은 자'를 뜻하며,
교리의 전개 과정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구제자로서 다수의 붓다를 상정하여 소위 '부처'로 통용된다.
남방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라고 부르는데, 고타마(Gotama:산스크리트로는 Gautama)는 석가모니의 성이다.
일부의 경전에서는 BC 1~AD 2세기 무렵 서북인도에 침입하여
인도에서 널리 사용된 사카력(曆)을 만들어낸 사카(Saka)족도 석가로 쓰는 예가 있으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공자 예수 석가 공동성명(共同聲明)

 

공자가 이 세상에 다시온다면
사당과 제삿상을 없에버리고
지금 당장 살아있는 네 부모나 잘 모시라고 할겁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온다면
호화스런 거대한 교회를 다 팔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전부 다 나누어주고
사랑이나 잘 하고 살라고 할겁니다.

 

석가가 이 세상에 다시온다면
거대한 금불상 다 팔아버리고
산에서 내려와 자비나 잘 베풀고 살라고 할겁니다.

 

인과 예를 가르쳤더니
허례허식이나 못된 욕심에 빠지고

 

사랑하라 가르쳤더니

시기와 질투 탐욕에 물들어
교회나 키우고 목사를 하느님 처럼 섬기고

 

자비를 가르쳤더니
불상에다 빌고 스님을 부처 인 양 받드니

 

논어에도 성경에도 불경에도 쓴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어느놈들이 나를 팔아 장사하는거야...
이 몹쓸놈들....

 

 

 

 

 

 

 

 

 

 

 

 

 

 

 

 

 

 

 

 

정월 대보름

 

정월 대보름(正月 大보름) 또는 대보름은 음력 1월 15일로,
오기일(烏忌日)이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은 도교적인 명칭으로, 삼원(상원, 중원, 하원) 중 첫 번째이다.
새해 들어 처음 맞이하는 보름날로서 농사의 시작일이라 하여 매우 큰 명절로 여겼다.
대보름 전날인 음력 14일과 당일에는 여러 곳에서 새해의 운수에 관한 여러 풍습들을 행한다.

정월은 한해를 처음 시작하는 달로서 그 해를 설계하는 달이다.
1월 15일인 대보름날에는 점을 친다.
또 율력서에 "정월은 천지인 삼자가 합일하고 사람을 받들어 일을 이루며,
모든 부족이 하늘의 뜻에 따라 화합하는 달"이라고 설명된다.
 
농사력(農事曆)으로 볼 때 이 시기는 대보름에 이르기까지
걸립(乞粒)을 다니면서 마을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이다가 농사철로 접어드는 때이며,
마을공동의 신격(神格)에 대한 대동의례·대동회의·대동놀이 등이 집중된 때이기도 하다.

작은 보름에는 수숫대의 껍질과 속대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잘라서 물감으로 채색한 뒤
벼·보리·밀·옥수수·콩·목화 등의 이삭 모양을 만들어 짚단에 꽂아 긴 장대 끝에 묶어서
집 옆에 세우거나 마구간 앞 거름더미에 꽂아놓는다.
이것은 낟가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해 오곡이 낟가리처럼 풍성하게 여물어줄 것을 바라면서 즐기는 행사였다.
이 행사는 그 유래가 매우 오래 되었으며 내농작(內農作)이라는 궁중의식으로 채용되기까지 했다.
음력 1월 15일 대보름에는 집집마다 약밥을 만들어 먹었으며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달맞이를 했다.
이날 밤 들판에 나가서 그해의 새싹이 잘 자라고 전답의 해충이 소멸되도록 쥐불을 놓았다.
아이들은 연띄우기·바람개비·꼬꼬대·실싸움·돈치기 등을 즐겼으며,
어른들은 다리밟기·편싸움·횃불싸움·줄다리기·동채싸움·놋다리밟기 등을 했다.
이와 같이 대보름날 밤에는 온 마을이, 때로는 마을과 마을이 대결하는 경기를 조직하여 집단적으로 즐겼다.

 

한국의 풍습

한국에서는 달은 음에 해당하여 여성으로 본다.
달은 여신, 땅으로 표상되며 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모신으로 출산하는 힘을 가졌다고 여겼다.
달은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한국에서는 대보름을 설과 같은 중요한 명절로 여겼다.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대보름날 자정을 전후로 마을의 평안을 비는 마을 제사를 지냈다.
전남 해남의 도둑잡이굿, 전남 완도 장보고당제, 전남 보성 벌교갯제,
충남 연기 전의장승제, 전북 고창 오거리당산제, 경북 안동 도산부인당제,
경북 안동 마령동별신제, 강원도 삼천 억던 남근제, 전북 김제 마현당제가 있다.

대보름에는 오곡밥을 지어 먹으며,
아침 일찍 부럼이라고 하는 껍질이 단단한 과일을 깨물어서 마당에 버리는데,
이렇게 하면 1년 내내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부럼깨기).
또 귀밝이술을 마시고, 밤에는 뒷동산에 올라가 달맞이를 하며 소원 성취를 빌고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하였다.
즉 달빛이 희면 많은 비가 내리고 붉으면 가뭄이 들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오고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대보름의 풍년과 복을 비는 행사로는 볏가릿대세우기·용알뜨기·놋다리밟기 등이 있고,
놀이로는 지신밟기·용궁맞이·하회별신굿·쥐불놓이(놀이)·사자놀이·줄다리기·차전놀이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더위팔기도 있다.

 

각 지방마다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다.

 

행사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세워진 달집 모양보름새기 -

설날과 같이 수세하는 풍습이 있어 온 집안의 등불을 켜놓고 지새웠다.
보름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하였는데,

가족 중에 누군가 잠이 들면 장난삼아 밀가루 등으로 눈썹을 하얗게 칠해놓기도 한다.

