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 제13장 도불원인장(道不遠人章)
 

1.
子曰道不遠人하니 人之爲道而遠人이면 不可以爲道니라
자왈도불원인하니 인지위도이원인이면 불가이위도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하니 사람이 도를 하되
사람에게서 멀리 한다면 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본문 해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 이것이 곧 도이다.
사람은 도에서 나오고 도에서 살고 있으니, 도가 사람이고 사람이 곧 도이다.
도와 사람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明心寶鑑』에도 소강절(邵康節) 선생의 말을 인용하여
“天聽이 寂無音하니 蒼蒼何處尋고 非高亦非遠이라 都只在人心이니라
(하늘이 들으심이 고요하여 소리가 없으니 푸르고 푸름에 어느 곳에 찾을꼬.
높지도 않고 또한 멀지도 않음이라.
도무지 다만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니라)” 하였듯이
하늘, 부처, 도 모두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道者는 率性而已니 固衆人之所能知能行者也라
도자는 솔성이이니 고중인지소능지능행자야라 

 

도라 하는 것은 성품을 따를 뿐이니
진실로 모든 사람들이 능히 알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는 바이라.

 

故로 常不遠於人하나니 若爲道者 厭其卑近하야 以爲不足爲라하고

고로 상불원어인하나니 약위도자 염기비근하야 이위부족위라하고

 

而反務爲高遠難行之事면 則非所以爲道矣니라.
이반무위고원난행지사면 즉비소이위도의니라.

 

그러므로 항상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아니함이니
만약 도를 하는 자가 그 비근함을 싫어하여
써 족히 할 만한 것이 못한다고 도리어 고원난행이라면서 힘을 쓰면
곧 써 도를 하는 바가 아니니라.

 

[앞주 해설]

앞서 ‘天命之謂性이고 率性之謂道’라 하였듯이
도는 하늘이 준 성품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能知能行한 것, 곧 사람에게 있는 本之本能을 따르는 것이 도이다.
그런데 도를 하는 자가 당연히 가야 할 것들,
이를테면 부부관계나 일상적인 언어, 행동거지 등에 대해서는
비근하다고 하여 하찮게 여기고,
도가 마치 저 멀리 하늘이나 먼 산에 있는 어려운 일이라고 하면서
엉뚱한 데서 찾아 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은 사람답지 않은 행동으로 일상생활에서 허물만 짓게 되니
이는 도를 하는 것이 아니다.

 

 

2.
詩云 伐柯伐柯여 其則不遠이라하니 執柯以伐柯하되 睨而視之하고
시운 벌가벌가여 기칙불원이라하니 집가이벌가하되 예이시지하고

 

猶以爲遠하나니 故로 君子는 以人治人하다가 改而止하니라
유이위원하나니 고로 군자는 이인치인하다가 개이지하니라

 

시경에 말하기를 도끼자루를 찍어내네, 도끼자루를 찍어내네.
그 법은 멀지 않도다고 하였다.
도끼자루를 잡고서 도끼자루를 찍어내되 대중하여 보고 오히려 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리다가 고쳐져야 그만둔다.

 

[본문 해설]
위 시는 『시경』「국풍 빈풍 벌가(國風 빈風 伐柯)」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를 인용한 것이다.

伐柯如何오 匪斧不克이니라 / 도끼자루 베려면 어찌 하오 도끼 아니면 아니 되지 
取妻如何오 匪媒不得이니라 / 처를 얻으려면 어찌 하오 중매쟁이 아니면 아니 되지
伐柯伐柯여 其則不遠이로다 / 도끼자루를 베고 도끼자루를 벰이여 그 법이 멀지 않도다
我?之子하니 ?豆有踐이로다 / 내 그 님을 맞아 예를 갖춰 혼례하네

원래 이 시는 예를 갖춰 혼례함을 노래한 것이다.

도끼자루와 도끼는 남자와 여자의 혼례를 비유한 것으로
각자의 짝을 찾는데 그 기준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앞서도 살을 맞대고 한 방을 쓰는 부부에게도 도가 있듯이
그 부부를 이루기 위한 성혼의 과정에도 도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道不遠人’의 예에 해당한다.

부부는 천생연분이니 서로를 배필이라고 하듯이 서로 닮은 구석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상대방을 찾는데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예를 시에서는 도끼와 도끼자루에 비유하고 있다.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베는데,
베려는 나무는 도끼자루이니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도끼자루처럼 만들면 된다.
곧 도끼자루를 만드는 법이 바로 자기 옆에 있기에 바로 보면 될텐데
이는 생각지 못하고 마치 그 방법이 멀리 있는 것처럼 비스듬히 보고 있음을 꼬집은 내용이다.
사람이 곧 도이고 도가 곧 사람이므로,
군자가 사람을 다스리려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를 미루어 남을 다스리면 된다.

남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남이 있기에 나를 미루어 다스리다가
그 사람이 허물을 고치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치는 것이다.
이는 『大學』 傳文 제10장 제1절에 나오는 ?矩之道(혈구지도)의 이치와 같다.

“所謂平天下 在治其國者는 上이 老老而民이 興孝하며
上이 長長而民이 興弟하며 上이 恤孤而民이 不倍하나니 是以로 君子는 有?矩之道也니라
(이른바 “천하를 平함이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다”는 것은,
위에서 늙은이를 늙은이로 섬기면 백성들이 孝에 일어나고,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면 백성들이 弟에 일어나며,
위에서 외로운 이를 불쌍히 여기면 백성들이 배반하지 아니하니,
이 때문에 군자는 혈구의 도가 있느니라.)"

 

詩는 빈風伐柯之篇이라 柯는 斧柄이오 則은 法也라 睨는 邪視也라
시는 빈풍벌가지편이라 가는 부병이오 즉은 법야라 예는 사시야라

 

시는 빈풍장 벌가편에 있느니라.
가는 도끼자루요 칙은 법이라. 예는 흘겨봄이라.

 

言人이 執柯伐木에 以爲柯者 彼柯長短之法이 在此柯耳이라
언인이 집가벌목에 이위가자 피가장단지법이 재차가이이라

 

사람이 도끼자루를 가지고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드는 것은
저 도끼자루의 길고 짧은 법이 이 도끼자루에 있는 것을 말함이라.

 

然이나 猶有彼此之別이라 故로 伐者 視之를 猶以爲遠也어니와
연이나 유유피차지별이라 고로 벌자 시지를 유이위원야어니와

若以人治人은 則所以爲人之道 各在當人之身하야 初無彼此之別이라 
약이인치인은 즉소이위인지도 각재당인지신하야 초무피차지별이라

 

그러나 오히려 이것과 저것의 분별이 있느니라.
고로 베는 자가 보는 것을 오히려 써 멀다하거니와,
만약에 사람으로 써(사람의 도리로써)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하는 바 각각
마땅히 사람의 몸에 있어서 애당초 피차의 분별이 없느니라.

 

故로 君子之治人也에 卽以其人之道로 還治其人之身이라가 其人能改어든 卽止不治하나니

고로 군자지치인야에 즉이기인지도로 환치기인지신이라가 기인능개언든 즉지불치하나니

 

蓋責之以其所能知能行이오 非欲其遠人以爲道也라 張子所謂以衆人望人則易從이 是也라.
개책지이기소능지능행이오 비욕기원인이위도야라 장자소위이중인망인즉이종이 시야라.

 

그러므로 군자가 사람을 다스리는데
곧 사람의 도리로써 도리어 그 사람의 몸을 다스리다가
그 사람이 능히 고치거든 곧 그쳐서 다스리지 아니하나니
대개 그 능히 알고 능히 행하는 바로써 꾸짖는(가르치는) 것이오.
그 사람을 멀리하여 써 도를 하고자 함이 아니니라.
장자(張載)가 이른바 여러 사람으로 써 사람을 바라보게 하면 쉽게 따름’이 이것이라.


[앞주 해설]
도끼자루를 새로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벨 때 길게 해야 할지 짧게 해야 할지를 가늠하는 것은
도끼자루를 베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현재 쓰고 있는 것이 조금 짧아 불편하다 하면 다소 길게 만들면 될 것이고
자루가 길어 불편하다 싶으면 조금 짧게 다듬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지키라고 다스리는 것이기에
그 도리는 마땅히 모든 사람의 몸 속에 들어 있는 것이고,
도끼자루처럼 짧고 긴 분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의 도리란 각각의 몸 속에 있기에 능히 알고 능히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깨우쳐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高遠難行한 것은 아니다.
장자도 말했듯이 사람의 개성은 각각 다르지만 사람의 도리(본성)는
거의 같기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게 하면 쉽게 따른다고 하였다.
즉 사람에게는 대중적 심리가 있어 누가 이렇게 해야 한다면 따르는 습성이 있기에
사람을 다스리는 군자가 항상 자기 몸에 있는 사람의 도리
곧 하늘로부터 부여받는 성품 그대로 나간다면 모두가 이를 따를 것이다.

 

 

3.
忠恕違道不遠하니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이니라
충서위도불원하니 시제기이불원을 역물시어인이니라

 

충과 서는 도에서 어긋남이 멀지 아니하니,
자기에게 베풀어 짐을 바라지 않는 것을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

 

[본문 해설]
忠은 원이라는 도형으로 볼 때 中心과 求心力에 해당하고,
恕는 중심에서 둘레까지 이르는 반지름으로 밖으로 똑같이 작용하는 遠心力과 같은 것으로 如心이다.
다시 말하면 忠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진실함을 말하며
恕는 나 자신을 용서하듯이 남도 나 자신과 똑같이 대하는 마음을 말한다.
즉 나의 충서가 남의 충서요 남의 충서가 나의 충서요, 나의 도가 남의 도요,
남의 도가 나의 도요, 나의 마음이 남의 마음이요 남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니,
자신이 무슨 일을 해보고 나서 좋지 않다고 여기면 남 또한 좋지 않게 여길 터이니
그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말이다.
이는 『대학』10장에서 말하는 혈구지도와 같은 의미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所惡於上으로 毋以使下하며 所惡於下로 毋以事上하며
소악어상으로 무이사하하며 소악어하로 무이사상하며

 

所惡於前으로 毋以先後하며 所惡於後로 毋以從前하며
소악어전으로 무이선후하며 소악어후로 무이종전하며

 

所惡於右로 毋以而交於左하며 所惡於左로 毋以而交於右니 此之謂?矩之道니라.
소악어우로 무이이교어좌하며 소악어좌로 무이이교어우니 차지위혈구지도니라.

 

위에서 싫은 바로 아래를 부리지 말며, 아래에서 싫은 바로 위를 섬기지 말며,
앞에서 싫은 바로 뒤를 앞서지 말며, 뒤에서 싫은 바로 앞을 따르지 말며,
오른쪽에서 싫은 바로 왼쪽을 사귀지 말며, 왼쪽에서 실은 바로 오른쪽을 사귀지 아니하는 것, 
이것을 일컬어 ‘혈구의 도’라고 하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에게 善이 있은 뒤에 남에게 그것을 요구하며,
자기에게 不善이 없은 뒤에 남에게 그르다고 하는 것이니,
자기 몸에 간직한 것이 恕가 아니고서 다른 사람을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은 있지 않다

 

(是故로 君子는 有諸己而後에 求諸仁하며 無諸己而後에 非諸人하나니
(시고로 군자는 유제기이후에 구제인하며 무제기이후에 비제인하나니

 

所藏乎身이 不恕이오 而能喩諸人者 未之有也니라)고 하였다.
소장호신이 불서이오 이능유제인자 미지유야니라)고 하였다. 

