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제11편 선진(先進) 1장~25장

 

1장
子曰 先進이 於禮樂에 野人也요 後進이 於禮樂에 君子也라 하나니 如用之則吾從先進하리라.
자왈 선진이 어례락에 야인야요 후진이 어례락에 군자야라 하나니 여용지칙오종선진하리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옛날 선비의 예와 악은 질박한 사람답고 지금 선비의 예와 악은
문채로 나타남이 군자답다고 하나 만일 쓴다면 나는 옛날 선비를 따를 것이다.”고 하셨다.


2장
子曰 從我於陳蔡者皆不及門也로다.
자왈 종아어진채자개불급문야로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나를 진과 채에서 따르던 자가 다 문하에 있지 않구나!

 

德行에는 顔淵閔子騫冉伯牛仲弓이요 言語에는 宰我子貢이요 政事에는 冉有季路요 文學에는 子游子夏니라.
덕행에는 안연민자건염백우중궁이요 언어에는 재아자공이요 정사에는 염유계로요 몬학에는 자유자하니라.

 

덕행에는 안연과 민자건과 염백우와 중궁이요, 언어에는 재아와 자공이요, 정사에는 염유와 계로요,
문학에는 자유와 자하 이었다.”고 하셨다.


3장
子曰 回也는 非助我者也로다. 於吾言에 無所不說이온저.
자왈 회아는 비조아자야로다. 어오언에 무소불설이온저.

 

공자 말씀하시기를, “안회는 나를 돕는 자가 아니다.
나의 말에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구나.”고 하셨다.


4장
子曰 孝哉라 閔子騫이여!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이로다.
자왈 효재라 민자건이여 인불간어기부모곤제지언이로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효자로다, 민자건이여!
사람들도 그 부모와 형제가 그를 칭찬하는 말에 이의가 없도다.”고 하셨다.


5장
南容三復白圭어늘 孔子以其兄之子로 妻之하시다.
남용삼복백규어늘 공자이기형지자로 처지하시다.

 

남용이 백규의 시를 세 번 반복하니,공자께서 그 형의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시었다.


6장
季康子問 弟子孰爲好學이니잇고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하더니 不幸短命死矣라 今也則亡하니라.
계강자문 제자숙이호학이니잇고 공자대왈 유안회자호학하더니 불행단명사의라 금야망칙하니라.

 

계강자가 묻기를, “제자 중에 누가 배움을 좋아합니까?”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안회라는 자가 있어서 배우기를 좋아하더니 불행히 목숨이 짧아서 이제는 없노라.”고 하셨다.


7장
顔淵死어늘 顔路請子之車하여 以爲之槨한대
안연사어늘 안로청자지차하여 이위지곽한대

 

子曰 才不才에 亦各言其子也니 鯉也死어늘 有棺而無槨하니
자왈 재불재에 역각언기자야니 이야사어늘 유관이무곽하니

 

吾不徒行以爲之槨은 以吾從大夫之後라 不可徒行也일새니라.
오불도행이위지곽은 이오종대부지후라 불가도행야일새니라.

 

안연이 죽으니, 안로가 공자의 수레를 청하여 곽을 만들고자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재주가 있거나 없거나 각기 그 자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가 죽으니 관은 있고 곽은 없었으니, 내가 도보로 행하지 아니하고 곽을 행한 것은
내가 대부의 말석에 따르는지라, 도보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8장
顔淵死어늘 子曰 噫라 天喪予삿다 天喪予삿다.
안연사어늘 자왈 희라 천상여삿다 천상여삿다.

 

안연이 죽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아,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고 하셨다.


9장
顔淵死어늘 子哭之慟하신대 從者曰 子慟矣시니이다.
안연사어늘 자곡지통하신대 종자왈 자통의시니이다.

 

曰 有慟乎아 非夫人之爲慟이요 而誰爲리오.
왈 유통호아 비부인지위통이요 이수위리오.

 

안연이 죽으니 공자께서 곡하심을 애통히 하시니 따르는 자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너무 애통해 하십니다.”고 하였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것이 지나침이 있느냐? 
이 사람을 위하여 애통하지 아니하고 누구를 위하여 애통하리오.”고 하셨다.


10장
顔淵死어늘 門人欲厚葬之한대 子曰 不可하니라.
안연사어늘 문인욕후장지한대 자왈 불가하니라.

 

안연이 죽으니문인이 후하게 장사하고자 하였더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옳지 아니하다.”고 하셨다.

 

門人이 厚葬之한대 子曰 回也는 視予猶父也어늘 予不得視猶子也하니 非我也라 夫二三子也니라.
문인이 후장지한대 자왈 회야는 시여유부야어늘 여불득시유자야하니 비아야라 부이삼자야니라.

 

문인이 후하게 장사하였더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안회는 나를 보기를 아비같이 하나,
나는 보기를 아들같이 못하니, 나의 뜻이 아니라 저 몇몇 사람이니라.”고 하셨다.


 

11장
季路問 事鬼神한대 子曰 未能事人이면 焉能事鬼리오 敢問死하노이다. 曰 未知生이면 焉知死리오.
계로문 사귀신한대 자왈 미능사인이면 언능사귀리오 감문사하노이다. 왈 미지생이면 언지사리오.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을 물으니,공자께서 말씀하기를, “능히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능히 귀신을 섬기겠느냐.”고 하니, 계로가 말하기를, “감히 죽음을 묻습니다.”고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삶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고 하셨다.


 

12장
閔子는 侍側에 誾誾如也하고 子路行行如也하고 冉有子貢은 侃侃如也어늘 子 樂하시다.
민자는 시측에 은은여야하고 자로행행여야하고 염유자공은 간간여야어늘 자 락하시다.

 

若由也는 不得其死然이로다.
약유야는 불득기사연이로다.

 

민자는 공자를 보실 적에는 화하고 기쁜 모습이고, 자로는 굳세고 강한 모습이었으며,
염유와 자공은 강직한 모습이었는데, 공자께서 즐거워하셨다.
자로 같은 이는 옳은 죽음을 얻지 못할 듯하다.


 

13장
魯人 爲長府어늘 閔子騫曰 仍舊貫如之何오 何必改作이리오 子曰 夫人이 不言이언정 言必有中이니라.
노인 위장부어늘 민자건왈 잉구관여지하오 하필개작이리오 자왈 부인이 불언이언정 언필유중이니라.

 

노나라 사람이 장부를 고쳐 짓더니 민자건이 말하기를, “그대로 수리를 하는 것이 어떠한가?
어찌 반드시 고쳐 지을까?”고 하였다.공자 말씀하시기를, “무릇 사람이 말을 하지 아니 할지언정,
말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음이 있다.”고 하셨다.


 

14장
子曰 由之瑟을 奚爲於丘之門고 門人이 不敬子路한대 子曰 由也는 升堂矣요 未入於室也니라.
자왈 유지슬을 해위어구지문고 문인이 불경자로한대 자왈 유야는 승당의요 미입어실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중유의 고르지 못한 거문고를 어찌 나의 집에서 타느냐?”고 하셨다.
문인이  자로를 공경치 아니하는걸 보시고, 
공자 말씀하시기를, “유의 학문은 아직 방에는 들지 못했으나 이미 당에 올라있다"고 하셨다.


 

15장
子貢이 問 師與商也孰賢이니잇고 子曰 師也는 過하고 商也는 不及이니라. 曰 然則師愈與잇가 子曰 過猶不及이니라.
자공이 문 사여상야숙현이니잇고 자왈 사야는 과하고 상야는 불급이니라. 왈 연칙사유여잇가 자왈 과유불급이니라.

 

자공이 묻기를, “사와 상은 누가 어진 사람입니까?”고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에 자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사가 낫습니까?‘고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지나치는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하셨다.


 

16장
季氏富於周公이어늘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한대 子曰 非吾徒也로소니 小子아 鳴鼓而攻之可也니라.
계씨부어주공이어늘 이구야위지취렴이부익지한대 자왈 비오도야로소니 소자아 명고이공지가야니라.

 

계씨가 재상인 주공보다 부유한데, 염구가 많은 세금을 거두어서 더욱 부유하게 하였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염구는 우리의 무리가 아니니, 소자들아,
북을 올려서 그 죄를 공격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고 하셨다.


 

17장
柴也는 愚하고 參也는 魯하고 師也는 辟하고 由也는 언이니라.
시야는 우하고 삼야는 노하고 사야는 벽하고 유야는 언이니라.

 

고시는 어리석고 증삼은 노둔하고 사는 편벽하고 중유는 속되다.


 

18장
子曰 回也는 其庶乎요 屢空이니라.賜는 不受命이요 而貨殖焉이나 億則屢中이니라.
자왈 회야는 기서호요 누공이니라.사는 불수명이요 이화식언이나 억칙루중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안회는 거의 도에 가까워 여러 번 양식이 떨어졌어도 마음이 편안하였다.
사는 천명을 받지 아니하고 재물을 늘리지만 전전긍긍 하는 삶이지 않은가 양식이 떨어져도
도를 행하고 실천하는 삶이 생각하면 잘 사리에 맞추는 것이다.”고 하셨다.


 

19장
子張이 問 善人之道한대 子曰 不踐迹이나 亦不入於室이니라.
자장이 문 선인지도한대 자왈 불천적이나 역불입어실이니라.

 

자장이 착한 사람의 도를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성품이 착한 이는 성인의 자취를 밟지 아니하여도
악하지는 않지만 성인의 경지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고 하셨다.


 

20장
子曰 論篤을 是與면 君子者乎아 色莊者乎아.
자왈 논독을 시여면 군자자호아 색장자호아.

 

공자 말씀하시기를, “언론이 독실한 이를 인정 한다면
그는 참다운 군자이겠느냐?  외모만 건장한 자이겠느냐?”고 하셨다.


 

21장
子路問 聞斯行諸잇가 子曰 有父兄在하니 如之何其聞斯行之리오 冉有問聞斯行諸잇가 子曰 聞斯行之니라.
자로문 문사행제잇가 자왈 유부형제하니 여지하기문사행지리오 염유문 문사행제잇가 자왈 문사행지니라.

 

자로가 여쭙기를 옳은말을 듣으면 바로 행하여야 합니까?

공자 말씀하시기를 부형이계신데 어찌 듣고 바로 행하겠는가?

 염유가 여쭙기를 말을듣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 말씀하시기를 듣는대로 행할것이다 고 하셨다.


公西華曰

由也問 聞斯行諸어늘 子曰 有父兄在라하시고 求也問 聞斯行諸어늘 子曰 聞斯行之라하시니 赤也惑하여 敢問하노이다.
공서화왈

유야문 문사행제어늘 자왈 유부형제라하시고 구야문 문사행제어늘 자왈 문사행지라하시니 적야혹하여 감문하노이다.

 

공서화가 말하기를,

 “유가 물으니 부형이 있다 하시고 구가 물으니 이에 행하라 하시니 의심스러워 그 뜻을 감히 묻습니다.


子曰 求也退라 故로 進之하고 由也兼人이라 故로 退之니라.
자왈 구야퇴라 고로 진지하고 유야겸인이라 고로 퇴지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구는 매사에 있어 주저하고 물러가는 고로  나아가게 하고,
유는 실천함에 있어 남보다 빠르기 때문에 한발 물러서게 한것이다 고 하셨다.


 

22장
子畏於匡하실새 顔淵後러니 子曰 吾以女爲死矣로다. 曰 子在어시니 回何敢死리잇가.
자외어광하실새 안연후러니 자왈 오이녀위사의로다. 왈 자재어시니 하회감사리잇가.

 

공자께서 광에서 난을 당하셨을 때,안연이 뒤에 왔더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죽은 줄로 알았다.”고 하시니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계신데
회가 어찌 감히 죽이겠습니까?”고 하였다.


 

23장
季子然이 問 仲由冉求는 可謂大臣與잇가 子曰 吾以子爲異之問이러니 曾由與求之問이로다.
계자연이 문 중요염구는 가위대신여잇가 자왈 오이자위이지문이러니 증유여구지문이로다.

 

所謂大臣者는 以道事君하다가 不可則止하나니 今由與求也는 可謂具臣矣니라.
소위대신자는 이도사군하다가 불가칙지하나니 금유여구야는 가위구신의니라.

 

曰 然則從之者與잇가 子曰 弑父與君은 亦不從也니라.
왈 연칙종지자여있가 자왈 시부여군은 역불종야니라.

 

계자연이 묻기를 중유와염구는 대신이라고 르를만 한가요? 고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나는 자네는 별다른 물음을 하리라 하였는데 역시나 유와구의 일을 묻는구나.
이른바 대신이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옳지 아니하면 마는것 이다.
이제 유와구는 갖춘 신하라고 해도 좋다. 계자연왈 그러면 이들은 따르는 자 입니까?
공자 말씀하시기를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일따위는 따르지 아니할것이다.고 하셨다.


 

24장
子路使子羔爲費宰한대 子曰 賊夫人之子로다
자로사자고위비재한대 자왈 적부인지자로다

 

子路曰 有民人焉하며 有社禝焉하니 何必讀書然後爲學이리잇고 子曰 是故로 惡夫佞者하노라.
자로왈 유민인언하며 유사직언하니 하필독서연후위학이리릿고 자왈 시고로 악부녕자하노라.

 

자로가 자고로 하여금, “계씨의 영지인 비 땅의 원을 삼았더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자식을 해치는 것이다.”고 하셨다.
자로가 말하기를,
“그곳에도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글을 읽은 연후에 배운다고 하겠습니까?”고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이런고로 말만 잘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이다.”고 하셨다.


 

25장
子路曾晳冉有公西華侍坐러니 子曰 以吾一日長乎爾나 毋吾以也하라.
자로증석염유공서화시좌러니 자왈 이오일일장호이나 무오이야하라.

 

居則曰不吾知也라하나니 如或知爾면 則何以哉오.
거칙왈불오지야라하나니 여혹지이면 칙하이재오.

 

자로와 증석과 염유와 공서화가 모시고 앉았더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룻날쯤 너희들보다 어른이지만 나이로써 대하지 말라 고 하셨다.
평시에 말 하기를 나를 알지 못한다 고하니 만일 혹 너희를 알아주면 어찌 하겠느냐 고

 

子路率爾而對曰千乘之國이 攝乎大國之間하여 加之以師旅요
자로솔이이대왈천승지국이 섭호대국지간하여 가지이사려요

 

因之以饑饉이어든 由也爲之면 比及三年하여 可使有勇이요 且知方也하리다.
인지이기근이어든 유야위지면 비급삼년하여 가사유용이요 차지방야하리다.

 

자로가 급히 대답하여 말하기를,
“천승의 나라가 큰 나라 사이에 끼어 군란이 더하고 인하여 기근까지 겹치어도 유가 다스리면
삼년이면 백성들을 용맹이 있게 하고 또 의에 향하는 방향을 알게 하겠습니다.”고 하셨다.

 

夫子哂之하시다 求아 爾는 何如오 對曰方六七十과 如五六十에
부자신지하시다 구아 이는 하여오 대왈방육칠십과 여오육십에

 

求也爲之면 比及三年하여 可使足民이어니와 如其禮樂엔 以俟君子하리다.
구야위지면 비금삼년하여 가사족민이어니와 여기례락엔 이사군자하리다.

 

빙그레 웃으시며 공자 말씀하시기를, “구야,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지방이 육칠십 리 혹은 오륙십 리는 구가 하면 삼년이면 백성을 족하게 하려니와
그 예와 악 같은 것은 군자를 기다리겠습니다.”고 하였다.

 

赤아 爾는 何如오 對曰 非曰能之라 願學焉하노이다 宗廟之事와 如會同에 端章甫로 願爲小相焉하노이다.
적아 이는 하여오 대왈 비왈능지라 원학언하노이다. 종묘지사와 여회동에 단장보로 원위소상언하노이다.

 

적아,너는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능히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으니 배우기를 원합니다. .
종묘의 일과 혹 회합이 있을 때에 현단의 옷과 예관을 쓰고 조금 돕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點아 爾는 何如오 鼓瑟希러니 鏗爾舍瑟而作하여 對曰 異乎三子者之撰이니다 子曰 何傷乎리오 亦各言其志也니라.
점아 이는 하여오 고슬희러니 갱이사슬이작하여 대왈 이호삼자자지찬이니다 자왈 하상호리오 역각언기지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점아,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시니
비파 타기를 잠깐 중단하고 한 번 소리를 굵게 내고 놓으며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세 사람이 갖추어 아뢴 것과는 다릅니다.”고 하였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상하겠는가? 또한 각자 그 뜻을 말한 것이니라.”고 하셨다.


曰 莫春者에 春服旣成이어든 冠者五六人과 童子六七人으로 浴乎沂하여 風乎舞雩하여 詠而歸하리이다.
왈 박춘자에 춘복기성이어든 관자오륙인과 동자칠육인으로 욕호기하여 풍호무우하여 영이기하리이다.

 

夫子喟然嘆曰 吾與點也하노라.
부자위연탄왈 오여점야하노라.

 

말하기를, “저문 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을 한자 오륙 인과 동자 예닐곱명 과 함께
기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시나 읊고 돌아오리다.”고 하니,
부자께서 의연히 탄식하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점처럼 하고자 한다.”고 하셨다


三子者出커늘 曾晳後러니 曾晳曰 夫三子者之言이 何如하니잇고 子曰 亦各言其志也已矣니라.
삼자자출커늘 증석후러니 증석왈 부삼자자지언이 하여하니잇고 자왈 역각언기지야이의니라.

 

세 사람이 나가고 증석이 뒤에 있더니 말하기를, “세 사람의 말이 어떠합니까?”고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또한 각자 그 뜻을 말하였을 뿐이다.”고 하시었다.


曰 夫子何哂由也시니잇고 曰 爲國以禮어늘 其言不讓이라 是故로 哂之로라.
왈 부자하신유야시니잇고 왈 위국이례어늘 기언불양이라 시고로 신지로라.


증석 말하기를, “부자께서 어찌 하여 유의 말에 빙그레 웃으셨습니끼?”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나라의 정치는 예로써 하는데 그 말이 겸양하지 아니하여
이 때문에  웃었다.”고 하셨다.


唯求則非邦也與잇가 安見方六七十과 如五六十而非邦也者리오 唯赤則非邦也與잇가
유구칙비방야여잇가 안견방육칠십과 여오륙십이비방야자리오 유적칙비방야여잇가

 

宗廟會同이 非諸侯而何오 赤也爲之小면 孰能爲之大리
종묘회동이 비제후이하오 적야위지소면 숙능위지대리

 

이르기를, “그러면 구는 나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까?”고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어찌 방이 육칠십 리와 혹은 오륙십 리라고 해서 나라가 아니겠느냐?”고 하셨다.
“그렇다면 적이 말한 것은 나라의 일이 아닙니까.”고 하니 “종묘와 회동하는 것은
제후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적이 작다면 누가 능히 큰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다.

 

 

한은섭옮김

논어(論語)-제10편 향당(鄕黨) 1장~18장

 

1장
孔子於鄕黨에 恂恂如也하사 似不能言者러시다. 其在宗廟朝廷하사는便便言하시되 唯謹爾러시다.
공자어향당에 순순여야하사 사불능언자러시다. 기재종묘조정하사는변변언하시되 유근이러시다.

 

공자께서 향당에 계시면 신실한 모습으로 능히 말씀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 종묘와 조정에 계실 때에는 분명히 말씀하시되 오직 삼가셨다.

 

 

2장
朝에 與下大夫言에 侃侃如也하시며 與上大夫言에 誾誾如也러시다.君在어시든 踧踖如也하시며 與與如也러시다.
조에 여하대부언에 간간여야하시며 여상대부언에 은은여야러시다.군재어시든 축적여야하시며 여여여야러시다.

 

조회하실 때는 하대부와 더불어 말씀하심에 강직하게 하시며,상대부와 더불어 말씀하실 때는
온화하고 기쁨으로 간하셨다. 임금이 계시거든 공경스럽게 하시고,위의를 적중하게 하셨다.

 

 

3장
君召使擯이어시든 色勃如也하시며 足躩如也러시다.

군소사빈이어시든 색발여야하시며 족곽여야러시다.

 

揖所與立하사대 左右手러시니 衣前後襜如也러시다.

읍소여립하사대 좌우수러시니 의전후첨여야러시다.

 

趨進에 翼如也러시다.賓退어든 必復命曰賓不顧矣러시다.

추진에 익여야러시다.빈퇴어든 필복명왈빈불고의러시다.

 

임금이 불러 국빈을 대접하게 하시면, 얼굴빛을 긴장하시며  걸음도 조심하셨다. 

손님을 서서 맞을 적에는 읍하시되 좌우로 손을 잡으시고, 옷의 앞과 뒤는 가지런하였다. 

빨리 나아가심에 날개를 편 듯하셨다. 

손이 물러간 뒤에는 반드시 복명하시기를, ‘손이 돌아보는 일도 없이 잘 갔습니다.”고 하셨다.

 

 

4장

入公門하실새 鞠躬如也하사 如不容이러시다. 立不中門하시며 行不履閾이러시다.

 입문공하실세 국궁여야하사 여불용이러시다. 입불중문하시며 행불리역이러시다.

 

過位하실새 色勃如也하시며 足躩如也하시며 其言이

과위하실새 색발여야하시며 족곽여야하시며 기언이

 

似不足者러시다. 攝齊升堂하실새 鞠躬如也하시며 屛氣하사 似不息者러시다.

 사불족자러시다. 섭제승당하실새 국궁여야하시며 병기하사 사불식자러시다.

 

出降一等하사는 逞顔色하사 怡怡如也하시며 沒階하사는

출강일등하사는 영안색하사 이이여야하시며 몰계하사는

 

趨進翼如也하시며 復其位하사는 踧踖如也러시다.

추진익여야하시며 복기위하사는 축적여야러시다.

 

궁문에 들어가실 때에는 몸을 구부리시어 용납지 못할 것같이 하시었다. 

서실 때에는 문 가운데 서지 아니하시고, 행하실 적에는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셨다. 

자리를 지나실 적에는 안색을 긴장하시고 걸음도 조심하시며, 그 말씀은 족하지 못한 것같이 하시었다.

옷자락을 거머잡고 당에 오르실 때, 몸을 구부리시며 기운을 감추시어 숨도 쉬지 않는 것같이 하셨다. 

나오시어 섬돌 한 층계를 내려서는
얼굴빛을 푸시고 온화하고 기뻐하시며, 층계를 다 내려서서는 빨리 나아가시되 날개를 편 듯하시며, 

자리에 돌아와서는 황송해 하셨다.

 

 

5장

執圭하사대 鞠躬如也하사 如不勝하시며上如揖하시고 下如授하시며 勃如戰色하시며 足蹜蹜如有循이러시다.

집규하사대 국궁여사하사 여불승하시며 상여읍하시고 하여수하시며 발여전색하시며 족축축여유순이러시다.

 

享禮에 有容色하시며 私覿에 愉愉如也러시다.

향례에 유용색하시며 사적에 유유여야러시다.

 

홀을 잡으시면 몸을 굽혀 이기지 못하는 것같이 하시고, 올리실 때는 읍하시듯이 하시며, 

내리실 때에는 물건을 주는 것같이 하시고,
얼굴빛을 긴당하여 두려운 듯하시며, 걸음을 좁게 자주 떼셨다.

