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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大學] 중용[中庸]
사서(四書)의 체제를 완성시킨 주희(朱熹)는 사서를 읽을 때
『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의 순서로 읽으라고 권한다.
이 순서는 난이도만을 고려한 것이 아니고 사서의 내용에 비추어서 공부하는 순서를 정한 것이다.
즉 “『대학』에서는 규모를 정하고, 『논어』에서는 근본을 세우며,
『맹자』에서는 발현된 부분을 관찰하고, 『중용』에서는 옛 사람의 미묘한 곳을 구하라”는
그의 주장에서 사서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단순히 사서를 읽는 방법만을 제시한다기보다
사서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자신을 수행해야 하는가라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대학』과 『중용』이 독립된 저작으로 사서의 일부분이 된 뒤
『대학』과 『중용』은 성리학에서 인간의 자기수양의 근거와 방법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중요한 저작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런 만큼 성리학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서 이 책을 둘러싼 많은 논란이 전개되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학문의 전통이 수립되기도 하고 확증되기도 한다.
중국의 저명한 사상사학자 서복관은
『중용』은 도덕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보장해 주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다고 하며,
『대학』은 마음[心]과 의지[意]를 중심으로 하여
도덕과 지성을 하나의 영역으로 묶어 놓은 책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서복관의 설명은 주희에 의해 구상된 사서체제 속에서
『대학』과 『중용』이 차지하는 위치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논어』와 『맹자』가 주로 구체적인 대화나 이야기를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대학』과 『중용』은 유학의 도덕과 형이상학에 대한 이론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학』과 『중용』이 『논어』나 『맹자』에 비해서
이론적인 측면을 많이 다룬 것이라고는 하지만
유학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실천과 분리된 이론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주희가 『대학』과 『중용』의 체제를 완성한 이후 많은 학자들은
주희가 제시한 대학관과 중용관에 도전을 하기도 하고 새롭게 구성하기도 한다.
♣ 대학大學, 경1장 4~5 절
예전에 온 세상에 밝은 덕을 밝히고(明明德)자 한 사람은 먼저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고(治其國)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집안을 반듯하게 하였다.
자신의 집안을 반듯하게 하고(齊其家)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몸을 닦았다.
자신의 몸을 닦고(修其身)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았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正其心)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였다.
자신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고(誠其意)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앎을 극한까지 확충(致其知)시켰다.
그와 같은 앎의 확충은 사물을 탐구하는 데 있다.
사물이 탐구된 뒤에 앎에 도달한다.
앎에 도달한 뒤에 의지가 성실하게 된다.
의지가 성실하게 된 뒤에 마음이 올바르게 된다.
마음이 올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여진다.
몸이 닦여진 뒤에 집안이 반듯해진다.
집안이 반듯해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진다.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온 세상이 태평해 진다.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欲治其國者,先齊其家。欲齊其家者,
先修其身。欲修其身者,先正其心。欲正其心者,先誠其意。欲誠其意者,
先致其知。致知在格物。物格而後知至。知至而後意誠。意誠而後心正。
心正而後身修。身修而後家齊。家齊而後國治。國治而後天下平。
♣ 중용中庸, 제20장 8~11 절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는 다섯 가지이고,
그것을 행하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즉 군신․부자․부부․형제․친구 간의 사귐,
이 다섯 가지가 천하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인 도(道)이다.
그리고 지혜로움(知)과 인자함(仁), 용맹스러움(勇)
이 세 가지가 천하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인 덕(德)이다.
그러나 이것을 행하게 하는 방법은 한 가지(→성(誠))이다.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고심해서야 알기도 하지만 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어떤 사람은 마음에 걸림이 없이 편안하게 행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할 때만 행하고
어떤 사람은 힘써 열심히 행한다.
그러나 결과를 성취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공자가 말하였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혜로움(知)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자함(仁)에 가까우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용맹함(勇)에 가깝다.
이 세 가지를 알면 몸을 닦는 방법을 알 것이며,
몸을 닦는 방법을 알면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 것이다.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면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 것이다.”
天下之達道五,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父子也,夫婦也,昆弟也,朋友之交也:五者天下之達道也。
知、仁、勇三者,天下之達德也,所以行之者一也。或生而知之,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及其知之一也;或安而行之,或利而行之,或勉強而行之,及其成功一也。
子曰:「好學近乎知,力行近乎仁,知恥近乎勇。知斯三者,則知所以修身;知所以修身,
則知所以治人;知所以治人,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
대학과 중용은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압축한 책이다.
논어는 사람들의 대화를 주섬주섬 모았다.
주로 공자가 한 말을 받아썼다.
반면, 대학과 중용은 공자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글 말로 썼다.
공자의 생각을 정교하게 다듬고 쌓았다.
어떤 이의 생각이 커다란 학문으로 발전하려면 규범이 필요하다.
공자의 여러 말과 행동은 대학과 중용으로 유학이 된다.
유학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기 모습이 조금씩 달랐다.
대학과 중용에 대한 해석의 중심을 무엇으로 두느냐에 따라
두 책에 뜻을 빼거나 더했다.
성리학, 양명학, 고증학. 우리나라의 실학.
대학과 중용은 유학의 출발점이자 공자 사상의 핵심이다.
여기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갈 수는 있어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유학에 입문하려는 사람한테 가장 먼저 읽으라고 권하는 책이다.
논어를 읽었으면 바로 다음에 꼭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기도 하다.
대학은 강령을 모은 책이다.
중용은 그 강령의 방법을 논한 책이다.
학문의 목표와 방법을 이 두 권으로 정리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대학과 중용은 정치적 느낌이 강하다.
세상을 평화롭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자기 수양을 강조한다.
통치자의 덕을 강조한다.
지배자의 덕이 백성에게 두루 미친다는 게 줄거리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드는 예가 임금에게나 어울린다.
두 책에는 임금이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지가 강렬하게 나타난다.
공자가 추구했던 꿈이, 바로 그것이었니까.
물론, 대학과 중용이 꼭 지배층의 덕성을 키우는 교과서라고 단정할 순 없다.
유학의 핵심은 본성의 발현이었기에 누구에게나 삶의 지침서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성실한 사람을 가장 좋게 여긴다.