 

盡己之心이 爲忠이오 推己及人이 爲恕라 違는 去也니 如春秋傳에 齊師 違穀七里之違니
진기지심이 위충이오 추기급인이 위서라 위는 거야니 여춘추전에 제사 위곡칠리지위니

 

言自此至彼에 相去不遠이오 非背而去之之謂也라
언자차지피에 상거불원이오 비배이거지지위야라
 
자기 몸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 忠이 되는 것이오,
몸을 미루어서 남에서 미치는 것이 恕가 되느니라.
違는 거리인 것이니 춘추전에 ‘제나라 군사가 곡이라는 땅에서 7리의 거리가 있다’는 違와 같으니,
이로부터 저기에 이르는 것이 서로의 떠난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이오 등져 간다는 것을 이름이 아니니라.

 

道卽其不遠人者 是也라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은 忠恕之事也라 
도즉기불원인자 시야라 시제기이불원을 역물시어인은 충서지사야라

 

以己之心으로 度人之心하야 未嘗不同則道之不遠於人者를 可見이라
이기지심으로 도인지심하야 미상부동즉도지불원어인자를 가견이라
 
도라는 것은 곧 그 사람에게 멀지 않다는 것이 이것이라.
저 몸에 베풀어 보아서 원치 않거든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은 충서의 일이라.
자기의 마음으로써 남의 마음을 헤아려서 일찍이 같지 아니하지 않다면
곧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것을 가히 봄이라.

 

故로 己之所不欲을 則勿以施於人이니 亦不遠人以爲道之事라 
고로 기지소불욕을 즉물이시어인이니 역불원인이위도지사라

張子所謂以愛己之心으로 愛人則盡仁이 是也니라.
장자소위이애기지심으로 애인즉진인이 시야니라.

 

그러므로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곧 써 남에게 베풀지 말 것이니
또한 사람을 멀리해서 써 도를 하는 것이 아니니라.
장자가 이른바 ‘자기 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남을 사랑하는 것인즉
어짊(사랑, 仁)을 다한다’는 것이 이것이니라.

 

4.
君子之道四에 丘未能一焉이로니 所求乎子로 以事父를未能也하며 所求乎臣으로 
군자지도사에 구미능일언이로니 소구호자로 이사부를미능야하며 소구호신으로

 

以事君을 未能也하며 所求乎弟로 以事兄을未能也하며 所求朋友로 先施之를未能也로니 
이사군을 미능야하며 소구호제로 이사형을미능야하며 소구붕우로 선시지를미능야로니

 

庸德之行하며 庸言之謹하야 有所不足이어든 不敢不勉하며 有餘어든不敢盡하야 
용덕지행하며 용언지근하야 유소부족이어든 불감불면하며 유여어든불감진하야

 

言顧行하며 行顧言이니 君子胡不조조爾리오
언고행하며 행고언이니 군자호불조조이리오
 
군자의 도가 넷인데 구는 하나도 다하지 못하였다.
자식에게 요구하는 바로서 아버지 섬김을 다하지 못하였다.
신하에게 요구하는 바로서 임금 섬김을 다하지 못하였다. 벗에게
요구하는 바로서 먼저 베풀어 주지를 못하였다.
용덕을 행하며 용언을 삼가서, 부족한 바가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아니치 못하며,
남음이 있으면 감히 다하지 않아서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을 돌아보는 것이니,
군자가 어찌 부지런히 힘쓰지 않겠는가?

 

[본문 해설]
丘는 공자의 휘이다.
옛날에 선비들은 성인의 이름을 그대로 읽을 수 없다하여‘某(모)’라고 읽었다.
여기서는 공자가 스스로를 지칭하며 일상적인 일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고 겸손해 하며,
도라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떳떳하게 행하고 떳떳하게 말을 삼가는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해서 언행일치가 될 때 진정한 군자의 도를 이룰 수 있고,
군자가 세상에 나아가 덕을 베풀려면 말과 행동이 우선임을 말하고 있다.

 

『소학』외편에도 嘉言善行(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말하였다.
庸言과 庸行은 평상시에 하는 보통 말과 보통 행실을 말한다.
군자는 평범한 말에도 항시 믿도록 하며 평범한 행동에서도 항시 삼간다.
사람은 때로 간사한 마음이 생기지만 군자는 이런 정중한 덕이 있기 때문에
간사한 마음을 막고 그 정성을 늘 보존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더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온 천하를 덕으로 교화한다. 이러한 군자의 덕에 대해 주역 건괘 九二괘의 문언전에 잘 나타나 있다.

중용 서문(중용에 들어가기에 앞서)에서도 밝혔지만
다음 인용문은 자사가 『중용』이란 책명을 따온 글귀이기도 하다.

子曰 龍德而正中者也니 庸言之信하며 庸行之謹하야 閑邪存其誠하며 
자왈 룡덕이정중자야니 용언지신하며 용행지근하야 한사존기성하며

善世而不伐하며 德博而化니 易曰 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 하니 君德也라.
선세이불벌하며 덕박이화니 역왈 견룡재전이견대인이라 하니 군덕야라.
 
(공자 이르길 용덕이 바르게 가운데 한 것이니 떳떳이(항시) 말을 미덥게 하며,
떳떳이(항시) 행실을 삼가서 간사한 것을 막고 그 정성을 보존하며
세상을 착하게 하여도 자랑하지 않으며 덕을 넓게 하여 화하게 하니
역에 이르기를 ‘현룡재전이견대인’이라 하니 인군의 덕이라)”
 
求는 猶責也라 道不遠人이니 凡己之所以責人者는 皆道之所當然也라
구는 유책야라 도불원인이니 범기지소이책인자는 개도지소당연야라

故로 反之以自責而自脩焉이라 庸은 平常也라
고로 반지이자책이자수언이라 용은 평상야라
 
구(求)는 질책하는 것과 같음이라.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은 것이니
무릇 자기가 남을 질책하는 것은 모두가 도의 당연한 바이니라.
그러므로 돌이켜 써 스스로 자기 몸을 꾸짖고 스스로 닦아야 하느니라.

용(庸)은 평상적이라,

行者는 踐其實이오 謹者는 擇其可라 德不足而勉이면 則行益力이오 
행자는 천기실이오 근자는 택기가라 덕부족이면이면 즉행익력이오

言有餘而?이면 則謹益至니 謹之至則言顧行矣오 行之力則行顧言矣라
언유여이인이면 즉근익지니 근지지즉언고행의로 행지력즉행고언의라
 
행(行)은 그 실지를 밟는(실천하는) 것이오, 근(謹)은 그 옳음을 가리는 것이라.
덕이 부족한 것은 힘쓰면 행실이 더욱 더 힘쓸 것이오
말이 남음이 있는데 더듬적거리면 삼감이 더욱 지극함이니
삼감이 지극한즉 말이 행동을 돌아보는 것이오 행실을 힘쓰면 행동이 말을 돌아봄이라.

 ??는 篤實貌라 言君子之言行이 如此하니 豈不??乎아 하시니 贊美之也라   
조조는 독실도라 언군자지언행이 여차하니 기부조조호아 하시니 찬미지야라

凡此는 皆不遠人以爲道之事니 張子所謂以責人之心으로 責己則盡道 是也니라.
범차는 개불원인이위도지사니 장자소위이책인지심으로 책기즉진도 시야니라.

 

조조(??)는 독실한 모양이라.

‘군자의 말과 행동이란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독실하고 독실하지 않으리오’라고 (공자가) 하셨으니 찬미하심이라.
무릇 이것은 모두가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써 도를 행하는 일이니,
장자가 이른바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써 자신을 꾸짖는다면
도를 다하는 것’이 이것이니라.

 
右는 第十三章이라

 

道不遠人者는 夫婦所能이오 丘未能一者는 聖人所不能이니 皆費也요
도불원인자는 부부소능이오 구미능일자는 성인소불능이니 개비야요

而其所以然者는 則至隱이 存焉이라 下章放此하니라.
이기소이연자는 즉지은이 존언이라 하장방차하니라. 

 

도가 사람에게 멀지 않다는 것은 부부의 능한 바이오,
공자가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성인도 능치 못한 바이니,
모두가 소비요 그러한 바는 즉 지극히 은미함이 있는 것이라.
아래 장도 이를 모방함이라.

 

중용 제12장 부부지우장(夫婦之愚章)

 

1.
君子之道는 費而隱이니라.

군자지도는 비이은이니라.

 

군자의 도는 소비하되 숨느니라.

 

2. 

夫婦之愚로도 可以與知焉이로대 及其至也하야난 雖聖人이라도

(부부지우로도 가이여지언이로대 급기지야하야난 수성인이라도)

 

亦有所不知焉하며 夫婦之不肖로도 可以能行焉이로대

(역유소부지언하며 부부지불초로도 가이능행언이로대)

 

及其至也하야난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能焉하며

(급기지야하야난 수성인이라도 역유소불능언하며) 

 

天地之大也애도 人猶有所憾이니 故로 君子 語大인댄

(천지지대야에도 인유유소감이니 고로 군자 어대인댄) 

 

天下莫能載焉이오 語小인댄 天下 莫能破焉이니라.

(천하막능재언이오 어소인댄 천하 막능파언이니라.)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가히 써 참여하여 알되

그 지극한데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아지 못하는 바가 있으며

부부의 어질지 못함으로도 가히 써 능히 행하되

그 지극한데 미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또한 능치 못하는 바가 있으며

천지의 큼에도 사람이 오히려 한하는 바가 있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큰 것을 말할진댄 천하가 능히 실을 수 없고(費),

작은 것을 말할진댄 천하가 능히 파하지 못하느라(隱)

 

與: 참여할 여 肖: 어질 초 憾: 한할 감, 유감할 감 破: 깨뜨릴 파

 

 

3.

詩云 鳶飛戾天이어늘 魚躍于淵이라 하니 言其上下察也니라.

(시운 연비려천이어늘 어약우연이라 하니 언기상하찰야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거늘 고기는 연못에서 뛰어논다 하니

그 위와 아래에 드러남을 말함이니라.

 

 

4.

君子之道는 造端乎夫婦니 及其至也하야난 察乎天地니라.

(군자지도는 조단호부부니 급기지야하야난 찰호천지니라.)

 

鳶 : 솔개 연 戾 : 이를 려 躍 ; 뛸 약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끝(단서)을 지으니 그 지극한데 미쳐서는 천지에 나타나느니라.

 

[본문 해설]

‘費’는 陽이고 ‘隱’은 陰이며, ‘費’가 바깥(外)이라면 ‘隱’은 안(內)이며,

‘費’가 用이라면 ‘隱’은 體가 되는 이치로 군자의 도, 곧 중용지도를 설명하고 있다.

『주역』계사상전 제6장에

“夫易이 廣矣大矣라 以言乎遠則不禦하고 以言乎邇則靜而正하고 以言乎天地之間則備矣라

(무릇 역이 넓고 큼이라. 먼 곳을 말하면 막지 못하고, 가까운 곳을 말하면 고요해서 바르고,

천지의 사이를 말하면 갖춤이라)”하여 費而隱의 이치를 담아 두었다.

『중용』이란 글은 주역의 이치를 끌어당겨 중용의 도를 설명하고 있기에

예로부터 그 철학적 의미가 깊고 대단히 어려운 글이라고 알려져 왔다.