 

더위팔기 - 보름날 해뜨기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한해 더위를 판다.
달맞이 -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을 맞으면서 새해의 풍년을 점치고 행운을 빈다.
달집태우기 - 달집을 만들어 달이 떠오를 때에 태우면서 풍년을 빈다.
다리밟기 - 땅에 놓인 '다리'를 밟으면 밟는 사람의 '다리'가 튼튼해진다고 기대하며 다리를 밟는 풍습이다.
지신밟기 - 영남 지방의 대보름 문화로, 농민들이 행렬을 이루어 집을 차례로 찾아가는 풍습이다.
액막이 연 - 그해의 액운을 멀리 날려 보낸다는 뜻으로 음력 정월 열나흗 날에 띄워 보내는 연.
연에는 이름, 생년월일 따위와 송액영복(送厄迎福)과 같은 글귀를 쓴다.

 

음식

대보름에 차려 먹는 절식으로는 부럼·귀밝이술 외에도 약밥·오곡밥·묵은 나물과 복쌈 등이 있다.
또 고사리·버섯·오이고지·호박고지·가지껍질·무시래기 등
햇볕에 말린 묵은 나물을 물에 잘 씻어서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고 건강하게 지낸다고 한다.

부럼 - 정월 보름날 새벽에는 부스럼이 생기지 말라는 의미에서 밤·잣·호두 등 단단한 견과류의 부럼을 먹는다.
이때 부럼(주로 밤의 껍질을 직접 깨물어 먹음).
오곡밥 - 쌀, 보리, 조, 수수, 팥 등의 다섯 가지 이상의 곡물을 섞어 지은 오곡밥을 먹음.
진채식 - 무, 오이, 호박, 박, 가지, 버섯, 고사리 등을 말려둔 것을 먹는다.
여러 집에서 아홉 가지 나물을 아홉 번, 또는 열 가지 나물을 먹기도 함.
약밥 - 물에 불린 찹쌀을 시루에 찐 뒤 꿀이나 설탕·참기름·대추 등을 쪄서 거른 것을 섞고,
다시 진간장·밤·대추·계피·곶감·잣 등을 넣어 시루에 찐 밥을 말함.
복쌈 - 밥을 김이나 취나무, 배추잎에 싸서 먹는다.
여러개를 만들어 그릇에 높이 쌓아서 성주님께 올린 다음 먹으면 복이 있다고 함.
귀밝이술 - 보름날 새벽에 데우지 않은 찬술을 남녀구별 없이 조금씩 마심.
솔떡 - 솔을 깔고 떡을 쪄서 나누어 먹음.
대보름날에는 세 집 이상 성이 다른 집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루 세번 먹는 밥을 이 날은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믿음.

 

가축

소밥주기 - 소에게 밥과 나물을 차려 줌.
개보름쇠기 - 보름날에 밥을 주면 개가 마른다고 하여 달이 뜨는 저녁에 밥을 줌.
까마귀밥 - 찰밥을 지어 까마귀에 제를 지낸다. 또는, 약밥이나 나물을 까마귀에 던져 줌.


놀이

연날리기 - 대보름 날에는 겨울 내내 띄우던 연을 날려보낸다.
대보름 이후로는 연날리기를 하지 않고, 대보름 이후에 연을 날리면 ‘고리백정 (또는 백정)’이라 불렀다.
쥐불놀이 - 대보름 밤에 쥐불을 놓아 벌레를 없앤다.
횃불싸움 - 두 마을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횃불을 들고 싸운다.
널뛰기 - 정월대보름 밤에 널뛰기를 하며, 이후로는 하지 않는다.
사자희 - 머리에 사자 가면을 쓰고 농악을 울리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춤추며 논다.
기타 줄다리기, 석전, 고싸움 등의 놀이를 벌이기도 한다.

 

2013.2.23. 작은보름날 한은섭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자와 예수 석가 이야기  (0) 2013.04.06
7 개월 된 우리 이쁜이 외손녀 김지유  (0) 2013.03.11
법정 스님의 인연 이야기  (0) 2013.02.08
설의 유래  (0) 2013.02.08
정(情)이란 무엇일까  (0) 2013.01.27
 
법정 스님의 인연 이야기

현재의 생각이 내일을 만들어 간다.
오늘은 어제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현재의 생각은 내일의 삶을 만들어 간다.
삶은 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니,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하게되면 고통이 그를 따른다. 
<법구경>에서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삶에는 많은 방향이 있으며,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는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이 선택의 자유는 가장 큰 선물이다.
인간의 삶은 날실과 씨실로 짜 나가는 한 장의 천이다.
지금 이 자리, 그대가 더하는 실은 무슨 빛깔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말로 자신을 찍는다.
사람은 태어날 때 부터 입 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
<법구경>
 
아무리 아름답고 빛이 고을지라도 향기 없는 꽃이 있듯이,
실천이 따르지 않는 말은 그 열매가 없다.'
<법구경>
 
변하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무상(無想)이라는 말은 단순히 덧없고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무상이라는 말의 본뜻은 변한다는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거기에 가능성이 있다.
변하기 때문에 창조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얼마든지 고쳐 나갈 수 있다.
 
진심으로 들을 때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들을 때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요즘처럼 저 마다 자기 말과 주장만을 내세우는 세태 속에서는 단절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이 깨지는 이유도 사람들이 남의 말을 진심으로 듣지 않는데 있다.
 
삶은 동시적 의존관계로 엮어져 진행된다.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의 법칙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존재도 우연히 혹은 독립적이고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 존재를 성립케 하는 원인과 조건이 있다.
나는 너의 원인과 조건이 되고,
너는 나의 원인과 조건이 되어 줌으로써
우리는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진리의 세계에서는 상호의존적 존재라고 한다.
내가 사라지면 너의 존재도 소멸된다.
너의 존재가 사라지면 나의 존재 역시 소멸되어 버린다.
 