흔히들 말하는 성실,
그것이 유학에서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행동이 하나 되는 길이다.
도다. 동양 철학은 인간 행위의 근거를 자연 질서에서 찾았다.
그 방법이 중용이다.
중용은 때에 맞게 행동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려면 꼭 갖추어야 할 게 세 가지다.
지, 인, 용. 지식, 실천, 용기.
공자는 역시나 지, 인, 용이 뭐라고 꼭 집어 말하지 않는다.
이분 말하는 방식이 그렇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혜로움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자함에 가까우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용맹함에 가깝다.
" 가까운 거지, 바로 그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왜 이렇게 말할까?
공자는 지나침을 경계했다.
지식이 지나치면 교만해지고,
실천이 지나치면 반성이 적고,
용기가 지나치면 생각이 없다.
세 가지가 조화롭게 어울린 상태가 성실함이다.
그 성실함으로 중용에 이른다.
그러면 사람은 하늘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
정말이지 이렇게 행동하기는 어렵다. 무척 어렵다.
공자도 중용의 길을 가기는 어렵다고 수차례 말한다.
수많은 제자가 있었으나, 안회만이 그 중용을 실천했다고 한다.
가난하면서도 너그럽고 만족스러운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겠는가?
안회는 그걸 해낸 사람이다. 성인이다.
성인은 배우지 않아도 하늘의 뜻과 어울려 행동하는 자다.
평범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깨달아 실천하는 일을 꾸준히 반복하란다.
이것이 바로 성실이다.
공자에게 배움이란 성실이었다.
꾸준히 인을 깨닫고 실천하는 노력이었다.
성실한 사람은 중용의 길을 걷는다.
하늘의 뜻과 자신의 행동을 일치시킨다. 도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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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孟子)의 4단(四端)과 4덕(四德)
4단(四端)
4단(端)은 실마리의 뜻으로, 유교에서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네가지(仁 義 禮 智) 마음씨를 말한다.
① 측은지심(惻隱之心) :
인(仁)에서 우러나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 즉 곤경에 처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② 수오지심(羞惡之心) :
의(義)에서 우러나는 부끄러워하는 마음, 즉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③ 사양지심(辭讓之心) :
예(禮)에서 우러나는 사양하는 마음,즉 남을 공경하고 사양하는 마음
④ 시비지심(是非之心) :
지(智)에서 우러나는 시비를 따지는 마음,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능력
4덕(四德)
군자가 행하여야 한다는 네가지 품성
인(仁), 의(義), 예(禮), 지(智)
[맹자의 4덕 이외]
① 천지자연의4덕 : 원(元, 으뜸), 형(亨, 형통), 이(利, 이로움), 정(貞, 곧음)
② 여자가 갖추어야 한다는 4덕 : 마음씨, 말씨, 맵씨, 솜씨 품성
③ 인륜의 4덕 : 효(孝, 효도), 제(悌, 공경), 충(忠, 충성), 신(信, 신의)
④ 불교 열반의 4덕 : 상(常, 항상), 낙(樂, 기쁨), 아(我, 나), 정(淨, 깨끗함)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맹자가 독창적으로 주창한 인성론으로서 ‘사단설’ 또는 ‘성선설(性善說)’이라고도 한다.
성선설이란 사람의 본성은 ‘선(善)’이라고 보는 학설이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의지적인 확충작용에 의해 덕성으로 높일 수 있는 단서를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다.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이 4단(四端)이며,
그것은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근원을 이룬다.
맹자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왕도정치인데, 이 왕도정치가 가능한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보고, 그 마음을 확대하여 나가면 ‘인의예지’ 네 가지 덕을 완성하여,
다시 이 덕행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교화시킴으로써 왕도정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맹자는 왕도정치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
왕이 먼저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으면,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정치가 있다.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정치를 행하면 천하 다스리기를 손바닥 안에서 움직일 수 있다.
” 여기서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란,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여,
사람의 불행을 앉아서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
이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면 마치 손바닥 위에서 물건을 굴림과 같이
아주 쉽게 공을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맹자는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은 사람에게 본래 있는 것이라며 성선설을 입증하고 있다.
“사람들은 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까닭은 이러하다.
이제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다 놀라고 불쌍한 마음을 가진다.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 함도 아니며,
마을 사람들과 벗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하여 그러는 까닭도 아니며,
그 원성을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맹자는 사람들은 다 차마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앞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다.
즉, 어린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워 근심하고 깊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반드시 달려가 구하려고 하는데, 이는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근본 마음이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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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 이해하기
논어가 언제 편찬됐느냐에 대해서 현재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한(漢) 초에 이미 노논어, 제논어, 고논어의 세 논어가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논어의 편찬 시기는 한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어에는 논어의 성립 시기를 알려주는 분명한 언급은 없다.
다만 태백(泰伯) 편에 증자(曾子)가 임종할 무렵의 일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논어의 성립 시기는 적어도 증자가 사망한 이후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는 『맹자』이다.
공자의 문도임을 자인한 맹자의 저서 안에는 논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에 근거하여 논어의 성립 시기를 맹자 이후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것은 논어에 있는 공자의 말을 인용할 때 “論語曰”이라고 하지 않고,
바로 “孔子曰”이나 “子曰”, 또는 “仲尼曰”이라고 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논어의 성립 시기에 관한 정설(定說)은 없다.
다만 춘추 말에서 전국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논어가 성립되었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논어를 누가 편찬했는가도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송(宋)의 정자(程子)는 논어에서 오직 유자(有子)와 증자(曾子)만을 자(子)로 칭하는 것에 주목하여
논어가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편찬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견도 많다.
송의 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에 인용된 한(漢)의 대학자 정현(鄭玄)의 주장에 의하면
논어는 중궁(仲弓),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현재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논어가 공자의 이대(二代) 제자나 그 이후의 문인들에 의하여 편찬되었으리라는 것뿐이다.
인쇄술이 아직 발명되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 책은 필사(筆寫)나 구전(口傳)을 통하여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책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당연히 많은 이본(異本)들을 낳았다.
논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漢) 초기에 세 종류의 논어가 있었다.
이른바 노논어(魯論語), 제논어(齊論語), 고논어(古論語)가 그것이다.