배우지 아니한 어리석은 부부라도 잠자리를 통해 쾌감을 알고

생명의 잉태함을 알며, 어질지 못하더라도 능히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 지극한 바를 알지 못하고 능치 못하는 경우가 있다.

춘하추동에 따라 생장수장하는 천지의 큰 이치가 있지만

어느 곳은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고 해일이 일어나며

어떤 사람에게는 병이 들어 고통을 안겨주어 사람들이 오히려 유감스러워 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큰 것을 말한다면 큰 것이 너무 커서 어디에도 실을 수 없고

작은 것을 말한다면 너무 작아 깨뜨려 없앨 수가 없다.

‘莫能載焉’은 밖으로 큰 ‘費’를 말하고, ‘莫能破焉’은 안으로 작은 ‘隱’을 말한다.

 

『詩經』의 大雅 旱麓(한록)편을 인용하여 군자지도의 費隱을 설명하고 있다.

생물이라는 것이 위에 나타나는 것도 있는가 하면 아래에 나타나는 것도 있는 것을,

하늘의 솔개와 물속의 고기에 비유해 상하의 나타남을 예로 들었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費, 곧 用이 한없이 드러날 때는 위로 끝이 없듯이

하늘 위를 높이 훨훨 나는 솔개에 비유했고,

아래로 드러날 때는 저 물 속에서 펄펄 뛰어노는 물고기에 비유했다.

 

군자의 중용지도는 큰 것만 짓는 것이 아니라,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다 중용지도로 이루어야 한다.

그 예로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의 연을 이루는 잠자리에서부터

중용지도의 단서가 시작되어 그 지극함에는 천지상하 모두에 나타나는 것이다.

 

費는 用之廣也오 隱은 體之微也라.

비는 용지광야오 은은 체지미야라.

 

費는 用의 넓음이요 隱은 體의 미미함이라.

 

費는 조금 쓰이다 마는 것이 아니라 온 천하에 널리 쓰이는 것이고

隱은 숨어 있는 본체로 지극히 미미한 것이다.

큰 것으로 말하면 한없이 크고, 작은 것으로 말하면 한없이 작아

태극이나 무극, 유극의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


君子之道는 近自夫婦居室之間으로 遠而至於聖人天地之所 不能盡하야

군자지도는 근자부부거실지간으로 원이지어성인천지지소 불능진하야

 

其大無外하고 其小無內하니 可謂費矣라 

기대무외하고 기소무내하니 가위비의라 

 

然이나 其理之所以然則隱而莫之見也라 蓋可知可能者는 道中之一事오

연이나 기리지소이연즉은이막지견야라 개가지가능자는 도중지일사오

 

及其至而聖人도 不知不能則擧全體而言이니 聖人도 固有所不能盡也이니라

급기지이성인도 부지불능즉거전체이언이니 성인도 고유소불능진야이니라

 

侯氏曰聖人所不知는 如孔子問禮問官之類요 所不能은 如孔子 不得位와 堯舜이 病博施之類라

후씨왈성인소부지는 여공자문예문관지류요 소불언은 여공자 부득위와 요순이 병박시지류라

 

愚謂人所憾於天地는 如覆載生成之偏과 及寒暑재祥之不得 其正者라.

우위인소감어천지는 여복재생성지편과 급한서재상지부득 기정자라.

 

군자의 도는 가까이는 한 집에 거처하는 부부 사이로부터

멀리는 성인천지의 능히 다하지 못하는 바에까지 이르러

그 큰 것은 바깥이 없고, 그 작은 것은 안이 없으니 가히 ‘費’라 이르느니라.

그러나 그 이치의 연유한 바(所以然)는 숨어서 보이지 않음이라.

대개 가히 알고 가히 능하다는 것은 도 가운데 한 가지 일이요

그 지극한데 미쳐서는 성인도 알지 못하고 능치 못한 것은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이니

성인도 진실로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음이니라.

후씨 가로되 성인이 아지 못하는 바는 공자가 예를 묻고 벼슬을 물은 것과 같은 종류이고

능치 못한 바는 공자가 황제의 위를 얻지 못하고 요임금 순임금과 같은 분도 널리 베푸는데 병이 든 것과 같음이라.

(주자의) 어리석은 내가 보기에 사람이 천지의 한이 있다고 한 바는

(하늘이) 덮고 (땅이) 싣고 (하늘이) 내고 (땅이) 이루어내는 데의 편벽됨과 추위와 더위,

재앙과 상서로움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함과 같음을 말함이라.

재 : 재앙 재,  災와 동일


[해설]

군자의 도는 가까이는 한 집안에 거처하는 부부의 일로부터

멀리로는 성인과 천지도 능히 다하는 못하는 데까지 이르니

크다고 할 것 같으면 한없이 커서 어디가 밖인지 외적인 구별을 못하고,

작다고 할 것 같으면 한없이 작아 그 내적인 한계를 모르니 바로 이것이 ‘費’가 된다.

작다 크다 할 것 없이 부부의 거실지간도 쓰는 것이고 성인천지의 조화도 소비하는 것인데

작다고 하면 한없이 작고, 크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큰 이치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치의 연유한 바(所以然)는 숨어서 드러나지 않아

성인도 잘 모를 수 있고 능치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 법성게(法性偈)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가운데 모든 것이 있으니 많은 것은 하나 가운데에 있고

一卽一切多卽一 .하나는 곧 모든 것이니 많은 것은 곧 하나이고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가운데 우주가 포함되어 있으니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티끌 가운데에도 역시 이와 같고 塵;티끌 진

無量遠劫卽一念. 끝없이 먼 겁도 곧 일념이고 劫 ; 위협할 겁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이 곧 바로 무량겁이라.


대개 가히 알고 능하다는 것은 도 가운데의 한 가지 일이고

도라는 것은 이치이며 진리이니 진리 속에 들어 있는 한 가지 일인데

그 지극한 데 미쳐서는 성인도 알지 못하고 능치 못하다고 한 것은 도의 전체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전체적인 것으로 보면 성인도 사람이요,

사람 가운데 훌륭한 사람일 뿐이니 성인도 진실로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


후씨(侯氏 : 侯仲良)는 성인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공자가 예를 물은 것과

관제(官制)를 물은 것을 예로 들고, 성인도 능치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공자가 지위를 얻지 못한 것과 요순이 널리 베풀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로 병을 예로 들었다.


‘孔子問禮’라 함은 사마천의 『史記』공자세가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공자가 이름을 얻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제자인 남궁경숙과 함께 노자를 찾아가 예를 물은 것이고,

‘問官’은 관제에 대해 공자가 담자(?子)에게 들은 내용으로 『春秋左氏傳』‘昭公 17년조 가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천자문의 “龍師火帝 鳥官人皇”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으로

담자는 노나라 소공의 벼슬 이름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黃帝氏는 구름을 바탕으로 삼은(수호신으로 삼은) 고로 雲師가 되어 구름으로 이름하였고,

炎帝氏는 火師가 되어 불 이름으로 하였으며, 共工氏는 물을 바탕으로 하여 水師가 되어 물 이름으로 하였고,

태호씨(大?氏, 복희씨)는 용을 바탕으로 삼아 龍師가 되어 용이름으로 하였으며,

 (담자의 조상인) 소호지(少?摯)가 왕이 되었을 때 봉새(鳳鳥)가 나타나 새를 기원으로 하여 鳥師가 되어

새 이름으로 하였으며, 鳳鳥氏는 歷을 바로 잡았으며(曆을 관장했으며),

玄鳥氏는 춘분과 추분의 시기를 구분하는 일을 맡았고(司分),

伯趙氏는 하지와 동지를 구별하는 일을 맡았고(司至),

靑鳥氏는 양기가 만물의 힘을 열어주는 일을 맡았으며(司啓),

丹鳥氏는 음기가 만물의 힘을 정지케 하는 것을 관장했고(司閉),

축구씨(祝鳩氏)는 司徒가 되었으며, 저구씨(?鳩氏 : 물수리)는 司馬가 되었으며,

시구씨(?鳩氏 : 뻐꾸기)는 司空이 되었으며, 상구씨(爽鳩氏)는 司寇가 되었으며,

골구씨(?鳩씨 : 송골매)는 農工을 맡았으며(司事), 다섯 구(五鳩)의 官은 백성들을 모아 영도했으며,

다섯 치(五雉)의 官은 다섯 분양의 工人들을 맡은 관장이 되어 도구를 편리하게 하고(利器用),

도량의 법을 바르게 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오(正度量하여 夷民者也라).

아홉 호(九扈)의 관은 아홉 가지 농정을 맡아 백성들을 안착시켜 게으르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전욱씨(?頊氏) 이래로 우리 인간 사회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수호자로 삼지 못하고

가까운 것을 바탕으로 삼아(不能紀遠 乃其於近) 백성임금은 백성만을 거느리는 존재가 되어

백성의 일을 가지고 관명으로 삼으니 이는 인간 밖의 것을 부릴 수가 없어서 그랬음이오

(爲民師而命以民事하니 則不能故也라)”라 했다.


'所不能 如孔子 不得位’와 관련해서는

『明心寶鑑』存心편에

“擊壤詩에 云富貴를 如將智力求인대 仲尼도 年少合封侯라 世人은 不解靑天意하고 空使身心半夜愁니라

(격양시에 이르기를 부귀를 지혜의 힘으로 구할 수 있을진대 공자 같은 이는 젊은 시절에 제후에 합하여 봉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푸른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공연히 몸과 마음을 한밤중에 근심하게 한다)”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지혜로운 공자라도 능치 못함이 있는데 그것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또한 백성을 하나하나 잘 살폈다는 요순임금이라 하더라도 둥근 해가 떠올라 온 세상을 고루 비추지만

그늘진 곳이 있듯이 어느 한 구석에는 불구자가 있고 굶는 사람도 있고,

고통받는 사람도 있고, 아파 누워 있는 사람도 있어 요순 임금에게는 항상 근심걱정이 되는 바였다.

이것이 병이 되었으니 ‘病博施’라 한 표현이 이를 이름이다.

 
詩는 大雅旱麓之篇이라 鳶은 치類라 戾는 至也라 察은 著也라

시는 대아한록지편이라 연은 치류라 려는 지야라 찰은 저야라

 

子思 引此詩하야 以明化育流行하야 上下昭著가 莫非此理之用이니 所謂費也라

자사 인차시하야 이명화육류행하야 상하소저가 막비차리지용이니 소위비야라

 

然이나 其所以然者 則非見聞所及이니 所謂隱也라

연이나 기소이연자 즉비견문소급이니 소위은야라

 

故로 程子 曰此一節은 子思 喫緊爲人處요 活潑潑地라 하시니 讀者 其致思焉이니라.

고로 정자 왈차일절은 자사 끽긴위인처요 활발발지라 하시니 독자 기치사언이니라.

 

詩는 대아 한록편이니라. 鳶은 솔개의 종류이라. 戾는 이름이라. 察은 나타남이라.

자사가 이 시를 이끌어서 화육이 유행해서 상하에 밝게 나타남이 이 이치의 용이 아님이 없으니 이른바 소비함이라. 

그러나 그 까닭은 견문의 미치는 바가 아니니 이른바 은이라.

그러므로 정자가 ‘이 일절은 자사가 요긴하게 사람을 위한 것이고 활발한(생동감 넘치는) 곳’이라 하였으니

읽는 자가 그 생각을 이루어야(다하여야) 하느니라.

