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주서-낙고(洛誥)
▣ 낙고(洛誥)
『洛邑旣定에 周公이 遣使告卜하니 史氏錄之하여 以爲洛誥하고 又幷記其君臣答問과 及成王命周公留治洛之事하니 今文古文皆有하니라』
『○ 按周公拜手稽首以下는 周公授使者告卜之辭也요 王拜手稽首以下는 成王授使者復公之辭也요 王肇稱殷禮以下는 周公敎成王宅洛之事也요
公明保予沖子以下는 成王命公留後治洛之事也요 王命予來以下는 周公許成王留洛하여 君臣各盡其責難之辭也요 伻來以下는 成王錫命하여 毖殷命寧之事也요
戊辰以下는 史又記其祭祀冊誥等事와 及周公居洛歲月久近하여 以附之하여 以見周公作洛之始終하니 而成王擧祀發政之後에 卽歸于周하고 而未嘗都洛也라』
『 낙읍(洛邑)이 이미 정해지자 주공(周公)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점괘를 아뢰니,
사관(史官)이 이것을 기록하여 〈낙고(洛誥)〉라 하고, 또 군신(君臣)간에 문답한 것과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명(命)하여
머물러서 낙읍(洛邑)을 다스리게 한 일을 함께 기록하였으니,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에 모두 있다.』
『 ○ 살펴보건대 ‘주공배수계수(周公拜手稽首)’ 이하는 주공(周公)이 사자(使者)에게 주어서 점괘를 아뢴 말이요,
‘왕배수계수(王拜手稽首)’ 이하는 성왕(成王)이 사자(使者)에게 주어서 공(公)에게 답한 말이며,
‘왕조칭은례(王肇稱殷禮)’ 이하는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낙읍(洛邑)에 머무는 일을 가르친 것이요,
‘공명보여충자(公明保予沖子)’ 이하는 성왕(成王)이 공(公)에게 뒤에 머물러 낙읍(洛邑)을 다스리게 한 일을 명(命)한 것이며,
‘왕명여래(王命予來)’ 이하는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낙읍(洛邑)에 머물 것을 허락하여 군신(君臣)이 각기 어려운 일로 책함을 다한 말이요,
‘팽래(伻來)’ 이하는 성왕(成王)이 명(命)을 내려 은(殷)나라를 경계하고 편안하게 함을 명령한 일이며,
‘무진(戊辰)’ 이하는 사관(史官)이 또 제사(祭祀)하고 책고(冊誥)한 등등의 일과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거한 세월의 오래고
가까움을 기록하여 붙여서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만든 시종을 나타낸 것이니,
성왕(成王)은 제사(祭祀)를 거행하고 정사(政事)를 발한 뒤에 즉시 주(周)나라로 돌아왔고, 일찍이 낙읍(洛邑)에 도읍하지 않았다.』
▣ 제1장(第一章)
『 주공(周公)이 배수계수(拜手稽首)하고 말씀하였다. “나는 그대 명벽(明µ?)『[밝은 군주(君主)]』에게 복명(復命)하노이다.』
『 이 이하는 주공(周公)이 사자(使者)에게 주어서 점괘를 고한 말이다.
배수계수(拜手稽首)는 사관(史官)이 주공(周公)이 사자(使者)를 보내는 예(禮)를 기록한 것이다.
복(復)은 역복(逆復)의 복(復)과 같다.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명(命)하여 가서 성주(成周)를 경영하게 하니,
주공(周公)이 점괘를 얻고는 왕(王)에게 복명(復命)한 것이다.
성왕(成王)을 일러 자(子)라고 한 것은 친하게 여긴 것이요, 성왕(成王)을 일러 명벽(明µ?)이라고 한 것은 높인 것이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도왔으니, 존귀(尊貴)함으로 말하면 군주(君主)이고, 친함으로 말하면 형(兄)의 아들이다.
명벽(明µ?)은 밝은 군주(君主)를 이른다.
선유(先儒)들이 이르기를 ‘성왕(成王)이 어려서 주공(周公)이 왕(王)을 대신하여 군주(君主)가 되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권(政權)을 성왕(成王)에게 돌려주었으므로 ‘복자명벽(復子明µ?)『〔그대에게 군주의 자리를 회복해줌〕』’이라 했다.” 하였으니,
잃음이 있은 뒤에 회복함이 있는 것이니, 무왕(武王)이 죽고 성왕(成王)이 즉위(卽位)함에 일찍이 하루도 임금의 지위에 거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어찌 회복함이 있겠는가. 〈채중지명(蔡仲之命)〉에 “주공(周公)이 총재(¾4宰)의 지위에 올라 백공(百工)을 바로잡았다.” 하였으니,
주공(周公)이 총재(¾4宰)로서 백공(百工)을 총괄하였을 뿐임이 어찌 드러나고 드러나서 심히 분명하지 않겠는가.
왕망(王莽)이 거섭(居攝)하여 거의 한(漢)나라의 솥『[국통(國統)]』을 기울일 뻔한 것은 모두 유자(儒者)들이 계도(啓導)함이 있었던 것이니,
이것을 분변하지 않을 수 없다.』
『 ○ 소씨(蘇氏)가 말하였다.
“이 위에 탈간(脫簡)이 〈강고(康誥)〉에 있으니, ‘유삼월재생백(惟三月哉生魄)’으로부터 ‘홍대고치(洪大誥治)’까지의 48자(字)이다.』
▣ 제2장(第二章)
『 왕(王)께서 감히 하늘의 기명(基命)『[시작한 명]』과 정명(定命)『[안정한 명]』을 미처 알지 못하는 듯이 하시기에
내 태보(太保)를 이어 〈가서〉 크게 동토(東土)를 살펴보니, 백성의 명벽(明µ?)이 될 터전이었습니다.』
『 무릇 집을 만들 적에는 터를 닦은 뒤에 이루고 이룬 뒤에 정(定)하니, 기명(基命)은 처음을 이루는 것이고, 정명(定命)은 종(終)을 이루는 것이다.