노논어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를 중심으로 전해지던 것으로 도합 20편(編)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논어의 편제(編制)는 이 노논어를 따른 것이다.
제논어는 지금의 산동성 일대인 제나라의 학자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것이다.
도합 22편으로 문왕(問王), 지도(知道)의 두 편이 더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장구(章句)도 노논어보다 많았다고 한다.
고논어는 한(漢) 대에 공자의 구택(舊宅)을 허물다 그 벽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현재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堯曰)의 제2장 “子張問於孔子曰” 이하를 별도로 자장(子張) 편(編)으로 독립시켜
결국 자장 편이 둘 있는 21편이다.
고문(古文) 즉 옛 글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쓰여져 있어 고논어라고 한다.
현재 이들 세 논어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보는 논어의 성립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한 성제(成帝) 때의 인물인 장우(張禹)는 본래 노논어를 전수받았으나,
제논어의 좋은 점도 취하여 자기나름의 논어를 만들었다.
그가 안창후(安昌侯)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 논어를 장후론(張侯論)이라 하는데, 세상에서 귀하게 여겼다.
또 한(漢) 말에 정현은 노논어의 편장(編章)을 주로 하고, 제, 고논어를 참고하여 주(註)를 달았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위(魏)의 하안(何晏) 등이
당시 전해져 오던 여러 학자들의 좋은 점을 취하여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펴냈다.
현재 우리가 보는 논어는 이 『논어집해』를 따른 것이다. 장후론과 정현의 논어 또한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99년 5월 22일 동아일보에 BC 55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논어 죽간(竹簡)본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중국 하북성 팔각랑(八角郞) 촌에서 농민들이 수로공사를 하던 중 한 무덤에서 죽간을 발견하였는데,
그 내용이 논어라는 것이다.
그 무덤은 BC 55년 사망한 제 6대 중산왕(中山王) 유수(劉修)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무덤의 죽간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논어가 된다.
중국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기대된다.
논어가 전해지는 과정이 이와 같았던 만큼 논어에는 앞뒤의 문맥이 이어지지 않는 곳이 상당히 있다.
앞이나 뒤의 문장이 빠진 곳으로 추측되는 곳도 있고, 공자나 공문(孔門)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되는 글도 있으며,
무슨 뜻인지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문장도 있다. 물론 전해지는 과정에서의 착간(錯簡)이나 누락 때문으로 추측되나,
때로는 의도적인 조작의 가능성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그런 만큼 논어 장구(章句)의 해석도 다양하여 그야말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 할 만큼 많은 주석서(註釋書)가
발간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하에서는 논어의 중요한 주석서에 대해 개괄해 본다.
1) 하안의 『논어집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존하는 최고의 논어 주석서이자, 논어 텍스트이다.
하안 혼자 쓴 것은 아니며 손옹(孫邕), 정충(鄭沖), 조희(曹羲), 순의(荀顗) 등도 함께 관여하였다.
그 시기는 대략 위나라 정시(正始) 년간(240~254)으로 추정된다.
한(漢)의 공안국(孔安國), 포함(包咸), 주씨(周氏), 마융(馬融), 정현(鄭玄), 위(魏)의 진군(陳群),
왕숙(王肅), 주생렬(周生烈周生烈周들이 소개되어 있다.
하안 자신이 직접烈周를 단 것도 있으나, 그 자신이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하였기 때문에
자설(自說周生烈경우에는 노장 사상生烈흔적이 엿보인다.
논어生烈周 중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에 고주(古注)라고도 불리운다.
신주(新注)라고 불리우는 주자의 『논어집주』가 나오기 전까지 논어를 읽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책이었다.
2)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
6세기 전반인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의 인물 황간이 하안의 『논어집해』를 재주석한 것이다.
하안 이후 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학자들의 주석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황간 자신이 유학자이면서 불교 신봉자이기도 한지라, 노장 사상과 불교의 영향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또한 기이하고 재미있는 해설이 풍부하게 소개되어 있어, 그것이 장점이자 단점이 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실전(失傳)되었으나,
일본에서 전해 내려오던 것이 중국에 다시 역수입돼 청(淸)의 건륭(乾隆) 년간에 복간되었다.
3) 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
하안의 『논어집해』를 북송(北宋) 초에 형병이 재주석한 것이다.
원래 이름은 『논어정의(論語正義)』이나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안에 포함되어 있어
『논어주소』라고도 불리운다.
경전의 권위적 해석에 충실하여 특별히 새로운 주장 등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4) 주자(朱子)의 『논어집주(論語集注)』
중국의 유학은 한 대 이래 고전의 해석에 충실하였다.
이른바 훈고학(訓古學)이다. 그러나 북송(北宋) 중기 이후 새로운 유학의 기풍이 등장한다.
이른바 도학(道學), 이학(理學), 또는 그 완성자의 이름을 따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불리우는
성리학(性理學)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들은 유학을 새로운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우주를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려고 한 이 새로운 유학은 이정자(二程子)라고 불리우는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거쳐 주자, 즉 주희(朱熹)에 의해 완성된다.
주자는 자신의 학문의 법통을 공자에서 증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로 이르는 계보에서 찾는다.
주자는 논어, 『맹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따로 사서(四書)라고 불렀으며,
오경(五經)보다도 중요시하였다.
주자에게 공자는 인류 최대의 성인이었으며, 당연히 그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 또한 최고(最高)의 책이었다.
그런 주자가 논어를 자신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자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만큼
그의 『논어집주』 또한 논어의 가장 뛰어난 주석서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주에는 공자를 지나치게 성인시하고,
또 자신의 성리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원문을 무리하게 해석하는 등 결점도 적지 않다.
주자의 『논어집주』는 고주, 즉 하안의 『논어집해』와 대비하여 흔히 신주(新注)라고 불리운다.
이후 신주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논어에 관한 일종의 교과서로 받아들여져 왔다.
5) 유보남(劉宝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
남송(南宋) 이래 4~500년을 넘게 중국의 학계를 지배한 성리학은
청(淸) 대에 이르러 학자들의 집단적인 반발에 직면한다.
청의 학자들은 성리학에 대항하여 실증적인 고증학(考證學)을 주창하였다.
이들은 주자의 신주에서 이(理) 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부정하고,
고대의 음운학이나 언어학을 연구하여 고전을 당시의 뜻 그대로 읽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청 대 고증학의 연구가 총 집대성된 것이 유보남의 『논어정의』다.