예물을 드리실 때에는 얼굴빛을 펴시며, 사사로 보내실 때에는 더욱 화기가 돋우셨다.

 

 

6장

君子는 不以紺緅飾하시며 紅紫로 不以爲褻服이러시다. 當署하사 袗絺綌을 必表而出之러시다.

군자는 불이감추식하시며 홍자로 불이위설복이러시다. 당서하사 진치격을 필표이출지러시다.

 

보랏빛과 아청빛으로 장식하지 아니하시며, 붉은 빛과 자주 빛으로 사사로운 옷을 만들지 아니하셨다.
더울 때를 당하여는  홑 칡 베옷과 굵은 칡 베옷을 반드시 껴입고 나가셨다.

 

緇衣엔 羔裘요 素衣엔 麑裘요 黃衣엔 狐裘러시다. 褻裘長하되 短右袂러시다.

치의엔 고구요 소의엔 예구요 황의엔 호구러시다. 설구장하되 단우매러시다.

 

검은 옷에는 양 갓옷이요, 흰 옷에는 사슴 갓옷이요, 누른 옷에는 여우 갓옷을 입으셨다.
평시에 입는 갓옷은 길게 하되, 오른 소매를 짧게 하시었다.

 


必有寢衣하시니 長一身有半이러라. 狐貉之厚로 以居러시다. 去喪하사는 無所不佩러시다

필유침의하시니 장일신유반이러라. 호맥지우로 이거러시다. 거상하사는 무소불패러시다.

 

반드시 잠옷이 있었는데 길이가 한 길 반이었다. 여우와 담비의 두터운 갓옷을 입고 사시었다.
상기를 마친 뒤는 패물을 차지 않으심이 없었다.

 

非帷裳이어든 必殺之러시다. 羔裘玄冠으로 不以弔러시다. 吉月에 必朝服而朝러시다.

비유상이어든 필살지러시다. 고구현관으로 불이조러시다. 길월에 필조볻이조러시다.

 

조회와 제례의 예복이 아니면 반드시 좁게 하시었다. 양의 갓옷과 검은 관으로
조상하지 아니하셨다. 길월에는 반드시 조복을 입고, 조회를 하시었다.

 

 

 

7장

齊必有明衣러시니 布러라. 齊必變食하시며 居必遷坐러시다.

제필유명의러시니 포러라. 제필번식하시며 거필천좌러시다.

 

재계하실 때에는 반드시 깨끗한 옷이 있었는데, 베로 만든 것이었다. 
재계하실 때에는 반드시 음식을 바꾸시며,거하심에 반드시 자리를 옮기셨다.

 

 

 

8장

食不厭精하시며 膾不厭細러시다.

식불염정하시며 회불염세러시다.

 

밥은 정한 것은 싫어하지 않으셨으며, 회는 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食饐而餲와 魚餒而肉敗를 不食하시며 色惡不食하시며 臭惡不食하시며 失飪不食하시며 不時不食어러시다.

식의이애와 어뇌이육패를 불식하시며 색약불식하시며 취악불식하시며 실임불식하시며 불시불식어러시다.

 

 밥이 상하여 쉰 것과 생선이 상하고 고기가 썩은 것을 먹지 아니하시고, 빛이 변한 것을 먹지 아니하시었다. 

냄새가 나쁜 것은 먹지 아니하시고, 익지 아니한 것도 먹지 아니하시었고, 때가 아니면 먹지 아니하셨다.

 

 割不正이어든 不食하시며 不得其醬이어든 不食하시다. 肉雖多나 不使勝食氣며 唯酒無量하시되 不及亂이러시다.

할불정이어든 불식하시며 불득기장이어든 불식하시다. 육수다나 불사승식기며 유주무량하시되 불급란이러시다.

 

바르게 잘려있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고 간이 맞지 아니하면 먹지 아니하셨다. 고기를 비록 많이 드시더라고

반드시 곡기를 드셨으며 오직 술만은 얼마든지 드셨으나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으셨다.

 

沽酒市脯을 不食하시며 不撤薑食하시며 不多食이러시다.

 고주시포을 불식하시며 불철강식하시며 불다식이러시다. 

 

祭於公에 不宿肉하시며 祭肉은 不出三日하더시니 出三日이면 不食之矣니라.

제어공에 불숙육하시며 제육은 불출삼일하시더니 출삼일이면 불식지의니라.

 

파는 술과 저자의 포를 먹지 않으셨다. 생강 자시는 것을 끊지 아니하셨으며. 밥은 많이 자시지 아니하셨다.
나라에 제사지낼 때 받은 고기는 밤을 재우지 않으시며, 

제사지낸 고기는 삼일을 넘기지 아니하시고 삼일이 지나면 먹지 않으셨다.

  

食不語하시며 寢不言이러시다. 雖疏食菜羹이라도고 祀必祭하시되 必齊如也러시다.

식불어하시며 침불언이러시다. 수소식채갱이라도고 과필재하시되 필제여야러시다.

 

자시면서는 대답하시지 않으시고 주무시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곡신에게 드렸는데, 반드시 공경히 하셨다.

 

 

  

9장

席不正 이어든 不坐 러시다.

석불정 이어든 불좌 러시다.

 

자리가 마르지 아니하시면 앉지 않으셨다.

 

 

10장

鄕人飮酒에 杖者出이어든 斯出矣러시다. 鄕人儺에 朝服而立於阼階러시다.

향인음주에 장자출이어든 사출의러시다. 향인나에 조복이립어조계러시다.

 

사람들과 술을 마실 적에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일어서시면 따라 일어나셨다.
사람들이 푸닥거리를 할 때는 조복을 입으시고 동쪽 섬돌에 서 계셨다

 

 

 

11장

問人於他邦하실새 再拜而送之러시다. 康子饋藥이어늘 拜而受之曰 丘未達이라. 不敢嘗이러시다.

문인어타방하실새 재배이송지러시다. 강자궤약이어늘 배이수지왈 구미달이라. 불감상이러시다.

 

사람을 보내어 다른 나라에 있는 지인의 안부를 부르실 적에는 두 번 절하고 보내셨다.

계강자가 약을 나누어 주니 절하고 받으면서 말씀하기기를,

“내 이 약이 병이 낫는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감히 맛보지 못한다.”고 하셨다.

 

 

 

12장

廏焚이어늘 子退朝 曰 傷人乎아하시고 不問馬하시다.

구분이어늘 자퇴조 왈 상인호아하시고 불문마하시다.

 

마굿간에 불이 났는데 공자께서 조정에서 물러나 오시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상했느냐?"고 하시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아니하셨다.

 

 

 

13장

君賜食이어시든 必正席先嘗之하시고 君賜腥이어시든 必熟而薦之하시고 君賜生이어든 必畜之러시다.

군사식이어시든 필정석선상지하시고 군사성이어시든 필숙이천지하시고 군사생이어든 필축지러시다.

 

임금이 먹을 것을 주시면 반드시 자리를 바르게 하여 먼저 맛보시고 임금이 날고기를 주시면 익혀서 올리시며
임금이 살아 있는 것을 주시면 반드시 기르시었다.

 

侍食於君에 君祭어시든 先飯이러시다.

 시식어군에 군제어시든 선반이러시다.

 

疾에 君視之시어든 東首하시고 加朝服拖紳이러시다. 君命召어시든 不俟駕行矣러시다.

질에 군시지시어든 동수하시고 가조복타신이러시다. 군명소어시든 불사가행의러시다.

 

임금을 모시고 식사할 때 임금이 제사음식을 드시면 먼저 맛보시었다. 

병이 있을 때에  임금이 와서 보시면,
동으로 머리를 두시고 조복을 껴입고 큰 띠를 걸쳐서 경의를 표하셨다. 

임금이 명하여 부르시면 멍에 매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가시었다.

 

 

 

14장

入太廟하사 每事問이러시다.

입태묘하사 매사문이러시다.

 

태묘에 들어 가서는 모든일을 물으셨다.

 

 

15장

朋友死하여 無所歸어든 曰 於我殯이라하시다. 朋友之饋는 雖車馬라도 非祭肉이어든 不拜러시다.

붕우사하여 무소귀어든 왈 어아빈이라 하시다. 붕우지궤는 수마차라도 비제육이어든 불배러시다.

 

벗이 죽어서 돌아갈 곳이 없을 때는 말씀하시기를, “내 집에 빈소를 차리라.”고 하셨다.
벗이 보낸 선물은 비록 수레와 말이라도 제사지낸 고기가 아닌 것은 절하지 아니하셨다.

 

 

 

16장

寢不尸하시며 居不容이러시다. 見齊衰者하시고 雖狎이나 必變하시며 見冕者與瞽者하시고 雖褻이나 必以貌러시다.

침불시하시며 거불용이러시다. 견제쇠자하시고 수압이나 필변하시며 견면자여고자하시고 수설이나 필이모러시다.

 

凶服者를 式之하시며 式負版者러시다. 有盛饌이어든 必變色而作이러시다. 迅雷風烈에 必變이러시다.

흉복자를 식지하시며 식부판자러시다. 유성찬이어든 필변색이작이러시다. 신뢰풍렬에 필변이러시다.

 

취침하실때는 벌렁 드러누어 죽은몸처럼 하지 않으셨다. 집에 계실때는 모양을 꾸미지 않으시며

상복을 입은자를 보시면 비록 친하더라도 반드시변하시며 면류관을 쓴자와 소경을 보시면 비록

평복일때 라도 반드시 예모로 대하셨다.

 

상복을 입은 이를 만나면 수레 위에서 예를 표하시며, 등에 나라의 지도와 호적을 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셨다.
성찬을 받으시면 반드시 얼굴빛을 변하시고 일어나서 감사의 뜻을 표하셨다.
빠른 우뢰와 맹렬한 바람에도 반드시 얼굴빛을 변하셨다.

 

 

 

17장

升車하사 必正立執綏러시다. 車中에 不內顧하시며 不疾言하시며 不親指러시다.

승차하사 필정립집수러시다. 차중에 불내고하시며 불질언하시며 불친지러시다.

 

수레에 오르실 때에는 반드시 바로 서서 수레 고삐를 잡으셨다.
수레 안에서 머리를 돌려보지 않고 말을 빨리 하지 않으시며,
몸소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리키지 않으셨다.

 

 

 

18장

色斯擧矣하며 翔而後集이니라. 曰 山梁雌雉가 時哉時哉인저 子路共之한데 三嗅而作하시다.

색사거의하며 상이후집이니라. 왈 산량자치가 시재시재인저 자로공지한데 삼후이작하시다.

 

새도 사람의 얼굴빛을 보고  날라서 빙 돌다가 다시 앉는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산기슭의 암꿩이 때를 만났구나!”고 하셨다.
이때 자로가 모이를 주었더니  세 번 냄새를 맡고 날아갔다.

 

 

 

한은섭 옮김

논어(論語)-제9편 자한(子罕) 1장~30장

 

1장
子는 罕言利與命與仁이러시다.

자는 한언리여명여인이러시다.

 

공자께서는 이와 명과 인에 대하여 드물게 말씀하셨다


 

2장
達巷黨人曰 大哉라 孔子여 博學而無所成名이로다 子聞之하시고

달항당인왈 대재라 공자여 박학이무소성명이로다 자문지하시고

 

謂門弟子曰 吾何執고 執御乎아 執射乎아 吾執御矣로리라.

위문제자왈 오하집고 집어호아 집사호아 오집어의로리다.

 

달항당 사람이 말하기를, “크도다, 공자시여. 널리 배워서 한 가지도 드러난 아름이 없도다.“고 했다.
공자께서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무엇을 잡을 것인가? 말고삐를 잡을 것인가?
활을 잡을 것인가? 나는 말고삐를 잡으리라..“고 하셨다.


 

3장
子曰 麻冕이 禮也어늘 今也純하니 儉이라 吾從衆하리라.拜下禮也어늘 今拜乎上하니 泰也라. 雖違衆이나 吾從下하리라.

자왈 마면이 예야어늘 금야순하니 검이라 오종중하리라.배하례야어늘 금배호상하니 태야라. 수위중이나 오종하하리라.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삼으로 짠 관을 쓰는 것이  옛날 예이지만  지금 와서는 실로 짠 것을 쓰니  검소함이라 
나도 여러 사람들을 따르리라. 신하가 당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옛날의 예의인데 요즈음은 단 위에서 절을 하니
이는 거만하다  비록 여러 사람이 어기더라도 나는 당 아래서 절을 하겠다.“고 하셨다.


 

4장

子絶四러시니 毋意毋必毋固毋我러시다.

자절사러시니 무의무필무고무아러시다.

 

공자께서 네 가지를 끊었는데 뜻함도 끊고, 기필함도 끊고, 아집도 끊고 없었으며, 사사로움도 끊고 없더라.


 

5장
子畏於匡이러시니 曰文王旣沒하시니 文不在玆乎아 天之將喪斯文也신데

자외어광이러시니 왈문왕기볼하시니 문불재자호아 천지장상사문야신데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어니와 天之未喪斯文也시니 匡人이 其如予何리오.

후사자불득여어사문야어니와 천지미상사문야시니 광인이 기여여하리오.

 

공자께서 광에서 경계할 일이 있었는데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예악문물이 이제 나에게 있지 아니하느냐. 

하늘이 장차 이 문을 없애려면  뒤에 죽을 내가 이 문에 간여하지 않았을 것

이어니와 하늘이 이 문을 없애지 않으시니 광 땅의 사람이 나에게 어찌 하겠는가.“고 하셨다.

 


6장
太宰問於 子貢曰 夫子聖者與아 何其多能也오 子貢曰 固天縱之將聖이시고 又多能也시니라.

태재문어 자공왈 부자성자여아 하기다능야오 자공왈 고천종지장성이시고 우다능야시니라.

 

子聞之하시고 曰太宰知我乎인저 吾少也賤이라 故로 多能鄙事하니

자문지하시고 왈태재지아호인저 오소야천이라 고로 다능비사하니

 

君子는 多乎哉아 不多也니라 牢曰 子云吾不試라 故로 藝라하시니라.

군자는 다호재아 불다야니라 뇌왈 자운오불시라 고로 예라하시니라.

 

태재가 공자에게 묻기를, “선생님께서는 성인이신가?  어찌 그렇게 능한 것이 많습니까.“고 하셨다.
자공이 대답하시기를,

“ 선생님께서는 진실로 하늘이 내리신 측량할 수 없는 성인이시라 또한 재능도 많을 것이다.“고 하였다.

 

공자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태재가 나를 아는구나, 내가 젊었을 때에 지위가 천했다  그래서  천한 일에 아주 능하였다.
군자는 재능이 많아야 되는가,  많지 않아도 되느니라.“고 하셨다. 

뇌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쓰이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기예를 익혔다.’고 하신 적이 있었다.“고 했다.


 

7장
子曰 吾有知乎哉아 無知也로라 有鄙夫問於我하되 空空如也라도 我叩其兩端而竭焉하노라.

자왈 오유지호재아 무지야로라 유비부문어아하되 공공여야라도 아고기양단이갈언하노라.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
어리석은 자가 있어 나에게 묻는 일이 있다면, 그 말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 양끝을 잡아다가 밝혀주었다.“고 하셨다.

 


8장
子曰 鳳鳥不至하며 河不出圖하니 吾已矣夫인저.

자왈 봉조불지하며 하불출도하니 오이의부인저.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봉새도 이르지 아니하고,
하수에서는 그림도 나오지 아니하니 내 모든 일은 진정 그만인가.“고 하셨다.


 

9장

子見齊衰者와 冕衣裳者와 與瞽者하시고 見之에 雖少나 必作하시며 過之에 必趨러시다.

자견제최자와 면의상자와 여고자하시고 견지에 수소나 필작하시며 과지에 필추러시다.

 

공자께서 재최의 상복을 입은 자와 면류관을 쓰고 의상을 입은 자와 소경을 만날 때에는
잠깐 앉았을 때라도 반드시 일어나시며, 지나심에는 반드시 빠른 걸음으로 지나셨다.

 

 


10장
顔淵이 喟然歎曰仰之彌高하며 鑽之彌堅하며 瞻之在前이러니 忽焉在後로다

안연이 위연탄왈앙지미고하며 찬지미견하며 첨지재전이러니 홀언재후로다

 

夫子循循然善誘人하사 博我以文하시고 約我以禮하시니라

부자순순연선유인하사 박아이문하시고 약아이례하시니라

 

欲罷不能하여 旣竭吾才하니 如有所立卓爾라 雖欲從之나 末由也已로다.

 욕파불능하여기갈오재하니 여유소립탁이라 수욕종지나 말유야이로다.

 

 

안연이 길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으며,
뚫어볼수록 더욱 굳으며,바라볼 때에 앞에 계시더니 홀연히 위에 계시다.“고 하였다.


선생님께서 질서 있게 사람을 잘 지도하시고, 글로써 나를 넓혀주시고,
예로써 나를 제약하시니라

 

파하고자 해도 능히 못하며, 이미 나의 재주를 다하였는데 무엇인지 앞에 우뚝 섰으니
비록 좇고자 하나  말미암지 못하였다.

 


11장
子疾病이어시늘 子路使門人爲臣이러니 病間曰久矣哉라 由之行詐也여

자질병이어시늘 자로사문인위신이러니 병간왈구의재라 유지행사야여

 

無臣而爲有臣하니 吾誰欺오 欺天乎인저 且予與其死於臣之手也로

무신이위유신하니 오수기오 기천호인저 차여여기사어신지수야로

 

無寧死於二三子乎아 且予縱不得大葬이나 予死於道路乎아.

무녕사어이삼자호아 차여종불득대장이나 여사어도로호아.

 

공자께서 병환이 위중하실 때 자로가 문인으로 하여금 거짓 가신을 삼았다. 

병이 조금 나으심에 말씀하시기를, “오래되었구나,
유가 속임을 행함이여, 내가 가신이 없는데 가신이 있게 되었으니 내가 누구를 속일 것인가? 

하늘을 속일 것인가?
또 내가 거짓 가신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너희들의 손에 죽는 것이 편안치 않겠느냐? 

또 내가 비록 크게 장사는 못하더라도
내가 길에서야 죽겠느냐.“고 하셨다.


 

12장
子貢曰 有美玉於斯하니 韞匵而藏諸잇가 求善賈而沽諸잇가 子曰 沽之哉沽之哉나 我待賈者也로라.

자공왈 유미옥어사하니 온독이장제잇가 구선가이고제잇가 자왈 고지재고지재나 아대가자야로라.

 

자공이 말하기를, “아름다운 옥이 여기에 있다면 함 속에 감추어 두겠습니까?
좋은 값을 받고 팔겠습니까?”하니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팔아야지, 팔아야지,
그러나 앉아서 사갈 사람을 기다리겠다.“고 하셨다 .


  

13장
子欲居九夷러시니 或曰陋어니 如之何잇고 子曰 君子居之면 何陋之有리오.

자욕거구이러시니 혹왈루어니 여지하잇고 자왈 군자거지면 하루지유리오.

 

공자께서 구이에 옮겨 살고자 하셨더니,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추하다는데
어떻게 그러하실 수 있겠습니까?”고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군자가 거하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고 하셨다.


 

14장
子曰 吾自衛反魯然後樂正하여 雅頌各得其所하니라.

자왈 오자위반로연후락정하여 아송각득기소하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네가 위나라로부터 노나라로 돌아온 후에 음악이 바르게 되어
아악과 송악이 각각 그 일정한 위치를 얻게  되었다.”고 하셨다.


 

15장
子曰 出則事公卿하고 入則事父兄하며 喪事를 不敢不勉하며 不爲酒困이 何有於我哉리오.

자왈 출칙사공경하고 입칙사부형하며 상사를 불감불면하며 불위주곤이 하유어아재리오.

 

공자 말씀하시기를, “밖에 나아가면 공과 경을 섬기고 들어오면 바모와 형을 섬기고
상사를 당하면 정성을 다하고 술을 마시더라도 실수를 않는 것이 무엇 하나 내게 취할

것이 있겠느냐.”고 하셨다.


  

16장

子在川上曰逝者如斯夫인저 不舍晝夜로다.

자재천상왈서자여삽부인저 불사주야로다.

 

공자 내 위에 계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가는 것이 이와 같아서 낮과 밤을 쉬지 않는구나!.”고 하셨다.


  

17장
子曰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로라.

자왈 오미견호덕여호색자야로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내가 덕을 좋아하기를 이성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하셨다.

 

 
18장

子曰 譬如爲山에 未成一簣하여 止도 吾止也며 譬如平地에 雖覆一簣나 進도 吾往也니라.

자왈 비여위산에 미성일궤하여 지도 오지야며 비여평지에 수복일궤나 진도 오왕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비유컨대, 산을 만들되 한 삼태기로 이루지 못하고 그침도 내가 그치는 것이다.
비유컨대 땅을 평평하게 함에 비록 한 삼태기 흙을 덮더라도 나아가는 것도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고 하셨다.


 

19장
子曰 語之而不惰者는 其回也與인저

자왈 어지이불타자는 기회아여인저

 

공자 말씀하시기를, “말을 하면 게으르지 않은 자는
안회일 것인저.”라고 하셨다.


 

20장
子謂 顔淵曰 惜乎라 吾見其進也요 未見其止也로라.

자위 안연왈 석호라 오견기진야요 미견기지야로라.

 

공자께서 안연을 일러 말씀하시기를, “아깝도다!
나는 그 학문이 나아가는 것을 보았으나

그가 중도에서 그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다.


 

21장 
子曰 苗而不秀者有矣夫며 秀而不實者有矣夫인저

자왈 묘의불수자유의부며 수의부실자유의부인저

 

공자 말씀하시기를, “싹이 나오고 꽃이 못피는 것도 있고,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라고 하셨다.

 

 
22장

 子曰 後生可畏니 焉知來者之不如今也리오 四十五十而無聞焉이면 斯亦不足畏也已니라.

 자왈 후생과외니 언지래자지불여금야리오 사십오십이무문언이면 사역불족외야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후생이 두려운 것이니,어찌 오는 자가 지금사람만 같지 못하다는 것을 알겠는가?
사십니나 오십이 되어서도 아직 세상에 들림이 없다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고 하셨다.

 

 
23장
子曰 法語之言을 能無從乎아 改之爲貴니라 巽與之言을 能無說乎아

자왈 법어지언을 능무종호아 개지위귀니라 손여지언을 능무설호아

 

繹之爲貴니라 說而不繹하며 從而不改면 吾末如之何也已矣니라.

역지위귀니라 설이불역하며 종이불개면 오말여지하야이의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바르게 깨우쳐 주는 말을 능히 좇지 않겠는가마는 

고치는 것이 귀한 것이며,유순하고 거역함이 없이 이르는 말이
능히 기쁘지 않으리오마는 그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이 귀한 것이다. 

기뻐하되 그 실마리를 찾지 아니하고 따르되 고치지 아니 하면
나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셨다.

 

 
24장

 子曰 主忠信하며 毋友不如己者요 過則勿憚改니라.