성왕(成王)이 어리고 퇴탁(退託)하여 감히 하늘의 기명(基命)과 정명(定命)을 미처 알지 못하는 듯하시기에 내 태보(太保)를 이어 가서 크게 낙읍(洛邑)을 살펴보니,
거의 왕(王)이 처음으로 백성의 명벽(明µ?)이 될 만한 땅이었다. 낙읍(洛邑)이 호경(鎬京)의 동쪽에 있으므로 동토(東土)라 한 것이다.』
▣ 제3장(第三章)
『 내가 을묘일(乙卯日) 아침에 낙사(洛師)에 이르러 내 하삭(河朔)과 여수(黎水)를 점쳐보며
내 간수(澗水)의 동쪽과 전수(ç/水)의 서쪽을 점쳐보니 낙읍(洛邑)을 먹어들어가며,
내 또 전수(ç/水)의 동쪽을 점쳐보니 또한 낙읍(洛邑)을 먹어들어갔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와서 지도(地圖)와 점괘(占卦)를 올리는 것입니다.”』
『 을묘(乙卯)는 곧 〈소고(召誥)〉의 을묘일(乙卯日)이다. 낙사(洛師)는 경사(京師)라는 말과 같다.
하삭(河朔)과 여수(黎水)는 하북(河北)과 여수(黎水)가 교류하는 곳의 안이며,
간수(澗水)의 동쪽과 전수(ç/水)의 서쪽은 왕성(王城)이니 조회(朝會)하는 땅이고,
전수(ç/水)의 동쪽은 하도(下都)이니 상(商)나라 백성들이 거주하는 땅이다.
왕성(王城)은 간수(澗水)와 전수(ç/水)의 사이에 있고, 하도(下都)는 전수(ç/水)의 밖에 있으니,
이 지역이 모두 낙수(洛水)에서 가까우므로 두 번 낙수(洛水)를 먹었다고 말한 것이다.
식(食)은 사관(史官)이 먼저 먹줄을 정해 놓았는데 거북껍질을 구운 조짐이 바로 그 먹줄을 먹은 것이다.
팽(伻)은 사람을 부리는 것이다. 도(圖)는 낙수(洛水)의 지도이다. 헌복(獻卜)은 점괘의 조사(兆辭)를 바친 것이다.』
▣ 제4장(第四章)
『 왕(王)이 배수계수(拜手稽首)하여 말씀하였다.
“공(公)『[주공(周公)]』이 감히 하늘의 아름다움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으시어 와서 집터를 살펴보시니, 주(周)나라에 짝할 만한 아름다운 땅을 만드셨습니다.
공(公)이 이미 집터를 정하시고 사람을 보내 와서 나에게 점괘가 아름다워 항상 길함을 보여주시니,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마땅할 것입니다.
공(公)이 나로써 만억년(萬億年)을 하늘의 아름다움을 공경하게 하시기에 배수계수(拜手稽首)하여 가르쳐주신 말씀에 경의를 표합니다.”』
『 이는 왕(王)이 사자(使者)에게 주어 공(公)에게 답한 말씀이다.
왕(王)이 배수계수(拜手稽首)한 것은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존경하고 특별히 대우하여 그 예(禮)를 중히 여긴 것이다.
필(匹)은 짝함이다. 공(公)이 감히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어 와서 집터를 살펴보고서 주(周)나라에 짝할 만한 아름다운 땅을 만드셨으니,
이는 낙읍(洛邑)을 점쳐 주(周)나라의 명(命)을 무궁함에 짝함을 말한 것이다.
시(視)는 보여줌이니, 나에게 점괘가 아름다워 항상 길(吉)함을 보여준 것이다.
두 사람은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이다. 정(貞)은 당(當)『[마땅함]』과 같다.
십만(十萬)을 억(億)이라 한다.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집터를 정함에 규모가 크고 원대하니,
나로써 만억년(萬億年)을 하늘의 아름다운 명(命)을 공경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또 배수계수(拜手稽首)하여 주공(周公)이 점괘를 고하여 가르쳐 주신 말씀에 사례한 것이다.』
▣ 제5장(第五章)
『 주공(周公)이 말씀하였다.
“왕(王)께서 처음 성대한 예(禮)를 거행하여 새 도읍(都邑)에서 제사(祭祀)하시되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않은 것까지 모두 차례로 제사(祭祀)하소서.』
『 이 이하는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낙읍(洛邑)에 거하는 일을 고한 것이다.
은(殷)은 성대함이니, 5년에 두 번 은제(殷祭)『[성대한 제사]』를 지낸다는 은(殷)과 같다.
질(秩)은 차례함이다. 무문(無文)은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않은 것이다.
왕(王)이 처음 성대한 예(禮)를 거행하여 낙읍(洛邑)에서 제사하되 모두 마땅히 제사할 것을 차례로 제사하고,
비록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않은 것이라도 의리상 마땅히 제사할 것은 또한 차례로 제사하는 것이다.』
『 여씨(呂氏)가 말하였다.
“도읍(都邑)을 정한 초기에 처음 성대한 예(禮)를 거행하여 여러 제사에 크게 제향(祭享)하되 비록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않은 것이라도 모두 질서에 따라 제사하여,
고유(告由)함이 있고 보답함이 있고 기도함이 있었으니, 처음 새 도읍을 세워 밝게 상하(上下)에 이름은 성사(成事)를 고유한 것이요,
비오고 햇볕 남이 때로 순하여 큰 역사(役事)가 이루어짐은 신(神)의 은혜에 보답한 것이며,
지금으로부터 시작하여 길이 중토(中土)에 전거(奠居)함은 큰 아름다움을 기원한 것이다.
