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제33장 무성무취장(無聲無臭章)

 


詩曰 衣錦尙絅이라 하니 惡其文之著也이라 故로 君子之道는 闇然而日章하고
시왈 의금상경이라 하니 오기문지저야이라 고로 군자지도는 암연이일장하고

 

小人之道는 的然而日亡하나니 君子之道는 淡而不厭하며 簡而文하며 溫而理니
소인지도는 적연이일망하나니 군자지도는 담이불염하며 간이문하며 온이리니

 

知遠之近하며 知風之自하며 知微之顯이면 可與入德矣리라.
지원지근하며 지풍지자하며 지미지현이면 가여입덕의리라.

 

시에 가로되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니 그 무늬의 나타남을 미워함이라.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두우면서 날로 빛나고 소인의 도는 밝으면서 날로 없어지나니,
군자의 도는 담박하되 싫지 아니하며, 간략하되 무늬가 있으며, 온화하되 조리가 있으며,
먼 것이 가까운 곳부터라는 것을 알며, 바람이 부터함(어느 곳에서부터 일어남)을 알며,
은미함이 드러남을 알면 가히 더불어 덕에 들어가리라.

絅 : 홑옷 경


[본문 해설]

『시경』에 나오는 衣錦尙絅이란 말은 비단옷을 입었다고 으스대며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덧옷을 입어 그 비단옷의 화려함을 가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려함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싫어해 가렸다는 것인데
여기서 비단옷이라 함은 많이 알고 아름다운 것을 많이 품은 군자를 말하고 덧옷은 겸양을 뜻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조금만 알아도 그것을 확대해 남들에게 자랑하려고 야단이지만
군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추고 있어 오히려 감추려고 애쓴다는 말이다.


『주역』地火明夷괘 大象傳에 “밝음이 땅 가운데 들어감이 ‘명이’니,
군자가 이로써 무리에 다다름에 그믐을 써서 밝히느니라

(象曰 明入地中이 明夷니 君子ㅣ 以하야 ?衆애 用晦而明하나니라)”라 하였다.
군자의 도란 겉으로는 어두운 그믐인 체하면서 세상을 밝힌다는 것이다.
그믐이 다하면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훤히 밝아지듯, 군자의 도는 어두우면서 날로 자연히 빛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소인의 도는 겉으로 굉장히 밝은 것 같지만 그 밝은 것이 날로 없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도는 담백한 물과 같이 아무리 마셔도 싫지 아니하며,
간략하지만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무늬가 나오고, 늘 온화하면서도 조리가 있어 잘 다스리고,
먼 곳이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됨을 알고, 바람이 어느 곳에서부터 불기 시작했는지
다시 말해 무슨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알며,
은미하게 시작하여 후에 훤히 드러나는 것까지 알게 된다.
이런 정도가 되면 가히 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前章엔 言聖人之德이 極其盛矣오 此는 復自下學立心之始로 言之而下文에 又推之하야 以至其極也라
전장엔 언성인지덕이 극기성의오 차는 부자하학립심지시로 언지이하문에 우추지하야 이지기극야라

 

詩는 國風 衛碩人 鄭之봉에 皆作衣錦경衣하니 경은 絅으로 同이니 단衣也라 
시는 국풍 위석인 정지봉에 개작의금경의하니 경은 경으로 동이니 단의야라

 

尙은 加也라 古之學者는 爲己라 故로 其立心이 如此라
상은 가야라 고지학자는 위기라 고로 기입심이 여차라

 

尙絅故로 闇然이오 衣錦故로 有日章之實이며 淡簡溫은 絅之襲於外也오 不厭而文且理焉은 錦之美이 在中也라 
상경고로 암연이오 의금고로 유일장지실이며 담간온은 경지습어외야오 불염이문차리언은 금지미이 재중야라

 

小人은 反是則暴於外而無實以繼之니 是以로 的然而日亡也라
소인은 반시즉폭어외이무실이계지니 시이로 적연이일망야라

 

遠之近은 見於被者이 由於此也오 風之自는 著乎外者本乎內也오 微之顯은 有諸內者 形諸外也라
원지근은 현어피자이 유어차야오 풍지자는 저호외자본호내야오 미지현은 유저내자 형제외야라

 

有爲己之心하고 而又知此三者면 則知所謹而可入德矣라 故로 下文에 引詩하야 言謹獨之事하니라. 
유위기지심하고 이우지차삼자면 즉지소근이가입덕의라 고로 하문에 인시하야 언근독지사하니라.
 

앞장(제32장)에서는 성인의 덕이 그 성함을 다함을 말하고

여기서는 다시 아래에서 배우는 이가 마음을 세우는 시작부터 말하였으며
아랫글에 또 이것을 미루어서 써 그 지극함에 이르게 한 것이라.
시는 「국풍」의 ‘위풍 석인편’과 ‘정풍 봉편’에 모두 ‘의금경의’로 되어 있으니 ‘?’은 ‘絅’으로 같으니, 홑옷이라.
‘尙’은 더함이라. 옛날의 학자들은 자기를 위함이라. 그러므로 그 마음을 세움이 이와 같으니라.
홑옷을 덧입었기 때문에 어두움이오, 비단옷을 입었기 때문에 날로 빛나는 실제가 있느니라.
담담하고 간략하고 온화함은 홑옷이 밖에서 껴입어짐이오.

싫지 않고 무늬가 나며 또 조리가 있음은 비단의 아름다움이 속에 있음이라.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하니 밖에 드러나되 실제로써 이어짐이 없으니, 이로써 밝되 날로 없어짐이라.
‘원지근’은 저기에 나타남이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요, ‘풍지자’는 밖에 나타난 것이니 안에 근본함이요,
‘미지현’은 저 안에 있는 것이 저 밖으로 형체가 됨이라.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고 또 이 세 가지(遠之近, 風之自, 微之顯)를 알면

삼갈 바를 알아 가히 덕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아랫 글에 『시경』을 인용하여 홀로를 삼가는(謹獨) 일을 말하였느니라.

경: 홑옷 경.  단: 홑옷 단.  襲: 껴입을 습.  暴: 나타날 폭


[앞주 해설]

학문에는 ‘爲己之學’과 ‘爲人之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爲己之學’이란 남을 의식하거나 벼슬하고자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남이 뭐라고 하던 나를 위해서,
스스로 수신을 위해서, 사람이 되고자 학문을 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爲人之學’이란 자신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남에게 큰소리치거나 벼슬하려고 혹은 돈을 벌려고 하는 공부를 말한다.
옛날 성현이나 군자들은 위기지학의 자세로 공부를 했는데 처음 공부를 하려는 사람 또한 위기지학으로 임해야 한다.


윗글에서 군자의 밖으로 드러난 행동을 ‘絅之襲於外’라 표현하고,
소인의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暴於外’라고 표현한 것은 잘 음미해야 한다.
군자는 겉으로 홑옷을 껴입어 밝음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실제는 속에 비단옷을 입고 있어 날로 밝아지지만,
소인은 큰소리만 치고 주먹을 휘두르고 폭력을 쓰니 금방 드러나기는 하지만

실제 알맹이가 없어 날로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군자의 도는 밖으로나 멀리서나 은미한 가운데서도 드러나니 ‘遠之近’과 ‘風之自’와 ‘微之顯’으로 표현하였다.

『주역』계사상전 제8장에 風澤中孚괘 九二효사 “우는 학이 그늘에 있거늘 그 자식이 화답하도다.
나에게 좋은 벼슬이 있어 내가 너와 더불어 얽히노라
(鳴鶴이 在陰이어늘 其子ㅣ 和之로다 我有好爵하야 吾與爾靡之하노라)”에 대해
공자가 “군자가 그 집에 거해서 그 말을 냄에 선하면 천리 밖에서 응하나니,
하물며 그 가까운 데에서랴! 말이 몸에서 나와 백성에게 더하며, 행실이 가까운 데서 발해 먼 곳에서 나타나나니,
언행은 군자의 추기니 추기의 발함이 영과 욕의 주가 되느니라.
언행은 군자가 이로써 천지를 움직이는 바니 가히 삼가지 아니하랴!

 

(子曰 君子 居其室하야 出其言에 善이면 則千里之外 應之하나니
(자왈 군자 거기실하야 출기언에 선이면 즉천리지외 응지하나니

 

況其邇者乎여 居其室하야 出其言에 不善이면 則千里之外 違之하나니
황기이자호여 거기실하야 출기언에 불선이면 즉천리지외 위지하나니

 

況其邇者乎여 言出乎身하야 加乎民하며 行發乎邇하야 見乎遠하나니
황기이자호여 언출호신하야 가호민하며 행발호이하야 현호원하나니

 

言行은 君子之樞機니 樞機之發이 榮辱之主也라 言行은 君子之所以動天地也니 可不愼乎아)”라고 말씀하신 뜻과 같다.
언행은 군자지추기니 추기지발이 영욕지주야라 언행은 군자지소이동지천야니 가불신호아)"라고 말씀하신 뜻과 같다.

 

이러한 군자이기에 말에는 항상 실지가 있고 행동에는 항상함이 있다는 것을

『주역』風火家人괘 대상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象曰 風自火出이 家人이니 君子ㅣ 以하야 言有物而行有恒하나니라
(상에 가로되 바람이 불에서 나는 것이 가인이니,

군자가 이로써 말에는 실지가 있고 행동에는 항상함이 있게 하나니라).
” 여기서 가인은 한 집안을 말하는데, 집에서 남들이 듣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밖으로 새어나가 남들이 모두 알게 되듯이,
밖에 나타난 것은 바로 내 집안 내 마음 속에서 근본이 된 것이다.


즉 자기 몸을 위하여 공부하는 마음(爲己之心)이 먼저 있고,

‘遠之近’ ‘風之自’ ‘微之顯’의 세 가지가 진리라는 것을 알면,
삼갈 바를 알아서 가히 덕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래는 『시경』을 인용해서 ‘謹獨’을 말하고 있다.


詩云 潛雖伏矣나 亦孔之昭라 하니 故로 君子는 內省不구하야
시운 잠수복의나 역공지소라 하니 고로 군자는 내필불구하야

 

無惡於志나 君子之所不可及者는 其惟人之所不見乎인뎌
무오어지나 군자지소불가급자는 기유인지소불견호인뎌

 

『시경』에 이르기를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으나 또한 심히 밝다” 하니
그러므로 군자는 안으로 살펴 병들지 아니해서 뜻(마음)에 미워함이 없으니
군자의 가히 미치지 못하는 것은 그 오직 사람이 보지 않는 바인저!

孔 : 심히 공


[본문 해설]

『시경』「小雅」正月편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魚在于沼(어재우소)하니 / 고기가 못에 있으니

亦匪克樂(역비극락)이로다 / 또한 능히 즐겁지 못하도다

潛雖伏矣(잠수복의)나 / 물에 잠겨서 엎드려 있으나

亦孔之炤(역공지소)이로다 / 또한 심히 밝게 보이도다

憂心慘慘(우심참참)하여 / 마음에 근심하기를 심히 하여

念國之爲虐(염국지위학)하노라 / 나라의 포악함을 염려하노라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으나 또한 심히 밝다”는 것은

세상 속에 엎드려 있다 하더라도 그 곳에서 밝은 빛이 나온다는 말이다.
앞서 ‘衣錦尙絅’과 같이 비록 겉옷을 덧입었지만 결국은 빛이 나게 된다는 말을 이어서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겉으로보다 안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안으로 스스로 가책을 느끼거나 마음의 병폐가 조금도 없어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군자가 남들과 다른 점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 나 홀로 있는 것을 삼가는 것이다.
이 제33장은『중용』을 마무리 지으면서 맨 처음 제1장의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니 可離면 非道也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를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하는 대목이다.


詩는 小雅正月之篇이라 承上文하야 言莫見乎隱莫顯乎微也라
시는 소아정월지편이라 승상문하야 언막현호은막현호미야라

 

구는 病也라 無惡於志는 猶言無愧於心이니 此는 君子謹獨之事也라.
구는 병야라 무오어지는 유언무괴어심이니 차는 군자근독지사야라.

 

시는 「소아 정월편」이라. 윗글을 이어 숨은 것보다 드러남이 없고, 은미한 것보다 나타남이 없음을 말한 것이라.
구는 병이라. 마음에 미움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과 같으니 이는 군자가 홀로를 삼가는 일이라.


[앞주 해설]

주자 또한 자사가 예를 든 『시경』의 구절을
『중용』 제1장에 나오는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ㅣ니라”를 들어

‘愼獨’을 ‘謹獨’으로 설명하고 있다.


詩云 相在爾室혼대 尙不愧于屋漏라 하니 故로 君子는 不動而敬하며 不言而信이니라.
시운 상재이실혼대 상불괴우옥루라 하니 고로 군자는 부동이경하며 불언이신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집안에 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방구석에서도 부끄럽지 않다” 하니
그러므로 군자는 동하지 않아도 공경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느니라.

漏 : 샐 루, 서북모퉁이 루 * 屋漏 : 방구석, 아랫목 한구석


[본문 해설]

위에 인용된 시는 앞서 『중용』제16장에서도 인용된 바가 있다(인용 시 내용은 제16장에서 참조 바람).
앞글에 이어서 ‘謹獨’의 효험을 말하고 있다.
즉 남이 볼 때나 홀로 있을 때를 삼가 안으로 마음을 잘 닦아 正心修道를 하니
군자는 억지로 남에게 잘 보이려고 움직이지 않아도 결국은 세상에 진심이 드러나게 되어 남들이 공경하게 되고,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남들이 믿어주게 된다.