 자왈 주충신하며 무우불여기자요 과칙물탄개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충성과 믿음을 주로 하고,
자기만 못한 자를 벗하지 말고,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고 하셨다.

 

 
25장

子曰 三軍은 可奪帥也어니와 匹夫는 不可奪志也니라.

자왈 삼군은 가탈수야어니와 필부는 불가탈지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삼군은 원수를 빼앗을 수도 있으나
필부의 뜻만은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다.

 

 

26장
子曰 衣敝縕袍하며 與衣狐貉者로 立而不恥者는 其由也與인저

자왈 의폐온포하며 여의호맥자로 입이불치자는 기유야여인저

 

不忮不求면 何用不臧이리오 子路終身誦之한대 子曰是道也何足以臧이리오.

불기불구면 하용불장이리오 자로종신송지한대 자왈시도야하족이장이리오.

 

공자 말씀하시기를,

“해어진 무명옷과 도포를 입고, 여우와 이리의 털로 만든 갖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자는 아마도 우일 것이다. 

남의 부귀를 시기하지 아니하며 탐내지 아니하면  어찌 등용한들 착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다.

자로가 이 말씀을 항상 외웠더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그것이 도리이기는 하나 그것만으로 어찌 족히 좋다고 하겠는가.”고 하셨다.

 

 

27장 
子曰 歲寒然後에 知松柏之後彫也니라.

자왈 세한연후에 지송백지후조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뒤에 시들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셨다.


 

 28장
子曰 知者不惑하고 仁者不憂하고 勇者不懼니라.

자왈 지자불혹하고 인자불우하고 용자불구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지혜로운 자는 미혹되지 아니하고
어진 자는 근심하지 아니하며 용맹한 자는 두려워하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29장
子曰 可與共學이라도 未可與適道며 可與適道라도 未可與立이며 可與立이라도 未可與權이니라.

자왈 가여공학이라도 미가여적도며 가여적도라도 미가여립이며 가여립이라도 미가여권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같이 학문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도에 갈 수는 없고
같은 도에 나갈 수는 있으나 같은 자리에 서지 못하며 같은 자리에 설 수도 있으나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셨다.

 

 

30장

 唐棣之華여 偏其反而로다 豈不爾思리오마는 室是遠而니라 子曰 未之思也언정 夫何遠之有리오.

 당체지화여 편기반이로다 개불이사리오마는 실시원이니라 자왈 미지사야언정 부하원지유리오.

 

당체꽃이 나부껴서 번쩍이도다. 어찌 너를 생각지 아니하랴 마는 집이 멀도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생각만 있다면 거리가 무슨 이유가되나”고 하셨다.
 

 

한은섭 옮김

논어(論語) 제8편 태백(泰伯 ) 1장~21장 

 

 

1장  

子曰 泰伯은 其可謂至德也已矣로다. 三以天下讓하되 民無得而稱焉이온여.

자왈 태백은 기가위지덕야이의로다. 삼이천하양하되 민무득이칭언이온여.

 

공자 가라사대 태백은 아마 지극한 덕이있는 사람 이라 할수있겠다.

세번이나 천하를 사양하고도 백성이 그의 덕을 칭송할 자취조차도 남기지 않았으니. 

 

2장
子曰 恭而無禮則勞하고 愼而無禮則葸하고 勇而無禮則亂하고 直而無禮則絞니라.

자왈 공이무례칙로하고 신이무례칙사하고 용이무례칙란하고 직이무례칙교니라.

 

君子篤於親이면 則民興於仁하고 故舊不遺면 則民不偸니라.

군자독어친이면 칙민흥어인하고 고구불유면 칙민불투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공손하기만 하고 예가 없으면 수고롭고,
삼가기만하고  예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하기만 하고 예가 없으면 어지럽고,
곧기만 하고 예가 없으면 조급하여 두서가 없을 것이다.

웃사람이 친척에게 도탑게 하면,  백성이 인에 감동할 것이요,
옛 친구를 잊지 아니하면 백성도 박대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다.

 


3장
曾子有疾하사 召門弟子曰啓予足하며 啓予手하라

증자유질하사 소문제자왈계어족하며 계어수하라

 

詩云戰戰兢兢하여 如臨深淵하며 如履薄氷이라하니 而今而後에야 吾知免夫로라.

시운전전긍긍하여 여림심연하며 여리박빙이라하니 이금이후에야 오지면부로라.

 

증자가 병이 위증할 때  이제야 내가 면함을 알았노라, 사람들이여!”고 하셨다.
제자를 불러 말하기를, “이불을 걷고 나의 발을 보라. 이불을 열고 나의 손을 보라 

시경에 이르기를 ‘두려워하고 경계하기를 깊은 못에 이른 듯이 엷은 얼음을 밟듯 하라’

하였으니 이제야  내가 면함을 알았노라 사람들아.


 

4장
曾子有疾이어시늘 孟敬子問之러니 曾子言曰 鳥之將死에 其鳴也哀하고

증자유질이어시늘 맹경자문지러니 증자언왈 조지장사에 기명야애하고

 

人之將死에 其言也善이니라. 君子所貴乎道者三이니 動容貌에 斯遠暴慢矣며

인지장사에 기언야선이니라. 군자소귀호도자삼이니 동용모에 사원폭만의며

 

正顔色에 斯近信矣며 出辭氣에 斯遠鄙倍矣니 籩豆之事則有司存이니라

정안색에 사근신의며 출사기에 사원비배의니 변두지사칙유사존이니라.

 

증자가 병이 위중할 때에   맹경자가 문병을 하였더니
증자가 이르기를, “새가 장차 죽으려고 할 때에는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고 할 때에는   그  말이 착한 것이다.
군자가 지켜야할 귀중한 도가 세 가지 있으니  몸을 움직임에는
사납고 거만함을 멀리하고 

얼굴빛을 바르게 함에는 믿음직하게 하고  말을 함에는
비루하고 어긋남을 멀리 할 것이니  그밖에 제사를 차리는 것 같은

소소한 일은 유사가 있어 할 것이다.

 


5장
曾子曰 以能問於不能하며 以多問於寡하며 有若無하며 實若虛하며 犯而不校를 昔者에 吾友嘗從事於斯矣러니라.

증자왈 이능문어불능하며 이다문어과하며 유약무하며 실약어하며 범이불교를 석자에 오우상종사어사의러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능하면서도 능치 못한 자에게 물으며 많으면서도 적은 이에게 물으며 있으되 없는 것 같이 하고
차있으되 없는 것 같이 하며 범하고도 계교치 아니함을 옛적에 내 벗이 일찍이 이에 종사하였느니라.

 


6장 
曾子曰 可以託六尺之孤하며 可以寄百里之命이요 臨大節而不可奪也면 君子人與아 君子人也니라.

증자왈 가이탁육척지고하며 가이기백이지명이요 임대절이불가탈야면 군자인여아 군자인야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육척의 어린 임금을 맡아 도울만하고, 백리의 명을 위임할 만하며
큰 절개에 임하여 뺏기지 아니할 사람이라면 그는 군자일 것이다. 참으로 군자일 것이다."

 


7장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니 任重而道遠이니라 仁以爲己任이니 不亦重乎아 死而後已니 不亦遠乎아.

증자왈 사불가이불홍의니 임중이도원이니라 인이위기임이니 불역중호아 사이후이니 불역원호아.

 

증자가 말하기를, “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야 할 것이니 그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어짐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야 하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야 말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8장 
子曰 興於詩하며 立於禮하며 成於樂이니라.

자왈 흥어시하며 입어례하며 성어락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시에서 보편적 정서를 일으키고,
예에서 의범을 세우고, 악에서 조화를 이룬다.”고 하셨다.

 


9장
子曰 民은 可使由之요 不可使知之니라.

자왈 민은 가사유지요 불가사지지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백성은 따르게는 할 수 있지만
원리를 백성마다 알게 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

 


10장 
子曰 好勇疾貧이 亂也요 人而不仁을 疾之已甚도 亂也니라.

자왈 호용질빈이 난야요 인이부인을 질지이심도 난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함을 싫어하면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이요,사람으로서 어질지 아니한 이를

미워함을 너무 심히 하는 것도 난을 일으키게 한다.”고 하셨다

 


11장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로다 使驕且吝이면 其餘는 不足觀也已니라.

자왈 여유주공지재자미로다 사교차린이면 기여는 불족관야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설령 주공과 같은 재질의 아름다움을 가지고도,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재주 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을 것이다.”

 


12장
子曰 三年學에 不至於穀을 不易得也니라.

자왈 삼년학에 불지어곡을 불역득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삼 년을 배우고도, 
녹봉에 뜻이 이르지  아니하는 이를
쉽게 얻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13장 
子曰 篤信好學하며 守死善道니라 危邦不入하고 亂邦不居하며 天下有道則見하고 無道則隱이니라.

자왈 독신호학하며 수사선도니라 위방불입하고 난방불거하며 천하유도칙견하고 무도칙은이니라.

 

邦有道에 貧且賤焉이 恥也며 邦無道에 富且貴焉이 恥也니라.

방유도에 빈차천언이 치야며 방무도에 부차귀언이 치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독실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기를 한하고 지키고 도를 착하게 하라.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아니하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가고

도가 없으면 숨을 것이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도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유하고

귀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고 하셨다.

 


14장
子曰 不在其位하여는 不謀其政이니라.

자왈 불재기위하여는 불모기정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그 지위에 있지 아니하면
그 정사를 꾀하지 아니 한다.‘고 하셨다.

 


15장

子曰 師摯之始에 關雎之亂이 洋洋乎盈耳哉라.

자왈 사지지시에 관저지란이 양양호영이재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태사 지가 처음 직책에 나갔을 때에
<관저>끝장의 악곡이 아름답게 귀에 차는구나.” 고 하셨다.

 


16장
子曰 狂而不直하며 侗而不愿하며 悾悾而不信을 吾不知之矣로라.

자왈 광이불직하며 동이불원하며 성성이불신을 오불지지의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뜻만 높고 곧지 않으며 무지하면서 근후하지 아니하며,
무능하면서 미쁘지 못한 사람은 나는 이를 알아보고 싶지도 않다.”고 하셨다.

 


17장 
子曰 學如不及이요 猶恐失之니라.

자왈 학여불급이요 유공실지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배우되 미쳐 가지 못하는 것같이 하며,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셨다.

 


18장 
子曰 巍巍乎라 舜禹之有天下也而不與焉이여.

자왈 외외호라 순우지유천하야이불여언이여.

  

높고 크도다, 순임금과 우임금은 천하를 가지고도

훌륭한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고 자신은 간여하지 않으셨도다.

 


19장

子曰 大哉라 堯之爲君也여 巍巍乎唯天爲大어늘 唯堯則之하시니 蕩蕩乎民無能名焉이로다.

자왈 대재라 요지위군야여 외외호유천위대어늘 유요칙지하시니 탕탕호민무능명언이로다.

 

巍巍乎其有成功也여 煥乎其有文章이여.

외외호기유성공야여 환호기유문장이여.

  

공자 말씀하시기를, “위대하도다, 요의 임금되심이여, 높고 높음은 오직 하늘이 큰 것인데
다만 요임금께서 본받으셨으니, 그 넓은 공덕을 백성들이 능히 무어라 이름 하지 못하는구나.

넓고 크도다 그 공을 이룸이여, 빛나도다 그 문장 있음이여!.”고 하셨다.

 


20장 
舜有臣五人而天下治하니라 武王曰 予有亂臣十人호라

순유신오인이천하치하니라 무왕왈 여유란신십인호라

 

孔子曰 才難이 不其然乎아 唐虞之際가 於斯爲盛하니 有婦人焉이라 九人而已니라

공자왈 재난이 불기연호아 당우지제가 어사위성하니 유부인언이라 구인이이니라

 

三分天下에 有其二하사 以服事殷하시니 周之德은 其可謂至德也已矣로다. 

삼분천하에 유기이하사 이복사은하시니 주지덕은 기가위지덕야이의로다.

 

순임금이 어진 신하 다섯 사람을 두심에 천하가 다스려졌다.
무왕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다스리는 신하 열 사람을 두었노라.”고 하거늘

공자 말씀하시기를, “옛 말에 ‘인재 얻기가 어렵다’고 했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당우의 시대가 가장 많았고, 무왕의 때에는 열 사람 중 부인이 있으니

아홉 사람이 있을 뿐이다.

문왕은 천하를 삼분하여 그 둘을 가지고도  은나라를 섬겼으니 문왕의 덕이야 말로
지극한 덕이라고 이를 뿐이다.”고 하셨다.

 


21장
子曰 禹는 吾無間然矣로다 菲飮食而致孝乎鬼神하시며 惡衣服而致美乎黻冕하시며

자왈 우는 오무간연의로다 비음식이치효호귀신하시며 악의복이치미호불면하시며

 

卑宮室而盡力乎溝洫하시니 禹는吾無間然矣로다.

비궁실이진력호구혁하시니 우는오무간연의로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우는 :  내가 허물할 수 없구나! 음식을 간소하게 하시되 선조의 신을

제사함에는 효성을 다하고, 평소의 의복은 허술하게 하시되, 제례의 의관은 화려하게 하고,

궁실은 검소하게 하되 백성을 위한 치수사업에는 힘을 다하셨으니
우는  내가 허물을 가질 수 없도다.”고 하셨다.

 

 

한은섭 옮김

논어(論語) 제7편 술이(述而) 1장~37장

 

 

1장
子曰 述而不作하며 信而好古를 竊比於我老彭하노라

자왈 술이불작하며 신이호고를 절비어아로팽하노라.

 

공자 가라사대 예것을 풀이하고 창작하지 아니하며

믿어서 옛 것을 좋아하는것을 노팽에게 비유할것이다

 


2장

子曰 黙而識之하며 學而不厭하며 誨人不倦이 何有於我哉오

자왈 묵이식지하며 학이불염하며 회인불권이 하유어아재오

 

공자 가라사대 묵묵히 진리를 탐구하며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것이 어찌 나에게 있겠느뇨.

 

 
3장
子曰 德之不修와 學之不講과 聞義不能徙와 不善不能改가 是吾憂也니라.

자왈 덕지불수와 학지불강과 문의불능사와 불선불능개가 시오우야니라.

 

공자 가라사대 덕을 닦지 못하는것과 배움에 강하지 못하는것과

의를 듣고도 능히 옮기지 못하며 착하지 않은것을 능히 고치지 못하는 것 이 나의 근심이다.

 

 
4장
子之燕居에 申申如也하시며 夭夭如也러시다

자지연거에 신신여야하시며 요요여야러시다.

 

공자께서 한가히 거하시니 그 모습은 편안 하시고 얼굴빛은 기뻐 하셨다.

 

 

5장

子曰 甚矣라 吾衰也여 久矣라 吾不復夢見周公이로다.
자왈 심의라 오쇠아여 구의라 오불복몽견주공이로다.

 

공자 가라사대 나도이제 많이 쇠약해 젔구나 꿈속에 주공을 뵙지 못하는구나.

 


6장

子曰 志於道하며 據於德하며 依於仁하며 遊於藝니라
자왈 지어도하며 거어덕하며 의어인하며 유어예니라.

 

공자 가라사대 도에 뜻을두고 덕에의거하며 어진것에 의지하며 예에서 노닐어야 할 것이다.

 

 

7장

子曰 自行束脩以上은 吾未嘗無誨焉이로라.
자왈 자행속수이상은 오미상무회언이로다.

 

공자가라사대 비록마른고기 한묶음을 가져올지라도 배우고자 하는이를 가르쳐주지 않은적이 없다.


 

8장
 子曰 不憤이어든 不啓하며 不悱어든 不發하되 擧一隅에 不以三隅反이어든 則不復也니라.
자왈 불분이어든 불계하며 불비어든 불발하되 거일우에 불이삼우반이어든 칙불부야니라.


공자가라사대 배우는 사람이 분발하지 않으면 그를 열어주지 않고

깨달은 이치를 표현하기를 애쓰지 않으면 그를 발하게 해주지 아니하며

한구석을 듣고서 세모퉁이를 돌이키지 못 한다면 다시 가르쳐 주지 않는다.

 

 

9장

子於有喪者之側에 未嘗飽也러시다 子於是日에 哭則不歌러시다.
자어유상자지측에 미상포야러시다 자어시일에 곡칙불가러시다.

 

공자께서 조문을 가시면 결코 배불리 먹지 아니하시고
곡은 하시되 노래는 부르지 아니 하셨다.

 

 

10장

子謂顔淵曰 用之則行하고 舍之則藏을 我與爾有是夫인저

자위안연왈 용지칙행하고 사지칙장을 아여이유시부인저

 

子路曰 子行三軍이면 則誰與시리잇고 子曰 暴虎馮河하며

자로왈 자행삼군이면 칙수여시리잇고 자왈 폭호풍하하며

 

死而無悔者를 不與也니 必也臨事而懼하며 好謀而成者也니라.

사이무회자를 불여야니 필야림사이구하며 호모이성자야니라.

 

공자께서 안연에게 이르기를, “우리를 등용하면 행하고
버리고 등용하지 않으면 재주를 간직할 이는
나와 너가 있을 뿐이다.”고 하셨다.


자로가 말하시기를, “ 선생님께서 삼군을 다스린다면 누구와 함께 하겠습니까.”고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범을 맨손으로 잡으며 하수를 걸어서 건너다가 죽어도 뉘우침이 없는 자를  같이 하지 않는다.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계획을 세워서 이루는 이를 좋아한다.

 


11장

 子曰 富而可求也인댄 雖執鞭之士라도 吾亦爲之어니와 如不可求인댄 從吾所好하리라

자왈 부이가구야인댄 수집편지사라도 오역위지러니와 여불가구인댄 종오소호하리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부유하게 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다면 비록 말채찍을 잡는 일꾼이라도
나는 그러한 일을 하겠고  만일 구하지 못할 일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리라.

 


12장

子之所愼은 齊戰疾이러시다

자지소신은 제전질이러시다.

 

공자가 조심하는 것에는 제사와 전쟁과 질병이었다.


 

13장

子在齊聞韶하시고 三月不知肉味하사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호라.

자재제문소하시고 삼월불지육미하사 왈 불도위락지지어사야호라.

 

공자가 제나라에 있으면서 소을 들으시고 
3개월간을 고기 맛을 알지 못하시고 
공자 말씀하시기를, “풍류가 이 경지에 이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하셨다.

 


14장

廉有曰 夫子爲衛君乎아 子貢曰 諾 吾將問之호리라

염유왈 부자위위군호아 자공왈 낙 오장문지호리라.

 

염유가 묻기를 선생님께서 위나라임금을 위하시겠나 하니

자공이 말하기를 그럴껄...내가한번 여쭈고옴세...

 

入하여 曰 伯夷叔齊는 何人也잇고

입하여 왈 백이숙제는 하인야잇고

 

공자께로 들어가 자공이 묻기를 백이숙제는 어떤 사람들 입니까?

 

曰 古之賢人也니라

왈 고지현인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옛날의 어진 사람이니라.”고 하셨다.

 

曰 怨乎잇가

왈 원호잇가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던가요?

 

曰 求仁而得仁이어니 又何怨이리오

왈 구인이득인이어니 우하원이리오


공자 말씀하시기를, “어진 것을 구하여 어진 것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했겠는가.”라 하셨다.

 

曰 夫子不爲也시니라.

왈 부자불위야시니라.


자공이 나와서 말하기를, “선생님께서는 돕지 아니할 것이다.”고 했다.

 


15장

子曰 飯疏食飮水하고 曲肱而枕之라도 樂亦在其中矣니 不義而富且貴는 於我如浮雲이니라.

자왈 반소식음수하고 곡굉이침지라도 낙역재기중의니 불의이부차귀는 어아여부운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자더라도 즐거움이 그 중에 있도다. 

의롭지 아니하고서 부유하게 되고 귀하게 된 것은
나에게는 뜬 구름과 같으니라.”고 하셨다.

 


16장

子曰 加我數年하여 五十以學易이면 可以無大過矣리라.

자왈 가아수년하여 오십이학역이면 가이무대과의리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몇 년이 더 주어진다면 나이 오십에 주역을 배워 큰 허물을 없앨 수 있으리라.

 


17장

子所雅言은 詩書執禮니 皆雅言也러시다

자소아언은 시서집례니 개아언야러시다.

 

공자 말씀 하신 바 아언은 시서와 집예이시니 모두가 아언이다.

 


18장

葉公이 問孔子於子路어늘 子路不對한대 子曰 女奚不曰其爲人也發憤忘食하고 樂以忘憂하여 不知老之將至云爾오.

엽공이 문공자어자로어늘 자로불대한대 자왈 여해불왈기위인야발분망식하고 낙이망우하여 불지로지장지운이오.

 

엽공이 공자에 대해 자로에게 물으니 자로는 대답하지 못했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네는 어찌하여 ‘그 사람의 사람 됨이 배움을 좋아하고 분발하여 먹는 일도 잊으며,
즐거워 근심도 잊고 늙어가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고 말씀하셨다.


 

19장

子曰 我非生而知之者라 好古敏以求之者也로라.

자왈 아비생이지지자라 호고민이구지지야로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구하는 사람이다.”고 하셨다.


 

20장

子不語怪力亂神이러시다.

자불어괴력란신이러시다.

 

공자는 괴이함과 완력과 어지러움과 귀신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셨다.

 


21장

子曰 三人行에 必有我師焉이니 擇其善者而從之요 其不善者而改之니라.

자왈 삼인행에 필유아사언이니 택기선자이종지요 기불선자이개지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세 사람이 행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나니 
그 중 착한 자를 가려서 쫓고 그 중 선하지 아니한 자로 나의 허물을 고친다.


 

22장

子曰 天生德於予시니 桓褪其如予何리오.

자왈 천생덕어여시니 환퇴기여여하리오.

 

공자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덕을 나에게 주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 할 것인가?”고 하셨다.

 


23장

子曰 二三子는 以我爲隱乎아 吾無隱乎爾로라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是丘也니라.

자왈 이삼자는 이아위은호아 오무은호이로라 오무행이불여이삼자자시구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내가 무엇을 숨긴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너희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행하고 너희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 나 공구이다.

 


24장

子以四敎하시니 文行忠信이러시다.

자이사교하시니 문행충신이러시다.

 

공자께서 네 가지 일로써 가르치시니, 문과 행과 충과 신이었다.

 

 

25장

子曰 聖人을 不得而見之矣어든 得見君子者면 斯可矣니라

자왈 성인을 불득이견지의어든 득견군자자면 사가의니라.

 

子曰 善人을 吾不得而見之矣어든 得見有者면 斯可矣니라

자왈 선인을 오불득이견지의어든 득견유긍자면 사가의니라.

 

亡而爲有하며 約而爲泰면 難乎有矣니라.

망이위유하며 약이위태면 난호유긍의니라.

 

子는 釣而不網하시며 翼不射宿이러시다.

자는 조이불망하시며 익불사숙이러시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성인을 직접 만나 그를 볼 수 없으니 군자를 만나 볼 수 있다면  좋겠도다.”고 하셨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착한 사람을  내가 만나 보지 못할진대 떳떳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만나보았으면 좋겠다.