후세에는 제사의 의의(意義)와 귀신(鬼神)의 덕(德)을 알지 못하여, 주공(周公)이 첫번째 새 도읍에서 제사한 것을 보고는 마치 사정에 우활한 것처럼 말하니,
이는 인주(人主)가 새 도읍에 임하여 진무(鎭撫)하는 초기에 한 마음을 공경하고 깨끗이 하여
천지(天地)를 대월(對越)하여 이 정명(精明)한 덕(德)을 도달하게 해서 사해(四海)에 이르기까지 기준하지 않는 바가 없고,
제사를 돕는 제후로부터 아래로 포적(胞翟)의 천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성이 있어 우러러보아 방심(放心)을 거두고
이산(離散)됨을 합하게 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고 천하(天下)를 모으는 방도가 이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주공(周公)이 첫번째 일로 삼음이 당연하다 하겠다.』
▣ 제6장(第六章)
『 나는 백공(百工)『[백관(百官)]』들을 정제하여 주(周)나라에서 왕(王)을 따르게 하고, 내 말하기를 ‘아마도 임금께서 일함이 있으실 것이다.’ 하였습니다.』
『 주공(周公)이 말씀하기를 “내 백관들을 정제하여 성왕(成王)을 주(周)나라에서 따르게 했다.” 하였으니, 장차 낙읍(洛邑)으로 가려 할 때를 말한 것이다.
내 이르기를 “아마도 임금께서 일하시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공(公)이 단지 그 뜻을 조금 보여서 성왕(成王)이 스스로 가르치기를 기다린 것이다.』
▣ 제7장(第七章)
『 이제 왕(王)께서 곧 태사(太史)에게 명령하시기를 ‘공(功)이 높은 자를 기록하여 공로(功勞)에 따라 원사(元祀)를 만들라.’ 하시고,
또 공신(功臣)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너희들이 포상하는 명령을 받았을진댄 돈독히 보필하라.’ 하소서.』
『 공종(功宗)은 공(功)이 높고 드러난 자이다.
〈제법(祭法)〉에 “성왕(聖王)이 제사를 만들 적에 법(法)이 백성에게 시행되었으면 제사하고, 죽음으로써 일을 부지런히 하였으면 제사하고,
공로로써 나라를 안정시켰으면 제사하고, 큰 재앙을 막았으면 제사하고, 큰 화(禍)를 막았으면 제사한다.” 하였으니,
공신(功臣)은 모두 큰 증제(烝祭)에 제사하되 훈로(勳勞)가 가장 높고 드러난 자를 으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원사(元祀)라 이른 것이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가르쳐 “왕(王)께서 곧 명령하시기를 ‘공(功)이 높고 드러난 자를 기록하여 공로(功勞)에 따라 원사(元祀)를 만들라.’ 하시고,
또 명령하시기를 ‘너희 공신(功臣)들이 이 포상하는 명령을 받았을진댄 마땅히 더욱 왕실(王室)을 후하게 보필하라.’ 하소서.” 하였으니,
원사(元祀)를 만들어 이미 공신(功臣)들을 위로(慰勞)하고 보답하고,
또 왕실(王室)을 좌우(左右)『[좌우(佐佑)]』하여 더욱 오래고 큰 업(業)을 도모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 제8장(第八章)
『 공(功)을 기록한 재적(載籍)을 크게 보여줄 것이니, 당신께서 모두 스스로 백관(百官)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 비(丕)는 큼이요, 시(視)는 보여줌이다. 공재(功載)는 공(功)을 기록한 재적이다.
크게 공재(功載)를 보여주어 공정하지 않음이 없으면 백공(百工)들이 이것을 본받아 또한 모두 공정할 것이며,
크게 공재(功載)를 보여주어 혹 사사로움에서 나왔으면 백관(百官)들이 이것을 본받아 또한 모두 사사로울 것이다.
공정함과 사사로움이 모두 너로부터 가르치는 것이니, 이른바 네가 모두 스스로 백관(百官)들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상장(上章)에 공신(功臣)들을 포상함을 말하였으므로 크게 공재(功載)를 보여줌을 경계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 제9장(第九章)
『 유자(孺子)께서는 사정을 두시겠습니까.
유자(孺子)께서 사사롭게 하시면 그 번져나감이 불이 처음에는 염염히 타오르나 그 타는 것이 차례로 번져서 끊을 수 없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 유자(孺子)는 어린 아들이다. 붕(朋)은 아비(阿比)함이다.
상문(上文)에 백관(百官)들이 보고 본받음이 이와 같으니, 만일 논공행상(論功行賞)할 적에 유자(孺子)가 조금이라도 비당(比黨)의 사사로움을 따를 수 있겠는가.
유자(孺子)가 조금이라도 비당(比黨)의 사사로움을 따른다면 이로부터 이후로는 마치 불이 타오름과 같아서
처음에는 비록 염염하여 아직 미미하나 그 불타오름이 장차 차례로 번져 타올라서 박멸할 수 없을 것이다.