詩는 大雅抑之篇이라 相은 視也라 屋漏는 室西北隅也라
시는 대아억지편이라 상은 시야라 옥루는 실사북우야라

 

承上文하야 又言君子之戒謹恐懼가 無時不然하야 不待言動而後에 敬信하니 則其爲己之功이 益加密矣라
승상문하야 우언군자지계근공구가 무시불연하야 부대언동이후에 경신하니 즉기위기지공이 익가밀의라

 

故로 下文에 引詩하야 幷言其效하니라.
고로 하문에 인시하야 병언기효하니라.

 

시는 「대아 억편」이라. 상은 봄이라. 옥루는 방의 서북쪽 귀퉁이라.
윗글을 이어 또 군자의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두려워함(戒謹恐懼)이 때로 그렇지 않음이 없어
말과 행동을 기다리지 않은 뒤에 공경하고 믿게 함을 말하였으니 ‘위기지공(몸을 위한 공력)’이 더욱더 주밀함이라.
그러므로 아랫글에 시를 인용해서 아울러 그 효험을 말함이라.


[앞주 해설]

屋漏를 방의 서북쪽이라 하고 귀퉁이라고 하는 이유는 보통 집을 남향으로 짓는데,
이 경우 문을 열고 들어 갈 경우 아랫목은 서쪽이 되고, 그 구석이 서북쪽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있으면서도 부끄럽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 ‘謹獨’의 자세이다.
戒謹恐懼는 누가 두려워서라기 보다 스스로를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삼가는 마음 자세이다.
만약 벌을 받을까봐 누구로부터 야단을 맞을까봐 삼가는 것은 ‘謹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중용』 제1장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불가(佛家)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빛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영원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한 말도
바로 不睹하고 不聞이라 하여 도를 닦지 않음을 경계한 말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爲己之學)로 더욱더 주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爲己之功은 爲己之學과 같은 뜻이다.


詩曰 奏假無言하야 時靡有爭이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不賞而民勸하며 不怒而民威於부鉞이니라. 
시왈 주격무언하야 시미유쟁이라 하니 시고로 군자는 불상유민권하며 불서이민위어부월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신 앞에) 나아가 (신이 감격해) 이름에 말이 없어서 때에 다툼이 있지 않다”하니,
이런 고로 군자는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권하며, 성내지 않아도 백성들이 작도와 도끼보다 더 두려워하느니라.

奏: 아뢸 주, 나아갈 주 假: 이를 격 ?: 작도 부 鉞: 도끼 월

 

[본문 해설]

“奏假無言하야 時靡有爭이라”는 말은 『중용』제16장의 “神之格思를 不可度思온 ?可射思아”라는 말과 같이
신은 오직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 때에 헤아릴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신 앞에 나아가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면 신이 감격하여 이르게 되는데
이때에는 아무 말이 필요 없고 묵묵한 가운데 신과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 다툼이 있을 수가 없듯이 군자가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에게 임하면,
군자가 백성에게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들은 서로 잘하자고 권하며,
군자가 성내지 않아도 백성들은 형벌보다도 더욱 두려워하여 잘 따르게 된다.


詩는 商頌烈祖之篇이라 奏는 進也라 承上章而遂及其效하야
시는 상송열조지편이라 주는 진야라 승상장이수급기효하야

 

言進而感格於神明之際에 極其誠敬하야 無有言說而人自化之也라 威는 畏也라 부는 좌斫刀也오 鉞은 斧也라.
언진이감격어신명지제에 극기성경하야 무유언설이인자화지야라 위는 외야라 부는 좌작도야오 월는 부야라.
 

시는 「상송 열조편」이라. 주는 나아감이라.
윗글을 이어 드디어 그 효험에 미쳐 나아가 신명을 감격할 즈음에 그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여
말과 설명을 하지 않아도 사람이 스스로 감화됨을 말한 것이라.
위는 두려워함이라. 부는 여물을 써는 작도요, 월은 도끼라.

遂: 드디어 수 際: 즈음 제 ?: 여물 좌 斫: 벨 작


詩曰 不顯惟德을 百벽其刑之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篤恭而天下平이니라.
시왈 불현유덕을 백벽기형지라 하니 시고로 군자는 독공이천하평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드러나지 않은 덕을 백벽(여러 제후)이 법으로 삼는다” 하니
이런 고로 군자는 공순함을 돈독히 하여 천하가 평평해지느니라.


詩는 周頌烈文之篇이라 不顯은 說見二十六章이라 此는 借引以爲幽深玄遠之意라
시는 주송열문지편이라 불현은 설견이십육장이라 차는 차인이위유심현원지의라

 

承上文하야 言天子 有不顯之德而諸侯 法之하니 則其德이 愈深而效愈遠矣라
승상문하야 언천자 유불현지덕이제후 법지하니 즉기덕이 유심이효유원의라

 

篤은 厚也니 篤恭은 言不顯其敬也라
독은 후야니 독공은 언불현기경야라

 

篤恭而天下平은 乃聖人至德이 淵微하야 自然之應이니 中庸之極功也라. 
독공이천하평은 내성인지덕이 연미하야 자연지응이니 중용지극공야라.
 

시는 「주송 열문편」이라. 불현은 설명이 제26장에 보이니라.
이는 빌리고 인용해서 써 그윽하고 깊고 아득하고 먼 뜻을 삼은 것이라.
윗글을 이어서 천자가 드러나지 않은 덕이 있어 제후가 그것을 법으로 삼으면
그 덕이 더욱 깊어 효험이 더욱 멀어지는 것을 말함이라.
독은 두터움이니 독공은 그 공경함이 나타나지 않음을 말함이라.
공순함을 돈독히 해서 천하가 평평해짐은 이에 성인의 지극한 덕이 깊고 은미하여 자연히 응함이니,

중용의 지극한 공효이라.


詩云 予懷明德의 不大聲以色이라 하야날 子曰 聲色之於以化民애 末也라 하시니라
시운 여회명덕의 부대성이색이라 하야날 자왈 성색지어이화민에 말야라 하시니라

 

詩云德유如毛라 하니 毛猶有倫이어니와 上天之載 無聲無臭아 至矣니라.
시운덕유여모라 하니 모유유륜이어니와 상천지재 무성무취아 지의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내가 명덕의 소리와 다못(또) 색을 크게 여기지 않음을 생각한다”하거늘,
공자 말씀하시기를 “소리와 빛은 백성을 교화하는데 끝이라” 하시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덕이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 하니 터럭은 오히려 비교할 수 있거니와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야만 지극하니라.

以: 다못 이, 또 이 倫: 비교 륜 載: 일 재


[본문 해설]

『시경』「大雅 皇矣篇」에서 “予懷明德의 不大聲以色이라”는 내용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고 하였듯이 사람은 모두 밝은 덕을 갖고 나왔다.
이것이 앞에서 나온 不顯惟德이다. 이 드러나지 않는 덕은 멋진 소리나 화려한 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시경에서 ‘밝은 덕의 소리와 색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하였다.
공자는 이러한 소리와 빛은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지엽말단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덧붙여 시경의 말을 인용하여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고 하였다.
만약 덕이 무겁다면 누가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터럭조차 물건이라 큰 터럭, 작은 터럭이 있듯이 비교가 된다.
이렇게 비교가 되는 것으로 덕을 나타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주역 산천대축괘의 상구효에 보면 “어느 하늘의 거리인고,

형통하니라(上九曰 何天之衢(하천지구)오 亨(형)하니라)” 하였고,
그 爻象傳(효상전)에“何天之衢는 도가 크게 행함이라(象曰 何天之衢는 道 大行也라)”고 하였다.
주역의 易簡의 법칙이 있을 뿐이다. 하늘은 쉬운 법칙이 있기에 만물을 내고,
땅은 하늘의 쉬운 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간단한 법칙으로 만물을 기르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상천의 일은 易簡의 법칙에 따라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이 지극할 뿐인 것이다.
『중용』은 『시경』「文王篇」의 “上天之載 無聲無臭”를 인용하고 이 뒤에 “至矣라(지극하니라)”라는
두 단어만을 덧붙여 끝맺음을 하였다.
하늘의 덕은 지극하기에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는 것이다.


詩는 大雅皇矣之篇이니 引之하야 以明上文所謂不顯之德者正以其不大聲與色也라
시는 대아황의지편이니 인지하야 이명상문소위불현지덕자정이기부대성여색야라

 

又引孔子之言하야 以爲聲色은 乃化民之末務어늘 今但言不大之已면 則猶有聲色者 存하니
우인공자지언하야 이위성색은 내화민지말무어늘 금단언부대지이면 즉유유성색자 존하니

 

是未足以形容不顯之妙라 不若烝民之詩에 所言德유如毛하니
시미족이형용불현지묘라 불약증민지시에 소언덕유여모하니

 

則庶乎可以形容矣어니와 而又自以爲謂之毛면 則猶有可比者하니
즉서호가이형용의어니와 이우자이위위지모면 즉유유가차자하니

 

是亦未盡其妙라 不若文王之詩所言上天之事無聲無臭니 然後에 乃爲不顯之至耳라
시역미진기묘라 불약문왕지시소언상천지사무성무취니 연후에 내위불현지지이라

 

蓋聲臭는 有氣無形하야 在物에 最爲微妙어늘 而猶曰無之라
개성취는 유기무형하야 재물에 최위미묘어늘 이유왈무지라

 

故로 惟此에 可以形容不顯篤恭之妙오 非此德之外에 又別有是三等然後에 爲至也니라. 
고로 유차에 가이형용불현독공지묘오 비차덕지외에 우별유시삼등연후에위지야니라. 


시는 「대아 황의편」이니 이것을 인용하여 써 윗글에 이른바 드러나지 않는 덕을

정히 써 소리와 색을 크게 여기지 않음을 밝혔느니라.
또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소리와 색은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끄트머리에 힘써야 하는 일이거늘,
이제 다만 크게 여기지 않게 여긴다고 말했을 뿐이라면,
이것은 오히려 소리와 색이 남아 있는 것이니 드러나지 않는 묘함을 형용하기에 충분하지 못함이라.
『시경』「증민」시에 말한 바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라고 한 것만도 못하니
즉 거의 가히 써 형용이 되었으되 또 스스로 이르기를 터럭이라고 하면 오히려 가히 비교가 되니
이 또한 그(불현지덕) 묘함을 다하지 못한 것이리라.
「문왕시」에 말한 바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한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한 후에야 드러나지 않음의 지극함이 될 뿐이라.
대개 소리와 냄새는 기운만 있고 형체가 없어서,

물건에 있어 가장 미묘한 것임에도 오히려 없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오직 이것은 가히 써 드러나지 않은 공순함을 돈독히 한다는 묘함을 형용함이오,
이 덕의 밖에 또 별도로 이 세 가지 등수(성색→ 터럭→무색무취)가 있은 연후에 지극함이 된다고 함이 아니니라.

 

右는 第三十三章이라

 

子思 因前章極致之言하야 反求其本하야 復自下學爲己謹獨之事로 推而言之하야
자사 인전장극치지언하야 반구기본하야 부자하학위기근독지사로 추이언지하야

 

以馴致乎篤恭而天下平之盛하시고 又贊其妙하야 至於無聲無臭以後에 已焉하시니
이순치호독공이천하평지성하시고 우찬기묘하야 지어무성무취이후에 기언하시니

 

蓋擧一篇之要 而約言之하야 其反復丁寧示人之意가 至深切矣시니 學者其可不盡心乎아. 
개거일편지요 이약언지하야 기반복정녕시인지의가 지심절의시니 학자기가불진심호아. 


자사가 앞 장 극치의 말을 인해서, 돌이켜 그 근본을 구하게 하여 다시 하학(초학)이
자기 몸을 위한 근독의 일로부터 미루어 말해서 써 공순함을 돈독히 해서

천하가 평해지는 성한 데까지 길들여 이루게 하시고,
또 그 묘함을 찬양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은 뒤에 끝나는 데 이르게 하시니,
대개 한 편(제33장)의 요점을 들어 간략하게 말씀하시어

그 반복하고 정녕하여 사람에게 보여주신 뜻이 지극히 깊고 절실하시니,
배우는 자가 그 가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앞주 해설]

이상으로 『중용』은 마지막 제33장에 시경 8편의 시를 인용하여 지극한 정성의 의미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 지극한 정성의 덕은 드러나지 않아 소리나 빛, 터럭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무색무취의 지극함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至誠如神).
그러하므로 사람이 항상 지극한 정성으로 임한다면 신이 감격하여 이르니
하늘이 감동한다는 것(至誠感天)이 자사가 『중용』을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치려는 요체일 것이다.
따라서 배우는 우리들은 그 마음을 다하여 中庸의 道를 배워야 할 것이다.

 

終(종)

 

중용 제32장 성지천덕장(聖知天德章)

 


唯天下至誠이아 爲能經綸天下之大經하며 立天下之大本하며 知天地之化育이니 夫焉有所倚리오.
유천하지성이아 위능경륜천하지대경하며 입천하지대본하며 지천지지화육이니 부언유소의리오. 

 

오직 천하에 지극한 정성이라야 능히 천하의 큰 법도를 경륜하며,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우며,
천지의 화육을 알지니, 어찌 의지하는 바가 있으리오.!