우리가 산 속으로 들어가 수도하는 것은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우리가 사람들을 떠나는 것은
그들과 관계를 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 길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전생의 일을 알고 싶거든 현재 내가 받는 것을 보라
내생의 일을 알고 싶거든 현재 내가 짓고 있는 것을 보라
자신이 뿌린 것은 자신이 거둔다는 인과관계의 질서와 도리를 바탕으로
복잡한 삶속에서 점점 메말라 가는 사람들의 마음밭을 일궈 주는 이야기
 
법정 스님의 < 인연 이야기 >중에서 한은섭 옮김

 

 

설의 유래

 

음력 1월1일 설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가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택한 것은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개화당의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의한 하나의 혁명이었다.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건양 1)1월1일이라고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선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력(歲曆)을 태양력으로 바꾸었고.
나라에 쓰는 연호도 양력을 세운데는 뜻의 건양(建陽)이라 고치었다.
이에 양력이 음력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정부는 1985년부터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민속의 날>로 정했던 구정을
1989년부터 <설날>로 개명하는 동시에 3일간의 연휴로 하기로 한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신정과세를 강압적으로 추진했지만.
전통의 뿌리가 깊은 농촌에서는

신정이 <일본설>로 취급되어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음력 1월 1일은 환세(換歲)의 기점으로 삼고

그저 <정월 초하루>라 하기도 하고
<설>또는 설의 복합어인 <설날><설명절>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리고 정월 또는 초하루에 든 명절이라고

<정월명일>.<정월명절>.<정초명일>등으로 부른다.
혹은 줄여서 <정초>라고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1월1일부터 1월15일까지를 통틀어서 말할 경우와 혼용하고 있다.
정초에는 그 해를 가늠하고 예축(豫祝)하기 때문에
언행을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설' 또는 '설날'을 가리키는 한자어는 무척 많다.
"정초(正初), 세수(歲首), 세시(歲時), 세초(歲初),
신정, 연두(年頭), 연수(年首), 연시(年始)"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흔히 느끼던 설날의 정취는 그 많은 한자어보다
'설'이란 토박이말에서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자어와 설날 아침을 뜻하는 한자어 '원단(元旦),
원조(元朝), 정조(正朝), 정단(正旦)"등의 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어려운 한자어는 굳이 쓸 필요없이 '설날 아침'이란 말을 쓰는 것이 좋다.

'설'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하나는 '한 살 나이를 더 먹는'에서의 '살'에서 왔다고 한다.
곧 '살'이 '설'로 된 것인데

그 근거로 '머리(豆)'가 '마리'에서 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유추할 수 있음을 든다.
다음으로는 "장이 선다."와 같이 쓰이는

'선다'의 '선'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설다(제대로 익지 않다)',
'낯설다' '설어둠(해가 진 뒤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어둑어둑한 때)

'설'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다.
또 '삼가다'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뜻의 옛말 '섧다'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다.
첫번째 두번째 어원에 따르면

'설'의 의미는 새해 새날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고
세번째 견해에서는 설날을 몸가짐에 그릇됨이 없도록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의

'신일(愼日)'이란 어휘를 챙기게 된다.
한 해의 마지막 무렵을 흔히 '세밑, 세모(歲暮)'라고 부른다.
특히 설날의 전날인 섣달 그믐을 가리킨다.
아이들은 '까치 설날'이라 부른다.
옛말로는 " 셜"이라 하는데 ''은 '작은'이란 뜻이다.
그러나 동지(24절기의 하나, 태양력으로 12월 22일쯤)를 가리키는

'작은설'과 혼동하면 안 된다.
동지는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해(태양)의 힘이 가장 약화된 날이다.
그 다음 날부터 낮이 시나브로 길어지므로

아마도 1년의 출발 기준으로 생각하여 '작은 설'로 삼았던 듯싶다.

 

2013.2.8.(음2012.12.28.) ㅎㅇㅅ

 

정(情)이란 무엇일까
 
情=뜻정, 정겹다정, 정들다정
 
정이 무엇일까요?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이 정이라 합니다.
부부간에 헤어지고 싶어도 정 때문에 못 헤어지고
친구간에 헤어지고 싶어도 정 때문에 못 헤어집니다.
 
미운정 고운정 할 때 정[情]은 무엇일까요?
 
情=心 + 靑[뜻정=마음심 + 푸를청]

안녕하십니까?
정(情)이란 무엇일까요?
오랫동안 지내 오면서 생기는 사랑하는 마음이나 친근한 마음
그리고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을 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는 사랑하는 방법이 서로 다른 가 봅니다.
남자는 사랑하는 마음만 가슴에 담고 있으면 그만이라고들 하지만,
여자들은 한사코 그 가슴 속에 담아둔 사랑을 꺼내서 보여 주기를 원하죠.
 
조용필의 노래에 <정이란 무엇일까>가 있습니다.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 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정을 쏟고 정에 울며 살아 온 살아온 내 가슴에/
오늘도 남모르게 무지개 뜨네./
정을 쏟고 정에 울며 살아 온 살아 온 내 가슴에/
오늘도 남모르게 무지개 뜨네.」
 
누구나 어려울 때, 많이 외로울 때, 무슨 일 때문에 외롭고 괴로울 때,
진심으로 정으로 다가가 한사람의 정신세계를 편안하게
그리고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켜
살맛나게 하는 게 정이고 사랑이고 진심이 아닐 런지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진심이건만 상대방이 그 진심을 몰라줄 때가
아마 내 마음이 가장 허무하고 제일 안타까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다는 것이 진심으로 정을 나누고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살아 보는 게 꿈이고 가장 큰 소망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내며 살아가게 되죠.
사랑이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는 아내로 하여금 커다란 자긍심과 용기를 심어줍니다.
그러나 무심코 던진 날카로운 말 한마디는 오래도록 날개를 달고 다니면서
누군가에게 평생 씻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와 한으로 남겨질 수도 있다는 것을
저는 생각 못하고 산 것 같습니다.
 
