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제3장 능구장(能久章)


 

子曰 中庸은 其至矣乎인뎌 民鮮能久矣니라.
자왈 중용은 기지의호인져 민선능구의니라.

 

공자 말씀하시길 “중용이여,참으로 지극하도다!

아~사람들이 거의 그 지극한 중용의 덕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구나.”


 

過則失中이오 不及則未至라 故로 惟中庸之德이 爲至라
 과즉실중이오 불급즉미지라 고로 유중용지덕이 위지라 

 

然이나 亦人所同得하야 初無難事로대 但世敎衰하야 民不興行이라
연이나 역인소동득하야 초무난사로대 단세교쇠하야 민불흥행이라

 

故로 鮮能之今已久矣라 論語엔 無能字하니라.
고로 선능지금이구의라 논어엔 무능자하니라.

 

지나치면 중을 잃고 미치지 못하면 이르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오직 중용의 덕이 지극함이라.
그러나 또한 사람이 한가지로 (중용의 덕을) 얻어서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 없으되
다만 세상 가르침이 쇠퇴해져서 백성이 (중용의 덕에) 일어나 행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능한 이가 적은지 이제 이미 오래되었느니라.
논어에는 ‘能’자가 없느니라.


[해설]

중용의 덕이 지극한지라 과하면 중을 잃게 되고 불급하면 미치지 못한다.
사람은 애초 하늘로 부터 중용의 덕을 얻었기에 처음에는 이를 실천하는데 어렵지 않았으나
세상의 가르침이 쇠퇴 해 지면서 중용의 덕이 흥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래전부터 중용에 능한 자가 드물게 된 것이다.
공자의 말씀이 많이 담겨 있는 논어를 보면,
옹야편(雍也篇)에 “子ㅣ曰 中庸之爲德也라 其至乎인져 民鮮이 久矣니라”
(중용은 덕이라 그 지극함이여 (중용의 덕을 행하는) 백성이 드문지 오래니라)고 하였듯이
이곳에는 ‘能’자가 빠져 있다. 즉 지극한 중용을 행하는 백성이 적다라고 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자사가 지은 중용에는 ‘지극한 중용의 덕을 능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적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고
‘能’자를 하나 더 붙여 피폐해진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右는 第三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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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제2장 시중장(時中章)

 

 

1

仲尼曰 君子는 中庸이오 小人은 反中庸이니라.

중니왈 군자는 중용이오 소인은 반중용이니라.

 

중니(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중용이오 소인은 반중용이니라.

 

中庸者는 不偏不倚無過不及而平常之理니 乃天命所當然이요
중용자는 불편불의무과불급이평상지리니 내천명소당연이요

 

精微之極致也라 唯君子라야 爲能體之요 小人은 反是니라.
정미지극치야라 유군자라야 위능체지요 소인은 반시니라.

 

중용이라 하는 것은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기울어지지도 아니하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어서 늘 그대로의 이치이니
이에 천명의 당연한 것이고 정미롭고 은미한 극치니라
오직 군자라야 능히 그 중용을 체행을 하고 소인은 이와 반대되는 짓을 하느니라.

 

 

2.
君子之中庸也는 君子而時中이오 小人之反中庸也는 小人而無忌憚也니라.
군자지중용야는 군자이시중이오 소인지반중용자는 소인이무기탄야니라.

 

군자의 중용은 군자이면서 때로 중을 하고 소인의 반중용은 소인이면서 꺼림이 없느니라.


王肅本에 作小人之反中庸也라 하야늘 程子이 亦以爲然하시니 今從之하노라
왕숙본에 작소인지반중용야라 하야늘 정자이 역이위연하시니 금종지하노라

 

君子之所以爲中庸者는 以其有君子之德하야 而又能隨時以處中也하고
군자지소이위중용자는 이기유군자지덕하야 이반능수시이처중야하고

 

小人之所以反中庸者는 以其 有小人之心하야 而又無所忌憚也니라
소인지소이반중용자는 이기 유소인지심하야 이우무소기탄야니라

 

蓋中無定體하야 隨時而在하니 是는 乃平常之理也니라
개중무정체하야 수시이재하니 시는 내평상지리야니라

 

君子는 知其在我라 故로 能戒謹不覩하고 恐懼不聞하야 而無時不中이요
군자는 지기재아라 고로 능계근부도하고 공구불문하야 이무시불중이요

 

小人은 不知有此하니 則肆欲妄行하야 而無所忌憚矣리라.
소인은 부지유차하니 즉사욕망행하야 이무소기탄의리라.

 

왕숙본에 소인이 중용에 반한다고 지었거늘 정자가 또한 써 그렇다고 하니
이제 따르노라 군자가 써 중용을 한다는 것은 그 군자의 덕이 있으면서
또한 능히 때를 따라 써 중에 처함이요 소인이 써 중용에 반한다는 것은
그 소인의 마음이 있어서 또한 기탄하는 바가 없느니라.
대개 중이라 하는 것은 정한 체가 없어서 때를 따라서 있으니 이것이 이에 늘 평상의 이치이라.
군자는 그 내게 있음을 아느니라.
그러므로 보지 않을 적에 경계하고 삼가며 듣지 않았을 적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여 때로 중을 하지 않음이 없고,
소인은 이것이(중용이 내 마음에 있음을) 있음을 아지 못하니
방자한 욕심이 망령되이 움직여서 조금도 꺼리는 바가 없느니라.

 

[해설]

‘中無定體’는 주역에 나오는 ‘神无方而易无體(신은 방소가 없고 역은 체가 없다)’의 이치와 같다.
때와 장소에 따라 신비로운 신의 작용이 나타나므로 방소가 없고
역 또한 때마다 다르게 점괘가 나오므로 일정한 체가 없듯이 중이라 하는 것도
정해진 체가 없어 때에 따라 나타남을 설명한 글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중용은 항상 삼가고 두려워하는 반면 소인의 반중용은 거리낌없이 망령되이 행동한다.

 


右는 第二章이라

 

此下十章은 皆論中庸하야 以釋首章之義며 文雖不屬이나
차하십장은 개논중용하야 이석수장지의며 문수부속이나

 

而意實相承也니라 變和言庸者는 游氏曰 以性情으로 言之면 曰中和요
이의실상승야니라 변화언용자는 유씨왈 이성정으로 언지면 왈중화요

 

以德行으로 言之면 則曰中庸이 是也니라 然이나 中庸之中은 實兼中和之義라.
이덕행으로 언지면 즉왈중용이 시야니라 연이나 중용지중은 실겸중화지의라.

 

이 아래 열장은 다 중용을 논해서 머리장의 뜻을 해석함이니
글이 비록 연결되지는 아니하나 뜻은 실로 서로 이어지니라.
和를 변하여 庸이라고 하는 것은, 유씨가 말하기를 성정으로 말하면 가로되 중화요,

덕행으로써 말하면 중용이 이것이라.
그러나 중용의 가운데에 실지로 중화의 뜻을 겸하느니라.

 

 

제일먼저 나오고 있는 仲尼(중니)라는 말은 공자의 字(자)이다.

어릴 때 名(명)이라는 이름을 얻고 커서 20세가 되었을 때 字(자)라는 이름을 얻는다.

어릴 때 이름은 태어난 모습이 유별나게 짱구라서 머리꼭대기가 언덕처럼 평평하다 하여

언덕 구(丘)자를 썻다고 (사기) 孔子世家에 적혀 있다.

그리고 중니는 공자의 부모가 곡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尼山(니산)에서 빌어서 났기 때문에 붙여진 자(字)인 것이다.

손자인 자사가 할아버지를 字로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서 정설은 없다.

그러나 손자가 할아버지를 字롤 부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법은 없었으며

구체적인 변별력 때문에 자로써 부르는 것은 무방하다고 [중용혹문]에 쓰여져 있다.

제3장부터는 모두 자왈(子曰)로 되어 있는데 유독 제일 처음 나오는 로기온자료에 "仲尼曰"이라고 한것은

이미 子思 당대에 "字" 즉 한 학파의 스승(Master)으로 불리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과 구별키 위하여 중니(仲尼)라는 字를 밝혔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하면 다음에 나오는 "子曰"은 당연히 "공자왈"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데 중니라는 말은 제30장에 한 번 다시 나온다.

그리고 제30장에서 중니가 언급되는 맥락은 중니를 극한으로 존승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제2장에서 처음으로 "중니"라는 말은 쓰고

계속 "字"로써 일관하였다가 제30장에서 다시 "중니"라는 말을 ㅆ는 자사의 수법은

"중니"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중니왈"은 "나의 위대한 할아버지 중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라는 식의

사적인 느낌과 공문(孔門)에 대한 무한한 프라이드가 담겨져 있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다음은 "君子"와 "小人"의 테마이다.

군자와 소인의 관해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그대로의 의미로 새겨도 무방하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라든가,

신분의 차이라든가,부의 소유의 차이에 의하여 외면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의 위대성은 인간을 보편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데에 있다.

공자 자신이 천한 출신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공자는 출신이나 신분에 의하여

인간이 규정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

고대사회의 사상가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덕성이다.

희랍의 모든 사상가가 "노예제"를 긍정한 위에서 평범한 시민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인간" 관에는 인간의 수준에도 못미치는 노예가 깔려있다.

서양의 보편적 인간관은 실제로 미국의 "노예해방"이후에나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有敎無類(유교무류)"라고 언명한다.

가르침이나 배움에는 류적 차별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배우면 군자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분차별성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뚯일 뿐 아니라

인간의 계발가능성에 대하여 차별성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참으로 위대한 사상이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이 참으로 실현된 사회가 20세기 대중사회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변화를 인식 못하고 스스로 자신에게 제약을 가하고 있을 뿐이다.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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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章句大全


中者는 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이오 庸은 平常也니라.
중자는 불편불의무과불급지명이오 용은 평상야니라.

 

중(中)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過)과 미치지 못함(不及)이 없음의 이름이고, 용(庸)은 평상(平常)함이다.

偏 ; 치우칠 편. 倚 ; 기울 의.


子程子曰 不偏之謂中이오 不易之謂庸이니 中者는 天下之正道오 庸者는 天下之定理라
자정자왈 불편지위중이오 불역지위용이니 중자는 천하지정도오 용자는 천하지정리라

 

此篇은 乃孔門傳授心法이니 子思 恐其久而差也라
차편은 내공문전수심법이니 자사 공기구이차야라

 

故로 筆之於書하야 以授孟子하시니 其書 始言一理하야 中散爲萬事하며
고로 필지어서하야 이수맹자하시니 기서 시언일리하야 중산위만사하며

 

末復合爲一理하야 放之則彌六合하고 卷之則退藏於密하야 其味無窮하니 皆實學也라
말부함위일리하야 방지즉미육합하고 권지즉근장어밀하야 기미무궁하니 개실학야라

 

善讀者가 玩索而有得焉이면 則終身用之라도 有不能盡者矣리라.
선독자가 완색이유득언이면 즉종신용지라도 유불능진자의리라.

 

선생님이신 정자께서 말씀하시길
“치우치지 않음을 중(中)이라 이르고, 바뀌지 않음을 용(庸)이라 이르니,
”中“이란 것은 천하의 바른 도(正道)요 ”庸“이란 것은 천하의 정한 이치(定理)이다.
이 책은 이에 공문(孔門)에서 전수한 심법(心法)이니
자사(子思)께서 그 오래됨에 다름이 있을까 두려워하셨다.
그러므로 책에 써서 맹자에게 주신 것이니 그 책이 처음에는 한 이치를 말하여 가운데에는 흩어져,
만(萬) 가지 일이 되며 끝에는 다시 합하여 한 이치가 되어 이를 풀어놓으면 육합에 가득하고
이를 거두어들이면 물러나 은밀한 데 감추어져 그 맛이 다함이 없으니 다 실한 학문이다.
잘 읽는 자가 완미하여 찾아서 얻음이 있으면,
몸을 마치도록 그것을 쓰더라도 능히 다하지 못함이 있을 것이다.

易;바꿀 역. 恐;두려울 공. 筆;쓸 필. 復; 다시 부. 放; 놓을 방. 彌;두루 미.

 


중용 제 1장 천명장(天命章)

 

1.
天命之謂性이오 率性之謂道이오 修道之謂敎이니라.
천명지위성이오 솔성지위도이오 수도지위교이니라.