 

[본문 해설]

앞장에서는 지극한 성인(至聖)으로 말하고, 여기서는 지극한 정성(至誠)으로 말하고 있는데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 곧 지극한 성인이고, 지극한 성인이 곧 지극한 정성이다.
여기서 정성이라는 것은 두 손을 합장하고 백배 천배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깨끗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끗한 마음을 가진, 오로지 지극한 정성을 가진 사람이라야 능히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는
천하의 큰 법을 경륜할 수 있고, 천하의 근본을 세울 수 있으며

천지가 만물을 나오도록 하고 길러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천지와 더불어 짝하는 성인이기에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經綸은 皆治絲之事니 經者는 理其緖而分之오 綸者는 比其類而合之也라
경륜은 개치사지사니 경자는 이기서이분지오 륜자는 비기류이합지야라

 

經은 常也라 大經者는 五品之人倫이오 大本者는 所性之全體也라
경은 상야라 대경자는 오품지인륜이오 대본자는 소성지전체야라

 

唯聖人之德이라야 極誠無妄이라
유성인지덕이라야 극성무망이라

 

故로 於人倫에 各盡其當然之實하야 而皆可以爲天下後世法이니 所謂經綸之也라
고로 어인륜에 각진기당연지실하야 이개가이위천하후세법이니 소위경륜지야라

 

其於所性之全體에 無一毫人欲之僞以雜之하야
기어소성지전체에 무일호인욕지위이잡지하야

 

而天下之道千變萬化가 皆由此出하니 所謂立之也라
이천하지덕천변만화가 개유차출하니 소위립지야라

 

其於天地之化育에 則亦其極誠無妄者 有묵契焉하니 非但聞見之知而已라
기어천지지화육에 즉역기극성무망자 유묵계언하니 비단문견지지이이라

 

此皆至誠無妄自然之功用이니 夫豈有所倚著於物而後에야 能哉리오.
차개지성무망자연지공용이니 부기유소의저어물이후에야 능재리오. 


경륜(經은 실을 나르는 것이고, 綸은 북으로 짜는 것)은 모두가 실을 다스리는 일(베짜는 일)이라.
경이라는 것은 그 실마리를 다스려서 나누는 것이오, 윤이라는 것은 그 유를 나란히 해서 합함이라.
경은 떳떳함이라. 대경이라는 것은 오품의 인륜(五倫)이오, 대본이라는 것은 성품인 바의 전체이라.
오직 성인의 덕이라야 지극히 성실하고 망령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의 윤리에 각각 그 당연함의 실지를 다하여 다 가히 써 천하 후세의 법이 되니 이른바 경륜이란 것이라.
그 성품인 바의 전체에 한 터럭만한 사람 욕심의 거짓이 섞임이 없어서
천하의 도에 천 번 변하고 만 번 화함이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니 이른바 세운다는 것이라.
그 천지의 화육함에 또한 지극히 성실하고 망령됨이 없는 자라야 묵묵히 앎이 있으니

다만 듣고 보아서 알 뿐만이 아니라.
이는 모두가 지극한 성실함과 망령됨이 없는 자연의 공용이니

무릇 어찌 물건에 의착한(기대고 붙은) 바가 있은 뒤에야 능하겠는가!

契 : 알 계, 묶을 계


준준其仁이며 淵淵其淵이며 浩浩其天이니라.
준준기인이며 연연기연이며 호호기천이니라.

 

간곡하고 간곡한 그 어짊이며, 깊고 깊은 그 못이며, 넓고 넓은 그 하늘이니라.

준 : 간곡할 준(순)


준준은 懇至貌니 以經綸而言也오 淵淵은 靜深貌니 以立本而言也오
준준은 간지모니 이경륜이언야오 연연은 정심모니 이립본이언야오

 

浩浩는 廣大貌니 以知化而言也라 其淵其天則非特如之而已라.
호호는 광대모니 이지화이언야라 기연기천즉비특여지이이라. 

 

준준은 간곡하고 지극한 모양이니 경륜으로써 말함이오, 연연은 고요하고 깊은 모양이니 입본으로써 말함이오,
호호는 광대한 모양이니 지화로써 말함이라. 그 못이며 그 하늘이면 특별히 이와 같을 뿐만이 아니라.


[앞주 해설]

다시 말해 준준은 ‘爲能經綸天下之大經’을 말하는 것이고,

淵淵은 ‘立天下之大本’을 말하며, 浩浩는 ‘知天地之化育’을 말한다.
그러한 연못과 하늘이기에 한정지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위와 같이 표현할 수 있을 뿐이지 이보다 더 무한한 초월적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면 其孰能知之리오.
구불고총명성지달천덕자면 기숙능지지리오.

 

진실로 진짓 총명하고 성스럽고 지혜로와서 하늘의 덕에 통달한 자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알리오!

固 : 진짓 고, 실제 고


固는 猶實也라 鄭氏曰 唯聖人이아 能知聖人也라.
고는 유실야라 정씨왈 유성인이아 능지성인야라.

 

고는 실제와 같음이라. 정씨(鄭玄)가 말하기를 오직 성인이라야 능히 성인을 앎이라.

 

右는 第三十二章이라

 

承上章而言大德之敦化하니 亦天道也라 前章은 言至聖之德하고 此章은 言至誠之道이라
승상장이언대덕지돈화하니 역천도야라 전장은 언지성지덕하고 차장은 언지성지도이라

 

然이나 至誠之道는 非至聖이면 不能知오 至聖之德은 非至誠이면 不能爲니 則亦非二物矣라
연이나 지성지도는 비지성이면 불능지오 지성지덕은 비지성이면 불능위니 즉역비이물의라  

 

此篇은 言聖人天道之極致이 至此而無以加矣니라.
차편은 언성인천도지극치이 지차이무이가의니라.

 

윗장을 이어 대덕의 돈화를 말함이라.
앞 장(제31장)에서는 지극한 성인의 덕을 말하고, 이 장에서는 지극한 정성의 도를 말함이라.
그러나 지극히 성실한 도는 지극한 성인이 아니면 능히 알지 못함이오,
지극한 성인의 덕은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하니 곧 또한 두 가지 물건이 아니라.
이 편은 성인의 천도의 극치를 말함이니 이에 이르름에 더할 것이 없느니라.

중용 제31장 총명예지장(聰明睿知章)

 

 

唯天下至聖이아 爲能聰明睿知이 足以有臨也이니 寬裕溫柔이 足以有容也이며
유천하지성이아 위능총명예지이 족이유림야이니 관유온유이 족이유용야이며

 

發强剛毅이 足以有執也이며 齊莊中正이 足以有敬也이며 文理密察이 足以有別也이니라.
발강강의이 족이유집야이며 제장중정이 족이유경야이며 문리밀찰이 족이유별야이니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어야 능히 총명하고 예지함이 족히 써 군림함이 있나니,
너그럽고 넉넉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움이 족히 써 용납함이 있으며,
펼치고 강하고 강함과 굳셈이 족히 써 잡음(고집스러움)이 있으며,
재계하고 씩씩하고 중정함이 족히 써 공경함이 있으며 문이 있고 조리있고 치밀하고 살핌이

족히 써 분별함이 있느니라.


聰明睿知는 生知之質이라 臨은 謂居上而臨下也라 其下四者는 乃仁義禮智之德이라
총명예지는 생지지질이라 임은 위거상이림하야라 기하사자는 내인의예지지덕이라

 

文은 文章也오 理는 條理也오 密은 詳細也오 察은 明辨也라.
문은 문장야오 이는 조리야오 밀은 상세야오 찰은 명변야라.


총명예지는 나서부터 아는 바탕이다.
임은 위에 거하여 아래로 군림함을 이름이라.
그 아래 네 가지는 인의예지의 덕이라.
文은 문장이오 理는 조리이며, 密은 상세함이요, 察은 밝게 분별함이라.


[앞주 해설]

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生而知之이다.
오직 지극한 성인이어야 백성들 위에 군림해서 백성들을 잘 다스릴 있는데 그 바탕은 ‘聰明睿知’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 본문에서 언급한 ‘聰明睿知’는 오행으로 말하면 가운데 중앙 土에 해당하는 ‘信’이고,
‘寬裕溫柔’는 동방 木인 ‘仁’이며, ‘發强剛毅’는 서방 金인 ‘義’이며,
‘齊莊中正’은 남방 火인 ‘禮’이며, ‘文理密察’은 북방 水인 ‘智’에 해당한다.

溥博淵泉하야 而時出之니라.
보박연천하야 이시출지니라.

 

크고 넓고 깊고 깊어서 때로 나오니라.

溥 : 클 부, 넓을 부


溥博은 周편而廣闊也오 淵泉은 靜深而有本也라 出은 發見也라 言五者之德이 充積於中而以時發見於外也라.
 보박은 주편이광활야오 연천은 정심이유본야라 출은 발현야라 언오자지덕이 충적어중이이시발현어외야라. 

 

부박은 주변이 광활함이요 연천은 고요하고 깊어서 근본이 있음이라. 출은 밖으로 나타남이라.
다섯 가지의 덕이 중심에 충적되어 때로써 밖에 발현함이라.

편: 두루 편


[앞주 해설]

『대학』에 “誠於中이면 形於外라(마음 속에 정성을 다하면 밖으로 나타나니라)” 하였듯이
위의 다섯 가지 덕이 ‘溥博淵泉’으로 마음 속에 채워지고 쌓이면 때로 밖으로 발현된다.
이것이 바로 천하의 至誠이 되는 것이다.

 


溥博은 如天하고 淵泉은 如淵이라 見而民莫不敬하며 言而民莫不信하며 行而民莫不說이니라. 
보박은 여천하고 연천은 여연이라 현이민막불경하며 언이민막불신하며 행이민막불설이니라. 

 

부박은 하늘과 같고, 연천은 못과 같음이라.
나타남에 백성이 공경하지 않음이 없으며, 말함에 백성이 믿지 않음이 없으며,

행함에 백성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言其充積이 極其盛而發見이 當其可也라
언기충적이 극기성이발현이 당기가야라.

 

그 충적함이 지극히 성하고 발현함이 그 가함에 마땅함을 말함이라.

 


是以로 聲名이 洋溢乎中國하야 施及蠻貊하야 舟車所至와
시이로 성명이 양일호중국하야 이급만맥하야 주차소지와

 

人力所通과 天之所覆와 地之所載와 日月所照와 霜露所隊애
인력소통과 천지소부와 지지소재와 일월소조와 상로소추애

 

凡有血氣者 莫不尊親하니 故로 曰配天이니라.
범유형기자 막불존친하니 고로 왈배천이니라.

 

이로써 성명(소리와 이름)이 나라 가운데 넘치고 넘쳐서 변방의 땅까지 뻗쳐서 배와 수레가 이르는 바와
인력이 통하는 바와 하늘이 덮은 바와 땅이 싣는 바와 해와 달이 비치는 바와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에 무릇 혈기가 있는 자들이, 높이고 친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가로되 하늘을 짝하느니라.

施: 뻗을 이 貊: 북쪽 오랑캐 맥 隊: 떨어질 추(墜)

 

舟車所至以下는 蓋極言之라 配天은 言其德之所及이 廣大如天也라.
주거소지이하는 개극언지라 배천은 언기덕지소급이 광대여천야라.

 

‘주거소지’ 이하는 대개 지극히 말한 것이라. ‘배천’은 그 덕의 이르는 바가 넓고 커서 하늘과 같음을 말함이라.


[앞주 해설]

『주역』건괘 문언전에서 “대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한다(夫大人者는 與天地合其德하며.......)”고 하였듯이
오직 성인이어야 지극한 정성이 있기에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되고 천지와 같이 참여하는 경지가 된다.

 

右는 第三十一章이라

 

承上章而言小德之川流하니 亦天道也라.
승상장이언소덕지천류하니 역천도야라.

 

윗장을 이어서 소덕의 천류를 말했으니 또한 천도이라.

 

[앞주 해설]

천도의 운행이 自彊不息하듯, 쉴 새 없이 흐르는 냇물과 같은 소덕 또한 주자는 천도의 이치로 보았다.

중용 제30장 중니조술장(仲尼祖述章)

 

1.
仲尼는 祖述堯舜하시고 憲章文武하시며 上律天時하시고 下襲水土하시니라.
중니는 조술요순하시고 헌장문무하시며 상률천시하시고 하습수토하시니라.

 

중니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할아버지로 지으시고 문왕과 무왕을 법으로 문장하시며
위로는 하늘의 때를 법으로 삼으시고, 아래는 수토를 익히시니라.

尼: 가까울 니, 중 니 襲: 익힐 습

 

[본문 해설]

子思가 할아버지 공자(字는 중니)에 대해서 쓴 글이다.
중니께서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祖宗으로 삼아 전술하시고,
문왕과 무왕의 모든 행적을 법으로 삼았으며, 위로는 天文, 곧 천도의 운행법칙을 법으로 삼고,
아래로는 地理, 곧 물이 흐르고 땅에서 모든 동식물이 나오는 수토를 익히고 또 익히셨다고 하였다.

주역의 관점에서 자사가 쓴 글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공자는 『주역』계사하전 제2장에서 조종을 복희씨에 두고 그 뒤를 신농씨와 황제,
요, 순으로 이어짐을 밝히고 있다.
참고로 역의 祖宗이 되는 복희씨가 대자연의 근본 이치를 담은 팔괘를 지은 것에 대해
공자가 서술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애 仰則觀象於天하고 俯則觀法於地하며 
"고자포희씨지왕천하야애 앙즉관상어천하고 부즉관법어지하며

 

觀鳥獸之文과 與地之宜하며 近取諸身하고 遠取諸物하야 
간조수지문과 여지지의하며 근취제신하고 원취제물하야 

 

於是애 始作八卦하야 以通神明之德하야 以類萬物之情하니......
어시애 시작팔괘하야 이통신명지덕하야 이류만물지정하니......