부부라는 인연의 끈으로 매여 수 십 년을 해로(偕老) 하면서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다 알거라 믿으며 살아 왔습니다.
눈으로 말하고 가슴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꼭 해줘야 할 말을 해주지 않은 탓에
행복하고 아름답게 보낼 수 있었던 아내의 인생을
혹 망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이 듭니다.
 
여기 어느 노부부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부 금실이 좋기로 유명한 분들이었죠.
그들은 부유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위해주며 아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부부를 보고 있으면 어느 사람이라도 행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런 행복을 깨는 불행한 일이 터진 것입니다.
바로 건강하던 할아버지께서 아프기 시작하셨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아버지가 병원에 치료를 다니면서부터
할머니를 구박하기 시작하시는 거예요.
“약 가져와!” “네 여기요”
“물은?” “네 여기요”
“아니. 뜨거운 물로 어떻게 약을 먹어?”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물 컵을 엎어버렸어요.
그래서 이번엔 뜨거운 물이 아닌 찬 물로 할머니가 물을 다시 떠왔더니
“아니 그렇다고 찬물을 가져오면 어떡해!!” 하며
또 할머니가 가져온 물을 엎질러 버렸습니다.
집에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손님들 오셨는데 왜 이렇게 늦게 상을 차리느냐며 소리를 쳤습니다.
“당신이 하도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정신이 벙벙해서 그만...”
“이게 어디서 말대답이고?!” “손님들 계신데 너무 하시네요...”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할머니께서는 마음이 너무 아프셨습니다.
할머니는 결국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나가셨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에 너무 당황한 손님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어르신! 왜 그렇게 사모님을 못 살게 구세요...”
그러자 한참동안 말이 없던 할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습니다.
“저 할망구가 마음이 여려. 나 죽고 나면 어떻게 살지 걱정이 되서 말이야.....
날 미워하게 해서라도 나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야 될 거 같아.....
” 할아버지의 눈가엔 어느새 울며 나간 할머니보다도
더 슬퍼 보이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할아버지는 할머니 곁을 떠나셨지요.
그리고 그 무덤가 한 편엔 우두커니 서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어요.
일부러 할머니와 정 떼려고 했던 할아버지의 원치 않던 독한 모습이
왜 이렇게 할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네요.
할머니도 마음이 아프셨겠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정 떼려고 일부러 그렇게 할머니에게 모질게 구셨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오늘도 따뜻한 정 나누는 주말 되시길 바라면서
 
2013.1.27.
Fool HanEunSeob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정 스님의 인연 이야기  (0) 2013.02.08
설의 유래  (0) 2013.02.08
Les Miserables(레 미제라블)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  (0) 2013.01.09
계사년 뱀 이야기  (0) 2012.12.31
연꽃의 특성과 의미  (0) 2012.12.29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프랑스어="불쌍한 사람들"

(우리에겐 장 발장으로 더 알려짐)

 

프랑스 대혁명 직전 라브리 마을의 날품팔이 노동자 장발장이 누이동생과 조카 일곱을 부양하고 살면서
배고픔 끝에 빵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3년형의 선고를 받게된다.
장발장은 남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여 틈만 있으면 탈옥을 시도한다.
그로 인해 형이 19년으로 늘었는데 13년만에 만기출옥 하여 사회로 나왔을 땐 이미 중년의 사내가 된 장발장은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면서도 적개심을 품은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알프스 산록 밑의 소도시 디뉘의 거리에 허름한 옷차림과 피곤에 찌든 몰골로 장발장은 거리를 배회한다.
이미 그가 전과자라는 소문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음식과 잠자리 제공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사나운 개에게 걸을 수도 없는 지경 '나는 개보다 못한 신세로구나!'하고 성당 벤치 위에 쓰러졌다.
지나가던 한 부인의 조언대로 성당의 사제관 문을 두드린 결과 노사제 밀리에르 신부로부터 환대를 받는다.

더운 음식과 깨끗한 잠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순간적인 충동으로
사제관의 은 접시를 훔쳐 달아나다 헌병에게 끌려 신부 앞으로 온다.
그런데 밀리에르 신부는 자기가 준 선물이라 증언해 준다.
장발장에게 은촛대까지 내주며 '정직하게 살아가라며 자네 영혼은 내가 사서 하느님께 바쳤다네' 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후 장발장은 가석방의 선서를 어기고 자신의 이름을 마드렌느로 바꾸어 살아간다.
그동안 공장주인과 시장으로서 성공하게 된다.
그의 공장에 다니는 직공 중에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무도 몰래 코젯이라는 사생아를 키우는 판틴느란 직공이 있었다.
사생아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다른 여직공들과 싸우던 도중

장발장이 나타나 공장감독에게 이일을 해결하라고 한다.
공장감독은 판틴느를 유혹하다가 거절당한 일이 있는데다가, 여직공들의 얘기를 듣고는 그녀를 해고한다.
딸의 약값을 마련하여야 하였던 그녀는 목걸이와 머리카락을 팔고 결국 창녀로 일하게 된다.
바닥 인생이 되어 버린 그녀는 한 손님과 다툼이 일어나 다치게 되고,
그 손님은 경찰(자베르)를 불러 그녀를 체포하라고 한다.
그때, 장발장이 나타나 그녀를 병원에 보낼 것을 요구한다.