旱: 가물 한 .麓: 산기슭 록 .?: 솔개 치 .喫: 먹을 끽 .緊: 긴장할 긴, 요긴할 긴 .潑: 솟아날 발

 

[해설]

화육이라 함은 모든 생물이 천지조화에 의해서 꿈틀거리고 화해서 나와서 길러지는 것을 말하고

유행이라 함은 품물유형(品物流形)을 말한다.

건괘 단전에 보면 “彖曰 大哉라 乾元이여 萬物이 資始하나니 乃通天이로다 雲行雨施하야 品物이 流形하나니라”하였다.

그 뜻은 ‘단전에 이르기를 건(하늘)의 원이여(큼이여)! 만물이 이를 바탕하여(힘입어) 비롯하나니,

이에 하늘을 거느리로다.

구름이 행하고 비가 베풀어서 품물이 형체를 흘리나니라(제각기 흘러 모양을 갖추느니라)’이다.

하늘보다 큰 것이 없기에 문왕이 지으신 건괘에 공자가 ‘크도다’하고 보충설명을 붙인 것이다.

그 큰 하늘의 씨앗이 元이 되어 만물이 시작하여 나오는데 그것은 雲雨之情,

곧 천지 음양 작용으로 땅의 음기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하늘의 양기가 이를 받아들여 서로 엉김으로써 비를 내리는 것이고,

그 속에서 모든 물건(物)들이 하나하나씩 나름대로 형상을 갖추게 되는 것이 品物流形이다.

雲은 일어나는 것이고 雨는 사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녀가 교합하는 것을 雲雨之樂이라 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을 雲雨之情이라고 표현한다.


萬物은 모든 물건을 다 합쳐서 말한 것이고

品物은 천지인 삼재로 구분하여 물건을 각기 나눈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제각기 품성과 모습대로 흘러가게 된다는 流形을 설명하였으므로

만물로 표현하지 않고 품물이라고 한 것이다.

자식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다 해도 어머니와 같을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의 모습 다르고 낳아준 어머니 모습이 다르다.

옛말에 ‘꼴값한다’는 말이 있듯이 모두가 자기 생긴 모습대로 살다가 죽는다.

제 모습이란 갓난애기 때부터 세월 따라 변한다.

歲月流水란 말처럼 세월 따라 흐르는 것이다.


‘以明化育流行’이란 바로 건괘 단전의 글귀를 끌어다 해설한 내용으로

천지의 음양조화로 만물을 화육하고 유행해서 천지 상하에 밝게 드러나는 것이

이치의 用이 아님이 없고 이것이 바로 費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천지 상하에 用이 나타나는 연유는 인간이 보고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이 바로 隱인 것이다. 그래서 정자는 이 부분이 중용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요긴한 곳이며,

생동감이 흘러 넘치는 곳이라 하였다. ‘喫緊’이란 요긴함을 먹는다는 뜻이니 아주 중요함을 음미한다는 뜻이다.


황제음부경에도 “其盜機也를 天下 莫能見 莫能之하나니 君子는 得之固窮이라

(그 도적의 기틀을 천하가 능히 보지도 못하고 능히 알지도 못하니

군자는 이를 얻어 몸을 견고히 하니라)하였듯이 아주 깊이 생각하고 음미하여,

‘費而隱’의 참뜻을 여기서 알아내라는 말이다.


『周易』序卦 下傳에 "有天地然後에 有萬物하고 有萬物然後애 有男女하고

有男女然後애 有夫婦하고 有夫婦然後애 有父子하고 有父子然後애 有君臣하고

有君臣然後애 有上下하고 有上下然後애 禮義有所錯니라

(천지가 있은 연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연후에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은 연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연후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연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연후에 상하가 있고

상하가 있은 연후에 예의를 두는 바가 있느니라.)” 하였다.

주역 상경이 天道이고 하경은 人事인데 인사적인 하경의 첫머리에

음양의 사귐인 咸괘가 나오는 이유에 대해 공자가 설명하신 내용이다.


하늘과 땅이 있은 후에 만물이 나오는 것이고,

만물이 있은 연후에 사람이 있게 되는데 사람에게는 한 陽과 한 陰이 있게 된다.

太極에서 一生二法에 의해 음양이 나오는데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가 되는 이치이다.

남녀가 있으니 서로 혼인해서 부부가 되고 자식이 생기니 부자 관계가 이루어진다.

가정의 가족관계가 확대되다 보면 한 나라의 인군과 신하의 관계가 생겨나고 그러다보면 상하의 구별이 있게 된다.

상하가 있게 되니 사람 사회에서 불가불 예의가 생겨나는 이치이다.

이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사람 사회의 모든 이치의 출발은 부부 관계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주역이라 일컬어지는 중용을 쓴 자사가 ‘費而隱’을 설명함에 있어

그 단서의 예시를 부부관계에서 끌어온 이치를 알아볼 수 있다.

 


結上文이라

윗글을 맺음이라.

 


右는 第十二章이니라

 

子思之言이니 蓋以申明首章道不可離之意也라 其下八章은 雜引孔子之言하야 以明之니라.

자사지언이니 개이신명수장도불가리지의야라 기하팔장은 잡인공자지언하야 이명지니라.

 

자사의 말씀이니, 대개 써 머리장에 ‘도는 가히 떠날 수 없다’는 뜻을 거듭 밝힘이라.

그 아래 여덟 장은 공자의 말씀을 섞어 이끌어서 밝힘이라.

중용 제11장 색은행괴장(素隱行怪章) 

주역의 귀신관 소략

 


 1

子曰 素隱行怪를 後世에 有述焉하나니 吾弗爲之矣로라.

자왈 색은행괴를 후세에 유술언하나니 오불위지의로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은벽(은밀)한 것을 찾아내고 괴이한 짓을 행하는 것을

후세에 칭술하는 이가 있나니 나는 그렇게 하지 않노라

素 : 본디 소, 여기서는 索(찾을 색)으로 보아야 함.

 

 2

君子 遵道而行하다가 半途而廢하나니 吾弗能已矣로라.

군자 준도이행하다가 반도이폐하나니 오불능이의로라.

 

군자가 도를 따라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두나니 나는 능히 그만두지 못하노라.

遵 : 좇을 준

 

 3

君子는 依乎中庸하야 遯世不見知而不悔하나니 唯聖者아 能之니라.

군자는 의홍중용하아 돈세불견지이불회하나니 유성자아 능지니라.

 

 

군자는 중용에 의지해서 세상을 은둔해서 (남들이) 알아주는 것을 보지 못하더라도

후회하지 아니 하나니 오직 성인이라야 능하느니라.

遯 : 피할 돈(둔), 은둔할 돈(둔)(주역 괘명일 때는 ‘돈’, 세상을 피한다는 뜻의 遯世는 '돈세'로 읽는다.)

 


[본문 해설]

이 세상에는 옹벽한 곳에서 귀신이나 도깨비 등 잡된 것을 찾아내

여기에서 기이한 것이 생긴다며 괴이한 짓으로 사술이나 조화를 부리고 세상을 현혹되게 하고,

더 나아가서 후세 사람들은 이를 칭술(稱述)하며 책으로 엮어내고 가르쳐 전파하기까지 한다.

공자께서 이는 결코 중용지도가 아니기에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군자가 도를 따라가다가 그만두면 아니함만 못하다.

보통 사람들이 중도에 그만두는 이유는 제대로 도를 실천하지 않고 건성으로 닦아나가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나는 그만두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도를 늘 진실로 일상화하여

그만두려 해도 그만 두지 못함을 얘기한 것이다.

‘遯’은『주역』33번째 괘명이기도 하다.

천산돈(天山遯 : )괘를 보면 소인은 욕심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해 그쳐 있는 것이고,

군자는 욕심을 버리고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소인이 안에서 실권을 주고 더욱 득세해나가고 군자의 바른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세상을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군자가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소인을 피해 물러나는 것이다.

아무 때나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기대를 걸고 버텨보면서 때를 보아 진정으로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는 것이다

(遯而亨也ㅣ나 剛當位而應이라 與時行也ㅣ니라 小利貞은 浸而長也일새니 遯之時義ㅣ 大矣哉ㅣ라 :

물러나서 형통하나, 강한 것이 位에 마땅해서 응함이라. 때로 더불어 행함이라.

小利貞은 점차 길어지기 때문이니, 돈의 때와 뜻이 크도다).

때가 되어 기꺼이 물러났기에 후회가 있을 수가 없다.

또한 세상을 물러나 은둔해 있어도 ‘벼슬자리를 버리고 괜히 떠나왔나’,

‘왜 다시 나에게 벼슬 자리를 권하지 않나’하고 원망하거나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은

군자는 중용의 도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遯世하였기에 민망함이 없다(遯世无悶)는 말은 두 번 나온다.

『주역』건괘 문언전 제2절 초구 효사에

“子曰 龍德而隱者也니 不易乎世하며 不成乎名하야 遯世无悶하며

不見是而无悶하야 樂則行之하고 憂則違之하야 確乎其不可拔이 潛龍也라

(공자 이르길 용의 덕이되 숨어 있는 것이니 세상을 바꾸지 아니하며

이름을 이루지 아니하여서 세상을 피하여도 민망함이 없으며,

옳다함을 보지 못해도 민망함이 없어서 즐거우면 행하고

근심하면 어겨서 확고하여 가히 뽑을 수 없는 것이 잠룡이라)” 하였다.

용덕이 숨어 있다는 것은 군자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때가 아니기에 굳이 세상을 바꾸지도 않으며(不易乎世)

이름을 내려고도 하지 않아서(不成乎名) 세상을 떠나 은둔해 있어도 민망할 것이 없고(遯世无悶)

나를 옳다고 인정해주는 이가 없어도 속끓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不見是而无悶).

이렇게 해서 즐거우면 한번 나름대로 행하여 보고 세상이 근심되면 꾹 참고 어겨 등지고(樂則行之 憂則違之),

확고부동하게 잠겨 잡아 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잠룡이라(確乎其不可拔潛龍也) 하였다.

 
『주역』 28번째 괘인 澤風大過( ) 대상전에도

“澤滅木이 大過ㅣ니 君子ㅣ 以하야 獨立不懼하며 遯世无悶하나리라

(못이 나무를 멸하는 것이 대과니, 군자가 이로써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멀리해도 민망하게 여기지 않느니라)”하여 遯世无悶을 얘기하고 있다.

 
『논어』 맨 첫머리 學而篇에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이면 不亦君子乎아

(공자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들이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서운해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황석공(黃石公) 『素書(소서)』에도 ‘潛居抱道(잠거포도)’라 하였다.

참다운 군자라면 도를 안고 은거하고 있으니 无悶하고 樂天知命할 수 있는 것이다.

 
不爲索隱行怪면 則依乎中庸이 而已오 不能半塗而廢하니 是以로 遯世不見知而不悔也라

불위색은행괴면 즉의호중용이 이이오 불능반도이폐하니 시이로 둔세불견지이불회야라

  

此는 中庸之成德이오 知之盡이며 仁之至니 不賴勇而裕如者라

차는 중용지성덕이오 지지진이며 인지지니 불뢰용이유여자라

 

正吾夫子之事언마는 而猶不自居也시니라 故로 曰唯聖者라야 能之而已라 하시니라.

정오부자지사언마는 이유부자거야시니라 고로 왈유성자라야 능지이이라 하시니라.

