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 - 상서 - 이훈(伊訓)


▣ 이훈(伊訓)


『訓은 導也라 太甲嗣位에 伊尹이 作書訓導之어늘 史錄爲篇하니 今文無, 古文有하니라』

 

『 훈(訓)은 인도함이다.
태갑(太甲)이 지위를 잇자 이윤(伊尹)이 글을 지어 훈도하였는데 사관(史官)이 기록하여 편(篇)을 만들었으니,
금문(今文)에는 없고 고문(古文)에는 있다.』

 

 

 

▣ 제1장(第一章)


『 원사(元祀)『[원년(元年)]』 12월 을축일(乙丑日)에 이윤(伊尹)이 선왕(先王)에게 제사(祭祀)할 적에
사왕(嗣王)을 받들어 공경히 할아버지를 뵈었는데, 이때 후복(侯服)과 전복(甸服)의 여러 제후(諸侯)들이 모두 있었으며
백관(百官)들이 자기의 직책을 총괄하여 총재(¾4宰)에게서 명령을 들었다.
이에 이윤(伊尹)이 열조(烈祖)『[성탕(成湯)]』가 이룩하신 덕(德)을 분명히 말하여 왕(王)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하였다.』

『하(夏)나라는 세(歲)라 하고 상(商)나라는 사(祀)라 하고 주(周)나라는 연(年)이라 하였으니, 똑같다.
원사(元祀)는 태갑(太甲)이 즉위한 원년(元年)이다.
12월은 상(商)나라는 건축월(建丑月)을 정월(正月)로 삼았으므로 12월을 정월(正月)로 삼은 것이다.
을축(乙丑)은 일진(日辰)이니, 초하루를 붙이지 않은 것은 초하루가 아니기 때문이다.
삼대(三代)가 비록 정삭(正朔)이 똑같지 않으나 모두 인월(寅月)로 수(數)를 일으켰으니,
조근(朝覲)하고 회동(會同)하며 책력(冊曆)을 반포하여 농사철을 나누어주는 것은 정삭(正朔)으로 행사하였고,
달의 수(數)를 기록함에 이르러서는 모두 인월(寅月)을 첫번째로 삼은 것이다.
이(伊)는 성(姓)이고 윤(尹)은 자(字)이니, 이윤(伊尹)의 이름은 지(摯)이다.
사(祠)는 사당(祠堂)에서 고유(告由)하고 제사(祭祀)하는 것이다.
선왕(先王)은 탕왕(湯王)이다. 총(¾4)은 우두머리이다.
예(禮)에 총자(¾4子)•총부(¾4婦)의 명칭이 있고, 주(周)나라 사람 또한 총재(¾4宰)라 일렀으니,
옛날에 왕(王)이 택우(宅憂)『[상중(喪中)에 있음]』하면 사당(祠堂)에서 제사(祭祀)지낼 경우 총재(¾4宰)가 대신하여 사당(祠堂)에 고유(告由)하고,
또 대신하여 군신(群臣)에게 임(臨)하였다.
태갑(太甲)이 중임(仲壬)의 상(喪)을 입고 있었으므로 이윤(伊尹)이 선왕(先王)에게 제사(祭祀)할 적에 태갑(太甲)을 받들어 즉위(卽位)하고
개원(改元)한 일을 가지고 공경히 할아버지를 뵈온 것이니 이는 대신하여 사당(祠堂)에 고한 것이며,
후복(侯服)과 전복(甸服)의 여러 제후(諸侯)들이 모두 있었고 백관(百官)이 자기의 직책을 모두 총괄하여 총재(¾4宰)에게 명령을 들었으니
이는 대신하여 군신(群臣)에게 임한 것이다.
열(烈)은 공(功)이니, 《시경(詩經)》〈상송(商頌)〉에 “우리 열조(烈祖)를 즐겁게 한다.” 하였다.
태갑(太甲)이 즉위하고 원년(元年)을 고치자, 이윤(伊尹)이 선왕(先王)에게 제사(祭祀)하고 고유(告由)할 적에
탕왕(湯王)이 이룩하신 덕(德)을 분명히 말하여 태갑(太甲)에게 훈계하였으니, 이는 사관(史官)이 일을 서술한 처음 말이다.』