없으면서 있다고 하고 비었으면서 찼다고 하며 
간략하면서 크다고 하면 떳떳한 마음을 가지기가 어렵다. 

 공자께서는 낚시질은 하시나 그물질은 하지 않으시며 
주살을 하시되  잠자는 새를 쏘지는 않으셨다.


 

27장

子曰 蓋有不知而作之者아 我無是也로라 多聞하여 擇其善者而從之하며 多見而識之가 知之次也니라.

자왈 개유불지이작지자아 아무시야로라 다문하여 택기선자이종지하며 다견이식지가 지지차야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이치를 알지 못하고 저술하는 이가 있을까  나는 이런 일이 없다. 
많이 들어서 그 착한 것을 택하여 따르고 많이 보아서 기록하면 지혜의 다음은 되리라.

 

 

28장

互鄕은 難與言이러니 童子見커늘 門人惑한대 子曰 與其進也요 不與其退也니 唯何甚이리오

호향은 난여언이러니 동자견커늘 문인혹한대 자왈 여기진야요 불여기퇴야니 유하심이리오

 

人潔己以進이어든 與其潔也요 不保其往也니라.

인결기이진이어든 여기결야요 불보기왕야니라.

 

 

호향 땅 사람들은 같이 말하기가 어려운데 그 마을 동자를 만나주니 문인들이 의심스러워했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그의 선으로 나옴을 허락한 것이지 그의 악으로의 물러감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니 

거절하는 것은 어찌 심하지 않은가 사람이 자기의 허물을 씻고 나오면 

그 결백함을 허락하고 지난 날의 잘못을 간직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29장 
子曰 仁遠乎哉아 我欲仁이면 斯仁至矣니라

자왈 인원호재아 아욕인이면 사인지의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인에 이르는 길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을 하고자 하면 인은 곧 이르는 것이다.”고 하셨다.

 


30장
陳司敗問昭公知禮乎잇가 孔子曰 知禮시니라 孔子退 어시늘揖巫馬期而進之하여

진사패문소공지례호잇가 공자왈 지례시니라. 공자퇴어시늘 읍무마기이진지하여

 

曰吾聞君子不黨이라하니 君子亦黨乎아 君取於吳하니 爲同姓이라

왈오문군자불당이라하니 군자역당호아 군취어오하니 위동성이라.

 

謂之吳孟子라하니 君而知禮면 孰不知禮리오.

위지오맹자라하니 군이지례면 숙불지례리오.

 

진나라 사패가 묻기를, “소공이 예를 압니까?” 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예를 아신다.”고 햐셨다.
공자가 물러나시니  무마기에게 읍하고 그에게 가니 무마기가 말하기를, ‘군자는 편당하지 아니한다.

”하였는데  군자는 또한 편당하십니까. 소공이 같은 성씨의 오나라에 장가를 들어 같은 성씨가

되었는데 이를 <오맹자>라고 하니 그 임금이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르겠습니까?”고 했다.

 


31장 
子與人歌而善이어든 必使反之하시고 而後和之러시다.

자여인가이선이어든 필사반지하시고 이후화지러시다.

 

공자께서 사람과 더불어 노래를 하고 잘하면
반드시 다시하라 하시고 뒤에 화답하셨다.

 


32장 
子曰 文莫吾猶人也아 躬行君子는 則吾未之有得호라.

자왈 문막오유인야아 궁행군자는 칙오미지유득호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문은 나도 다른 사람과 같우나
군자의 도를 몸소 행하는 것은 내가 일찍이 하지 못하였다.

 


33장 
子曰 若聖與仁은 則吾豈敢이리오 抑爲之不厭하며 誨人不倦은 則可謂云爾已矣니라

자왈 약성여인은 칙오개감이리오 억위지불염하며 회인불권은 칙가위운이이의니라

 

公西華曰 正唯弟子不 能學也로소이다.

공서화왈 정유제자불 능학야로소이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성인과 인자 같은 존재야 내가 어찌 감히 될 수 있겠는가? 
다만 배우기를 싫어하지 아니하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을
말 할 수 있을 뿐이니라.
공서화가 말하기를, “참으로 제자가 능히 배우지 못할 바입니다.”고 했다.


 

34장
子 疾病이어시늘 子路請禱한대 子曰 有諸아 子路對曰 有之하니 曰禱爾于上下神祇라하니이다

자 질병이어시늘 자로청도한대 자왈 유제아 자로대왈 유지하니 뇌왈도이우상하신기라하니이다

 

子曰 丘之禱久矣니라.

자왈 구지도구으니라.

 

공자가 병이 심하거늘   자로가 빌기를 청하니 공자 말씀하시기를, “그러한 일이 있었는가?”고 하니 
자로가 대답하기를, “있습니다.”고 했다.  <뇌>에 이르기를, “너를 도와 달라고 천지시명에게 빈다.

”고 하였습니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러한 기도를 한 지는 오래 되었도다.”고 하셨다.

 


35장
子曰 奢則不孫하고 儉則固니 與其不孫也론 寧固니라.

자왈 사칙불손하고 검칙고니 여기불손야론 영고니라.

 

공자 가라사대 사치스러우면 겸손하지 못하고 검소하면 고루해 보인다.

그러나 견손치 아니함 보다는 고루한 것 이 좋다.고 하셨다.

 


36장 
子曰 君子坦蕩蕩이요 小人長戚戚이니라.

자왈 군자탄탕당이요 소인장척척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군자의 마음은 편안하고
소인의 마음은 항상 근심과 걱정을 한다.”고 하셨다. 

 


37장 
子는 溫而厲 하시며 威而不猛하시며 恭而安이러시다.

자는 온이려 하시며 위이불맹하시며 공이안이러시다.

 

공자는 온화하시면서 엄숙하시고
위엄이 있으면서 사납지 않으시고
공손하시면서도 마음이 편하셨다

 

한은섭 옮김

 

논어(論語) 제 5편 공야장[公冶長]

 

 

此篇은 皆論古今人物賢否得失하니
蓋格物窮理之一端也니
凡二十七章이라
胡氏以爲疑多子貢之徒所記云이라.


이 편(篇)은 모두 고금(古今)의 인물(人物)에 대한 현부(賢否)와 득실(得失)을 평론했으니,
격물(格物)•궁리(窮理)의 한 가지이다.
모두 27장(章)이다.
호씨(胡氏)는 “이 편(篇)은 자공(子貢)의 문도(門徒)들이 기록한 것이 많은 듯하다.” 하였다.

 

 

1장
子謂 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로妻之.
자위 공야장 가처야. 수재류설지중 비기죄야 이기자로처지.

 

子謂南容 邦有道 不廢 邦無道 免於刑戮 以其兄之子 妻之.
자위남용 방유도 불폐 방무도 면어형륙 이기형지자 처지.

 

공자(孔子)께서 공야장(公冶長)을 두고 평하시기를 “사위 삼을 만하다.
비록 포승으로 묶여 옥중(獄中)에 있었으나 그의 죄가 아니었다.” 하시고,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셨다.

 

공자 남용에게 말씀하시기를,나라에 도가 있음에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나라에 도가 없음에는 조심하여 형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시고 그 형의 자식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셨다.

 

 

해설

공야장(公冶長)은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이다.
처(妻)는 <딸을 시집보내어> 그의 아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누(縲)는 검정색의 포승이고, 설(絏)은 결박이다.
옛날 옥중(獄中)에서는 검정색의 포승으로 죄인(罪人)을 결박하였다.
공야장(公冶長)의 사람됨은 상고할 곳이 없으나,
부자(夫子)께서 ‘사위 삼을 만하다.’고 칭찬하셨으니,
그에게 반드시 취할 만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또 그 사람이 비록 일찍이 옥중(獄中)에 갇혀 있었으나 그 사람의 죄가 아니었으니,
참으로 사위 삼는 데에 나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가 있고 없음은 자신에게 달려 있을 따름이니,
어찌 밖으로부터 이르른 것을 가지고 영욕(榮辱)을 삼겠는가!

남용(南容)은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이니 남궁(南宮)『[남쪽에 있는 궁궐]』에 거주하였고,
이름은 도(縚』)이며 또 괄(适)이라고도 하였다.
자(字)는 자용(子容), 시호는 경숙(敬叔)이니, 맹의자(孟懿子)의 형(兄)이다.
불폐(不廢)는 반드시 쓰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언행(言行)을 삼가였으므로, 잘 다스려지는 조정에서는 쓰임을 당하고,
난세(亂世)에는 화(禍)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일은 또 제11편『〔先進〕』에 보인다.

혹자가 말하기를
“공야장(公冶長)의 어짊이 남용(南容)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성인(聖人)이 자기 딸을 공야장(公冶長)에게 시집보내고
형의 딸을 남용(南容)에게 시집보냈으니,

이는 형에게 후히 하고 자기에게 박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이는 자신의 사심(私心)을 가지고 성인(聖人)을 엿본 것이다.
무릇 사람들이 혐의를 피하는 것은 모두 자기 마음에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은 본래 지극히 공정하시니, 어찌 혐의를 피할 일이 있겠는가?
하물며 딸을 시집보내는 일은 반드시 딸의 재질을 헤아려서 배필을 구하는 것이니,
더욱이 피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공자(孔子)의 이 일로 말하면,
그 연령의 차이와 시집간 시기의 선후(先後)를 모두 알 수 없거니와,
다만 혐의를 피했다고 하는 것은 크게 옳지 않다.
혐의를 피하는 일은 현자(賢者)도 하지 않는데 하물며 성인(聖人)에게 있어서이겠는가!”

 


2장
子謂子賤 君子哉 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
자위자천 군자재 약인 노무군자자 사언취사.

 

공자가 자천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군자로구나 노나라에 군자가 없다면 어찌 이런 사람을 취하리오.

 

해설

 자천(子賤)은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이니, 성(姓)은 복(宓)이고, 이름은 불제(不齊)이다.
‘사언취사(斯焉取斯)’의 위 사자(斯字)는 이 사람『〔子賤〕』이고, 아래 사자(斯字)는 이러한 덕(德)이다.
자천(子賤)은 아마도 어진이를 존경하고 훌륭한 벗을 취하여 덕(德)을 이룬 사람인 듯하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이미 그의 어짊을 찬탄(贊歎)하시고,
다시 “노(魯)나라에 군자(君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취하여 
이러한 덕(德)을 이루었겠는가?”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로 인하여 노(魯)나라에 군자(君子)가 많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 소씨(蘇氏)가 말하였다.
“사람의 선(善)을 칭찬할 적에
반드시 그 부형(父兄)과 사우(師友)를 근본 하여 말하는 것은 후덕(厚德)함이 지극한 것이다.”

 

 

 

3장
子貢問曰賜也 何如 子曰 女 器也 曰 何器也 曰 瑚璉也.
자공문왈사야 하여 자왈 녀 기야 왈 하기야 왈 호련야.

 

자공이 묻기를 사는 어떠합니까? 하니공자 가라사대 너는 훌륭한 그릇이다
고 하시니 자공이 말하기를 어떤 그릇 입니까? 하니 호련이다고 했다.

 

해설

기(器)란 쓰임이 있는 완성된 재질이다.
하(夏)나라에서는 호(瑚)라 하였고, 상(商)나라에서는 연(璉)이라 하였고,
주(周)나라에서는 보궤(簠簋)라고 하였으니,
모두 종묘(宗廟)에서 서직(黍稷)을 담는 그릇인데, 옥(玉)으로 장식하였으니,
그릇 중에 귀중하고 화려한 것이다.
자공(子貢)은 공자(孔子)께서 자천(子賤)을 군자(君子)라고 허여 하심을 보았다.
이 때문에 저는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孔子)께서 이처럼 답하셨으니,
그렇다면 자공(子貢)은 비록 불기(不器)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또한 그릇의 귀한 것일 것이다.

 


4장
或曰 雍也 仁而不佞이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혹왈 옹야 인이불녕이 자왈 언용녕 어인이구급 누증어인 불지기인 언용녕.

   

어떤이가 말하기를 옹은 이질기는 하나 말재주가 없습니다.하니 공자 가라사대
사람을 대하는데 말재주로서 하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일이 많다. 그의
어진 마음을 알지못하고 어찌 말재주따위를 쓰겠는가?

 

해설

어(禦)는 당(當)『[상대, 또는 막는 것]』하는 것이니, 남의 말에 응답함과 같다.
급(給)은 말을 잘하는 것이다.
증(憎)은 미워함이다.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구변 좋은 사람이 남과 응답하는 것은 단지 입으로 약삭빠르게 말하여 이기기를 취할 뿐이요,
실정(實情)이 없어서 한갓 남들에게 미움을 받는 일이 많을 뿐이다.
내 비록 중궁(仲弓)이 인(仁)한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그의 말재주 없음은 바로 훌륭함이 되는 것이요 흠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라고 다시 말씀한 것은 깊이 깨우치려고 하신 것이다.
혹자가 의심하기를
“중궁(仲弓)의 어짊으로도 부자(夫子)께서 그의 인(仁)을 허여 하지 않으심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인(仁)의 도(道)는 지극히 커서 전체가 인(仁)이고 그침이 없는 자가 아니고서는 이에 해당될 수 없다.
안자(顔子)와 같은 아성(亞聖)으로서도 오히려 3개월이 지난 뒤에는 인(仁)을 떠남이 없지 못하였다.
더구나 중궁(仲弓)은 비록 어질다고 하지만 안자(顔子)에 미치지 못하니,
성인(聖人)께서 참으로 가볍게 허여 하실 수 없는 것이다.”

 


5장
子使漆彫開 仕 對曰吾斯之未能信. 子 說.

자사칠조개 사 대일오사지미능신. 자 열.


공자께서 칠조개로 하여금 벼슬을 하게 하시니 칠조개가 답하기를
제가 아직 벼슬을 나갈 자신이 없습니다.고 했다.이에 공자께서 기뻐 하셨다.

 

해설

『칠조개(漆雕開)는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이니, 자(字)는 자약(子若)이다.
사(斯)는 이 이치를 가리켜 말한 것이요,
신(信)은 참으로 그러함을 알아 털끝 만한 의심도 없음을 말한다.
칠조개(漆雕開)는 스스로 말하기를
“아직 자신할 수 없어 사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그의 뜻이 돈독함을 기뻐하신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칠조개(漆雕開)가 이미 대의(大意)를 보았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기뻐하신 것이다.”
또 말씀하였다.
“옛사람은 도(道)를 봄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사씨(謝氏)가 말하였다.
칠조개(漆雕開)의 학문(學問)은 상고할 곳이 없다.
그러나 성인(聖人)께서 그로 하여금 벼슬을 하게 하였으니,
반드시 그의 재질이 벼슬할 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은미(隱微)함에 이르러서는
털끝만큼이라도 자득(自得)하지 못함이 있으면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데 무방(無妨)『[불해(不害)]』하니,
이것은 성인(聖人)『[공자(孔子)]』도 아시지 못하는 것인데,
칠조개(漆雕開)가 스스로 안 것이다.
그 재질이 벼슬할 만한데도 그 그릇이 작은 성취에 안주하지 않았으니,
후일의 성취하는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부자(夫子)께서 이 때문에 기뻐하신 것이다.”』

 

 


6장
子曰 道不行 乘桴 浮于海 從我者 其由與 子路聞之 喜
자왈 도불행 승부 부우해 종아자 기유여 자로문지 희

 

子曰 由也 好勇 過我 無所取材.
자왈 유야 호용 과아 무소취재.

 

공자 가라사대 도가 행해지지 않는지라 바다로 떠나갈까 하니 나를 따르는 자는
아마도 유 일것이다.이말을 듣은 자로가 기뻐하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유는 용
맹을 좋아 하기는 나보다 낫지만 재능에서 취할바는 아니다.

 

해설

『부(桴)는 뗏목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바다를 향해하겠다는 탄식은 천하(天下)에 어진 임금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서 하신 말씀이다.
자로(子路)는 의리(義理)에 용감하였으므로 그가 자신을 따라올 것이라고 하신 것이니,
이는 모두 가설(假設)해서 하신 말씀일 뿐이다.
그런데 자로(子路)는 이것을 실제라고 생각하여 부자(夫子)께서 자기를 허여해 주심을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그의 용맹을 찬미하시고,
그 사리를 헤아려 의(義)에 맞게 하지 못함을 기롱하신 것이다.”』

 


7장
孟武伯 問 子路 仁乎 子曰 不知也 又問 子曰 由也 千乘之國
맹무백 문 자로 인호 자왈 불지야 우문 자왈 유야 천승지국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求也 何如 子曰 求也 千室之邑
가사치기부야 부지기인야 구야 하여 자왈 구야 천실지읍

 

百乘之家 使爲之宰也 可不知其仁也 赤也 何如 子曰 赤也
백승지가 사위지제야 가부지기인야 적야 하여 자왈 적야

 

束帶立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
속대립어조 가사여빈객언야 부지기인야.

 

맹무백이 자로에 대해 묻기를 자로는 어집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그가 어진지는 알수 없으나 유야는 천승의 나라에서 그 군사를 다스릴수는 있으나

그가 어짐은 알지 못하겠다 하셨다.

 

맹무백이 묻기를 구는 어떻습니까?

공자가 답하기를 천승의 고을과 백승의 집안에서 재가 될수는 있으나 그가 어짐은 알지 못하겠구나 하셧다.

 맹무백이 묻기를 적은 어떠합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적은 띠를 두르고 조정에서서 빈객과 더블어 말하게 할수는 있으나 그가 어짐은 알지 못하겟다 고 하였다.

 

해설

『부(賦)는 병(兵)『[군(軍)]』이다.
옛날에는 토지의 세금을 따져 군사를 내었으므로,
군(軍)을 일러 부(賦)라 하였으니,
《춘추전(春秋傳)》에 이른바
“저희 나라의 군(軍)을 모두 모았다『〔悉索敞賦〕』.”는 것이 이것이다.
자로(子路)의 재주는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을 뿐이며, 인(仁)한지는 알지 못하겠다고 말씀한 것이다.』
『“구(求)『[염유]』는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구(求)는 천실(千室)『[천호(千戶)]』의 큰 읍(邑)과
백승(百乘)『[경대부(卿大夫)]』의 집안에 재(宰)가 되게 할 수는 있거니와
그가 인(仁)한지는 알지 못하겠다.”』
『천실(千室)은 큰 읍(邑)이요, 백승(百乘)은 경대부(卿大夫)의 집안이다.
재(宰)는 읍장(邑長)과 가신(家臣)의 통칭이다.』
『“적(赤)은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적(赤)은 <예복(禮服)을 입고> 띠를 띠고서 조정에 서서
빈객(賓客)을 맞아 대화를 나누게 할 수는 있거니와 그가 인(仁)한지는 알지 못하겠다.”』
『적(赤)은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이니,
성(姓)은 공서(公西)요, 자(字)는 자화(子華)이다.』 

 

 

 

8장
子謂 子貢曰 女與回也 孰愈 對曰賜也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자위 자공왈 녀여회야 숙유 대왈사야하감망회 회야 문일이지십

 

賜也는 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吾與女 弗如也.
사야는 문일이지이. 자왈 불여야.오여녀 불여야.

 

공자가 자공에게 묻기를 너희중에는 누가 나은냐 고 묻자

자공이 답하기를 제가 어찌회를 바라 보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듣으면 열을 알고 사는 하나를 듣으면 둘을 압니다.고 하니

공자 가라사대 너와 나는 같지 않구나고 햇다.

 

해설
『유(愈)는 낫다는 뜻이다.』
『일(一)은 수(數)의 시작이요, 십(十)은 수(數)의 끝이며, 이(二)는 일(一)의 상대이다.
안자(顔子)는 밝은 지혜가 비추는 바로 시작을 가지고 끝을 알았고,
자공(子貢)은 추측하여 알아 이것을 인하여 저것을 알았다.
<선진편(先進篇)에> 공자(孔子)께서 “내 말을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다.
『〔無所不說〕』.”고 안자(顔子)를 칭찬한 것과
<학이편(學而篇)에> “지나간 것을 말해주니 말하지 않은 것을 안다
『〔告往知來〕』.”고 자공(子貢)을 칭찬한 것이 그 증거이다.』

『여(與)는 허여(許與)이다.』
『호씨(胡氏)가 말하였다.
“<헌문편(憲問篇)에> 자공(子貢)이 사람들을 비교 평가하자,
공자(孔子)께서 ‘나는 그럴 겨를이 없다.’하셨으며,
또 ‘너는 안회(顔回)와 누가 나으냐?’고 물어,
그가 자기 자신을 앎이 어떠한가를 살펴보신 것이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은 상지(上智)의 자질로,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이『〔生而知之〕』의 다음이요,
문일지이(聞一知二)는 중인(中人) 이상의 자질로, 배워서 아는 이『〔學而知之〕』의 재주이다.
자공(子貢)이 평소에 자신을 안회(顔回)에 견주어 따라갈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비유하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이다.
부자(夫子)는 자공(子貢)이 자신을 앎이 분명하고 또 자기를 굽히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그 말을 옳게 여기시고 또 거듭 허여 하신 것이다.
자공(子貢)은 이 때문에 끝내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되었고,
비단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9장
宰予晝寢 子曰 朽木 不可雕也 糞土之墻 不可杇也 於予與 何誅
재여주침 자왈 후목 불가조야 분토지장 불가오야 어여여 하주

 

子曰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에 改是.
자왈 시오어인야 청기어이기신행 금오어인야 청기언이관기행 어여여에 개시.

 
재여가 낮잠을 자거늘 공자 가라사대

썩은 나무는 조각을 할수 없고 부스러진 흙으로 만든 담장은 흙손질 하지 못할것 이니

여에게 무엇을 꾸짖을꼬 하셨다

공자 가라사대 비로소 내가 그 말을 듣고 그 행실을 믿었었는데 사람들 말을 듣고
이제 그 행실을 보니 재에 있어서는 이런 행동을 고쳐야 한다 고 하셨다.

 

해설 

『주침(晝寢)은 낮을 당하여 잠자는 것을 말한다.
후(朽)는 썩은 것이요, 조(雕)는 조각이요, 오(杇)는 흙손질이다.
그 뜻과 기운이 흐리고 게을러 가르침을 베풀 곳이 없음을 말씀한 것이다.
여(與)는 어조사이다.
주(誅)는 꾸짖음이니, 꾸짖을 것이 없다고 말씀한 것은 바로 그를 깊이 꾸짖으신 것이다.』
『재여(宰予)는 말은 잘하였으나 행실이 말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 재여(宰予)의 일로 인하여 나의 이러한 잘못을 고쳤다고 말씀하셨으니,

거듭 깨우치신 것이다.』

『호씨(胡氏)가 말하였다.
“자왈(子曰)은 연문(衍文)인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한 때에 하신 말씀이 아닐 것이다.”』

『범씨(范氏)가 말하였다.
“군자(君子)가 학문(學問)에 대하여 날로 부지런히 힘써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
그러면서도 행여 따라 가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재여(宰予)는 낮잠을 잤으니,
스스로 포기함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는가?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그를 책망하신 것이다.”』

『호씨(胡氏)가 말하였다.
“재여(宰予)가 의지로 기운을 통솔하지 못하고, 편안히『〔居然〕』 나태하였다.
이는 안락하려는 기운이 우세하고, 경계하는 뜻이 태만해진 것이다.
옛 성현(聖賢)은 일찍이 게으름과 편안히 지내는 것을 두렵게 여기고,
부지런히 힘쓰며 쉬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힘쓰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는 바로 공자(孔子)께서 재여(宰予)를 깊이 꾸짖으신 이유이다.
‘말을 듣고 다시 행실을 살펴보게 되었다.’는 것은,
성인(聖人)이 이 일을 기다린 뒤에 그렇게 되신 것도 아니며,
또한 이로 말미암아 배우는 자들을 모두 의심하신 것도 아니다.
다만 이를 인하여 교훈을 세워 제자(弟子)들을 깨우쳐서 말을 삼가고 행실을 힘쓰게 하려고 하신 것일 뿐이다.”』

 

 

10장
子曰 吾未見剛者 或對曰 申棖. 子曰 棖也 慾 焉得剛.
자왈 오미견강자 혹대왈 신정. 자왈 정야 욕 언득강.