 

색은행괴를 하지 아니하면 즉 중용에 의지한 것뿐이고

능히 중도에서 그만두지 아니하면 이것으로서 세상을 은둔해 앎을 보지 못해도 후회하지 않느니라.

이것은 중용의 이룬 덕이오, 知의 극진함이며, 仁의 지극함이니 용맹에 힘입지 않아도 여유로워짐과 같음이라.

바로 우리 공자의 일이언마는 오히려 스스로 거처하지 않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오직 성인이라야 능할 따름이라 하셨느니라.

 

[해설]

본문의 “君子는 依乎中庸하야 遯世不見知而不悔”란 말은

실은 공자 자신의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옛날의 다른 성인들로 돌리신 것은

그만큼 공자가 중용지덕을 갖춘 성인이기에 겸양하게 표현했다고 주자는 설명하고 있다.


[참고] 주역의 鬼神觀

흔히 사람들은 神의 신령스러움은 알지만 그 神이 神이 된 바는 알지 못한다

(人이 知其神之神하고 不知其神之所以神이라)고 황제음부경은 말하고 있다.

자연의 신묘한 이치를 알아서 깨우쳐야 함에도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어떤 초인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기이한 사술에 현혹되어 중용의 도에서 벗어나기에

공자는 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대개 儒家에서는 신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이다.

주역에서 공자는 신을 두루 언급하고 있다.

특히 계사전이나 설괘전을 보면 神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까지 나온다.

 


계사상전 제9장에 “凡天地之數 五十有五니 此 所以成變化하며 而行鬼神也라

(무릇 천지의 수가 오십오니, 이것으로써 변화하며 귀신을 행하느니라)” 하여

天數와 地數의 합인 55 속에서 음양이 변화를 하고 그것을 귀신이 행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陰이 변하는 것, 즉 음적인 작용은 鬼가 되고, 陽이 변하는 것,

즉 양적인 작용은 神이라고 한다. 鬼는 죽어가는 것(自有而無)을 말하고, 神은 살아나오는 것(自無而有)을 말한다.

앞서 계사상전 제4장에서 “精과 氣가 물건이 되고 혼이 놀아서 변이 되어 이로써 귀신의 정상(情狀)을 안다

(精氣爲物이오 游魂爲變이라 是故로 知鬼神之情狀하나니라)”고 한 뜻도 음양의 변화이기에

“신은 방소가 없고 역은 체가 없다(神无方而易无體)”라 하였다.

따라서 ‘음양은 쉽게 헤아리지 못하기에 이를 神이라(陰陽不測之謂ㅣ 神이라 : 계사상전 제5장)’ 정의하였다.

 
설괘전 제6장(妙神文)을 보면 구체적으로 神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神也者는 妙萬物而爲言者也니 動萬物者 莫疾乎雷하고

신야자는 묘만물이위언자야니 동만물자 막질호뢰하고

 

撓萬物者 莫疾乎風하고 燥萬物者 莫한乎火하고 

요만물자 막질호풍하고 조만물자 막한호화하고

 

說萬物者 莫說乎澤하고 潤萬物者 莫潤乎水하고 終萬物始 萬物者 莫盛乎艮하니

설만물자 막설호택하고 윤만물자 막윤호수하고 종만물시 만물자 막성호간하니

 

故로 水火 相逮하며 雷風이 不相悖하며 山澤이 通氣然後에아 能變化하야 旣成萬物也하니라.

고로 수호 상체하며 뢰풍이 부상패하며 산택이 통기연후에야 능변화하야 기성만물야하니라.

 

(신이라는 것은 만물을 묘하게 함을 말한 것이니 만물을 움직이는 것이 우레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을 흔드는 것이 바람보다 빠른 것이 없고, 만물을 말리는 것이 불보다 말리는 것이 없고,

만물을 기쁘게 하는 것이 못보다 기쁘게 하는 것이 없고, 만물을 적시는 것이 물보다 적시는 것이 없고,

만물을 終하여 始하는 것이 艮보다 성한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물과 불이 서로 따르며,

우레와 바람이 서로 거스르지 아니하며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한 후에야 능히 변화하여 만물을 다 이루느니라)

 


공자는 만물을 묘하게 하는 것이 신이라 하였다.

그래서 ‘신은 묘하다’ 해서 神妙하다고 한다.

위의 건삼련 하늘과 아래 곤삼절 땅, 곧 천지는 곧 하나의 신이 된다.

이 신묘함에서 우레와 바람과 물과 불과 산과 못이 되는 후천 팔괘 방위도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즉 건곤괘를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 괘인 자녀괘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다.

神也者라는 속에 건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유가에서 죽은 조상과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부모는 신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신묘함으로 아들이 나오고 딸이 나오는 것이기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즉 자식은 부모의 신이 아니면 나올 수 없고, 만물은 천지의 신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妙神文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만물을 움직이는 것은 우레보다 더한 것이 없어 봄에 만물이 약동해 나오는 것을 東方震

우레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만물을 마구 흔드는 것은 바람보다 더한 것이 없다.

바람은 장녀인 음괘( )이므로 장남인 양괘( ) 우레보다는 움직임이 부드러워 물체를 흔들어준다.

신을 말함에 있어서 우레신은 움직이는 것만 맡고 있으며 바람신은 흔드는 걸 맡고 있다.

만물을 우레와 바람으로서 동요시키는 것이다.

 


만물을 말리는 것은 불보다 더한 것이 없다.

중녀인 離虛中( ) 불신은 젖은 것을 말려주는 신이다.

만물을 기쁘게 하는 것은 못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소녀인 兌上絶( ) 못신은 기쁨의 신이다.

만물을 불리는 것은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

중남인 坎中連( ) 물신은 적셔서 윤택하게 해주고 생명을 불려주는 신이다.

 


만물을 끝내고 만물을 비롯하는 것은 艮보다 더한 것이 없다.

소남인 艮上連( )은 후중히 그치는 신으로 終則有始의 매듭 역할을 한다.

다른 자녀괘들의 경우는 형이하적 괘상인 雷 風火 澤 水를 들어 표현했지만

만물을 종시하는 이 산괘의 경우는 유달리 형이상적인 괘명인 艮으로써 표현하였다.

이 간괘가 선천을 마치고 후천을 여는 근본 핵심(형이상적인 태극의 역할)이 된다는 것을 공자가 특별히 강조한 듯하다.

여기서 천지는 숨어버렸다.

말하자면 부모가 돌아가서 신으로 화한 것인데 부모는 자식한테 재산도 넘겨주고 혈육의 대까지 넘겨준다.

왕가의 인군으로 말하자면 태자에게 다 넘겨주는 것이다.

저 위에 있던 하늘이 서북방으로 가서 쭈그리고 있고 아래에 있던 땅은 서남방으로 가서 쭈그리고 있다.

이렇게 하여 천지는 서북과 서남에서 신이 되어 움츠리고 있다.

신이 되어 ‘動만물, 撓만물, 燥만물, 說만물, 潤만물, 終만물과 始만물’의 후천적인 用事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용은 선천팔괘의 교역으로 인한 것인데 六坎水( )와 三離火( )의 물과 불이 서로 미치고(水火相逮),

四震雷( )와 五巽風( )의 우레와 바람이 서로 거슬리지 않으며

七艮山( )과 二兌澤( )의 산과 못이 기운을 통하고(山澤通氣)

그런 뒤에야 능히 변화해서 모든 만물을 다 이루게 되고 후천의 이치가 정립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만물을 묘하게 하는 신의 작용이라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천지자연의 지극히 정미롭고도 신묘한 작용에 의해 변화해서

調和를 이루는 이치가 곧 주역에서 말하는 귀신이자 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귀신은 가득찬 것을 해롭게 하고 겸손함에는 복을 준다

(鬼神은 害盈而福謙이라 : 주역 15번째괘인 地山謙괘 대상전)”하여,

교만한 자에게 재앙과 손해를 입히고 겸손한 자에게 복과 길함을 준다는 것이 우리나라 전통의 기본적인 귀신관이다.

(귀신에 관해서는 중용 제16장에서 자세히 언급된다.)

 


素는 按漢書에 當作索이니 蓋字之誤也라

소는 안한서에 당작색이니 개자지오야라

 

索隱行怪는 言深求隱僻之理而過爲詭異之行也라

 색은행괴는 언심구은벽지리이과위궤이지행야라 

 

然이나 以其足以欺世 而盜名이라 故로 後世에 或有稱述之者하니

 연이나 이기족이기세 이도명이라 고로 후세에 혹유칭술지자하니 

 

此는 知之過而 不擇乎善이오 行之過而不用其中이니 不當强而强者也라

차는 지지과이 불택호선이오 행지과이불용기중이니 부당강이강자야라

 

聖人이 豈爲之哉시리오.

성인이 기위지재시리오.

 

素는 『한서』를 상고하건대 마땅히 ‘찾을 색’으로 지었으니 대개 글자가 잘못되었느니라

(잘못 옮겨진 데서 비롯된 것이니라).

‘은벽한 것을 찾고 괴이한 짓을 행하는 것’은

은벽한(비과학적인) 이치를 깊이 구해서 지나치게 괴이한 행동함을 말함이라.

그러나 그 족히 써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적질하는 것이니라(혹세무민함이라).

그러므로 후세에 혹 칭술하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앎이 지나치고 선을 가리지 못함이오,

행동이 지나쳐 그 중을 쓰지 못함이니 마땅히 강해서는 아니 될 때에 강함이라.

성인이 어찌 이러한 짓을 하시리오

按: 상고할 안   僻: 후미질 벽   詭: 속일 궤

 


遵道而行은 則能擇乎善矣오 半塗而廢는 則力之不足也니

준도이행은 즉능택호선의오 반도이폐는 즉력지부족야니

 

此는 其知 雖足以及之나 而行有不逮니 當强而不强者也라

차는 기지 수족이급지나 이행유불체니 당강이불강자야라

 

已는 止也라 聖人이 於此에 非勉焉而不敢廢요 蓋至誠無息하야 自有所不能止也시니라.

이는 지야라 성이이 어차에 비면언이불감폐요 개지성무식하야 자유소불능지야시니라.

 

 

도를 따라서 가게 되면 곧 능히 선을 택하고

반쯤 가다 그만두면 즉 힘이 부족함이니

이는 그 아는 것이 비록 거기(도를 따르는 것)에 미치기는 하나 행실이 미치지 못함이 있으니

마땅히 강해야 할 때 강하지 못함이니라.

已는 그침이라.

성인이 이에 힘을 써서 감히 폐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대개 지극한 정성이 쉬지 아니하여 스스로 능히 그만두지 못하는 바가 있음이라.

 


[해설]

군자가 도를 따라 행한다는 것은

善을 가릴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은 되지만 이를 이끌어나갈 실천 능력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강하지 말아야 할 때 강함(不當强而强)과는 상반되게

정작 강해야 할 때 강하지 못함(當强而不强)을 지적한 것이다.

반면 성인이 도를 행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까봐 억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타고난 성실함, 지극한 정성 그대로 나가다보니

이것이 몸에 배어 그만둔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右는 第十一章이라

 


子思所引夫子之言으로 以明首章之義者 止此하니

자사소인부자지언으로 이명수장지의자 지차하니

 

蓋此篇大旨는 以知仁勇三達德으로 爲入道之門이라

개차편대지는 이지인용삼달덕으로 위입도지문이라

 

卽以大舜顔淵子路之事로 明之하시니 舜은 知也오 顔淵은 仁也오

즉이대순안연자로지사로 명지하시니 순은 지야오 안연은 인야오

 

子路는 勇也라 三者에 廢其一이면 則無以造 道而成德矣라 餘見第二十章하니라.