유보남은 고주, 즉 하안의 『논어집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한유(漢儒), 송유(宋儒)를 비롯하여 명(明), 청 대 학자들의 장점을 모두 섭렵하고 있다.
가히 전통 시대 논어 연구의 최정점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책 전부를 유보남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유보남이 집필하다 중도에 그만둔 것을 아들 유공면(劉恭冕)이 계속하여 동치(同治) 5년인 1866년 출판하였다.
6)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논어 해석은 주자의 신주(新注) 일색이었다.
주자학이 국교이다시피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실학(實學)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세운 실학자들은 당시 청의 고증학에 눈을 돌려 경전을 재해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소산으로 나타난 것이 다산의 『논어고금주』다.
다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답게 논어에 관한 고금의 주를 두루 섭렵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청 대의 학자들과 일본의 오규소라이(荻生徂徠)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하다.
다산의 『논어고금주』는 1812년 다산의 나이 52세 때 유배지인 강진의 초당에서 쓰여졌다.
이외 논어의 주석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나,
그 중 일본의 이또진사이(伊藤仁齋)의 『논어고의(論語古義)』,
오규소라이의 『논어징(論語徵)』도 눈여겨 볼 만한 책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논어를 연구한 책으로는 중국의 조기빈(趙紀彬)의 『논어신탐(論語新探)』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反논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나온 책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교조주의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또 중국의 정수덕(程樹德)의 『논어집석(論語集釋)』은 논어의 각종 주 중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집대성한 책으로 논어의 여러 주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논어의 주석서는 아니지만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와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도
논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그것은 이 책이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전기(傳記)이기 때문이다.
다만 크릴(H. G. Creel)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몇몇 부분의 신빙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크릴이 쓰고 이성규 교수가 번역한 『孔子 ― 인간과 신화』도 논어를 읽는데 여러모로 많이 도움이 된다.
저자는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공자에 관한 여러 잘못된 전승(傳承)을 비판하면서 공자를 합리주의자로 재정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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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사상
서양철학은 한마디로 플라톤의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이 서양철학을 대표할만큼 절대적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을 대표할 철학도 있다.
바로 공자다.
공자는 도인도 아니고 유림들이 숭배하는 우상도 아니다.
공자는 오늘날 관점에서 봐도 놀라울 정도로 위대한 선각자요,정치사상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1.공자는 (편향된)도덕주의자가 아니다.
공자하면 자동적으로 도덕군자라고 떠올리는 데,문제는 도덕이 뭐냐는 것이다.
공자의 도덕은 쉽게 정의내릴 수 없다.
상식적이고 저급하고 편협한 도덕이 결코 아니고 차원이 아주 다르다.
개인과 집단을 훨씬 넘어선 세계적 보편적 大도덕이다.
공자사상의 핵인 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인은 인류애고 박애주의니까 이를 담은 무한정 이타적도덕주의를
공자의 도덕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또,공자는 도덕을 정치와 분리하지 않았다.
도덕없는 정치는 무의미하며 정치없는 도덕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도덕과 정치를 떼어놓지만 공자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정치를 모르면서 정치를 배제하고,도덕을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
그런 도덕은 이미 도덕이 아닌 것이다.
2.공자는 법치주의를 단호히 반대했다.
법이상의 것을 추구했다.
사랑과 평등이 실현된 사회.
공자는 인치仁治,즉 덕치주의자다.
예나 지금이나 법치가 판을 치는 세상인데,공자는 법이 만능도 아니고
세상을 바로 잡을 수없다는 것을 알았다.
악법도 많을뿐더러 법으로 사람을 강제하고 지배한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며,
오로지 덕으로써 감화해서 자발적으로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한다고 했다.
문명화가 될수록 법은 더 강화되었지만 인심은 싸나워지고 인정이 메말라가는 것을 볼때,
법대로'가 얼마나 위험하고 맹점이 많은 것인지 깊히 돌아보지 않을 수없는 것이다.
공자는 법없이도 살수있는 세상을 꿈구었다.
바로 가족이 그 전범이다.수신~평천하는 가족주의의 대확장이다.
가족의 도,운영방식,메카니즘을 토대로 세상을 다스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이상적 사회의 밑그림은 이 가족에서 나왔고,실현된 사례도 많다.
부모가 자식이 못났다고 차별하지 않듯이,
국가도 약자와 빈민을 배려해서 선진국처럼 평등하게 잘 살수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3.공자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경계했다.
공자가 목숨건 것은 딱 한가지다.
仁의 실현을 살신성인하는 것이다.
당연히 仁과 배치는 것과도 목숨걸고 싸워야한다.
자본주의를 사익추구,이기주의로 볼때,공자는 이에 맞서지 않을 수없다.
공자는 이익이 아니라 인의,도덕이라고 숱하게 강조했고,
안빈낙도를 이상시했는 데,어찌 자본의 농락에 놀아날 수있겠는가.
가난을 걱정하지 말고 균분,즉 평등하지 못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고도 했다.
이기주의는 약육강식의 잔혹한 사회를 낳는다.
공자는 그래서 (일부만)잘먹고 잘살자가 아니라,
모두가 고르게 바르게 잘 살자고 했던 것이다.
이는 공화,공생주의이고,나아가선 사회주의의 원조라 할 수있겠다.
공자는 여러모로 대 선각자이다.
4.공자는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민주주의가 뭐냐에 따라 논쟁이 가능하지만,민주를 민중을 사랑하는 위민,
애민주의로 압축할때,공자가 민주주의자임은 틀림없다.
仁사상은 부자 강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약자와 기층민중을 위한것이다.
지금이 민주사회라지만 약자,빈민의 처지가 어떠한가를 살펴본다면
공자가 더 민주주의자가 아닐 수없다.
시대를 2500년이나 앞서간 공자가 그리운 이유다.
예수는 "세상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는 불가능한 말을 남겨 유명해졌지만,
공자는 "민중을 <네가족처럼만 사랑하라>"고 더 현실적인 말을 남겼는 데,
왜 공자의 사상은 현대에 꽃피우지 못하는 걸까.
5.공자는 중용의 도를 갈파하지 않았다.