 

하늘의 명령은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본성에 솔직한 것은 도(道)를 말하는 것이다.
도를 닦는 것은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품(性)이라 이르고,
천명의 성품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도(道)라 이르고,
그 성품을 따르는 길을 닦는 것을 가르침(敎)이라 이르느니라.

 

[본문 해설]

천명 = 성(性) ․ 솔성 = 도(道) ․ 수도 = 교(敎)는
대학의 첫머리에 나오는 삼강령인 명명덕(明明德)과 친민(親民)과 지어지선(止於至善)과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대학과 마찬가지로 중용도 天地人 삼재로 시작함을 알 수 있다.
하늘이 우리에게 명해준 것이 성품이므로 곧 天命之謂性이고,
하느님에게서 타고난 성품을 내가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길(道)이므로 곧 率性之謂道이고,
그 성품을 따르는 도를 잘 닦아 나가 마름질 해놓은 것이 가르침이므로 곧 修道之謂敎이다.
도를 잘 닦아 나가는 것, 즉 마름질하는 것이 바로 교육적인 가르침(敎)이 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을 받아 道를 따라가는 것이며, 그 도를 가다 보면 率性이 되고 결국 천명을 그대로 받드는 것이 된다.
성품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역 계사상전 제8장에서
공자가 “이루어진 성품을 존하고 존함이 도의의 문이라(成性存存이 道義之門이라)” 하신 말씀과 통하는 글귀이다.
주역 계사상전 제5장에서는 “한 번은 陰을 하고 한 번은 陽을 하는 것이 道이고, 이를 이어나가는 것은 善이 되며,
이를 이룬 것은 性이라(一陰一陽之謂 道니 繼之者 善也오 成之者 性也라)”하였다.

 

사람은 원래 善하게 타고 난다.
그 선을 바탕으로 이어나가면서 이룬 것이 性이 된다.
繼之者善은 1년으로 말하면 元亨의 봄과 여름을 말하고, 成之者性은 利貞의 가을과 겨울에 해당한다.
하늘 그대로 이어받기는 받았지만 어떻게 여물지 모르는 상태가 繼之者善이고
가을이 되면 부여받은 성질대로 여무는 것이 成之者性이다.
그 成之者性이 계속 存存하는 成性存存만 된다면 道義의 문이 된다는 것이다.

도는 그 體이고 義는 그 用이다. 곧 도덕과 의리이다.
성성존존하게 된다면 이것은 곧 도덕과 의리를 행하는 문이 되어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이나 우리 몸은 모두가 역의 이치로 만들어졌다.
자신의 몸을 자연과 더불어 순수하게 천명 그대로 이끌어나갈 때 率性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存存하는 것이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모습 그대로 천성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주역의 본체로 들어가서 역을 깨닫고 도를 통하게 되는데,
중용을 소주역이라 하는 이치를 맨 먼저 중용 머릿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 黃帝陰符經을 보면 “天性은 人也요 人心은 機也니 立天之道하야 以定人也니라
(하늘의 성품이 곧 사람의 것이고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는 기틀인 것이니
하늘의 도를 잘 세움으로써 사람을 정립하느니라)”라 하였다.
또한 마음에서 물건이 나오고 물건에서 죽으니 그 기틀이 눈에 있다
(心生於物하고 死於物하나니 機在於目이니라) 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보는 것에 따라 항상 흔들리므로 항상 하늘의 도를 잘 세워 용맹정진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논어의 가장 첫머리에서 ‘學而時習之(배우고 때로 익힌다)’를 내세워
항상 공부해야 함을 강조함도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命은 猶令也이요 性은 卽理也니라
 명은 유영야이요 성은 즉리야니라 

 

天以陰陽五行으로 化生 萬物하야 氣以成形하고 而理亦賦焉하니 猶命令也니라 
천이음양오행으로 화생 만물하야 기이성형하고 이리역부언하니 유명령야니라 

 

於是에 人物之生이 因各得其所賦之理하야 以爲健順五常之德하니 所謂性也이리라.
어시에 인물지생이 인각득기소부지리하야 이위건순오상지덕하니 소위성야이리라.

 

명은 영(令)과 같고 성은 즉 이치이니라.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써 화하여 만물을 내니 기운으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치를 부여해주니 (하늘이 사람에게) 명령함과 같음이라.
이에 사람과 모든 물건의 생함에는 각기 그 부여받은 바의 이치로 인하여
건순오상의 덕을 갖추고 나왔으니 성품이라 이르느니라.

 

[해설]

윗글은 주자가 달아놓은 앞주이다.
천명은 하늘의 命令이며,
性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어떻게 살라고 부여해준 보이지 않는 이치를 말함이다.
하늘이 음양오행의 이치로 만물을 화생하여 그 기운으로써 형체를 이루고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이치를 준 것이다.
천명지위성의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이치에는 건순오상의 덕이 있다.
주역 건괘 대상전에서 공자는 “하늘의 움직임은 굳건하여 군자가 이로써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는다
(天行이 健하니 君子 以하야 自彊不息하나니라)”라고 하여 하늘은 순양으로써 굳셈을 나타내었고,
곤괘 문언전에서는 “곤의 도가 순한저! 하늘을 이어 때로 행하느니라
(坤道 其順乎. 承天而時行하나니라)”고 하여 땅은 순음으로써 유순함을 말하였다.
곧 사람의 하늘과 땅의 음양의 도에 따라 健順함을 부여받았으며,
음양이 사귀는 가운데 나온 오행에 따라 仁 義 禮 智 信이라는

다섯 가지의 떳떳한 덕인 五常의 덕을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란 누구나가 健順五常이라는, 하늘이 명한 성품을 갖고 나왔다는 것이다.
중용을 ‘소주역’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머릿장에 천명을 언급하고 있으니
그것은 곧 주역의 음양 이치에 따른 글이기 때문이다.

 

率은 循也요 道는 猶路也니라 人物이 各循其性之自然이면
솔은 순야요 도는 유로야니라 인물이 각순기성지자연이면

 

則其日用事物之間에 莫不各有當行之路하니 是則所謂道也니라.
즉기일월사물지간에 막불각유당행지로하니 시즉소위도야니라.

 

‘솔’은 ‘따를 순’과 같고, ‘도’는 ‘길 로’와 같음이라.
사람이나 모든 물건이 각각 그 성품의 자연함을 따르면,
날로 쓰는 사물의 사이에 각각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곧 도이니


[해설]
道와 路를 합하여 道路가 된다.

道는 ‘머리 수(首)’와 ‘갈 지(之)’가 합한 글자로 머리가 가는 것이 으뜸이요 원칙이고,
路는 ‘발 족(足)에 ’각기 각(各)‘을 합하였으니 각각 나아가는 것으로

道는 나아가는 길의 體가 되고, 路는 用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야 할 길이 있는 한편으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각기 처한 바 위치에 따라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있음을 말한다.

 

修는 品節之也니라 性道는 雖同而氣稟이 或異니라
수는 품절지야니라 성도는 수동이기품이 혹이니라 

 

故로 不能無過不及之差할새 聖人이 因人物之所當行者而品節之하야
고로 불능무과불급지차할새 성인이 인인물지소당행자이품절지하야

 

以爲法於天下則爲之敎이니 若禮樂刑政之屬이 是也니라.
이위법어천하칙위지교이니 약예악형정지속이 시야니라.

 

수는 품절(마름질하는 것)이라.
성과 도는 비록 같으나 기품이 혹 다르니라.
그러므로 과하거나 불급함의 차이가 없지 않기 때문에
성인이 사람과 물건의 마땅히 가야할 바를 인하여 잘 품절하여 써 천하의 법을 삼으니
이를 일러 교라고 하니 예를 들어 예절과 음악과 형벌과 정치 같은 등속이니라.

 

[해설]
닦는다는 것은 마름하는 것이다.
물품을 잘 손질하고 다듬어 절도 있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명이 性이고 그 성품을 닦는 것이 道이므로 하늘이 부여하는 원리는 같으나
사람마다 타고 나는 기질적인 품성(稟性)은 각기 다르다.
타고난 성질이 급한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으며, 타고난 기질이 강한 사람도 있고 유약한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모두가 똑같이 중을 지켜나간다면 별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타고난 과불급의 차이가 있기에 성인이 사람마다 물건마다
마땅히 가야 할 바에 대해 잘 닦아나갈 수 있도록 마름질을 한다.
그것이 곧 ‘敎’, 가르침인데 이에는 예절과 음악, 형벌과 정치 등등의 여러 방법이 있다.

 

蓋人이 知己之有性호대 而不知其出於天하며 知事之有道호대
개인이 지기지유성호대 이부지기출어천하며 지사지유도호대

 

而不知其由於性하며 知聖人之有敎호대 而不知其因吾之所固有者하야 裁之也니라
이부지기유어성하며 지성인지유교호대 이부지기인오지소고유자하야 재지야니라

 

故로 子思이 於此에 首發明之하시니 而蕫子所謂道之大原이 出於天이라하니 亦此意也라.
고로 자사이 어차에 수발명지하시니 이동자소위도지대원이 출어천이라하니 역차의야라.

 

대개 사람이 자기에게 성품이 있음을 알되 그것이 하늘에서 나옴을 알지 못하며,
사물이 가야 할 길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하늘이 부여해준 성품을 따라야 하는 연유는 알지 못하며,
성인의 가르침이 있는 것을 알면서 그 나의 진실로 둔 바를 인하여 마름하는 것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자사가 이에 (중용의) 머릿장에 밝히시니 동자(董子 ; 동중서)란 이가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다 이르니 또한 이 뜻이니라.


2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이니 可離면 非道也니라 
도야자는 불가수유리야이니 가리면 비도야니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
시고로 군자는 계신호기소부도하며 공구호기소불분이니라.

 

도라 하는 것은 가히 잠깐이라도 떠나지 못할 것이며 가히 떠나면 도가 아니니라.
이런 고로 군자는 그 보지 못한 바에서 경계하고 삼가하며

그 듣지 못한 바에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느니라.

 

[해설]
우리가 가야 할 길, 곧 도라는 것은 내 몸에서 잠깐이라도 떠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길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도를 실천하지 않아 벌어질 무서움이나 두려움을 보고 난 뒤에야
어거지로 하는 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보지 않고(不睹) 듣지 않더라도(不問)
이것이 사람이 가야 할 길이겠구나 하는 원리에 입각해
스스로 늘 조심조심 도를 따라가야 한다(戒愼恐懼)는 것이다.

 

불가(佛家)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 빛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영원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한 말도 바로 不睹하고 不聞이라 하여 도를 닦지 않음을 경계한 말이다.

 

道者는 日用事物當行之理니 皆性之德而具於心하야 無物不有하고 無時不然하니 所以不可須臾離也니라
도자는 일용사물당행지리니 개성지덕이구어심하야 무물불유하고 무시불연하니 소이불가수유리야니라

 

若其可離면 則豈率性之謂哉이요 是以로 君子之心이 常存敬畏하야
약기가리면 즉기솔성지위재이요 시이로 군자지심이 상존경외하야

 

雖不見聞이나 亦不敢忽이니 所以存天理之本然이요 而不使離 於須臾之頃也니라.
수불견문이나 역불감홀이니 소이존천리지본연이요 이불사리 어수유지경야니라.

 

도라 하는 것은 날로 쓰는 사물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이치이니 모두가 성품의 덕이요
그것이 마음에 다 갖추어져 물건마다 (도를) 두지 않음이 없고
때로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써한 바가히 잠깐이라도 떠나지 않음이 없느니라.
만약 가히 떠나면 어찌 하늘이 정한 성품을 따른다고 할 수 있으리요.
이로써 군자의 마음이 항상 경외롭게 두어(곧 戒愼恐懼) 비록 보고 듣지 못하나
또한 감히 경솔히 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써한 바 천리의 본연(곧 性道)을 존하는 것이고
잠깐의 경각이라도 떠나지 못함이니라.
 