 

한편, 장발장(시장)은 어느날 달려오던 수레에 깔린 포쉬르방이라는 한 남자를 구하게 되는데,
이 장면을 목격한 자베르는 굉장히 힘이 셌고, 가석방의 선서를 어기고 달아난 죄수 장발장을 연상하게 된다.
그리고 시장에게 자기가 쫓던 장발장을 잡았다고 말한다.
장발장은 무고한 사람이 자기를 대신하여 감옥으로 끌려가는 것을 묵인할 수 없어
자기 자신이 바로 자베르가 쫓고 있던 죄수 24601이라고 밝힌다.
병원으로 간 장발장은 죽어가는 판틴느에게 그녀의 딸 코젯을 죽을 때까지 맡아서 키우겠다고 굳게 약속한다.
이때 자베르가 장발장을 체포하기 위하여 찾아오지만 장발장은 자베르를 때려눕히고 도망친다.

어린 코젯은 5년 동안 여관을 경영하고 있는 떼나르디에 부부와 그의 딸 에포닌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코젯을 하녀로 부려먹으며 학대한다.
어둠 속에서 물을 길러 갔던 코젯은 장발장을 만나게 되고
장발장은 떼나르디에 부부에게 돈을 지불하고 코젯을 데려간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생긴 파리의 한 거리. 장발장과 코젯은 거리를 거닐다
코젯과 마리우스란 한 청년과 부딪히게 되고, 그들은 첫눈에 반하게 된다.

한편, 떼나르디에가 이끄는 부랑집단이 장발장과 코젯을 덮치는데,
이때 장발장을 알아보지 못한 자베르가 그들을 구해준다.
그 후 바로 사라진 장발장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순간, 떼나르디에가 그가 장발장임을 알려주게 된다.
자베르는 끝까지 장발장을 잡을 것을 결심한다.

마리우스는 그를 짝사랑하는 에포닌에게 코젯을 좀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에포닌은 돕기로 한다.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한 작은 까페.
그들은 현정부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단 한 사람인
레마르크 장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것을 계기로 시민 혁명을 준비한다.
젊은이들의 리더인 앙졸라는 학생들과 함께 민중들을 선동하기 위하여 거리로 나온다.
그러나 그 모임의 일원인 마리우스는 단지 코젯 생각에 잠겨 있다.

 

한편, 코젯도 첫눈에 반한 마리우스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장발장은 코젯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녀의 과거에 대하여는 말하려 하지 않는다.
마리우스의 대한 사랑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리우스를 코젯에게 안내하고,
그녀의 아버지가 장발장의 집을 털려는 것을 막는다.
이때 밖에 있는 사람이 자베르라고 생각한 장발장은 코젯에게 이 나라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젊은이들, 그들의 의도를 파괴하려는 자베르,
나라를 탈출하려는 장발장, 기약 없는 헤어짐을 슬퍼하는 마리우스와 코젯,
마리우스를 잃게되는 슬픔으로 가득찬 에포닌, 혼란을 틈타 자신의 부를 키우려는 떼나르디에....
각자 서로 다른 생각으로 내일을 맞이한다.

 

젊은이들은 바리케이트를 준비하고, 마리우스는 에포닌에게 자신의 편지를 코젯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에포닌이 편지를 전하러 갔지만 코젯은 만나지 못하고, 장발장에게 편지를 주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마리우스를 만나기 위하여 바리케이트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젊은이들은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정부군과 맞선다.
에포닌은 마리우스에게 가는 도중 총을 맞고 마리우스의 품안에서 숨을 거둔다.
자베르는 신분을 숨긴 채 젊은이들과 같이 있었으나,
가브로쉬가 자베르의 정체를 폭로하고 자베르는 포로가 된다.
장발장은 마리우스의 편지를 읽고 마리우스를 찾아 바리케이트에 도착하고,
그에게 자베르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장발장은 자베르를 풀어준다.

학생들은 바리케이트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그 고요한 밤에 장발장은 마리우스가 살아남기를 기도한다.
다음날 가브로쉬의 죽음을 필두로 앙졸라를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전멸하고,
장발장은 의식불명의 마리우스를 업고 하수구로 피한다.
그곳에서 떼나르디에는 죽은 사람들의 몸에서 도둑질을 하던 중 장발장이 살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한
시체, 즉, 마리우스의 몸에서 반지를 훔치고 장발장은 자베르를 만나게 된다.
마리우스를 살리기 위해 간청하는 장발장을 자베르는 보내준다. 
자베르는 자신의 정의에 대한 원칙이 장발장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에 무너지자
심하게 회의를 하고 결국 세느강에 투신하여 자살한다.

한편, 자신을 구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마리우스는 코젯의 간호 속에 서서히 회복해 나간다.

그러던 중, 마리우스와 코젯의 결혼 전, 장발장은 마리우스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그들의 결혼 후에 자신은 홀로 떠나야 함을 이야기한다.
드디어, 마리우스와 코젯은 결혼하고 장발장은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홀로 떠난다.
결혼식에 참석한 떼나르디에는 마리우스에게 공갈칠 목적으로 코젯의 아버지가 살인자라고 말하며
그 증거라면서 그날 밤 시체에서 훔친 반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마리우스 자신의 반지였으며, 이로써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장발장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는 코젯과 함께 장발장을 찾아간다.
죽음을 맞이하는 장발장을 만나,
이제까지의 숨겨진 모든 이야기를 듣고
이미 죽은 판틴느, 에포닌,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학생들과 함께
마지막 노래를 부르면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지금까지 장발장의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의 유래  (0) 2013.02.08
정(情)이란 무엇일까  (0) 2013.01.27
계사년 뱀 이야기  (0) 2012.12.31
연꽃의 특성과 의미  (0) 2012.12.29
이 글을 읽는 그대에게  (0) 2012.12.21
 
계사년 뱀 이야기
 
뱀(巳)은 12지의 여섯 번째로
천간(天干)이 ‘계(癸)’이고, 지지(地支)가 ‘사(巳)’인 해.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서른 번째 해이다. 癸열째 천간 계
 
육십갑자에서 을사(乙巳), 기사(己巳), 계사(癸巳), 정사(丁巳), 신사(辛巳) 등 5번 순행한다.
뱀(巳)은 시각으로는 9시에서 11시, 방향으로는 남남동, 달로는 음력4월에 해당한다.
파충류의 동물 실체로 일상생활에서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거나 흉물로 배척당하지만
민속신앙에서는 신적 존재로 위해지면서 일찍부터 다양한 풍속이 전승되고 있다.
뱀은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다.
땅에 가장 많이 몸을 대고 살기에 땅과 밀접하며 냉혈동물이고, 독을 품고 있어 두렵다.
 