아니,정도로서의 중용만을 말했다.
공자의 중용은 일반적 의미의 중간이나 중도,중립이 아니다.
仁에 부합하고 義에 합당한 것이 중용이다.
해서 중용은 공자사상 전부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무엇이 인이고 의인가를 알아야 중용도 파악되는 것.
인간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가치선택을 하며 산다.
중도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중간이 아닌 옳은 선택을 해야하고
그럴려면 철학을 알고 공자도 이제는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仁이고 인은 사랑이고 평등이다.
이를 아는 이상 이의 사회적 구현을 위해 작은 노력이나마 마다할 수있겠는가!
공자는 진보주의자로서 가히 사회혁명가의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현실은 보수주의자로 낙인찍어 별 쓸모도 없는 존재로 전락시켰다.
성선설 [性善說]
사람은 선한 본성을 타고난다는 맹자(孟子)의 인성론(人性論).
〈시경 詩經〉·〈주역 周易〉 등의 경전에도 성선에 관한 사상이 보이며,
이를 체계화한 것이 맹자의 성선설이다.
〈중용 中庸〉에서는 "천명을 성이라 이른다"(天命之謂性)고 하여
성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
사람이 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것으로 규정했는데, 맹자는 이것을 선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 사람이 누구나 남의 불행을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고
이로부터 4단(四端)과 4덕(四德)을 이끌어낸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의 실마리이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의 실마리이며,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의 실마리이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智)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선한 성을 타고나지만
모두 선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인의예지의 4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에 차별이 있어서가 아니라
선의 실마리를 힘껏 배양하고 확충하지 않은 결과라고 보고
이것을 군자(지배자)와 소인(피지배자)을 구분하는 근거로 삼았다.
즉 군자는 그것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반면
소인은 보존하지 못하고 상실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또 이러한 인의예지의 본성이 현실사회에서는 군신·부자 관계,
지배와 피지배 관계 등 사회 윤리의 측면에서 구현된다고 보았다.
즉 효친(孝親)·충군(忠君) 등의 윤리 행위가
모두 사람의 4단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 이는 군자가 통치하여 그의 선한 성을 소인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인정(仁政)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맹자의 성선설은 유학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에 의해 계승되었다.
주희는 인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고
본연지성을 순선(純善)한 것으로,
기질지성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맹자가 말한 성선은 본연지성에 해당한다.
주희의 성론도 기질지성의 혼탁한 정도에 따라
성인·군자와 일반사람들로 구분된다고 하여
당시의 신분제사회를 뒷받침해주는 이념의 역할을 했다.
한편 우리나라에는 고려말에 유입된 주자학(朱子學)이
조선 중기 이후 지배사상의 위치를 확고히 했기 때문에
주자학 내에서의 성 이해가 활발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주희의 본연·기질지성론이
당시의 신분제사회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분제사회질서가 동요되면서
그와 같은 논리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적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맹자가 말한 성은 선을 좋아하는 기호에 불과하다고 하여
성으로 인간을 규정했던 성리학적 사유를 부정한
정약용(丁若鏞)의 성기호설(性嗜好說)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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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오경 [四書五經]
유교의 경전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과
다섯 가지 경서인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를
아울러 이르는 말.
[사서오경(四書五經)은 유교의 핵심적인 경전]
흔히 유교의 경전이라 하면 사서삼경(四書三經) 또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일컫는데
이는 유교의 경전 중에 가장 핵심적인 책들이다.
사서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네 개의 경전이며,
삼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痙)’ ‘주역(周易)’의 세 경서를 뜻한다.
여기에 ‘춘추(春秋)’와 ‘예기(禮記)’의 경서를 포함한 것이 오경이다.
또 오경에 악기(樂記)를 더하여서 육경(六經), 육예(六藝), 육학(六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경전들의 개요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 사서(四書)
1. 논어(論語); 공자의 어록을 집성. 공자의 정치론인 군자론(예약정치), 인(仁), 교육관과 수양론등의 내용으로 구성.
2. 맹자(孟子); 맹자의 어록을 집성. 맹자의 정치론인 천(天), 군자와 왕도정치(王道政治)등의 내용으로 구성
3. 대학(大學); 오경중 하나인 예기의 42편을 독립하여 편집. 군자정치와 유교의 정치론과 수양론등 순자학의 기초자료
4. 중용(中庸); 오경중 하나인 예기의 31편을 독립하여 편집. 유교의 도덕론등으로 맹자학의 기초자료
[공자(孔子)ㅡB.C. 551 ~ 479 노(魯)나라] 중국 춘추시대의 교육자·철학자·정치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
[맹자(孟子)ㅡB.C. 372 ~ 289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의 사상가.
공자의 인(仁) 사상을 발전시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 인의의 정치 추구.
유학의 정통으로 숭앙되며 `아성`이라 불린다.
[순자(荀子)ㅡB.C. 298? ~ 238?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말기의 유가 사상가이자 학자.
공자의 사상 중 예(禮)를 강조하여 발전시켰는데,
악한 본성을 예(禮)를 통해 변화시켜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
■ 오경(五經)
1. 시경(詩經); 중국 고대의 시가집. 국풍(國風; 고대의 풍속이 담긴 노래),
아(雅; 소아와 궁중시가인 대아등), 송(頌; 조상을 칭송하는 노래)등으로 구성
2. 서경(書經); 상서(尙書)라고도 부르며 임금의 말(言)을 담은 요순에서부터 주나라 무왕때까지의 역사서.
우서(虞書), 하서(夏書), 상서( 商書), 주서(周書)등으로 구성.
3. 역경(易經); 주역(周易)이라고도 부르며 고대중국의 점복서.
8괘와 64괘, 단전과 송전, 해설집 및 계사전과 서괘전등의 부록으로 구성
4. 예기(禮記); 중국 고대의 각종 의례의 집성. 주례(周禮), 의례(儀禮)와 함께 삼례라 한다.
5. 춘추(春秋); 임금의 업적(行)을 담은 역사서. 공자가 편찬한 춘추시대 노나라 은공에서 애공까지의 연대기.