[해설]
윗 글의 常存敬畏는 대학 전문 제6장 제2절의
"小人 閒居 爲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后 厭然揜其不善 而著其善

 "소인 한거 위불선 무소불지 견군자이후 염연엄기불선 이저기선 

人之視己 如見其肺肝然 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 君子 必愼其獨也"

 인지시기 여견기페간연 즉하익이 차위성어중 형어외 고 군자 필신기독야" 

 

(소인이 한가하게 있을 때에 불선을 행함이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가
군자를 보고 난 뒤에 슬며시 그 불선을 가리고 선을 드러내지만,
남들이 자기를 알아봄이 마치 나의 폐장과 간장을 보는 듯할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 유익하겠는가.
이를 일컬어 ‘속마음에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니,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니라).”는 내용과 같이
항상 .戒愼恐懼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3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이니라.
막현호은이며 막현호미니 고로 군자는 신기독야이니라.

 

숨은 것보다 나타나는 것이 없으며 미미한 것보다 드러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를 삼가느니라.

 

[해설]
천자문에 屬耳垣墻(속이원장), 寓目囊箱(우목낭상)이라는 말이 있다.
귀는 담장에 붙어 있고, 눈은 내가 늘 쓰는 상자 속이나 천장에 붙어 있으니 말조심 행동조심 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숨어있는 것이 절대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 잘 나타나고,
미미한 것이라 하여 결코 드러나지 않으리라 여기지만 역시 다 드러나기 때문에 숨어 있을 때나
은미할 때나 남이 보지 않고 듣지 않을 때라도 다시 말해 홀로 있을 때라도 스스로를 삼가야 한다.
주역 풍화가인(風火家人)괘에서 언급한 ‘君子는 言有物而行有恒이라
(말에는 실물이 있고 행동에는 항상함이 있다)’ 하여야 하고 앞서도 나왔듯이 必愼其獨해야 한다는 뜻이다.

 

隱은 暗處也이요 微는 細事也니라 獨者는 人所不知而己所 獨知之地也니라
은은 암처야이요 미는 세사야니라 독자는 인소부지이기소 독지지지야니라

 

言幽暗之中 細微之事에 跡雖未形이나 而幾則已動하니 人雖不知나 而己獨知之하니
언유암지중 세미지사에 적수미형이나 이기즉이동하니 인수부지나 이이독지지하니

 

則是天下之事니無有著見明懸而過於此者니라
즉시천하지사니무유저견명현이과어차자니라

 

是而로 君子는 旣常戒懼하야 而於此에 尤加謹焉이니
시이로 군자는 기상계구하야 이어차에 우가근언이니

 

所以遏人欲於將萌하야 而不使其潛 滋暗長於隱微之中하야 以至離道之遠也니라.
소이알인욕어장맹하야 이부사기잠 자암장어은미지중하야 이지리도지원야니라.

 

隱은 어두운 곳이요 微는 가느다란 일이라.
홀로란 것은 남이 알지 못하는 바이며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것이라.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 세미한 일이 비록 자취라는 형체는 있지 아니하나
기미는 이미 움직이고 있어 남들이 비록 알지 못하나 나 홀로는 아는 것이 곧 천하의 일이니
나타나고 밝게 드러나 여기에 지남이 있지 않느니라.
이로써 군자가 항상 계신공구하야 이에 더욱 더 삼갈 것이니,
써한 바 사람의 욕심이 장차 싹 트는 것을 막아 은미한 가운데 푹 잠겨 차차 불어나고(潛滋)
어두운 속에서 점차 커져(暗長) 도를 떠나 멀리 이르지 않게 함이니라.

 

[해설]
아무리 비밀스럽게 하는 일이라도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기에
형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기미는 드러나 있는 것이니 곧 만천하에 다 알려진다.
주역 14번째 화천대유(火天大有)괘에 보면 "遏惡揚善(알악양선)하야
順天休命(순천휴명)하나니라(악한 것을 막고 선한 것을 드날려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따르느리라)”하였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많아지고 풍성해지다보니 이를 탐하고 욕심을 내어 죄짓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물질이 풍요롭고 빈부의 격차가 나면 없는 사람는 없기에 가지려고 죄짓고, 있는 사람은 더 가지려고 죄를 짓는다.
그래서 遏惡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맹자에도 ‘遏人欲存天理(사람의 욕심을 막아 하늘의 이치를 보존해야 한다)’라 하였다.
즉 하늘이 부여해주 性道를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戒愼恐懼해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대목이다.

 

4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이니
희노애락지미발을 위지중이요 발이개중절을 위지화이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이오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
중야자는 천하지대본야이오 화야자는 천하지달도야니라.

 

희노애락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를 中이라 이르고
나타났지만 節에 맞게 함을 和라 하니
中이라 하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和라는 것은 천하의 통한 道이니라(모두가 가야 할 길이니라)

 

[해설]
여기서부터는 중용을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는 도를 말하였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슬퍼하거나 즐거워할 때가 있다.
이것이 아직 마음 속에 있을 때가 중이고,
그것을 잘 조절해 적절히 나타났을 때를 和, 곧 조화, 화합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中和이며, 中庸을 말한다. 中은 언제나 中이고, 和는 ‘떳떳함(庸)’, 正, 節로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中和라 하면 中庸이요, 中正이요 中節이요 中道로도 얘기할 수 있다.
中은 속에 있는 것이므로 뿌리가 되기에 大本으로 표현했고,
근본에서 나와 가지를 뻗어 나가는 것이 道이므로 누구나 다 가야할 길이기에 和를 達道로 표현했다.
곧 내적인 大本이 中, 外的인 達道가 和가 된다.

 

喜怒哀樂은 情也이니 其未發則性也니라 無所偏倚라
희노애락은 정야이니 기미발즉성야니라 무소편의라

 

故로 謂之中이요 發皆中節은 情之正也니라 無所乖戾라
고로 위지중이요 발개중절은 정지정야니라 무소괴려라

 

故로 謂之和라 大本者는 天命之性이니 天下之理가 皆由此出하니
고로 위지화라 대본자는 천명지성이니 천하지리가 개유차출하니

 

道之體也니라 達道者는 循性之謂니 天下古今之所共由니
도지체야니라 당도자는 순성지위니 천하고금지소공야니

 

道之用也라 此言은 性情之德이니 以明道不可離之意니라.
도지용야라 차언은 성정지덕이니 소명도불가리지의니라.

 

희노애락은 (사람의) 감정(情)이니 그것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를 性이라 함이라.
치우치고 기울어지는 바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를 중이라 함이요

발하되 절도에 맞는 것을 감정의 바름이니라.
어긋나거나 거스리는 바가 없으므로 이를 和라 이르니라.
대본이라는 것은 천하의 성품이니 천하의 이치가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니 도의 體이니라.
통한 도라고 하는 것은 성품을 따름을 이름이니 천하와 고금이 한가지로 말미암은 바이니 도의 用이라.
이것은 성정의 덕을 말함이니 써 밝은 도는 가히 떨어질 수 없다는 의미니라.

 

[해설]
大本은 곧 道之體가 되며 中이 되며, 바로 중용 맨첫머리에 언급한 天命之謂性을 말한다.
達道는 곧 道之用이 되며 和가 되고 率性之謂道에 해당하고 性情之德을 말한다.


5
致中和면 天地位焉하며 萬物이 育焉이니라.

치중화면 천지위언하며 만물이 육언이니라.

 

중화에 이르면 천지가 자리하며 만물이 길러지느니라.


[해설]
주역 계사상전 첫머리에 “易簡而天下之理ㅣ 得矣니 天下之理ㅣ 得而成位乎其中矣니라
(쉽고 간단함에 천하의 이치를 얻으니, 천하의 이치를 얻음에 위를 그 가운데에 이루느니라)’고 하였으며,
천부경에도 ‘人中天地一’라 하여 가운데 자리하는 것을 매우 소중함을 밝히고 있다.
하늘이나 땅이나 중화라는 제 위치를 잃는다면 만물이 길러질 수 없음을 표현해
중화는 곧 천지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致는 推而極之也니라 位者는 安其所也이오 育者는 遂其生也니라
치는 추이극지야니라 위자는 안기소야이오 유자는 수기생야니라

 

自戒懼而約之하야 以至於至靜之中하야 無所偏倚而
자계구이약지하야 이지어지정지중하야 무소편의이

 

其守를 不失이면 則極其中而天地가 位矣요 自謹獨而精之하야
기수를 부실이면 즉극기중이천지가 위의요 자근독이정지하야

 

以至於應物之處에 無小差謬而無適不然이면 則極其和而萬物이 育矣이니라
이지어응물지처에 무소차류이무적불연이면 즉극기화이만물이 유의이니라

 

蓋天地萬物은 本吾一體니 吾之心이正이면 則天地之心이 亦正矣이요
개천지만물은 본오일체니 오지심이정이면 즉천지지심이 역정의이요

 

吾之氣가 順이면 則天地之氣가 亦順矣이라 故로 其效驗이 至於如此하니
오지기가 순이면 즉천지지기가 역순의이라 고로 기효험이 지어여차하니

 

此는 學問之極功이요 聖人之能事라 初非有待於外나 而修道之敎로 亦在其中矣니라
차는 학문지극공이요 성인지능사라 초비유대어외나 이수도지교로 역재기중의니라

 

是其一體一用이 雖有動靜之殊나 然이나
시기일체일용이 수유동정지수나 연이나

 

必其軆立而後에야 用이 有以行이면 則其實이 亦非有兩事也니라 
핀기체립이후에야 용이 유이행이면 즉기실이 역비유양사야니라

 

故로 於此에 合而言之하야 以結上文之意이니라.
고로 어차에 함이언지하야 이결상문지의이니라.


치는 미루어 극함이라, 위라는 것은 그 곳에서 편안함이오, 육은 그 생함을 이룸이니라.
계신공구로부터 간략히 하여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이르러 치우치거나 미뤄지는 바가 없어
그 지키는 바를 잃지 않으면 그 중이 지극해져 천지가 위를 얻게 되고,
근독(홀로를 삼가함)으로부터 정미롭게 해서 써 물건을 응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서 어디를 가든지 그렇지 않음이 없으면(中이라는 體를 잘 잡는다면)
그 화함을 극하게 해서 만물이 길러지느니라.
대개 천지만물이라 함은 본래 내 한 몸이니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를 것이요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또한 순하느니라.
그러므로 그 효험이 이와 같은데 이르니 이것은 (중용이라는) 학문의 지극한 공이며 성인의 능한 일이니라.
처음에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 아니하나(내 성품 밖으로 나가지 않으나)
도를 마름하는 敎(修道之敎)가 또한 그 가운데 있느니라
(도를 잘 마름하고 밖으로 나가 가르치니 효험이 커짐이 있음이라).
이 그 일체일용이 비록 동하고 정하는 다름이 있으나 반드시 그 체가 선 뒤에 용이 써 행함이 있으면
즉 그 실지(실상)가 두 가지 일이 있지 않음이니 고로 이에 합해서 말하니 윗글의 뜻을 여기에 말함이라


[해설]
천지인이 모두가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천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 속에 있음을 부연설명하고 체용의 이치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체를 바로 세우고 행해야 함을 덧붙이면서 一體一用은 곧 一原을 밝히고 있다.


右는 第一章이라


子思가 述所傳之意以立言하야 首明道之本原이 出於天而不可易하니
자사가 술소전지의이립언하야 수명도지본원이 출어천이불가역하니

 

其實은 體備於己而不可離이요 此言 存養省察之要하야
기실은 체비어기이불가리이요 차언 존양성찰지요하야

 

終言聖神功化之極하니 蓋欲學者로 於此에 反求諸身而自得之이니
종언성신공화지극하니 개욕학자로 어차에 반구제신이자득지이니

 

以去夫外誘之私而充其本然之善이니라
이거부외유지사이충기본연지선이니라 

 

楊氏 所謂一篇之體要요 是也이니라 
양씨 소위일편지체요요 시야이니라

 

其下十章은 蓋子思가 引夫子之言하야 以終此章之意이니라.
기하심장은 개자사가 인부자지언하야 이종차장지의이니라.
 