논공행상(論功行賞)할 적에 사정(私情)을 따르는 폐해가 그 처음에는 심히 미미하나 그 종말에는 끊을 수 없음에 이름을 말한 것이니,
그 말을 엄하게 하여 미연(未然)에 금한 것이다.』
▣ 제10장(第十章)
『 상도(常道)를 순히 하고 국사(國事)를 어루만지기를 내가 정사할 때와 같이 하여
오직 현재 있는 주(周)나라의 관리(官吏)들을 데리고 새 도읍에 가시어 하여금 임금의 의향을 알아 유료(有僚)『[관직]』에 나아가게 하며,
명백히 하고 진작하여 공(功)을 두며, 돈후히 하고 크게 하여 풍속을 넉넉하게 하시면 당신은 영원히 칭찬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 상도(常道)를 순히 함과 국사(國事)를 어루만짐을 항상 내가 정사(政事)할 때와 같이 하여 오직 현재 있는 주(周)나라 관리(官吏)를 쓰고
사사로운 사람들을 참여시키지 말아, 새 도읍에 가서 백관(百官)들로 하여금 상(上)의 의향을 알아 각기 관직에 나아가게 하며,
명백(明白)히 하고 분양(奮揚)하여 사공(事功)에 달려가게 하며, 돈후(敦厚)하고 박대(博大)하여 풍속을 넉넉하게 한다면
왕(王)의 아름다운 명성(名聲)이 또한 길이 후세에 말함이 있을 것이다.』
▣ 제11장(第十一章)
『 공(公)『[주공(周公)]』이 말씀하였다. “아! 그대 충자(沖子)는 끝마치셔야 할 것입니다.』
『 주(周)나라의 왕업(王業)을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시작하였으니, 성왕(成王)이 마땅히 끝마쳐야 하는 것이다.
이 이상은 공(功)을 기록하고 백관(百官)들을 가르치는 내치(內治)의 일을 자세히 말하였고,
이 이하는 제후들을 통어(統御)하며 만민(萬民)을 교양(敎養)하는 방도이다.』
▣ 제12장(第十二章)
『 당신께서 공경(恭敬)하여야 백벽(百µ?)『[제후]』들의 향(享)함을 알고 또한 향(享)하지 않음을 아실 것이니,
향(享)은 예의(禮儀)가 많으니 예의(禮儀)가 물건에 미치지 못하면 이것을 불향(不享)이라 이릅니다.
향(享)에 뜻을 쓰지 않으면 모든 백성들이 말하기를 ‘굳이 향(享)할 것이 없다.’ 하여, 일이 어그러지고 업신여기게 될 것입니다.』
『 이는 제후를 어거하는 방도이다. 백벽(百µ?)은 제후이다. 향(享)은 조향(朝享)『[조회하고 물건을 바침]』이다.
의(儀)는 예(禮)이고, 물(物)은 폐백(幣帛)이다.
제후가 상(上)에게 물건을 바칠 때에 정성스러운 경우가 있고 거짓인 경우가 있으니,
인군(人君)이 능히 공경하는 자라야 이것을 알아서 향(享)에 정성스러운 자를 알고 또한 향(享)에 정성스럽지 않은 자를 아는 것이다.
향(享)은 폐백(幣帛)에 있지 않고 예(禮)에 있으니, 폐백(幣帛)이 유여(有餘)하고 예(禮)가 부족(不足)하면 이 또한 이른바 ‘불향(不享)’이란 것이다.
제후들이 향(享)에 뜻을 쓰지 않으면 국인(國人)들이 이에 화(化)하여 또한 모두 이르기를 “상(上)에게 굳이 향(享)할 것이 없다.” 하여,
온 나라가 윗사람에게 바치는 정성이 없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정사(政事)가 어찌 어그러지고 참모(僭侮)하여
왕(王)의 법도(法度)를 실추하여 반란을 함에 이르지 않겠는가.
인군(人君)이 경(敬)으로써 마음을 두어 조기(早期)에 분변하고 미미할 때에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제13장(第十三章)
『 그대 유자(孺子)는 나의 한가롭지 않음을 반포하여 내가 당신에게 백성의 떳떳한 성품을 도우라고 가르쳐준 것을 들으소서.
당신께서 이것을 힘쓰지 않으면 이에 영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정부(正父)『[무왕(武王)]』를 돈독히 생각하고 차례를 따르되 나와 같이 하지 않음이 없으면 백성들이 감히 당신의 명(命)을 폐하지 않을 것이니,
당신은 낙읍(洛邑)에 가서 공경하소서.
나는 물러가 농사를 밝힐 것이니, 저 낙읍(洛邑)에서 우리 백성들을 편안히 하면 먼데 할 것이 없이 다 올 것입니다.”』
『 이는 만민(萬民)을 교양(敎養)하는 방도이다. ‘반짐불가(頒朕不暇)’는 미상(未詳)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성왕(成王)은 나의 급급히 하여 한가롭지 않음을 반포(頒布)해야 한다.”고 한다.
내가 당신에게 백성의 떳떳한 성품을 돕는 방도를 가르쳐 준 것을 들어야 하니,
당신께서 이것을 힘쓰지 않으면 백성의 떳떳한 성품이 민란(泯亂)해져 장구히 하는 도(道)가 아니다. 정부(正父)는 무왕(武王)이니,
지금에 선정(先正)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다.
독(篤)은 독후(篤厚)히 하여 잊지 않음이요, 서(敍)는 선후(先後)가 문란하지 않음이니,
무왕(武王)의 도(道)를 돈독히 생각하고 차례를 따르되 나와 같이 하지 않음이 없으면 사람들이 감히 그대의 명(命)을 폐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 여씨(呂氏)가 말하였다. “무왕(武王)이 별세함에 주공(周公)이 무왕(武王)과 똑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천하(天下)가 주공(周公)의 명(命)을 폐하지 않았으니,
주공(周公)이 떠남에 성왕(成王)이 주공(周公)과 똑같이 하면 천하(天下)가 성왕(成王)의 명을 폐하지 않을 것이다.”』
『 여(戾)는 이름이다. “왕(王)은 낙읍(洛邑)에 가서 공경할지어다.