해설서인 춘추전으로는 좌씨, 공양씨, 곡량씨의 삼전이 있다
조선시대 찬란한 유교문화와 함께 양명학·성리학·실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학문연구가 있게 된 것도
이들 경서를 바탕으로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 등의 성리학자와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의 실학자가 노력한 결과다.
유교라는 종교와 학문으로서의 유교 경전에 대해 논하려면 앞서 언급한 경전 외에도 많은 책들과 학문을 논해야 하나
이 자리에서는 사서오경과 유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ㅡ [사서(四書)의 유래]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사서라고 한다.
송나라 때 정자라는 사람이 오경 중 하나인 공자가 편찬한 예기(禮記)에서 대학, 중용을 분리해
논어, 맹자와 함께 엮어내 사서로 만들었다. 그 전에는 오경이 주로 읽혀졌으나 내용이 어려워 널리 읽히지 못했다.
하지만 송나라 때부터 편찬된 사서가 중시되기 시작해 원나라 때는 고시 과목으로 중시됐다가
명나라의 영락제에 의해서 사서대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주자학(성리학 性理學)을 집대성하여 중국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친 주자(12세기 남송)는
사서대전에 평생작업으로 주해(주석)를 달아 사서집주(史書集註)를 냈다. 이를 토대로 한 사서가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사서를 배울 때는 먼저 대학을 읽고 학문의 깊이를 정한 다음 논어에서 근본을 배운다.
이어 맹자에서 그 발전을 터득한 후에 마지막 중용에서 선인들의 높은 사상을 음미하는 것이 대체적인 순서다.
ㅡ [사서(四書)의 내용]
■ 논어(論語)
유가(儒家)의 성전(聖典)이라 불리는 중국 최초의 어록집인 공자 언행록으로 공자의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책.
여기서 공자는 인(仁)에 대해 일관되게 말한다. 인(仁)이란 자애로움·친근함·인정(人情)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공자 이전 시기에 인(仁)은 군주가 백성에게 보이는 친애의 뜻으로만 풀이됐지만
공자는 인(仁)의 의미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완전한 덕성을 나타내는 말로 확대시켰다.
■ 맹자(孟子)
맹자가 공자의 뜻을 진술해 '맹자' 7편을 추가로 저술한 책이다.
여기서는 공자가 언급하지 않는 내용도 당시 상황에 맞게 순응시켜 부가했다.
공자가 인(仁)만 말한 것을 맹자는 의(義)를 덧붙여 설명하고 있고,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패도(覇道: 힘으로 나라를 통치)를 배격하고, 절제를 강조했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의 내용도 들어 있다.
■ 대학(大學)
공자의 손자 자사가 예기 49편 중에서 42편을 별책으로 엮어 만든 것이다.
이후 주자가 `대학장구`를 만들어 경 1장, 전 10장으로 구별 지어 주석을 가하면서부터 널리 세상에 퍼졌다.
경에서는 명명덕(明明德 명덕을 밝히는 일),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 지지선(止至善 지선에 머무르는 일)을
대학의 3강령(三綱領)이라 한다.
또 격물치지(格物致知 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해 지식을 완전하게 함)·성의(誠意 일을 정성껏 하는 태도나 마음)·
정심(正心 올바른 마음)·수신(修身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제가(齊家 집안을 바로 다스림) 하면
치국(治國 나라를 다스림) 평천하(平天下 천하를 평안하게 한다) 할 수 있다는 8조목(八條目)으로 유교의 윤곽을 제시.
이로 인해 대학은 초학자가 덕으로 들어가는 문호(門戶)로 여기며, 대학을 배우고 나서 논어와 맹자를 배워야
거의 오차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경전이라 할 수 있다.
■ 중용(中庸)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저서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중용은 `예기`에 있는 `중용편`이 송나라 때 단행본으로 내려온 것이다.
여기에서 `중(中)`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며,
`용(庸)`이란 평상시를 뜻한다. 이치에 맞고 불변하지 않는 상태, 즉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길을 의미한다.
중용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본성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성을 좇아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도(道)이며, 도를 닦기 위해서는 궁리(窮理)가 필요하고,
이 궁리를 교(敎)라고 한다. 중용이 바로 이 궁리를 연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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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오경(五經)의 유래]
오경(五經)은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 경전인
`서경(書經)` `시경(詩經)` `역경(易經)`을 의미하는 `주역(周易)` 삼경에 `예기(禮記)` `춘추(春秋)`를 총칭.
경(經)이란 말은 본래 날줄로서 피륙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데,
뜻이 변해 사물의 줄거리 또는 올바른 도리란 의미를 지니게 됐다.
따라서 오경은 성인(聖人)의 모든 진리의 원천이 되는 변하지 않는 가르침이 담겨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즉,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인지에 대한 해답은 모두 오경 속에 구비돼 있다고 여겼으나
내용이 워낙 까다로워 송나라 이후 사서에 비해 호응을 얻지 못하게 된다.
오경을 경으로 칭하고 권위를 높인 것은 순자(荀子)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오경이라는 용어가 성립된 것은 전한(前漢)시대 무제 황제 때에 유교 관학으로 삼고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었던 것에서 비롯됐다.
후한시대에 와서 반고가 `백호통의`에서 오경이라는 말을 쓰면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ㅡ [오경(五經)의 내용]
■ 시경(詩經)
춘추시대의 민요(民謠)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집(詩集)이며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해지나
미상이란 주장도 있다. 시경의 내용은 매우 광범위해 통치자의 전쟁과 사냥, 귀족계층의 부패상,
백성들의 애정과 일상생활 등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이 당시의 연구를 위한 좋은 자료로 많이 쓰인다.
■ 서경(書經)
중국의 요순 때부터 주나라 때까지의 정사(正使)에 대한 문서를 수집해
공자(公子)가 편찬한 책이며 상서(尙書)라고도 한다.
서경의 일부는 후대에 와서 기록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지만 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꼽힌다. 초반부에는 중국의 전설적인 태평시대에 나라를 다스렸다는
유명한 요(堯)·순(舜)왕의 말과 업적을 기록했고,
후반부에는 BC 10세기경 은(殷)나라의 건국과 몰락에 대한 기록이 있다.
■ 역경(易經)
주역(周易)이란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는 고대 중국의 철학서 육경(六經)의 하나이다.
주역은 후세에 철학, 윤리, 정치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연구하는 경서이다.