 

공자 가라사대 나는 강한자를 아직 보지못하였다. 고 하니

어떤이가 말하기를 신정이란 사람이 있습니다.하니

공자 답하기를 욕심이 있음을 어찌 강하다 하랴.

 

해설
 강(剛)은 굳세고 강하여 굽히지 않는다는 뜻이니, 사람으로서 가장 능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게서 보지 못하였다고 탄식하신 것이다.
신장(申棖)은 제자(弟子)의 성명(姓名)이다.
욕(慾)은 기욕(嗜慾)이 많은 것이다.
기욕(嗜慾)이 많으면 강(剛)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사람이 욕심이 있으면 강(剛)할 수 없고, 강(剛)하면 욕심에 굽히지 않는다.”』

『사씨(謝氏)가 말하였다.
“강(剛)과 욕(慾)은 서로 정반대이다. 물건을 이길 수 있는 것을 강(剛)이라 한다.
그러므로 항상 만물(萬物)의 위에 펴 있고, 물건에 가려지는 것을 욕(慾)이라 한다.
그러므로 항상 만물(萬物)의 아래에 굽히게 된다.
예로부터 의지가 있는 자가 적고, 의지가 없는 자가 많으니,
부자(夫子)께서 강(剛)한 자를 만나보지 못하심이 당연하다.
신장(申棖)의 욕(慾)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사람됨이 아마도 고집 세고 자기 지조를 아끼는 자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때문에 혹자가 강(剛)하다고 여긴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욕(慾)이 되는 것인 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11장
子貢曰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子曰 賜也 非爾所及也.
자공왈 아불욕인지가제아야 오역욕무가제인.자왈 사야 비이소급야.


자공이 말하기를 나는 남이 나에게 더하는 일을 바라지 않으므로

나도 남에게 가하지 않겠습니다.고 하였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사야 이것은 네가 미칠바가 아니다

 

해설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남이 나에게 가(加)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나도 남에게 가(加)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였으니,
이는 인자(仁者)의 일로서 억지로 힘쓰지 않고 저절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자공(子貢)이 미칠 바가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내가 남이 나에게 가(加)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나도 남에게 가(加)하지 않으려고 함은 인(仁)이요,
자신에게 시행하여 원하지 않는 것을 나 역시 남에게 베풀지 않으려 하는 것은 서(恕)이다.
서(恕)는 자공(子貢)이 혹 힘쓸 수 있으나, 인(仁)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건대, ‘무가제인(無加諸人)’의 무(無)는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요,
‘물시어인(勿施於人)’의 물(勿)은 금지하는 말이니, 이것이 인(仁)과 서(恕)의 구별이다.』

 

12장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자공왈 부자지문장 가득이문야 부자지언성여천도 불가득이문야.

 

자공이 말하기를, “선생님의 문장은  얻어 들을 수 있지마는 

말씀 중에 성과 천도에 대한 말씀은  얻어 들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해설
 『문장(文章)은 덕(德)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위의(威儀)와 문사(文辭)가 모두 이것이다.
성(性)은 사람이 부여받은 천리(天理)요, 천도(天道)는 천리자연(天理自然)의 본체이니, 그 실상은 한 이치이다.』

『부자(夫子)의 문장(文章)은 날마다 밖으로 드러나 진실로 배우는 자들이 함께 들을 수 있으나,
성(性)과 천도(天道)에 있어서는 말씀을 적게 하시어 배우는 자들이 들을 수 없었다.
이는 성인(聖人)의 문하(門下)에서는 가르침이 등급을 뛰어넘지 않으므로,
자공(子貢)은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얻어 듣고는 그 훌륭함에 감탄한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이는 자공(子貢)이 부자(夫子)의 지극하신 말씀을 듣고 탄미(歎美)한 말이다.”』

 

13장
子路 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자로 유문 미지능행 유공유문.

 

자로는 깨우쳐 줌을 듣고 그것을 능히 행하지 못했으니 오직 다 깨우쳐 줌이 있을까 두려워 했다.

 

해설 

『前所聞者를 旣未及行이라 故로 恐復有所聞而行之不給也라』

『전에 들은 것을 이미 미처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다시 들음이 있어 그것을 실행함에 충분하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范氏曰 子路聞善이면 勇於必行하니 門人自以爲弗及也라 故로 著之라 若子路면 可謂能用其勇矣로다』

『범씨(范氏)가 말하였다.
“자로(子路)는 좋은 말을 들으면 반드시 실행하는 데 용감하니,
문인(門人)들이 스스로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이것을 기록한 것이다.
자로(子路)와 같다면 그 용맹을 잘 썼다고 말할 만하다.”』 

 

 

14장
子貢問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자공문왈 공문자 하이위지문야 자왈 민이호학 불치하문.

 

是以謂之文也.
시이위지문야.

 

자공이 묻기를 공문자를 어찌 문 이라고 이르십니까? 고 하니

공자 가라사대
민첩하고 배움을 좋아하며 아랫사람 에게 묻는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문 이라고 이르는 것 이다.고 하셨다.

 

해설 

『孔文子는 衛大夫니 名圉라 凡人性敏者는 多不好學하고 位高者는 多恥下問이라
故로 諡法에 有以勤學好問爲文者하니 蓋亦人所難也라 孔圉得諡爲文은 以此而已니라』

 

『공문자(孔文子)는 위(衛)나라 대부(大夫)이니 이름은 어(圉)이다.
대체로 사람은 성품이 명민(明敏)한 자는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많고,
지위가 높은 자는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는 이가 많다.
그러므로 시호를 내리는 법에,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행실을 문(文)이라 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 역시 사람이 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어(孔圉)가 문(文)이라는 시호를 얻은 것은 이 때문일 뿐이다.』


『蘇氏曰 孔文子使太叔疾出其妻而妻之러니 疾通於初妻之娣한대
文子怒하여 將攻之할새 訪於仲尼하니 仲尼不對하고 命駕而行하시다
疾奔宋한대 文子使疾弟遺로 室孔姞하니 其爲人如此로되 而諡曰文하니 此子貢之所以疑而問也라
孔子不沒其善하여 言能如此라도 亦足以爲文矣니 非經天緯地之文也니라』

 

『소씨(蘇氏)가 말하였다.
“공문자(孔文子)가 태숙질(太叔疾)로 하여금 본 부인을 쫓아내게 하고는

자기의 딸인 공길(孔姞)을 그에게 시집보내었다.
그후 태숙질(太叔疾)이 본부인의 여동생과 정을 통하였다.
이에 공문자(孔文子)는 노(怒)하여 장차 태숙질(太叔疾)을 치려 하면서 중니(仲尼)에게 묻자,
중니(仲尼)는 대답하지 않고 수레를 재촉하여 떠나셨다.
태숙질(太叔疾)이 쫓겨서 송(宋)나라로 달아나니,
공문자(孔文子)는 태숙질(太叔疾)의 아우인 유(遺)로 하여금 공길(孔姞)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였다.
공문자(孔文子)는 사람됨이 이와 같았는데도 <죽은 뒤에>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으니,
이 때문에 자공(子貢)이 의심하여 물은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그의 선(善)한 점을 없애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더라도 문(文)이라고 시호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셨으니,
경천위지(經天緯地)의 문(文)은 아니다.』

 

 

15장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자위자산 유군자지도사언 기행기야공 기사상야경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기양민야혜 기사민야의.

 

공자께서 자산에게 이르기를 군자의 도리에는 넷이 있으니

그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그 윗사람을 섬기기를 공손히 하고

그 백성을 다스림을 은혜로서 하고 그 백성을 부리기를 의롭게 하는것이다.

 

해설

『子産은 鄭大夫公孫僑라 恭은 謙遜也요 敬은 謹恪也요 惠는 愛利也라
使民義는 如都鄙有章하고 上下有服하며 田有封탳하고 廬井有伍之類라』

 

『자산(子産)은 정(鄭)나라 대부(大夫) 공손교(公孫僑)이다.
공(恭)은 겸손이요, 경(敬)은 삼감이요, 혜(惠)는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것이다.
백성을 부림에 의롭다는 것은 예를 들면 도시와 지방에 따라 법도의 차이가 있으며,
계급의 상하(上下)에 따라 복장이 다르며, 토지(土地)에는 두둑과 도랑을 두고,
사는 집과 마을『〔井〕』에는 다섯 가호씩 서로 조(組)가 되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다.』


『吳氏曰 數其事而責之者는 其所善者多也니
『臧文仲不仁者三, 不知者三이 是也요 數其事而稱之者는 猶有所未至也니
子産有君子之道四焉이 是也주:장문중불인자삼』라
今或以一言蓋一人하고 一事蓋一時하니 皆非也니라』


『오씨(吳氏)가 말하였다.
“그 일을 하나하나 열거하여 꾸짖는 것은 그의 선(善)한 점이 많은 것이니,
장문중(臧文仲)이 인(仁)하지 못한 것이 세 가지이고 지혜롭지 못한 것이 세 가지라 한 것이 이것이다.
그 일을 하나하나 열거하여 칭찬하는 것은 오히려 미진한 점이 있는 것이니,
자산(子産)이 군자(君子)의 도(道)가 네 가지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오늘날 혹 한 마디 말로써 한 사람을 총평하거나,
한 일을 가지고 한 때를 단정지으려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16장
子曰 晏平仲 善與人交 久而敬之.
자왈 안평중 선여인교 구이경지.

 

공자 가라사대 안평중은 사람과 잘 사귀는구나 오래도록 공경 하는도다.라고 히셨다.

 

해설

『晏平仲은 齊大夫니 名嬰이라 程子曰 人交久則敬衰하나니 久而能敬은 所以爲善이니라』


『안평중(晏平仲)은 제(齊)나라의 대부(大夫)이니 이름은 영(嬰)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사람은 사귀기를 오래하면 공경이 쇠해지니, 오래되어도 공경함은 사귀기를 잘한 것이 되는 것이다.”』

 


17장
子曰 臧文仲 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자왈 장문중 거채 산절조탈 하여기지야.

 

공자 가라사대 장문중이 점치는 거북을 간직하기 위해 집을 지으메

기둥머리에 산을 새기고 동자기둥에는 마름을 그려 귀신에게 아첨 하였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해설

『臧文仲은 魯大夫臧孫氏니 名辰이라 居는 猶藏也요 蔡는 大龜也라 節은 柱頭斗栱也라
藻는 水草名이요 棁은 梁上短柱也니 蓋爲藏龜之室而刻山於節하고 畫藻於棁也라
當時에 以文仲爲知라하니 孔子言其不務民義而諂瀆鬼神如此하니

安得爲知리오하시니 春秋傳所謂作虛器가 卽此事也라』

 

『장문중(臧文仲)은 노(魯)나라 대부(大夫) 장손씨(臧孫氏)이니 이름은 신(辰)이다.
거(居)는 장(藏)『[보관]』과 같다. 채(蔡)는 큰 거북이다.
절(節)은 기둥머리의 두공(斗栱)이다. 조(藻)는 수초(水草)의 이름이다.
탈(棁)은 들보 위 동자기둥이다.
<이는> 점을 칠 때 사용하는 거북껍질을 보관해 두는 방을 만들면서
기둥머리 두공(斗栱)에는 산(山) 모양을 조각하고 들보 위 동자기둥에는 수초(水草)를 그려놓은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장문중(臧文仲)을 지혜롭다고 하였다.
공자(孔子)께서 ‘그가 인간의 도의(道義)를 힘쓰지 않고 귀신에게 아첨하고 친압함이 이와 같았으니,
어떻게 지혜롭다 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춘추전(春秋傳)》에 쓸데없는 기물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곧 이 일을 가리킨 것이다.』


『張子曰 山節藻侻하여 爲藏龜之室은 祀爰居之義로 同歸於不知가 宜矣라』

 

『장자(張子)가 말씀하였다.
“절(節)에 산(山) 모양을 조각하고 탈(棁)에 수초(水草)를 그려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방을 만든 것과
원거(爰居)라는 새에게 제사한 의의는 모두 지혜롭지 못함에 귀결됨이 당연하다.”』

 

 


18장
子張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자장문왈 영윤자문 삼사위령윤 무희색 삼이지 무온색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未知
구령윤지정 필이고신령윤 하여 자왈 충의 왈 미지

 

曰 仁矣乎 焉得仁 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왈 인의호 언득인 최자시제군 진문자유마십승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가이위지 지어타방 칙왈 유오대부최자야 위지 지일방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칙왈 유오대부최자야 위지 하여?

 

子曰 淸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자왈 청의 왈 인의호 왈 미지 언득인.


자장이 묻기를 자문이 세번 벼슬을 하여 연윤이 되었어도 전혀 기쁜기색이 없었고

세번 벼슬을 그만두되 성내는 기색이 없고 자신이 맏았던바를 새로운 영윤에게 고하니 어떠합니까? 고 하니

공자가 말씀 하시기를 충의니라 하시니
자장이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어진건가요?

공자답하기를 어찌 어질다 하겠는가

다시 자장이 말하기를 최씨가 제나라 임금을 죽이니 진문자가 말 십승을 얻었다가 버리고 가서

다른 나라에 이르러 말 하기를 우리 대부 최씨와 같다고 하고

또다른 나라에 이르러서도 우리 대부 최씨와같다 고 말하고 떠났으니 어떻습니까?

공자답하기를 매우 청렴한 사람이다.고 하자 자장이 말 하기를 어진것입니까?
공자가 말 하기를 잘 모르겟다.어찌 어진 일 이겠는가? 고 했다.

 

해설 

『令尹은 官名이니 楚上卿執政者也라 子文은 姓鬪요 名穀於菟라
其爲人也喜怒不形하고 物我無間하여 知有其國而不知有其身하니 其忠盛矣라
故로 子張疑其仁이라 然이나 其所以三仕三已而告新令尹者가 未知其皆出於天理而無人欲之私也라
是以로 夫子但許其忠而未許其仁也시니라』

 

『영윤(令尹)은 벼슬 이름이니, 초(楚)나라의 상경(上卿)으로 정권을 잡은 자이다.
자문(子文)의 성(姓)은 투(鬪)요, 이름은 누오도(穀於菟)이다.
그의 사람됨이 기뻐함과 성냄을 나타내지 않고 남과 자기 사이에 간격이 없어 국가가 있음만을 알고
자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의 충성이 대단하다.
그러므로 자장(子張)이 인(仁)인가 하고 의심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 번 벼슬하였다가 세 번 그만두고 물러나면서
새로 부임해온 영윤(令尹)에게 옛 정사를 말해준 것이 모두 천리(天理)에서 우러나와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이 없었는지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부자(夫子)께서 다만 그의 충(忠)만을 허여 하시고 그의 인(仁)은 허여 하지 않으신 것이다.』


『崔子는 齊大夫니 名杼라 齊君은 莊公이니 名光이라 陳文子는 亦齊大夫니 名須無라
十乘은 四十匹也라 違는 去也라 文子潔身去亂하니 可謂淸矣라
然이나 未知其心果見義理之當然하여 而能脫然無所累乎아 抑不得已於利害之私하여 而猶未免於怨悔也라
故로 夫子特許其淸而不許其仁이시니라』

 

『최자(崔子)는 제(齊)나라 대부(大夫)이니, 이름은 저(杼)이다.
제(齊)나라 임금은 장공(莊公)이니, 이름은 광(光)이다.
진문자(陳文子)도 제(齊)나라 대부(大夫)이니, 이름은 수무(須無)이다.
10승(乘)은 40필이다. 위(違)는 떠남이다.
문자(文子)가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어지러운 나라를 떠났으니, 청백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과연 의리(義理)의 당연함을 보고 훌훌 벗어버려 누(累)한 바가 없었는지,
아니면  이해(利害)의 사사로움에 마지못한 것이어서 아직도 원망과 후회를 면치 못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부자(夫子)께서 다만 그의 청백함만을 허여 하시고 그의 인(仁)은 허여 하지 않으신 것이다.』


『愚聞之師하니 曰 當理而無私心이면 則仁矣라하시니
今以是而觀二子之事하면 雖其制行之高가 若不可及이나 然이나 皆未有以見其必當於理而眞無私心也라
子張未識仁體하고 而悅於苟難하여 遂以小者로 信其大者하니 夫子之不許也宜哉인저
讀者於此에 更以上章不知其仁과 後篇仁則吾不知之語와
幷與三仁夷齊之事觀之면 則彼此交盡하여 而仁之爲義를 可識矣리라
今以他書考之하면 子文之相楚에 所謀者無非僭王猾夏之事요
文子之仕齊에 旣失正君討賊之義하고 又不數歲而復反於齊焉하니 則其不仁을 亦可見矣니라』

 

『내가 선생(先生)『[연평(延平) 이동(李동)]』께 들으니
“이치에 합당하고 사심(私心)이 없으면 인(仁)이다.” 하셨다.
이제 이 말씀을 가지고 두 사람의 일을 관찰해 보면 그 행실의 높음은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모두 그것이 꼭 이치에 합당하고 참으로 사심(私心)이 없었는지를 볼 수 없다.
자장(子張)이 인(仁)의 본체를 알지 못하고 어려운 일을 구차하게 해내는 것만을 좋아하여
끝내 작은 것을 큰 것으로 믿었으니, 부자(夫子)께서 허여 하지 않으심이 당연하다.
독자는 이에 대해서 다시 위 장의 “그가 인(仁)한지는 모르겠다
『〔不知其仁〕』.” 하신 말씀과 뒤 편『[헌문편(憲問篇)]』의
“그가 인(仁)한지는 내가 모르겠다.” 하신 말씀과 및 아울러
<미자편(微子篇)의> 삼인(三仁)과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일을 가지고 본다면
저것과 이것이 서로 다하여 인(仁)의 의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다른 책을 가지고 살펴보면, 자문(子文)이 초(楚)나라를 도울 적에 획책한 것은
모두 왕(王)『[천자(天子)]』을 참칭하고 중국『[하(夏)]』을 어지럽히는 일 아님이 없었으며,
문자(文子)는 제(齊)나라에 벼슬할 때에 이미 임금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잃었고,
또 몇 년이 못되어 다시 제(齊)나라로 돌아갔으니, 그 인(仁)하지 못함을 또한 볼 수 있다.』

 

 

 

19장
季文子 三思而後行 子聞之 曰 再斯可矣.
계문자 삼사이후행 자문지 왈 재사가의.

 

계문자가 세번을 생각한후 행하니 공자께서 들으시고
말씀 하시기를 두번 함이 가하다 고 하시더라.

 

해설

『季文子는 魯大夫니 名行父라 每事必三思而後行하니 若使晉而求遭喪之禮以行이 亦其一事也라
斯는 語辭라 程子曰 爲惡之人은 未嘗知有思하니 有思則爲善矣라
然이나 至於再則已審이요 三則私意起而反惑矣라 故로 夫子譏之시니라』

 

『계문자(季文子)는 노(魯)나라 대부(大夫)이니,
이름은 행보(行父)인데, 매사를 반드시 세 번 생각한 뒤에야 행하였다.
예를 들면 진(晉)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면서 <진(晉)나라 임금이 병을 앓는다는 말을 듣고>
상(喪)을 당할 경우 사신(使臣)으로서 행해야 할 예(禮)를 미리 찾아보고 간 것과 같은 것이 그 한 예(例)이다.
사(斯)는 어조사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악(惡)한 짓을 하는 자는 애당초 생각함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생각함이 있다면 선(善)을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번 생각함에 이르면 이미 살핀 것이요, 세 번 하면 사사로운 뜻이 일어나 도리어 현혹된다.
그러므로 부자(夫子)께서 비판하신 것이다.』


『愚按 季文子慮事如此하니 可謂詳審而宜無過擧矣로되 而宣公纂立에 文子乃不能討하고
反爲之使齊而納賂焉하니 豈非程子所謂私意起而反惑之驗歟아 是以로 君子務窮理而貴果斷이요 不徒多思之爲尙이니라』

 

『내가 살펴보건대, 계문자(季文子)가 일을 생각함이 이와 같았으니,
자세히 살핀다고 말할 만하여, 당연히 잘못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선공(宣公)이 찬탈하고 즉위하자,
계문자(季文子)는 마침내 토벌하지 못하고

도리어 선공(宣公)을 위해 제(齊)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뇌물을 바쳤으니,
정자(程子)가 말씀한 “사사로운 뜻이 일어나 도리어 현혹된다.”는 증험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군자(君子)는 궁리(窮理)를 힘쓰면서도 과단(果斷)함을 귀히 여기고,
한갓 생각만 많이 하는 것을 숭상하지 않는 것이다.』

 계문자는 사려가 깊고 매사에 조심이 깊은지라 두번만 생각하고
행동해도 실수가 없을것이라는 말 하지만 자로의 경우라면..
아마 5번은 생각해야 가 할것이라고 말햇을지도...

 

 


20장
子曰 甯武子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 可及也 其愚 不可及也.

자왈 영무자방유도칙지 방무도칙우 기지 가급야 기우 불가급야.

 

공자 가라사대 영무자는 나라에 도 가 있으면 지혜롭게 행동하고 도가 없으면 우직하게 행동 했으니

그의 지혜는 내가 따를수 있지만 그의 우직함은 내가 따를수가 없도다.

 

 해설

『甯武子는 衛大夫니 名兪라 按春秋傳하면 武子仕衛는 當文公成公之時하니 文公有道어늘
而武子無事可見하니 此其知之可及也요 成公無道하여 至於失國이어늘
而武子周旋其間하고 盡心竭力하여 不避艱險하니
凡其所處가 皆智巧之士所深避而不肯爲者로되 而能卒保其身하고 以濟其君하니 此其愚之不可及也라』

 

『영무자(甯武子)는 위(衛)나라 대부(大夫)이니, 이름은 유(兪)이다.
《춘추전(春秋傳)》을 상고해 보면 영무자(甯武子)가 위(衛)나라에서 벼슬한 시기는
문공(文公)과 성공(成公) 때에 해당되는데,
문공(文公)은 도(道)가 있었으나 영무자(甯武子)는 볼만한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지혜를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성공(成公)은 무도(無道)하여 나라를 잃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영무자(甯武子)는 그 사이에서 주선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어렵고 험함을 피하지 않았다.
모든 그의 처세한 바는 지혜롭고 꾀있는 사람들은 모두 깊이 피하고 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영무자(甯武子)는 마침내 자기 몸을 보전하고 그 임금을 구제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어리석음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程子曰 邦無道에 能沈晦以免患이라 故로 曰不可及也라하시니라 亦有不當愚者하니 比干이 是也니라』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화(禍)를 면하였다.
그러므로 따를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또한 어리석어서는 안될 경우가 있으니, 비간(比干)이 이 경우이다.”』

 

21장
子在陳 曰 歸與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자재진 왈 귀여귀여 오당지소자광간 비연성장 불지소이재지.