『 혹자는 말하기를 “공씨(孔氏)가 말하기를 ‘탕왕(湯王)이 승하(昇遐)한 지 한 달이 넘음에 태갑(太甲)이 즉위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12월은 탕왕(湯王)이 승하(昇遐)한 해의 건자월(建子月)이니, 어찌 정삭(正朔)은 고치고 월수(月數)는 고치지 않았겠는가?”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씨(孔氏)가 《서경(書經)》의 서(序)에 미혹된 것이다.
태갑(太甲)이 중임(仲壬)의 뒤를 이어 중임(仲壬)의 상(喪)을 입고 있었는데,
공씨(孔氏)가 “탕왕(湯王)이 승하(昇遐)함에 빈소(殯所)에 전(奠)을 올리고 고유(告由)했다.”고 말했으니,
진실로 이미 잘못되었으며, 정삭(正朔)은 고치고 월수(月數)는 고치지 않음에 이르러서는 경문(經文)과 사책(史策)에서 더욱 상고할 수 있다.
주(周)나라는 건자월(建子月)을 정월(正月)로 하였으나 《시경(詩經)》에 “4월에 여름이 되고, 6월에 더위가 물러간다.”고 말하였으니,
인월(寅月)로 수(數)를 일으킴을 주(周)나라가 일찍이 고치지 않은 것이며, 진(秦)나라는 건해월(建亥月)을 정월(正月)로 삼았으나
《사기(史記)》에 “시황(始皇) 31년 12월에 납월(臘月)의 이름을 고쳐 가평(嘉平)이라 했다.” 하였으니,
납월(臘月)은 반드시 건축월(建丑月)로 한다.
진(秦)나라가 해월(亥月)을 정월(正月)로 삼았으면 납월(臘月)은 3월이 되어야 하는데,
12월이라고 말한 것은 인월(寅月)로 수(數)를 일으킴을 진(秦)나라가 일찍이 고치지 않은 것이다.
37년에 이르러 “10월 계축일(癸丑日)에 시황(始皇)이 나가 유람하였고, 11월에 여행하여 운몽(雲夢)에 이르렀다.”고 썼고,
뒤이어 “7월 병인일(丙寅日)에 시황(始皇)이 별세(別世)하여 9월에 역산(¦]山)에 장사지냈다.”고 썼으니,
먼저 10월•11월을 쓰고, 뒤이어 7월•9월을 쓴 것은 10월을 정삭(正朔)으로 삼았으나 인월(寅月)로 수(數)를 일으킴을 일찍이 고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진(秦)나라 사관(史官)이 책을 만들 적에 “새해의 시작을 고쳐서 조회(朝會)하고 하례(賀禮)함을 모두 10월 초하루부터 했다.” 하였으니,
진(秦)나라는 주(周)나라를 뒤이었으니, 만약 월수(月數)를 고쳤다면 주(周)나라의 10월은 건유월(建酉月)이 되는 것이니,
어찌 건해월(建亥月)이 될 수 있겠는가. 한(漢)나라 초기에 사관(史官)이 쓴 것은 옛날 예(例)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한(漢)나라는 진(秦)나라의 정월(正月)을 그대로 따랐으나 또한 “원년(元年) 동(冬) 10월이다.” 하였으니,
정삭(正朔)은 고쳤으나 월수(月數)는 고치지 않은 것이 또한 너무 분명하다.
또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원사(元祀) 12월 을축일(乙丑日)이다.” 하였으니,