 

“(옛적 포희씨가 천하에 왕이 되었을 때에 우러러서는 하늘의 형상을 보고 구부려서는 땅의 법을 보며,
새와 짐승의 무늬와 땅의 마땅함을 보며, 가까이로는 저 몸에서 취하고 멀리로는 저 물건에서 취하여,
이에 비로소(처음) 팔괘를 지음으로써 신명의 덕을 통하여 만물의 실정이 같이하니(분류하니))”

 
祖述者는 遠宗其道요 憲章者는 近守其法이오 律天時者는 法其自然之運이오
조술자는 원종기도요 헌장자는 근수기법이요 율천시자는 법기자연지운이오

 

襲水土者는 因其一定之理니 皆兼內外該本末而言也라.
습수토자는 인기일정지리니 개겸내외해본말이언야라.


할아버지로 짓는다는 것은 멀리 그 도를 祖宗으로 삼는다는 것이요,
헌장이라는 것은 가까이 그 법을 지킴이오,
천시를 법도로 삼는다는 것은 그 자연의 운행을 법으로 삼는다는 것이오,
수토를 익힌다는 것은 그 일정한 이치를 인함이니 안과 바깥을 겸하고 근본과 끝을 포함해서 다 말함이라.

該 : 포함할 해, 다 해

 

[앞주 해설]

내외 본말을 다 겸하고 포함해서 공자 도의 기상을 말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祖述堯舜’이 本이고 內的이라면, ‘憲章文武’는 末이고 外的이다.
또한 ‘上律天時’가 本이고 內的이라면, ‘下襲水土’는 末이며 外的이다.


2.
비如天地之無不持載하며 無不覆도하며 비如四時之錯行하며 如日月之代明이니라.
비여천지지무불특재하며 무불부도하며 비여사시지착행하며 여일월지대명이니라.
 

비유컨대 천지가 가져 싣지 않음이 없으며, 덮고 덮지 않음이 없으며,
비유컨대 사시가 섞여 운행하는 것과 같으며, 일월이 번갈아 밝히는 것과 같으니라.

비: 비유할 비(譬). 도: 덮을 도

 
錯은 猶迭也라 此는 言聖人之德이라.
착은 유질야라 차는 인성인지덕이라.

 

착은 갈마듦(번갈아 함)과 같으니라. 이는 성인의 덕을 말함이라.

迭 : 갈마들 질

 

 3.
萬物이 병育而不相害하며 道병行而不相悖라 小德은 川流오
만물이 병육이불상해하며 도병행이불상패라 소덕은 천류오

 

 大德은 敦化니 此天地之所以爲大也니라.
대덕은 돈야니 천지지지소이위대야니라.

 

만물이 아울러 기르되 서로 해하지 아니하며 도가 아울러 행하되 서로 거스르지 않느니라.
작은 덕은 냇물이 흐름이요, 큰 덕은 돈독히 화함이니, 이는 천지가 써 큼이 되는 바이니라.


悖는 猶背也라 天覆地載하야 萬物이 병育於其間而不相害하며
패는 유배야라 천부지재하야 만물이 병육어기간이불상해하며

 

四時日月이 錯行代明而不相悖하니 所以不害不悖者는 小德之川流오
사시일월이 착행대명이불상패하니 소이불해불패자는 소덕지천류오

 

所以병育병行者는 大德之敦化라 小德者는 全體之分이오
소이병육병행자는 대덕지돈화라 소덕자는 전체지분이오

 

大德者는 萬殊之本이오 川流者는 如川之流니
대덕자는 만수지본이오 천류자는 여천지류니

 

맥絡이 分明而往不息也오 敦化者는 敦厚其化니 根本이 盛大而出無窮也라
맥락이 분명이왕불식야오 돈화자는 돈후기화니 근본이 성대어출무궁야라

 

此는 言天地之道하야 以見上文取譬之意也라.
차는 언천지지도하야 이현상장취벽지의야라.

 

패는 등짐과 같으니라.
하늘은 덮고 땅은 실어서 만물이 아울러 그 사이에 길러져 서로 해하지 아니하며
사시와 일월이 번갈아 운행하며 번갈아 밝으며 서로 거스르지 아니하니,
써한 바 해치지도 않고 거스르지도 않는 것은 소덕의 내가 흐르는 것이오,
써한 바 아울러 길러지고 아울러 행한다는 것은 대덕의 돈화라.
소덕이라는 것은 전체의 나뉨이요, 대덕이라는 것은 만 가지 다름의 근본이요,
천류라는 것은 냇물의 흐름과 같으니 맥락이 분명하고 감이 쉬지 않음이오,
돈화라는 것은 돈독하고 후중하게 그 화함이니 근본이 성대하여 나옴이 궁함이 없는 것이라.
이것은 천지의 도를 말하여 써 윗글에 비유를 취한 뜻을 밝혀놓는 것이라.


[앞주 해설]

소덕과 대덕을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서로 해하지 않고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은 소덕으로 이를 냇물의 흐름인 川流에 비유했다.
천자문에 보면 ‘川流不息(냇물은 흘러 쉬지 않는다)’이 있고,
『논어』자한편(子罕篇)에는 “子在川上曰 逝者ㅣ 如斯夫인저 不舍晝夜로다
(공자께서 시냇가에 계시면서 말씀하시길,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도다’)”라고 하여
천지조화의 끊임없는 이치를 시냇물에 비유하고 있다.
또한 노자의 『道德經』제8장에서는 “上善은 若水하니 水善利萬物而不爭하야 處衆人之所惡하나니 故로 幾於道矣니라
(최상의 선은 물과 같으니, 물의 훌륭한 점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뭇 사람이 싫어하는 바에 거처하나니,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까우니라)”고 하였다.


한편 천지가 자연히 모든 만물을 아울러 기르고 일월성신을 아울러 운행하는 것은
마치 천류가 모여 큰 바다로 모두 모이듯이 대덕의 敦化라 하였다.

 

右는 第三十章이라

 

言天道也라

천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29장 왕천하장(王天下章)

 

1.
王天下 有三重焉이니 其寡過矣乎인뎌
왕천하 유삼중언이니 기과과의호인뎌

 

천하를 왕 함이 세 가지 중요함이 있으니 그 허물이 적을진저!

 

[본문 해설]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림에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를 잘 지켜나간다면 왕으로서 허물이 적을 것이다.

 
呂氏曰 三重은 謂議禮制度考文이니 惟天子라야 得以行之
여씨왈 삼중은 위의례제도고문이니 유천자라야 득이행지

 

則國不異政하고 家不殊俗而人得寡過矣리라.
즉국불이정하고 가불수속이인득과과의리라.

 

여씨 말하기를 세 가지 중요하다는 것은 의례(예를 의논), 제도(법도를 지음),
고문(글을 상고함)이니, 오직 천자라야 얻어서 써 행하게 되면 나라의 정사가 다르지 않을 것이고,
집집마다 풍속이 다르지 않아 사람이 얻어 허물이 적을 것이리라.

 

2.
上焉者는 雖善이나 無徵이니 無徵이라 不信이오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상언자는 수선이나 무징이니 무징이라 불신이오 불신이라 민불종이니라

 

 下焉者는 雖善이나 不尊이니 不尊이라 不信이오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하언자는 수선이나 불존이니 불존이라 불신이오 불신이라 민불종이니라.


위인 자는 비록 선하나 징험이 없으니,
증험이 없음이라 믿지 않음이오, 믿지 않음이라 백성이 따르지 않느니라.
아래인 자는 비록 선하나 높지 아니하니, 높지 않음이라 믿지 않음이오,
믿지 않음이라 백성이 따르지 않느니라.

 
上焉者는 謂時王以前이니 如夏商之禮 雖善而皆不可考오
상언자는 위시왕이전이니 여하상지례 수선이개불가고오

 

下焉者는 謂聖人在下하니 如孔子 雖善於禮나 而不在尊位也라.
하언자는 위성인재하하니 여공자 수선어례나 이불재존위야라.

 

위인 자는 당시 왕 이전을 이름이니,
하나라와 상나라의 예가 비록 선하나 모두 가히 상고할 수 없음과 같고,
아래인 자는 성인이 아래에 있음을 이름이니,
공자와 같이 비록 예에 선하나 높은 자리에 있지 못함과 같음이라.

 
3.
故로 君子之道는 本諸身하야 徵諸庶民하며 考諸三王而不謬하며
고로 군자지도는 본제신하야 징제서민하여 고제삼왕이불류하며

 

 建諸天地而不悖하며 質諸鬼神而無疑하며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이니라.
 건제천지이불패하며 질제귀신이무의하며 백세이사성인이불혹이니라.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몸에 근본하여 서민을 고증하며,
삼왕(夏 殷 周)을 고증하여 어긋나지 아니하며, 저 천지를 세워도 거슬리지 않으며,
저 귀신에게 질정을 해도 의심이 없으며, 백세(3천년)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느니라.

 

[본문 해설]

『주역』 풍지관(風地觀)괘에 九五효에 “觀我生호대 君子면 无咎리라
(나의 생김새를 보되 군자면 허물이 없으리라)”하였고,
그 爻象傳에 “象曰 觀我生은 觀民也라
(나의 생김새를 본다는 것은 백성을 봄이라)” 하였듯이
왕이 되어 나의 업적을 보려면 바로 백성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백성이 잘살면 내가 군자로써 나타나는 것이고, 백성이 못살면 내가 소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군자의 도는 내 몸을 근본으로 삼아 백성들에게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 고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 은 주 삼대의 왕을 고증해서도 어긋나지 않고, 與天地合其德하듯 저 천지에 세워도 거슬리지 않고,
저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심이 없으며,
아주 먼 훗날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 만세의 귀감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此君子는 指王天下者而言이라 其道는 則議禮制度考文之事也라
차군자는 지왕천하자이언이라 기도는 즉의예제도고문지사야라

 

本諸身은 有其德也오 徵諸庶民은 驗其所信從也라 建은 立也니 立於此而參於彼也라
본제신은 유기덕야오 징제서민은 험기소신종야라 건은 입야니 입어차이참어피야라

 

天地者는 道也오 鬼神者는 造化之迹也라
천지자는 도야오 귀신자는 조화지적야라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은 所謂聖人復起사도 不易吾言者也라.
백세이사성인이불혹은 소위성이부기사도 불역오언자야라. 

 

이 군자는 왕천하하는 이를 가르켜 말함이라.
그 도는 곧 의례, 제도, 고문의 일이라.
자신에게 근본한다는 것은 그 덕이 있음이오, 저 서민에게 고증한다는 것은 믿고 따르는 바를 증험함이라.
건은 세움이니 여기에 세워놓고 저기에 참여함이라. 천지라는 것은 도요, 귀신이라는 것은 조화의 자취라.
백세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른바 ‘성인이 다시 일어나신다 해도 내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란 것이라.

 
[앞주 해설]

여기의 군자는 학덕이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천하를 다스리는 왕을 말한다.
그러한 군자의 도는 의례, 제도, 고문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근본한다는 ‘本諸身’은 먼저 내 몸에 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徵諸庶民’은 백성을 보는 것이 곧 나를 보는 것과 같이 백성이 믿고 따르는 바로 시험해보는 것이다.

‘건’은 천지를 세운다는 것이 아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의례, 제도, 고문을 확립해 놓고,
이것을 천지 사이에 잘 펼쳐서 여기저기 모두에 영향을 미쳐 모두 이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천지라는 것을 도를 말하는 것으로 천지에 세운다는 것은 곧 도를 세운다는 뜻이다.

귀신이라는 것은 조화의 자취로, 낮이 밤으로 바뀌고, 밤이 낮으로 바뀌며 하루가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춘하추동 사시가 바뀜과 같이
사람이 모르는 가운데 변화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화의 자취라고 한다.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은 ‘聖人復起사도 不易吾言’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맹자』공손추장구상(公孫丑章句上)편에 나오는 말과 같다.
즉 공손추가 ‘知言’을 묻자 맹자가 이에 답하면서 “聖人復起사도 必從吾言矣시리라
(성인이 다시 일어나신다 해도 반드시 내 말을 따르실 것이다)”라는 한 말과 같은 뜻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何謂知言이니잇고 曰 피辭에 知其所蔽하며 淫辭에 知其所陷하며
하위지언이니잇고 왈 피사에 지기소폐하며 음상에 지기소함하여

 

邪辭에 知其所離하며 遁辭에 知其所窮이니 生於其心하야 害於其政하며
사사에 지기소리하며 둔사에 지기소궁이니 생어기심하여 해어기정하며

 

發於其政하야 害於其事하나니 聖人復起사도 必從吾言矣시리라.
발어기정하야 해어기사하나니 성인부기사도 필종오언의시리라.

 

(공손추가 묻기를 “무엇을 지언이라 합니까?”
맹자 말씀하시길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그 빠진 바를 알며,
삿된 말에 그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 그 궁한 바를 아니,
그 마음에서 나와 그 정사에 해를 끼치며, 그 정사에 발하여 그 일에 해를 끼치나니,
성인이 다시 일어나신다 해도 반드시 내 말을 따르실 것이니라”)

 
質諸鬼神而無疑는 知天也오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은 知人也니라.
질제귀신이무의는 지천야오 백세이사성인이불혹은 지인야니라.

 

저 귀신에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음은 하늘을 아는 것이오,
백세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음은 사람을 아는 것이니라.


知天知人은 知其理也니라
지천지인은 지기이야니라.

 

하늘을 알고 사람을 아는 것은 그 이치를 아는 것이라.

 

5.
是故로 君子는 動而世爲天下道니 行而世爲天下法하며 
시고로 군자는 동이세위천하도니 행이세위천하법하며

 

言而世爲天下則이라 遠之則有望이오 近之則不厭이니라.
언이세위천하칙이라 원지즉유망이오 근지즉불염이니라.

 

이런 고로 군자는 동함에 세대로 천하의 도가 되니, 행함에 세대로 천하의 법이 되며,
말함에 세대로 천하의 준칙이 되느니라. 멀면 바라봄이 있고 가까우면 싫지 않느니라.