 

공자께서 진에 계실때 말씀 하시기를 돌아가자 돌아가자 우리들 젊은이들은 뜻은 높으나

일에는 소홀하여 비록 문체는 찬란하나 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구나.

 

해설

『此는 孔子周流四方하되 道不行而思歸之歎也라
吾黨小子는 指門人之在魯者라 狂簡은 志大而略於事也라
斐는 文貌요 成章은 言其文理成就하여 有可觀者라
裁는 割正也라 夫子初心엔 欲行其道於天下러니 至是而知其終不用也라
於是에 始欲成就後學하여 以傳道於來世라
又不得中行之士하여 而思其次하시니 以爲狂士志意高遠하여 猶或可與進於道也라
但恐其過中失正而或陷於異端耳라 故로 欲歸而裁之也시니라』


『이것은 공자(孔子)께서 사방(四方)을 두루 돌아다니셨으나 도(道)가 행해지지 않자,
돌아갈 것을 생각하시며 하신 탄식이다.
오당(吾黨)의 소자(小子)는 노(魯)나라에 있는 문인(門人)을 가리킨 것이다.
광간(狂簡)은 뜻은 크나 행실에 소략한 것이다. 비(斐)는 문채 나는 모양이다.
성장(成章)은 문리(文理)『[위의(威儀)와 학문(學問)]』가 성취되어 볼 만함이 있음을 말한다.
재(裁)는 베어서 바르게 하는 것이다.
부자(夫子)의 처음 마음에는 그 도(道)를 천하(天下)에 펴보려 하였으나,
이 때에 이르러 끝내 쓰여지지 못할 줄을 아셨다.
이에 비로소 후학(後學)을 성취시켜 후세(後世)에 도(道)를 전하고자 하신 것이다.
또 중행(中行)『[중도(中道)]』의 선비를 얻지 못하여 그 다음 사람을 생각하셨으니,
광사(狂士)는 뜻이 고원(高遠)하여 혹 그와 더불어 도(道)에 나아갈 수 있다고 여기신 것이었다.
단 광사(狂士)들은 중도(中道)를 벗어나고  정도(正道)를 잃어 혹 이단(異端)에 빠질까 염려하셨다.
그러므로 돌아가 바로잡고자 하신 것이다.』

 

22장
子曰 伯夷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
자왈 백이숙제 불념구악 원시용희.

 

공자 가라사대 백이와 숙제는 남의 지나간 악행을 생각하지 않는지라 원망하는 사람이 드물다.

 

해설

伯夷叔齊는 孤竹君之二子라
孟子稱其不立於惡人之朝하고 不與惡人言하며 與鄕人立에 其冠不正이어든
望望然去之하여 若將浼焉이라하시니 其介如此하니 宜若無所容矣라
然이나 其所惡之人이 能改卽止라 故로 人亦不甚怨之也니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 임금의 두 아들이다.
맹자(孟子)는 그들을 일컬어 “악한 사람『[임금]』의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았고,
악한 사람과는 함게 말하지 않았으며, 무식한 시골사람과 서 있을 때에
그의 갓『〔冠〕』이 바르지 않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려, 마치 자기가 오염될 것처럼 여겼다.” 하셨다.
그의 꼿꼿한 지조(志操)가 이와 같았으니, 당연히 포용하는 바가 없을 듯하다.
그러나 미워하던 사람이 잘못을 고치면 즉시 미워하는 마음을 그쳤다.
그러므로 사람들도 심히 그를 원망하지 않은 것이다.』


『程子曰 不念舊惡은 此淸者之量이니라 又曰 二子之心을 非夫子면 孰能知之리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남이 옛날에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청자(淸者)의 도량이다.”또 말씀하였다.
“두 사람의 마음을 부자(夫子)가 아니셨다면 누가 알았겠는가.”』


23장
子曰 孰謂微生高直 或乞醯焉 乞諸其隣而與之.
자왈 숙위미생고직 혹걸혜언 걸제기린이여지.

 

공자 가라사대 누가 미생을 정직하다고 하는가

어떤사람이 초를 빌리면 그는 이웃에 가서 그것을 빌려다 주는구나.

 

해설 

『微生은 姓이요 高는 名이니 魯人이니 素有直名者라 醯는 醋也라
人來乞時에 其家無有라 故로 乞諸隣家以與之라 夫子言此는 譏其曲意徇物하고 掠美市恩하여 不得爲直也라』


『미생(微生)은 성(姓)이요, 고(高)는 이름이니,
노(魯)나라 사람으로 평소에 정직(正直)하다는 이름이 있는 자였다. 혜(醯)는 식초이다.
어떤 사람이 빌리려왔을 때 자기 집에 식초가 없으므로 이웃집에서 빌어다 준 것이다.
부자(夫子)께서 이를 말씀하신 것은 뜻을 굽혀 남의 비위를 맞추고 아름다움을 빼앗아 생색을 냈으니,
정직(正直)함이 될 수 없다고 기롱하신 것이다.』


『程子曰 微生高所枉雖小나 害直爲大니라
范氏曰 是曰是하고 非曰非하며 有謂有하고 無謂無를 曰直이라
聖人은 觀人於其一介之取予하여 而千駟萬鍾을 從可知焉이라
故로 以微事斷之하시니 所以敎人不可不謹也시니라』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미생고(微生高)의 정직(正直)하지 못함은 비록 작으나 정직(正直)함을 해침은 크다.”』

『범씨(范氏)가 말하였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며,
있으면 있다고 하고, 없으면 없다고 하는 것이 정직(正直)이다.
성인(聖人)께서는 한 개를 주고받는 것에서 사람을 관찰하여
천사(千駟)『[천승(千乘)의 병거(兵車)]』와 만종(萬鍾)을 따라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 단정하신 것이니,
사람에게 작은 것이라 하여 삼 가지 않아서는 안됨을 가르치신 것이다.”』

 

 

24장
子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자왈 교언령색족공 좌구명치지 구역치지.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낙원이우기인 좌구명치지 구역치지.

 

공자 가라사대 지나치게 말을 공손히 하고 얼굴빛을 착하게 하는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도 이러한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하셨다.

원망을 숨기고 그 사람과 벗하는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도 이러한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고 하셨다.


 해설

『足는 過也라 程子曰 左丘明은 古之聞人也라
謝氏曰 二者之可恥는 有甚於穿窬也어늘 左丘明恥之하니 其所養可知矣라
夫子自言丘亦恥之라하시니 蓋『竊比老彭주:절비노팽』之意요 又以深戒學者하여 使察乎此而立心以直也시니라』


『주(足)는 지나침이다.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좌구명(左丘明)은 옛날에 유명했던 사람이다.”』

『사씨(謝氏)가 말하였다. “두 가지의 부끄러워할 만함은 담을 뚫고 담을 뛰어넘는 도둑질보다 심하다.
좌구명(左丘明)이 이를 부끄럽게 여겼으니, 그의 마음을 수양함을 알 만하다.
부자(夫子)께서 ‘나 또한 부끄러워한다.’고 스스로 말씀하셨으니,
이는 ‘저으기 노팽(老彭)에게 비한다『〔竊比老彭〕』.’는 뜻이다.
또 배우는 자들을 깊이 경계하여 이 점을 살펴 정직(正直)함으로써 마음을 세우게 하신 것이다.”』

 

 

25장
顔淵季路侍 子曰 盍各言爾志 子路曰 願車馬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안연계로시 자왈 합각언이지 자로왈 원차마의경구 여붕우공 폐지이무감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안연왈 원무벌선 무시로 자로왈 원문자지지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자왈 노자안지 붕우신지 소자회지

 

안연과 계로가 공자를 모시는데 공자께서 말씀 하시기를

어찌 각자 너희의 뜻을 말하려 하지 않는가 고 하시니

자로가 말하기를 수레와 말과 갑옷을 친구와 함께 쓰다가 그것이 설령 낡아져도 유감이 없겠습니다.고 하니

안연이 말하기를
원컨대 잘 한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공로를 과장함이 없게 되기를 원합니다.라했다.
자로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공자 가라사대 늙은이를 편안 하게 하고 친구를 미덥게 사귀고 젊은 사람을 마음에 품어야한다.

나는이제 더 할말이 없구나.

 

해설
『盍은 何不也라』

『합(盍)은 어찌 않는가의 뜻이다.』

『衣는 服之也라 裘는 皮服이라 敝는 壞也요 憾은 恨也라』

『의(衣)는 입는 것이다. 구(裘)는 갖옷이다. 폐(敝)는 해짐이다. 감(憾)은 유감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伐은 誇也요 善은 謂有能이라 施亦張大之意라 勞는 謂有功이니 易曰 勞而不伐이 是也라
或曰 勞는 勞事也니 勞事는 非己所欲이라 故로 亦不欲施之於人이라하니 亦通이니라』


『벌(伐)은 자랑이요. 선(善)은 유능함을 말한다.
시(施)는 과시하는 것이요. 노(勞)는 공로가 있음을 말하니,
《주역(周易)》에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혹자는 “노(勞)는 수고로운 일이니, 수고로운 일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므로
남에게도 베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하니, 이 역시 통한다.』

 

老者를 養之以安하고 朋友를 與之以信하고 少者를 懷之以恩이라
一說에 安之는 安我也요 信之는 信我也요 懷之는 懷我也라하니 亦通이니라』

 

『늙은이를 편안하게 봉양하고, 붕우(朋友)를 신의로써 대하며, 젊은이를 은혜로 감싸주는 것이다.
일설(一說)에는 안지(安之)는 나를 편안하게 여기게 하는 것이요,
신지(信之)는 나를 믿게 하는 것이요, 회지(懷之)는 나를 사모하게 하는 것이라 하니, 역시 통한다.』

 

『程子曰 夫子는 安仁이요 顔淵은 不違仁이요 子路는 求仁이니라
又曰 子路顔淵孔子之志는 皆與物共者也니 但有小大之差爾니라
又曰 子路는 勇於義者니 觀其志하면 豈可以勢利拘之哉아 亞於浴沂者也니라 顔子는 不自私己라
故로 無伐善하고 知同於人이라 故로 無施勞하니 其志可謂大矣라
然이나 未免於有意也요 至於夫子하여는 則如天地之化工이 付與萬物而己不榮焉하니 此聖人之所爲也라
今夫羈靮以御馬하고 而不以制牛하나니 人皆知羈靮之作在乎人하고 而不知羈靮之生由於馬하니 聖人之化亦猶是也라
先觀二子之言하고 後觀聖人之言하면 分明天地氣象이니 凡看論語에 非但欲理會文字요 須要識得聖賢氣象이니라』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부자(夫子)께서는 인(仁)을 자연『[편안]』스레 행하신 것이요,
안연(顔淵)은 인(仁)을 떠나지 않은 것이요, 자로(子路)는 인(仁)을 구한 것이다.”』

『 또 말씀하였다.
“자로(子路)•안연(顔淵)•공자(孔子)의 뜻은 모두 남과 함께 하신 것인데,
다만 작고 큰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 말씀하였다.
“자로(子路)는 의리(義理)에 용감한 사람이니,
그의 뜻을 살펴보면 어찌 세력이나 이익을 가지고 그를 구속할 수 있겠는가?
‘기수(沂水)에 목욕하겠다.’고 한 증점(曾點)에 버금가는 자이다.
안자(顔子)는 자신을 사사로이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잘하는 것을 자랑함이 없었고, 남과 내가 같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공로를 과시함이 없었으니, 그 뜻이 크다 할 만하다.
그러나 의식(意識)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부자(夫子)에 이르러서는 마치 천지(天地)의 화공(化工)『〔造物主〕』이 모든 사물에 맡겨주고
자신은 수고롭지 않은 것과 같으니, 이는 성인(聖人)의 행하시는 바이다.
지금 굴레와 고삐는 말을 어거하는 데 사용하고 소를 어거하는 데는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두 굴레와 고삐를 만든 것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만 알고,
이 굴레와 고삐가 생겨난 것이 말에게 말미암은 줄은 알지 못한다.
성인(聖人)의 조화(造化)도 이와 같다.
먼저 안연(顔淵)과 자로(子路) 두 사람의 말을 살펴보고,
뒤에 성인(聖人)『[공자(孔子)]』의 말씀을 살펴보면, 분명 천지(天地)의 기상(氣象)이다.
《논어(論語)》를 읽을 때에는 비단 글자의 뜻만 알려 할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성현(聖賢)의 기상(氣象)을 알아야 한다.”』

 

 

26장

子曰 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
자왈 이의호 오미견능견기과이내자송자야.

 

안타깝지만 나는 자신의 허물을 보고 마음속으로 스스로 꾸짖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햇다.

 

해설
『已矣乎者는 恐其終不得見而歎之也라
內自訟者는 口不言而心自咎也라
人有過而能自知者鮮矣요 知過而能內自訟者는 爲尤鮮이라
能內自訟이면 則其悔悟深切而能改가 必矣라
夫子自恐終不得見而歎之하시니 其警學者深矣로다』


『이의호(已矣乎)란 끝내 그러한 사람을 만나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탄식하신 것이다.
내자송(內自訟)은 입으로 말하지 않고 내심(內心)으로 자책(自責)『[자구(自咎)]』하는 것이다.
사람이 허물이 있을 때에 스스로 아는 자가 드물며,
허물을 알고서 내심(內心)으로 자책(自責)하는 자는 더더욱 드물다.
내심(內心)으로 자책(自責)한다면 그 뉘우침과 깨달음이 깊고 간절하여 허물을 고칠 것임에 틀림없다.
부자(夫子)께서 스스로 끝내 만나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탄식하셨으니, 배우는 자들을 깨우치심이 깊다.』

 

 

 

27장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자왈 십실지읍 필유충신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공자 가라사대 열가구 이상 모여잇는 읍에는 반드시 충성과 믿음이
나와같은 이가 있겠지만 나만큼 배움을 좋아하지는 못할것이다.

 

해설

 『十室은 小邑也라 忠信如聖人은 生質之美者也라
夫子生知而未嘗不好學이라 故로 言此以勉人이라
言美質易得이나 至道難聞하니 學之至則可以爲聖人이요 不學則不免爲鄕人而已니 可不勉哉아』


『십실(十室)은 10호(戶)의 작은 읍(邑)이다.
충신(忠信)이 성인(聖人)과 같다면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운 자이다.
부자(夫子)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아신 분인데도, 일찍이 학문(學問)을 좋아하지 않은 젓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말씀하여 사람들을 힘쓰게 하신 것이다.
아름다운 자질을 얻기 쉬우나 지극한 도(道)는 듣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배움을 지극히 하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고, 배우지 않으면 시골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은섭 옮김

논어 제4편 이인(里仁) 
 
'仁은 忍' 어질인자 인은 참을인자인, 어진 것이 참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고 살다 죽고 싶은 땅이 있습니다.
공자 역시 군자의 나라 구이九夷(동이)에서 살고 싶어하셨죠.
심지어 공자의 7대손 공빈(孔斌) 역시 할아버지가 살고 싶어했던 동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습니다.
어찌하여 공자는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셨을까요?
바로 여기 이인(里仁) 편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子曰 里仁이 爲美하니 擇不處仁이면 焉得知리오
자왈 이인이 위미하니 택불처인이면 언득지리오

 

어질고 덕이 있는 마을에서 사는 것은 아름다우니,
어진 마을를 택해서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 하리오.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대, 약육강식과 폐도의 시대에
낙천지명 樂天知命, 하늘의 명을 받들어 평화롭게 살고 싶은 게 모든 인간의 마음
공자께서도 뗏목이라도 타고 그 마을에 가고 싶었던 것이고
망망대해 위험한 길을 향할 때 유일하게 자로 한 사람 만은 나를 따를 것이라고
자로를 추켜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 불재 뫔 진달래 마을이 들어선 것도 마찬가지,
이인 里仁을 꿈꾼 물님의 한 생각이 이곳 구이(동이) 정각에 어진 마을을 세우자
귀신이 춤추는 이 곳이 사람들이 왕래하고 기거하는 군자의 마을,
이인 里仁, 즉 뫔 진달래 마을이 된 것입니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숨쉬는 것 부터 새로 배우고 때로 익힙니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 곳에서 오는 현실을 오게하고 가는 현실을 가게 합니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서 한 마리 소가 되어 이웃 마을의 밭을 갈게 됩니다.

子曰 朝聞道면 夕死라도 可矣 자왈 조문도 석사 가의니라
이 이인 里仁에서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행복하다" 하셨으니,
그 무엇보다 말씀을 듣고 말씀 안에서 사는 사람은 죽어도 산 사람이요
살아도 죽은 사람이라는 말씀
공자는 그렇게 말씀 안에서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하루를 사신 분이셨고 또 한 순간 영원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제 4편 이인(里仁)

1,
子曰 里 仁 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자왈 이 인 위미. 택불처인 언득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이 머무는 곳은 인(仁)을 아름답게 친다.
골라 머물기를 인에 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해설>
里 仁爲美는 보통 里仁爲美로 붙여 읽는다.
그러나 다산은 里에서 끊어 읽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다산을 따라 해설하기로 한다.
이(里)는 다산에 의하면 사람이 머무는 곳이나, 주거(住居)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처 안에서 산다, 예수 안에서 산다 할 때의 그 산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즉 사람은 항상 인(仁)에 머물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주자는 里仁爲美로 붙여 읽는다. 里仁은 마을의 풍속이 어질고 도다운 것이다.
주자를 따라 해석한다면 “마을이 풍속이 어진 것이 아름다우니,
그러한 어진 곳을 골라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 할 수 있겠는가?”가 된다.

 

2,
子曰 不仁者 不可爲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 安仁 知者 利仁.
자왈 부인자 불가이구처약, 불가이장처악. 인자 안인 지자 이인.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어질지 못한 자는 곤궁한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하며,
즐거움도 오래 누리지 못한다.
어진 자는 인(仁)에 안주하며, 지혜로운 자는 인(仁)을 이용한다.”

 

<해설>
약(約)은 곤궁한 것이다. 안(安)은 안주(安住)하는 것이다.
어진 자는 곤궁하거나 부유함에 구애받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의 본분을 잃는 일도 없다.
그러나 어질지 못한 자는 곤궁하면 참람하여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되고,
즐거우면 방탕해진다.
어진 자는 자신이 이미 인(仁)과 하나가 되었으므로,
인(仁) 속에서 편안함을 얻으며, 한시도 인(仁)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과 인(仁)이 하나는 되지 못했지만,
인(仁)의 좋음을 아는 까닭에 인(仁) 속에서 많은 이득을 얻는다.

<참고>
옹야 21, 자한 28, 헌문 30에서도 인자(仁者)와 지자(知者)를 대비하여 말하고 있다.
  
3,
子曰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자왈 유인자 능호인 능오인.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오직 어진 사람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능히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해설>
어진 자는 사랑을 바탕으로 항상 남과 더불어 어울려 살려고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갖고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어진 자는 항상 공동선(共同善)의 관점에서 사람을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으며, 능히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

<참고>
자로 24에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악한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있다.
위령공 27에서는 “뭇사람들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며,
뭇사람들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라고 하고 있다.

 

4,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자왈 구지어인의 무악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남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해설>
구(苟)는 성(誠)이다. 오(惡)는 남을 미워하는 것이다.
인(仁)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
바로 앞 장에서 오직 어진 자만이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정 인(仁)에 뜻을 두었다면 남을 미워하기에 앞서
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먼저 가질 것이다.
인자(仁者)의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말로 앞 장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주자는 오(惡)를 악(惡)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둔다면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인(仁)을 너무 소극적으로 해석하여 읽는 맛이 줄어든다. 
 
5,
子曰 富與貴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자왈 부여귀시인지소욕야. 불이기도득지 불처야. 빈여천 시인지소오야.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 違仁造次 必於是 顚沛 必於是.
불이기도득지 불거야. 군자거인 오호성명. 군자무종식지간 위인조차 필어시 전패 필어시.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귀는 사람마다 원하는 바이나,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빈천은 사람마다 싫어하는 것이지만, 부당하게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애써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군자가 인(仁)을 떠나서 어찌 군자라는 이름을 이룰 수 있겠는가?
군자는 밥 한끼 먹는 동안이라도 인(仁)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경황이 없을 때도 그러며, 위급한 경우에도 그렇다.”

 

<해설>
不以其道得之는 마땅히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의 학문과 덕행에 의해 부귀나 빈천이 결정되지 않고 무언가 다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종식지간(終食之間)은 밥 한끼를 먹는 동안이다.
조차(造次)는 다급하여 경황이 없는 것이고, 전패(顚沛)는 엎어지고 넘어져 위급한 것이다.
군자가 부귀, 빈천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인(仁)을 이루는 데만 뜻이 있기 때문이다.
부귀, 빈천은 인(仁)을 이루는 것과는 아무 관계없는 ‘내 몸 밖의 물건(身外之物)’일 뿐이다.
그러나 군자는 부당한 부귀로부터는 당장 벗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부당한 빈천으로부터는 그것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하더라도 애써 떠나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군자는 거친 밥에 물을 먹고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며,
불의의 부귀를 뜬구름과 같이 여길 수 있는 것이다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술이 15).
다산의 『논어고금주』는 不以其道得之의 得之에 대하여 앞의 것은 得處之,
뒤의 것은 得去之로 풀이하고 있다.
각기 바로 뒤의 不處也, 不去也의 처(處), 거(去)가 생략된 것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머물게 된 부귀가 아니면 거기에 머물지 않으며,
정당한 방법으로 벗어나게 된 빈천이 아니면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6,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자왈 아미견호인자 오불인자. 호인자 무이상지. 오불인자 기위인의.

 

不使不仁者 加乎其身. 有能一日 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불사불인자 가호기신. 유능일일 용기역어인의호. 아미견력불족자. 개유지의 아미지견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인(仁)을 좋아하는 자와 어질지 못함을 미워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
어진 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거니와, 어질지 못함을 미워하는 자도 인(仁)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질지 못한 것이 자신의 몸에 범접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능히 하루라도 인(仁)에 그 힘을 쓸 수 있겠는가?
나는 아직 그렇게 할 힘이 부족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도다.
혹시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해설>
상(尙)은 더하는 것(加)이다.
인(仁)은 인간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인(仁)을 좋아하는 자는 인(仁) 속에 안주할 수 있는(安仁) 사람으로,
인간으로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러나 비록 인(仁)을 좋아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질지 못함을 미워하면,
어질지 못한 것이 내 몸 가까이 이르지 못하게 하니 비록 소극적일지언정 인(仁)을 행하는 것이 된다.
인(仁)이 먼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인(仁)에 뜻을 두면 바로 인(仁)을 행할 수 있다(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술이 29).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한 사람이 혹시 있을 수도 있다고 한 것은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7,
子曰 人之過也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
자왈 인지과야각어기당. 관과 사지인의.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의 잘못이 각각 그 무리에 따라 유형이 다르니,
그 잘못을 보면 그 인(仁)을 알 수 있다.”