상(商)나라 12월을 정삭(正朔)으로 삼아 원년(元年)을 고쳤음을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오직 정삭(正朔)으로 행사했기 때문에 이보다 뒤에 정권(政權)을 군주(君主)에게 돌려줄 때에도
또한 12월 초하루에 사왕(嗣王)을 받들어 박읍(¨]邑)으로 돌아왔던 것이니,
사당(祠堂)에 고유(告由)함과 정권(政權)을 군주(君主)에게 돌려줌이 다 중요한 일이므로 모두 정삭(正朔)으로 행한 것이다.
공씨(孔氏)는 그 말을 알지 못하고 생각하기를 “탕왕(湯王)이 승하(昇遐)한 지 한 달이 넘음에 태갑(太甲)이 즉위(卽位)하여
빈소(殯所)에 전(奠)을 올리고 고유(告由)했다.” 하였으니, 이는 승하(昇遐)한 해에 개원(改元)한 것이 된다.
소씨(蘇氏)는 말하기를 “승하(昇遐)한 해에 개원(改元)함은 난세(亂世)의 일이니,
이윤(伊尹)의 세대에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없으니, 분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또 살펴보건대 공씨(孔氏)가 “탕왕(湯王)이 승하(昇遐)하였다.” 하였는데,
오씨(吳氏)가 말하기를 “빈소(殯所)에는 조석(朝夕)의 전(奠)이 있으니 어찌하여 사당(祠堂)에 제사하며,
상주(喪主)는 빈소(殯所)의 곁을 떠나지 않으니 어찌 공경히 뵐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태갑(太甲)이 사왕(嗣王)이 된 것은 중임(仲壬)을 이어 왕(王)이 된 것이다.
태갑(太甲)은 태정(太丁)의 아들이니, 중임(仲壬)은 그의 숙부(叔父)이다.
숙부(叔父)를 뒤이어 왕(王)이 되었으나 그를 위해 3년상(年喪)의 복(服)을 입은 것은 후계자가 된 자는 자식이 되기 때문이다.
태갑(太甲)이 이미 중임(仲壬)의 영구(靈柩) 앞에서 즉위(卽位)하고 중임(仲壬)의 빈소(殯所) 곁에서 거우(居憂)하고 있기에
이윤(伊尹)이 마침내 상(商)나라의 조묘(祖廟)에 이르러 상(商)나라의 선왕(先王)에게 두루 제사(祭祀)하고,
태갑(太甲)을 세운 일을 고유(告由)한 것이다.
태갑(太甲)이 제사했다고 말하지 않고 이윤(伊尹)이 했다고 말한 것은 3년상(年喪) 안에는 제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갑(太甲)을 받들어 상(商)나라의 선왕(先王)들을 두루 뵈었는데 유독 할아버지를 공경히 뵈었다고 말한 것은,
비록 선왕(先王)들을 두루 뵈었으나 더욱 탕왕(湯王)에게 뜻을 지극히 한 것이니,
이는 또한 주공(周公)의 금등(金¦$) 책에 비록 세 왕(王)에게 두루 고유(告由)하였으나 유독 문왕(文王)에게 권권(眷眷)한 것과 같다.
탕왕(湯王)이 이미 사당(祠堂)에 부묘(쯊廟)되었으니, 그렇다면 이 글은 애당초 외병(外丙)과 중임(仲壬)의 일을 폐하지 않았으나,
다만 이 글은 본래 이윤(伊尹)이 탕왕(湯王)의 성덕(成德)을 말하여 태갑(太甲)을 훈계하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외병(外丙)과 중임(仲壬)의 일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나머지는 서서(書序)에 보인다.』