그런가 하면 뱀이 크면 구렁이가 되고, 이 구렁이가 더 크면 이무기(이시미)가 되며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거나 어떤 계기를 가지면 용으로 승격한다는 민속체계가 있다.
뱀의 범주에는 이무기, 구렁이, 뱀이 다 포함된다.
 
뱀 하면 가정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기다란 몸뚱이, 소리없이 발 밑을 스윽하고 스쳐 지나가는 듯한 촉감,
미끈하고 축축할 것 같은 피부, 무서운 독을 품은 채 허공을 날름거리는 길다란 혀,
사람을 노려보는 듯한 차가운 눈초리,
게다가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든 장본인으로서
교활함의 대명사가 돼 버린 뱀은 분명 우리 인간에게 그리 반가운 동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지나친 혐오감 뒤에는 또다른 호기심과 관심이 있다.  
뱀은 겨울잠을 자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성장할 때 허물을 벗는다.
이것이 죽음으로부터 매번 재생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불사(不死)→재생(再生)→영생(永生)의 상징으로
무덤의 수호신, 지신(地神), 죽은 이의 새로운 재생과 영생을 돕는 존재 인식했다.
또 많은 알과 새끼를 낳는 뱀의 다산성(多産性)은 풍요(豊饒)와 재물(財物),가복(家福)의 신이며,
뱀은 생명 탄생과 치유의 힘, 지혜와 예언의 능력,
끈질긴 생명력과 짝사랑의 화신으로 문화적 변신을 하게 된다.
우리가 뱀을 각기 문화적 맥락 속으로 상징화할 때 생긴 문화적 오해 때문이다.
 
뱀은 치료의 신이다. 그리스 신화 아폴론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의 신’이다.
이 의술신의 딸이 들고 다니는 단장에는 언제나 한 마리의 뱀이 둘둘 말려 있었다.
이 뱀은 의신의 신성한 하인이었고, 해마다 다시 소생하여 탈피함으로서
새로운 정력을 소생시킨다는 스태미너의 심벌로 간주돼 왔다.
지금도 군의관의 뺏지는 십자가 나무에 뱀 두 마리가 감긴 도안이고,
유럽의 병원과 약국의 문장은 치료의 신, 의술의 신을 상징하는 뱀이다.  
 
한편 뱀은 민간의료의 약용으로도 쓰인다.
약용으로 쓰는 뱀은 주로 살모사, 구렁이, 칠점사, 독사, 독뱀 등이다.
뱀은 정력강장 작용을 하고 고혈압 환자에게 혈압 하강작용을 하며,
일체의 허약성으로 오는 질환에 사용된다고 알려졌다.
뱀허물도 중요한 약재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산림경제(山林經濟)』
등에서도 뱀 허물이 약재로 쓰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뱀허물이 정창, 모든 상처에 파리와 구더기를 없애는데,
태(胞衣)가 나오지 않을 때, 경풍(驚風) 등이 쓰인다고 했다.
 
  뱀은 영특한 동물이고 사람에게 먼저 해를 끼치지 않는다.
뱀은 용과 함께 영험한 힘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어 죽이거나 잡아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조선조까지도 뱀을 먹는 풍습은 없었다.
 
뱀의 쓸개가 눈을 밝게 한다는 말이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있기는 하나,
정력에 좋다는 속설은 뱀장수들이 만들어낸 허설이라고 한다.
뱀의 독은 맹독으로 한 마리가 가진 독으로 수십 명을 죽일 수 있다.
특히 뱀탕을 끓였을 때 뜨는 뱀기름은 남성의 성기능을 해친다고 한다.
뱀을 생식한다든가 구워서 먹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몸에 좋지 않다.
독성이 걸러지지 않은 상태로 몸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뱀을 먹어 정력이 솟아나 회춘했다는 사람이 있으나 사실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몸이 늙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몸 속에 독을 넣어 흔들어대는 것과 같다.
간혹 죽음 직전의 폐병 환자가 뱀을 고아먹는 경우는 있었다.
그것은 이왕 죽을 사람이므로 마지막 죽기살기식의 독용법(毒用法)인 셈이다.
의학적으로 동종요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독을 조금씩 써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때 쓰는 독은 아주 적은 양이다.
이열치열(以熱治熱)하듯 한의학에서는 이를 '독으로써 독을 다스린다.'는 비술(秘術)로 쓰고 있다.
이 때의 약용은 살모사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뱀을 '업구렁이'라 해서 신성시하였다.
구렁이가 집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재물을 내려준다 해서 길조로 여겼다.
물론 죽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업구렁이가 집에서 나갈까 보아 걱정을 하면서 잘 모셨다.
따라서 '구렁이'라 부르지도 않고 '지킴' 또는 '지킴님'이라고 높여 불렀다.
'구렁이'라 부르는 것은 금기(禁忌)였던 것이다.
이건(李建)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에 보면,
"풀이 무성하고 습기가 많을 때는 뱀이 규방이나
처마, 마루 밑, 자리 아래 어디서나 기어들어와 잠잘 때 피하기가 어렵다.
섬 사람들은 뱀을 보면 '부군신령(府君神靈)'이라 하여 쌀과 맑은 물과 술을 뿌리면서 빌고,
죽이지를 않았으며, 만일 뱀을 죽이면 재앙이 내려 발굼치도 움직이지 못하고
죽는다고 알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뱀은 중국에서도 신으로 모셨다.
복희씨와 여와씨(女窩氏)는 뱀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이 달린 형상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물의 신(河神)의 모습도 뱀이라고 믿었다.
 