자사가 전한 바의 뜻을 지어서 써 말을 세워서 먼저 도의 본원이 하늘에서 나와서
가히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밝혀 놓았으니
그 실지는 체가 몸에 갖추어져 가히 떠나지 못함을 (머릿장에) 밝힌 것이오,
이 말은 살피고 살핌의 중요함을 잘 존양하고(말해놓고 ) 마침내는 성신(성인의 신비로움)의
공되고 화하는 지극함을 말해 놓았으니, 대개 배우는 자가 이에 저 몸에 돌이켜 구해(反求諸身)
스스로 얻어서 밖으로 유혹되는 사사로움을 버리고 본연의 선함을 충족시키게 함이라 .
양씨가 한편의 체요라고 말한 바가 이것이니라.
이하 십장은 대개 자사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써 이장의 뜻을 마무리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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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천명하고 있는 책이다.
이것은 본래 『예기(禮記)』 49편 가운데 제31편으로 들어 있었지만,
그 내용의 중요성 때문에 일찍이 한대(漢代)부터 단행본으로 세상에 통용되었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의 육예략(六藝略) 예류(禮類)에는 『중용설(中庸說)』2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의 저자로는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자사가 『중용』을 지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로서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일찍이 송(宋)에서 곤경에 처하였는데,
이 때에 『중용』을 지었다"라고 되어 있다.
 
후한(後漢)의 경학자 정현(鄭玄)은 "공자의 손자 자사가 이를 지어 성조(聖祖)의 덕을 소명(昭明)하였다"고 하였다.
정현은 현존 최고의 주석(註釋)을 남겼는데,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양(梁)의 심약(沈約)과
『오경정의(五經正義)』의 책임 편찬자인 공영달(孔穎達), 한유(韓愈)·이고(李 ) 등
한(漢)·당(唐)의 학자·문인들은 아무도 이러한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현학(玄學)과 불교가 크게 유행하였던 남조(南朝) 송(宋)의 대옹(戴 )이 『중용전(中庸傳)』2권을 짓고,
양(梁)의 무제(武帝)는 『중용의소(中庸義疏)』1권과

『사기제지중용의(私記制旨中庸義)』5권을 남겼다고 하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성리학(性理學)이 유행하면서 호원(胡瑗)·정호(程顥) 등의 학자들이 주석서를 지었는데,
이것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것이 주희(朱熹)의 『중용장구(中庸章句)』이다.
정호·정이(程 )��� 『중용』을 공자의 문하에서 전수된 심법(心法)이라고 하여 중시하였고,
주희는 『중용장구』와 『중용혹문』을 지어 중용의 뜻을 천명하면서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과 함께 사서로 표장(表章)하였다.
 
그런데 『예기』가 한(漢)나라 초기인 B.C.130년 경 처음 나타났던 것으로 보면

자사의 생존 시대와 약 300년의 차이가 있다.
또한 하간헌왕(河間獻王)에 의해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131편이었다고 하며,
뒷날 대성(戴聖)의 의하여 49편으로 정리되기까지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있었다.
이는 『중용』의 자사 저작설에 대해 충분히 의심할 만한 근거가 된다.
자사의 『중용』 저작설에 대해 처음으로 의심한 사람은

북송(北宋)의 사학자요 문인인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여대림(呂大臨)이었다.
이 가운데 정이의 제자인 여대림은 "자사가 송에서 지냈던 때는

그의 나이 16세에 불과하다"라는 『공총자(孔叢子)』의 기록을 근거로
그 같은 나이에 저술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주장은 후에 『공총자』가 위서(僞書)임이 드러나서 논거가 흔들리기는 하였으나

당시에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청대(淸代)에 이르러 경서 전반에 대해 고증학적 검토가 진행되었다.
이때의 연구 성과를 수용한 호적(胡適)·전목(錢穆) 같은 학자들은 자사의 『중용』 저작설을 부정하고
진(秦)·한(漢) 사이의 학자가 지은 것으로 단정하였다.
그리고 풍우란(馮友蘭)·무내의웅(武內義雄) 등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중용』 전체 내용을 살펴볼 때 전 22편이 자사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첫 장(章)은 분명히 자사의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중용』전체의 요체가 된다는 점에서 『중용』은 자사에 의하여
그 저본이 성립되고 그 문도들에 의해 보충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예기』『중용』편은 본래 33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정이는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여겨

37장으로 나누어 『중용해(中庸解)』를 지었고,
주희는 다시 33장으로 하여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지었다.
이 책의 서문은 『대학장구(大學章句)』의 서문과 함께 명문으로 평가되어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애송되었으며,
주희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담고 있어 더욱 중요시되었다.
그것에 따르면 우선 『중용』은 "자사가 도학(道學)의 전통이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지은 것이다"라고 하여

도통(道統)의 맥락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상서(尙書)』『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세하니
오직 정밀하고 오직 한결같아야 진실로 그 중용을 잡게 된다"라는 문장을 내세우고
도심이 늘 몸의 주인이 되고 인심은 언제나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도학의 전통을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고요(皐陶)·
이윤(伊尹)·부열(傅說)·주공(周公)·소공(召公)·공자(孔子)·안회(顔回)·증삼(曾參)·
자사(子思)·맹자(孟子)·정씨 형제·주희 자신으로 전승된 것으로 제시하였다.
한편 조보지(晁補之)는 82장으로 나누어 『중용전(中庸傳)』을 지었으며,

여립무(黎立武)는 15장으로 나누어 『중용분장(中庸��章)』을 지었다.
 
『중용』은 구성 체재 및 내용을 보면, 제1장은 전편(全篇)의 요체가 되는 것으로 자사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즉 천명(天命)·성(性)·도(道)·교(敎)를 말하여 『중용』의 철학적 근거와 내용을 밝혔다.
이어서 중화(中和)의 공효(功效)를 말하여 "중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라는 중용 최고의 경지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이 중용의 도이다.
 
주희는 이에 대하여 "도의 본원은 하늘로부터 나와 바뀔 수 없고,

도의 실체는 자신에게 갖추어져 떠날 수 없음을 밝혔고,
이어서 그것을 기르고 살피는 요령을 말하였으며,

끝으로 성신(聖神)의 공화(功化)가 지극함을 말하였다"라고 설명하였다.


제2장에서 제11장까지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제1장의 뜻을 완결시킨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희는 "중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는 것이며,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것을 일컬음이고, 용(庸)은 평상(平常)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즉 중은 지중지정(至中至正)한 인성(人性)의 본연(本然)을 나타내는 말로서 시중(時中)을 말하며,
용은 일상 생활에서 평상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중용의 도는 일상 생활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을 평탄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용을 택하여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이 있게 되는데,
제2장에서 공자는 "군자는 중용을 따르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부터 제11장까지는 중용의 도를 이루는 즉 치중화(致中和)하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는 중용과 중화의 관계를 "성정(性情)으로써 말하면 중화이고,
리의(理義)로써 말하면 중용이지만, 그 실제는 동일하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중화를 체(體)라고 한다면 중용은 용(用)이다.
결국 중화는 성정으로서 심성(心性)을 가리키는 것이고, 중용은 그것이 행위로서 드러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제12~20장에서는 공자의 말과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중용의 도'의 원리와 작용에 대해서 밝혔다.
제12장 본문에는 "군자지도(君子之道)는 비(費)하며 은(隱)하다"고 하였는데,

주희는 이것을 체용(體用)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즉 중용의 중은 천하의 정도(正道)로서 용(用)·비(費:넓음)이고,
용(庸)은 천하의 정리(定理)로서 체(體)·은(隱:은미함)이라고 하였다.
또한 중화의 중은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으로서 체·은이며, 화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으로서 용·비이다.
그리고 중용과 중화의 관계에서 중화는 체로서 은이며, 중용은 용으로서 비이다.
 
제21장~26장은 성(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성은 『중용』에서 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개념이다.
제20장에서 "성실함[誠]은 하늘의 도요, 성실히 하는 것[誠之]은 사람의 도이다"라고 하였다.
성은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고, 사물의 끝과 시작이 되는 본체로서 존재와 원리이며,
'성지'는 미숙한 인간이 진실무망하려고 노력하는 인사(人事)의 당연이다.
제22장에서는 '성지'하는 수양을 통하여 성을 이룬다면 천성(天性)을 터득하여 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제27~33장에서는 지성(至誠)을 체득한 성인의 도(道)·덕(德)·교화(敎化)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우리 나라에 『중용』이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라고 보여진다.
그것은 신라 원성완 4년(788)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태학(太學)에 설치할 때

그 과목 중에 『예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용』은 고려말 성리학(性理學)의 전래 이후 학자들 사이에서 필독서로서 널리 읽혀졌는데,
권근(權近)이 사서에 구결을 하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많이 읽힌 주석서(註釋書)로는 송대(宋代) 석돈(石 )이 편집하고 주희가 산정한 『중용집략(中庸輯略)』,
주희의 『중용장구』·『중용혹문(中庸或問)』, 명대(明代) 양주진(楊朱陳)의 『중용사초(中庸私抄)』,
관지도(管志道)의 『중용정석(中庸訂釋)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언적(李彦迪)은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를 지었으며,
선조(宣祖)의 명으로 간행한 이이(李珥)의 『중용언해(中庸諺解)』가 있다.
 

 

중용장구 ( 中庸章句 )

 

제 1 편 도와 중용 ( 道 中庸 )

본래 장명(章名) 없이 33장으로 이루어진 중용장구는,
편명(篇名)과 장명을 책에따라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어 이해를 돕기 위해 각명칭을 기입한다.
장에 따라 긴 문장도 있고 한줄 짜리 문장도 있다
(   )안에 있는장은 본래 장의 명칭이다

 

제 1 장(제1장) 천과 인 (天과 人)

天命之謂性이오 率性之謂道요 修道之謂敎니라.
천명지위성이오 솔성지위도요 수도지위교니라.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하고, 도를 닦 는 것을 교(敎)라 한다.)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니 可離면 非道也니라.
도야자는 불가수유리야니 가리면 비도야니라.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
 시고로 군자는 계신호기소부도하며 공구호기소불문이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바를 조심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愼其獨也니라.
막현호은이며 막현호미니 고로 군자신기독야니라.
(숨겨진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작은 것 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중 화 (中和)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오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라
희로애락지미발을 위지중이오 발이개중절을 위지화니라
(희로애락이 발(發)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 하고,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한다.)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
중야자는 천하지대본야요 화야자는 천하지달도야니라.
(중은 천하의 대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통용되는 도)이다)

 

致中和면 天地位焉하며 萬物育焉하니라.
치중화면 천지위언하며 만물육언하니라.
(중과 화에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이 제 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라게 된다.)

 
본래 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이해를 돕기 위해 2장으로 나뉜 것을 수록하였으며,
주자는 이 1장을 중용의 총론으로 생각하여 제일 중요한 장으로 여겼다.
 

제 2 편 군자와 중용 ( 君子와 中庸 )

제 1 장(제2장) 중용의 도 (中庸의 道)

仲尼曰 君子는 中庸이오 小人은 反中庸이니라.
중니왈 군자는 중용이오 소인은 반중용이니라.
(공자(중니)게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중용이요, 소인은 반중용(중용에 반대)이다)

 

君子之中庸也는 君子而時中이오 小人之中庸也는 小人而無忌憚也니라.
군자지중용야는 군자이시중이오 소인지중용야는 소인이무기탄야니라.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때에 알맞게 하고, 소인의 중용은 소인으로서 기탄(거리낌)없는 것이다.)

 

제 2 장(제3장) 중용의 덕 (中庸의 德)

子曰 中庸은 其至矣乎인저 民鮮能久矣니라.

자왈 중용은 기지의호인저 민선능구의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중용은 지극한(좋은)것이다, 백성들은 오래할수 있는이가 드물다.)

 

제 3 장(제4장) 과와 불급 (過와 不及)

知者는 過之하고 愚者는 不及也니라.

지자는 과지하고 우자는 불급야니라.
[공자 말씀이 도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안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한다.)

 

賢者는 過之하고 不肖子는 不及也니라.
현자는 과지하고 불초자는 불급야니라.
[도가 밝혀지지 않음은]

(현명한 자는 지나치고 못난 자는 미치지 못한다.)

 

人莫不飮食也나 鮮能知味也니라.
인막불음식야나 선능지미야니라.
(사람은 누구나 마시고 먹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무니라.)

 

제 4 장(제5장) 내성의 심정 (內聖의 心情)

子曰 道其不行矣夫인저.
자왈 도기불행의부인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도는 행하여지지 않을 것이다.)

[이장은 한구절로 이루어짐]

앞장의 구절을 연속하여 사람들의 성품도 까다롭고 교육도 제대로 행하
여지지 않고 있으니 중용의 도가 인간사회에서 잘 행하여지기 어렵다는 뜻.