 

[본문 해설]

귀신에 질정해도 의심이 없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아는 것이고
백세의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됨이 없는 것은 인간세상사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을 알고 사람을 아는 군자가 움직여 활동하면 그 모든 일이 후세 대대로 도가 되니,
그러한 군자가 행하면 천하의 법이 되고,
말 한마디 한마디는 천하의 준칙이 되어 만고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먼 후대로 내려가면, 마치 우리가 공자를 높이 바라보듯 우러러 봄이 있고,
가까이에서 그런 군자를 모시면 조금도 싫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動은 兼言行而言이오 道는 兼法則而言이라 法은 法度也오 則은 準則也라.
동은 겸언행이언이오 도는 겸법즉이언이라 법은 법도야오 칙은 준칙야라.

 

동은 언행을 겸해서 말함이오, 도는 법칙을 겸해서 말함이라. 법은 법도요, 칙은 준칙이라.

 
6.
詩曰 在彼無惡하며 在此無射이라 庶幾夙夜하야 以永終譽라 하니
시왈 재피무오하며 재차무사이라 서기숙야하야 이영종예라 하니

 

君子 未有不如此而蚤有譽於天下者也니라.
군자 미유불여차이조유예어천하자야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저기에 있어도 싫지 아니하며 여기에 있어도 싫지 않느니라.
거의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해서 명예를 길이 마치리라”하니
군자가 이와 같지 않고서 일찍이 천하에 명예를 둔 자는 있지 않느니라.

惡: 미워할 오 射: 싫을 역 蚤: 일찍 조

 
詩는 周頌振鷺之篇이라 射은 厭也이라 所謂此者는 指本諸身以下六事而言이라.
시는 주송진로지편이라 사는 염야이라 소위차자는 지본제신이하유사이언이라. 

 

시는 「주송 진로편」이라. 역(射)은 싫어함이라.
이른바 이것이란 ‘本諸身’ 이하의 여섯 가지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

 
[앞주 해설]

이 여섯 가지는 ‘本諸身’ ‘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을 말한다.

 

右는 第二十九章이라

 


承上章居上不驕而言이니 亦人道也라
승상장거상불교이언이니 역인도야라

 

윗장(제27장)의 ‘위에 거해도 교만하지 않음이라’는 것을 이어서 말함이니, 또한 인도이라.

 

중용 제28장 오종주장(吾從周章)

 

1.
子曰 愚而好自用하며 賤而好自專이오 生乎今之世하야 
자왈 우이호자용하며 천이호자전이오 생호금지세하야 

 

反古之道면 如此者는 재及其身者也니라.
반고지도면 여차자는 재급기신자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어리석고 스스로(제멋대로) 씀을 좋아하며,
천하면서 스스로 오로지 함을 좋아하고,
지금 세상에 나와서 옛적의 일을 돌이키려고 하면 이와 같은 자는 재앙이 그 몸에 미치는 자이니라.

재 : 재앙 재(災)

 

[본문 해설]

자기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그 어리석음을 모르고 제멋대로 제 생각대로 쓰는 것을 좋아하고,
제 자신이 참으로 천하면서도 천한 줄을 모르고 오로지 제 뜻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나왔으면 지금 세상의 법도대로 살아야 함에도 隨時變易을 하지 못하고
옛 것을 고집한다면 그 몸에 재앙이 미치게 된다.

여기서 ‘反古之道’의 ‘道’라는 것은 성인의 도를 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인의 도라면 적극적으로 펴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옛날의 있었던 것,
오늘날에는 버려야 할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공자가 이 말을 한 뜻은 殷나라가 폭정으로 멸망한 뒤
새로 일어난 周나라가 紂의 폭정을 답습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以上은 孔子之言을 子思 引之反復也이라.
이상은 공자지언을 자사 인지반복야이라.

 

이상은 공자의 말씀을 자사가 반복하여 인용하심이라.

 

2.
非天子면 不議禮하며 不制度하며 不考文이니라.
비천자면 불의예하며 불제도하며 불고문이니라.

 

천자가 아니면 예를 의논하지 못하며 법도를 짓지 못하며 글을 상고하지 못하느니라.


此以下는 子思之言이라 禮는 親疎貴賤이 相接之禮也라 度는 品制오 文은 書名이라.
차이하는 자사지언이라 예는 친소귀천이 상접지례야라 도는 품제오 문은 서명이라.


이로써 아래는 자사의 말씀이라.
예는 친한 사람, 소원한 사람, 귀한 사람, 천한 사람이 서로 접하는 예이니라.
법도는 품제(물품을 마름하는 것)요, 문은 글 이름이라.

 

3.
今天下 車同軌하며 書同文하며 行同倫이니라.
금천하 거동궤하며 서동문하며 행동륜이니라.

 

이제 천하가 수레는 바퀴가 같으며, 책에는 글이 같으며, 행실에는 윤리가 같으니라.

車: 수레 거 軌: 바퀴 궤

 

今은 子思自謂當時也라 軌는 轍迹之度오
 금은 자사자위당시야라 궤는 철적지도오 

 

倫은 次序之體오 三者皆同은 言天下一統也라.
륜은 차서지례오 삼자개동은 언천하지통야라.

 

이제는 자사가 스스로 당시를 이름이라.
궤는 수레바퀴 자취의 법도요,
윤은 차서(질서)의 체이니 세 가지가 다 같다는 것은 천하가 하나로 통합된 것을 말함이라.

轍 : 수레바퀴 철
 

4.
雖有其位나 苟無其德이면 不敢作禮樂焉이며 雖有其德이나
수유기위나 구무기덕이면 불감작에악언이며 수유기덕이나

 

苟無其位면 亦不敢作禮樂焉이니라.
구무기위면 역불감작예악언이니라.

 

비록 그 위가 있으나 진실로 그 덕이 없으면 감히 예악을 짓지 못하며,
비록 그 덕이 있으나 진실로 그 위가 없으면 또한 감히 예악을 짓지 못하느니라.

 

[본문 해설]

사람에게 행동규범의 禮와 흥을 푸는 樂이 없으면 금수(禽獸)나 다를 바 없다.
곧 예악은 사람이 사는 생명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예악을 아무나 짓는 것은 아니다.
천자라고 하여도 그 덕이 없으면 오히려 예악을 흩트리고,
位도 없으면서 덕이 있다고 예악을 짓는다면 그 권위가 서지 않아 아무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요임금이나 순임금처럼 그 位와 德을 갖춘 성군만이 예악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이다.

 
鄭氏曰 言作禮樂者는 必聖人이 在天下之位라
정씨왈 언작예악자는 필성인이 재천하지위라.

 

정씨(鄭玄) 말하기를, 예악을 짓는 자는 반드시 성인이 천자의 자리에 있어야 함을 말함이라.

 
5.
子曰 吾說夏禮나 杞不足徵也오 吾學殷禮호니 有宋이 存焉이어니와
자왈 오설하례나 기부족징야오 오학은례호니 유송이 존언이어니와

 

吾學周禮호니 今用之라 吾從周호리라.
오학주례호니 금용지라 오종주호리라.

 

공자 가라사대 내가 하나라 예를 설명하나 기나라가 족히 증거를 대지 못하고
내가 은나라 예를 배우니 송나라가 존하거니와 내가 주나라 예를 배우니 이제 이것을 쓰노라.
나는 주나라를 따르리라.

杞 : 나라이름 기, 버드나무 기

 
[본문 해설]

성인으로서의 덕은 있지만 천자의 자리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예악을 짓지 아니하고
주례를 따른 공자의 지극한 겸양의 도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위 글은 고대 중국에 하나라와 은나라, 주나라의 예가 있는데,
공자께서 그 가운데 周禮를 따르는 이유를 말씀하신 내용이다.

 
하나라의 예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라를 뒤이은 杞나라가 夏禮에 대해 증거를 대지 못하며,
은나라의 경우 말기에 紂王의 폭정으로 比干이 죽음을 당하고,
箕子는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살아남고, 微子는 神主를 훔쳐 도망가 송나라를 세우고 시조가 되었지만
殷禮에 대해 충분히 증거를 대주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논어』팔일편(八佾篇)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子曰 夏禮를 吾能言之나 杞不足徵也며 殷禮를 吾能言之나

宋不足徵也는 文獻不足故也니 足則吾能徵之矣로리라

(하나라의 예를 매가 말할 수 있으나 기나라에서 충분한 증거를 대주지 못하며,
은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송나라에서 충분히 증거를 대주지 못함은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충분하다면 내가 증거를 댈 수 있으리라.)”

 
此는 又引孔子之言이라 杞는 夏之後라 徵은 證也라 宋은 殷之後라
차는 우인공자지언이라 기는 하지후라 징은 증야라 송은 은지후라

 

三代之禮를 孔子 皆嘗學之하야 而能言其意로되
삼대지례를 공자 개상학지하야 이능언기의로되

 

但夏禮는 旣不可考證이오 殷禮雖存이나 又非當世之法이오
단하례는 기불가고증이오 은례수존이나 우비당세지법이오

 

惟周禮는 乃時王之制니 今日所用이라 孔子 旣不得位시니 則從周而已시니라.
유주례는 내시왕지제니 금일소용이라 공자 기부득위시니 즉종주이이시니라.
 

이는 또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함이라. 기나라는 하나라의 후예라.
징은 증거이라. 송은 은나라의 후손이라.
삼대의 예를 공자께서 모두 일찍이 배워 능히 그 뜻을 말씀할 수 있으나.
다만 하나라의 예는 이미 가히 고증할 수 없고,
은나라의 예는 비록 남아 있으나 또 당세의 법이 아니오,
오직 주나라의 예는 바로 당시 왕의 제도이니 오늘날 쓰는 바이라.
공자께서 이미 지위를 얻지 못하셨으니 주나라를 따를 뿐이시니라.


[본문 해설]

참고로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기우(杞憂)’라고 하는데
杞나라에서 누군가 하늘이 무너진다고 소문을 내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걱정 근심에 쌓인 데서 비롯된 말이다.

 

右는 第二十八章이라

 

承上章爲下不倍而言이니 亦人道也이라.
승상장위하불패이언이니 역인도야니라.

윗장의 ‘위하불패’를 이어서 또한 사람의 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27장 존덕성장(尊德性章)

 

1.
大哉라 聖人之道여
대재라 성인지도여

 

크도다, 성인의 도여!

 
包下文兩節而言이라.
포하문양정이언이라.

 

아래 글 두 구절을 싸서(함축하여) 말함이라.


2.
洋洋乎發育萬物하야 峻極于天이로다.
양양호발육만물하야 준극우천이로다.

 

넘실넘실 만물을 발육하여 하늘의 높음이 닿았도다.

洋 : 넘심넘실할 양

 
峻은 高大也라 此는 言道之極於至大而無外也라.
준은 고대야라 차는 언도지극어지대이무외야라.

 

준은 높고 큼이라. 이것은 도가 지극히 큰 데 다하여 밖이 없음을 말함이라.

 

[앞주 해설]

‘至大而無外 至小而無間’이다.
작다면 작은 것이 끝나지 않고 크다면 큰 것이 끝나지 않으니 그 內外가 없는 것이다.
큰 도라는 것은 지극한 데까지 극해서 안과 바깥의 한계가 없다는 말이다.


3.
優優大哉라 禮義三百과 威儀三千이로다.
우우대재라 예의삼백과 위의삼천이로다.

 

넉넉하고 넉넉해서 크도다. 예의는 삼백편이요 위의는 삼천편이로다.


[본문 해설]

성인이 지으신 『예기』를 보면 사람이란 짐승과 다르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야 하므로 예의와 위의가 있어야 하기에,
예의는 삼백편이나 되고 위의는 삼천 편이나 된다는 말이다.

 
優優는 充足有餘之意라 禮儀는 經禮也오 威儀는 曲禮也라
우우는 충족유여지의라 예의는 경예야오 위의는 곡례야라

 

此는 言道之入於至小而無間也라.
차는 언도지입어지소이무간야라.

 

우우는 충족하여 남음이 있는 뜻이라.
예의는 경례(법도의 예)요, 위의는 곡례라.
이것은 도가 지극히 작은 데까지 들어가 틈이 없음을 말함이라.


[앞주 해설]

앞 문장에서 양양은 바깥이 없음을 말한 반면 이곳에서는 남음을 얘기하고 있다.
성인의 도가 큰 데에 이르러서는 한없이 커서 내외가 없고,
작은 데 미쳐서는 한없이 작아 틈이 없음을 대비하여 말하는 것이다.
『예기』에 보면 ‘예의’와 ‘곡례’가 있다.
‘예의’는 經禮로 법도가 되는 큰 예이고, 이것이 줄기라면, ‘위의’는 곡례로 가지가 되는 작은 예를 말한다.
이러한 줄기가 되는 예의가 3백편이고, 가지가 되는 곡례는 3천편이 되는
도가 지극히 작은 데까지 들어가서 틈이 없다는 것이다.
앞 문장의 ‘至大而無外’는 외적인 것을 말하고 ‘至小而無間’은 내적인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는 아무나 행하는 것이 아니다.
주역 계사하전 제8장에서 “苟非其人이면 道不虛行하나니라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도가 헛되이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듯이
모든 것은 진실로 도를 펼 수 있는 성인만이 가능한 일이다.

 
4.
待其人而後에 行이니라.
대기인이후에 행이니라.

 

그 사람을 기다린 뒤에 행하느니라.

 
總結上兩節이라.

총결상양절이라.

 

위의 두 마디를 다 맺음이라.