 


▣ 제2장(第二章)


『 “아! 옛날 유하(有夏)의 선후(先后)『[선왕(先王)]』들이 그 덕(德)을 힘쓰셨기에 천재(天災)가 없었으며,
산천(山川)의 귀신(鬼神)들이 또한 편안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조수(鳥獸)와 어별(魚鼈)들이 모두 순하였는데,
그 자손들이 법도(法度)를 따르지 않자 황천(皇天)이 재앙(災殃)을 내리시어 천명(天命)을 소유한 우리 탕왕(湯王)에게 손을 빌리시니,
공격(攻擊)을 시작함은 명조(鳴條)로부터 하였는데 우리『[탕왕(湯王)]』가 덕(德)을 닦은 것은 박읍(¨]邑)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 《시경(詩經)》에 “은(殷)나라의 거울『[귀감]』이 멀리 있지 않아 하후(夏后)의 세대에 있다.” 하였으니,
상(商)나라가 마땅히 거울로 삼을 것은 하(夏)나라보다 가까운 것이 없다.
그러므로 첫번째로 하(夏)나라 일로 고한 것이다. 솔(率)은 따름이요, 가(假)는 빌림이다.
유명(有命)은 천명(天命)을 소유한 자이니, 탕왕(湯王)을 이른다.
걸(桀)이 선왕(先王)의 도(道)를 따르지 않으므로 하늘이 재앙을 내려서 우리 성탕(成湯)의 손을 빌려 주벌(誅伐)한 것이다.
하(夏)나라의 선후(先后)들이 덕(德)을 힘쓸 때에는 하늘이 돌아보고 명령함이 이와 같더니,
자손(子孫)들이 따르지 않음에 이르러서는 복망(覆亡)의 화가 또 이와 같으니,
태갑(太甲)이 성탕(成湯)의 도(道)를 따를 줄 모르면 하걸(夏桀)의 복망(覆亡)한 화를 또한 거울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재(哉)는 비로소이다.
명조(鳴條)는 하(夏)나라가 거주하던 곳이요, 박읍(¨]邑)은 탕왕(湯王)이 거주하던 곳이니,
공격할 수 있는 단서를 만든 것은 걸(桀)이 명조(鳴條)에서 악(惡)을 쌓음에서 말미암고,
탕왕(湯王)이 덕(德)을 닦은 것은 박읍(¨]邑)에서 시작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 제3장(第三章)


『 우리 상왕(商王)이 성무(聖武)를 펴서 드러내시어 사나움을 대신하시되 너그러움으로 하시니,
조민(兆民)들이 믿고 그리워하였습니다.』

『 포소(布昭)는 펴서 드러냄이다. 성무(聖武)는 《주역(周易)》에 이른바 ‘신무(神武)하여 죽이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탕왕(湯王)의 덕(德)과 위엄(威嚴)이 천하(天下)에 펴져 드러나서 걸왕(桀王)의 사나움을 대신하되 우리의 너그러움으로써 하였다.
그러므로 천하(天下)의 백성들이 믿고 그리워한 것이다.』

 


▣ 제4장(第四章)

 

『 이제 왕(王)께서 그 덕(德)을 이으려 하신다면 즉위(卽位)하는 초기에 있지 않음이 없으니,
사랑을 세우되 어버이로부터 하시며 공경을 세우되 어른으로부터 하시어, 집과 나라에서 시작하여 사해(四海)에서 마치소서.』

『 초(初)는 즉위(卽位)한 초기이니, 처음을 삼가지 않으면 안됨을 말한 것이다.
처음을 삼가는 도(道)는 효제(孝悌)뿐인데, 효제(孝悌)는 인심(人心)에 똑같은 바이니, 반드시 사람마다 가르칠 것이 없다.
입(立)은 세움이다. 사랑과 공경을 여기에 세움에 사랑과 공경이 저기에 나타나니, 내 어버이를 친애하여 남의 어버이에게 미치고,
내 어른을 공경하여 남의 어른에 미쳐서, 집에서 시작하여 나라에 이르며 끝내는 천하(天下)에 두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사랑을 세움을 어버이로부터 시작함은 백성들에게 화목을 가르치는 것이요,
공경을 세움을 어른으로부터 시작함은 백성들에게 순종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였다.』

 


▣ 제5장(第五章)