자로는 용야라 삼자에 폐기일이면 즉무이조 도이성덕의라 여견제이십장하니라.

 

자사가 부자의 말씀을 끌어 써 머리장의 뜻을 밝힌 것이 이에 그치니

대개 이편의 큰 뜻은 앎(知) ? 어짊(仁) ? 용맹(勇) 세 가지 통한 덕(達德)으로 도에 들어가는 문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 편 머리에 곧 순임금과 안연과 자로의 일로써 밝히시니

순임금은 지적이고 안연은 어짊이고 자로는 용맹이노라.

세 가지 중에 그 하나라도 버리면 도에 나아가서 덕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나머지는 제20장에 나타나느니라.

 

중용 제10장 자로문강장(子路問强章)


 1

子路 問强
자로 문강

 

자로가 강을 묻자오니


[해설]

자로(BC543~BC481)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이다.
子路는 자(字)이며, 계로(季路)라고도 한다.
노(魯)나라 변(卞, 지금의 산동성) 출신으로, 공자의 훌륭한 10명의 제자인 공문십철(孔門十哲) 가운데 하나이다.
무용(武勇)에 뛰어났으며 인품이 호방하고 성실하였다.
무술로써 항상 공자를 수행하였는데 공자는 가끔 그의 만용과 과단한 성격에 대해 꾸지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의 솔직한 성격으로 공자와 가장 마음이 통했던 제자로 꼽혀지기도 한다.
공자와 자로의 이러한 관계는 논어에 자주 언급된다.

공야장(公冶長)편에 보면, 공자가 “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갈까 하는데
나를 따를 자는 유일 것이다(道不行이라 乘?하야 浮于海하리니 從我者는 其由與인저)” 하자 자로가 기뻐했다.
그러자 공자는 다시 “유는 용맹하기를 좋아하는데 나보다 더하니 재량 분별할 줄을 모른다

(由也는 好勇過我하나 無所取材니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공자가 난세에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며 차라리 세상을 피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얘기인데
정작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다닐 때의 위험은 생각지 않고

그저 스승이 자신을 택해 함께 한다는 사실에만 기뻐할 뿐
깊이 사려하지 못하는 자로를 깨우치고자 하신 말씀이다.

또 한 예를 선진(先進)편에서 들어보자.
하루는 공자의 네 명의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약간 나이가 많다고 해서 어려워하지 말라.
그대들은 노상 ‘나를 몰라준다’고 말하지만 만약 그대들을 알아서 써 준다면 어찌 하겠느냐?
(以吾一日長乎爾나 毋吾以也하라 居則曰 不吾知也라 하나니 如或知爾면 則何以哉오)”고 하시자
자로가 불쑥 나서서 대답하기를 “병차 천승을 낼 수 있는 나라가 큰 나라 사이에 끼여 곤란을 당하고
더욱 또한 전란과 기근으로 허덕인다 하더라도 제가 나서서 다스리면 삼년 안으로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또 백성들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겠습니다.”라 하였다. 공자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모두의 얘기를 듣고 세 사람의 제자가 나간 뒤 증자의 아버지인 증석(曾晳)이 남아 웃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나라는 예로써 다스려야 하는데,
그는 말하는 데도 겸양할 줄을 모르니 웃었노라(爲國以禮어늘 其言不讓이라 是故로 ?之호라)” 하였다.


자로는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으나 위나라 괴외의 내란 때 전사했다.
이때 그의 시체가 소금에 절여진 것을 안 공자는 매우 슬퍼했다고 했다.

 

[참고] 공문십철(孔門十哲)에 관하여


춘추시대 때 공자의 문하생 중 뛰어난 제자 열 명을 말한다.
논어 선진편(先進篇)에 “덕행에는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伯牛), 중궁(仲弓),
언어에는 재아(宰我), 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有), 계로(季路), 문학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라 하여 72 제자 중

중심을 이룬 제자 10명을 그 장점에 따라 4분류하고 있다.
이것을 후세에 사과십철(四科十哲)이라 하였다. 덕행이란 모든 행위가 바른 것,
언어란 제후간의 응대 수사(修辭)에 뛰어난 것, 정사란 치국에 재능이 있는 것, 문학이란 고전에 정통한 것이다.
이것을 四科라 한 것은 후한 때의 『논형(論衡)』문공편(問孔篇)과 『後漢書』정현전(鄭玄傳)에서부터이고,
十哲이란 명칭을 부여한 것은 당나라 때 『史通』암혹편(暗惑篇)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子路는 孔子弟子仲由也라 子路는 好勇이라 故로 問强이라.
자로는 공자제자중유야라 자로는 호용이라 고로 문강이라.

 

자로는 공자 제자로 (이름은) 중유이라. 자로는 용맹을 좋아하여 ‘강’에 대해 여쭘이라.


 2

子曰 南方之强與아 北方之强與아 抑而强與아
자왈 남방지강여아 북방지강여아 억이강여아

 

공자 가라사대 “남방의 강인가? 북방의 강인가? 아니, 너의 강인가”

抑은 語辭오 而는 汝也니라
억은 어사오 이는 여야니라

억은 어조사요, 이는 너라

 

3
寬柔以敎오 不報無道는 南方之强也니 君子 居之니라.
관유이교오 불보무도는 남방지강야니 군자 거지니라.

 

너그러우며 부드러움으로 써 가르치고 무도한 이를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이니 군자가 거하느니라.

 

[해설]

주역 설괘전 제5장에 “離也者는 明也니 萬物이 皆相見할새니 南方之卦也니
聖人이 南面而聽天下하야 嚮明而治하니 蓋取諸此也라
(‘離’라는 것은 밝음이니, 만물이 다 서로 봄이니,
남방의 괘이니 성인이 남쪽을 향해 천하를 들어서(천하의 의견을 들어서) 밝은 데를 향하여 다스리니,
다 여기(離卦 : )에서 취함이라)”이라 하였다.


離虛中( ) 불괘는 불이고 해가 되니까 밝다.
사람에게는 눈이기도 하다. 만물은 모두 이괘에서 보기 때문에 남방에 속한 괘가 이괘이다.
모두 만나고 모이고 부딪치는 때이며 가장 밝은 때이므로 모두 다 보인다.
성인이 밝은 남쪽을 향해 앉아서 천하의 소리를 듣고 밝게 정치를 한 것이 대개 이 이괘에서 취한 것이다.
성인이 남쪽을 향해서 천하를 듣는다는 것은 귀를 크게 열어서 백성의 소리를 잘 듣는 것이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고도 한다. 정치는 눈으로만 보고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이 부당한 경우를 당했다든지 요구사항이나 불만스러운 게 있으면 다 들어서 충족시켜 주고,
잘못된 것은 잘 생각해서 올바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공자가 용맹을 좋아한 자로의 물음에 먼저 남방지강에 대해 말한 것은,
자로와 같은 용맹한 군자가 취해야 할 ‘寬柔以敎’와 ‘不報無道’의 자세가 중요함을 역설코자 한 뜻도 있을 것이고
북방의 過한 강에 대해 不及한 강을 비유코자 한 뜻도 있을 것이다.


寬柔以敎는 謂含容巽順하야 以誨人之不及也이오 
관유이교는 위함용손순하야 이회인지불급야이오

 

不報無道는 謂橫逆之來에 直受之而不報也니라 南方은 風氣柔弱이라
불보무도는 위횡역지래에 직수지이불보야니라 남방은 풍기유약이라

 

故로 以含忍之力으로 勝人爲强이니 君子之道也니라.
고로 이함인지역으로 승인위강이니 군자지도야니라.

 

‘관유이교’는 이르되 관용을 베풀고 손순해서 남의 불급함을 가르침이오,
‘불보무도’는 비끼고 거스려 오는 것에 그대로 받아주고 보복하지 않는 것이니라.
남방은 바람 기운이 부드럽고 약함이라.
그러므로 함인(포용하고 인내)의 힘으로써 남을 이겨 강으로 삼으니 군자의 도이라.

誨: 가르칠 회 橫:비낄 횡


 4

임金革하야 死而不厭은 北方之强也니 而强者 居之니라.
임금혁하야 사이불염은 북방지강야니 이강자 거지니라.

 

병기와 갑옷을 깔고서 죽어도 싫지 아니함은 북방의 강이니 강한 자가 이에 거하느니라.

임 : 깔 임

 

[해설]

여기서 북방은 주역으로 볼 때 서북건방(西北乾方)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주역 설괘전 제5장에 “戰乎乾”이라 하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사이에 음기운이 극성해져 戰乎乾으로 싸움이 붙는다.
乾은 방위상으로 戌亥方으로 서북쪽이다.

서북쪽은 험준한 데다 일기도 좋지 않아서 늘 음양의 기운이 싸우는(陰陽相薄) 곳이다.
하루 온종일 강했던 양이 저녁이 되면서 음이 극성해지니까 서로 싸움이 붙는다는 뜻이다.
 결국은 음이 이기고 어두워지는데 늦저녁의 양은 늙어서(乾三連 老陽: ) 쇠한 때이고 음은 한창 파릇파릇한 때인데,
한낮의 양에 한밤의 음이 오느라 음양이 싸우는 것이다. 그렇게 싸우다 죽을지언정 싸우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그것은 (서)북방의 강함이고 강한 자가 이에 거하는 것이다. 남방의 강에 비해 過한 강의 예를 든 것이다.


임은 席也오 金은 戈兵之屬이오 革은 甲?之屬이라 
임은 석야오 금은 과병지속이오 혁은 갑주지속이라 

 

北方은 風氣剛勁이라 故로 以果敢之力으로 勝人爲强이니 强者之事也라.
북방은 풍기강경이라 고로 이과감지력으로 승인위강이니 강자지사야라.

 

임은 자리요 금은 창과 병기에 속한 것이오. 혁은 갑옷과 투구에 속한 것이라.
북방은 풍기가 강하고 굳셈이라 그러므로 과감의 힘으로 남을 이겨 강으로 삼으니 강자의 일이라.


 5

故로 君子는 和而不流하나니 强哉矯여 中立而不倚하나니
고로 군자는 화이불류하나니 강재교여 중립이불의하나니

 

强哉矯여 國有道에 不變塞焉하나니 强哉矯여 國無道에 至死不變하나니 强哉矯여 
강재교여 국유도에 불변색언하나니 강재교여 국무도에 지사불변하나니 강재교여 

 

그러므로 군자는 화하되 흐르지 아니하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중립하여 치우치지 아니 하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나라의 도가 있음에 막혔을 때 (의지를) 변하지 아니하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음에 죽음에 이르러도 변하지 아니하니, 강하다! 꿋꿋함이여!