 

제 5 장(제6장) 순의 지혜 (舜의 智慧)

舜이 問而好察邇言하시고 隱惡而揚善하시니라.
순이 문이호찰이언하시고 은악이양선하시니라.
[공자께서 순은 큰 지혜를 가지신 분이구나]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시며,
비근(卑近 : 심원한 맛이 없고 낮고도 가까움)
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시고 (천박한 말속에서도 좋은 말을 취하시고)
악함을 감추었고 선함을 드러내시었다. (선악을 구분하는 모범을 보임)

 

執其兩端하사 用其中於民하시니 其斯以爲舜乎이신저.
집기양단하사 용기중어민하시니 기사이위순호이신저.
(그 양극단을 잡으시어 그중간을 백성들에게 적용하였으니, 이것이 순임금이 (聖人)된 까닭일 게다.)

순(舜) : 고대 중국의 우(虞)나라 임금으로 이름은 중화(重華)였고
요(堯)임금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BC 2255 -2207 까지 재위하다
우(禹)에게 양위함.

이복형제와 계모 밑에서 고생을 많이 하였음에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다하였다고 함.

 

제 6 장(제7장) 참다운 지혜(智慧)

子曰 人皆曰予知로되 驅而納 諸網獲陷穽之中而莫之知抗也라
자왈 인개왈여지로되 구이납 저망화함정지중이막지지피야라
(공자님이 말씀하실길 사람들은 모두 자기는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그물과 덫이나 함정 가운데로 몰아넣어도 그것을 피할 줄 모른다.)
獲 : 획, 확, 화로 읽으며 뜻은 잡을획, 덫확(덫화)을 의미한다.

 

人皆曰予知로되 擇乎中庸而不能期月守也니라.
인개왈여지로되 택호중용이불능기월수야니라.
(사람들은 모두 자신은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중용을 택하여 한 달 동안도 지켜 내지 못하느니라.)

 

제 7 장(제8장) 안회의 인 (顔回의 仁)

子曰 回之爲人也는 擇乎中庸하야 得一善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니라.
자왈 회지위인야는 택호중용하야 득일선즉권권복응이불실지의니라.
(공자님 말씀이 안회의 사람됨은 중용을 택하여 한가지 선을 얻으면 받들어 가슴속에 지니고 그것을 잃지 않았다.)

 

제 8 장(제9장) 중용의 어려움 (中庸의 어려움)

子曰 天下國家도 可均也며 爵祿도 可辭也며 白刃도 可蹈也로되 中庸은 不可能也니라.
자왈 천하국가도 가균야며 작록도  가사야며 백인도 가도야로되 중용은 불가능야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천하의 국가도 고르게 다스릴 수 있고, 작록도 사양할 수 있고,
서슬 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다 하여도 중용은 능히 할 수 없느니라.)

 

제 9 장(제10장) 군자의 강함 (君子의 强함)

君子는 和而不流하나니 强哉矯여 中立而不倚하니 强哉矯여

군자는 화이불류하나니 강재교여 중립이불의하니 강재교여
(자로가 강함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화하면서도 흐르지 아니하니 강하도다 그 꿋꿋함이여,
중에서 기울어지지 아니하니 강하도다 그 꿋꿋함이여

(時流에 휩쓸리지 아니한다는뜻)

 

제 10 장(제11장) 군자의 도 (君子의 道)

子曰 素隱行怪를 後世有述焉이나 吾弗爲之矣니라.
자왈 소은행괴를 후세유술언이나 오불위지의니라.
(공자님 말씀이 은밀한 이치를 찾아 내려 하고,

괴이한 짓을 하면 후세에 떠받드는 일이 있을 것이지만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君子遵道而行타가 半途而廢하나 吾弗能已矣니라.
군자준도이행타가 반도이폐하나 오능불이의니라.
(군자가 도를 좇아 행하다가 중도에 그만두는데 나는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

 

君子는 依乎中庸하야 遯世不見知而不悔하나니 唯聖者能之니라.
군자는  의호중용하야 돈세불견지이불회하나니 유성자능지니라.
(군자는 중용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숨어 있어 알려지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는 오직 성자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

 

돈세(遯世) : 돈 또는 둔으로 읽는다.

둔세(遁世)와 같으며 뜻은 세상을 피해 홀로 숨어 사는것.

※ 중용의 도에는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이 있을 수 없으며,
선악의 기준은 상대적인 것이며 때와 장소에 따라 어느 누구에게나 알맞은 타당한 것이 중용의 길이다.


제 3 편 도 론 ( 道 論 )

제 1 장(제12장) 도의 용과체 (道의 用과體)

君子之道는 費而隱이니라.
군자지도는 비이은이니라.
[군자의 도는 광대하면서도 은미하다.]

(군자가 행하는 중용의 도는 남의 눈에 안 띄지만 한없이 넓고 커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그 내용은 은밀하고 미세하여 눈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君子語大면 天下莫能載焉이오 語小면 天下莫能破焉이니라
 군자어대면 천하막능재언이오 어소면 천하막능파언이니라.
(중용의 지극함이란) 군자(군자의 도)가 큰 것을 말하면 천하도 능히 실을 수가 없고,

작기로 말하면 천하도 능히 이를 쪼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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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 인간의 맛 (도올 김용옥)

 

도올. 과거에 TV 채널 돌리면 가끔 만났던 분.
노무현 정부때 송유관에 대해 이야기하며 정부 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한 내용 외엔

중 같은 노인네..그저 쇳소리 나는 유명한 노인네 정도로 생각했는데...
나꼼수에서 들은 시원시원한 발언에서 호감을 얻어 그의 책을 읽어 보자고 덤벼 들었다

그런데 해석을 잘 해 놓았는데도 어렵다.


 

내가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진보주의자이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진보"라는 말의 배면에는 역사 정칙주의의 극심한 빈곤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를 "진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역사를 "중용"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역사 정칙주의라는 것은 인류 역사의 미래를 확정적으로 예견할 수 있다는 모든 망상을 의미한다.

물론 맑시즘이나 공산주의도 그러한 망상의 한 전형이다.

기독교 종말론의 사관이나 헤겔의 변증법적 사관 또한 그러한 망상의 전형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중용"이 자유와 평등의 "가운데"일 수는 없다.

"중용"은 오직 자유와 평등을 포섭하는 가치로서만 우리의 심성에서 꽃을 피운다.

미국은 땅이 텅텅 비어있는데 반해 중국은 전 땅 덩어리가 사람들로 꽉 차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꽉 차있는 것은 사람뿐 아니라 역사라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비하면 미국은 신생국가이다.

어디에든지 위대한 자연은 있는데 위대한 역사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안타깝게도 지구상의 인류는 행복의 기준을 자율적 결단 하에 묶어두지 못하고

주어지는 외재적 대세에 맡겨버리는 뜬구름의 세상을 살고 있다.

미국이나 한국의 경우, 정치권력의 최고지도자를 최대공약수로서의

자유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하는 민주제도를 정착시킨 나라들이지만,

그 결과로 선출된 리더십의 질이 끊임없이 하락하고 있다는 현실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데 반하여,

오히려 그러한 민주제도의 소모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주기적인 리더십을 교체하는 방식을 채택한

중국의 경우 리더십의 일정한 퀄리티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최고의 권력자라 할지라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9명의 집단지도체제의 견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중략>

우리나라 사람들이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중국의 "공산당"은 "당"이라는 명사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당Party"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략>

중국 공산당은 국가권력을 초월하는 권력이며 이념이며 당위이다.

따라서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의 군대는 "당군"이지 "국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혁과 개방에 의하여 경제발전이 진행되고, 일정소득수준 이상의 계층이 의미있는 비율로 증가하고,

다양한 사회집단간의 관용의 요구가 고조되면, 다수의 참여에 의한 정책결정을 선호하는 방식으로

비권위주의적 지향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순대까지 대기업이 독점하는 사회, 거기서 우리 국민이 얻을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제 몸 버려가면서 물건 싸게 사서 무엇하겠다는 것인가?

'중용'을 읽고 "일상적 삶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중용'을 읽지 않은 것이다.

과연 그런가 아니 한가?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한 번 자기의 삶을 반추해보라!

 



제 1 장 천명장 天命章

天이 命하는 것, 그것을 일컬어 性이라 하고,
性을 따르는 것, 그것을 일컬어 道라도 하고,
道를 닦는 것, 그것을 일컬어 敎라고  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도를 만약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君子는 보이지 않는 데서 계신(戒愼)하고 들리지 않는데서 공구(恐懼)한다.

숨은 것처럼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미세한 것처럼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있음을 삼가는 것이다.
喜努哀樂이 아직 발현되지 않는 상태를 中이라 일컫고,
그것이 발현되어 상황의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和라고 일컫는다.
中이라는 것은 天下의 큰 근본이요, 和라는 것은 천하사람들이 달성해야만 할 길이다.

中과 和를 지극한 경지에까지 밀고 나가면 天과 地가 바르게 자리를 잡을 수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만물이 잘 자라게 된다.

 

"중용"에 대한 가장 큰 일반인들의 오해는

그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에 있어서 어떤 행동규범상의 "가운데"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는

근거없는 통념관한 것이다.

나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중용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호언하는 것은

결국 회색분자도 안 되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중용"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문제의 핵심을 도피하거나,

적당한 타협을 유도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우유부단한 머뭇거림의 비겁한 방평을 제시하는

그런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공자나 자사는 그러한 "중용"을 말한 적이 없다.

대개 그러한 "중용"의 개념은 서양철학에서 온 것이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 Ethica Nicomachea'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언어에 대한 피상적 이해로부터 온 것이다.

 

서구인들이 말하는 삶의 의미는 진정한 삶의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을 순수하게 방치하지 못하고

그것에 반드시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논의는 기실 알고보면 인간을 체제나 신화의 질곡 속에 예속시키기 위한 음모이다.

 

우리는 '니코마코스윤리학'을 읽을 때도 "행복 eudaimonia"이라는 말을

현대인들의 심리적 개념으로 전적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행복"은 "기분좋게 몽롱한 심적 상태 a mental state of euphoria"가 아니다.

대개 현대인이 "행복하다"는 말을 쓸 때는 애인을 만나 몽롱하게 기분좋거나,

상을 받아 흥분되었거나 하는 심리적 상태를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유다이모니아"는

심적 상태가 아닌, "성공적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적인 상태가 아닌 동적인 활동 dynamic activity이다.

 

인격적 훌륭함이란 습관 ethos의 축적된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윤리적ethike이라는 말은 습관ethos이라는 말의 형용사형이다.

윤리와 습관은 같은 어원을 가지는 말이다. <중략>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용감한 행위를 계속해버릇함으로써

그러한 습성hexis이 생겨나고 그러한 성격상태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이란 이런 것이다.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이며,

<중략 ... 이후 YY란 XX와 ZZ의 중용이며라는 식의 패턴 반복>

용기라는 덕목 자체가 우리가 삶의 체험 속에서 느낄 수도 있고,

사회적 공감 속에서 어느 정도의 개념적 공통성을 가질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실체적으로 취급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비겁과 만용의 중간항이라는 양적, 직선적 비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중략>

어떤 때는 비겁한 듯이 보이는 행동이 용기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상황에서는 만용이 위대한 용기의 전범이 될 수도 있다. 


공자의 근원적 관심은 "인仁"에 있었으며,

"인"이란 주어진 삶의 상태를 감지하고 결단하는 심미적 감수성이며,

그것은 근원적으로 상황적이며 역동적인 것이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전할 때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는 이 한마디로써

치세의 모든 방편과 적통성을 부여하였다고 말한다.

그 뜻인즉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라!"라는 것이니,

그것은 중화민족의 대헌장과도 같은 것이다.

모세에게 배타적인 유일신관의 십계명을 내림으로써 살육적이고 복종강요적이며

독선적인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지어낸 야훼의 언설에 비하면

참으로 포용적이고 상황적이고 화평한 높은 격조의 인문세계 언설이라 할 것이다.

 


주희가 불교를 통하여 인도-유러피안어계의 사유구조를

부지불식간에 흡수한 결과로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이지,

결코 중화민족의 본래적 사유 패턴으로 간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희의 배불排佛은 이미 불교적 사유의 바탕 위에 서있다.