『 아! 선왕(先王)께서 처음으로 인기(人紀)『[인륜]』를 닦으시어 간언(諫言)을 따라 어기지 않고 선민(先民)에게 이에 순종하시며,
위에 거(居)해서는 능히 밝게 하시고 아래가 되어서는 능히 충성하시며,
사람을 허여하되 완비(完備)하기를 요구하지 않고 몸을 검속하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시어 만방(萬邦)을 소유함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 인기(人紀)는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이니 효도하고 공경하는 실제이다. 상문(上文)에 태갑(太甲)이 사랑과 공경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탕(成湯)이 인기(人紀)를 닦은 것을 말하였으니, 하문(下文)에 말한 바와 같다.
강상(綱常)의 이치가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으나 걸왕(桀王)이 폐기(廢棄)하였는데 탕왕(湯王)이 비로소 닦아 회복한 것이다.
불(퓆)은 거스름이다. 선민(先民)은 전배(前輩), 구덕(舊德)과 같다.
간언(諫言)을 따라 거스르지 않고 선민(先民)에게 순종하는 것은 선(善)을 즐거워함에 진실한 자가 아니면 능하지 못하다.
위에 거해서는 능히 밝게 했다는 것은 아래에 임하는 도(道)를 다함을 말한 것이요,
아래가 되어서는 능히 충성했다는 것은 윗사람을 섬기는 마음을 다함을 말한 것이다.』

『 ○ 여씨(呂氏)가 말하였다. “탕왕(湯王)이 능히 충성함은 가장 보기가 어렵다.
탕왕(湯王)이 걸왕(桀王)을 추방하여 신하(臣下)로서 군주(君主)를 갈아치웠으니, 어찌 충성(忠誠)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탕왕(湯王)의 마음이 가장 충성스러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천명(天命)이 떠나지 않고 민심(民心)이 이반(離叛)하지 않았을 때에 걸왕(桀王)을 섬기는 마음이 어찌 일찍이 사수(斯須)『[잠시]』라도 쇠하였겠는가.
남의 선(善)을 허여하여 완비하기를 구하지 않고 자신을 검속하는 정성이 미치지 못할 듯이 여김이 있었으니,
상하(上下)와 인기(人己)의 사이에 처함이 또 이와 같았다.
이 때문에 덕(德)이 날로 성해지고 업(業)이 날로 넓어져서 천명(天命)이 돌아오고 인심(人心)이 추대하여 70리로 말미암아
만방(萬邦)을 소유함에 이르렀으니, 적루(積累)의 수고로움이 이 또한 어려운 것이다.
이윤(伊尹)이 앞에서는 하(夏)나라가 천하(天下)를 잃음이 쉬웠음을 말하였고, 여기서는 또 탕왕(湯王)이 천하(天下)를 얻음이 어려웠음을 말하였으니,
태갑(太甲)이 이것을 계승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제6장(第六章)


『 철인(哲人)을 널리 구하시어 당신의 후사(後嗣)들을 돕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 부(敷)는 넓음이니, 현철(賢哲)을 널리 구하여 당신의 후사(後嗣)들을 돕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제7장(第七章)

 

『 관부(官府)의 형벌을 만드시어 지위에 있는 자들을 경계하기를
‘감히 궁중(宮中)에서 항상 춤을 추고 집에서 취하여 노래함이 있으면 이것을 무풍(巫風)이라 이르며,
감히 재화(財貨)와 여색(女色)에 빠지고 유람(遊覽)과 사냥을 항상함이 있으면 이것을 음풍(淫風)이라 이르며,
감히 성인(聖人)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충직(忠直)한 말을 거스르며 나이 많고 덕(德)이 있는 이를 멀리하고
완동(頑童)을 가까이 함이 있으면 이것을 난풍(亂風)이라 이르니, 이 삼풍(三風)과 열 가지 잘못 중에 경사(卿士)가 몸에 한 가지가 있으면
집이 반드시 망하고, 나라의 군주(君主)가 몸에 한 가지가 있으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니,
신하(臣下)가 이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그 형벌(刑罰)이 묵형(墨刑)이다’ 하여 몽사(蒙士)『[어린 선비]』일 적에 자세히 가르치셔야 할 것입니다.』