나는 물러가 전야(田野)에서 쉬면서 오직 농사를 밝힐 것이다.” 하였으니, 공(公)이 돌아가 늙으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피(彼)는 낙읍(洛邑)을 이른다. 왕(王)이 낙읍(洛邑)에서 백성들을 화하고 넉넉하게 하면 백성들이 장차 먼데 할 것이 없이 올 것이다.』
▣ 제14장(第十四章)
『 왕(王)이 대략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공(公)께서 나 충자(沖子)를 밝히고 보우(保佑)하시어 공(公)께서는 크게 드러난 덕(德)을 들어서 나 소자(小子)로 하여금
문왕(文王)•무왕(武王)의 공렬(功烈)을 드날리고 천명(天命)을 받들어 답하며,
사방(四方)의 백성들을 화하게 하고 항구하게 하여 무리를 거하게 하셨습니다.』
『 이 이하는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답하고 공(公)을 만류한 것이니, 대저 상장(上章)과 참착(參錯)하여 서로 응한다.
명(明)은 드러내어 밝힘이요, 보(保)는 보우(保佑)함이다. 칭(稱)은 듦이다.
화(和)는 어그러지지 않게 함이요, 항(恒)은 오래가게 함이다. 거사(居師)는 무리를 거하게 하는 것이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밝히고 보우(保佑)하여 크게 밝은 덕(德)을 들어서 위로는 문왕(文王)•무왕(武王)에게 욕되지 않게 하며,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봄에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 제15장(第十五章)
『 공종(功宗)을 돈독히 하되 큰 예(禮)로 하여 원사(元祀)를 들어 차례로 제사하되 모두 사전(祀典)에 기재되지 않은 것까지 차례로 제사하였습니다.』
『 종(宗)은 공종(功宗)의 종(宗)이니, 하문(下文)의 종례(宗禮)와 같다. 장(將)은 큼이다.』
▣ 제16장(第十六章)
『 공(公)의 덕(德)이 상하(上下)에 밝게 빛나고 사방(四方)에 부지런히 베풀어져서 널리 목목(穆穆)함을 지어 치평(治平)함을 맞이해서
문왕(文王)•무왕(武王)이 애쓰신 가르침을 혼미하지 않게 하시니, 나 충자(沖子)는 밤낮으로 제사(祭祀)만 삼갈 뿐입니다.”』
『 방(旁)은 방소(方所)가 없는 것이니,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을 인하여 말한 것이다. 목목(穆穆)은 화경(和敬)함이다. 아(¬,)는 맞이함이다.
주공(周公)의 덕(德)이 상하(上下)에 밝게 드러나고 사방(四方)에 부지런히 베풀어져서 널리 목목(穆穆)함을 지어 치평(治平)함을 맞이해서
문왕(文王)•무왕(武王)이 애쓰신 바의 가르침을 천하(天下)에 혼미하지 않게 하시니, 공(公)의 덕교(德敎)가 당시에 가해짐이 이와 같았다.
나 충자(沖子)는 무슨 일을 하겠는가. 오직 밤낮으로 제사를 삼갈 뿐이다.
성왕(成王)은 주공(周公)이 물러가 쉬려는 뜻이 있음을 알았으므로 만류하려는 뜻을 보인 것이다.』
▣ 제17장(第十七章)
『 왕(王)이 말씀하였다. “공(公)의 공(功)은 나를 돕고 인도함이 돈독하니, 이와 같이 하지 않음이 없을지어다.”』
『 주공(周公)의 공(功)은 나를 보필하고 나를 계도(啓導)함이 후하니, 마땅히 항상 이와 같이 할 것이요, 떠남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 제18장(第十八章)
왕(王)이 말씀하였다. “공(公)아! 나 소자(小子)는 물러가서 곧 주(周)나라에 군주노릇하고 공(公)에게 명(命)하여 뒤에 남게 하겠다.』
『 이 이하는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머물게 하여 낙읍(洛邑)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
성왕(成王)이 말씀하기를 “나는 물러가서 곧 주(周)나라에 거하고 공(公)에게 명(命)하여 뒤에 남아 낙읍(洛邑)을 다스리게 하겠다.” 하였다.
낙읍(洛邑)을 만든 것은 주공(周公)이 본래 성왕(成王)이 천도(遷都)하여 천하(天下)의 중앙에 머물게 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성왕(成王)의 뜻은 호경(鎬京)을 버려 조종(祖宗)의 옛 터전을 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낙읍(洛邑)에서 제사를 거행하고 정사를 발한 뒤에 즉시 종주(宗周)로 돌아가 거하고 주공(周公)을 머물게 하여 낙읍(洛邑)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 것이다.
뒤라고 말한 것은 성왕(成王)을 먼저한 말이니, 후세에 유수(留守)•유후(留後)의 뜻과 같다.
선유(先儒)들이 “백금(伯禽)을 봉하여 노(魯)나라의 뒤로 삼게 했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비서(費誓)〉를 상고해보면 동교(東郊)가 개통되지 않은 것이 바로 주공(周公)이 동정(東征)할 때에 있었으니,
백금(伯禽)이 노(魯)나라로 나아간 지가 이미 오래이다. 하문(下文)에 “주공(周公)에게 그 뒤에 남아 낙읍(洛邑)을 다스리게 한 일을 고한 것이다.” 하였으니,
기자(其字)의 뜻에서 더욱 주공(周公)이 되고 백금(伯禽)이 아님을 볼 수 있다.』
▣ 제19장(第十九章)
『 사방(四方)이 개척되어 다스려졌으나 아직 공종(功宗)의 예(禮)를 정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또한 공(公)의 공(功)을 편안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 종례(宗禮)는 곧 공종(功宗)의 예(禮)이다. 난(亂)은 다스림이다.