 
5.
故로 曰苟不至德이면 至道 不凝焉이라 하니라.
고로 왈구부지덕이면 지덕 불응언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진실로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엉겨지지 않느니라.” 하니라

 
至德은 謂其人이오 至道는 指上兩節而言이라 凝은 聚也며 成也라.
지덕은 위기인이오 지도는 지상량절이언이라 응은 취야며 성야라.

 

지극한 덕은 그 사람을 말함이오, 지극한 도는 위 두 마디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응은 모임이며 이룸이라.

 
[앞주 해설]

지덕은 “待其人而後에 行이니라”에서 ‘其人’을 말하는 것이고,
지도는 “洋洋乎發育萬物하야 峻極于天이로다”와
“優優大哉라 禮儀三百과 威儀三千이로다”의 두 마디를 가리켜 한 말이다.

 
6.
 故로 君子는 尊德性而道問學이니 致廣大而盡精微하며
고로 군자는 존덕성이도문학이니 치광대이진정미하며

 

極高明而道中庸하며 溫故而知新하며 敦厚以崇禮니라.

극고명이도중용하며 온고이지신하며 돈후이숭례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니, 광대함을 이르고 정미함을 다하며,
고명함을 다하고 중용을 이르며,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며,
두터움을 돈독히 하고 써 예를 숭상하느니라.

 

[본문 해설]

군자는 지극한 도가 엉기는 사람이다.
그러한 군자는 하느님으로부터 타고난 선한 본성인 덕성을 높이고 밖으로 학문적인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 광대함을 이루게 되고 깨끗하고 은미한 데까지도 다하게 된다.
‘致廣大’는 ‘洋洋乎發育萬物’의 외적인 것이고(至大),
‘盡精微’는 ‘禮儀三百 威儀三千’의 내적인 것이다(至小).
또한 높고 밝음을 다하고서 중용지도를 말해야 하고,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며,
두터움을 돈독히 해서 예절을 숭상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윗 글에서 尊德性, 致廣大, 極高明, 溫故는 내적인 체가 되고,
道問學, 盡精微, 道中庸, 知新은 외적인 용이 되는 관계이다.
이 체와 용이 표리가 되어 ‘敦厚以崇禮’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尊者는 恭敬奉持之意라 德性者는 吾所受於天之正理라 
존자는 공경봉지지의라 덕성자는 오소수어천지정리라 

 

道는 由也라 溫은 猶심溫之溫이니 謂故學之意니 復時習之也라
도는 유야라 온은 유심온지온이니 위고학지의니 복시습지야라

 

敦은 加厚也라 尊德性은 所以存心而極乎道體之大也오
돈은 가후야라 존덕성은 소이존심이극호도체지대야오

 

道問學은 所以致知而盡乎道體之細也라 二者는 修德凝道之大端也라
도문학은 소이치지이지호도체지세야라 삼자는 수덕응도지대단야라

 

不以一毫私意自蔽하며 不以一毫私欲自累하여 涵泳乎其所已知하며
불이일호사의자폐하며 불이일호사욕자루하여 함영호기소이지하며

 

敦篤乎其所已能이니 此皆存心之屬也라
돈독호기소이능이니 차개존심지속야라

 

析理則不使有毫釐之差요 處事則不使有過不及之謬요
석리즉불사유소리지차요 처사즉불사유과불급지류요 

 

理義則日知其所未知요 節文則日謹其所未謹이니 此皆致知屬也라
이의즉일지기소미지요 절문즉일근기소미근이니 차개치지속야라

 

蓋非存心이면 無以致知오 而存心者 又不可以不致知라
개비존심이면 무이치지오 이존심자 우불가이불치지라

 

故로 此五句는 大小相資하고 首尾相應하야 聖賢所示入德
고로 차오구는 대소상자하고 수미상응하야 성현소시입덕

 

聖賢所示入德之方이 莫詳於此하니 學者 宜盡心焉이니라.
성현소시입덕지방이 막상어차하니 학자 선진심언이니라.

 

높힌다는 것은 공경하고 봉지한다는(받들어 갖는다는) 뜻이라.
덕성이라는 것은 내가 하늘에게서 받은 바 바른 이치이니라.
도는 말미암음(연유)이라. 온은 심온(불을 때서 따뜻하게 익힌다)의 온과 같으니
옛 것을 배우고 다시 때로 익힘을 말함이라. 돈은 더욱 두터움이라.
덕성을 높인다는 것은 써 마음을 존해서 도체의 큰 데에 다하는 것이오,
문학을 이룬다는 것은 써 앎을 이루어 도체의 세밀한 데까지 다함이니라.
이 두 가지는 덕을 닦고 도를 엉기는 큰 단서이라.
한 터럭 사사로운 뜻으로 스스로 가리지 아니하며
한 터럭 사사로운 욕심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해서
그 이미 아는 바를 무젖게 하며 그 이미 할 수 있는 바에 돈독해야 하니
이는 모두가 마음을 존한다는 등속이라.
이치를 분석하면 터럭 끝 만큼의 차이도 있지 아니하게 하고,
일에 처하게 되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어긋남도 있지 아니하게 하고,
의리를 다스린다고 하면 날마다 그 알지 못하는 바를 알고,
글을 절도있게 한다면 날로 그 삼가지 못하는 바를 삼갈 것이니 이는 다 앎을 이루는 등속이라.
대개 마음을 존하지 아니하면 앎을 이룰 수 없고, 존심한 자는 또 가히 써 치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 다섯 글귀는 큼과 작음이 서로 바탕하고,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응하여 성현이 덕에 들어가는 방법을 보여준 바가 이보다 자세함이 없으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마음을 다할 지어니라.

?: 데울 심 蔽: 가릴 폐 累: 더러울 루 涵: 젖을 함 釐: 털끝 리

 
是故로 居上不驕하며 爲下不倍라 國有道에 其言이 足以興이오
시고로 거상불교하며 위하불패라 국유도에 기언이 족이흥이오

 

國無道에 其묵이 足以容이니 詩曰 旣明且哲하야 
국무도에 기묵이 족이용이니 시왈 기명차철하야 

 

以保其身이라 하니 其此之謂與인뎌
이보기신이라 하니 기차지위여인뎌

 

이런 고로 위에 거해서 교만하지 아니하며, 아래가 되어서 거스리지 않느니라.
나라에 도가 있음에 그 말이 족히 써 일어나고 나라에 도가 없음에 그 묵묵함이 족히 써 용납할지니,
『시경』에 이르기를 그 밝고 또 밝아서 써 그 몸을 보존한다 하니 이것을 이름인저!

倍 : 거스릴 패, 배반할 배

 

[본문 해설]

『中庸』이란 책은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周易』乾卦 九二爻에 대한 文言傳의 해설에서 자사가 취한 내용으로,
君德 즉 군자가 나아가야 할 덕을 밝힌 내용이다.
그러기에 중용에는 주역의 원리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윗 글 내용 또한 『周易』乾卦 九三爻에 대한 文言傳의 해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九三曰 君子終日乾乾夕?若?无咎는 何謂也오
(구삼왈 군자종일건건석척약려무구는 하위야오)

구삼에 이르길 ‘군자종일건건석척약려무구’는 어찌 이름인고?

 

子曰 君子 進德修業하나니 忠信이 所以進德也오
(자왈 군자 진덕수업하나니 충신이 소이진덕야오)

공자 이르길 군자가 덕에 나아가며 업을 닦나니 충성되고 미덥게 함이 덕에 나아가는 바요

 
修辭立其誠이 所以居業也라 (수사입기성이 소이거업야라)

말을 닦고 그 정성을 세움이 업에 거하는 바라

 
知至至之라 可與幾也며 知終終之라 可與存義也니
(지지지지라 가여기야며 지종종지라 가여존의야니)

이를 줄을 알고 이르나니 더불어 기미(조짐)할 수 있으며,
마칠 줄을 알고 마치나니 더불어 의리를 보존할 수 있으니

 
是故로 居上位而不驕하며 在下位而不憂하나니
시고로 거상위이불교하며 재하위이불우하나니

이런 까닭에 높은 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낮은 자리에 있어도 근심하지 아니하나니

 
故로 乾乾하야 因其時而척하면 雖危나 无咎矣리라
고로 건건하야 인기시이척하면 수위나 우구의리라

그러므로 굳세고 굳세게 해서 그 때로 인하여(때에 따라)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하나 허물이 없으리라.

 
참고로 주역의 九三자리는 내괘이면서 양이 양자리에 있어 바른 자리이므로 군자이지만
내괘를 마치고 외괘로 넘어가기 직전이고 지나치게 강하여 위태로운 상태이다.
이때 군자는 진덕수업을 행하여 내적으로는 늘 덕을 행하고 외적으로는 늘 업을 닦는 것이다.


‘충성 忠’은 中心 즉 속마음 그대로 성실한 것을 말하고
‘믿을 信’은 사람이 말한 그대로 행하여 미더운 것을 말한다.
이러한 충과 신에 바탕하여(忠信) 내적인 덕을 행하는 것이고(所以進德也)
밖으로는 늘 말 한마디마다 잘 닦아 헛되게 하지 않고 성실함이 있어(修辭立其誠)
그 정성을 다 바쳐서 업에 거처하는 것이다(所以居業也).

 
그렇게 진덕수업을 했을 때 이를 데를 알아 이르므로(知至至之)
필연코 일의 기미를 알고 일을 시작하게 되며(可與幾也)
또한 마칠 데를 알아 마치는 까닭에(知終終之) 필연코 결실(종결)을 알게 되니(知終終之)
그 결실과 의리를 보존하게 되는 것이다(可與存義也).

 
이렇기 때문에 구삼은 초구의 구이보다 윗자리에 있지만 교만하게 대하지 아니하고(居上位而不驕),
구사와 구오보다 아랫자리에 있지만 그보다 못한 처지를 부러워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다(在下位而不憂).


즉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교만해서는 안 되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명에 따르지 않고 거스르거나 위배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이 두 가지만 가지고도 사람이 왜 학문을 하고, 왜 덕성을 높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나라에 도가 있어 정치가 잘 이루어질 때에는 군자가 하는 말이 인정받아 흥기되고
반면 無道한 세상에서는 바른 말을 하면 잡아가두기 때문에 이런 때는 아무 말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용납될 뿐이다.

 
주역은 明哲保身의 학문이다.
밝음을 밝혀서 자기 몸을 보호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바로 윗글에서 인용한 『시경』의 “旣明且哲 以保其身”의 말이다.
‘明’은 밝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哲’은 입으로 딱딱 끊어서 말하는 것이다.
다 같은 밝음인데 明은 체가 되고 哲은 용이 된다. 그래서 哲學이라고 한다.


興은 謂興起在位也라 詩는 大雅烝民之篇이라.
흥은 위흥기재위야라 시는 대아증민지편이라.

흥은 흥기해서 지위에 있음을 이름이라. 시는 「대아장 증민편」이라.


[앞주 해설]

족히 써 일어난다는 것은 내가 배운 것이 많고 그것을 발표했을 때,
세상이 알아주고 높은 사람들이 끌어올려 벼슬자리에 있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시경』「대아 증민편」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肅肅王命을 仲山甫將之하며 / 엄숙한 왕명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며
(숙숙왕명을 중산보장지하며)

邦國若否를 仲山甫明之로다 / 나라의 좋고 나쁨을 중산보가 밝히도다
(방국약부를 중산보명지로다)

旣明且哲하야 以保其身이며 / 이미 밝고 또 밝아서 그 몸을 보호하며
(기명차철하야 이보기신이며)

夙夜匪解하야 以事一人이로다 /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하니하여 한 사람을 섬기도다
(숙야비해하야 이사일인이로다)

 
右는 第二十七章이라

 

言人道也라

인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26장 지성무식장(至誠無息章)

1.
故로 至誠은 無息이니
고로 지성은 무식이니

 

그러므로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으니

 

[본문 해설]
사람이 본래 타고난 성은 진실무망(眞實无妄)이나 形氣에 의해 가려져 있어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야만 회복할 수 있다.
그 지극한 정성을 기울이려면 천도의 운행이 굳세어 자강불식하듯이 조금도 쉼이 없어야 한다.
주역 중천건(重天乾)괘 대상전에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니, 군자가 이로써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느니라
(天行이 健하니 君子ㅣ 以하야 自彊不息하나니라)”고 했다. 이와 같이 至誠은 조금도 쉼이 없는 것이다.

 

旣無虛假하니 自無間斷이라.
기무허가하니 자무간단이라.

 

이미 헛되고 거짓됨이 없으니 스스로 간단이 없느니라.

 

2.
不息則久하고 久則徵하고
불식즉구하고 구즉정하고

 

쉬지 않으면 오래하고 오래하면 증험하고

 

[본문 해설]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이 오래하고, 오래하면 증험이 나타나는데 오래할 수 있는 이유는 천지의 이치가 쉽기 때문이다.
『주역』 계사상전 제1장에서 천하의 이치가 모두 하늘과 땅의 이간(易簡)의 법칙에 들어 있으니
사람이 그것을 터득해 얻는다면 천지와 더불어 나란히 어깨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乾以易知오 坤以簡能이니 易則易知오 簡則易從이오 易知則有親이오 易從則有功이오

“건이이지오 곤이간능이니 이즉이지오 간즉이종이오 이지즉유친이오 이종즉유공이오

 

有親則可久오 有功則可大오 可久則賢人之德이오 可大則賢人之業이니
유친즉가구오 유공즉가대오 가구즉현인지덕이오 가대즉현인지업이니

 

易簡而天下之理 得矣니 天下之理 得而成位乎其中矣니라.

이간이천하지리 득의니 천하지리 득이성위호기중의니라.