만상(萬象)을 음양 이원으로써 설명하고 그 으뜸을 태극이라 하였고 거기서 64괘를 만들어 설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주역은 흔히 점을 보는 점서(占書)라고 부르는데 크게 경(經)과 전(傳)의 두 부분으로 돼 있다.
경은 양효(陽爻)와 음효(陰爻)를 여섯 개의 선으로 된 그림에 설명을 붙여 그 각각의 그림을 괘(卦)라고 하는데
이는 모두 64괘이다. 서죽(三竹)과 산목(算木)을 써서 그림을 구해 길흉을 판단한다.
■ 예기(禮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禮)에 관한 이론과 실제를 기술한 책이다.
주례(周禮)와 의례(禮儀)와 같이 예 자체를 기술한 책은 아니지만
음악, 정치, 학문에 걸쳐 예의 근본정신에 대해 기록돼 있다.
특히 예기는 변하는 시대성에 부응할 수 있는 예에 관한 이론과 해설을 모았다는 점에서 중시됐다.
■ 춘추(春秋)
사건의 발생을 연대별과 계절별로 구분하던 고대의 관습에서 유래해 공자가 죽기 직전까지
노(魯)나라의 12제후가 다스렸던 시기의 주요 사건들을 기록한 책으로 ‘춘하추동’을 줄인 이름이다.
ㅡㅡㅡ [유교와 조선시대의 학문적 변천]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가 가장 크게 꽃피우게 된다. 이때 조선의 유교 학문에 가장 영향을 준 건
주자학(송나라 주희)과 양명학(명나라 왕양명)이 있으며, 이 두 개를 묶어 송명이학(宋明二學)이라 부른다.
주자학은 ‘경물(敬物)’을 주장, 객관적인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먼저라 하고,
양명학은 주자학으로부터 시작됐지만 ‘치양지(致良知), 즉 주관적인 사람의 마음을 깨닫는 것을
우선이라 주장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조선 초기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이 이어져 조선 중기에 성리학 융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들이 서경덕, 이언적, 이황, 기대승, 이이, 성혼, 조식, 김인후 등이다.
이언적은 최초로 무극태극(無極太極) 문제를 논한 학자이며, 서경덕은 중국의 기론(氣論)을 도입한 학자이다.
이황은 주자학의 정통을 계승해 호발설(互發說)을 주장했고 이이는 한국 성리학을 정립해 일도설(一途說)을 주창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급격한 당파 싸움이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당파싸움으로 율곡의 이기론(理氣論)과
이황의 주리론(主理論)에 대한 이견 차이가 있다.
주리론은 이(理)는 기(氣)의 활동의 근본이 되고 기를 주재하고 통제하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한다.
반면 이기론은 주리론에 바탕을 둬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떨어져 있을 순 없지만 동시에
서로 섞일 수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차이가 있다.
현재까지도 이를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 해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조선후기는 실학사상을 중심으로 한 학문이 발달한다.
실학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두었으나 성리학의 모순을 비판한 학문이다.
이 중 율곡에 뿌리를 두고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조선의 후진성을 개혁하자고 주장한
실학의 한 학풍을 북학파라 하였는데 박지원, 박제가가 이에 포함된다.
이와는 반대파인 퇴계에 뿌리를 둔 유형원, 이익의 뒤를 이어 정약용이 실학을 집대성하게 된다.
이후 실학은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와 김홍집 등의 온건개화파로도 나뉘게 되고 동학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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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오계 [花郞五戒]
事君以忠(사군이충), 事親以孝(사친이효), 交友以信(교유이신), 臨戰無退(임전무퇴), 殺生有擇(살생유택)
▒ 삼강오륜 [三綱五倫]
중국 전한(前漢 BC 206~25) 때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가 공맹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設)을 논함에서 유래된 것으로, 유교의 세 가지 기본강령과 다섯 가지 실천적 도덕강목.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기본적인 사회윤리로 존중되어왔다.
삼강은 임금과 신하(君爲臣綱), 어버이와 자식(父爲子綢), 남편과 아내(夫爲婦綱)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1431년(세종13)에는 집현전 부제학 설순(?循) 등이 왕명에 따라 삼강의 모범이 될만한 충신 · 효자 · 열녀를
각각 35명씩 모두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 칭송하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1481년에 한글로 번역되어 간행되었고 그뒤 1511년(중종 6)과 명종 · 선조 · 영조 때에
각각 중간되어 도덕서(道德書)로 활용되었다.
오륜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하며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모는 자녀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하며,
부부유별(夫婦有別) 남편과 아내는 분별있게 각기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붕우유신(明友有信) 친구 사이에는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장유유서는 집안과 집밖의 양쪽에 해당되는 것으로 집안에서는 형제의 차례를 말하고
사회생활에서는 연장자와 연소자의 차례를 말한다.
1797년(정조 21)에는 이병모(李秉模) 등이 왕명을 받아 ≪삼강행실도≫에 ≪이륜행실도≫를 덧붙여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편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는 교서관(校書館)에서 중간되었는데
효자 33명, 충신 35명, 열녀 35명, 형제 24명, 종족(宗族) 7명, 붕우 11명, 사생(師生) 5명 등이 수록되었다.
오륜을 각 장으로 나누어 경기체가 형식으로 만든 <오륜가(五倫歌)>가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전해지고 있으며,
주세붕(周世鵬)?김상용(金尙容)?박인로(朴仁老)?황립의 문집 내지 속고(續稿)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는 오륜이 조선시대에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윤리로서 널리 존중되어왔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흔히 삼강오륜은 봉건시대의 덕목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오늘날에도 현대적인 해석을 통하여 활용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다.
부자유친·장유유서·붕우유신은 오늘날 더욱 요망되는 덕목이며,
군신유의는 왕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것으로 대치할 경우 타당한 것이다.
부부유별 역시 남녀의 차별이 아니라 남녀 역할의 의하여 직능완수로 이해될 수 있다.