사방(四方)이 개척되어 다스려짐은 공(公)의 공(功)인데 아직 공종(功宗)의 예(禮)를 정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공(公)의 공(功)을 편안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공(쭵功)은 그 공(功)을 안정함을 이르니, 곧 하문(下文)에 명(命)하여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다.』
▣ 제20장(第二十章)
『 그 뒤를 개척하여 크게 해서 우리 사(士)•사(師)와 백공(百工)들로 하여금 보게 해서
문왕(文王)•무왕(武王)께서 하늘로부터 받으신 백성을 크게 보호하여 다스려 사보(四輔)가 될지어다.”』
『 장(將)은 큼이다.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거하면서 그 뒤를 개척하여 크게 해서 우리 사(士)•사(師)와 백공(百工)들로 하여금 보는 바가 있어
문왕(文王)•무왕(武王)께서 하늘에서 받은 바의 백성을 크게 보호하여 다스려 종주(宗周)의 사보(四輔)가 되라는 것이니,
한(漢)나라의 삼보(三輔)는 아마도 여기에서 근본한 듯하다. 이제 살펴보건대 “먼저 그 뒤를 열어 크게 하라.” 하고,
뒤이어 “다스려 사보(四輔)가 되라.”고 하였으니, 주공(周公)에게 낙읍(洛邑)에 유후(留後)가 되도록 명(命)한 것이 분명하다.』
▣ 제21장(第二十一章)
『 왕(王)이 말씀하였다. “공(公)이 이곳에 머물거든 나는 종주(宗周)로 갈 것이니,
공(公)의 공(功)을 백성들이 엄숙히 받들고 공경하여 기뻐하니, 공(公)은 나를 곤궁하게 하지 말지어다.
나는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을 싫어함이 없을 것이니, 공(公)이 모범이 됨을 폐하지 않으면 사방(四方)이 대대로 공(公)의 덕(德)을 누릴 것이다.”』
『 정(定)은 《이아(爾雅)》에 “그침이다.” 하였다.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은 낙읍(洛邑)에 머물러 있고 자신은 돌아가 종주(宗周)로 가고자 한 것이다.
주공(周公)의 공(功)을 사람들이 모두 엄숙히 받들고 공경하여 기뻐하니, 마땅히 낙읍(洛邑)을 진무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할 것이요,
떠나가기를 구하여 나를 곤궁하게 하지 말라.
나는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을 싫어하지 않을 것이니, 공(公)이 〈모범이 되어〉 우리 사(士)•사(師)와 백공(百工)들로 하여금
보게 함을 폐하지 않으면 사방(四方)이 대대로 공(公)의 덕(德)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오씨(吳氏)가 말하였다. “《전한서(前漢書)》에 두 번 ‘공무곤재(公無困哉)’를 인용하였는데 모두 재자(哉字)를 아자(我字)로 썼으니,
마땅히 아자(我字)를 바른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제22장(第二十二章)
『 주공(周公)이 배수계수(拜手稽首)하고 말씀하였다.
“왕(王)께서는 나를 명(命)하여 낙읍(洛邑)에 오게 하시어 그대의 문조(文祖)『[문왕(文王)]』께서 명(命)을 받은 백성과
그대의 광렬고(光烈考)이신 무왕(武王)을 계승하여 보존하게 하시니, 나의 공손함을 크게 여기신 것입니다.』
『 이 이하는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낙읍(洛邑)에 머무는 등의 일을 허락한 것이다. 내(來)는 낙읍(洛邑)에 온 것이다.
그대의 문조(文祖)께서 명(命)을 받은 백성과 광렬고(光烈考)인 무왕(武王)을 계승하여 보존한다는 것은
문왕(文王)•무왕(武王)께서 하늘로부터 받은 백성을 크게 보호하라는 말씀에 답한 것이다.
군주에게 어려운 일을 책(責)함을 공(恭)이라 이르니, 나의 공손함을 크게 여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을 책(責)하는 의(義)를 크게 여긴 것이다.』
▣ 제23장(第二十三章)
『 유자(孺子)께서 이곳에 와서 집터를 보시니,
전장(典章)과 은(殷)나라의 어진 백성을 크게 돈독히 하시어 다스려 사방(四方)의 새 군주(君主)가 되어 주(周)나라에 공손함의 솔선(率先)이 되소서.
” 또 말씀하였다. “이로부터 중앙에서 다스려 만방(萬邦)이 모두 아름답게 되면 왕(王)께서는 훌륭한 성적(成績)이 있을 것입니다.』
『 전(典)은 전장(典章)이고, 은헌민(殷獻民)은 은(殷)나라의 어진 자이다.
마땅히 그 전장(典章)과 은(殷)나라의 헌민(獻民)을 크게 후하게 할 것이니, 문적(文籍)과 현자(賢者)는 정치(政治)하는 대요(大要)이다.
난(亂)은 다스림이니, 성왕(成王)이 새 도읍에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여 사방(四方)의 새로운 군주(君主)가 되라는 것이다.
주(周)나라에 공손함의 솔선(率先)이 되라는 것은 인군(人君)이 공손함으로써 아랫사람들을 접하여 공손함으로 후왕(後王)을 창도(倡導)하는 것이다.
공(公)은 또 말씀하기를 “이로부터 중앙에 머물면서 정치(政治)를 도모하여 만방(萬邦)이 모두 아름다움을 이루면 왕(王)은 훌륭한 성적(成績)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다스리는 효험으로 성왕(成王)에게 바란 것이다.』
▣ 제24장(第二十四章)
『 나 단(旦)은 다자(多子)『[여러 경대부(卿大夫)]』와 어사(御事)들과 함께 전인(前人)께서 이룩하신 공렬(功烈)을 돈독히 하여
백성들에게 보답해서 주(周)나라에 성실함의 솔선(率先)이 되어 우리 소자(昭子)의 법(法)을 이루어 문조(文祖)의 덕(德)을 다할 것입니다.』
『 다자(多子)는 여러 경대부(卿大夫)이다.
당(唐)나라 공씨(孔氏)가 말하기를 “자(子)는 덕(德)이 있는 자의 칭호이니, 대부(大夫)를 모두 자(子)라고 칭한다.” 하였다. 사(師)는 무리이다.