일본인들도 뱀 자체를 시조신으로 여긴다.
일본을 건국한 천조대신(天照大神)의 동생 소전명존(素箋鳴尊)은
머리가 여덟 달린 뱀의 몸에서 칼을 꺼내 나라를 지키는 보검으로 삼았다.
이것이 일본 3대 국보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는 천총운검(天叢雲劒)이다.
 
희랍신화의 최초 인간은 케크로스라는 뱀이고 헤브라이신화의 첫여자 에와도 뱀이었다.
에와와 뱀은 같이 어울릴 수 있었고 성행위를 하는 관계였다.
이는 창세기에 기록된 뱀과 이브의 어울림에서 알 수 있다.
즉 태초의 뱀은 서서 다녔고 잘 생겼고 지혜로왔으며 이브와 함께 놀 수 있는 상대였다.
그것은 반대로 말해 이브와 뱀이 한 종족이었다는 반증이 된다.
고구려의 천왕지신총 벽화에는 인두사신상(人頭蛇神像)이 있고
삼실총 벽화 중 교사도(交蛇圖) 가운데도 뱀이 지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라의 미추왕릉이나 노동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에도 뱀은 역시 신성한 존재로 새겨져 있다.
뱀이 나쁜 의미로 인식된 것은 나쁜 역할을 도맡아 한
희랍 신화 속의 메두사가 대표적인 존재일 것이다.
 
뱀은 우리 나라 설화 속에서도 주로 인간을 해치려는 사악한 존재로 묘사됐었다.
강원도 치악산에 있는 상원사(上阮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가 그러한 예의 하나일 것이다.
가난하지만 선한 나무꾼이 살았다.
그는 나무를 해먹고 사는 처지라 늘 산을 오르내리게 되었다.
산이 그의 친구였고 산짐승 또한 그의 친구였다.
그는 약육강식이 횡횡하는 산에서 늘 약하고 불쌍한 짐승들의 편이 되었다.
어느날 그는 꿩 부부가 뱀의 공격에 처한 상황을 보게 되었다.
뱀은 꿩의 새끼를 잡아 먹으려 했던 것이다.
그는 어린 껴병이를 지키려는 꿩의 모성애에 감탄하여 작대기로 뱀을 때렸다.
단 한번뿐이었는데 뱀은 급소를 맞아 죽어 버렸다.
그러던 다음날 나무꾼은 나무를 팔고 돌아오다 고갯길에서 밤을 맞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불빛이 비치는 집을 찾게 되고 하루 저녁 쉬어가기를 청했다.
주인 여자는 살갑게도 따뜻한 저녁과 술로 주린 나무꾼의 배를 채워 주었다.
술에 취한 나무꾼은 여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술기운에도 목이 눌리는 것을 깨달은 나무꾼은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뻗었다.
놀랍게도 몸을 칭칭 감은 뱀이 입을 벌려 그를 잡아 먹으려 하고 있었다.
이 뱀은 어제 죽은 뱀의 신부뱀으로서 복수하기 위해 여인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그러니 나무꾼은 공연히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꼼짝없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갑자기 종소리가 들렸다.
땡땡땡땡, 자지러지게 우는 종소리에 뱀이 놀라 숨어버리는 바람에 나무꾼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나무꾼은 자신을 구해준 종을 찾아가 보았다.
그곳에는 전날 나무꾼이 살려준 꿩 부부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를 살려주기 위해 몸으로 보은을 한 것이다.
그 터가 상서롭다 하여 절을 세웠는데 그 절 이름이 바로 상원사이다.
<용재총화>에는 한 승려가 죽어 뱀이 된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진광사(晉光寺)의 승려가 시골 여인을 아내로 삼고 몰래 밤마다 출입하다가 죽었다.
죽은 중은 아내를 못잊어 뱀으로 환생하여 낮에는 독 속에 숨어있다가 밤이면 아내와 동침하였다.
이 사실을 안 마을의 사또가 뱀을 궤짝에 넣어 물에 띄워버렸다는 내용이다.
 
이밖에도 절에서는 탐욕하거나 게으른 중이 뱀으로 환생하여 절 근처에 살면서
다른 중의 본보기가 된다는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 외에도 뱀이 사람을 해치려고 했다는 설화는 꽤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선악의 이분법처럼
좋은 뱀에 대해 나쁜 뱀의 대칭으로 쓰여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뱀이 나쁘게 인식된 것은 남근의 상징으로,
또는 남의 여인을 범하는 상사뱀 전설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뱀은 떠돌아 다니는 남성, 즉 한량아로 비유된다.
정숙한 부인들을 유혹하는 애욕 그 자체인 것이다.
죽은 사람의 혼으로 태어나는 상사뱀은
자기의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사모했던 여인을 노리게 된다.
가지밭에 숨어 가지로 둔갑하거나 오이밭에선 오이로,
고추밭과 무밭에서는 고추와 무로 변신하고 있다가
사모했던 여인이 밭으로 들어오면 재빨리 여인의 음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한번 들어간 뱀은 절대로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평생 그 여인의 신랑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연유로 색시를 빼앗긴 남성들에게는 뱀은 철천지 원수가 되고
그러한 상사뱀으로 인해 뱀 자체에 대한 나쁜 인식이 심어지게 된다.
상사뱀 설화는 대체로 불교적인 교훈을 말할 때
'뱀은 애욕의 화신'이라는 관점으로 인용된데서 비롯한다.
 