점차 삼강오륜과 같은 전통적 윤리질서를 봉건적 잔재라고 쉽게 무시해버리지 말고,
그 현대적 해석이 가지는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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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그리는 마음
고진숙 시/강창식 곡/Sop.김정아
따스한 솔바람이 산등성을 넘고
말끔한 봄빛이 들녘을 휘돌아
이 마음속에 꽃봉오리로 피어나는데
기다려지는 그대의 소식 멀기만 하구나
신록의 푸르름과 뻐꾸기 울음 소리
그대여 잊었는가 잠자고 있는가
앙상한 나무 가지 부풀어 올라
생명이 솟아 나는 신비의 소리가
내 마음속의 옛이야기를 끌어내는데
보고 싶은 그대의 모습 간절 하구나
초원을 달리는 평화스런 말굽소리
그대여 잊었는가 꿈꾸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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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안개같이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 음 음 음 밝은 빛을 쏘는 태양으로 떠서 나를 눈부시게 해야만 하는가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이 되어 내 얼굴을 자꾸만 쏘아보면서 나로 눈물을 나게 해야만 하는가 사철 밝고 뜨거운 태양으로 떠서 불꽃을 흩뿌려 날 설레게 하는 태양으로 남아야만 쓰는가 저녁 노을같이 다시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 음 음 음 하늘을 맴돌며 내려다 보는 태양으로 살아가야만 쓰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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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德經(도덕경)
중국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
≪노자≫ 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한다.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 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 德經〉이라고 한다.
노자가 지었다고 하나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변형 과정을 거쳐 기원전 4세기경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다고 여겨진다.
여러 가지 판본이 전해 오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하상공(河上公)이 주석한 것으로 알려진 하상공본과,
위(魏)나라 왕필(王弼)이 주석하였다는 왕필본의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전문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당사본(唐寫本)과 육조인사본(六朝人寫本)이 있고,
여러 곳에 도덕경비(道德經碑)가 아직도 흩어져 있어
노자의 경문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도덕경≫의 구성 체재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성립 연대 및 실질 저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는데,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하였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시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한 사람의 전작물임을 주장하는 관점은
노자를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의 실존인물로 보아
≪도덕경≫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라는 점과,
또한 비록 실존인물이라 하여도 ≪도덕경≫과는 상관이 없다는 관점에서
현존하는 ≪도덕경≫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사상 및 내용〕
그러나 ≪도덕경≫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많은 문제점과 상반된 처지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기본 사상이 변함없이 계속해서
일관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도덕경≫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는‘도는 언제나 무위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의 무위이고,
자연은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天法道道法自然).’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도덕경≫의 사상은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이다.
좋다·나쁘다, 크다·작다, 높다·낮다 등의 판단들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비교하여 만들어낸 상대적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로는 도(道)를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들의 집합체이므로
≪도덕경≫에서는 언어에 대한 부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점에서 유가사상과 현격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유가사상에서는 인위적 설정이 강조되는 예학(禮學)이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언어에 의한 규정이 강력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반면, ≪도덕경≫에서는 규정성의 파기와 언어에 대한 부정을 강조하는데,
유가사상이 중국 북방의 황하유역에서 형성된 것인 반면,
이런 무위자연의 사상은 중국 남방의 양쯔강유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기질적인 차이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북방은 생존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투쟁적이어야 하지만,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자연 조건이 순조로워 평화적이고 낭만적이었는데,
이런 분위기의 차이가 사상 형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사상이 인(仁)·의(義)·예(禮)·지(智)의 덕목을 설정하여
예교(禮敎)를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상쟁대립이 전제된 반면,
≪도덕경≫의 사상은 상쟁의 대립이 인위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보고,
무(無)와 자연의 불상쟁(不相爭) 논리를 펴나간 것이다.
〔기 능〕
이러한 내용의 ≪도덕경≫의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위·진, 남북조시대처럼 사회가 혼란과 역경에 빠져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밝혀 주는 수양서로서도 받아 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국내 유입 과정 및 성행〕
우리 나라 자료에는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왕 즉위년조에
근구수왕이 태자로 있을 때 침입해 온 고구려군을 패퇴시키고 계속 추격하려 하는 순간,
휘하의 장수 막고해(莫古解)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듣기로는 도가의 말에, 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 얻은 것이 많은데 더 욕심을 내어서 무엇합니까?”
이 말을 듣고 추격이 중지되었다고 하는데, 이 구절은 ≪도덕경≫ 제44장에 나오는 말이다.
≪도덕경≫의 구절이 장수의 입에까지 오를 정도였다면
당시 사회에서는 상당히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임에 틀림이 없고,
나중의 일이지만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도 비슷한 내용의 시를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것이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삼국유사≫ 보장봉로조(寶藏奉老條)에는 당나라 고조(高祖)가
고구려인의 오두미교 신봉 이야기를 듣고 624년 천존상과 함께 도사를 보내어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듬해 영류왕은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불(佛)·노(老)를 배우고자 하였고,
고조는 이를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보장왕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배우도록 하였는데,
당나라 태종(太宗)이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보내 주자 왕은 기뻐하며
승사(僧寺)를 지어 도사를 거처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신라에서는 575년 화랑도를 만들고 그 정신을 현묘지도(玄妙之道)라 칭하였는데,
‘현묘’라는 말은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衆妙之門)’을 연상시키는 용어로
도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술연구에 골몰하였던 김가기(金可紀)에 대해서는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 海東異蹟≫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도덕경≫을 비롯하여 여러 선경(仙經)을 계속해서 낭송하고
수련을 계속한 끝에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왕 중에서도 도교신앙이 제일 돈독하고 재위 당시 도교가 융성하였던 예종이
청연각(淸燕閣)에서 한안인(韓安仁)에게 명하여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유교경전과 대등하게 다루어서 강론시켰을 정도이므로,
당시 ≪도덕경≫을 연구하던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수준도 높았으리라 짐작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엄격한 주자학적 사상(朱子學的思想)과 그 배타적 성격 때문에
≪도덕경≫에 대한 연구가 위축되었지만,
유학자들 가운데서 주석서를 펴내어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박세당(朴世堂)은 ≪신주도덕경 新註道德經≫을 저술하였고,
이이(李珥)는 ≪도덕경≫ 81장을 40여 장으로 줄여 ≪순언 醇言≫이라는 주석서를 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도덕경≫에 관한 관심은 희박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 이외는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보는 성리학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덕경≫의 기본 흐름은 일찍부터 도교신앙과 접합되어 오면서
민중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기층의 민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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