주공(周公)이 말씀하기를 “내 여러 경대부(卿大夫)와 일을 다스리는 신하(臣下)들과 함께 문왕(文王)•무왕(武王)께서 이룩하신 공(功)을 독후히 하여
천하(天下)의 무리에게 보답한다.” 한 것이다.
부(孚)는 신(信)『[성실함]』이니, 주(周)나라에 성실함의 솔선(率先)이 된다는 것은 인신(人臣)이 성실함으로써
윗사람을 섬겨서 성실함으로 후인(後人)을 창도하는 것이다. 고(考)는 이룸이다.
소자(昭子)는 이른바 명벽(明µ?)『[밝은 군주(君主)]』이란 말과 같으니, 친히 여기기 때문에 자(子)라고 말한 것이다.
형(刑)은 의형(儀刑)『[본보기]』이며, 단(單)은 다함이니, 우리 소자(昭子)의 의형(儀刑)을 이루어 문왕(文王)의 덕(德)을 다한다는 것이니,
주공(周公)이 여러 신하(臣下)들과 함께 전인(前人)이 이룩한 공렬(功烈)을 돈독히 하는 것은 성왕(成王)의 의형(儀刑)을 이루어 문조(文祖)의 덕(德)을 다하는 것이다.
이는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다스리는 일로 스스로 책임진 것이다.』
▣ 제25장(第二十五章)
『 왕(王)께서는 사람을 보내와 은(殷)나라 사람들을 경계하시고,
나를 명(命)하여 편안히 하시되 검은 기장과 울금(鬱金)으로 빚은 술 두 그릇으로 하시고,
말씀하기를 ‘밝게 공경하노니, 배수계수(拜手稽首)하여 아름다이 향례(享禮)를 올린다.’ 하였습니다.』
『 이는 은(殷)나라 백성들을 삼가 경계하고 주공(周公)을 명(命)하여 편안하게 한 것이다.
거(秬)는 검은 기장이니, 껍질 하나에 쌀이 두 알이니, 화(和)한 기운에서 생긴 것이다.
창(鬯)은 울금(鬱金)이니, 향초(香草)이다. 유(卣)는 중간 크기의 술잔이다.
명(明)은 깨끗함이요 인(禋)은 공경함이니, 신(神)을 섬기는 예(禮)로 공(公)을 섬긴 것이다.』
『 소씨(蘇氏)가 말하였다.
“검은 기장으로 술을 만들고 울창(鬱鬯)을 합함은 강신(降神)하기 위한 것이니, 종묘(宗廟)의 예(禮)는 강신(降神)보다 더 성대한 것이 없다.
왕(王)이 사람을 시켜 와서 여러 은(殷)나라 사람들을 경계하고 또 검은 기장과 울금(鬱金)으로 빚은 술 두 그릇으로 주공(周公)을 편안하게 하고는 “밝게 공경한다.” 하고 “아름답게 향례(享禮)를 올린다.” 한 것은 어째서인가? 주공(周公)을 섬기기를 신명(神明)을 섬기듯이 한 것이다.
옛날에 큰 빈객(賓客)이 있으면 향례(享禮)로 예우하였으니, 술이 맑아지고 사람들이 목말라도 마시지 못하고, 고기가 마르고 사람들이 굶주려도 먹지 못한다.
그러므로 향(享)에 체천(體薦)『[통째로 올림]』이 있으니, 아마도 공경하기를 지극히 하는 자에게는 그 예(禮)를 제사(祭祀)와 같이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제26장(第二十六章)
『 저는 감히 이것을 받을 수가 없어서 문왕(文王)•무왕(武王)에게 제사(祭祀)하였습니다.』
『 숙(宿)은 〈고명(顧命)〉에 삼숙(三宿)의 숙(宿)과 같다.
인(禋)은 제사의 이름이니, 주공(周公)이 감히 이 예(禮)를 받을 수가 없어서 문왕(文王)•무왕(武王)에게 제사한 것이다.』
▣ 제27장(第二十七章)
『 순히 독서(篤敍)『[돈독히 하여 잊지 않고 차례를 따름]』하여 스스로 병을 만남이 없어 만년(萬年)에 그대의 덕(德)을 충만하게 하며,
은(殷)나라 사람들도 인고(引考)『[수명(壽命)을 연장함]』하게 하소서.』
『 이는 제사(祭祀)의 축사(祝辭)이니,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다.
혜(惠)는 순함이다. 독서(篤敍)는 독서내정부(篤敍乃正父)와 같다.
순히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도(道)를 독서(篤敍)하여 몸이 강강(康强)해서 스스로 질병과 해에 걸림을 만남이 없어서
자손(子孫) 만년(萬年)에 그대의 덕(德)을 염포(厭飽)『[충만]』하게 하며, 은(殷)나라 사람들 또한 길이 수고(壽考)하게 하라는 것이다.』
▣ 제28장(第二十八章)
『 왕(王)께서는 은(殷)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가르치는 차서(次敍)를 받들기를 만년(萬年)토록 하여 길이 우리 유자(孺子)를 보고서 덕(德)을 생각하게 하소서.”』
『 승(承)은 따라 받듦이요, 서(敍)는 교조(敎條)의 차제(次第)이다.
왕(王)께서는 은(殷)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교조(敎條)의 차서(次敍)를 받들기를 만년(萬年)토록 하여
길이 우리 유자(孺子)를 보고 본받아서 그 덕(德)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주공(周公)이 비록 성왕(成王)에게 낙읍(洛邑)에 머물 것을 허락하였으나
또 “왕(王)께서는 은(殷)나라 사람들로 하여금”이라고 말한 것은
“낙읍(洛邑)으로 옮긴 백성은 내 진실로 책임지겠으나 이들로 하여금 가르치는
차서(次敍)를 받들기를 만년(萬年)토록 하는 것은 실로 왕(王)에게 달려 있다.”고 말씀한 것이다.