(건은 쉬움으로써 주장하고, 곤은 간단함으로써 능하나니, 쉬우면 주장하기 쉽고,
간단하면 따르기 쉽고, 쉽게 주장하면 친함이 있고, 쉽게 따르면 공이 있고, 친함이 있으면 오래할 수 있고,
공이 있으면 클 수 있고, 오래갈 수 있으면 현인의 덕이요, 클 수 있으면 현인의 업이니,
쉽고 간단함에 천하의 이치를 얻으니, 천하의 이치를 얻음에 위를 그 가운데에 이루느니라)”

 

久는 常於中也이오 徵은 驗於外也이라.
구는 상어중야이오 징은 험어외야이라.

 

구는 가운데 떳떳함이오, 징은 바깥에 증험함이라.

 

[앞주 해설]
구는 내 마음 속에 늘 갖고 있고 지극한 정성 그대로 떳떳한 것을 말한다.
그 떳떳한 것이 오래가면 외적으로 모든 일을 하는데 하나하나가 증험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을 위 본문해설에서 볼 수 있듯이 『주역』에서는 현인의 덕으로 말하고 있다.

 

3.
徵則悠遠하고 悠遠則博厚하고 博厚則高明이니라.
정즉유원하고 유원즉박후하고 박후즉고명이니라.

 

증험하게 되면 아득하게 멀고, 아득하게 멀면 넓고 두텁고, 넓고 두터우면 높고 밝으니라.

 

[본문 해설]
자강불식하기에 오래하고 오래하다 보니 밖으로 증험이 나타난다.
그러면 시간적으로 유원(悠遠)해지고 공간적으로는 박후(博厚)해져

나중에는 시공을 가릴 것 없이 고명(高明)하게 된다.
천지의 고명함 그대로를 닮게 되는 것이다.

 

此는 皆以其驗於外者로 言之니 鄭氏所謂至誠之德이 著於四方者 是也라

차는 개이기험어외자로 언지니 정씨소위지성지덕이 저어사방자 시야라

存諸中者 旣久則驗於外者 益悠遠而無窮矣라

존제중자 기구즉험어외자 익유원이무궁의라


悠遠故로 其積也 廣博而深厚하고 博厚故로 其發也 高大而光明이라.

유원고로 기적야 광박이심후하고 박후고로 기발야 고대이광명이라.


이는 모두 그 밖에서 징험함으로써 말한 것이니 정씨가 이른바 지극한 정성의 덕이 사방에 나타난다는 것이 이것이라.
저 속에 존하는 자는 이미 오래가면 밖에 증험을 하는 것이 더욱 유원하여 끝이 없음이라.
유원하기 때문에 그 쌓인 것이 넓으며 심후하고, 박후하기 때문에 그 발함이 높고 크고 광명함이라.

 

4.
博厚는 所以載物也이오 高明은 所以覆物也이오 悠久는 所以成物也니라.
바후는 소이제물야이오 고명은 소이부물야이오 유구는 소이성물야니라.

 

박후는 물건을 싣는 바요 고명은 물건을 덮는 바요 유구는 물건을 이루는 바이니라.

 

[본문 해설]
천부지재(天覆地載)라는 말처럼 박후는 땅의 덕이고, 고명은 하늘의 덕이며,
유구는 천지의 조화로운 덕으로, 이 모두가 사람에게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悠久는 卽悠遠이니 兼內外而言之也라 本以悠遠으로 致高厚하고
유구는 즉유원이니 겸내외이언지야라 본이유원으로 치고후하고

而高厚 又悠久也니 此는 言聖人이 與天地同用이라.

이고후 우유구야니 차는 언성인이 여천지동용이라.

 

유구는 즉 유원이니 내외를 겸해서 말함이라.
본래 유원으로써 고후해지고 고후가 또 유구해지니 이는 성인이 천지와 더불어 한가지로 씀이라.

 

5.
博厚는 配地하고 高明은 配天하고 悠久는 無疆이니라.
바후는 배지하고 고명은 배천하고 유구는 무강이니라.

 

박후는 땅과 배합되고, 고명은 하늘과 배합되고, 유구는 끝이 없느니라.

 

此는 言聖人이 與天地同體라

차는 언성인이 여천지동체라.

이는 성인이 천지와 더불어 체가 같음이라.

 

6.
如此者는 不見而章하며 不動而變하며 無爲而成이니라.
여차지는 불현이장하며 부동이변하며 무위이성이니라.

 

이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아도 빛나며, 움직이지 않아도 변하며, 함이 없어도 이루어지느니라.

 

[본문 해설]
윗글의 ‘不見而章’은 땅 속의 물건이 보이지 않아도 밖으로 생명체가 나와서 빛나듯이,
땅에 배합하여 말한 것으로
『주역』중지곤(重地坤) 육삼효 상전에 “含章可貞이나 以時發也ㅣ오
(빛남을 머금어 가히 바르게 하나 때로써 발함이라)는 데서 취한 글이다.
천지와 더불어 동체가 되면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與天地合其德),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고(與日月合其明), 사시와 더불어 그 차례를 합하고(與四時合其序),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하며(如鬼神合其吉凶), 빨리 아니 해도 빠르고(不疾而速),
행하지 아니해도 이르는(不行而至) 경지가 되고, 묵묵해도 이루며(?而成之),
말을 아니 해도 믿는(不言而信) 경지가 된다.
이렇게 저절로 빛나고 활동하지 않아도 저절로 변화가 이루어지고,
함이 없이도 이루어지니 이것이 무강(無疆)한 천지조화인 것이다.

 

見은 猶示也라 不見而章은 以配地而言也오 不動而變은 以配天而言也오 無爲而成은 以無疆而言也라.

현은 유시야라 불현이장은 이배지이언야오 부동이변은 이배천이언야오 무위이성은 이무강이언야라.

 

현은 ‘보일 시’와 같음이라. 보이지 않아도 빛난다는 것은 땅에 배합해서 말함이오,
움직이지 않아도 변한다는 것은 하늘에 배합해서 말함이오, 함이 없어도 이룸은 끝이 없음으로써 말함이라.

 

7.
天地之道는 可一言而盡也하니 其爲物이 不貳라 則其生物이 不測이니라.
천지지도는 가일언이진야하니 기위물이 불이라 즉기생물이 불측이니라.

 

천지의 도는 가히 한마디 말로 다하니 그 물건됨이 둘이 아니니라.
곧 그 물건을 생함이 헤아리지 못하느니라.

貳 : 둘 이, 의심할 이

 

[본문 해설]
『중용』을 ‘반(半)주역’이고 할 만큼 그 이치가 웅숭깊다.
천지의 도란 것이 한 말로 딱 짚어 말할 수 있으니 그 물건됨이 이것저것으로 나가지 않고 한결같아 의심할 바가 없다.
生生之易이듯이 태극 → 음양 → 사상 → 팔괘로 계속 낳고 진화해나가며 물건을 내고 있으니 헤아릴 수가 없다.

 

此以下는 復以天地로 明至誠無息之功用이라 天地之道 可一言而盡은 不過曰誠而已라

 차이하는 부이천지로 명지성무식지공용이라 천지지도 가일언지진은 불과왈성이이라  

不貳는 所以誠也라 誠故로 不息而生物之多 有莫知其所以然者라.

불이는 소이성야라 성고로 불식이생물지다 유막지기소이연자라.

 


이로써 아래로는 다시 천지로써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는 성공적인 쓰임을 밝힘이라.
천지의 도를 가히 한마디로 말함은 ‘誠“을 말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라.
의심치 않는다는 것은 성실하다는 것이다.
정성스럽기 때문에 쉬지 않아 물건을 냄이 많아서 그 까닭을 알지 못함이 있느니라.

 

[앞주 해설]
『주역』을 음양불측의 ‘神’이라고 압축해 말한다면, 『중용』은 정성 ‘誠’으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용의 천지의 도는 ‘정성’ 그 자체이고 의심할 나위없는(不貳) 성실함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성실함은 『주역』풍택중부괘에서 ‘중심으로 믿는 마음(中孚之心)’을 말하며,
돼지나 물고기까지도 믿게 하는 마음(中孚는 豚魚면 吉하니)을 말한다.
또한 九二爻의 “우는 학이 그늘에 있거늘 그 자식이 화답하도다.
나에게 좋은 벼슬이 있어서 내가 너와 더불어 얽히노라
(鳴鶴이 在陰이어늘 其子 和之로다 我有好爵하야 吾與爾靡之하노라)”와 같이
어미 학이 우니 새끼 학이 화답하고 임금과 신하가 중심(中心)으로 수작(酬酌)하듯이,
성인이 천지와 더불어 하는 도가 바로 지극한 정성이다.
이러한 정성이 있기에 쉬지 않는 것이고 천지가 쉬지 않으니 생물이 많아지는데 그 까닭(所以然)은 알 수가 없다.
오늘날 생명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생명공학이 발달하며
일부 유전자의 비밀을 알아내어 치료 등의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대자연의 生生之易의 정미한 이치를 밝혀내기란 지극히 어렵다.
생명공학의 발달은 자칫 대자연의 질서를 그르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극한 믿음만이 자연을 더욱 조화롭게 보존할 수 있리라고 본다.

 

8.
天地之道는 博也 厚也 高也 明也 悠也 久也이니라.
천지지도는 박야 후야 고야 명지 유야 구지이니라.

 

천지의 도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멀고 오래하느니라.

 

[본문 해설]
천지의 도는 博 厚 高 明 悠 久가 아니고는 말할 수가 없다.
‘박후’의 땅 ‘고명’의 하늘, ‘유구’의 무강으로, 이를 삼재지도(三才之道)로 말한다면,
천도(天道)는 고명, 지도(地道)는 박후, 인도(人道)는 유구인 것이다.

 

言天地之道는 誠一不貳라 故로 能各極其盛하야 而有下文生物之功이라.

언천지지도는 성일불이라 고로 능각극기성하야 이유하문생물지공이라.

천지의 도가 정성스럽고 한결같아서 둘이 아니니라(의심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능히 각각 그 성함을 지극히 하여 아랫글의‘생물지공(물건을 내는 공)’이 있느니라.

 

9.
今夫天 斯昭昭之多니 及其無窮也하야난 日月星辰이 繫焉하며 萬物이 覆焉이니라.
금부천 사소소지다니 급기무궁야하야난 일월성신이 계언하며 만물이 부언이니라.

 

今夫地는 一撮土之多하니 及其廣厚하야난 載華嶽而不重하며 振河海而不洩하며 萬物이 載焉이니라.
금부지는 일촬토지다하니 급기광후하야나 재화악이부중하며 진하해이부설하며 만물이 재언이니라.

 

今夫山이 一卷石之多하니 及其廣大하야난 草木이 生之하며 禽獸는 居之하며 寶藏이 興焉이니라.
금부산이 일권석지다하니 급기광대하야난 초목이 생지하며 금수는 거지하며 보장이 흥언이니라.

 

今夫水는 一勺之多하니 及其不測하야난 원 타 蛟 龍 魚 鼈生焉하며 貨財殖焉이니라.
금부수는 일작지다하니 급기불측하야난 원 타 교 룡 어 별생언하며 화재식언이니라.

 

이제 무릇 하늘이 이 소소함이 많으니 그 무궁한데 미쳐서는
해와 달과 별이 매어 있으니 만물이 덮여 있느니라.
이제 무릇 땅이 한 줌 흙이 많으니 그 넓고 두터운데 미쳐서는
화악을 싣고서도 무겁지 아니하며 하해를 거두면서도 새지 아니하며 만물이 실려 있느니라.
이제 무릇 산이 한 주먹 돌이 많으니 그 광대함에 미쳐서는
초목이 나며 새와 짐승이 살며 보배가 감추어져 나오느니라.
이제 무릇 물은 한잔 물이 많으니 그 헤아릴 수 없음에 미쳐서는
큰 자라, 악어, 교룡, 물고기, 자라가 자라며 화재(貨財)가 번식하느니라.

撮 : 한줌 촬, 잡을 촬. 洩 : 샐 설 .卷 : 작을 권 .勺 : 술잔 작
원 : 자라 원. 타 : 악어 타. 鼈 : 자라 별 .殖 : 번성할 식

 

[본문 해설]
박후고명한 땅과 하늘의 공효인 ‘생물지공’의 증거로, 天覆地載의 사례를 들고 있다.
참고로 화악이라 함은 천자문의 ‘악종항대(嶽宗恒岱)’에서 나왔듯이
중국의 대표적인 오악(五嶽)의 하나를 말한다. 동악인 태산(泰山, 岱山),
서악인 화산(華山), 남악인 형산(衡山), 북악인 항산(恒山), 중악인 숭산(崇山)이 바로 오악으로 일컬어진다.

 

昭昭는 猶耿耿이니 小明也라 此는 指其一處而言之라

   소소는 유경경이니 소명야라 차는 지기일처이언지라

   
及其無窮은 猶十二章及其至也之意니 蓋擧全體而言也라 振은 收也오 卷은 區也라

 급기무궁은 유십이장급기지야지의니 개거전체이언야라 진은 수야오 권은 구야라 

 

此四條는 皆以發明由其不貳不息하야 以致盛大而能生物之意라

차사조는 개이발명유기불이불식하야 이치성대이능생물지의라

 

然이나 天地山川은 實非由積累而後에 大하니 讀者 不以辭害意 可也니라.

연이나 천지산천은 실비유적루이후에 대하니 독자 불이사해의 가야니라.

소소는 경경(반짝거림)과 같으니 조금 밝으니라.
이것은 그 한 곳만을 가르켜 말함이라.
‘극기무궁’은 12장의 ‘及其至也’의 뜻과 같으니 대개 전체를 들어서 말함이라.
진은 거둠이요, 권은 구역이라.
이 네 가지는 모두 써 불이불식으로 말미암아 성대함을 이루어 능히 물건을 내는 뜻을 발명함이라.
그러나 천지산천은 실지로 쌓고 포갬으로 말미암은 뒤에 커진 것은 아니니,
읽는 자가 말로써 뜻을 해치지 않음이 가하니라.