『 관형(官刑)은 관부(官府)의 형벌(刑罰)이다. 무풍(巫風)은 항상 노래하고 항상 춤추어 무격(巫覡)『[무당]』과 같은 것이다.
음(淫)은 과함이니, 과하여 한도가 없는 것이다. 비(比)는 친함이다.
도치(倒置)되고 이치를 어김을 난(亂)이라 하니,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를 싫어하는 것이다.
풍(風)은 풍화(風化)이다. 삼풍(三風)은 건(愆)의 강령(綱領)이고 십건(十愆)은 풍(風)의 조목(條目)이다.
경사(卿士)와 제후(諸侯)가 열 가지 중에 한 가지가 있으면 이미 집을 망치고 나라를 망친다.
묵(墨)은 묵형(墨刑)이니, 신하(臣下)로서 그 군주(君主)를 바로잡지 않으면 묵형(墨刑)을 가하는 것이다.
구(具)는 상세히 다하는 것이다. 동몽(童蒙)의 처음 배우는 선비들을 이로써 자세히 가르치니,
이는 관청(官廳)에 들어와서 바르게 간할 줄을 알게 하고자 해서이다.
후에 태갑(太甲)이 욕심으로 법도(法度)를 무너뜨리고 방종으로 예(禮)를 무너뜨렸으니,
이윤(伊尹)이 미리 그 기미를 보았으므로 간곡하게 이것을 언급한 것이다. 유시강(劉侍講)이 말하였다.
“묵(墨)은 곧 숙향(叔向)의 이른바 하서(夏書)에 ‘혼(昏)과 묵(墨)과 적(賊)은 죽이는 것이 고요(皐陶)의 형벌이다.’ 라는 것이니,
탐욕하여 관(官)을 무너뜨림을 묵(墨)이라 한다.”』

 


▣ 제8장(第八章)


『 아! 사왕(嗣王)은 그 몸을 공경하여 이를 깊이 생각하소서.
성인(聖人)의 법(法)이 양양(洋洋)하여 아름다운 말씀이 매우 드러나시니,
상제(上帝)는 일정하지 않으시어 선행(善行)을 하면 온갖 상서(祥瑞)를 내리고 불선(不善)을 하면 온갖 재앙(災殃)을 내려 주십니다.
당신은 덕(德)에 있어서는 작다고 여기지 마소서. 만방(萬邦)의 경사(慶事)입니다.
당신은 덕(德)이 아닌 것에 있어서는 크다고 여기지 마소서. 그 종사(宗社)를 실추(失墜)하실 것입니다.”』

『 탄식하고 말하기를 “태갑(太甲)은 마땅히 삼풍(三風)과 십건(十愆)의 교훈으로 몸을 공경하여 생각하고 잊지 말라.” 한 것이다.
모(謨)는 꾀를 이르고, 언(言)은 가르침을 이른다.
양(洋)은 큼이요, 공(孔)은 심함이니, 그 모훈(謨訓)이 크게 밝아서 소홀히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불상(不常)은 거취가 일정함이 없는 것이니, 선(善)을 하면 온갖 상서(祥瑞)를 내리고
악(惡)을 하면 온갖 재앙(災殃)을 내려 주어서 각기 유(類)에 따라 응하는 것이다.
작은 선(善)이라고 하여 하지 않지 말아야 하니 만방(萬邦)의 경사(慶事)가 작은 데서 쌓이며,
작은 악(惡)이라고 하여 하지 말아야 하니 종사(宗社)가 실추됨이 큰 것에 있지 않으니,
선(善)은 반드시 쌓은 뒤에 이루어지고 악(惡)은 비록 작더라도 두려워할 만하다.
이는 윗글을 총결(總結)하고 또 천명(天命)과 인사(人事)의 화복(禍福)을 가지고 거듭 경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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