 

<해설>
당(黨)은 무리(類)다. 사(斯)는 즉(則)이다.
사람은 타고날 때의 성품은 서로 큰 차이가 없으나,
그 후의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性相近也 習相遠也―양화 2).
군자의 수업을 받고 군자와 어울리면 자연 군자의 풍모가 나오며,
소인의 수업을 받고 소인과 어울리면 절로 소인이 된다.
군자는 사람을 사랑함이 너무 두터우며, 소인은 너무 각박하다.
그것이 군자와 소인의 허물이다.
그 허물됨을 보면 그 사람의 어진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자의 설(說)을 따랐다.
고주의 공안국은 다르게 풀이한다.
“소인이 군자의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의 허물이 아니다.
마땅히 용서하고 책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잘못을 본다는 것은 현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제자리에 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仁)을 행하는 것이다.” 즉 남의 잘못을 책망할 때,
그 사람이 군자냐 소인이냐를 먼저 살펴 각각 그 무리에 따라 달리하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8,
子曰 朝聞道 夕死 可矣.
자왈 조문도 석사 가의.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세상에 도(道)가 행해지고 있다는 소리를 아침에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다.”

 

<해설>
도(道)는 世之有道로 세상에 도가 행해지는 것이다.
무도한 세상에 태어나 얼마나 도가 행해지는 세상에 대한 염원이 컸으면
공자가 이런 말을 따랐을까? 고주를 따랐다.
주자의 신주에서는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다.”로 해석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해석이다. 그러나 주자에 따르면,
공자가 마치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득도(得道)를 염원하고 있는 석가처럼 생각된다.
주자의 성리학에 반영된 중국 선종(禪宗)의 영향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고 말하면
필자의 상상이 너무 지나친 것일까?

 

9,
子曰 士志於道 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자왈 사지어도 이치악의악식자 미족여의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서도 거친 옷과 거친 밥을 부끄러워한다면 더불어 의논할 바가 없다.”

 

<해설>
군자는 ‘내 몸 밖의 물건(身外之物)’에 연연해하지 않는 법이다.

 

10,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자왈 군자지어천하야 무적야 무막야. 의지여비.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천하의 모든 것에 대하여 꼭 해야 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없다.
오로지 의(義)로써 비교하여 할 뿐이다.”

 

<해설>
적(適)과 막(莫)에 대해서는 해설이 분분하다.
황간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범녕(范甯)의 설(說)에 의하면 후(厚)하고 박(薄)한 것,
일본의 오규소라이(荻生徂徠)의 『논어징(論語徵)』에 의하면 친(親)하고 소(疎)한 것이다.
그러나 당(唐)의 한유(韓愈)는 『논어필해(論語筆解)』에서
적(適)은 가(可), 막(莫)은 불가(不可)라고 하고 있다.
주자의 신주(新注)에 인용된 글에서
송(宋)의 사량좌(謝良佐)도 적(適)을 가(可), 막(莫)을 불가(不可)로 해석하고 있으며,
다산(茶山)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도 같은 입장이다.
또 미자 8에도 無可無不可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는 이 주장을 따랐다.
비(比)는 비교하는 것으로 義之與比는 의(義)로써
비교하여 옳으면 행하고 옳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참고> 미자 8.

 

11,
子曰 君子 懷德 小人 懷土. 君子 懷刑 小人 懷惠.
자왈 군자 회덕 소인 회토. 군자 회형 소인 회혜.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가 덕에 의한 정치로 돌아가면 소인은 자기 땅으로 돌아가며,
군자가 형벌에 의한 정치로 돌아가면 소인은 외국의 자혜(慈惠)로운 임금에게로 돌아간다.”

 

<해설>
회(懷)는 귀(歸)로 돌아가는 것이다.
토(土)는 자기가 원래 살던 곳이며,
혜(惠)는 외국의 자혜로운 임금이다.
여기서 군자는 위정자, 소인은 백성을 뜻한다.
형벌보다는 덕에 의지하여 백성을 다스릴 것을 주장한 말이다.
유월(兪樾)의 『군경평의(羣經平議)』에 의거했다.
그러나 주자의 해석은 이와 다르다.
주자는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벌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한다.”로 풀이한다.
즉 군자는 덕(德)과 형벌(刑)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地)과 이익(惠)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정 3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자가 평소 덕에 의한 정치를 주장하였지,
형벌에 의한 정치는 배척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주자의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 고주의 공안국은 회(懷)를 안(安)으로 풀이하고 있다.
군자가 덕에 안주하면 소인은 그 땅에 안주하며,
군자가 법에 안주하려 한다면 소인은 물질적인 은혜나 생각한다는 뜻이다.
  
12,
子曰 放於利而行 多怨.
자왈 방어이이행 다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이익을 좇아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

 

<해설>
방(放)은 고주의 공안국에 의하면 의지하는 것(依)이다.
이익을 쫓으면 필연적으로 남과 다투게 된다.
따라서 남의 원망을 사는 일이 많아진다.
이익을 놓고 남과 경쟁하는 것을 사회의 기본 원리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점점 더 각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13,
子曰 能以禮讓 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 爲國 如禮 何.
자왈 능이예양 위국호 하유. 불능이예양 위국 여례 하.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예와 겸양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예와 겸양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면 예는 해서 무엇하겠느냐?”

 

<해설>
예양(禮讓)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예(禮)다. 하유(何有)는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의 뜻이다.
위정자가 어진 덕을 쌓고 예로서 나라를 다스린다면 온 나라가 태평해질 것이다.
결코 법과 형벌에만 의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14,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자왈 불환무위 환소이립. 불환막기지 구위가지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 지위가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능력이 있을까를 근심하며,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근심하지 말고, 알아줄 만한 사람이 되도록 하여라.”

 

<해설>
신주의 정자가 말하길 “군자는 그 몸에 있는 것을 구할 뿐이다(君子求其在己者而已矣).”라고 하였으니,
군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근심할 뿐, 벼슬이나 명성과 같이 자기 밖에 있는 것,
자기로부터 이루어지지 않는 것(身外之物)은 근심하지 않는다.

<참고> 학이 16, 헌문 32, 위령공 18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15,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자왈 삼호 오도 일이관지. 증자왈 유. 자출. 문인 문왈 하위야. 증자왈 부자지도 충서이이의.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증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일관되어 있느니라.”
증자가 말하길 “그렇습니다.”
공자께서 자리를 뜨시자, 문인들이 묻기를 “무슨 말입니까?‘
증자가 말하길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입니다.”

 

<해설>
삼(參)은 증자의 이름이다. 유(唯)는 그렇다고 승낙하는 말이다.
문인(門人)은 증삼과 같이 수학하는 공자의 제자들이다. 
충(忠)은 주자에 의하면 자기 몸을 다하는 것(盡己之謂)을 말하며,
서(恕)는 자기 몸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推己之謂)을 말한다.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 인용된 왕필(王弼)의 해설에 의하면 충(忠)은 정(情)을 다하는 것(情之盡),
서(恕)는 정(情)을 돌이켜 남과 같아지는 것(反情以同物)이다.
혹자는 가운데 마음(中心)을 충이라 하고, 같은 마음(如心)을 서라고도 한다. 대개 같은 말이다.
즉 충은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하는 성실함을 말하며, 서는 남을 자기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충서(忠恕)는 온 몸을 다하는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남도 자기 몸처럼 대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자기 몸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을 사랑하는 것(推自愛之心以愛人之謂)
즉 인(仁)을 말한다.

 

<보충>
남송(南宋) 대에 주자(朱子)는 성리학(性理學)을 발전시키면서,
자신들의 학문적 법통(法統)을 공자―증자―자사(子思)―맹자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찾았다.
주자는 증자가 공자의 학문적 법통을 이었다는 근거로 이 문답을 들고 있다.
주자에 의하면, 증자는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 속에서,
공자의 한가지 이치(一理)라는 것이 혼연일체(渾然一體)로 천하 만물에 두루 응(應)하고 타당한 것이며,
비유하자면 천지(天地)의 지극한 정성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만물을 제자리에 있게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것 이외에는 다른 법이 없으며, 또 미루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학자들의 진기(盡己), 추기(推己)라는 말을 빌어 밝힘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는 것이다.
계속 주자에 의하면, 천지의 지극한 정성이 한순간도 쉬지 않는 것은 도(道)의 체(體)로,
천하 만물의 한가지 근본이다.
천하 만물이 제자리를 얻는 것은 도(道)의 용(用)으로, 한가지 근본에서 각각 나온 것이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실질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즉 주자는 충서(忠恕)가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일(一)을 정확히 나타낸 말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단지 증자가 공자의 도(道)를 한마디로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 그렇게 말했을 뿐이며,
증자가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란 말 속에서 깨달은 것은
공문(孔門)에서 별도의 비전(秘傳)으로 전수되어,
자사, 맹자로 이어져 오다가, 오랫동안 끊어진 것이,
이정자(二程子, 程顥, 程頤 형제)와 자기에게서 다시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의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많다.
우선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증자는 공자보다 46살이나 어리다.
사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선진 25에 증자의 아비인 증석(曾晳)이 공자의 제자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증자가 공자와 상당히 나이가 차이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 그가 어찌 안연(顔淵)이나, 염옹(冉雍), 민자건(閔子騫),
자공(子貢) 같은 쟁쟁한 뭇 선배들을 제치고,
혼자만이 공자로부터 비전(秘傳)의 공부를 전수받을 수 있었겠는가?
또 이는  가르침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有敎無類―위령공 38)고 한 공자의 말과도 상충한다.
게다가 위령공 2에서 공자는 자공에게도 일이관지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마디 말로 일생 동안 지킬 만한 것이 있느냐라는 자공의 질문에
그것은 바로 서(恕)라고까지 대답하고 있다(위령공 23).
증자의 말과 충(忠) 한 글자만 다를 뿐이다.
증자만이 공자의 비전을 전수받았다는 주자의 주장은 자신의 성리학(性理學)을 정당화하기 위한
견강부회(牽强附會)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주자의 주장은 부처가 자신이 고심 끝에 터득한,
세상의 어떤 말로도 나타낼 수 없는(不立文字),
오묘한 깨달음(心得)을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微笑)로써 가섭(迦葉)에게 전하고,
그 비전의 가르침이 달마(達摩)를 거쳐 중국 선종(禪宗)으로 이어졌다는 불교의 설화와 너무도 흡사하다.
주자는 선종으로부터 중국 유학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성리학을 세웠으나,
후대 청의 유학자들이 말하는대로 석씨지학(釋氏之學, 유학자들이 불교를 경멸하여 부르는 말로
釋迦牟尼의 석釋자에서 유래했다)으로 석씨지학을 비판한 격이 되고 말았다.
주자의 성리학은 공자의 말로 포장한 별개의 철학으로 보아야 하며,
그런 면에서 주자의 신주를 읽을 때 독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고 하겠다.            
충서(忠恕)는 말 그대로 공자의 사상 근저를 하나로 꿰뚫고 있는 근본 원리일 뿐이며,
그것은 나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그 정성으로 남도 나처럼 사랑하라는 뜻(仁) 외에
다른 별도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참고> 위령공 2에서 공자는 자공에게도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을 하고 있다.
 
16,
子曰 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
자왈 군자 유어의 소인 유어리.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해설> 유(喩)는 효(曉)로 밝은 것이다.

 

<보충>
공자는 논어 안에서 자주 군자는 ~하고, 소인은 ~한다는 식으로, 군자와 소인을 대비하여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군자를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인간, 소인은 인격이 용렬한 자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는 군자와 소인을 단지 그렇게 도덕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원래 의미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분명히 계급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전자가 임금(君)의 자식(子)이라는 의미, 후자가 하찮은(小) 사람(人)이라는 의미의 글자로
이루어졌음을 볼 때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청(淸)의 유월(兪樾)은 『군경평의(羣經平議)』에서
옛사람들이 군자, 소인이라고 말할 때는 모두 그 지위를 갖고 말하였다.
한(漢)나라 시대의 학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후세의 유가(儒家)들은 오직 인품만을 갖고 군자, 소인을 논한다.
옛뜻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공자는 군자, 소인의 개념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을까?
공자가 군자, 소인을 일정 부분 계급적인 내용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논어 안에 여러번 보인다.
이인 11(君子懷德 小人懷土 君子懷刑 小人懷惠), 안연 19(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必偃),
양화 4(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 )에서 보이는 군자, 소인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군자, 소인은 분명히 위정자와 백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곳에서는 군자, 소인이 주로 인품과 관련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공자 이전 계급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 왔던 군자, 소인이,
공자 당대에 이르러서는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사람의 인품과 관계되는 것으로 전화되어 가는 단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와 관련하여 중국의 조기빈(趙紀彬)이 『논어신탐(論語新探)』
(국내에는 『反논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에서 펼친 주장은 새로운 단초를 열어주고 있다.
조기빈은 소인을 고대 노예사회가 철기 등의 도입에 따른 생산력 발전의 결과로 붕괴되면서,
부의 축적을 통해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신흥지주계급으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들이 중국의 중세 봉건사회(秦漢帝國)를 열어 간 역사발전의 주체이며,
그들의 정치경제적 입장은 묵가(墨家)를 거쳐 법가(法家)에 이르러 완성되어 중국의 통일과 발전을 가져왔다.
그에 반하여 공자의 입장은 역사 발전의 반동(反動)으로서,
기존 노예 소유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여 노예제 사회를 온존시키고 생산력과 역사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공자의 이러한 정치경제적 입장은 소위 복례(復禮)노선으로 집약되며,
그것은 다름아닌 군자(君子) 계급의 정치경제적 입장이라는 것이다.
조기빈은 군자를 노예 소유 계급으로 보고 있다.
조기빈의 주장은 군자, 소인이라는 용어의 구체적 실례나 당시 사회상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결여되어 있어서
그대로 다 인정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다.
또 문화대혁명 당시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던 때의 글들이라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조기빈의 주장은 적어도 군자, 소인이라는 용어를 단순한 도덕적인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당시 사회상과 연결하여 풀이하려 했다는 점에서 분명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군자, 소인을 말한 공자의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단순히 도덕적인 의미으로만 말하고 있는 듯한 곳에서도
그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선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는 이 장(章)이 바로 그렇다.
소인이 이익에 밝다는 것은 당시 이미 이익을 쫓는 풍조가 일반화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함께 노동하고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적 질서가 이미 무너지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한 생존경쟁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남과 이익을 놓고
치열하게 다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군자는 의(義), 즉 공동체적 이념을 추구하는 사람, 소인은 이(利),
즉 생존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조기빈처럼 군자를 꼭 노예제 사회의 옹호자, 소인을 신흥의 지주 계급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이 말 속에서 공동체적 이념과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적 이념이 서로 충돌하고 있음은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방증은 논어의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안연 16에서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도와 이루게 하나, 나쁜 점은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소인은 그 반대이다.”라고 한 말도 사실 당시 생존경쟁의 치열함과
그 과정에서의 군자와 소인의 입장의 차이를 나타낸 말로 볼 수 있다.
또 자로 4에서 공자는 농사 짓는 법에 대해 묻는 번지(樊遲)에 대해 소인이라고 질책하고 있다.
번지는 당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농업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 뿐이리라.
그런 그를 공자가 소인이라 책망한 것 또한 이러한 사회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헌문 24에는 “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는 말이 있다.
아래라는 것이 이익(利益)을 뜻한다는 데에는 대부분의 주석이 일치한다.                  

 

17,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자왈 견현사제언 견불현이내자성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어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이 되려고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스스로 마음 속에서 반성해야 한다.”

 

<해설> 思齊는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참고> 술이 21에는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좋은 면을 골라 그것을 따르고, 좋지 않은 것에서는 나의 허물을 고친다.”라는 말이 있다. 
 
18,
子曰 事父母 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자왈 사부모 기간. 견지부종 우경불위 노이불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모를 섬길 때는 드러내지 않고 은근하게 간해야 하며,
부모가 따르지 않을 뜻임을 보이더라도 더욱 공경하여 거스르지 말아야 하고, 수고롭더라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해설>
기간(幾諫)은 미간(微諫) 즉 드러내지 않고 은근하게 간하는 것이다.
勞而不怨은 부모가 자식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수고롭더라도
부모를 원망하지 말고 부모의 기분이 좋을 때를 기다려 다시 간하라는 말이다.
청의 왕인지(王引之)는 『경의술문(經義述聞)』에서 勞而不怨의 노(勞)를 우(憂)로 해석하여
부모가 자식의 뜻을 따르지 않아 근심은 하지만 원망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또 다산 정약용은 見志不從을 자식이 부모의 명을 따르지 않을 것임을 은근히 보이는 것이라고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다산에 의하면 그렇게 하면서도 부모를 더욱 공경하여 언젠가 부모가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기다리라는 뜻이다.
 
19,
子曰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
자왈 부모재 불원유. 유필유방.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멀리 나가지 말아야 하며,
나갈 때에는 반드시 가는 곳을 밝혀 두어야 한다.”

 

<해설>
방(方)은 다산에 의하면 소(所)로 장소이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너무 멀리 여행하지 말아야 하며,
만일 어디 나갈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가는 곳을 알려 주어
부모로 하여금 걱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주의 정현(鄭玄)은 방(方)을 상(常)으로 풀이하여 어디 나갈 때는
늘 다니던 곳으로만 다니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20,
子曰 三年 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자왈 삼년 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삼 년 동안 부모가 하던 바를 고치지 않아야 가히 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학이 11에 같은 내용이 있다.

 

21,
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
자왈 부모지년 불가부지야. 일즉이희 일즉이구.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부모의 나이는 알아두어야 할 것이니,
한편으로는 그 오래 사심을 기뻐함이요, 한편으로는 그 늙어 가심을 두려워함이라.”

 

22,
子曰 古者 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
자왈 고자 언지불출 치궁지불체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옛사람이 말을 삼가한 것은, 그 행함이 못 미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해설> 궁(躬)은 몸소 행하는 것이요, 체(逮)는 미치는 것이다.

<참고>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학이 14, 위정 13, 이인 24, 헌문 29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23,
子曰 以約失之者 鮮矣.
자왈 이약실지자 선의.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검약하면 잃는 것이 적다.”

 

<해설> 약(約)은 경제적으로 검소한 것을 뜻할 수도 있고,
말과 행동을 비롯한 모든 일에 삼가고 조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후자가 더 맛이 깊다.

 

24,
子曰 君子 欲訥於言 而敏於行.
자왈 군자 욕눌어언 이민어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말은 더디 하되, 행동은 민첩하게 하기를 원한다.”

 

<해설> 눌(訥)은 말을 더디 하는 것이다.

<참고> 학이 14, 위정 13, 이인 22, 헌문 29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25,
子曰 德不孤 必有鄰.
자왈 덕불고 필유인.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덕이 있는 자는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

 

<해설>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그와 덕을 같이 하는 동류(同類)가 있어 외롭지 않은 법이다.

<참고> 안연 5에는 “ … 군자가 공경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바가 없고,
남에게 공손하여 예를 지킨다면 온 세상 사람이 모두 형제입니다. … ”라는 말이 있다.

 

26,
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
자유왈 사군삭 사욕의. 붕우삭 사소의.

 

자유가 말하길 “임금을 섬김에 너무 자주 간언하면 오히려 욕을 보게 되고,
벗을 사귐에 너무 자주 충고하면 오히려 소원해진다.”

 

<해설>
삭(數)은 번거롭게 자주 하는 것이다. 소(疏)는 소원한 것이다.
도로써 임금을 섬기되 간하여 듣지 않으면 그만 두라 하였으니(以道事君 不可則止―선진 23)
그렇지 않으면 일신의 화를 부르게 된다.
벗을 사귈 때도 충고하여 올바른 길로 이끌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만두어
내 몸에 욕됨이 없게 하여야 한다
(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안연 23).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벗을 잃고 만다.

 

<보충>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충(忠)은 임금이 잘못할 경우,
죽음을 무릎쓰고서라도 임금에게 간언(諫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에게 간언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을 만고의 충신으로 숭상까지 하고 있다.
충(忠)은 모든 도덕적 항목 가운데 있고 더불어 으뜸을 차지하고 있으며,
함께 묶어 부를 때도 충효로 충이 효보다 먼저 불리워지고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공자의 말은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크게 다르다.
임금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만두어 화를 면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인 남용이 나라에 도가 있으면 쓰일 것이요,
도가 없더라도 형벌은 면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시집보낸 바 있으며(공야장 1),
선진 23에서는 도로써 임금을 섬기되, 안되면 그만두라(以道事君 不可則止)고 말하고 있다.
충(忠)을 중요하게 취급하고는 있으나, 효제(孝弟)와 같은 정도의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원래 공자는 효제(孝弟)를 군주에 대한 충성(忠誠)보다 우선시하였다.
누차 말했지만 공자가 살던 주나라의 정치 제도는 주왕실이 종가(宗家)이고
각 제후는 주왕실의 지족(支族)이라는 종법(宗法)에 입각한 것이었다.
성이 다른 제후국의 경우는 동성의 분가한 제후국을 의제(擬制)하였다.
각 제후국 밑에는 의연 이전부터 존재하던 혈연공동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사회 전체의 기초 단위는 이 혈연에 기초한 공동체였으며,
이 공동체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그 특수성을 인정받아 자신들만의 고유한 관습과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효제는 이 혈연에 기초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 질서였다.
뿐만 아니라 효제는 종법을 유지시키는 근거이기도 했다.
따라서 공자에게 있어서 군주에 대한 충성이란 종족 내의 효제(孝弟)의 외형적 연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공자는 효제가 국법 질서에 우선함을 자로 18의 섭공(葉公)과의 대화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전국 시대가 지나고 진한(秦漢)의 통일 제국 시대를 맞으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미 혈연공동체는 파괴되어 가족(家族)이 별도의 단위로 독립하기 시작했다.
중앙 권력은 종전의 공동체를 매개로 한 통치에서 벗어나 직접 개별 가족,
즉 개별 인민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공동체적 특수성은 부정되었으며, 따라서 효제(孝弟)도 당연히 국가 질서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되어야 했다.
한(漢) 대의 유가들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직면하여 새로운 논리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종족 내의 효제(孝弟)는 가족 내의 가부장적인 효자(孝慈)로 변질되었고,
더 나아가 군주, 윗사람에 대한 공순(恭順)으로 발전하였다.
임금은 모든 백성의 어버이로 임금에 대한 충성은 가장 큰 효로 간주되었다.
이럼으로써 충(忠)과 효(孝) 사이의 모순은 해결되었으며,
충이 효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 대 유가(儒家)들의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유교(儒敎)는 국교(國敎)로 채택될 수 있었으며,
이후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이르기까지 이천 년이 넘게 중국의 정치, 사상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한은섭 옮김

 

논어 제2편 위정편(爲政篇)

  
1.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 共之
자왈 위정위덕 비여북신 거기소 이중성 공지

공자 가라사대 정치를 덕으로써 해야함을 비유하시며 
북극성이 그 곳에 거하거든 뭇별이 거기에 향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였다.