耿 : 빛날 경. 區 : 구구할 구(작은 모양)

 

10.
詩云 維天之命이 於穆不已라 하니 蓋曰天之所以爲天也이오
시운 유천지명이 오목불이라 하니 개왈천지소이위천야이오

 

於乎不顯이 文王之德之純이여 하니 蓋曰文王之所以爲文也이니 純亦不已니라.
오호불현이 문왕지덕지순이여 하니 개왈문왕지소이위문야이니 순역불이니라.

 

『시경』에 이르길 “하늘의 명이 아! 심원하여 그치지 않느니라” 하니 대개 하늘이 써 하늘이 된 바를 말함이오.
“아! 나타나지 않는가. 문왕의 덕이 순전(純全)함이여”라 하니
대개 문왕이 써 문(文)이 된 바니 순전함이 또한 그치지 않느니라.

於 : 어조사 오(아름다움을 뜻하는 감탄사)

 

詩는 周公維天之命篇이라 於는 歎辭라 穆은 深遠也라 不顯은 猶言豈不顯也라
시는 주공유천지명편이라 오는 탄사라 목은 심원야라 불현은 유언기불현야라

純은 純一不雜也라 引此하야 以明至誠無息之意라

순은 순일부잡야라 인차하야 이명지성무식지의라

程子曰 天道 不已어늘 文王이 純於天道 亦不已하시니 純則無二無雜이오 不已則無間斷先後라.

정자왈 천도 불이어늘 문왕이 순어천도 역불이하시니 순즉무이무잡이오 불이즉무간단선후라.

 

시는 『시경』「주송 유천지명」이라. 오는 감탄한 말이라.
목은 심원(깊고 멀음)이라. 불현은 어찌 나타나지 아니하랴와 같음이라.
순은 순전하고 한결같아 섞이지 않음이라. 이를 인용해서 지성무식의 뜻을 밝힘이라.
정자 말씀하시길 “하늘의 도가 그치지 아니하거늘 문왕이 천도에 순전함이 또한 그치지 아니하니,
순전하면 둘이 없고 섞임이 없음이오 그치지 않으면 간단 선후가 없느니라.

 

右는 第二十六章이라

 

言天道也니라
천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25장 성자자성장(誠者自成章)

 

1.
誠者는 自成也오 而道는 自道也이니라.

성자는 자성야오 이도는 자도야이니라.

 

성이라는 것은 스스로 이룸(無爲)이오, 도라는 것은 스스로 도함이라.

 

[본문 해설]

誠이라는 글자는 ‘말씀 言’에 ‘이룰 成’으로 이루어져 있다.
言을 빼놓고 보면 成만을 본다면, 하늘의 밝은 기운(丁)을 받아

땅위에서 무성하게(戊) 그대로 이루어진다(成)는 뜻이다.
여기서 誠은 『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다는 의미와 일맥상통됨을 알 수 있다.

 

言誠者는 物之所以自成이오 而道者는 人之所當自行也라
언성자는 물지소이자성이오 이도자는 인지소당자행야라

 

誠은 以心으로 言이니 本也오 道는 以理로 言이니 用也라
성은 이심으로 언이니 본야오 도는 이리로 언이니 용야라

 

성이라는 것은 물건이 써 스스로 이루는 바요, 도라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가야 할 바이니라.
정성은 마음으로써 말하는 것이니 근본이요, 도는 이치로써 말하는 것이니 용이라.

 

2.
誠者는 物之終始니 不誠이면 無物이니 是故로 君子는 誠之爲貴니라.
성자는 물지종시니 불성이면 무물이니 시고로 군자는 성지위귀니라.

 

성이라는 것은 물건의 마침과 시작이니 성실하지 않으면 물건이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성실함을 귀하게 여기느니라.

 
天下之物이 皆實理之所爲라 故로 必得是理然後에 有是物이니
천하지물이 개실이지소위라 고로 필득시이연후에 유시물이니

 

所得之理 旣盡이면 則是物이 亦盡而無有矣라 
소득지리 기진이면 즉시물이 역진이무유의라 

 

故로 人之心이 一有不實이면 則雖有所爲라도 亦如無有일새 而
고로 인지심이 일유부실이면 즉수유소위라도 역시무유일새 이

 

君子 必以誠爲貴也라 蓋人之心이 能無不實이라야 乃爲有
군자 필이성위귀야라 개인지심이 능무부실이라야 내위유

 

以自成이요 而道之在我 亦無不行矣리라.
이자성이요 이도지재아 역무불행의리라.

 

천하의 물건이 모두 실질적인 이치가 하는 바이라.
그러므로 반드시 이 이치를 얻은 연후에 이 물건이 있는 것이니
얻은 바의 이치가 이미 다하면 이 물건이 또한 다해서 있음이 없어지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이 하나라도 실함이 없으면 비록 하는 바가 있더라도
또한 있는 것이 없는 것과 같아서 군자가 반드시 정성으로써 귀함을 삼느니라.
대개 사람의 마음이 능히 실하지 않음이 없어야 이에 써 스스로 이룸이 있고
도가 나에게 있는 것이 또한 행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3.
誠者는 非自成己而已也라 所以成物也니 成己는 仁也오 
성자는 비자성기이이야라 소이성물야니 성기는 인야오 

 

成物은 知也니 性之德也라 合內外之道也니 故로 時措之宜也니라.
성물은 지야니 성지덕야라 삼내외지도야니 고로 시조지의야니라.

 

성실하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이룰 뿐만이 아니라 물건(남)을 이루는 바이니,
자기를 이루는 것은 인이요, 물건(남)을 이루는 것은 지혜니 성품의 덕이니라.
내외의 도를 합함이니 그러므로 때로 둠이 마땅하니라.

 

[본문 해설]

誠에는 仁과 知가 다 들어있음을 말하고 있다.
자기 몸을 이루는 것은 어짊(仁)이고, 내적인 체가 되고,
물건을 이루는 것 즉 남을 이루어주는 것은 지혜(知)로, 외적인 용이 된다.
즉 性의 덕은 인과 지가 합한 도가 되므로 그때그때 맞게 행해야 하는 것이다.
곧 주역 중지곤(重地坤)괘 문언전의 “군자가 공경함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리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여 경과 의가 섬에 덕이 외롭지 아니하나니
(君子ㅣ 敬以直內하고 義以方外하야 敬義立而德不孤하나니)”라고 한 말과 같다.

‘誠’은『대학』에서 말하는 ‘止於至善’에 해당하는 것으로,
‘때로 마땅함을 두는 것(時措之宜)’이『대학』의 내적인 明明德이라면『중용』에서는 成己에 해당하고,
『대학』의 외적인 親民은 『중용』에서는 成物에 해당한다.

 
誠은 雖所以成己나 然이나 旣有以自成이면 則自然及物이오
성은 수소이성기나 연이나 기유이자성이면 즉자연급물이오

 

而道亦行於彼矣라 仁者는 體之存이오 知者는 用之發이니
이도역행어피의라 인자는 체지존이오 지자는 용지발이니

 

是皆吾性之固有而無內外之殊하니 旣得於已면 則見於事者 以時措之而皆得其宜也라.
시개오성지고유이무내외지수하니 기득어이면 즉현어사자 이시조지이개득기의야라.
 

성은 비록 자기를 이루는 바이나 이미 스스로 이룸이 있으면 곧 자연히 물건에 미칠 것이오,
도가 또한 저기에서 행해지느니라. 仁이라는 것은 體에 존함이요,
知라는 것은 用의 발함이니, 이것은 모두 내 성품의 고유함이오 안팎의 다름이 없나니,
이미 자기에게서 얻으면 일에 나타나는 것이 때에 따라 둠에 모두 그 마땅함을 얻게 될 것이라.

 

右는 제二十五章이라


言人道也라
사람의 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24장 지성여신장(至誠如神章)

 

 
至誠之道는 可以前知니 國家將興에 必有禎祥하며 國家將亡에 必有妖얼하야 見乎蓍龜하며 動乎四體라
지성지도는 가이전지니 국가장흥에 필유정상하며 국가장망에 필유요얼하야 현호시귀하며 동호사체라

 

禍福將至에 善을 必先知之하며 不善을 必先知之니 故로 至誠은 如神이니라.
화복장지에 선을 필선지지하며 불선을 필선지지니 고로 지성은 여신이니라.

 

지극한 정성의 도는 가히 써 앞일을 알 수 있으니, 국가가 장차 흥함에 반드시 상서로움이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함에 반드시 재앙이 있어서 시초와 거북에 나타나며 사지(四肢)에 움직이느니라.
화와 복이 장차 이름에 선함을 반드시 먼저 알려 선하지 못함을 반드시 먼저 아느니,
그러므로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으니라.

 
禎祥者는 福之兆오 妖孼者는 禍之萌이라 蓍는 所以筮오 龜는 所以卜이라
정상자는 복지조오 요얼자는 화지맹이라 시는 소이서오 구는 소이복이라

 

四體는 謂動作威儀之間이니 如執玉高卑에 其容俯仰之類라 凡此는 蓋理之先見者也라
사체는 위동작위의지간이니 여집옥고비에 기용부앙지류라 범차는 개리지선현자야라
 
然이나 唯誠之至極而無一毫私僞 留於心目之間者라야 乃能有以察其幾焉이라 神은 謂鬼神이라.
연아나 유성지지극이무일호사위 유어심목지간자라야 내능유이찰기기언이라 신은 위귀신이라.

 

상서롭다는 것은 복의 징조요, 요얼이라는 것은 화의 싹이라.
시초는 서점(댓가지점, 주역점)이오, 거북은 거북점이라.
사체는 동작과 위의의 사이를 이르니, 옥을 잡는데 높고 낮게 함에
그 용모가 구부리고 우러르고 하는 종류와 같음이라.
대저 이것은 이치가 먼저 나타나는 것이라.
그러나 오직 정성이 지극하여 한 터럭 사사롭고 거짓됨이 마음과 눈 속에 머무름이 없는 자라야
이에 능히 그 기미를 살핌이 있느니라.
신은 귀신을 이름이라.

 
[앞주 해설]

시초라는 것은 주역에서 말하는 댓가지 50개로 점을 치는 것을 말하고
거북점은 거북의 등껍질을 불에 달궈 갈라지는 모습으로 점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사람은 늘 움직이는 동작을 하게 마련인데 그 움직임 속에서 그 사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執玉高卑에 其容俯仰之類’는 동작의 예를 든 것으로 『춘추좌씨전』定公 15년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주(?)나라 은공이 노(魯)나라로 조회를 왔는데 자공(공자 제자인 자사)이 이를 살폈다.
주나라 군주가 (예물인) 옥을 잡아 올림에 너무 높게 하여 얼굴이 너무 들렸고,
공(노나라 정공)은 옥을 받음에 너무 낮게 하여 얼굴이 너무 숙여졌다.
자공이 이것을 보고는 ‘예의를 차리는 거동을 보아서는 두 군주는 모두 곧 돌아가실 것이다.
예의는 사람이 죽고 살고, 나라가 보존되고 망하는 기본인 것이다.
손발을 좌우로 내고, 몸을 돌리며,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서고,
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굽어보는 것으로 곧 죽을 것인가 오래 살 것인가를 알아보고,
조정에서의 거동, 제사지내는 태도, 服喪하는 자세,
軍事에서의 행동으로 나라를 지킬 것인가 망칠 것인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정월달에 서로 우호를 위하여 만나, 다 법도를 지키지 못했으니 마음은 이미 잃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일에 근본을 지키지 못했는데 어찌 오래 살 수가 있으랴.
물건을 높이 들어 온몸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교만함을 나타냄이고,
몸을 낮추어 아래로 굽힘은 기운이 빠졌음을 나타냄이다. 교만 부림은 난리를 일으키기 쉽고,
기운이 빠졌음은 병 들기 쉬운 것이다. 군(정공)이 주인이 되니, 먼저 돌아가실 것이다

 

十五年春에 주隱公來朝라 子貢觀焉에 주子執玉高하여 其容仰하고 公受玉卑하여 其用俯라.
십오년춘에 주은공래조라 자공관언에 주자집옥고하여 기용앙하고 공수옥비하여 기용부라.

 

子貢曰 以禮觀之면 二君子皆有死亡焉하리라 
자공왈 이례관지면 이군자개유사망언하리라

 

夫禮死生存亡之體也라 將左右周旋進退俯仰於是乎取之하고 朝祀喪戎於是乎觀之라.
부예사생존망지예야라 장좌우주선진퇴부앙어시호취지하고 조사상융어시호관지라.

 

今正月相朝하여 而皆不度하니 心已亡矣라 嘉事不體어늘 何以能久아 高仰驕也요 卑俯替也라
금정월상조하여 이개부도하니 심이망의라 가사불예어늘 하이능구아 고앙교야요 비부체야라

 

驕近亂하고 替近疾이라 君爲主에 其先亡乎인저
교진란하고 체근질이라 군위주에 기선망호인저 

 

그해 정공이 죽고, 애공 7년에 노나라가 주나라를 치니,
두 임금이 모두 죽게 되어 자공이 예견한 것이 딱 맞게 되었다는 말이다.
몸가짐, 곧 四體의 모습을 보고 앞날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짐을 살필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성이 지극하고
마음과 눈 사이에 한 터럭의 사사로움이나 거짓됨이 없이 깨끗하여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右는 第二十四章이라

 

言天道也라
천도를 말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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