주희의 도학은 "유교의 불교화"라고까지 혹평할 수도 있다.

 

 

"대大"는 분명하게 사람이 손발을 벌리고 있는 정면상임에 분명하다.

사람을 옆에서 본 측면상이 "인人"이라는 글자인데,

사람을 옆에서 본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기 때문에

위압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정면으로 보면 그 사람에 대하여

위압감을 느끼게 되며, 더구나 북면하는 신하가 남면한 왕을 대할 때는

그의 마제스틱한 거대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정면상이 "크다"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맹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인간중심의 편견을 벗어날 때,

대자연의 모든 개체는 무한한 성性의 깊이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온다.

돌멩이 하나에도 매우 복잡한 성의 구조가 있다.

이것은 도道, 유儒의 차별적 세계관의 문제가 아니다. <중략>

서양언어는 예외없이 "휴먼 네이쳐human nature"가 된다.

다시 말해서 "성性"은 "nature" 이외에 다른 적당한 말이 없다.

그런데 "nature"는 분명히 동시에 문명이 아닌 대자연 혹은 천연의 자연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nature"는 "본성"과 "자연"을 항상 동시에 의미한다. <중략>

희랍인들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생명이 없는 무기물의 집합체가 아니라

생명원리로서의 혼(푸쉬케psyche)을 그 자체에 내포한 유기적 자연이었다. <중략>

"퓌지스"가 로마와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에 와서 "나투라natura"로 번역되었는데,

그것도 "퓌지스"와 똑같이 "태어난다"는 의미의 "나스코르nascor"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으며 "퓌지스"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에 오게 되면

신과 인간과 자연은 완전히 계층적으로 분리된다.

신은 초월자로서 자연에 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신의 창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가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

인간과 자연은 신에 의하여 따로 따로 창조된 것이며, 인간은 자연외적 존재로 소외된다.

 

 

공자는 '공자가어'의 '예운'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얘기를 했다. 
"도대체 인정 즉,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것은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욕심내고

하는 일곱 가지 감정인데, 이것은 인간이 배우지 않고서도 매우 잘하는 것이다." 
"불학이능弗學而能"이라는 말이 매우 중요하다. <중략>

희,노,애,구,애,오,욕,의 칠자야 말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하늘이 명하는 것"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중략>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인간을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해온 서구적, 근대적 모든 인간관의 편견을 근원적으로

"메타노이아" 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중략>

공자-자사가 말하는 "인정人情"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칸트가 말하는 저급한 감각소여 수준의 감성Sinnlichkeit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략>

이성은 오히려 인간 삶의 가장 초보적인 당위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중략>

경영수학의 도사라고 하는 자들 중에는 아마 나라를 말아먹고

세상을 미혹케 하는 그런 야망에 불타있는 광인이 무수히 많은 수도 있다. <중략>

이성이라는 것은 섬세한 인간의 감성적 판단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한낱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공자-자사가 말하는 인정이란 칸트가 말하는 감성,오성,이성을 통섭하는

보다 포괄적이고 보다 능동적이며 보다 최종적인 판단의 기능일 수도 있다.

인간을 교육한다고 하는 문제는 이성만을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포섭하는 심미적 감수성을 배양하는 것이다.

그 감수성을 공자-자사는 "인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인"이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하는 것이다. <중략>

동방인이 말하는 "정"이란 개념은 반드시 "대의大義"와 관련이 있다.

정은 의를 구현치 못하면 온전한 정이 되지 못한다


"도라는 것은 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정이라는 것은 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도의 시작은 정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학습을 거쳐 완성되는 종착지는 의에 가까운 것이다." <중략>

"솔率"에는 선택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길"이라는 것은 반드시 선택되어 반복적인 습성을 통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된 길은 계속 끊임없이 사람이 다니고 보수공사를 해야만 유지되는 것이다.

<중략>

"수도修道"의 과정을 자사는 "근정近精"에서 "근의近義"로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을 교육시킨다고 하는 문제는 결코 이성적 인간을 만드는 데만

그 목적이 있지 아니 한다. 이성은 상식이다.

우리가 배양해야 할 것은 정감精感의 윤리성과 심미성이다.

심미적 감성을 결여한 윤리는 독선적이고 맹목적일 수 있으며,

윤리적 당위를 결여한 심미는 나른하고 자기기만적일 수 있다. <중략>  

서양의 20세기에 유일하게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축한 화이트해드가

'교육의 목적 The Aims of Education'이라는 일문을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지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사유의 활동인 동시에 아름다움과 인간적 느낌에 대한 감수성이다.

평범한 이성적 정보의 더미들은 이 문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주 정보에 밝기만 한 유식자는 하나님이 만든 이 지구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지루키만 한 인간을 수도 있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 배양하고자 하는 목적은

특정한 방향으로 발양되는 문화와 전문적 지식을 동시에 소유하는

훌륭한 인간을 양육하는 데 있다."


성, 도, 교 중에서 도를 주어로 삼아 이야기한 것은,

성性을 자연Nature라 하고

교敎를 문명Culture이라 한다면

도道는 그 중간자적 위치에 있으면서 그 양자를 통섭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도라는 것은 자연과 문명을 매개하며, 존재Sein와 당위Sollen를 통합한다. <중략>

종교는 안 믿으면 그만이고, 교회는 안 나가면 그만이다.

"그만이다"라는 말은 곧 신앙의 대상은 항상 나를 떠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사는 말한다: "도는 잠시라도 떠나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잊을 수 있지만, 도는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떠나 있을 수 있지만 도는 떠나 있을 수가 없다.

왜냐? 떠나 있으면 그것은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략>

도는 수유라도 나에게로 떠날 수가 없다.

도가 곧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떠날 수 없듯이, 도는 도인 나를 떠날 수 없다.

도는 나의 삶의 밖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나의 삶의 활동 그 모든 것에 내재하는 것이다.

도Dao를 영어로 "the Way"라고 번역하지만,

"웨이way"는 길인 동시에 "방법method"을 의미한다.

도는 나의 "삶의 길"인 동시에,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만 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나의 존재의 방식이다.

도는 내가 살아있는 한에 있어서는 나의 몸,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쉴 수가 있고, 교회 나가는 것도 쉴 수가 있고,

기도나 성경공부도 쉴 수가 있는 것이지만, 도는 쉴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에 내재하는 것이다. <중략>

하나님은 요청의 대상이 아니라 내 몸에 내재한다. 아니 내 몸 그 자체이다.

내 몸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도를 구현할 때

하나님은 요청의 대상으로서의 필요가 없이 자연스럽게 내 몸에 구현되는 것이다.

차를 마실 때도 茶道가 있고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할 때에는 跆拳道가 있고,

먹을 때도 먹는 도食道가 있고, 잠잘 때도 수면의 도가 있으며,

섹스를 할 때도 색色道도가 있다. <중략>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도를 실천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하나님은 기도라는 언어를 통하여 매개되지만 도는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다.

몸으로만 전수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는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곧 몸속에서 하나님을 배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닦는 것이다.

하나님은 몸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그 무엇이다.

하나님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고 끊임없이 생성되어가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몸의 고정태가 아니며,

몸의 끊임없는 가치평가the valuation of Mom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나의 몸을 하나님화하는 과정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에게 부여되는 천명을 홀로, 고독하게 구현하는 것이다.

독하게 구현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책임을 나 홀로 걺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존의 대상이 되면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의 몸의 비젼이며 이상태이다.

그것은 자기생성적이며 나의 몸의 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하는 가치평가이며

새로움과 탈바꿈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이며 창진이다.

이 모든 과정이 홀로 있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속에서 선택되는 것이다.

 

 

중中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다.

여기 천하라는 것은 천지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인간세human society를 지칭한다.

중은 인간세의 큰 근본이다. <중략>

조화Harmony라는 것은 현실태이기보다는 끊임없이 지향되는 달성의 과정이다.

그것은 부조화의 현실을 인정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부조화가 없이는 조화가 없다. <중략>

문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중용"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자질구레한 덕성태들의 중간항목을 찾아 행복해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에 대한 절제를 통하여 천지와의 조화를 이룩해야만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다.

<중략>

자사는 그들의 문명적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센다이 앞바다의 쯔나미도 후쿠시마 원전이 없었다면

그토록 큰 비극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연재해보다 인위재해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그렇다면 원전을 만들지 않고 사는 문명의 방식을 우리는 힘써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심성의 문제이며 정감의 문제이며 "중절中節"의 문제이다.


제 2 장 시중장 時中章

중니께서 말씀 하시었다.
"君子는 행위는 중용을 지킨다.
그러나 小人의 행위는 중용에서 어긋난다.
군자가 중용을 행함은 군자다웁게 때에 맞추어 中을 실현한다.
그러나 소인의 중용을 행함은 소인다웁게 기탄忌憚함이 없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라든가, 신분의 차이라든가,

부의 소유의 차이에 의하여 외면적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공자의 위대성은 인간을 보편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데에 있다. <중략>

고대사회의 사상가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덕성이다.

희랍의 모든 사상가는 노예제를 긍정한 위에서 평범한 시민을 이야기한다. <중략>

서양의 보편적 인간관은 실제로 미국의 노예해방 이후에나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소인은 계급적으로 구분되는 특수 인간부류가 아니라,

군자가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군자가 되지 못하는 인간일 뿐이다. <중략>

군자와 소인은 어디까지나 가변적인 통합개념이다.

군자가 소인이 될 수도 있고, 소인이 군자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군자도 중용을 하고, 소인도 중용을 한다.

그런데 군자의 중용은 무엇이고, 소인의 중용은 무엇이냐?

그 둘은 어떻게 다르냐? 어떻게 구별되는 것이냐?

공자는 말한다.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이고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無氣憚이다.

공자의 언급은 천하에 둘도 없는 명언이라 할 수 있다.


제 3 장 능구장 能久章

공자께서 말씀 하시었다.
중용이여,참으로 지극하도다.!
아~사람들이 거의 그 지극한 중용의 덕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구나.!

핵심은 그의 인격에 우러나오는 능구에 있다. 지속할 수 있음에 있다.

지속하지 않으면 그것은 중용이 아니다.

인생의 목표는 영원이나 불멸이나 불사나 불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언어들은 모두 종교적 언어이며 속임수에서 우러나온 방편적 픽션의 언어들이다.

인생의 진리에 영원불변은 없다. 인간은 죽으면 끝이다.

아니, 죽어도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결국 잊혀지고 만다. <중략>

그럼 인간이 믿고 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지속태"일 뿐이라고 공자-자사는 말한다. <중략>

지속이란 불변의 아니라, 변화이며, 시간 속에서의 유지를 말하는 것이다. <중략>

공자의 말씀속에는

허황된 진리를 추구하지 말고 구체적인 삶의 지속을 추구하라는 당부가 들어있다.


제 4 장 지미장 知味章

공자께서 말씀 하시었다.
道가 행하여지고 있지 않은지,나는 알고 있도다.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道를 넘어서서 치달려 가려고만 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마음이 천한 데로 쏠려 미치지 못한다.
道가 왜 이세상을 밝게 만들지 못하고 있는지,나는 알고 있다.
현명한 자들은 분수를 넘어가기를 잘하고 不肖한 자들은 아예 못미치고 만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마시고 먹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맛을 제데로 아는 이는 드물다.

과, 불급은 도가 불행하고 불명한 사태에 대한 이유로서만 제시된 것이다.

중용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성은 과, 불급이 없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바로 "맛을 아는 심미적 경지"에 있다고 본 것이다. <중략>

맛인 예술이나, 인품이나, 문학이나, 과학이나, 논리, 그 모든 것에 적용되는 것으로

매우 경제적인 스타일을 형성하는 심미적 감성이다.

맛을 아는 숙달된 문장가는, 맛을 아는 숙달된 요리사가 음식의 재료를 낭비함이 없이

곧바로 최상의 맛을 내듯이, 단어를 낭비하지 아니한다.

맛을 아는 의상 디자이너는 천을 허비하지 않는다.

맛을 아는 장인은 언제고 주어진 조건에서 최상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중략>

따라서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맛"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맛을 아는 인간을 배양하느냐에 문명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맛"은 "멋"이며, "힘"이다. <중략>

절제없는 맛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맛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궁극적 도덕성이다. <중략>

맛은 시중이다. 맛은 전문가의 특권이다.