이는 또한 어려움을 책한 뜻이니, 〈소고(召誥)〉의 끝에 “왕(王)께서 하늘의 영명(永命)을 기원함에 바친다.”고 한 것과 어맥(語脈)이 서로 유사하다.』
▣ 제29장(第二十九章)
『 무진일(戊辰日)에 왕(王)이 새 도읍에 계시면서 증제(烝祭)를 올리시니,
해마다 한 번씩 올리는 성대한 예(禮)였는데 문왕(文王)에게는 붉은 소 한 마리이고, 무왕(武王)에게도 붉은 소 한 마리였다.
왕(王)이 명(命)하여 책을 지으라 하시니, 사관(史官)인 일(逸)이 축문(祝文)을 책에 쓰니, 주공(周公)에게 뒤에 남아 낙읍(洛邑)을 다스리게 한 일을 고한 것이었다.
왕(王)의 손님들이 왕(王)이 희생을 잡아 제사하므로 모두 오니, 왕(王)이 태실(太室)에 들어가 강신제(降神祭)를 올리셨다.』
『 이 이하는 사관(史官)이 제사하고 책으로 고(告)하는 등의 일을 기록하여 편(篇)의 끝에 붙인 것이다.
무진(戊辰)은 12월의 무진일(戊辰日)이다. 이 날에 성왕(成王)이 낙읍(洛邑)에 있으면서 증제(烝祭)『[겨울에 올리는 제사]』의 예(禮)를 거행하였다.
세(歲)라고 이른 것은 1년에 한 번씩 거행하는 제사이다. 주(周)나라는 적색(赤色)을 숭상하였으므로 붉은 소를 쓴 것이다.
종묘(宗廟)에는 태뢰(太牢)로 제사하는데 여기에서 특우(特牛)를 쓴 것은 주공(周公)에게 명(命)하여 낙읍(洛邑)에 유후(留後)가 되게 하였으므로
성대한 예(禮)를 거행한 것이다.
일(逸)은 사관(史官)인 일(逸)이고 책을 지었다는 것은 책에 쓴 것이니, 일(逸)이 축문(祝文)을 책에 썼다는 것은
사관인 일(逸)이 축문(祝文)을 책에 써서 신(神)에게 고(告)한 것이다.
주공(周公)에게 뒤에 남아 낙읍(洛邑)을 다스리게 한 일을 고한다는 것은 축책(祝冊)에 기재한 내용이 다시 딴 것은 언급하지 않고
오직 주공(周公)이 뒤에 남아 유수(留守)하게 한 뜻을 고(告)한 것이니, 이 일을 중히 여긴 것이다.
왕빈(王賓)은 우빈(虞賓)과 같으니, 기(杞)나라와 송(宋)나라의 등속이니, 제사를 돕는 제후이다.
제후들은 왕(王)이 희생(犧牲)을 잡아 선조(先祖)의 사당(祠堂)에 정결히 제사하기 때문에 모두 온 것이다.
태실(太室)은 청묘(淸廟)『[문왕(文王)의 사당]』의 중앙에 있는 방이다.
관(祼)은 술을 땅에 붓는 것이니, 규찬(圭瓚)을 가지고 검은 기장으로 빚은 울창주(鬱鬯酒)를 떠서 땅에 부어 강신(降神)하는 것이다.』
▣ 제30장(第三十章)
『 왕(王)이 주공(周公)에게 명(命)하여 뒤에 남아 책문(冊文)을 짓게 하시므로 사관(史官)인 일(逸)이 고(告)하니, 12월에 있었다.』
『 일고(逸誥)는 사관(史官)인 일(逸)이 주공(周公)에게 낙읍(洛邑)을 다스리며 유후(留後)가 되게 한 일을 고(告)한 것이다.
12월에 있었다는 것은 무진일(戊辰日)이 12월임을 밝힌 것이다.』
▣ 제31장(第三十一章)
『 주공(周公)이 문왕(文王)•무왕(武王)이 하늘로부터 받은 명을 크게 보존하기를 7년 동안 하였다.』
『 오씨(吳氏)가 말하였다.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머문 뒤로부터 무릇 7년만에 별세한 것이다.
성왕(成王)이 공(公)을 만류할 때에 “문왕(文王)•무왕(武王)이 하늘로부터 받은 백성을 크게 보호하라.” 하였고,
공(公)이 성왕(成王)에게 답할 때에 또한 “그대의 문조(文祖)께서 명(命)을 받은 백성과 그대의 광렬고(光烈考)인 무왕(武王)을 계승하여 보존하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신(史臣)이 맨 마지막에 그 연수(年數)를 계산하여 말하기를
“주공(周公)이 문왕(文王)•무왕(武王)이 하늘로부터 받은 명(命)을 크게 보존하기를 7년 동안 했다.” 하였으니, 공(公)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말이다.”』
▣ 제31장(第三十一章)
『 주공(周公)이 문왕(文王)•무왕(武王)이 하늘로부터 받은 명을 크게 보존하기를 7년 동안 하였다.』
『 오씨(吳氏)가 말하였다.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머문 뒤로부터 무릇 7년만에 별세한 것이다.
성왕(成王)이 공(公)을 만류할 때에 “문왕(文王)•무왕(武王)이 하늘로부터 받은 백성을 크게 보호하라.” 하였고,
공(公)이 성왕(成王)에게 답할 때에 또한 “그대의 문조(文祖)께서 명(命)을 받은 백성과 그대의 광렬고(光烈考)인 무왕(武王)을 계승하여 보존하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신(史臣)이 맨 마지막에 그 연수(年數)를 계산하여 말하기를
“주공(周公)이 문왕(文王)•무왕(武王)이 하늘로부터 받은 명(命)을 크게 보존하기를 7년 동안 했다.” 하였으니, 공(公)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말이다.”』