<법화경>은 뱀의 길다란 형태와 삼각형 머리를
남근의 형태나 성적 기교로 해석해 애욕의 뿌리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애욕과 성희에 대한 근원적 생각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빨래하러 갔던 여인의 가랑이 사이로 물 속에서 갑자기 솟구친 뱀이 뛰어들었다거나,
동동 떠내려오는 뱀알을 주워먹고 잉태를 했다는 옛날 이야기는
아이의 신비한 출생으로 간혹 미화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뱀은 남성 상징이라는 이야긴데,
외로운 여인에게 뱀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음직하다.
 
뱀에 얽힌 이야기는 민간에 많이 전한다.
어느 농부가 논두렁을 자꾸만 뚫는 뱀을 삽으로 찍어 죽인 다음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무럭무럭 잘 자라다가 담이 무너져 깔려 죽었다.
아이가 죽은 땅을 파 보았더니 토막난 뱀의 시체가 있었다는 이야기로부터,
뱀을 죽이려면 완전히 죽여야지 반만 죽이면 살아나서
그 집 간장독에 들어가 멱을 감는다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뱀서방 설화> 하나를 덧붙이는 것으로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자.
 
이 설화는 <맹진사댁 경사>, 즉 <시집가는 날>의 근원으로 현대 문학에 변용되어 나타난다.
어느 마을에 아기를 못낳는 부인이 있었다.
남편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씨를 내리지 못하니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였다.
그래서 이 부인은 정안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빌어도 보고
산 속 깊은 곳을 찾아가 바위 치성도 드려보았으나
잉태의 소망은 별바라기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세월도 흘러 부인의 나이 어느덧 오십, 손자는커녕
자식도 없으면서 동네 사람들로부터 할머니 취급을 받았다.
희망을 잃고 한숨을 쉬며 빨래를 하기 위해 개울로 나간 부인은
위쪽에서 동동 떠내려오는 오이 하나를 발견하곤 팔자타령을 하며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조화이랴.
그날 이후로 이 부인에겐 태기가 있어 열 달 후에 아기를 낳았으니
참으로 반갑고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아기를 본 부인은 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샅 부분까지는 분명히 사람인데, 그것도 아주 잘 생긴 사람인데 두 다리가 뱀이 아닌가.
징그러운 뱀이 고추 아래로 길게 붙어있는 것이다. 부인은 운명으로 여겼다.
이런 자식일망정 아들을 점지해 준 삼신할머니께 감사한 마음까지 가졌다. 정성으로 키웠다.
머리도 좋았고 건강하였으며 부모님께 효성하는 마음 또한 지극하였다.
 
어느덧 이 뱀아이는 열 여섯 살 총각이 되었다.
뱀총각은 장가를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신의 하체가 뱀이니 어떤 처녀가 시집을 올 것인가.
이때 이웃집에 딸 셋이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혼인 이야기가 나오자 기겁을 하며
차라리 처녀로 늙어 죽었으면 죽었지 뱀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셋째딸은 그것이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뱀총각을 동정하는 마음에서 결혼을 하겠다고 하였다.
뱀총각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드디어 혼인식을 올리고 첫날밤이 되었다. 뱀과 동침할 시간이 된 것이다.
셋째딸 색시는 불안한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또한 어찌된 일인가.
뱀신랑은 스르르 허물을 벗더니 멀쩡하고 잘 생긴 남자로 바뀌는 게 아닌가.
꿀같은 밤이 지났다. 아침이 되니 신랑은 다시 뱀으로 변했다.
낮에는 뱀이요 밤에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비밀을 아는 색시는 남들의 숙덕숙덕에 아랑곳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신랑은 과거의 업(業)과 인연을 이야기했다.
전생의 업보가 다하여 결혼 100일이 지난 날 뱀신랑은 완연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행복한 부부가 되자 큰언니 둘째언니는 시샘이 발동했다.
이제 완전한 사람으로 돌아온 신랑이 과거길에 나서자 막내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깊은 비밀 하나를 캐냈다.
뱀신랑은 마지막으로 허물을 벗던 날 뱀허물을 아내에게 주면서
앞으로 삼 년 동안 절대로 남에게 보여서는 안된다는 당부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니들의 꾐에 빠진 순진한 색시는 이 비밀을 언니들에게 말해버린 것이다.
막내가 밭에 나간 틈을 타서 언니 둘은 이 뱀허물을 찾아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어떻게 됐을까? 허물을 잃어버린 신랑은 영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색시는 울며불며 후회했지만 한번 엎질러진 물을 어이할 것인가.
색시는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죄의식으로 날이면 날마다 하늘에 빌고
땅에게 속죄했지만 한번 떠난 남편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색시는 결심했다. 남편을 찾아 나선 것이다.
갖가지 고통과 시험을 거친 어느날 색시는 드디어 남편의 소재를 알아냈다.
천길 땅속 깊은 곳 지하국에 남편이 살고 있다고 하여 찾아가니
과연 남편은 그곳에서 세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아들 딸도 여러명 있었다. 물론 변신하는 뱀이었다.
색시는 현재의 세 부인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남편을 되돌려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게 어디 될 말인가.
세 부인들은 오히려 색시를 미친년 취급하며 당장 여기를 떠나라고 호통을 쳤다.
그래서 색시는 남편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함께 돌아가자고 빌었다.
그러나 남편은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때 지하국 임금이 그간의 사정을 듣고는 우선 야단을 친 다음에
어려운 시험 세가지를 통과하면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고 허락했다.
색시는 호랑이 수염 뽑기 등 세 가지 어려운 관문을 가까스로 통과했다.
이리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온 뱀서방 내외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뱀 이야기였습니다.
 
Faust HanEunSeo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