2. 
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자왈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

공자 가라사대
『시경』 삼백편에 한 말로써 덮으니 가로대 생각에 간사함이 없느니라.

3.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자왈 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

공자 가라사대 
인도하되 정사로써 하고 가지런히 하되 형벌로써 하면 
백성이 면하기는 하되 부끄러움이 없느니라.

4.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자왈 오십유오이지우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왁립하였으며,마흔 살에 혹하지 아니하였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5.
孟懿子問孝 子曰 無違 
맹의자문효 자왈 무위

樊遲御 子告之曰 孟孫 問孝於我 我對曰 無違라 
번지어 자고지왈 맹손 문효어아 아대왈 무위라

樊遲曰 何謂也 子曰 生事之以禮 
번지왈 하위야 자왈 생사지이례

死葬之以禮 祭之以禮 
사장지이례 제지이례

맹의자가 효를 물은대 공자 가라사대 어김이 없느니라
번지가 뫼시더니 공자 가르쳐 가라사대 
맹손이 나에게 효를 묻거늘 내가 대답하여 가로대 어김이 없다 했느니라
번지 가로대 어찌 이르심이니잇고? 
공자 가라사대 살아실제 섬김을 예로써 하며 
죽으심에 섬김을 예로써 하며 제사지냄에 섬김을 예로써 하니라.

6. 
孟武伯 問孝 子曰 父母 唯其疾之憂 
맹무백 문효 자왈 부모 유기질지우

맹무백이 효를 물은대 공자 가라사대 부모는 오직 그 병을 근심하시니라.

7. 
子游 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자유 문효 자왈 금지효자 시위능양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지어견마 개능유양 불경 하이별호

자유가 효를 물은대 
공자 가라사대 지금의 효는 이 능히 기름(봉양)을 이름이니 
개와 말에 이르러도 다 능히 기름이 있으니

공경하지 아니하면 어찌 (견마와) 다르리오.

8. 
子夏 問孝 子曰 色難 有事 弟子服其勞 
자하 문효 자왈 색난 유사 제자복기로

有酒食 先生饌 曾是以爲孝乎 
유주사 선생찬 증시이위효호

자하가 효를 물은대 
공자 가라사대 얼굴빛 갖기가 어려우니, 
일이 있거든 제자가 그 수고로움(일)에 복종하고 
술과 먹을 것이 있거든 선생(부형)의 찬을 함이 일찍이 이로써 효가 되랴?

9. 
子曰 吾與回 言終日 不違如愚 
자왈 오여회 언종일 불위여우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 
퇴이성기사 역족이발 회야불우

공자 가라사대 내 회와 더불어 종일을 말하면 어기지 아니하니 
어리석은 것 같더니 물러나 그 사사로움을 살핀대 또한 
족히 써 발하나니 회는 어리석지 않도다.

10.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자왈 시기소이 관기소유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찰기소안 인언수재 인언수재

공자 가라사대 그 하는 바를 보며
그 따르는 바를 보며 그 편안한 바를 살펴보면
사람이 어찌 숨기리오, 사람이 어찌 숨기리오!

11.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공자 가라사대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면 가히 써 스승이 되느니라.

12. 
子曰 君子 不器 
자왈 군자 불기

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그릇이 아니니라.

13. 
子貢 問君子 子曰 先行其言 而後從之 
자공 문군자 자왈 선행기언 이후종지

자공이 군자를 물으신대 
공자 가라사대 먼저 그 말을 행하고 뒤에 따르니라.

14.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자왈 군자 주이불비 소인 비이불주

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두루하되 비교하지(편벽되지) 아니하고 
소인은 편벽되면서 두루하지 아니하니라.

15.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자왈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공자 가라사대 배우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없어지고, 
생각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하니라.

16. 
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자왈 공호이단 사해야이

공자 가라사대 이단에 전공하면 이 해로우니라.

17.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자왈 유 회여지지호 지지위지지

不知爲不知 是知也 
불지위불지 시지야

공자 가라사대 유야, 너에게 앎을 가르친저, 
아는 것은 안다하고 아지 못하는 것은

아지 못한다는 것이 이 아는 것이니라.

18. 
子張 學干祿 
자장 학간록

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則寡尤 多見闕殆 
자왈 다문궐의 신언기여즉과우 다견궐태

愼行其餘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신행기여즉과회 언과우 행과회 록재기중의

자장이 녹 구함을 배우려 한대,
공자 가라사대 많이 듣고 의심나는 것은 빼놓고, 
말을 그 나머지를 삼가면 허물이 적을 것이며, 
많이 보고 위태로운 것을 빼놓고
행실을 그 나머지를 삼가면 후회가 적을 것이니, 
말은 허물이 적으며 행실이 뉘우침이 적으면
녹이 그 가운데에 있느니라.

19. 
哀公 問曰 何爲則民服
애공 문왈 하위즉민복

孔子對曰 擧直錯諸枉則民服 
공자대왈 거직조저왕즉민복

擧枉錯諸直則民不服 
거왕조저직즉민불복

애공이 묻자와 가로대 어찌하면 백성이 복종하니잇고? 
공자 가라사대 곧은 이를 천거하고
모든 굽은 이를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고, 
굽은 이를 천거하고 모든 곧은 이를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아니하니이다.

20. 
季康子問 使民敬忠以勸 如之何 
계강자문 사민경충이권 여지하

子曰 臨之以莊則敬 孝慈則忠 
자왈 임지이장즉경 효자즉충

擧善而敎不能則勸 
거선이교불능즉권

계강자가 묻기를 
백성으로 하여금 공경과 충성으로써 권하되(권장하려면) 어찌하니잇고? 
공자 가라사대 장엄함으로써 임하면 공경하고, 
효도와 사랑으로써 한즉 충성하고, 
선을 들어주고 능치 못한 이를 가르쳐주면 권장할 것이니라.

21.
或 謂孔子曰 子 奚不爲政
혹 위공자왈 자 해불위정

子曰 書云孝乎 惟孝 友于兄弟
자왈 서운효호 유효 우우형제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시어유정 시역위정 해기위위정

혹자가 공자에게 일러 가로대
선생은 어찌 정치를 하지 아니하시나니잇고?
정공 초년에 공자가 벼슬하지 아니하심이라. 
그러므로 혹인이 그 정치하지 아니하심을 의심하니라. 
공자 가라사대 서경에 이르기를 효인저, 
오직 효하며 형제에게 우애하야 정사에 베푼다 하니 
이 또한 정사를 함이니 어찌 그 (벼슬을) 해서만이 정사를 함이리오.

22. 
子曰 人而無信 不知其可也 
자왈 인이무신 부지기가야

大車無 小車無 其何以行之哉 
대거무 소거무 기하이행지재

공자 가라사대
사람이 되어 믿음이 없으면 그 옳음을 아지 못케라. 
큰 수레가 멍에가 없으며 적은 수레가 멍에가 없으면
그 어찌 써 가리오.
        
23. 
子張 問 十世 可知也 
자장 문 십세 가지야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자왈 은인어하례 소손익 가지야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 
주인어은례 소손익 가지야

其或繼周者 雖百世 可知也 
기혹계주자 수백세 가지야

자장이 묻기를 십세를 가히 아니잇가?
공자 가라사대 
은나라가 하나라 예를 인하니 (인하여 익혔으니) 손익하는 바를 가히 알며, 
주나라가 하나라 예를 인하니 손익하는 바를 가히 알지니, 
그 혹 주나라를 잇는 자가 있으면 비록 백세라도 가히 알 수 있느니라.

24. 
子曰 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자왈 비기귀이제지 첨야 견의불위 무용야

공자 가라사대 그 귀신이 아닌데 제사지내는 것이 아첨함이오,
의리를 보고 하지 아니함이 용맹이 없음이니라.

 
한은섭 옮김

 

 

<論語>
제1편 학이편(學而編)

1장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2장
有子 曰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 鮮矣
유자 왈 기위인야효제 이호범상자 선의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불호범상 이호작난자 미지유야 
 
君子 務本 本立而道生
군자 무본 본립이도생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유자가 말하였다.
"그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겸손하면서도 윗사람에게 대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윗사람에게 대들지 않는 사람 치고 난동부리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
군자는 근본에 힘쓰거늘, 근본이 서야 도(道)도 사는 법이다.
효성과 겸손은, 곧 인(仁)의 근본일 것이다."
 
 
3장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자왈 교언영색 선의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교묘하게 꾸민 말과 보기 좋게 꾸민 얼굴빛 에는
어진 마음이 드물다.?

 
4장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증자왈 오일삼성오신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매일 나 자신을 세 번씩 반성한다.
남을 위하여 일을 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는가,
벗들과 함께 사귀는데 신의를 다하였는가,
전수 받은 가르침을 반복하여 익히지는 않았는가?"


5장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자왈 도천승지국 경사이신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공자 가라사대 천승의 나라를 다스리되
일을 공경하고 믿게 하며 쓰는 것을 절약하고
사람(벼슬아치)을 사랑하며 백성을 부리는데 때로써 하느니라.
 
 
6장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자왈 제자입즉효 출즉제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근이신 범애중 이친인
 
行有餘力 則以學文.
행유여력 즉이학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는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하며 행실을 삼가여
말을 성실하게 하여, 널리 뭇사람을 사랑하되
어진 이와 가깝게 지내야 하고,
이를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워야 한다.

 
7장  
子夏曰 賢賢 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자하왈 현현 역색 사부모 능갈기력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사군 능치기신 여붕우교 언이유신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수왈미학 오필위지학의
 
자하 가로대!
어진 이를 어질게 하되
색을 바꾸며 부모를 섬기되 그 힘을 다하며,
인군을 섬기되 그 몸을 버리며,
붕우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믿음을 두면
비록 가로대 배우지 아니했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 이르리라.
 
 
8장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자왈 군자부중즉불위 학즉불고.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주충신 무우불여기자 과즉물탄개.
 
공자께서 말씀 히시기를
"군자가 마음이 후하고
행동이 무겁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고
배운다 해도 그 배움이 굳건하질 못하다.
성실과 믿음을 지니고 자신과 못한 사람과 사귀지 말며
허물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고쳐야 한다."
 
 
9장 
曾子曰 愼終追遠 民德 歸厚矣.
증자왈 신종추원 민덕 귀후의.
 
증자가 말하기를,
"초상初喪을 삼가 예에 따라 모시고
멀리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다."


10장
子禽 問於子貢曰夫子 至於是邦也
자금 문어자공왈부자 지어시방야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필문기정 구지여 억여지여

子貢 曰 夫子 溫良恭儉讓以得之
자공 왈 부자 온량공검양이득지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부자지구지야 기저이호인지구지여

자금이 자공에게 물었다. 
" 그 어르신은 어떤 나라에 가실 때마다 꼭 그 정치에 대해 들으시는데,
그 어르신이 요구하시는 것인가요,
아니면 그쪽에서 먼저 말하는 것인가요? "
자공이 말하였다.
" 그 어르신은 온화하시며 착하시고 공손하시며
검소하시고 겸양하시므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르신께서 요구하신다고 할 지라도
다른 사람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니라. "


11장
子曰 父在 觀其志 父沒 觀其行
자왈 부재 관기지 부몰 관기행

三年 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삼년 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아버지가 살아실 제 그 뜻을 살피고,
돌아가신 뒤에는 그 생전의 행동을 살핀다.
3년이 지나도록 그 아버지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12장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유자왈 예지용 화위귀


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
선왕지도 사위미 소대유지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유소불행 지화이화 불이예절지 역불가행야

유자가 말하였다. 
“예의 기능은 조화에 그 귀중함이 있다.
옛날 훌륭한 임금들의 도는, 그야말로 훌륭하였다.
크고 작은 일에 모두 조화의 도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래도 때때로 잘 안되는 일이 있었다.
조화의 중요함을 알아 그냥 조화를 이루는 데만 힘쓰고,
예절로써 조절하지 않는다면,
역시 안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13장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유자왈 신근어의 언가복야 공근어례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원치욕야 인불실기친 역가종야
 
유자가 말하기를,
"믿음을 의리에 가깝게 하면 그 약속한 말을 실천할 수 있으며,
지극히 공손하여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 할 수 있으며,
의지 하는 사람이 그가 친할 만할 이를 잃지 않으면
또한 그를 모실 수 있다." 
 
 
14장
子曰 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자왈 군자 식무구포 거무구안,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야이.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음식을 먹음에 배부른 것을 바라지 말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 편안한 것을 바라지 말며,
덕을 쌓는데 부지런하되 말은 잡도리(삼가)하고,
도를 닦아 자신을 바르게 하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15장

子貢 曰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자공 왈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예자야 


子貢 曰詩云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자공 왈시운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자왈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고제왕이지래자

자공이 말했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괜찮다만 (그보다는)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

자공이 말했다.
"시경에 '切磋琢磨' 라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비로소 너와 함께 시를 논할 수 있구나. 지난 일을 일러주니 앞일까지 아는구나."

 
16장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근심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근심해야 한다."


한은섭 옮김 

論語 이해하기

논어가 언제 편찬됐느냐에 대해서 현재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한(漢) 초에 이미 노논어, 제논어, 고논어의 세 논어가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논어의 편찬 시기는 한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어에는 논어의 성립 시기를 알려주는 분명한 언급은 없다.
다만 태백(泰伯) 편에 증자(曾子)가 임종할 무렵의 일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논어의 성립 시기는 적어도 증자가 사망한 이후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는 『맹자』이다.
공자의 문도임을 자인한 맹자의 저서 안에는 논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에 근거하여 논어의 성립 시기를 맹자 이후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것은 논어에 있는 공자의 말을 인용할 때 “論語曰”이라고 하지 않고,
바로 “孔子曰”이나 “子曰”, 또는 “仲尼曰”이라고 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논어의 성립 시기에 관한 정설(定說)은 없다.
다만 춘추 말에서 전국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논어가 성립되었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논어를 누가 편찬했는가도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송(宋)의 정자(程子)는 논어에서 오직 유자(有子)와 증자(曾子)만을 자(子)로 칭하는 것에 주목하여
논어가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편찬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견도 많다.
송의 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에 인용된 한(漢)의 대학자 정현(鄭玄)의 주장에 의하면
논어는 중궁(仲弓), 자유(子游), 자하(子夏)가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현재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논어가 공자의 이대(二代) 제자나 그 이후의 문인들에 의하여 편찬되었으리라는 것뿐이다.
 
인쇄술이 아직 발명되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 책은 필사(筆寫)나 구전(口傳)을 통하여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책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당연히 많은 이본(異本)들을 낳았다.
논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漢) 초기에 세 종류의 논어가 있었다.
이른바 노논어(魯論語), 제논어(齊論語), 고논어(古論語)가 그것이다.
노논어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를 중심으로 전해지던 것으로 도합 20편(編)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논어의 편제(編制)는 이 노논어를 따른 것이다.
제논어는 지금의 산동성 일대인 제나라의 학자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것이다.
도합 22편으로 문왕(問王), 지도(知道)의 두 편이 더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장구(章句)도 노논어보다 많았다고 한다.
고논어는 한(漢) 대에 공자의 구택(舊宅)을 허물다 그 벽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현재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堯曰)의 제2장 “子張問於孔子曰” 이하를 별도로 자장(子張) 편(編)으로 독립시켜

결국 자장 편이 둘 있는 21편이다.
고문(古文) 즉 옛 글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쓰여져 있어 고논어라고 한다.
현재 이들 세 논어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보는 논어의 성립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한 성제(成帝) 때의 인물인 장우(張禹)는 본래 노논어를 전수받았으나,

제논어의 좋은 점도 취하여 자기나름의 논어를 만들었다.
그가 안창후(安昌侯)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 논어를 장후론(張侯論)이라 하는데, 세상에서 귀하게 여겼다.
또 한(漢) 말에 정현은 노논어의 편장(編章)을 주로 하고, 제, 고논어를 참고하여 주(註)를 달았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위(魏)의 하안(何晏) 등이

당시 전해져 오던 여러 학자들의 좋은 점을 취하여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펴냈다.
현재 우리가 보는 논어는 이 『논어집해』를 따른 것이다. 장후론과 정현의 논어 또한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99년 5월 22일 동아일보에 BC 55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논어 죽간(竹簡)본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중국 하북성 팔각랑(八角郞) 촌에서 농민들이 수로공사를 하던 중 한 무덤에서 죽간을 발견하였는데,

그 내용이 논어라는 것이다.
그 무덤은 BC 55년 사망한 제 6대 중산왕(中山王) 유수(劉修)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무덤의 죽간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논어가 된다.

중국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기대된다.
  
논어가 전해지는 과정이 이와 같았던 만큼 논어에는 앞뒤의 문맥이 이어지지 않는 곳이 상당히 있다.
앞이나 뒤의 문장이 빠진 곳으로 추측되는 곳도 있고, 공자나 공문(孔門)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되는 글도 있으며,
무슨 뜻인지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문장도 있다. 물론 전해지는 과정에서의 착간(錯簡)이나 누락 때문으로 추측되나,
때로는 의도적인 조작의 가능성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그런 만큼 논어 장구(章句)의 해석도 다양하여 그야말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 할 만큼 많은 주석서(註釋書)가

발간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하에서는 논어의 중요한 주석서에 대해 개괄해 본다. 
 
1) 하안의 『논어집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존하는 최고의 논어 주석서이자, 논어 텍스트이다.
하안 혼자 쓴 것은 아니며 손옹(孫邕), 정충(鄭沖), 조희(曹羲), 순의(荀顗) 등도 함께 관여하였다.
그 시기는 대략 위나라 정시(正始) 년간(240~254)으로 추정된다.
한(漢)의 공안국(孔安國), 포함(包咸), 주씨(周氏), 마융(馬融), 정현(鄭玄), 위(魏)의 진군(陳群),

왕숙(王肅), 주생렬(周生烈周生烈周들이 소개되어 있다.
하안 자신이 직접烈周를 단 것도 있으나, 그 자신이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하였기 때문에

자설(自說周生烈경우에는 노장 사상生烈흔적이 엿보인다.
논어生烈周 중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에 고주(古注)라고도 불리운다.
신주(新注)라고 불리우는 주자의 『논어집주』가 나오기 전까지 논어를 읽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책이었다.
 
2)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
6세기 전반인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의 인물 황간이 하안의 『논어집해』를 재주석한 것이다.
하안 이후 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학자들의 주석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황간 자신이 유학자이면서 불교 신봉자이기도 한지라, 노장 사상과 불교의 영향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또한 기이하고 재미있는 해설이 풍부하게 소개되어 있어, 그것이 장점이자 단점이 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실전(失傳)되었으나,

일본에서 전해 내려오던 것이 중국에 다시 역수입돼 청(淸)의 건륭(乾隆) 년간에 복간되었다.
 
3) 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
하안의 『논어집해』를 북송(北宋) 초에 형병이 재주석한 것이다.
원래 이름은 『논어정의(論語正義)』이나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안에 포함되어 있어

『논어주소』라고도 불리운다.
경전의 권위적 해석에 충실하여 특별히 새로운 주장 등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4) 주자(朱子)의 『논어집주(論語集注)』
중국의 유학은 한 대 이래 고전의 해석에 충실하였다.
이른바 훈고학(訓古學)이다. 그러나 북송(北宋) 중기 이후 새로운 유학의 기풍이 등장한다.
이른바 도학(道學), 이학(理學), 또는 그 완성자의 이름을 따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불리우는

성리학(性理學)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들은 유학을 새로운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우주를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려고 한 이 새로운 유학은 이정자(二程子)라고 불리우는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거쳐 주자, 즉 주희(朱熹)에 의해 완성된다.
 
주자는 자신의 학문의 법통을 공자에서 증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로 이르는 계보에서 찾는다.
주자는 논어, 『맹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따로 사서(四書)라고 불렀으며,

오경(五經)보다도 중요시하였다.
주자에게 공자는 인류 최대의 성인이었으며, 당연히 그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 또한 최고(最高)의 책이었다.
그런 주자가 논어를 자신의 입장에서 새롭게 해석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자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만큼

그의 『논어집주』 또한 논어의 가장 뛰어난 주석서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주에는 공자를 지나치게 성인시하고,

또 자신의 성리학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원문을 무리하게 해석하는 등 결점도 적지 않다.
주자의 『논어집주』는 고주, 즉 하안의 『논어집해』와 대비하여 흔히 신주(新注)라고 불리운다.
이후 신주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논어에 관한 일종의 교과서로 받아들여져 왔다. 
 
5) 유보남(劉宝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
남송(南宋) 이래 4~500년을 넘게 중국의 학계를 지배한 성리학은

청(淸) 대에 이르러 학자들의 집단적인 반발에 직면한다.
청의 학자들은 성리학에 대항하여 실증적인 고증학(考證學)을 주창하였다.
이들은 주자의 신주에서 이(理) 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부정하고,

고대의 음운학이나 언어학을 연구하여 고전을 당시의 뜻 그대로 읽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청 대 고증학의 연구가 총 집대성된 것이 유보남의 『논어정의』다.
유보남은 고주, 즉 하안의 『논어집해』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한유(漢儒), 송유(宋儒)를 비롯하여 명(明), 청 대 학자들의 장점을 모두 섭렵하고 있다.
가히 전통 시대 논어 연구의 최정점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책 전부를 유보남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유보남이 집필하다 중도에 그만둔 것을 아들 유공면(劉恭冕)이 계속하여 동치(同治) 5년인 1866년 출판하였다.   
 
6)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논어 해석은 주자의 신주(新注) 일색이었다.
주자학이 국교이다시피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실학(實學)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세운 실학자들은 당시 청의 고증학에 눈을 돌려 경전을 재해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소산으로 나타난 것이 다산의 『논어고금주』다.
다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답게 논어에 관한 고금의 주를 두루 섭렵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은 청 대의 학자들과 일본의 오규소라이(荻生徂徠)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하다.
다산의 『논어고금주』는 1812년 다산의 나이 52세 때 유배지인 강진의 초당에서 쓰여졌다.
 
이외 논어의 주석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나,
그 중 일본의 이또진사이(伊藤仁齋)의 『논어고의(論語古義)』,

오규소라이의 『논어징(論語徵)』도 눈여겨 볼 만한 책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논어를 연구한 책으로는 중국의 조기빈(趙紀彬)의 『논어신탐(論語新探)』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反논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문화대혁명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나온 책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교조주의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또 중국의 정수덕(程樹德)의 『논어집석(論語集釋)』은 논어의 각종 주 중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집대성한 책으로 논어의 여러 주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논어의 주석서는 아니지만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와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도
논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그것은 이 책이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전기(傳記)이기 때문이다.
다만 크릴(H. G. Creel)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몇몇 부분의 신빙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크릴이 쓰고 이성규 교수가 번역한 『孔子 ― 인간과 신화』도 논어를 읽는데 여러모로 많이 도움이 된다.
저자는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공자에 관한 여러 잘못된 전승(傳承)을 비판하면서 공자를 합리주의자로 재정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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