矯: 굳셀 교   塞: 막힐 색


[본문 해설]

남방은 풍기가 유약하여 중으로 말하면 불급한 점이 있고, 북방은 풍기가 강하여 지나친 점이 있다.
그런데 군자라는 것은 모든 사람과 잘 화합하되 어느 한쪽으로 흐르지 않아야 한다(和而不流).
주역 38번째 괘인 화택규(火澤?)괘 대상전에 “象曰 上火下澤이 ?ㅣ니 君子ㅣ 以하야 同而異하나니라
(상전에 이르길 위에는 불 아래에는 못이 규니, 군자가 이로써 같되 다르게 하나니라)” 하였다.
위에는 火動而上의 불(上火)이고, 아래에는 澤動而下의 못(下澤)으로 어긋났다는 것이다.
군자가 이 규괘를 보고 본받아 먼저 어긋난 걸 같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긋난 것을 그냥 보고만 있으면 안 되고, 같이 하나 되도록 하고(同) 그러면서도 달리한다(而異)는 것이 和而不流이다.
사람을 和하게 대해서 이 사람도 좋고 저 사람도 좋고 이 사람 의견도 받아들이고 저 사람 의견도 받아들이되(和而),
나쁜 일을 하자고 하거나 도둑질하자고 하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즉 화하되 의리가 아니고 예가 아닌 곳에는 절대로 흐르지 말아야 하니 참으로 강한 것이다.

늘 중도에 서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니, 이 또한 참으로 강하고 꿋꿋한 것이다.
또한 나라에 도가 있어 평화로운 세상이라 하더라도 방심하지 않고 예전에 도가 없어
곤궁했을 적에도 흔들리지 않던 내 의지를 그대로 지키고 있으니, 이 또한 강하고 꿋꿋한 것이다.
나라에 도가 없어 무도하고 포악하며, 혼란한 세상이 되었다 해도 또한 평소에 지키던 지조를 변하지 않으니,
이것 역시 참으로 강하고 꿋꿋한 것이다.

 


此四者는 汝之所當强也라 矯는 强貌니 詩에 曰矯矯虎臣이 是也라

 차사자는 여지소당강야라 교는 강모니 시에 왈교교호신이 시야라 

 

倚는 偏著也오 塞은 未達也라 國有道에 不變未達 之所守하고 國無道에 不變平生之所守也라

의는 편저야오 색은 미달야라 국유도에 불면미달 지소수하고 국무도에 불변평생지소수야라

  

此는 則所謂中庸之不可能者니 非有以自勝其人欲之私면 不能擇而守也라
차는 즉소위중용지불가능자니 비유이자승기인욕지사면 불능택이수야라

 

君子之强이 孰大於是리오 夫子 以是로 告子路者는 所以抑 其氣血之强하고 而進之以德義之勇也라.
군자지강이 숙대어시리오 부자 이시로 고자로자는 소이억 기기온지강하고 이진지이덕의지용야라.

 

 

이 네 가지는 너의 마땅히 강해야 할 바이니라.
교는 굳센 모양이니 시경에 이르기를 ‘교교호신(굳세고 굳센 범 같은 신하)’이 이것이라.
의는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붙는 것이고, 색은 통하지 못함이라.
나라에 도가 있음에 통하지 못했을 때 지켰던 바를 변하지 아니하고,
나라에 도가 없음에 평소에 지킨 바(지조)를 변하지 아니함이라.
이것은 이른바 중용의 가히 능치 못하는 것이니 써 스스로 그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기는 이가 아니면
능히 가려내서 지키지 못하느니라. 군자의 강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리오.
공자께서 이 네 가지로써 자로에게 고한 것은 기혈의 강함을 누르고 덕의의 용맹으로써 나아가게 하심이라.


[해설]

군자가 마땅히 강해야 할 바인 네 가지는

和而不流, 中立而不倚, 國有道 不變塞焉, 國無道 至死不變을 말함이다.
‘矯’는 굳센 모양으로 詩經(시경)의 노송(魯頌) 반수편(泮水篇)에 나오는 말이다.

 


明明魯侯여 克明其德이샷다 (명명노후여 극명기덕이샷다)

旣作泮宮하니 淮夷攸服이로다 (기작반궁하니 회이유복이로다)

矯矯虎臣이 在泮獻馘하며 (교교호신이 재반헌괵하며) 馘: 벨 괵

淑問如皐陶이 在泮獻囚로다 (숙문여고도이 재반헌인로다)

 

밝고 밝으신 노나라 제후여 능히 그 덕을 밝히셨도다.

이미 반궁(주나라 제후들의 學宮)을 지으니 회이가 복종하는 바로다

굳세고 굳센 범 같은 신하들이 반궁에서 (죄수의) 머리를 바치며

고요와 같이 신문을 잘하는 자가 반궁에서 죄수를 바치리로다.


공자에게는 삼천 제자가 있었는데 각기 제자들의 성질이나 행동 등을 파악해 각각에 해당하는 것을 가르쳤다.
공자가 성격이 급하고 과단한 자로에게 이 네 가지로 가르치는데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겨야만

능히 중용을 가려서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기혈의 강함을 억제하고 덕과 의리의 용맹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孟子』 양혜왕장구하(梁惠王章句下편)에 제나라 선왕(宣王)과 맹자의 문답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王曰 大哉라 言矣여 寡人有疾하니 寡人은 好勇하노이다

對曰 王請無好小勇하소서 夫撫劍疾視曰 彼惡敢當我哉리오 하나니
此는 匹夫之勇이라 敵一人者也니 王請大之하소서(왕이 말하길 ”훌륭합니다.

말씀이여! 과인이 병통이 있으니 과인은 용맹을 좋아합니다.
(맹자께서) 가로대 “왕은 청컨대 자근 용맹을 좋아하지 마소서.
칼을 어루만지고 상대방을 노려보며 말하길, ‘네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하겠는가’하나니 이것은 필부의 용맹이라.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니, 왕은 청컨대 용맹을 크게 하소서)”


용맹함에는 작은 용맹(小勇)과 큰 용맹(大勇)이 있는데, 血氣의 용맹은 小勇이고, 義理의 용맹은 大勇이다.
군자가 취하여야 할 용맹은 血氣之勇이 아니라 대용인 義理之勇, 浩然之氣여야 한다.


무릇 뜻(志)은 기운의 장수요(夫志는 氣之帥요), 기운은 뜻의 다음(氣는 志之次也라)이다.
즉 뜻이 기운을 이끌고 나가서 기운을 조정할 수 있어야지,

뜻은 없고 기운만 앞서면 중용을 잃고 온갖 폐단만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氣血의 강을 누르고 덕과 의리의 용맹으로써 공부를 해나가도록 한 것이다.


右는 第十章이라

중용 제9장 백인가도장(白刃可蹈章)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며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니라.
자왈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며 백인가도야 중용불가능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천하국가도 가히 고르게 하며 벼슬과 녹도 가히 사양할 수 있으며
날이 선 칼날도 가히 밟을 수 있으되 중용은 가히 능치 못하느니라.”

爵: 벼슬 작  祿: 복 록  辭: 사양할 사  蹈: 밟을 도


 

均은 平治也라 三者는 亦知仁勇之事니 天下之至難也라
균은 평치야라 삼자는 역지인용지사니 천하지지난야라

 

然이나 皆倚於一偏이라 故로 資之近而力能勉者는 皆足以 能之어니와
연이나 개의어일편이라 고로 자지근이력능면자는 개족이 능지어니와

 

至於中庸하야는 雖若易能이나 然이나 非義精仁熟而無一毫人欲之私者면 不能及也라 

지어중용하야는 수약이능이나 연이나 비의정인숙이무일호인욕지사자면 불능급야라 

  

三者는 難而易하고 中庸은 易而難하니 此民之所以鮮能也라.
삼자는 난이이하고 중용은 이이난하니 차민지소이선능야라.

 

균은 평치함이라. 세 가지는 知 仁勇의 일이니 천하의 지극한 어려움이라.
그러나 모두가 한쪽에 기울어졌느니라.
고로 가까운 데부터 힘으로 능히 힘쓰는 자는 다 족히 써 능하거니와
중용에 이르러서는 비록 쉽게 능할 것 같으나 그러나 의로움(義)과 정미로움(精),
어짊이 성숙해져 터럭만큼의 사람 욕심의 사사로움이 없는 자가 아니면 능히 (중용지도에) 미치지 못하느니라.
세 가지는 어려울 것 같지만 쉽고 중용은 쉬울 것 같으나 어려우니, 이는 백성이 써 능한 이가 드문 바이니라.

 

[해설]

천하국가를 고르게 하려면 알아야 하고(知), 벼슬과 녹도 사양할 수 있으려면 어질어야 하고(仁),
칼날을 밟으려면 용기가 있어야(勇) 하는데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중용의 도에 이르려면 의롭고 정미롭고 어짊이 성숙해져 조금도 사사로운 욕심이 없어야 한다.
가균(可均)하려면 충분히 지혜롭기만 하면 되고, 가사(可辭)하려면 충분히 어질면 되고,

가도(可蹈)하려면 용감하기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 같지만 한쪽으로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기에 오히려 쉽다.
하지만 중용의 도를 실천하려면 의롭고 정미롭고 어짊이 모두 충분히 성숙되어야 하므로
얼핏 보기에는 쉬울 것 같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공자도 말씀하셨듯이 중용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右는 第九章이라


亦承上章하야 以起下章이라
영승상장하야 이기하장이라.

또한 위 글을 이어 써 아래 글을 일으킴이니라.

중용 제8장 회지위인장(回之爲人章)

 

 

子曰 回之爲人也 擇乎中庸하야 得一善 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니라.
자왈 회지위인야 택호중용하야 득일선 즉권권복응이불실지의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회(안자)의 사람됨이란

항상 중용을 택하되 하나의 선한 일이라도 깨닫게 되면 그것을 진심으로 고뇌하면서

가슴에 품어 잃는 법이 없느니라”

 

拳: 주먹 권,拳拳:주먹을 말아 쥐듯이 정성스럽게 받드는 모양을 나타냄. 膺:가슴 응

 

[해설]

안회(안자)가 32살에 돌아가셨을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망쳤다
(噫라 天喪予삿다 天喪予삿다 : 논어, 先進편)고 통곡할 만큼 탁월한 제자였다.
안회는 누추한 거리에 살면서 대나무로 엮은 밥그릇에 밥을 담아

쪽박의 물을 먹으면서도(一簞食와 一瓢飮에 在陋巷이라)
조금도 배우는 즐거움이 변치 않으니

공자는 안회야말로 참으로 어질다(賢哉아 回也여)고 거듭거듭 칭찬했다(논어, 雍也편).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에게 제자 중 누가 배우기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안회를 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단명으로 죽어 지금은 없다.
그후로는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들은 바가 없다

(不遷怒하며 不貳過하더니 不幸短命死矣라 今也則亡하니 未聞好學者也라 : 雍也편)”고 하였을 정도이다.


回는 孔子弟子顔淵의 名이라 拳拳은 奉持之貌라 服은 猶著也라 膺은 흉也라
회는 공자제자안연의 명이라 권권은 봉지지모라 복은 유저야라 응은 흉야라

 

奉持而著之心胸之間은 言能守也라 顔子는 蓋眞知之라
 봉지이저지심흉지간은 언능수야라 안자는 개진지지라 

 

故로 能擇能守如此하니 此는 行之所以無過不及而道之所以明也라.
 고로 능택능수여차하니 차는 행지소이무과불급이도지소이명야라. 