다시 말해서 수신의 결과로서만 달성되는 것이다. <중략>

맛은 교육의 정점이며, 교육의 특수성과 일반성을 통합하는 것이다.

맛은 전문성을 문명에 제공하는 끊임없는 문화이다.


제 5 장 도기불행장 道基不行章

공자께서 말씀 하시었다.
아~진실로 道가 행하여지질 않는구나.!


인간은 욕망의 주체이기 전에 도덕의 주체이며,

원죄의 불완전한 존재이기 전에

완전 즉 성聖의 가능성을 내포한 하학이상달의 위대한 존재이다. <중략>

우리가 재건해야 할 철학은 인간의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을 신성한 존재로서 재건설하는 것이다. <중략>

인간을 온전한 생명으로서 바라보는 것이다.


제 6 장 순기대지장 舜基大知章

공자께서 말씀 하시었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신 분이실진저.!
순임금께서는 무엇이든 묻기를 좋아하셨고 비근한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하셨다.
사람들의 추한 면은 덮어주시고 좋은 면은 잘 드러내주시었다.
어느 상황이든지 그 양극단을 모두 고려하시어 그 中을 백성에게 적용하시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舜이되신 까닭이로다. 

권력은 긍정적인 창조의 맥락에서 발휘되어야지

부정적인 콘트롤의 맥락에서 발현되면 안된다. <중략>

지라는 것은 인식론적 탐구라기보다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천적 앎이다.

앎이란 물론 나 이외의 환경세계에 대한 탐구를 내포한다.

앎은 나 자신에 대한 앎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앎을 포섭하는 것이다.

그런데 앎의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성은 호문好問이다.

호문이란 앎이라는 행위에 있어서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모든 격식을 타파하고 겸손하게 가슴을 여는 것이다.

지식은 선험적인 것으로 다 충족되지 않는다.

서양사람들이 "선험적 형식"을 중시하게 된 것은

그들의 지식추구방식이 실천적 앎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앎 그 자체에 대한 인식론적 탐구였기 때문이다.

"호문"이란 끊임없이 가슴을 열고 타인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다. <중략>

묻되 형이상학적 현리에 심취하지 말고

가깝고 비근한 실생활의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하라! <중략>

남들보다 대학교를 10년 더 먼저 나온다 한들,

10년 더 발리 학문이 성취되는 것도 아니요,

10년만큼 더 많이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1년 더 빨리 출세하는 것도 아니다. <중략>

어떤 질문 즉 태제가 제시되면 그것에 관련된 모든 양극적,

대척적 상황을 다 충분히 고려해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중용이란 양단의 중앙이 아니라,

모든 극단의 상황들을 충분히 고려해보고 그 숙성된 상황변수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결단이라는 뜻이다.


제 7 장 개왈여지장 皆曰予知章

공자께서 말씀 하시었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순임금처럼 지혜롭다고 말하는데,
나를 휘몰아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 속으로 빠뜨려도
나는 그것을 피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지혜롭다고 말하는데
나는 중용을 택하여 지키려고 노력해도
불과 1개월을 지켜내지 못하는구나. 

인간의 가치는 끊임없는 향상向上에 있다.

 

제8장 회지위인장回之爲人章

공자께서 말씀 하시었다.
안회의 사람됨이란,항상 중용을 택하되 하나의 善한 일이라도 깨닫게 되면,
그것을 진심으로 고뇌하면서 가슴에 품어 잃는 법이 없었다.

 

仁이란 감성적 섬세함Sensitivitv이다.

체험속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원리는 원리의 자격이 없다.

그것은 공허한 형식으로 머물뿐이며,실천의 실체적 준거가 되지 못한다.

작은 선이라도 지나치지말자.

그리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시중을 발현하자.그리고 능구하자.

 

제9장 백인가도장白刃可蹈章

공자께서 말씀 하시었다.
천하국가란 평등하게 다스릴 수도 있는 것이다.
높은 벼슬이나 후한 봉록도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서슬퍼런 칼날조차 밟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中庸은 能하기 어렵다.


제 10 장 자로문강장 子路問强章

子路가 强에 관하여 공자님께 여쭈었다.
공자께서 대답 하시었다.
그대가 묻는 것이 남방의 强을 가리키는가? 북방의 强을 가리키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대 자신이 지향하는 强을 가리키는가?
너그러움과 유순함으로서써 가르쳐주고
無道함에 보복하지 않는 것이 남방의 强이니,
군자가 이에 居한다.
병기와 갑옷을 입고 전투에 임하여 죽더라도 싫어하지 않는것은 북방의 强이다.
네가 말하는 强者는 결국 여기에 居하겠지.
그러므로 군자는 화합하면서도 흐르지 않으니
아~그러한 强함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가운데 우뚝서서 치우침이 없으니,
아~그러한 强함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나라에 도가 있어도 궁색한 시절에 품었던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니,
아~그러한 强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나라에 도가 없어도 평소에 지녔던 절개를 죽음에 이를지언정 변치 아니 하니,
아~그러한 强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용기있는 사람들은 흐르는 경향이 있다.

용기도 반드시 화和를 전제로 해야만 진정한 용기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공자는 용기를 중용의 맥락 속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제 11 장 색은행괴장 索隱行怪章

결국 상식적 일상언어로 환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그 속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뛰어넘는 비밀이 들어있듯이

색은하는 것은 우매의 소치일 뿐이다. <중략>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억지로 알리기 위하여 온갖 지랄발광을 하다보면

근원적으로 사회모랄을 파괴하는 짓까지 서슴치 않게 된다.


제 12 장 부부지우장 夫婦之愚章

사람은 단독자로서의 인人이 아니다.

인간人間일 수밖에 없다.

인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는 간(사이)이 필요한데,

그 간을 요약하면 오륜의 간이 된다는 것이다.


제 13 장 도불원인장 道不遠人章

모든 존재에 관한 법칙이 그 존재 자체에 내재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중략>

우주의 법칙은 우주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지, 우주 밖에 있는 어떤 존재가

그 법칙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도끼자루를 자르는 법칙이 도끼자루 자체에 내재하듯이,

"사람을 다스린다"하는 그 모든 법칙이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것이다. <중략>

스스로 고치기만 하면 더 이상 다스리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스림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발적 개선을 목표로 해야 한다. <중략>

공자는 서恕를 말했지 충忠을 말하지 않았다.

서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여심如心이며,

나의 마음을 타인의 마음에 이입하여 같이 느끼는 공감 상태를 의미한다.

공자는 인仁의 본질인 서에 있다고 보았다.

서라는 것은 실제로 요새말로 하자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보편적인 가치관이며, 인류애를 의미한다. <중략>

우리가 깨달아야만 할 중요한 인간학적 사실은

아가페를 빙자한 사랑의 폭력에 관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도 좋아한다는 보장이 없다. <중략>

대부분의 기독교국가 제국주의가 개발도상 국가들에게 이런 짓을 해온 것이다.

사랑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베품"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중략>

공자-자사는 언행일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언은 행을 돌보고 행은 언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중략>

언은 언 자체로 독자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으로 연결될 때만이 참다운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제 14 장 불원불우장 不怨不尤章

군자는 그 자리에 처하여 그 자리에 합당한 행동에 최선을 다할 뿐,

그 자리를 벗어난 환상적 그 무엇에 욕심내지 않는다. <중략>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 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중략>

군자는 평이한 현실에 거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짓을 감행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중략>

문명의 주체인 인간은 "자기를 바르게 하면서

나의 삶의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서 구하지 말아야 한다."


제 15 장 행원자이장 行遠自邇章

어찌하여 가까운 데, 낮은 데를 버리고 먼 곳과 높은 곳만을 바라본단 말인가?

하느님은 높은 데 있지 않고 낮은 데 있으며,

천국은 먼 곳에 있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도대체 왜 모른단 말인가?


제 16 장 귀신장 鬼神章

귀신이란 음양의 소장消長일 뿐이다. <중략>

그렇다면 만물에 귀신이 없는 것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중략>

다음과 같은 주희의 말을 한 번 더 살펴보자!

귀신은 단지 기氣일 뿐이다.

그런데 기라는 것은 끊임없이 움추렸다가, 폈다, 갔다, 왔다 하는 것이다.

천지지간에 기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까 하느님도 기일 뿐이다.

사람의 기와 천지의 기는 항상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사이에 단절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인간이 단지 그 연속성을 눈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다. <중략>

대저 생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이것은 모든 유기체의 운명이다.

죽게 되면 반드시 흙속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컬어 귀라고 한다.

그러나 혼기는 하늘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컬어 신이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귀와 신을 합하여 꼭 같이 제사지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선왕의 가르침의 지극한 것이다.


제 17 장 순기대효장 舜基大孝章 

효를 자식이라는 약자의 부모라는 강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으로 이해를 해왔고,

할고割股(허벅지 살을 베어 료친),

단지(손가락을 잘라 위독한 부모님 입에 피를 흘려드리고

남은 손가락은 죽을 끓여 드린다) 등의 터무니없는 자해행위를

효성의 극진한 행동으로 예찬하는 과거 형식주의 도덕의 유폐가

아직도 상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

귀신이란 인문세계의 역사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나라는 유기체는 어김없는 생멸의 과정을 거친다. 나라는 단위생명은 "단절"이다.

그러나 그 단절은 나의 단절로써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소생所生으로써 연속된다.

나의 소생은 일차적으로는 나의 자식이 될 것이요,

내가 역사 속에 남긴 유업일 수도 있다.

이 역사적 단절을 메워주는 "풀칠" 같은 것이 "귀신"일 수도 있다.

즉 내가 죽으면 나는 귀신이 되어 제사의 대상이 됨으로써

하대의 가족과 당분간 같이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략>

몸속 자궁에서 태아를 키우고, 몸 밖으로 태아가 성숙하여

나왔을 때부터 젖을 먹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젖을 먹인다"는 현상은 내 몸의 요소를 직접 자식에게 분유分有시킨다뜻이다.

<중략>

젖에 의존하는 것은 생존의 가능성을 높였지만,

또 그만큼 독립성이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젖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포유류는 많은 개체를 일시에 탕생시킬 수는 없다. <중략>

젖을 통해 "한 몸"이라는 기나긴 의식적 체험기간을 거치는 포유류에 있어서

비로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의 감정이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중략>

인간이 태어나서 엄마품에서 젖을 먹고 보호를 받는 기간이

최소한 3년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3년상을 아니지내고 딴짓을 하면서

편히 살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중략>

절대적 의존의 체험이라 말할 수 있는 효의 시기를 거친다.

의식의 언어적 분화가 일어나가 전에 이미

갓난아기는 순결하게 "절대적 타자"를 체험한다.

이 절대적 타자는 나의 몸의 생명영양체계를 가동시켜주는 절대적 양육,

그리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절대적 보호의 비언어적 체험의 주체이다.

<중략>

지식이 사회화 과정을 완료하면 엄마는 자식을 떠난다. <중략>

종교의 본질을 신앙의 대상에서 찾지 않고,

다시 말해서 역사에 드러난 문명적 개념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심성에 내재하는 체험으로서 그것을 말할 때

우리는 반드시 효라는 의식의 원초적 기저에 도달하게 된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상적 효자였을 뿐이다.

예수를 닮음은 효의 구현이다.

효심이 강한 조선왕조의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이러한 효기독론Xiao-Christology의 심층의식을 파고 들어왔다.

이것은 다석 유영모의 생각이다. <중략>

죽은자의 권위로써 산자를 제압하는 모든 원시적 형태의 제도가

다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의 존속은 사회적 연속성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아가페적 사랑은 "태양"과 "엄마"밖에는 없다.

질투와 증오와 독선의 이기적 주체인 유대인 여호와는

아가페의 리스트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제18장 문왕무우장文王無憂章

18장은 17장의 테마를 그대로 승계한 것이다.

혁명의 과제에도 3대의 효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父作之,子述之)부작지 자술지

사례는 죽은자의 위로써 하고,제사는 제사를 받드는 자손의 위로써 사의 예로써 한다.

또 거꾸로 아버지가 사의 신분이고 아들이 대부의 신분일 경우에는,

장례는 사의 예로써 하고 제사는 대부의 예로써 하는 것이다.