 

회는 공자 제자 안연의 이름이니라. 권권은 받들어 갖는 모양이라.
복은 붙이는 것과 같음이라. 응은 가슴이라.
받들어 가져서 가슴 한 가운데에 붙이는 것은 능히 지킴을 말함이라.
안자는 대개 참으로 아느니라. 그러므로 능히 가려내고 능히 지킴이 이와 같으니
이는 (중용을) 행하는데 써 과불급이 없어 도가 써 밝은 바이라

著: 붙일 착 흉: 가슴 흉, 胸과 같음


右는 第八章이라

중용 제7장 개왈여지장(皆曰予知章)


 

子曰 人皆曰予知 驅而納諸苦攫陷穽之中 而莫之知피也하며
자왈 인개왈여지 구이납저고확함정지중 이막지지피야하며

 

人皆曰予知 擇乎中庸 而不能期月守也니라.
인개왈여지 택호중용 이불능기월수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내가 안다 하되
몰아서 저 그물과 덫과 함정 속에 들이게 하면 피할 줄을 알지 못하며,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내가 안다 하되 중용을 가려내 지키라 하면 한달도 능치 못하느니라.” 
 

 

[해설]

세상 사람들은 으스대며 중용을 안다하니 이들을 몰아 (중용지도가 아닌) 그물이나 함정에 빠뜨리면 피하지 못하고
중용을 택해서 지키라 하면 한달도 지키지 못함을 공자가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순임금은 간악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서제가 수차례에 걸쳐 그를 죽이려 했을 때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순임금이 생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만약 순임금이 그들이 의도한 대로 죽었을 경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부모와 동생을 손가락질하며
자식과 형을 죽인 사람들이라고 욕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부모에 대한 불효요 형제간의 우애를 저버리는 일이기에 순임금이 지혜롭게 대처하신 것이다.


고는 網也오 확은 機檻也오 陷穽은 坑坎也이니 皆所以掩 取禽獸者也라

고는 망야오 확은 기함야오 함정은 갱감야이니 개소이엄 취금수자야라

 

擇乎中庸은 辨別衆理하야 以求所謂中庸이니 卽上章好問用中之事也라
택호중용은 변별중리하야 이구소위중용이니 즉상장호문용중지사야라

 

期月은 잡一月也니라 
기월은 잡일월야니라 

 

言知 禍而不知벽온 以황能擇而不能守랴 皆不得爲知也니라.
언지 화이부지벽온 이황능택이불능수랴 개부득위지야니라.

 

고는 그물(網)이오 확은 덫(機檻)이요 함정은 구덩이에 빠짐이니 모두가 눈을 가려 금수를 취하는 바이니라,
중용을 가려낸다는 것은 많은 논리를 분별해 나누어서 써 이른바 중용을 구함이니
즉 윗글에 (순임금이) 묻기를 좋아하고 중용을 쓴 일이니라.
기월은 한달을 두른 것이니라(한달이 된 것이니라).
화를 알고도 피할 줄을 알지 못하거든 써 하물며 능히 (중용을) 가려서 능히 지키지 못함이랴.
(이것은) 모두가 知가 되지 못함이라(조금 배우고 지혜롭다고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右는 第七章이라


承上章大知而言하고 又擧不明之端하야 以起下章也이니라.
승상장대지이언하고 우거불명지단하야 이기하장야이니라.

 

위 글의 대지를 이어서 말하고 또 밝지 못한 단서를 들어서 써 아래 장을 일으킴이니라.

중용 제6장 순기대지장(舜其大知章)

 

 

子曰 舜은 其大知也與신뎌 舜好問而好察邇言하샤대 
자왈 순은 기대지야여신뎌 순호문이호찰이언하샤대 

 

隱惡而揚善하시며 執其兩端하샤 用其中於民하시니 其斯以爲舜乎신뎌!
은악이양선하시며 집기양단하샤 용기중어민하시니 기사이위순호신뎌!

 

공자 말씀하시기를 순임금은 그 큰 지혜이시다.
순임금이 묻기를 좋아하시고 가까운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시되
악함을 숨기고 선을 드날리시며 그 두 끝을 잡으셔서 그 중을 백성에게 쓰시니
그 이로써 순임금이 되심이로다(과연 순임금이로시다).

 

[해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묻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순임금은 상대가 비록 어리석건 그러하지 않던 간에 묻고 살펴 그 악은 숨겨두고 선은 높이 드날렸다.
그리고 늘 백성들로부터 항상 양단의 얘기들을 듣고 중으로써 정치를 하셨으니
순임금은 과연 성인다우셨음을 표현한 글이다.


舜之所以爲大知者는 以其不自用而取諸人也라
 순지소이위대지자는 이기불자용이취제인야라 

 

邇言者는 淺近之言이어늘 猶必察焉하니 其無遺善을 可知라
이언자는 천근지언이어늘 유필찰언하니 기무유선을 가지라

 

然이나 於其言之未善者엔 則隱而不宣하시고 其善者엔 則播而不匿하사
연이나 어기언지미선자엔 즉은이부선하시고 기선자엔 즉파이불닉하사

 

其廣大光明이 又如此하시니 則人孰不樂告以善哉리오
기광대광명이 우여차하시니 즉인숙불락고이선재리오

 

兩端은 謂衆論不同之極致라 蓋凡物이 皆有兩端하니 如小大厚薄之類라
양단은 위중론부동지극치라 개범물이 개유양단하니 여소대후박지류라

 

於善之中에 又執其兩端而量度하야 以取中然後에 用之면 則其擇之審而行之至矣라
어선지중에 우집기양단이량도하야 이취중연후에 용지면 즉기택지심이행지지의라

 

然이나 非在我之權 精切不差면 何以與此리오
연이나 비재아지권도 정절불차면 하이여차리오

 

此는 知之所以無過不及而 道之所以行也라.
차는 지지소이무과불급이 도지소이행야라.

 

순임금이 써 대지가 되신 것은 그 스스로 쓰지 아니하고 저 사람에게 취함으로써 함이니라.
가까운 데 말은 천근한 말이어늘 오히려 반드시 살피니 (순임금이야말로)

그 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가히 알 만하니라.
그러나 그 말이 선하지 못한 자에게는 숨겨서 선양하지 아니하시고

그 선한 자에게는 전파하여 숨기지 아니하셔서
그 광대하고 광명함이 또한 이와 같으시니

즉 사람이 누가 선으로써 말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리오.
양단이란 것은 여러 사람의 의논이 같지 아니한 극치를 말함이라.
대개 그 물건이란 것이 모두 양단이 있으니 작고 크고 후하고 박한 종류인 것과 같음이라.
선한 가운데에 또한 그 양단을 잡아 잘 헤아려 중을 취한 연후에 쓰면

(백성들이) 그 가림을 살피고 행함이 지극할 지니라.
그러나 내게 있는 권도(저울과 잣대)가 정절해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음이 아닐 것 같으면 어찌 써 이에 참여하리오.
이는 지(知)로써 과하거나 불급하지 않음이 없어 도가 써 행해지는 바라.

 

중용 제5장 도기불행장(道其不行章)


 

子曰 道其不行矣夫인뎌
자왈 도기불행의부인뎌

 

공자 말씀하시기를 “도가 행하지 못할진져”

 

由不明이라 故로 不行이라.
유불명이라 고로 불행이라.

 

밝지 못하므로 말미암음이라. 그러므로 행하지 못함이니라.


右는 第五章이라


此章은 承上章而擧其不行之端하야 以起下章之意라.
차장은 승상장이거기불행지단하야 이기하장지의라.

 

이 장은 위 글을 이어서 그 행하지 못하는 단서를 들어서 써 아래 글의 뜻을 일으키느라.

 

[해설]

이 장은 간단하지만 앞 장에서 예시했듯이 결국은 知者나 愚者, 賢者나 不肖者의 과불급으로 인해
도가 행해지지 못함을 결론짓고 다음 장부터는 도가 행해진 예를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중용 제4장 지미장(知味章)


 1

子曰 道之不行也를 我知之矣라 知者는 過之하고 愚者는 不及也라니
 자왈 도지불행야를 아지지의라 지자는 과지하고 우자는 불급야라니
 

 

道之不明也를 我知之矣라 賢者는 過之하고 不肖者는 不及也니라.
도지불명야를 아지지의라 현자는 과지하고 불초자는 불급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도가 행하지 못할 것을 내가 아노라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함이라
도가 밝지 못할 것을 내가 아노라 어진 자는 지나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미치지 못하느니라.”

 

[본문 해설]

중용지도는 천리(天理)요 진리(眞理)이다.
주역에도 중정과 중부, 중절, 중용, 중화의 도를 강조하고 있다.
천지도 중용의 도가 아니면 만물을 낼 수 없듯이

중용의 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치와 실천하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중용지도로써 행해야 하는 사람은 흠결 하나 없듯이
정치도 중용지도로 행해 나가야 국가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하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된다.
그러나 대도(大道)인 중용지도를 행하고 밝힌다는 것은 쉽지 않음을 공자가 강조하고 있다.


[참조]

주역은 過하거나 不及함이 없는 中을 가장 중시한다.
中은 節과 통하니 천지의 배합인 60간지에 상응하는 60번째의 괘가 곧 水澤節이다

(節卦 彖傳에도 中正以通을 말함).


역법(曆法)상으로 한 해의 中節에 해당하는 것은 周天常數 360일이다.
5歲에 두 달의 윤을 두는 방법(五歲再閏)에 기준하면 매년 日行은 6일이 과도하고 月行은 6일이 부족하다.
주역에서는 이를 大過와 小過로 설명하고 있는데,

대과는 큰 양(日陽)이 지나친 것이고 소과는 작은 음(月陰)이 지나친 것이다.
그러므로 日行의 과도한 도수가 대과가 되고 月行의 과도한 도수가 소과가 되는데,
이것은 일월운행에서 상대적으로 발생하는 氣盈(기영 : 대과)과 朔虛(삭허 : 소과)의 도수에 상응한다.


道者는 天理之當然이니 中而己矣라 知愚賢不肖之過不及은
도자는 천리지당연이니 중이기의라 지우현불초지과불급은

 

則生품之異而失其中也라 知者는 知之過ㄹ새 旣以道로
즉생품지이이실기중야라 지자는 지지과할새 기이도로

 

爲不足行이오 愚者는 不及知하고 又不知所以行하니
위부족행이오 우자는 불급지하고 우부지소이행하니 

 

此는 道之所以常不行也라 賢者는 行之過ㄹ새 旣以道로
차는 도지소이상불행야라 현자는 행지과할새 기이도로

 

爲不足知하고 不肖者는 不及行하고 又不求所以知하니
위부족지하고 불초자는 불급행하고 우불구소이지하니

 

此는 道之所以常不明也라.
차는 도지소이상불명야라.

 

도라 하는 것은 천리의 당연함이니 중일뿐이니라.
알고 어리석고 어질고 어질지 못함의 과불급은 타고난 품부의 다름인즉 그 중을 잃음이라.
아는 자는 아는 것이 지나쳐 이미 도로써 족히 행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아는데 미치지 못하고 또한 행동하는 바를 아지 못하니,
이것은 도가 항상 행해지지 못하는 바이니라.
어진 자는 행실이 지나쳐 이미 도로써 알 것이 없다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행동이 미치지 못하고 또한 아는 바를 구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도가 항상 밝지 못하는 바이니라.

 

2
人莫不飮食也는 鮮能知味也니라.
인막불음식야는 선능지미야니라.

 

사람이 마시고 먹고 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능히 맛을 아는 이가 적으니라.


道不可離어늘 人自不察하니 是以로 有過不及之弊하니라.
도불가리어늘 이자불찰하니 시이로 유과불급지폐하니라.

 

도는 가히 떠나지 못하거늘 사람이 스스로 살피지 못하니 이로써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있느니라.


右는 第四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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