장례는 흉례의 속한 것이고,제례는 길례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5만원권 지페에 신사임당(1504~1551)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 호는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본받는 다는 뜻으로 신씨 자신이 지은 것이다.

율곡의 삶이 어머니의 뜻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할수도 있다.

그 아호는 참으로 거대한 혁명과 창업의 뜻이 숨겨져 있다.

 

제 19 장 주공달효장 周公達孝章

이 장의 가장 중요한 메세지는 효라는 것이 특정한 나의 혈연적 부모에 대한 복종이나

추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편적 인간의 선업을 계승하는 문화적 마인드야말로 진정한 효라고 천명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바르게 알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바로 그사람의 뜻과 일을 바르게 알고

계술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만들어주지 않는다.역사는 시간이 만든다.

그들이 행하였던 예를 내가 행하고, 그들이 즐겼던 악을 내가 즐기고,

그들이 존중했던 것을 내가 공경하며, 그들이 가깝게 했던 사람들과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중략>

우주생명의 창조적 가치를 인간이 문명 속에서 계속 계승하여 축적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이라는 뜻이다.


 


제 20 장 애공문정장 哀公問政章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知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仁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勇에 가깝습니다.

이 세 가지를 알면 과연 내 몸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몸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를 알게 되면 타인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중략>

공자도 "인능홍도人能弘道, 비도홍인非道弘人"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주체적으로 도를 넓혀갈 수는 있으나, 도가 사람을 넓혀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이 하나님다웁게 만들어갈 수 있으나,

하나님이 사람을 사람다웁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중략>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은 있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법이라는 것은 있어본 적이 없다.

<중략>

인간보편의 이해는 곧 하느님에 대한 앎에 포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나의 몸속에서 나는 친親, 그리고 인人, 그리고 천天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즉 나의 몸은 나의 몸의 생물학적 근원인 효孝의 세계이며,

그 효의 세계에서 인간, 그 보편을 파악하며, 우리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앎을 통해

하느님,

즉 종교적 신앙의 근원인 모든 신성, 경건성, 성스러움, 신성함을 파지하는 것이다.

즉 나의 몸, 신은 친이요, 인이요, 천이요, 신이다.

모두 운을 밟고 있는 아름다운 말이다. <중략>

문제는 끊임없는 "노력"이요 "호학"이다.

이에 관하여 순자는 그의 책 수신편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였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뽐낸다.

그러나 조랑말이라도 열심히 가기만 하면 열흘이면

같은 목적지에 너끈히 도달할 수 있다."

문제는 가는 목적지가 명확히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중략>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대 능하지 못하면 중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중략>

그 종착역에 도달할지 안 할지는 여기 질문의 대상이 되질 아니 한다. <중략>

인생은 과정이다. 인생의 목적이란 그 과정에 내재하는 것이다. 

 

 

제21장 자성명장自誠明章

이 장부터 자사의 성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21장은 자사성론子思誠論의 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성性에서부터 명明으로 구현되어 나아가는 것을 성性이라 일컫고,

명明에서부터 성誠으로 구현되어 나아가는 것을 교敎라고 일컫는다.

성誠하면 곧 명明해지고 명明하면 곧 성誠해진다.


제22장 천하지성장天下至誠章

인류에게서 종교가 생겨난 것은 제1차적으로 "상진언어"덕분이다.

상징언어가 없고 싸인언어(sign language)만 있는 동물에게는 종교라는 것이 없다.

언어와 결부되어 있는 인간의 원초적 종교감정은 "공포""두려움Fear"이다.

서양의 삼위일체Trinity는 성부Holy Father, 성자Holy Son, 성신Holy Spirit인데

우리 전통속에 삼위일체는 하늘Heaven,땅Earth,인간Man,이라는 엄연한 사실도 기억하고 넘어가자.!

성부,성자,성신이 한몸이 되는 것이 좋을까.?

하늘,땅,인간이 한몸이 되는 것이 좋을까.?


제23장 기차치곡장基次致曲章
이 장은 誠이라는 가치를 化와 연결 시킴으로서 하나의 새로운 테마를 드러내고 있다.

맹자도 인간의 경지의 단계를 6단계로 설정하여

善人ㅡ信人ㅡ美人ㅡ大人ㅡ聖人ㅡ神人을 말하였는데

성인聖人의 덕성에는 반드시 화化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화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쓰는 감화感化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인데,

그 "감화"의 본뜻은 "영향을 준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근원적인 패러다임 쉬프트를 이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4장 지성여신장至誠如神章

至誠의 道를 구현한 사람은 세상 일을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알 수가 있다.

국가가 장차 흥하려고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나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고 하면 반드시 요망스러운 재앙의 싹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길흉의 조짐은 산대점이나 거북점에도 드러나고,

관여된 사람들의 사지 동작에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화禍나 복福이 장차 이르려고 할 때,

至誠의 道를 구현한자는 그 원인이 되는 좋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알며,

좋지 않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알아 계신戒愼한다.

그러므로 至誠은 하느님과 같다고 할 것이다.

 

제25장 성자자성장聖者自成章

誠은 스스로 이루어 가는 것이요,道는 스스로 길지워 나가는 것이다.

誠은 物의 끝과 시작이다.誠하지 못하면 物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誠해질려고 노력하는 것을 삶의 가장 귀한 덕으로 삼는다.

誠이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 자기를 이룰 뿐 아니라

동시에 반드시 자기 밖의 모든 물을 이루어 줌으로써 구현되는 것이다.

자기를 이룸을 인仁이라 하고 나 이외의 사물을 이룸을 지知라한다.

仁과 知는 인간의 性이 축척하여 가는 탁월한 덕성이며,

인간존재의 外와 內를 포섭하고 융합하는 道이다.

그러므로 誠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지더라도 반드시 그 사물의 마땅함을 얻는다.


제 26 장 지성무식장 至誠無息章

천지天地는 기철학적 세계관을 전재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

천은 무형자이며 형이상학자이며 도道이며 혼魂이며 신神이다.

지地는 유형자이며 형이하학자이며 기器이며 백魄이며 정精이다.

천지는 음양의 기의 다른 이름이다.


제 27 장 존덕성장 尊德性

도와 덕은 현대어(서양어)의 도덕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도는 언어의 문제이며 지식의 문제이며 인식의 문제이다.

덕은, 도가 어디까지나 객곽적인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내면적, 주관적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도는 인식의 문제이지만, 덕은 "몸의 축적"에 관한 것이다.

모든 덕은 나의 몸에 습관으로서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를 통하여 세계를 인식하고,

덕을 통하여 나의 내면적 도덕적 주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제 28 장 오종주장 吾從周章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리석으면서도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려 하고,

신분이 낮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려 하고,

지금 세상에 태어나 지금 세상의 법도로 살고 있으면서도

옛날의 도로만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이 많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재앙이 그 몸에 미칠 수박에 없다."

 

제 29장 왕천하장(王天下)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되려면 반드시 3가지 중요한 일

(예악정의, 법도창제, 문자고정)을 해야 다스림에 과실이 적을것이다!
앞선대의 성왕이 제정한 예의제도가 아름다울지라도 그 연대가 오래되면 이미 검증할 수가 없게된다.
검증할 수가 없으면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민중은 복종하지 않는다.
천자의 자리에 있지않은 성인이 주장하는 예악제도가 아무리 아름답고 좋을지라도 존귀한 지위가 없다.
존귀한 지위가 없으면 사람들이 신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신임하지 않으면 민중이 복종하지 않는다.
그래서 군자가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의 가장 근본은

먼저 자기자신으로 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검증해서 확인하는 것이다.
하,상,주 삼대의 예악제도를 조사하여 어떤 차이나 잘못이 없다면

이를 다시 사용해 하늘과 땅사이에 실시해도 객관규율에 위배됨이 없을것이다.
점을 쳐 물어본것을 귀신과 비교해도 어떠한 의문이 없고

백세대 이후에 성인이 나타나길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을것이다.

귀신에게 물어 어떠한 의문도 없다면 하늘의 도리를 깨달은 것이다.
백세대이후에 성인이 나타나길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다면 사람의 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움직임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 천하의 법칙이 되고, 그의 행위는 대대로 세상사람의 규범이 되고,
그가 말하는 것은 세세토록 세상사람의 준칙이 된다.
그로부터 멀리있는 사람은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며, 가까운 사람은 한오라기의 싫어함도 없다.

“시경 주송 진로”편에서 말했다. “
(기,송 두나라는 하, 상 두왕조의 후대이다) 본 나라의 사람들은 증오가 없으며 주왕조대의 사람도 싫어함이 없도다.
정사를 돌봄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근면하여 영원토록 아름다운 명예를 지킨다.”
군자는 일찍부터 이런 일을 하여 아름다운 이름이 천하에 이르지 않는곳이 없다.

 

제 30 장 중니조술장 仲尼祖述章  

"소덕천류小德川流, 대덕돈화大德敦化"라는 명제도

같은 공존, 상생의 논리를 말해주고 있다.

소덕은 소덕 나름대로 유니크한 의미가 있으며,

대덕은 대덕 나름대로 포괄적인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소덕의 작은 천류와 같은 흐름이 없이는 대덕의 거대한 돈화가 있을 수 없다.

돈화에 화化라는 근원적인 변화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세혈관의 충실한 작용들이 있어야

우리 몸의 대동맥의 대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유기체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이러한 소덕과 대덕의 유기적 작용의 통합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서울 창덕궁의 대문의 이름도 "대덕돈화"에서 온 것이며,

남대문의 이름은

존덕성장(제27장)의 "돈후이숭례敦厚以崇禮"의 마지막 두 글자에서 온 것이다.

 

 

제 31장 총명예지장(聰明睿知)
오로지 천하의 가장 위대한 성인만이 그 총명과 지혜가 밝고 밝으며,
깊고 멀리 달할수 있어 하늘로 부터 부여 받은 군자의 위치에 거하면서 아래로는 민중들을 다스린다.
너그럽고 두텁고 온화하며 부드러운 인仁으로 천하만물을 포용한다.
노력하여 강해지기를 꾀하여 더욱 강하고 용맹하고 굳센 그 의義로써 세상의 큰일을 심사숙고하여 결정한다.
단정하고 장중하고 또 올바른 위치를 잘 지키는 그 예禮로써 타인의 존경을 받는다.
문장의 조리가 분명하고 생각이 주도면밀하고 밝게 살피는 그 지智로서 옳고 그름과 삿됨과 바름을 판별한다.

위대한 성인은 그 도덕이 넓고 또 자세 하고 깊다.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샘물과 같이 끊임이 없어 어떤곳 어떤시기라도 모두 드러난다.
그 넓은것으로는 경계가 없는 푸른 하늘과 같고, 그 세밀한 것으로는 아주 깊은 심연과 같다.
그가 위로 드러내면 존경을 표시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말을 하면 믿고 따르지 않을 사람이 없다.
행동을 하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그의 명성이 중국을 뛰어넘어 사방각지의 소수민족부락에 까지 미친다.
그래서 배와 마차가 닿을수 있는 곳, 사람이 다닐수 있는 곳, 푸른하늘이 덮을수 있는 곳, 대지가 능히 싣을수 있는 곳,
해와 달이 비추는 곳, 서리와 이슬이 떨어지는 곳과 무릇 피가 돌고 숨을 쉬는 사람이라면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친하지 않을수 없다.
그래서 성인의 도덕은 가히 하늘과 짝하는 것이다.

 

 

제 32 장 성지천덕장 聖知天德

준준肫肫, 연연淵淵 , 호호浩浩는 천, 지, 인 삼재三才사상과 관련이 있다.

 인人 인仁  준준肫肫   
 지地 연淵 연연淵淵    
 천天 천天  호호浩浩     

공자를 인성의 구현자로서 준준하고(간곡하고 지극하다),

땅의 구현자로서 연연하고(그윽한 깊이가 있다),

하늘의 구현자로서 호호하다(드넓고 광대하다)고 말함으로써

천, 지, 인 삼재의 모든 덕성을 한 몸에 구현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제 33 장 무성무취장 無聲無臭  

밤새 소리없이 소록소록 쌓이는 백설처럼

인간의 내면에 쌓이는 신독의 덕성이야말로

'중용'의 궁극적 주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사의 궁극적 의미는 참여하는 내가 조상의 삶의 자리를 밟아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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